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3

 

1541. 1절,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Verse l. And Abram went up out of Egypt, he and his wife, and all that he had, and Lot with him, toward the south.

 

속뜻으로는, 여기 서술된 것들과 본 장에서 이어지는 것들 모두 주님에 대한 표현, 주님을 표상하는 것이며, 어린 시절에 이은 주님의 일생입니다. In the internal sense, the things here stated, and those which follow in this chapter, also represent the Lord; there being a continuation of his life from childhood.

 

아브람이 애굽에서 올라갔다’, 주님을 떠나가 버린 기억-지식으로부터 올라가신 것, 즉 극복하신 것, 초월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Abram went up out of Egypt” signifies from memory-knowledges, which left the Lord.

 

속뜻을 보면, ‘아브람’, 주님, 여기서는 아직 어린 시절 주님을, ‘애굽’, 앞서와 같이 여기서도 기억-지식을, ‘그와 그의 아내’, 그때 주님과 함께 한 천적 진리들(the celestial truths, 天的)을, ‘그의 모든 소유와’, 천적인 것들에 속했던 모든 것을, ‘그와 함께 한 롯’, 감각적인 것을, ‘네게브로’(the Negev, 南方, 남쪽으로), 천적 빛을 향하여를 각각 의미합니다. In the internal sense, “Abram” is the Lord, here the Lord when still a child; “Egypt,” here as before, is memory-knowledge; “he and his wife” signifies the celestial truths that were then with the Lord; “and all that he had” signifies all things that were of the celestial things; “and Lot with him” signifies what is sensuous; “toward the south” signifies into celestial light.

 

※ ‘네게브’, 뜻 : 굴, 아브라함이 거주하였던 곳(창 13:1, 3, 20:1, 24:62)

 

네게브는 브엘세바와 그 남쪽으로 펼쳐진 거친 사막 황무지를 말한다. 위치적으로는 가나안의 남방이며, 강수량이 적어 나무나 풀이 거의 자라지 못하는 곳이다. 따라서 농사를 짓기에 부적절하고, 목축업도 겨울과 봄까지만 가능하다.

 

네게브가 주목받는 이유는 지정학적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통로에 있다는 점이다. 솔로몬은 네게브를 장악하여 아라비아, 시나이, 애굽, 이디오피아에서 올라오는 무역상들을 관리하였다. 현대 이스라엘은 200km나 떨어진 갈릴리 호수의 물을 끌어와 네게브에서 농업을 일궈내기 시작했다. 오렌지와 대추야자 재배는 물론 사막 가운데서 양어장을 운영하는 일도 시험하고 있다.

 

 

1542. 속뜻으로는, 이뿐 아니라 본 장에서 이어지는 내용 역시 주님을 표현한다는 것과, 이 이어지는 내용이 어린 시절부터 계속된 주님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들은, 그동안 앞 장에서 말씀드리고 보여드린,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들 및 특별히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며, 이것은 천국을 거쳐 주님으로부터 내려온 것, 그래서 말씀의 일점일획도 그 안에 천국의 아케이나가 담기지 않은 것은 없다는 사실들을 통해 아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That in the internal sense these things, and those that follow in this chapter, also represent the Lord, and that it is a continuation of his life from childhood, may be seen from what was said and shown in the preceding chapter, and also from what follows, but especially from the consideration that this is the Word of the Lord, and that it has come down from him through heaven, and therefore that not even the least bit of a word has been written that does not involve heavenly arcana.

 

※ 참고로, 창세기 주석을 끝내며 마지막 장인 50장 말미에 스베덴보리가 남긴 문장을 보면,

 

...특히 이 내용은 하늘로부터 내게 전달되어 딕테이트된, 즉, 내가 받아 쓴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But that the internal sense is such as has been set forth, is evident from all the details that have been unfolded, and especially from the fact that it has been dictated to me from heaven. (AC.6597)

 

즉, 스베덴보리의 무슨 두뇌 창작물이 아닌, 하늘, 곧 주님으로부터 계시된 내용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근원에서 오는 것은 본질상 다른 어떤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That which comes from such an origin cannot possibly be of any other nature.

 

속뜻으로는, 어린아이 시절 있었던 주님의 배움이라는 것 역시 이미 보셨습니다. It has been shown already that in the internal sense the Lord’s instruction when a child is treated of.

 

사람에게는 그가 천적이 되고자 하는 걸 방해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그의 지적 파트(intellectual part)에 속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의지 파트(will part)에 속한 것입니다. 지적 파트에 속한 것은 그가 어린 시절과 청년 때 배우는 빈(empty) 기억-지식, 그러니까 별 쓸데없는 지식들, 사실들(facts)을 구성하고, 의지 파트에 속한 것은 그가 가까이하는 갈망들(yearnings, 광(狂)적 열망)이 있는데 거기서 나오는 쾌락들(pleasures)을 구성합니다. There are two things with man which prevent his becoming celestial, one of which belongs to his intellectual, and the other to his will part: that which belongs to the intellectual part consists of the empty memory-knowledges he learns in childhood and youth; and that which belongs to the will part consists of pleasures from the yearnings which he favors.

 

이들 두 가지는 그로 하여금 천적인 것들을 얻을 수 없게 만드는 장애 요인들입니다. These are the hindrances that prevent his being able to attain to celestial things.

 

이들은 처음엔 흩어져 있습니다. 그러다 이들, 이 요인들이 흩어진 지 오래면, 그는 처음엔 천적인 것들의 빛 가운데 들어가는 게 허락되지만, 나중엔 마침내 천적 빛 안으로 온전히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These are first to be dispersed; and when they have been dispersed, he can then for the first time be admitted into the light of celestial things, and at last into celestial light.

 

[2] 주님은 여느 사람들처럼 태어나셨고, 또 그들처럼 교육을 받으셔야 했기 때문에, 기억-지식들을 배우실 필요가 있으셨는데, 이 모든 걸 아브람의 애굽 체류로 표상한(表象, represented) 것이며, 또한 빈 기억-지식들이 마침내 주님을 떠나버린 것을 바로가 자기 사람들에게 그에 관해 내린 명령과, 그들이 그를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와 함께 보낸 것으로 표상한 것입니다. (※ 앞 장 20절 참조) As the Lord was born as are other men, and was to be informed as others are, it was necessary for him to learn memory-knowledges, which was represented and signified by Abram’s sojourn in Egypt; and that the empty memory-knowledges at last left him, was represented by Pharaoh’s commanding his men respecting him, and by their sending him away, and his wife, and all that he had. (See the foregoing chapter, verse 20.)

 

그러나 의지에 속한 것들과 관련된 즐거움들(pleasures), 이 즐거움들은 사람을 감각적인(sensuous) 걸 추구하는 존재가 되게 하는데, 이것들의 가장 바깥에 있는 것 역시 주님을 떠났다는 것을 본 장에서 롯(Lot)으로 표상하고 있습니다. 그가 스스로 아브람에게서 떨어져 나갔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롯은 그런 사람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But that the pleasures which pertain to the things of the will, and which constitute the sensuous man, but the outermost of it, also left him, is represented in this chapter by Lot, in that he separated himself from Abram; for Lot represents such a man.

 

 

1543. 아브람이 애굽에서 올라갔다 And Abram went up out of Egypt.

 

이것이 주님을 떠난, 기억-지식으로부터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아브람’의 의미가 주님에 대한 표상이라는 점과, ‘애굽’의 의미가 기억-지식인 점, 그리고 ‘올라감’의 의미가, 곧 이 표현은 종종 더 낮은 것들, 기억-지식들에서 더 높은 것들, 천적인 것들을 향해 벗어나는 것, 탈피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말씀에서,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다’ 하는 표현이 자주 나오며, 이 또한 같은 걸 나타내는 표상이라는 점 등을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from memory-knowledges, which left the Lor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bram” as representing the Lord; and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Egypt,” which is memory-knowledge; and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going up,” for this expression is used of emerging from the lower things, which are the memory-knowledges, to the higher, which are the celestial things; and therefore, in the Word, “to go up from Egypt into the land of Canaan”—an expression which often occurs—involves the like things.

 

※ 즉, 주님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시기 위해 그동안 도움을 받았던 세상 지식과 결별하신 것입니다.

 

 

1544. 속뜻으로는, 여기 ‘아브람’은 주님, 어린 시절 주님이시며, ‘애굽’은 기억-지식이라는 것은 이미 주욱 보여드린 사실입니다. It has already been shown that here, in the internal sense, “Abram” is the Lord while still a child, and that “Egypt” is memory-knowledge.

 

 

1545. 그와 그의 아내 He and his wife.

 

이것이 그때 주님 안에 있던 천적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 곧 아브람의 의미가 주님이신 것을 생각하면, 그래서 그 결과, 그분 안에 있었던 천적인 것을 생각하면 보이실 겁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celestial truths then in the Lord may be seen from the signification of “he,” that is, of Abram, as being the Lord, and consequently the celestial that was in him.

 

사람은 그 안에 있는 것으로 사람입니다. 주님도 주님 안에 있는 천적인 것들, 곧 주님다우신 걸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스스로 천적이 되시려고, 홀로 천적이신 분이기 때문이며, 이런 이유로, 천적인 것들이 ‘아브람’으로, ‘아브라함’으로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A man is a man from the things that are in him; the Lord, from the celestial things; for he alone was celestial, so as to be the celestial itself; on which account celestial things are signified by “Abram,” and still more by “Abraham.

 

※ 주님은 어린 시절, 이미 자기 안에 여호와로 말미암은 신성이 있으심을 아시고, 하루속히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유전한 악한 인성을 벗고자 목표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본인이 친히 천적이 되시는 것이었고, 그래서 주님은 한눈팔지 않으시고, 전속력으로 앞으로 나아가신 것이며, 그래서 비록 어린 나이에도 어쩌면 매우 매력적일 수 있었던 세상 지식에 더 이상 미련 같은 걸 두지 않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동안 세상 모든 수도자와 경건한 영성가, 그리고 지금도 신실한 신앙인들이 세상을 가까이하지 않는 이유, 곧 금욕의 삶을 기꺼이 선택하여 주님 본받아 올곧게 걸어가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아내’의 의미가 천적인 것과 인접한 진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훨씬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 앞 1468번 글 참조) This may be further seen from the signification of a “wife,” as being truth adjoined to the celestial (as before shown, n. 1468).

 

진리들은 천적인 진리들이거나 천적인 것들로부터 나오는 진리들입니다. 이 사실은 ‘’가 먼저 거명되고, ‘그의 아내’가 뒤를 잇는 걸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truths are celestial truths, or truths which are from celestial thing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he” is named first, and “his wife” afterwards.

 

천적 전리가 하나 있고, 천적인 것에서 유래하는 진리가 하나 있기 때문인데, 천적 진리는 그 기원이 천적인 것에서 유래하는 반면, 천적인 것에서 유래하는 진리는 지식[cognitiones]을 사용하여 천적인 것에 이식된, 그런 진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For celestial truth is one thing, and truth celestial is another; celestial truth is that which derives its origin from the celestial; truth celestial is that which is from the truth which is implanted in the celestial by means of knowledges [cognitiones].

 

 

1546. 그의 모든 소유와 And all that he had.

 

이것은 천적인 것들이었던 모든 것을 의미한다는 건 지금까지 말씀드린 걸로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all things that were of the celestial things is evident from what has now been said.

 

 

1547. 그와 함께 한 롯 And Lot with him.

 

이것이 감각적인 걸 의미한다는 건 지금까지 이미 간략히 서술한 것으로 분명합니다. (AC.1428) 그러나 여기서 롯을 특별히 다루고 있기 때문에, 롯이 표상하는 것이 주님 안에 있는 무엇인지를 꼭 알 수 있어야 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what is sensuous, has already been briefly stated (n. 1428); but as Lot is here specifically treated of, it must be known what it is in the Lord that he represents.

 

바로(Pharaoh)는 마침내 주님을 떠나보낸 기억-지식들을 표상하는 반면, 롯은 감각적인 것들, 곧 겉 사람과 그 만족, 즐거움, 쾌락을 표상합니다. 이런 건 감각의 일에 속하며, 그래서 가장 바깥에 있고, 사람의 어린 시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선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그런 종류의 만족, 즐거움, 쾌락입니다. Pharaoh represented the memory-knowledges that at last sent the Lord away; but Lot represents sensuous things, by which is meant the external man and its pleasures that pertain to sensuous things, thus those things which are outermost, and which are wont to captivate man in his childhood, and draw him away from goods.

