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These are the births of Noah; Noah was a man righteous and perfect in his generations: Noah walked with God. (창6:9)

 

 

613. ‘당대에’(generations)가 신앙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은 글자의 뜻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글자의 뜻으로 말씀을 보게 되면 역사적으로, 즉 실제 일어난 역사 중 언제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 건지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오직 내적 의미만 다루기 때문에, 이 표현은 신앙에 관한 ‘당대에’, 즉, ‘신앙의 발전 단계 중 어느 한 단계에’라는 의미입니다. That the “generations” are those of faith, does not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which is historical; but as internal things only are here treated of, generations of faith are signified.

 

NCE(New Centry Edition)에서는, 이 ‘당대에’(generation)를 ‘종교적 발전의 한 단계’(a stage of religious development)로, 내포된 메시지를 ‘신앙의 여러 속성들’(attributes of faith)로 풀고 있습니다.


당대에’가 여기서 의미하는 게, ‘연결’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로도 또한 분명합니다. It is also evident from the connection that the generations here are no others.

말씀 다른 구절들, 가령 이사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It is the same in other passages of the Word, as in Isaiah: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They that shall be of thee shall build the waste places of old; thou shalt raise up the found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and thou shalt be called the repairer of the breach, the restorer of paths to dwell in. (사58:12)

 

이 모든 것들은 신앙에 속한 것들, 곧 신앙의 여러 면들을 상징합니다. ‘오래 황폐된 곳들’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황폐해진, 신앙의 천적 퀄러티들을, ‘역대의 파괴된 기초’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신앙의 영적 퀄러티들의 기초들을 각각 상징합니다. 이것들은 고대 이래로 폐허가 되었는데, 이 또한 상징하는 바입니다. All these things signify what is of faith; the “waste places of old” signify celestial things of faith; the “found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spiritual things of faith, which had lapsed from the ancient times that are likewise signified.

 

계속해서 Again: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They shall build the old wastes, they shall raise up the former desolations, they shall renew the waste cities, the desol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사61:4)

 

유사한 상징이지요. with similar signification.

계속해서 And again: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They shall not labor in vain, nor bring forth for trouble; for they are the seed of the blessed of Jehovah, and their offspring with them. (사65:23)

 

여기서도 ‘생산한 것’, 즉 자녀를 낳은 것은 신앙에 속한 것들, 곧 신앙의 속성들에 대한, ‘수고’는 사랑에 속한 것들, 곧 사랑의 속성들에 대한 서술입니다. Here also “bringing forth” [generare] is predicated of the things of faith; “laboring,” of those of love.

후자의 경우, 그들을 가리켜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라, 전자를 가리켜는 ‘후손’이라 하고 있습니다. Of the latter it is said that they are “the seed of the blessed of Jehovah”; of the former, that they are “offspring.

 

이처럼 말씀에서 ‘당대’, ‘역대’, ‘자손’, ‘후손’ 등의 표현은 모두 신앙과 관련된 표현들입니다. 단순한 무슨 역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614.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가 신앙의 교리, 신앙에 관한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며’라는 동일한 표현으로 언급되었던 에녹에 대한 내용(창5:22, 24, AC.519)을 보면 되는데요, 거기 보면, 이 표현은 후손들의 사용을 위해 보전된, 즉, 나중에 일어날 후손들로 하여금 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따로 보관하신 신앙의 교리를 상징했습니다. That “to walk with God” signifies the doctrine of faith, may be seen from what was said before respecting Enoch (chapter v. 22, 24), of whom also it is said that he “walked with God”; and there it signifies the doctrine of faith preserved for the use of posterity.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2, 24)


그리고 지금 이들이 바로 그 후손이기 때문에, 이 주제가 지금 다시 거론된 것입니다. And as this is the posterity for whose use it was preserved, the subject is now here taken up again.

 

 

615. 이 교회 사람의 퀄리티가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즉, 본 절은 이 교회 사람들의 전체적인 모습, 일반적인 모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모습이 된 건 아니고, 앞으로 될 모습입니다. 뒤에 이어지는 여러 장을 통해 이제 그 형성 과정을 보게 되는데요, (AC.838, 977-979) 즉,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통해, 이들은 체어리티의 사람들, 체어리티라는 감정, 정서를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며, 이렇게 이들은 체어리티 가운데 어떤 행동들을 하게 되고, 그 결과, 체어리티와 연결된 선량함을 통해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The quality of the man of this church is here described in general; not that he was such as yet—for his formation is treated of in what follows—but that such he might become: that is to say, that by knowledges of faith he could be endowed with charity, and so act from charity, and from the good of charity know what is true.

 

전에는, 즉, 이들의 선조인 태고 교회 사람들은 퍼셉션이라는 타고나는 능력으로 무슨 학습 없이도 선과 진리를 직관하며,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면, 이제 이들 홍수 후 세대인 노아 교회부터는 선과 진리를 이런 방식으로 알게 됩니다. 퍼셉션의 자리를 이제 이런 방식, 곧 신앙의 체어리티를 경유하는 방식이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체어리티의 선 혹은 ‘의인이요’(righteous, just)가 먼저 나오고, 체어리티의 진리 혹은 ‘완전한’(perfect, upright)이 그 뒤를 잇는 것입니다. For this reason the good of charity or “righteous” precedes, and the truth of charity or “perfect” follows.

체어리티는 앞서 말씀드렸듯(AC.325, 351), 이웃(our fellow human beings)을 향한 사랑이요, 자비입니다. 이것은 태고 교회가 주님을 향해 직접(directed) 가졌던 주님 사랑의 낮은 단계입니다. Charity, as before said,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and it is a lower degree of the love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love to the Lord.

이제 보시듯, 사랑은 내리막이 되었고, 더욱 외적, 곧 더욱 피상적이 되었는데, 이걸 가리켜 체어러티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Thus love now descended and became more external, and is to be called charity.

2021-08-22(D1)-주일예배(AC.613-615, 창6,9), '노아, 당대에, 하나님과 동행'.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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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FifBAMWg5c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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