창4

 

9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Verse 9,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 9절 속뜻

 

가인의 교리를 따르는 자들에게 주님의 어떤 딕테이트, 곧 체어리티에 대한 딕테이트가 있자 그들은 체어리티에 대한 평소 그들의 생각, 곧 자신들은 체어리티를 하찮게 여기며, 체어리티를 섬겨야 한다는 자신들의 의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와 관련된 모든 걸 일체 거부한다는 자신들의 입장과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37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는 그들에게 체어리티, 혹은 아우 아벨에 관하여 일종의 딕테이트(dictate)를 준 어떤 퍼셉션 같은 것(perceptivity)을 말합니다. Jehovah said unto Cain” signifies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that gave them a dictate concerning charity or the “brother Abel.

 

가인의 대답,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뭣도 아닌 걸로 여겼음을, 그리고 체어리티가 원하는 대로 하는 걸 마음에 내켜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체어리티와 관련된 모든 걸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Cain’s reply,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signifies that faith considered charity as nothing, and was unwilling to be subservient to it, consequently that faith altogether rejected everything of charity.

 

그런 게 그들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Such did their doctrine become.

 

 

371. 태고인들은 자신들의 퍼셉션을 여호와의 스피킹이라는 워딩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런 퍼셉션 역량을 주신 분이 주님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By the “speaking of Jehovah” the most ancient people signified perception, for they knew that the Lord gave them the faculty to perceive.

 

이 퍼셉션은 사랑이 주(, the principal)일 동안은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This perception could continue no longer than while love was the principal.

 

주님을 향한(to) 사랑이 식고 그 결과, 이웃을 향한(toward) 사랑 또한 식으면 퍼셉션은 사라졌습니다만 그러나 아직 사랑이 남아 있는 한은 퍼셉션도 남아 있었습니다. When love to the Lord ceased, and consequently love toward the neighbor, perception perished; but insofar as love remained, perception remained.

 

이러한 퍼셉션 역량은 태고교회에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후 세대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해서 주어지자 양심이라는 게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 양심이라는 것 또한 일종의 딕테이트를 주는 건데 방식은 다릅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This perceptive faculty was proper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faith became separated from love, as in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charity was given through faith, then conscience succeeded, which also gives a dictate, but in a different way,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양심이 딕테이트할 때, 그것은 말씀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와 같은 식입니다. 양심은 계시(things revealed)와 지식, 그리고 말씀으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the Word) 말씀하시거나(speaks) 딕테이트하실 때, 말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런 까닭에 심지어 오늘날에조차 양심, 혹은 신앙에 관한 걸 언급하면서 주께서 말씀하십니다라고 하는 것보다 더 일반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When conscience dictates, it is in like manner said in the Word that “Jehovah speaks”; because conscience is formed from things revealed, and from knowledges, and from the Word; and when the Word speaks, or dictates, it is the Lord who speaks; hence nothing is more common, even at the present day, when referring to a matter of conscience, or of faith, than to say, “the Lord says.

 

 

372. 지키는 자가 된다는 건 유대 교회의 문지기수위’(문지방을 지키는 자)처럼 섬기는 걸 말합니다. To be a “keeper” signifies to serve, like “door keepers” and “porters” (that is, the keepers of the threshold) in the Jewish church.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키는 자라고 합니다. 그것이 원래 신앙의 의무이니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앙은 자기가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가인이라 하는 교리를 원리로 삼아 따르고 말았습니다. 7절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Faith is called the “keeper” of charity, from the fact that it ought to serve it, but it was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the doctrine called “Cain” that faith should rule, as was said in verse 7.

Posted by bygracetistory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