 

그래서 사람이 광적 열망에서 오는 쾌락을 탐닉하는 한, 그는 사랑과 체어리티에 속한 천적인 것들로부터 멀리 내쳐지게 됩니다. 그런 쾌락들에는 자아 사랑, 세상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은 천적 사랑이 함께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For so far as a man indulges the pleasures that originate from yearnings, he is drawn away from the celestial things that are of love and charity; because in those pleasures there is love from self and from the world, with which celestial love cannot agree.

 

그러나 천적인 것들과 완벽하게 일치하면서 겉 형태와 유사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즐거움들이 있습니다. (※ 이와 관련해서는 위 945, 994, 995, 997번 글 참조) There are, however, pleasures that agree perfectly with celestial things, and that likewise appear similar in external form (concerning which see above, n. 945, 994, 995, 997).

 

그러나 광적 열망에서 기인하는 쾌락들은 억제되며, 지워져 버립니다. 그런 건 천적인 것을 향하는 길을 막기 때문입니다. But the pleasures that originate from yearnings are to be restrained and wiped out, because they block the way to celestial things.

 

롯, 그가 제 발로 아브람을 떠났다는 점에서, 이것이 본 장에서 다루고 있는 그런 쾌락들입니다. 딴 게 아니고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 그런 쾌락들이 있었다는 것을 ‘그와 함께 한 롯’이라는 표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It is these pleasures, and not the others, that are treated of in this chapter—by Lot, in that he separated himself from Abram; and here it is said that such pleasures were present, which are signified by “Lot with him.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의미하는 것은 겉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내용들을 보시면 분명할 겁니다. But in general by “Lot” is signified the external man, as will be evident from what follows.

 

 

1548. 네게브로 Toward the south.

 

이것이 천적 빛 안으로를 의미한다는 것은, ‘남쪽’의 의미가 내면에 빛이 환히 비추는 상태가 되는 것임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 앞서 1458번 글에서 말씀드린) That this signifies into celestial light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south” as being a state of light as to the interiors (spoken of before, n. 1458).

 

천적 빛이 나오는 두 가지 상태가 있습니다. There are two states from which comes celestial light.

 

첫 번째는 사람이 유아 시절, 뭘 배우기 시작할 때 상태입니다. 알려진 대로, 유아들은 순수(innocence)와 사랑의 선 가운데 있기 때문인데, 이는 천적인 것들이며, 맨 처음 주님한테서 뭔가를 배우기 시작할 때 그들 안에 주입, 훗날 쓰임새 및 그가 사후 삶 가운데 들어갈 때 쓰기 위해 어린 시절 쌓인 것입니다. 이것들을 이름하여 첫 번째 리메인스라 하는데, 전에 몇 군데서 언급한, 바로 그것들입니다. The first is that into which man is introduced from infancy; for it is known that infants are in innocence and in the goods of love, which are the celestial things into which they are at first introduced by the Lord, and which are stored up in the child for use in later life, and for his use when he comes into the other life; these are what are called the first remains, spoken of in several places before.

 

다른 상태는 사람이 지식을 통해 영적, 천적인 것들 안으로 인도되는 것이며, 이 지식은 유아 시절 공급되어 천적인 것들 안으로 이식된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The other state is that man is introduced into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by means of knowledges, which must be implanted in the celestial things given from infancy.

 

주님의 경우, 이 지식들이 그분의 처음 천적인 것들에 이식되었고, 이를 통해 여기서 ‘네게브’(南方, the south)라 하는 빛을 갖게 되신 것입니다. With the Lord, these were implanted in his first celestial things, from which he had the light which is here called “the south.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1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속뜻)

어린 시절 주님은 때, 곧 세상 지식과 결별할 때가 되어 천적 진리와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 그리고 겉 사람과 함께 다음 단계로 나아가셨다

 

※ 주님은 겉 사람을 멸시하거나 막 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겉 사람으로 하여금 속 사람과 결합할 수 있도록, 마치 유전한 악한 인성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를 통해 신적 인성으로 갈아입으신 것처럼, 주님은 아브람이 롯과 함께 간 것처럼, 끝까지 겉 사람과 함께 가십니다.

 

우리 역시 사실 이 겉 사람으로 인해 자주 넘어지고, 오히려 거룩한 삶에 방해가 되고, 걸리적거리지만 그러나 우리 삶에 이런 겉 사람을 허용하시는 주님의 섭리 아래 참고 계속 주님 의지하며, 도전, 또 도전, 넘어져도, 자빠져도 계속 주님 의지하며, 계속 재도전을 하다 보면, 어느 틈엔가 정말 아름다운 속 사람, 전엔 겉 사람이 속 사람을 방해하는 못된 짓만 일삼았다면, 이젠 오히려 속 사람의 훌륭한 벗, 진정한 친구가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0-31(D1)-주일예배(2224, AC.1541-1548, 창13,1),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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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GN796VNbW0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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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94. 19절,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Verse 19. Why saidst thou, She is my sister? And I might have taken her to me for a woman. And now behold thy wife; take her and go.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그렇게 그는 천적인 것(天的, what is celestial)하고 결합할 예정이었던 진리에 해를 입힐 수도 있었다는 것, and I might have taken her to me for a woman” signifies that so he might have done violence to the truth that was to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진리는 천적인 것하고만 결합해야 함을 각각 의미합니다. and now behold thy wife; take her and go” signifies that truth was to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1496.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I might have taken her to me for a woman.

 

이 표현의 의미가, 천적인 것하고 결합할 예정이었던 진리에 해를 입혔을 수도 있었다는 것임은, 방금까지 말씀드린 걸로, 그리고 마찬가지로 앞서 13절에서 말씀드린 걸로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so the truth that was to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might have suffered violence, is evident from what has just been said; and also from what was said above at verse 13.

 

(13절 본문)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13절 속뜻)

주님도 어린 시절, 무엇을 배우실 때, 바로 천적인 단계로 점프하시지 않고, 대신 이성(理性)과 합리(合理)의 단계를 거치셨다. 그래서 여호와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으셨다.

 

천적인 것과 결합하는 진리에 관하여 보자면, 경우가 이렇습니다. As regards truth being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the case is this.

 

그 자체로만 보면, 어린 시절 배운 진리는 천적인 것을 받기 위해 채택된 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Regarded in itself, the truth learned from childhood is nothing but a vessel adapted to the reception of what is celestial.

 

진리는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고, 다만 그 안으로 흘러드는 천적인 것으로만 생명이 있습니다. Truth has no life from itself, but only from the celestial that flows in.

 

천적이라는 것은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입니다. 모든 진리는 거기에서 나오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진리는 일종의 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한 이런 이해가 저 세상에서는 생생해집니다. 거기서는 결코 진리를 가지고 진리를 평가하지 않고, 대신 그 진리 안에 있는 생명(life), 그 진리 안에 있는, 사랑과 체어리티에 속한 천적인 것들을 가지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진리는 천적이 되며, 이런 진리를 천적 진리(celestial truth)라 합니다. The celestial is love and charity; all truth is thence, and because all truth is thence it is nothing but a kind of vessel; and so are truths themselves plainly presented in the other life; truths there are never regarded from truths, but from the life which is in them; that is, from the celestial things which are of love and charity in the truths; from these it is that truths become celestial, and are called celestial truths.

 

우리는 이제 지성적 진리(intellectual truth)가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의 경우, 지성적 진리가 천적인 것을 향한 길을 열었다는 사실도 함께 알 수 있습니다. We can now see what intellectual truth is, as also that with the Lord intellectual truth opened the way to celestial things.

 

기억 진리(truth in the memory, [verum scientificum, 학문적 진리])가 하나이고, 이성적 진리(rational truth)가 또 다른 하나입니다. 지성적 진리도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이어집니다. Truth in the memory [verum scientificum] is one thing; rational truth is another; and intellectual truth is another; they succeed one another.

 

기억 진리는 기억-지식에 관한 것입니다. 이성적 진리는 이성으로 확인한(confirmed) 진리입니다. 지성적 진리는 이것이 그렇다는 일종의 내적 지각(an internal perception)과 함께 결합합니다. Truth in the memory is a matter of memory-knowledge; rational truth is this truth confirmed by reason; intellectual truth is conjoined with an internal perception that it is so.

 

이 지성적 진리가 어린 시절 주님과 함께 있었고, 주님과 함께 천적인 것을 향한 길을 열었습니다. This intellectual truth existed with the Lord in his childhood, and with him opened the way to celestial things.

 

 

1497.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And now behold thy wife; take her and go.

 

이 표현이, 진리는 천적인 것과 결합할 예정이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아내’의 의미가 천적인 것과 결합하기로 되어 있는 진리임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앞서 11절, 12절에서 보여드린 것과, 또 방금 죽 말씀드린 내용으로부터) That this signifies that truth was to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wife” as being truth that is to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as before shown, at verses 11 and 12, and also from what has just been said).

 

(11절 본문)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1절 속뜻)

어린 시절, 주님이 말씀에서 오는 지식을 배우기 시작하셨을 때, 주님은 그 지식에 담기는 진리가 천적인 것과 아주 가깝고, 정말 기분 좋은, 매우 마음에 드는 진리라고 생각하셨다

 

(12절 본문)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2절)

 

(12절 속뜻)

기억-지식들도 주님과 함께 있는 진리들이 천적인 것을 알아보지만 그러나 거기엔 관심이 없고, 오직 종교적 지식에 대한 지적 탐구에만 전념할 것이다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9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속뜻)

주님도 어린 시절, 지성적 진리를 접하면 바로 천적 진리에 이를 줄 아셨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것은 본의 아니게 천적 진리에 해를 입힐 수도 있음과, 그것은 곧 여호와의 질서가 아님을 아시고 올바른 순서를 밟으셨다. 진리라는 그릇에는 오직 천적인 것, 곧 오직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과 삶만 담겨야 하기 때문이었다.

 

※ 지식, 지혜, 진리와 관련, 주님의 질서는, 주님 → 천적 → 영적 → 지성적 → 이성적 → 지식 순이며, 각각 화살표 오른쪽은 왼쪽을 담는 그릇입니다. 맨 오른쪽, ‘지식’은 우리가 일상 중 습득하는 일반적인 모든 지식을 말합니다.

 

위 순서를 크게 둘로 나누면, 영적 진리부터 왼쪽으로 한 그룹, 곧 영계에 관한 것과, 지성적 진리부터 오른쪽으로 한 그룹, 곧 자연계에 관한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은 자연계의 것으로는 영계의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이지요.

 

오직 올바른 순서, 곧 주님으로부터 시작, 세상 지식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것, 곧 인플럭스(influx, 입류, 신성이 담긴 영적 흐름)를 통해 단계별 진리들의 내면이 정돈되어 올바른 쓰임새,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게 되어야 그 역순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 지식은 이성의 거듭남을 위해 쓰임 받고, 거듭난 이성은 거듭난 지성을 위해 쓰임 받으며, 지성의 거듭남을 통해 영성이 열리고, 영성을 통해 천국이 열려 주님께 도달, 주님과 하나가 되며, 결합, 완덕의 경지에,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창12 아브라함의 아브람 시절, 곧 주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바로 이 첫 단계 이야기입니다.

 

2021-10-24(D1)-주일예배(2219, AC.1496-1497, 창12,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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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N-RmB8vj5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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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86. 1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Verse 17. And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and his house, because of the word of Sarai, Abram’s wife.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기억-지식들이 파괴되었음을, ‘그 집에’, 그가 모았던,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천적인 것에 인접해 있어야 했던 진리 때문에를 각각 의미합니다.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signifies that the memory-knowledges were destroyed; “and his house” signifies which he had collected; “because of the word of Sarai, Abram’s wife” signifies because of the truth that was to be adjoined to the celestial.

 

※ 주님의 허락으로 영안이 열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영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우리처럼 그 사람의 몸을 보고 있지만 말입니다. 또한 이처럼 우리 안의 천사들은 말씀을 속뜻으로 읽습니다. 비록 우리 눈을 통해 겉 글자로, 사람의 언어로 읽지만 말입니다.

 

※ 말씀의 아케이나에 접근 혹은 도달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최대한 쉽게 풀어쓰려고 쓴 것이겠지만...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이 아파트만한 돌더미, 흙더미를 죽을힘을 다해 뒤져 겨우 엄지손톱만 한 금광석을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발견이라도 하면, 아니 반드시 발견하게 하시는데, 그때 그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 이제부터라도 라틴어를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 중입니다. 포츠(Potts, 1888-1902)는 왜 클라우즈(Clowes, 1774-1806)의 초역을 재역했을까요? 그리고 NCE(2012)를 낸 쿠퍼(Cooper)는 왜 바로 라틴 원전(1749-1756)으로 갔을까요? 책 ‘천국과 지옥’을 번역한 김은경은 수많은 영역본이 있었음에도 왜 바로 라틴 원전으로 한(韓)역했을까요? 번역은 가급적 원전을 가지고 직접 해야지 역본을 가지고 하면 아주 엉뚱한 게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 전달 게임’처럼 말이지요. 한글 성경도 개역의 경우, 영역, 한(漢)역을 가지고 한 결과, 많은 오역이 있어 이번 개역개정의 경우는 직접 히브리어, 헬라어 원전으로 번역한 것처럼 말입니다.

 

 

1487.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And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이것이 기억-지식들이 파괴되었음을 의미함이라는 것은 ‘바로’의 의미가 일반적으로는 기억-지식이며, 결과적으로는 그런 지식에 속한 기억-지식이라는 것을 보면, 그리고 ‘큰 재앙을 내리심’의 의미가 파괴됨이라는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memory-knowledges were destroy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haraoh” as being memory-knowledge in general, consequently the memory-knowledges that belong to such knowledge;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being “smitten with plagues” as being to be destroyed.

 

기억-지식들과 관련하여 이 경우는 이렇습니다. As regards memory-knowledges the case is this.

 

어린 시절, 이 기억-지식들은 그저 단순히 알려는 목적 외에 무슨 다른 거 없이 습득되지만, 주님의 경우는 진리에 대한 기쁨과 애정으로 습득되었습니다. In childhood they are acquired for no other end than that of knowing; with the Lord, they were acquired from the delights and affection of truth.

 

어린 시절 습득한 기억-지식들은 그 수가 엄청나지만, 나중에 주님에 의해 쓰임 받기 위해 질서정연하게 배치됩니다. 먼저는, 생각하는 능력이 생기게 하시려고, 두 번째는, 생각의 재료가 될 수 있게 하시려고, 끝으로, 이게 그 원하시는 건데요, 다시 말해서, 삶 자체가 쓰임새로 구성되며, 쓰임새의 삶이 되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The memory-knowledges acquired in childhood are very numerous, but are disposed by the Lord into order so as to serve for use; first, to give the ability to think; then that they may be of use by means of thought; and lastly that this may take effect, that is to say that the very life may consist in use, and be a life of uses.

 

※ 쓰임새의 삶을 위해 지식을 습득하는 좋은 예는, 예를 들면,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돌보기 위해 법을 공부하여 판검사가 되고자 하는 경우, 또는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고자 하는 경우 등이 있겠습니다.

 

이것이 어린 시절 습득한 기억-지식들에 의해 수행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게 없으면, 겉 사람은 결코 속 사람과 상호결합할 수 없으며, 동시에 쓰임 받을 수도 없습니다. These are the things performed by the memory-knowledges that are acquired in childhood; and without them the external man can never be conjoined with the internal, and at the same time become use.

 

사람이 쓰임새의 사람이 될 때, 즉 그가 모든 걸 그 쓰임새에 따라 생각하고, 그 쓰임새대로 행할 때, (만일 대세를 따르지 않고, 대신 그런 쓰임새의 실천을 통해 습득된 성품에서 나오는 조용함 가운데 있다면, 그 처음 용도, 곧 사람으로 하여금 합리와 이성의 사람이 되게 하려던) 기억-지식들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어 파괴됩니다. When man becomes use, that is, when he thinks all things from the end of use, and does all things for the end of use—if not by manifest reflection, still by tacit reflection from a nature acquired by so doing—then the memory-knowledges which have served the first use—that the man may become rational—being no longer of service, are destroyed; and so on.

 

※ ‘대세를 따른다’는 것은 누구나 다 지식의 습득과 추구를 자기 사랑을 위해 한다는 것이며, ‘합리와 이성의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은 그 지식이 머리에만 저장되어 있는 사람이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 ‘기억-지식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쓰임새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회유와 저급한 시도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 주님으로 말미암은 공동선 앞에서는 세속과 세상의 얄팍한 잔머리는 설 데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여기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들입니다. These are the things here meant by the words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1488. 그 집에 And his house.

 

이것이 그가 수집한 기억-지식이라는 것은 ‘’의 상징, 곧 ‘수집되어 이곳에서 기억-지식이 되는’이라는 의미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which he had collect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house,” as being, in this place, the memory-knowledges that are collected.

 

Potts 역(1888-1902)의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을 Cooper 역(2012)에서는 ‘사실’(fact)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술에서 ‘지식’이란 무엇인가가 은근, 참 중요합니다. 참고로, Potts는 앞서 다른 분의 번역, 곧 Clowes 역(1774-1806, from the Original Latin)을 개정, 편집하였지만, CooperClowes처럼 라틴 원전을 직접 번역했습니다.

 

기억-지식을 수집하고, 그걸로 겉 사람의 틀을 만들어 세워가는 과정은 실제 집을 짓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 여러 곳에서는 그걸 ‘건축’이나 ‘가옥 건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처럼 말입니다. To collect memory-knowledges, and by their means frame the external man, and build it up, is not unlike building a house; and therefore such things are signified in many passages of the Word by “building,” and by “building houses,” as in Isaiah: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사65:17, 21-22) I create new heavens and a new earth; they shall build houses, and inhabit them; and they shall plant vineyards, and eat the fruit of them; they shall not build and another inhabit; (Isa. 65:17, 21–22)

 

여기서 ‘가옥’은 거기 지혜와 지성이 있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이 본문은 주님의 나라, 즉, 새 하늘과 새 땅을 다루고 있습니다. here “houses” mean where there ar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where there are the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for the Lord’s kingdom is here treated of, namely, the new heavens and the new earth.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렘29:5) Build ye houses and dwell in them; and plant gardens, and eat the fruit of them; (Jer. 29:5)

 

그 의미가 유사하지요. where the meaning is similar.

 

시편입니다. In David: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시112:1, 3) Blessed is the man that feareth Jehovah, that delighteth greatly in his commandments; wealth and riches are in his house, and his righteousness endureth forever; (Ps. 112:1, 3)

 

부와 재물’은 지혜와 지성, 즉 지식에 관한 부와 재물을 가리키는데, ‘그의 집에’, 즉 이 지식이 그의 안에 있음을 가리킵니다. where “wealth and riches” denote the wealth and riches of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knowledges; which are “in his house,” that is, are in him.

 

[2]’이 스바냐에서는 정반대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House” is used in the opposite sense in Zephaniah:

 

그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그들의 재물이 노략 되며 그들의 집이 황폐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에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습1:12-13) I will visit upon them that say in their heart, Jehovah hath not done good, and hath not done evil; and their wealth shall be for a spoil, and their houses a desolation; and they shall build houses and shall not inhabit them, and they shall plant vineyards but shall not drink the wine thereof. (Zeph. 1:12–13)

 

학개에서는 In Haggai: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학1:8-10) Go up into the mountain, and bring wood, and build the house. Ye looked for much, and lo, it came to little; and ye brought it into the house, and I did blow it away. Why? saith Jehovah. Because of my house, which is deserted, while ye run everyone to his own house; therefore upon you are the heavens shut from dew; (Hag. 1:8–10)

 

’은 머리를 써서 거짓에 이른 기억-지식을 가리킵니다. houses” denote memory-knowledges by which, through reasoning, come falsities.

 

이사야에서는 In Isaiah: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사5:7-9) Woe unto them that join house to house, that cause field to draw near to field, till there be no place, and ye dwell alone in the midst of the land. Shall not many houses be for a desolation, great and good, without an inhabitant? The vineyard of Jehovah is the house of Israel; (Isa. 5:7–9)

 

이 또한 사용한 결과, 거짓에 이른 기억-지식을 가리킵니다. also denoting memory-knowledges by means of which come falsities.

 

아모스에서는 In Amos:

 

보라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므로 타격을 받아 큰 집은 갈라지고 작은 집은 터지리라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서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며 (암6:11-12) Behold, Jehovah commandeth, and will smite the great house with breaches, and the little house with clefts. Shall horses run upon the rock? Will one plow there with oxen? But you have turned judgment into gall, and the fruit of righteousness into wormwood; (Amos 6:11–12)

 

’은 같은 의미로 거짓과 거기서 나오는 악을, ‘’은 머리 쓰는 것(reasoning)을, ‘정의’는 ‘쓸개로 바뀌는’ 진리를, ‘공의의 열매’는 ‘쓴 쑥으로 바뀌는’ 선을 각각 가리킵니다. where “houses” denote in like manner falsities and the derivative evils; “horses,” reasoning; “judgment,” truths, which are “turned into gall”; and “the fruit of righteousness,” goods which are “turned into wormwood.

 

[3] 그래서 말씀 전반에 ‘’은 인간의 마음을, 그 안에 지성과 지혜가 있어야 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Thus throughout the Word, “houses” denote human minds, in which there should be intelligence and wisdom.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본문의 ‘바로의 집’은 이걸 써서 지성이 오고, 그렇게 해서 또 지혜가 오는 기억-지식을 가리킵니다. In the passage before us, “the house of Pharaoh” denotes memory-knowledges by means of which comes intelligence, and thereby wisdom.

 

또 같은 내용이 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위해 지은 집으로도 상징되고 있습니다. The like is also signified by the house which Solomon built for the daughter of Pharaoh (1 Kings 7:8, etc.).

 

솔로몬이 거처할 왕궁은 그 주랑 뒤 다른 뜰에 있으니 그 양식이 동일하며 솔로몬이 또 그가 장가 든 바로의 딸을 위하여 집을 지었는데 이 주랑과 같더라 (왕상7:8)

 

’은 마음, 그 안에 지성과 지혜가 있고, 그 안에 의지에 속한 애정이 있는 마음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나오는 ‘’이라는 단어는 폭넓은 상징을 갖는 단어입니다만, 특별히 어떤 때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그것이 서술하고 있는 그 대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Because “houses” denote minds, in which are intelligence and wisdom, and in which are affections belonging to the will, the word “house” in the Word is of a wide signification; but what its specific signification is, may be seen from the things of which it is predicated.

 

또 사람 자신을 일컬어 ‘집 한 채’ 또는 ‘어떤 집’이라고도 합니다. Man himself is also called “a house.

 

 

1489.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Because of Sarai, Abram’s wife.

 

이 표현이 ‘천적인 것에 인접해 있었어야 할 진리 때문에’를 의미한다는 것은 ‘아내’와, 결과적으로 위 12절과 관련된, 천적인 것에 인접해 있을 진리로서의 ‘아내 사래’가 상징하는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because of the truth that was to be adjoined to what is celesti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wife,” and consequently of “Sarai the wife,” as being truth that is to be adjoined to the celestial, concerning which above, at verse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2절)

 

이 경우는 이런데요, 사람의 어린 시절, 쓰임새 수행의 결과 그를 이성적인(rational) 사람이 되게 한 지식의 경우, 파괴되어 지워지지 않는 한, 진리는 천적인 것과 결코 결합할 수 없습니다. The case is this: unless the knowledges which in childhood have performed the use of making the man rational are destroyed, so that they are as nothing, truth can never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 여기서 말하는 ‘이성적인, 합리적인’이라는 말은 다분히 지식을 추구하는 동기가 불량한 사람, 즉 아는 건 많은데 이기적이고,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을 말하며, 이런 식으로 사용된 지식은 파괴되고, 지워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걸 극복해야 다음 단계인 영적, 천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 첫 기억-지식들은 대개 땅에 속하고, 육체적이며, 세속적입니다. These first memory-knowledges are for the most part earthly, corporeal, and worldly.

 

어린아이가 배우는, 계명에 가까운 가르침들이 사실은 신성(Divine)일지라도, 어린아이는 여전히 이런 지식들을 가지고 얻을 수 있는 그런 것 말고 거기서 무슨 다른 아이디어를 얻지는 못합니다. 이렇게 이들 가장 낮은 수준의 지식들이 이 아이 마음에 달라붙어 있고, 얘는 오직 거기서만 무슨 아이디어를 얻고 있는 한, 이 아이의 마음은 다음 단계로 고양될 수가 없습니다. However Divine may be the precepts that a child learns, he still has no other idea concerning them than that which is obtainable from such knowledges; and therefore, so long as those lowest knowledges cling to him, from which are his ideas, his mind cannot be elevated.

 

주님의 경우도 같았습니다. 주님도 여느 아이들처럼 태어나셨고, 여느 아이들처럼 교육받으셨기 때문입니다만 그러나 앞서 죽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은 신적 질서를 따라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With the Lord it was the same, because he was born as are other men, and was to be instructed as are others, but according to Divine order, which is such as has been stated.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가는 이런 이야기 안에 바로 신적 질서, 신성한 플랜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 안에서 겉 사람이 어떻게 속 사람과 결합하고, 그래서 겉이 어떻게 신성이 되는지 하는 것입니다. In these things which are said concerning Abram in Egypt, there is described the Divine order—how in the Lord the external man was conjoined with the internal, so that the external also might become Divine.

 

※ 곧 유전 악을 지닌 인성을 입고 태어나신 주님이 어떻게 그 인성(Human)을 벗으시고 신적 인성(Divine Human)을 입으시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7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속뜻)

지식의 사명은 사람을 자연적, 지성적, 영적, 천적 순서를 거쳐 주님에게 이르게 함인데, 이 사명을 수행하지 않는 지식이 있어 파괴되고 지워졌다

 

※ 사람은 혹시 자신의 지식이 잘못된 용도로 사용되어 잘못된 길로 자기를 이끌고 있을 경우, 이걸 바로잡아야만 다음 단계인 영적, 천적 단계로 올라 주님께 이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잘못된 길’이란, 그 지식을 쓰면 쓸수록 주님하고는 멀어지는 걸 말합니다.

 

※ 이것이 인생에게 지식을 주시는 주님의 뜻이요, 목적이고 질서입니다. 사람은 지식을 통해 주님을 만나야 하며, 주님도 어린 시절, 이 과정을 밟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 정하신 신적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2021-10-17(D1)-주일예배(2214, AC.1486-1489, 창12,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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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Y6bBrcimT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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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2

 

1478. 14절,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Verse 14. And it came to pass when Abram was come into Egypt, that the Egyptians saw the woman, that she was very beautiful.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주님이 배움을 시작하셨을 때를,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지식 중 기억-지식은 스스로를 무척 즐거워하는 그런 본성이 있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It came to pass when Abram was come into Egypt” signifies when the Lord began to be instructed; “and the Egyptians saw the woman, that she was very beautiful” signifies that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is of such a nature as to be highly pleasing to itself.

 

※ 여기, ‘지식 중 기억-지식’(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이라는 John Faulkner Potts 역(1888-1902)에 대해, 최근(2010 출간) 라틴 원전(1749-1756)을 직접 번역한 Lisa Hyatt Cooper 역에서는 ‘종교 지식에 관한 스터디’(the study of religious knowledge)라고 번역하고 있다는 점을 코멘트합니다.

 

즉, 위 표현은, ‘종교 지식에 관한 스터디는 그 고유 본성 상, 그 자체를 무척 즐거워합니다.’로 번역할 수도 있겠습니다.

 

 

1479.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It came to pass when Abram was come into Egypt.

 

이 표현이, 어린 시절. 주님이 배움, 곧, 배우기를 시작하셨을 때를 의미한다는 것은, ‘아브람’이 그 속뜻으로는 주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표현이라는 점과, ‘애굽’의 의미가 앞서 10절에서 보여드린 대로, 지식 중 기억-지식, 곧 종교 지식에 관한 스터디라는 점을 보면 분명하며, That this signifies when the Lord began to be instructed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on of Abram, which in the internal sense is the Lord when a child;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Egypt” as being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as before shown, at verse 10.

 

그래서 ‘애굽에 이르렀을 때’의 의미가 가르침을 받는 것, 배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o come into Egypt” is to be instructed.

 

 

1480.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And the Egyptians saw the woman, that she was very beautiful.

 

이 표현은, 종교 지식에 관한 스터디는 지식 그 자체를 가장 즐거워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이런 사실은, 앞서 11절, 어린 시절에 볼 수 있는, 지식에 대한 어린이들의 태도에서 분명합니다. 무엇보다도 ‘아는 것’(knowing)을 가장 즐거워하는 바로 그 점이 기억-지식, 곧 사실적 지식(factual knowledge)에 있어 마치 본질적, 선천적인 면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람에게 선천적인 겁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is of such a nature as to be highly pleasing to itself, is evident from what was before said, at verse 11, that such is the nature of memory-knowledge during childhood; for this is as it were innate in memory-knowledge, because it is innate in man, that at the very first it pleases for no other end than for the sake of knowing.

 

모든 사람이 다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아는 걸 굉장히 좋아하여 더 이상 무슨 다른 걸 원하는 게 없을 정도입니다. 이것, 곧 지식은 영적인 것들의 양식입니다. 마치 겉 사람이 땅에서 나는 것으로 양식을 삼듯, 영은 이것으로 유지되며, 생기를 되찾습니다. Such is every man; his spirit is greatly delighted to know, so that there is scarcely anything it desires more; this is its food, by which it is sustained and refreshed, as the external man is by earthly food.

 

이것은 사람의 영의 자양물, 곧 그 영의 생명을 건강하게 유지시켜 주는 것인데, 지식이라는 것은 겉 사람과 커뮤니케이션하여 끝에 가서는 겉 사람으로 하여금 속 사람에게 순응하게 합니다. This sustenance, which is that of his spirit, is communicated to the external man, to the end that this may be adapted to the internal man.

 

방금, 지식을 영의 양식이라 하였는데, 그와 관련하여 한 말씀 드리면, 양식엔 다양한 양식이 있어 다음과 같은 순서로 서로의 뒤를 잇습니다. 천적 양식은 모든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이며, 주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영적 양식은 모든 신앙의 진리입니다. 천사들은 이 양식으로 살아갑니다. 이어 이들로부터 나오는, 천적, 영적 양식 같으나 더 낮은 수준이어서 천사적 영들의 몫이 되는 그런 양식이 있습니다. 다시, 여기서 나오는, 여전히 더 낮은 수준의 천적, 영적 양식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성과, 그로 인한 기억-지식의 양식입니다. 이것은 선한 영들의 양식입니다. 끝으로, 육적 양식이 있습니다. 사람한테는 이것이 맞으며, 이 양식이 사람이 몸 안에 사는 동안 이용하는 양식입니다. But the various foods succeed one another in the following order: celestial food is all the good of love and charity from the Lord; spiritual food is all the truth of faith: on these foods the angels live; and from them comes forth the food, likewise celestial and spiritual, but of a lower angelic degree, on which angelic spirits live; from this again there comes a still lower celestial and spiritual food, which is that of reason and thence of memory-knowledge, on which good spirits live; and lastly comes corporeal food, which is proper to man while he lives in the body.

 

이들 양식들은 놀라운 방식으로 서로에게 상응합니다. These foods correspond to one another in a wonderful manner.

 

이런 사실로 또한 분명한 것은, 기억-지식이라는 것이 왜, 그리고 어떻게 스스로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하는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이 경우는 다음과 같은 건데요, 그건 마치 식욕과 같고, 맛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음식을 먹는 건, 영들의 경우엔 기억-지식에 상응합니다. 즉, 식욕과 그걸 맛보는 건 지식에 대한 욕구와 같은 것이지요. 사정이 이렇다는 걸 저는 경험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되었는데, 여기에 관해서는 나중에(AC.4791-4795, 4801) 주님의 신적 자비, 곧 허락하심을 받아 말씀드리겠습니다. From this it is also evident why and how memory-knowledge is very pleasing to itself; for the case therewith is the same as it is with appetite and taste; and therefore eating, with man, corresponds to memory-knowledges in the world of spirits; and appetite and taste themselves correspond to the desire for these knowledges; as is evident from experience,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4절과 그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어린 시절, 주님도 여느 어린이들처럼 배움을 시작하셨다. 이 배움의 대상인 지식은 자기 자신, 곧, 진리 그 자체를 무척 즐거워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

 

2021-10-10(D1)-주일예배(2209, AC.1478-1480, 창12,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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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uEjBeMApf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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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2

 

1471. 12절,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Verse 12.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e Egyptians shall see thee, that they will say, This is his wife, and they will kill me, and will make thee to live.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지식들 중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이 기억-지식이 천적 지식을 볼 때, 그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묘사입니다.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e Egyptians shall see thee” signifies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which is described as to what it is when they see celestial knowledges;

 

즉, 기억-지식의 눈에는 천적 지식이 어떻게 보일 것인지에 대한 묘사입니다.

 

※ 세속적, 육체적인 사람은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만일 신앙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을 감각에 속한 것들을 통해 보거나, 기억에 속한 것들을 통해 이해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합니다. 그리고 자연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들과 반대될 수 없다고 확신하지요. 그런 식으로 그는 천적이고 신적(Divine)인 것들을, 감각에 속한 것들을 가지고 알 수 있기를 원하는데, 그건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없으면 믿을 수 없다, 내가 가진 지식을 가지고 이해할 수 없으면 그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건 과학으로 설명 가능하며,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더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그는 점점 더 소경이 되어갈 뿐이며, 결국 그는 아무 것도 믿지 않게 됩니다. 심지어 어떤 영적인 일이나 더더욱 영생의 문제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이런 일, 이런 결과는 그가 세웠던 원리들에서 오며, 이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창2:17)입니다. 누구든지 이 열매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는 죽게 될, 즉, 생명에서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닌, 주님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님은 당연히 믿어야 한다, 즉, 말씀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들은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이니까 합니다. 그리고 이 원리에 따라, 그는 자신의 사고를 조정합니다. 그의 조정된 사고를 통해 이성과 지식, 감각 및 본성에 속한 것들을 가지고, 그는 자신을 컨펌(confirm, 확정, 확신)하며, 컨펌되지 않는 것들은 한쪽으로 던져버립니다.

 

즉, 이성, 지식, 감각, 본성 등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 거듭나는 것이며, 이 모든 근본적인 변화가 그의 의지, 곧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AC.128)

 

※ 사람은 자기가 상정(想定)한, 가정한 원리들에 의해 다스림을 받습니다. 심지어 그 원리들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그의 모든 지식과 미루어 짐작하는 모든 생각은 그 원리들에 대해 호의적입니다. 이런 원리들에 대해 호의적이고, 또 지지하는 경향을 보이는 이런 수많은 생각들을 통해서 결국 그 사람 마음에 그 원리들은 선명해지며, 결국 그는 그런 거짓 안에서 큰 확신을 갖게 됩니다.

 

결국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마음을 정하면, 즉, 의지가 앞장서면, 나머지는, 곧 지식, 이성 등은 이 의지를 섬기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예를 들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게 돈이다!’ 하는 생각을 자신의 인생철학과 원리 중 하나로 받아들인 사람은 지금 저 ‘대장동 의혹’과 관련된 사람들처럼, 분명히 이 ‘돈을 첫 자리에 모시는 생각’은 잘못이요,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삶의 중심원리로 삼아, 이후 모든 걸 이걸 가지고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가령, 시장, 도지사, 더 나아가서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이 되는 것까지 말이지요. 돈으로 안 되는 게 없다 하여 재판도 돈으로, 선거도 돈으로, 언론, 방송 등 각종 미디어, 여론도 다 돈으로 움직일 수 있다 믿으며, 그래서 돈이 있어야 하고,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만들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 곧 ‘대장동 의혹’ 같은 일을 몇 번만 하면 된다 하는 식이지요. ‘50억을 주겠다는데 안 넘어갈 사람이 있겠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런 세속적 사고는, ‘육안으로 볼 수 없거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절대 믿을 수 없어!’ 하는, 근본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런 생각이 하나의 중심원리가 된 사람은 이후 결코 무엇을 믿을 수가, 곧,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영적, 천적인 것들은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요, 사람의 머리로 상상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순서, 참된 질서는 사람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곧,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는 것이며, 모든 것이 그 뒤를 따르고, 이어 심지어 이성(理性, reason)과 기억-지식에까지 깨달음을 받는(be enlightened)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 지식, 세속 지식으로 주님과 천국을 엿보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하는 것, 과학을 배우는 것이 절대 금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은 사람에게 유익하고,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며, 신앙의 사람이라 하여 학자들의 세계에서 하듯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금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이라고 하는 자연계의 질서도 그 기원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세상 학자들이 그 질서 속에서 주님을 시인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아서 문제이지요...

 

다만 이 원리, 곧,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가능한 한, 학자들 세계에서 세상, 세속적 지식에 친숙한 용어들을 사용, 영적, 천적 진리들을 자연적 진리들을 가지고 컨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식 사고요, 입장입니다. 세상을 세속이라 하여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는 기독교와 달리, 세상 친숙한 것들로 쉽게 비유, 천국 아케이나를 풀어주신 주님처럼 말이지요. 또한 기억-지식도 주님의 빛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 즉, 쓰임새의 문제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하지, 절대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됩니다. 전자는 생명이지만, 후자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AC.129)

 

※ 세상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동산’을 위해 감각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을 가지며, 그의 ‘에덴’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요, 그의 ‘동쪽’은 서쪽 혹은 자기 자신, 그의 ‘유브라데스 강’은 그가 소유한 모든 기억-지식인데, 그건 정죄를 받게 됩니다. 그의 ‘두 번째 강’은 ‘앗수르’에 있는데, 거짓을 생산하는 정신 나간 이성적 활동입니다. 그의 ‘세 번째 강’은 ‘구스’에 있으며, 악과 악에서 나오는 거짓의 원리들이며, 이것이 그가 가진 신앙 지식들입니다. 그의 ‘네 번째 강’은 거기서 나온 지혜이며, 말씀에서는 이걸 가리켜 ‘마술’이라 합니다. 그래서 ‘애굽’은, ‘애굽’은 기억-지식인데, 나중에 이 지식은 ‘마술’이 됩니다. 이 ‘애굽’은 또한 그런 ‘사람’도 상징하는데, 그 이유는, 말씀으로부터 알 수 있듯, 그가 자아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해, 에스겔을 보면

 

3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9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겔29:3, 9)

 

이런 사람들을 또한 일컫기를, 같은 예언서에서 ‘지옥에 있는 에덴의 나무들’이라 합니다. 거기에는 애굽 사람, 바로를 가리켜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6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18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겔31:16, 18)

 

여기 ‘에덴의 나무들’은 말씀에서 오는 지식을 가리키는데, 이것을 그들은 얄팍한 사유(思惟) 행위로 모독하는 것입니다. (AC.130)

 

지금까지 애굽, 곧 기억-지식이란 무엇인가, 그 두 번째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식은 그릇입니다. 그릇 자체는 선, 악이 없고, 다만 그 안에 뭘 담느냐의 문제이며, 그걸 정하는 것은 본인의 의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결국 선용의 문제입니다. 아이큐가 높은 사람도 마음 한 번 잘못 먹으면 악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지지만 반대로 그 좋은 머리를 천국의 빛을 받아 주님 위해 쓰면 영원토록 쓰임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신성을 목표, 즉, 신성과 하나됨, 신성과 인성의 합일을 목표로,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 곧 악을 유전한 인성을 벗기 위해, 오직 천적인 것을 추구, 어린 시절, 다른 어린이들처럼 지식 습득을 시작하실 때에도 다른 데 한눈팔지 않으시고, 정주행, 아주 일찍 완덕의 경지, 곧 천적 인간을 이루시고, 유전 악 인성을 신적 인성으로 갈아입으셨습니다.

 

주님은 이를 위해, 쓸데없는 세상 지식을 일체 가까이 하지 않으시고, 오직 말씀과 관련된 지식만 마치 스펀지가 물 빨아들이듯 그렇게 흡수하셨습니다. 우리도 일과 중, 스마트폰이나 유튜브, 각종 세상 뉴스나 컨텐츠 등을 가급적 절제, 멀리한다면 많은 시간, 주님께 훌쩍 다가가며, 아주 빨리 내면이 열리리라 믿습니다. 어서 내면이 열려, 이 아케이나의 말씀들이 참으로 꿀송이보다 더 달게(잠16:24) 느껴지기를, 그리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이 갈한(시42:1) 그런 사람, 그런 상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0-03(D1)-주일예배(2204, AC.1471, 창12,12), '애굽, 기억-지식(memory-knowledge)(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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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Jc7dn1NpV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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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59.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Verse 10. And there was a famine in the land. And Abram went down into Egypt to sojourn there; because the famine was grievous in the land.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어린 시절 주님은 아직 지식이 부족하셨음을 의미합니다. There was a famine in the land” signifies a scarcity of knowledges as yet with the Lord when a child;

 

※ 지식이란 무엇일까? 지식의 형성 과정에 대하여...

 

본래 모든 것은 위로부터, 곧, 주님으로부터 나와 천계를 적시고, 이 자연계로 흘러들어 옵니다. 이걸 인플럭스(influx, 入流)라 하며, 이런 순서로 들어오는 걸 간접 입류, 주님에게서 직접 오는 것을 직접 입류라 합니다. 즉, 이렇게 영계에서 자연계로 흐르는 것이 정상인데, 어린 시절엔 그게 어려우니까 살짝 순서를 달리해서, 먼저 감각, 즉,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그리고 만지는 오감을 통해서 영계의 것이 자연계로 쉽게 흘러들어 올 수 있도록 길을 닦습니다. 마치 우물물을 퍼 올리는 마중물처럼 말이지요. 비록 어리더라도 사람이 스스로 의도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환경을 조성하여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오감, 특히 어린 시절엔 듣기를 통해서 들어오는데, 이렇게 사람 안에 들어온 기억들이 모여서 지식이 되며, 이 지식을 통해서 영계의 것들, 곧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이 자연계, 곧 사람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의 육체가 아닌, 사람의 영에 저장됩니다. 육체는 그야말로 물질일 뿐이기 때문이며, 사람의 사후, 몸이 썩어 없어져도 모든 기억이 고스란히 남는 것을 보면, 이 모든 기억과 지식은 육체가 아닌 영에 저장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때 사람의 영도 겉과 속이 있어 우리가 습득하는 모든 기억과 지식은 영의 겉, 곧 겉 사람 안에 저장되는 것이며, 정리하면, 주님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사람의 속 사람을 거쳐 사람의 겉 사람에 최종 도착해야 하는데, 어린 시절엔 그게 어려워 먼저 감각을 사용하여 그 길을 먼저 닦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되겠습니다.

 

주님도 여느 어린이와 똑같이 성장 과정을 밟으셨으므로, 모든 평범한 어린이들에게 일어나는 이런 지식형성과정이 어린 시절 주님 안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경우는, 주님의 속 사람 안에 있는 것, 곧, 주님의 내면은 천적(天的, the celestial)이셨다는 것과, 이것이 주님의 겉 사람 안에 있는 그릇들로 하여금 지식을 담는 그릇이 되게 했고, 이런 식으로, 이 지식은 나중에 신성을 받는 그릇들이 되었다, 즉, 주님의 속 사람은 천적이어서 주님의 겉 사람도 신성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속 사람이 천국 질서를 따르면, 천국이 우리 안에 견고히 자리잡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멘, 할렐루야!

 

주님의 속 사람에는 여느 어린이들과 달리 그의 아버지이신 여호와로부터 온 신성(Divine)이, 주님의 겉 사람에는 그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로부터 온 인성(human)이 있었을 뿐, 어린 시절 주님은 여느 어린이들처럼 평범한 지식의 결핍 가운데 계셨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AC.1460)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지식은 지식인데 특별히 말씀-오리엔티드된 지식으로 교육받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애굽’, 지식[스키엔티아 코그니티오눔]에 관한 기억-지식을, ‘거류하려고’, 교육받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and Abram went down into Egypt to sojourn” signifies instruction in knowledges from the Word; “Egypt” is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scientia cognitionum]; “to sojourn” is to be instructed;

 

※ 영의 겉, 곧 겉 사람은 육체적, 감각적입니다. 영의 속, 곧 속 사람과 육체 사이에서 둘을 연결하기 때문이지요. 이때 중요한 건, 이런 겉 사람이 반드시 속 사람 쪽으로 기울어지는 건데요, 그 유일한 방법은 오직 지식을 통해서이며, 그것도 오직 말씀에서 오는 지식을 통해서입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주님의 신성이 흘러들어 오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일종의 땅과도 같습니다. 각종 채소와 나무가 자라는 땅 말입니다. 천적, 영적인 씨들이 이 땅에 뿌려져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자랍니다. 정착하는 것이지요. 이때 이 땅, 곧 지식은 오직 말씀에서 오는, 오직 말씀으로 말미암는 지식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연결되고 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린 시절, 오직 말씀에 관한 지식 말고 다른 세상 지식 습득하는 일은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곧장 정주행을 하셨고, 그래서 단기간에 유전 악을 타고난 인성을 벗으시고,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을 입어 여호와와 결합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이것이 지식의 올바른 기능이며, 또 지식에 대한 우리의 참된 자세입니다. 우리 역시, 온갖 잡다한 세상 지식에 너무 두리번거리는 대신 세월을 아껴 주님처럼 오직 말씀에 관한 지식, 주님과 연결되고 결합할 수 있는 지식을 얻는 일에 전념해야 하겠습니다. 거기서 모든 것이 오며, 모든 것이 그것으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25-33)

 

부연하여, 주님의 휴먼 에센스, 곧, 인성은, 영원부터 계신 주님의 디바인 에센스, 곧, 신성에 첨가된 어떤 것일 뿐입니다. (AC.1461)

 

※ 고대에 이집트 외에도 많은 곳에 교회가 있었으나 특별히 이집트에서 지식, 특히 기억-지식이 번창했습니다. 이 지식은 주로 세상 학문 등을 통해 학습한 지식인데, 문제는, 이들이 이런 세속적 지식을 가지고 천적, 영적 지식들, 곧, 하늘의 신비와 주님 신앙의 비밀들을 탐구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마술이 나왔고, 이로부터 악과 거짓이 나오게 되어 이후 ‘애굽’하면 이런 것들을 상징하게 된 것입니다. (AC.1462)

 

※ 본문의 ‘이집트’는 이와는 달리 유용한 기억-지식을 말합니다. 본문의 이집트는 천적, 영적 지식들을 담는 그릇으로 봉사합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19장 13절 말씀 중에, ‘그들은 애굽 종족들의 모퉁잇돌이거늘 애굽을 그릇 가게 하였도다’ 하여, 애굽을 ‘종족들의 모퉁잇돌’이라 표현하였는데 이는 ‘종족들’로 표현된 신앙을 받쳐줌, 곧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모는 것에 대한 섬김을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AC.1462)

 

※ 말씀에서 ‘체류’, ‘이주’ 등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표현을 천사들이 읽을 때, 그들은 상태가 바뀌고 있다, 변하고 있다로 읽습니다. 영계에서 상태가 바뀌는 것은 가르침, 교육을 통해서이며, 태고 교회 사람들은 ‘체류’를 통해서 이런 걸 지각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가 말씀-오리엔티드된 지식으로 교육을 받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AC.1463)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주님의 겉 사람 안에 있는 심한 결핍을 의미합니다. because the famine was grievous in the land” signifies much scarcity in his external man.

 

※ 이 표현에는 간략히 말씀드리기에는 너무나 많은 아케이나가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주님은 영적인 것을 배우시기 전, 먼저 천적인 것들부터 배우셔야 했다는 사실, 또 주님의 겉 사람 안에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전 악이 있으셨다는 사실 등... 이것들 말고도 무수합니다. (AC.1464)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0절의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린 시절 주님은 아직 영적, 천적 지식이 부족하셨다 주님은 특별히 말씀 지향적인 지식으로 배우셨다 어린 시절 주님의 겉 사람은 심한 결핍 가운데 계셨다

 

2021-09-26(D1)-주일예배(2200, AC.1459-1464, 창12,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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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77eHWXAbJ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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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모든 천국은 전체적으로

한 사람을 반영한다

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

 

 

59. 천국 전체가 한 사람 모습이라는 사실은 세상에서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비의(秘義, arcanum)이지만, 그러나 천국에서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That heaven in its whole complex reflects a single man is an arcanum hitherto unknown in the world, but fully recognized in the heavens.

 

이 사실과, 이와 관련된 세부사항들을 아는 것이 천국 천사들의 지성을 이루는 핵심입니다. 천사들이 이 사실을 그들의 보편원리로 삼지 않으면, 거기 의존하는 많은 것들을 명확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To know this and the specific and particular things relating to it is the chief thing in the intelligence of the angels there, and on it many things depend which without it as their general principle would not enter distinctly and clearly into the ideas of their minds.

 

자기들의 소사이어티들과 함께 모든 천국들도 각각 한 사람 모습임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천국을 가리켜 가장 큰 사람, 신적 인간(神人, the Divine man)(주60)이라 합니다. 신적(神的, Divine)이라 하는 이유는, 천국을 이루는 것이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이기 때문입니다. (AC.7-12) Knowing that all the heavens with their societies reflect a single man they call heaven the greatest man and the Divine man(주60)—Divine because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see above, n. 7–12).

 

 

60. 영적이고 천적(heavenly)인 것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사람들은 천적(celestial)이고 영적인 것들이 이런 형태와 이미지로 배열되고 결합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That into such a form and imag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re arranged and joined cannot be seen by those who have no right idea of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그런 사람들은 사람의 가장 바깥을 구성하는 흙과 물질적인 것이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하며, 그런 걸 떠나서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Such think that the earthy and material things of which man’s outmost nature is composed are what makes the man; and that apart from these man is not a man.

 

그러나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사람인 것은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고, 선을 의도하는 능력 때문에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But let them know that it is not from these that man is a man, but from his ability to understand what is true and to will what is good.

 

그런 이해함과 마음먹음이야말로 사람을 이루는 영적, 천적인 것들입니다. Such understanding and willing are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of which man is made.

 

더욱이, 모든 사람의 퀄러티는 각 개인의 이해와 의지의 퀄러티로 결정되며, 그 사람의 이 세상 몸은, 세상에서 그의 이해와 의지를 섬기기 위해, 그리고 자연계의 가장 바깥에서 그들의 쓰임새를 잘 성취하기 위해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Moreover, it is known that everyone’s quality is determined by the quality of his understanding and will; and it can also be known that his earthly body is formed to serve the understanding and the will in the world, and to skillfully accomplish their uses in the outmost sphere of nature.

 

이런 이유로, 몸은 스스로 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대신 이해와 의지에 철저히 종속되어 늘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혀와 입술로 말하는 정도이고, 사람이 의도하는 것을 몸과 팔다리로 행할 정도이지요. 이런 걸 보면, 이해와 의지가 행하는 것이지, 몸이 스스로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For this reason the body by itself can do nothing, but is moved always in entire subservience to the bidding of the understanding and will, even to the extent that whatever a man thinks he speaks with his tongue and lips, and whatever he wills he does with his body and limbs, and thus the understanding and the will are what act, while the body by itself does nothing.

 

그래서 이해와 의지에 속하는 것들이 사람을 이루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에 작용하듯, 이런 것들이 몸의 구석구석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적용되는 것을 보면, 분명 영과 육은 같은 형태이며, 이런 이유로, 사람을 일컬어 내적 인간, 영적 인간 하는 것입니다. Evidently, then, th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nd will are what make man; and as these act into the minutest particulars of the body, as what is internal into what is external, they must be in a like form, and on this account man is called an internal or spiritual man.

 

천국은 가장 광대하고, 가장 완벽한, 그런 사람의 형태입니다. Heaven is such a man in its greatest and most perfect form.

 

 

61. 사람에 대한 천사들이 가진 생각이 그렇기 때문에, 천사들은 사람이 그 몸으로 행한 것들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직 그런 행위를 왜 했는지 그 동기만 봅니다. Such being the angelic idea of man, the angels give no thought to what a man does with his body, but only to the will from which the body acts.

 

천사들은 이 의지가 그 사람 자신이라고 하며, 이해의 경우는, 의지와 일치하는 선에서만 그 사람이라 합니다.(주61) This they call the man himself, and the understanding they call the man so far as it acts in unison with the will.(주61)

 

 

62. 사실, 천사들은 천국 전체가 사람 모습인 것을 못 봅니다. 천국 전체는 어떤 천사의 뷰에도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지요. 다만 수천의 천사들로 구성된 멀리 떨어진 소사이어티들이 사람 형태인 것을 가끔 보기 때문에, 그들은 그 소사이어티를 일부로 하는 천국도 사람 모습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The angels, it is true, do not see heaven in its whole complex in the human form, for heaven as a whole does not come within view of any angel; but remote societies, consisting of many thousands of angels, they sometimes see as a one in the human form; and from a society, as from a part, they draw their conclusion as to the general, which is heaven.

 

가장 완벽한 형태에서는, 그저 둘 사이 크기만 다를 뿐, 전체는 부분과, 부분은 전체와 같은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성(神性, the Divine)이 가장 내적으로, 혹은 가장 높이 모든 것을 보시기 때문에, 주님의 시야로는 천국 전체가 사람 형태일 것임이 틀림없다고 말입니다. For in the most perfect form generals are like the parts, and parts are like the generals, with simply such a difference as there is between like things of greater or less magnitude; consequently, the angels say that since the Divine from what is inmost or highest sees all things, so in the Lord’s sight heaven as a whole must be in the human form.

 

 

63. 천국이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주님에 의해 마치 한 사람이 다스려지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로 다스려집니다. Heaven being such, it is ruled by the Lord as a single man is ruled, thus as a one.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람은 전체든 각 부분이든 수많은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체로는 사지와 기관, 그리고 내장들로, 부분으로는, 일련의 섬유와 신경, 그리고 혈관들로, 또 지체 안에 지체가, 부분 안에 부분 식으로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움직일 때, 그는 마치 한 사람처럼 움직입니다. For although man, as we know, consists of an innumerable variety of parts, not only as a whole but also in each part—as a whole, of members, organs, and viscera; and in each part, of series of fibers, nerves, and blood vessels, thus of members within members, and of parts within parts— nevertheless, when he acts he acts as a single man.

 

천국도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아래 이와 똑같습니다. Such likewise is heaven under the auspices and direction of the Lord.

 

 

※ 각주

 

60. 천국 전체가 한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며, 그래서 천국을 ‘가장 큰 사람’(the Greatest Man)이라 합니다. Heaven in the whole complex appears in form like a man, and for this reason heaven is called the Greatest Man (n. 2996, 2998, 3624–3649, 3741–3745, 4625).

 

 

61. 사람의 의지가 그의 생명 바로 그 자체[에세]이며, 사람의 이해는 거기서 나오는 그의 생명의 출발[이그지스테레]입니다. The will of man is the very being [esse] of his life, and his understanding is the outgo [existere] of his life therefrom (n. 3619, 5002, 9282). 사람의 주된 생명은 그의 의지의 생명이며, 여기서 이해의 생명이 나아갑니다. The chief life of man is the life of his will, and from that the life of the understanding proceeds (n. 585, 590, 3619, 7342, 8885, 9282, 10076, 10109, 10110). 사람은 그의 의지와 그 의지로 말미암는 이해로 사람입니다. Man is man by virtue of his will and his understanding therefrom (n. 8911, 9069, 9071, 10076, 10109, 10110).

 

HH.1.8.59-63.'8장, 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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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PV8ATkFK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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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39. 6절,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Verse 6. And Abram passed through the land, even unto the place Shechem, even unto the oak grove Moreh: and the Canaanite was then in the land.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에 이르니’, 주님의 두 번째 상태를 말합니다. 사랑의 천적인 것들, 곧 천국에 속한 것들이 주님에게 명료해졌을 때인데, 이것이 바로 ‘세겜’입니다. Abram passed through the land, even unto the place Shechem” signifies the Lord’s second state, when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became apparent to him, which are signified by “Shechem”;

 

※ 하란을 출발, 가나안을 향한 아브람의 여정은 어린 시절 주님의, 천국에 속한 것들을 향하신 여정입니다. 주님은 출발하셨고, 곁눈질하시거나 두리번거리시지 않는 대신 늘 길을 재촉하시더니, 마침내 도착하셔서 바라시던 바, 곧 천국에 속한 것들을 얻으셨습니다. (AC.1440)

 

※ ‘천국에 속한 것들’, 바로 이 안에 영혼의 빛이 있으며, 이 안에 주님의 신성, 곧 여호와께서 계십니다. 주님이 이것을 얻으신 것은 주님의 휴먼 에센스, 곧 인성과, 주님의 디바인 에센스, 곧 신성 간 결합을 말하며, 그때를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하시는 것입니다. (AC.1440)

 

※ ‘세겜’은 하란에서 출발, 가나안에 진입하는 첫 관문, 곧 입구입니다. ‘세겜 땅에 이르렀다’는 것은, 천국에 속한 것들을 향하신 고단한 여정을 마치시고 결국 도착하심, 마침내 얻으심을 뜻합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에 속한 것들, 곧 모든 천국적인 것들,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세겜’은 그런 가나안 땅의 입구이기 때문입니다.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세 번째 상태, 즉, 첫 퍼셉션입니다. 이것이 ‘모레 상수리나무’입니다. even unto the oak grove Moreh” signifies the third state, namely, the first perception, which is “the oak grove Moreh”;

 

※ 주님이 천적인 것들을 얻으시자마자, 곧 천적 인간이 되시자마자 여호와께서 나타나셨는데, 이것을 가리켜 퍼셉션을 얻으셨다 하는 것입니다. 모든 퍼셉션은 천적인 것들, 곧 하늘로부터 오며, 누구든지 천적 인간이 되면, 주님으로부터 이 퍼셉션을 받습니다. 퍼셉션이 무엇인지는 글 번호 104, 202, 371, 483, 495, 503, 521, 536, 865를 참조하시고, 태고교회 사람들이 받은 퍼셉션에 관하여는 글 번호 125, 597, 607, 784, 895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AC.1442)

 

※ 천적 인간이 되기 전, 곧 그 앞 단계인 영적 인간의 경우는,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습니다. 이것은 퍼셉션과 유사하거나 아니면 양심의 소리 같은 건데, 그 사람의 체어리티가 얼마나 천적이냐에 따라 더 할 수도, 덜 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체어리티 안에 계셔서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체어리티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십니다. 이런 일이 주님에게 나타나셨으니 그 정도가 어떠하겠습니까? 주님은 유아에서 출발, 여호와가 되신 분이며, 여호와와 결합, 하나가 되신 분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AC.1442)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주님의 외적 인간 안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유전한 악을 말합니다. and the Canaanite was then in the land” signifies the evil heredity from the mother in his external man.

 

※ 앞의 1414번 글에 보면, 사람은 부모에게 물려받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로부터 받는 내적인 것, 다른 하나는 어머니로부터 받는 외적인 것으로, 전자는 영원하고, 후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도 같았습니다. 주님도 이 둘을 물려받았으나 다만 주님은 아버지, 곧 여호와로부터는 신성을, 그리고 처녀 어머니로부터는 인성, 곧 유전악을 물려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입으신 주님의 일생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이 유전악을 벗으시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말씀,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는 주님이 처녀 어머니로부터부터 물려받아 주님의 외적 인간 안에 있는 악을 말합니다. (AC.1444)

 

※ 주님은 이 악과 싸우셨고, 결국 극복하셨습니다. 주님은 가장 극심한 유혹과 시험들을 겪으시고, 견디셨습니다. 이에 관하여는 나중에 주님의 허락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은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이 지옥 전체와 싸우셨습니다. 사람에게 악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시험을 당하지 않습니다. 악은 지옥의 영들로 하여금 흥분하게 하며, 그래서 저들은 사람 안의 악을 보고 달려들어 그를 시험에 빠트리고자 정성을 다하는 것이며, 주님도 아직 이 유전악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신 것입니다. (AC.1444)

 

※ 다음은 주님의 시험에 관한 본문들입니다.

 

12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1:12-13)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4:1)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눅4:1-2)

 

다음은 가나안 땅 우상숭배의 나라들과 그 가운데 가나안에 관한 본문들입니다. (AC.1444)

 

18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창15:18-21)

 

8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17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면 (출3:8, 17)

 

23내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28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출23:23, 28)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출33:2)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보라 내가 네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리니 (출34: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신7:1)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신20:17)

 

또 말하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수3:10)

 

너희가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이른즉 여리고 주민들 곧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넘겨 주었으며 (수24:11)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삿3:5)

 

※ 이상으로 오늘 본문 6절의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천적(天的, celestial)인 것이 명료해지며, 여호와로 말미암은 퍼셉션이 주님 안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주님의 외적 인간 안에는 유전 악이 있었다

2021-09-19(D1)-주일예배(2195, 아케이나말씀리딩.창12,6),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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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WVq76zyY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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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10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14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15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16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17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8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19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20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THE CONTENTS

 

 

1401. 여기서부터는 실제 있었던 일들이며, 이 모든 내용은 표상(表象), 즉 뭔가를 대신 표현하는 것이고, 각 어휘는 의미심장한 뭔가가 있습니다. True historical things begin here, all of which are representative, and each word significative.

 

아브람에 관한 본 장의 내용은 가장 어린 시절부터 청년 때까지 주님의 상태에 대한 표현입니다. The things related in this chapter concerning Abram represent the Lord’s state from earliest childhood up to youth.

 

주님도 일반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주님 역시 모호한 상태에서 한층 또렷한 상태로 발전되어 가셨습니다. As the Lord was born in the same way as other men, he also advanced from an obscure state to one more lucid.

 

‘하란’은 첫 번째 상태입니다. 불명확한, 모호한 상태이지요. ‘세겜’은 두 번째, ‘모레 상수리나무’는 세 번째, ‘바다를 향해서는 벧엘, 동쪽은 아이인 산’은 네 번째, 그리고 ‘남방 애굽에 이르는 여정’은 다섯 번째 상태입니다. “Haran” is the first state, which was obscure; “Shechem” is the second; “the oak grove Moreh” is the third; “the mountain which had Bethel toward the sea and Ai on the east” is the fourth; and the “journey thence toward the south into Egypt” is the fifth.

 

 

1402. 아브람의 애굽 체류에 대해 언급된 내용은 주님의 첫 번째 가르침에 대한 표현이요, 상징입니다. The things told of Abram’s sojourn in Egypt represent and signify the Lord’s first instruction.

 

‘아브람’은 주님, 아내로서 ‘사래’는 천적인 것에 붙어있고자 하는 진리, 누이로서 ‘사래’는 지성적 진리, ‘애굽’은 기억-지식 [스키엔티아, scientia]입니다. “Abram” is the Lord; “Sarai,” as a wife, is truth to be adjoined to the celestial; “Sarai,” as a sister, is intellectual truth; “Egypt” is memory-knowledge [scientia].

 

기억-지식으로부터 [from memory-knowledges, 아 스키엔티피시스 a scientificis, 학문으로부터] 심지어 천적 진리로까지 나아가는 전체 진행에 관한 묘사입니다. 이것은 신적 질서, 곧, 주님의 휴먼 에센스가 주님의 디바인 에센스와 결합하고, 동시에 여호와가 되시는, 그런 질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The progress memory-knowledges [a scientificis] even to celestial truths is described; this was according to Divine order, that the Lord’s human essence might be conjoined with his Divine essence, and at the same time become Jehovah.

 

 

THE INTERNAL SENSE

 

 

1403. 창세기 첫 장에서 여기까지, 더 정확히는 에벨에 관한 언급이 있는 데까지는 실재 역사는 아니고, 그 안에 속뜻이 있어 천적, 영적 실재들을 가리키도록 역사 이야기처럼 구성한 것입니다. From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up to this point, or rather to the mention of Eber, the historicals have not been true but made-up historicals, which in the internal sense signify celestial and spiritual actualities.

 

그러나 본 장과 이어지는 장들은 꾸민 이야기가 아닌 실재 역사이며, 그 속뜻으로는, 이들 역시 같은 식으로 천적, 영적 실재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은, 이 또한 주님의 말씀이라는 한 가지 생각만으로 읽는다면 누구든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But in this chapter and in those which follow, the historicals are not made-up but true historicals; and in the internal sense these in like manner signify celestial and spiritual actualities, as anyone may see from the single consideration that it is the Word of the Lord.

 

 

1404.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실재했던 이 내용은 그 모든 문장과 단어들 모두,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둘 다 그 안에 담긴 겉 글자의 뜻하고는 완전히 다른 속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고로, 실제 있었던 이야기 그 자체는 대표성을 띤 표상입니다. In these things now before us, which are true historicals, all the statements and word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ve in the internal sense an entirely different signification from that which they b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but the historicals themselves are representative.

 

다루어지는 첫 번째 인물은 아브람인데, 그는 일반적으로는 주님을 표상하지만, 그러나 특별히는, 천적 인간을 표상합니다. 그다음 인물은 이삭으로, 그 역시 같은 식으로, 일반적으로는 주님을, 특별히는 영적 인간을, 야곱 또한 일반적으로는 주님을, 특별히는 자연적 인간을 표상합니다. Abram, who is first treated of, represents in general the Lord, and specifically the celestial man; Isaac, who is afterwards treated of, in like manner represents in general the Lord, and specifically the spiritual man; Jacob also in general represents the Lord, and specifically the natural man.

 

그래서 그들은 주님과 주님의 왕국, 그리고 교회에 관한 것을 표상합니다. Thus they represent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of his kingdom, and of the church.

 

 

1405. 속뜻은, 이미 그동안 명백하게 보아온 (AC.64, 647, 813, 1143) 것처럼, 다음과 같은 건데요,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겉 글자의 뜻으로부터 추상적으로, 마치 겉 글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을 때라야 비로소 모든 것이 이해되는 그런 속성을 가졌습니다. 그 이유는, 속뜻엔 말씀의 혼과 생명이 있기 때문인데, 이건 겉 글자의 뜻이 마치 사라지는 것 같아야만,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But the internal sense, as has already been clearly shown, is of such a nature that all things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to be understood abstractly from the letter, just as if the letter did not exist; for in the internal sense is the Word’s soul and life, which does not become manifest unless the sense of the letter as it were vanishes.

 

그래서 사람이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위와 같이 지각합니다. Thus, from the Lord, do the angels perceive the Word when it is being read by man.

 

 

1406. 본 장에 나오는 실제 일어났던 일들이 표상하는 것은 앞서 전제했던 내용을 보시면 되며, 문장들과 단어들이 상징하는 바는 이어지는 내용과 그 풀이들을 보시면 됩니다. What the historicals in this chapter represent is evident from the contents that have been premised; what is signified by the statements and the words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where they are explained.

 

2021-09-12(D1)-주일예배(2190, 아케이나말씀리딩.창12), '창12, 표상(表象, representative) 교회의 시작'.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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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a0AaG2oIcc8

 

한결같은교회.주일예배(9/12, 아케이나말씀리딩.창12), '창12, 표상(表象, representative) 교회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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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6:9-22

 

9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3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5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16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17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18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20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21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22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THE INTERNAL SENSE

 

 

605.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는 ‘노아’라 이름하는 새 교회의 형성입니다. 이 교회의 형성을 방주를 가지고 묘사하고 있는데, 방주 안에는 온갖 종류의 생물들이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The subject now treated of is the formation of a new church, which is called “Noah”; and its formation is described by the ark into which living things of every kind were received.

늘 그렇듯,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는 그 교회에 속한 사람은 많은 시험을 당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을 방주를 띄움, 방주가 흔들거림, 홍수의 물 위로 지체됨 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But as is wont to be the case, before that new church could arise it was necessary that the man of the church should suffer many temptations, which are described by the lifting up of the ark, its fluctuation, and its delay upon the waters of the flood.

그리고 마침내 그가 참된 영적 인간이 되어 자유인이 된 것을 물의 빠짐과, 이어지는 많은 것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And finally, that he became a true spiritual man and was set free is described by the cessation of the waters, and the many things that follow.

말씀의 문자적 의미만 고수하는 사람은 결코 이런 메시지를 볼 수 없습니다. 이 경우가 특히 그런데요,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역사적으로 연결되고,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기 때문입니다. No one can see this who adheres to the sense of the letter only, in consequence (and especially is this the case here) of all things being historically connected, and presenting the idea of a history of events.

 

즉, 성경은 인류 역사에 대한 일대일 반영의 기록물이라는 입장입니다. 성경의 어떤 사건들은 반드시 실제로 있었던 과거 어떤 사건들이라는 것이지요. 여기, 며칠 전, 창세기 4장 때 내용 일부를 잠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창세기 1장부터 11장, 아브라함 등장 전까지는 실제 역사가 아닌, 고대인들의 문학 양식인 스토리텔링입니다. 즉, 이 기간 등장하는 인명(人名)은 실제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닌, 그 시대에 존재했던 교회의 이름, 교리 혹은 신학의 이름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오로지 사람을 거듭나게 하여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현재까지 밝혀진 지질학적 지구의 연대인 45억 년을 받아들입니다. 즉, 말씀(The Word)을 겉 글자의 뜻(letter sense, external sense)이 아닌, 속뜻(inner sense, internal sense)으로 읽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창세기 1장도 전통적인 육일간의 천지창조로 읽기보다는 한 사람의 거듭남의 여섯 상태, 또는 단계로 읽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어쩌면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가 이 45억 년 전체에 대한 기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구의 연대를 꼭 말씀에 명시적으로 일대일 대응시키실 필요를 느끼지 않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오로지 인류의 구원, 곧 사람의 거듭남에만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 곧 이런 스토리텔링이 그 당시 사람들의 언어 및 문학 스타일이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가장 큰 즐거움은, 모든 것을 대표성을 띤 그림들, 곧 상징성을 띤 어떤 문학적 도구들, 가령, 인물, 사물, 사건 등을 등장시켜, 그걸 역사 형태로, 스토리텔링으로 정돈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일관성이 있는 역사 시리즈일수록, 더 그들의 천부적 재능에 어울렸습니다. But such was the style of the men of that time, and most pleasing to them it was that all things should be wrapped up in representative figures, and that these should be arranged in the form of history; and the more coherent the historical series, the better suited it was to their genius.

고대인들은 오늘날처럼 어떤 사실을 날 것으로, 있는 그대로 다루느라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깊은, 심오한 사고(思考, thoughts)에 힘썼고, 그 결과는 오늘 본문에서 보듯 아주 기름진 결과들을 가져왔습니다. For in those ancient times men were not so much inclined to memory-knowledges as at this day, but to profound thoughts, of which the offspring was such as has been described.

이것이 고대인들의 지혜였습니다. This was the wisdom of the ancients.

 

 

606. ‘홍수’, ‘방주’ 및 이런 이유로, 이들과 관련된 것들이 거듭남과, 거듭남에 앞서 선행하는 시험들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또한 거듭남과 시험을 홍수, 그 범람하는 물에 비유하지요. That the “flood,” the “ark,” and therefore the things described in connection with them signify regeneration, and also the temptations that precede regeneration, is in some degree known among the learned at this day, who also compare regeneration and temptations to the waters of a flood.

 

※ 여기서 말하는 ‘오늘날’은 1750년대 유럽을 말합니다.

 

 

607. 하지만 이 교회의 캐릭터에 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But the character of this church will be described hereafter.

여기서는 살짝, 간략히만 말씀드리면, 태고교회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천적(天的, celestial, heavenly)이었던 반면, 지금 보고 있는 이 교회는 영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That an idea of it may be presented here, it shall be briefly said that the most ancient church was celestial, as already shown, but this church became spiritual.

태고교회는 선과 진리에 관한 퍼셉션(perception)을 가졌었던 반면, 지금 이 고대교회는 퍼셉션이 아닌, 그 자리를 대신하여 다른 종류의 딕테이트(dictate, inner voice), 곧 양심(conscience)이라고 하는 것을 갖게 되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had a perception of good and truth; this, or the ancient church, had not perception, but in its place another kind of dictate, which may be called conscience.

 

[2] 그러나 아직 세상에 알려진 적이 없고, 또 아마 믿기도 어려운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은 내적 호흡(internal respiration)을 했다는 것입니다. 외적 호흡은 그저 암묵적이었고요. But what is as yet unknown in the world, and is perhaps difficult to believe, is that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had internal respiration, and only tacit external respiration.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많은 말을 하는 대신 천사들처럼 생각으로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안색의 무궁한 변화, 특히 입술 주변의 미세한 변화들을 가지고 어떤 정신적 이미지들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Thus they spoke not so much by words, as afterwards and as at this day, but by ideas, as angels do; and these they could express by innumerable changes of the looks and face, especially of the lips.

입술에는, 셀 수 없는 근섬유들이 시리즈로 있는데, 오늘날엔 이 근섬유들을 자유롭게 쓸 수가 없지만, 그 시절 사람들은 자유로웠습니다. 그들은 그 근섬유들을 가지고, 오늘날 사람들이 또렷한 음성으로 한 시간 동안이나 설명해야 할 어떤 아이디어를 일 분도 안 되어 보여주기도, 상징하기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일을 오늘날 우리처럼 단어나 단어의 이런저런 조합, 곧 문장으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충만하고 분명하게 확 이해시킬 수 있었습니다. In the lips there are countless series of muscular fibers which at this day are not set free, but being free with the men of that time, they could so present, signify, and represent ideas by them as to express in a minute’s time what at this day it would require an hour to say by articulate sounds and words, and they could do this more fully and clearly to the apprehension and understanding of those present than is possible by words, or series of words in combination.

이런 이야기는 아마도 믿기 참 어려우시겠지만, 사실입니다. This may perhaps seem incredible, but yet it is true.

또한 이 행성에 속하지 않은 다른 많은 존재가 있는데, 그들은 이런 비슷한 방식의 언어생활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주님의 자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cf. AC.6814, 7359-7360, 7745-7746, 8022-8026, 8247-8248, 10587-10588, 10708-10710) And there are many others, not of this earth, who have spoken and at this day speak in a similar manner; concerning whom,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3] 저로 하여금 이 내적 호흡이 과연 무엇과 같으며,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배울 수 있게 하셨습니다. It has been given me to know the nature of that internal respiration, and how in process of time it was changed.

그들 태고교회 사람들은 천사들, 천사들이 이런 식으로 호흡을 하는데요, 이렇게 천사들이 가진 것과 같은 호흡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사고 속 아주 깊은 데까지 들어갈 수 있었고, 일종의 퍼셉션 같은 것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것은 설명이 불가능한 것인데요, 설령 그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따라서 실제로는 아무도 그걸 믿지 않을 것입니다. As these most ancient people had a respiration such as the angels have, who breathe in a similar manner, they were in profound ideas of thought, and were able to have such perception as cannot be described; and even if it could be described such as it really was, it would not be believed, because it would not be comprehended.

그러나 그들의 후손으로 가면서 이 내적 호흡은 점차 감소, 고갈되어 갔습니다. 끔찍한 신념과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이 내적 호흡은 소름 끼치도록 추한 것 말고는 무슨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생존할 수가 없었고, 그렇게 그들 모두는 쓸어버림을 당했습니다. But in their posterity this internal respiration little by little came to an end; and with those who were possessed with dreadful persuasions and fantasies, it became such that they could no longer present any idea of thought except the most debased, the effect of which was that they could not survive, and therefore all became extinct.

 

 

608. 내적 호흡이 줄어들면서,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것과 거의 똑같은 외적 호흡이 점점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이 외적 호흡과 함께 온 것이 바로 말로 하는 스피치인데, 또렷이 발음되어 잘 들리는 스피치입니다. 생각을 구성하는 개별 아이디어들을 실어나르는 것이 바로 이 스피치, 입 구조, 구강 구조를 사용하는 스피치입니다. When internal respiration ceased, external respiration gradually succeeded, almost like that of the present day; and with external respiration a language of words, or of articulate sound into which the ideas of thought were determined.

이 과정에서 인간의 상태는 급격히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이 전에 가졌던 그런 식으로 사물을 지각할 수가 없었고, 이 퍼셉션을 대신해서, 양심이라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종류의 내적 음성(dictate)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이것, 곧 이 ‘내적 음성’이라는 것은 양심과 흡사하며, 퍼셉션과 양심 사이 거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이 양심과 친숙합니다. Thus the state of man was entirely changed, and became such that he could no longer have similar perception, but instead of perception another kind of dictate which may be called conscience, for it was like conscience, though a kind of intermediate between perception and the conscience known to some at this day.

생각을 구성하는 아이디어들이 이런 형태의 틀 안으로 부어지기 시작하자, 즉, 말로 표현, 발음되기 시작하자, 태고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속사람을 통한 가르침을 받는 대신, 오직 겉사람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And when such determination of the ideas of thought took place, that is to say, into spoken words, they could no longer be instructed, like the most ancient man, through the internal man, but through the external.

태고교회 계시들의 자리를 교리들이 계승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육체적 감각들을 가지고 붙들 수 있는 첫 번째가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육체적 감각들은 기억 속 구체적 이미지들로 이미지화 되어 가고, 다시 아이디어들, 생각을 구성하는 것들인데, 다시 이미지화되어 아이디어들이 됩니다. 바로 이 아이디어들이 가르침의 어떤 도로 내지는 틀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And therefore in place of the revelations of the most ancient church, doctrinal things succeeded, which could first be received by the external senses, and from them material ideas of the memory could be formed, and from these, ideas of thought, by which and according to which they were instructed.

※ 그러니까 가령, 청력에 이상이 있어 듣지 못하시는 분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수화를 하거나 글을 사용해서 해야 합니다. 이 경우, 많은 제약이 따르며, 온전한 내용 전달이 어렵습니다. 원래대로라면 100%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을 2, 30% 밖에는 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홍수 이후 세대인 현 인류는 이렇게 아주 투박하고 낮은 수준의, 원시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태고교회의 뒤를 이어 일어난 교회인 고대교회는 전혀 다른 종류의 지니어스(genius, 재능, 타고난 천성)를 갖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인류에게 이 새로운 지니어스 또는 상태를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인류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Hence it was that this church which followed possessed an entirely different genius from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if the Lord had not brought the human race into this genius, or into this state, no man could have been saved.

 

 

609. ‘노아’라 이름하는 교회 사람들의 상태 변화 역시 똑같이 태고교회 사람들의 상태 변화에서 왔기 때문에, 앞서 설명대로, 그들 역시 아무도 더 이상 태고 사람들이 누렸던 방식으로 무슨 가르침을 받거나 내면이 열리거나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내면이 닫히고, 그래서 더 이상 하늘과 교통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예전의 그런 건 다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As the state of the man of this church which is called “Noah” was altogether changed from that of the man of the most ancient church, he could no longer—as said before—be informed and enlightened in the same way as the most ancient man; for his internals were closed, so that he no longer had communication with heaven, except such as was unconscious.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제는 오감을 통한 외적 방식으로밖엔 무엇을 배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Nor, for the same reason, could he be instructed except as before said by the external way of sense or of the senses.

이런 이유로, 태고교회를 위해 만들었던 어떤 계시들과 함께, 신앙에 관한 가르침들이 이 세대의 사용을 위해 보호, 보전된 것은 바로 주님의 섭리입니다. On this account, of the Lord’s providence, doctrinal matters of faith, with some of the revelations to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preserved for the use of this posterity.

‘가인’이 바로 이런 가르침들을 맨 처음 수집, 멸망을 대비, 보전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죽임을 면케 하셨다 하신 이유입니다. (이에 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창4:15 관련 내용인 AC.392-396 참조) These doctrinal things were first collected by “Cain,” and were stored up that they might not be lost; and therefore it is said of Cain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 (concerning which see what was said at that place, Gen.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에녹’은 이런 가르침들을 일종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으로 줄인 사람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아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세대에게만 유용한 것이었으며, 이걸 가리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창5:24 및 AC.521 참조) These doctrinal matters were afterwards reduced into doctrine by “Enoch”; but because this doctrine was of use to no one at that time, but was for posterity, it is said that “God took him.” (See also Gen.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4)

 

지금 설명 중인 후손 또는 교회가 사용할 수 있도록 주님이 따로 보관하신 것이 바로 이들 신앙의 가르침입니다. 퍼셉션은 사라질 것이며, 그래서 이 신앙의 가르침들이 잘 견디고 보존, 후대에 전달되어야 할 것을 주님은 미리 내다보셨습니다. These doctrinal matters of faith are what were preserved by the Lord for the use of this posterity or church; for it was foreseen by the Lord that perception would be lost, and therefore it was provided that these doctrinal things should remain.

 

 

THE CONTENTS

 

 

599.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노아’라는 이름을 가졌던 교회의, 거듭나기 이전 상태입니다.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state of the church called “Noah,” before its regeneration.

 

 

9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These are the births of Noah; Noah was a man righteous and perfect in his generations: Noah walked with God. 10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And Noah begat three sons: Shem, Ham, and Japheth.

 

600. 그 교회의 사람들을 거듭날 수 있었던 사람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9절). 그런 가운데 그 교회에서 세 종류의 교리(doctrine), 신학(theology)이 일어났는데, 그들이 바로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10절). The man of that church is described, that he was such that he could be regenerated (verse 9); but that there arose thence three kinds of doctrine, which are “Shem, Ham, and Japheth” (verse 10).

 

 

11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And the earth was corrupt before God; and the earth was filled with violence. 12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And God saw the earth, and behold it was corrupt, for all flesh had corrupted its way upon the earth. 13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And God said unto Noah, The end of all flesh is come before me, for the earth is filled with violence from their faces, and behold I will destroy them with the earth.

 

601. 태고교회의 남은 후손들은 그들의 끔찍한 종교적 신념(persuasion, 설득, 기만)과 더러운 갈망(yearnings, 욕망) 때문에 아무도 거듭날 수 없었으며 (11-12절), 그들은 결국 이런 걸로 자신을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13절). That the man who was left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could not be regenerated, on account of his direful persuasions and foul yearnings (verses 11–12); whereby he would utterly destroy himself (verse 13).

 

 

14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Make thee an ark of gopher woods; mansions shalt thou make the ark, and shalt pitch it within and without with pitch. 15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And thus shalt thou make it: three hundred cubits the length of the ark, fifty cubits its breadth, and thirty cubits its height. 16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A window shalt thou make to the ark, and to a cubit shalt thou finish it from above; and the door of the ark shalt thou set in the side thereof; with lowest, second, and third stories shalt thou make it.

 

602. 그러나 ‘방주’로 묘사하고 있는 ‘노아’ 교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14절). 그들에게 남아 있는 리메인스를 여러 수치(measures, 측량)로 (15절), 그들의 언더스탠딩(understanding, 이해력)의 여러 특징들은 ‘창’, ‘문’, ‘칸’으로 각각 묘사하고 있습니다 (16절). But the man of the church called “Noah,” who is described by the “ark,” was not so (verse 14); and the remains with him are described by the measures (verse 15);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by the “window,” “door,” and “mansions.” (verse 16)

 

 

17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And I, behold I do bring the flood of waters upon the earth, to destroy all flesh wherein is the breath of lives from under the heavens; everything that is in the earth shall expire.

 

603. 그들은 보호를 받게 되지만 나머지 다른 모든 사람은 악과 거짓의 범람, 홍수로 사라질 것입니다 (17절). That he would be preserved when the rest would perish by an inundation of evil and falsity (verse 17).

 

 

18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And I will set up my covenant with thee; and thou shalt enter into the ark, thou and thy sons, and thy wife, and thy sons’ wives with thee. 19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And of every living thing of all flesh, pairs of all shalt thou make to enter into the ark, to keep them alive with thee; they shall be male and female. 20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Of the fowl after its kind, and of the beast after its kind, of every creeping thing of the ground after its kind, pairs of all shall enter unto thee, to keep them alive. 21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And take thou unto thee of all food that is eaten, and gather it to thee, and it shall be for food for thee and for them. 22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And Noah did according to all that God commanded him; so did he.

 

604. 그들에게 있던 진리와 선이 건짐을 받으며 (18절), 언더스탠딩에 속한 모든 것, 그리고 의지에 속한 모든 것도 건짐을 받을 텐데, 그 방법은 바로 거듭남입니다 (19-20절). 그들은 거듭남을 위한 준비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며 (21절), 그렇게 되었습니다 (22절). And that the truths and goods which were with him would be saved (verse 18); and thus whatever was of the understanding and whatever was of the will, by regeneration (verses 19–20); for receiving which he was to be prepared (verse 21); and that it was so done (verse 22).

2021-09-05(D1)-주일예배(2184, 아케이나말씀리딩.창6,9-22), '노아, 셈, 함, 야벳, 방주, 끝 날, 홍수, 멸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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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vhAFdDnmOls

 

한결같은교회.주일예배(9/5, 창립 8주년, 아케이나말씀리딩.창6:9-22), '노아, 셈, 함, 야벳, 방주, 끝

#스베덴보리, #천계비의, #창세기, #아케이나말씀리딩 ATWR : Arcana The Word Reading 아케이나 말씀 리딩 원고 : https://bygracetistory.tistory.com/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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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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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10.08 06: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bygracetistory 2021.10.08 08: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 예를 들면, 603, 604 같은 번호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네,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군요 ^^

    이 글 번호들은, 스베덴보리(Swedenborg, 1688-1772, 스웨덴)의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인 Arcana Coelestia 에서, 저자가 자기 글 하나 하나에 붙인 번호입니다. 총 8권으로 된 이 주석은 그 마지막 글 번호가 10837번에 이를 만큼 장대해서, 저자조차 무슨 필요에 의해 채택한 것 같은데...

    사실, 대략 보면, 서양 고대인들의 거의 모든 기록들에도 이런 식의 글 번호가 사용되고 있음을 볼 때, 스베덴보리만의 무슨 독창적인 건 아니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