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창4:20)

 

 

412. ‘아다’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신앙의 천적,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상징합니다. By “Adah” is signified, as before, the mother of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야발,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 치는 자의 조상’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 관한 교리와 그 교리에서 나오는 천적 선을 상징합니다. by “Jabal,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is signified doctrine concerning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goods thence derived, which are celestial.

 

 

413. ‘아다’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상징한다는 것은 그녀의 첫아들 야발을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 치는 자의 조상’이라 하는 데서 분명합니다. 여기 가축은 천적인데, 가축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여기서 나오는 선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That by “Adah” is signified the mother of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is evident from her firstborn Jabal being called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which are celestial because they signify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goods thence derived.

 

 

414. ‘장막에 거주하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장막’이 상징하는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o “dwell in tents” signifies what is holy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ents” in the Word.

 

시편에 보면 As in David: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Jehovah, who shall abide in thy tent? Who shall dwell in the mountain of thy holiness? He that walketh upright, and worketh righteousness, and speaketh the truth in his heart, (시15:1-2)

 

이 말씀에서, ‘장막에 거주하는 것’ 혹은 ‘성산에 사는 것’을 사랑의 거룩한 것들, 즉,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in which passage, what it is to “dwell in the tent” or “in the mountain of holiness” is described by holy things of love, namely, the walking uprightly, and working righteousness.

 

계속해서 Again: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Their line is gone out through all the earth, and their discourse to the end of the world. In them hath he set a tent for the sun, (시19:4)

 

여기 ‘’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where the “sun” denotes love.

 

다시 Again: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I will abide in thy tent to eternities, I will trust in the covert of thy wings, (시61:4)

 

여기 ‘장막’은 천적인 것을, ‘날개 아래’는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where the “tent” denotes what is celestial, and the “covert of wings” what is spiritual thence derived.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By mercy the throne has been made firm, and one hath sat upon it in truth, in the tent of David, judging and seeking judgment, and hasting righteousness, (사16:5)

 

여기 또한 ‘장막’은 사랑의 거룩한 것을 가리킵니다. ‘정의로 판결함’, ‘공의를 신속히 행함’이라는 표현을 보면 아실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where also the “tent” denotes what is holy of love, as may be seen by the mention of “judging judgment,” and “hasting righteousness.

 

다시 Again: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Look upon Zion, the city of our appointed feast; thine eyes shall see Jerusalem a quiet habitation, a tent that shall not be moved away, (사33:20)

 

하늘의 예루살렘을 말씀하시면서 speaking of the heavenly Jerusalem.

 

[2]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야곱 장막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할 것이고 그 거처들에 사랑을 베풀 것이라 성읍은 그 폐허가 된 언덕 위에 건축될 것이요 Thus said Jehovah, Behold, I bring again the captivity of Jacob’s tents, and will have mercy on his dwelling places, and the city shall be builded upon her own heap; (렘30:18)

 

장막의 포로’는 천적인 것, 혹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의 황폐함을 상징합니다. the “captivity of tents” signifies the vastation of what is celestial, or of the holy things of love.

 

아모스입니다. In Amos: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In that day will I raise up the tabernacle of David which is fallen; and will fence up the breaches thereof, and I will raise up its ruins, and I will build it as in the days of eternity, (암9:11)

 

여기 ‘장막’(tabernacle)은 마찬가지로 천적인 것과 그것의 거룩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where the “tabernacle” in like manner denotes what is celestial and the holy things thereof.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The whole land is laid waste, suddenly are my tents laid waste, and my curtains in a moment. (렘4:20)

 

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내 장막을 세울 자와 내 휘장을 칠 자가 다시 없도다 My tent is laid waste, and all my cords are plucked out, my sons are gone forth from me, and they are not; there is none to stretch my tent anymore, and to set up my curtains, (렘10:20)

 

여기 ‘장막’은 천적인 것들을, 그리고 ‘휘장’과 ‘’은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where the “tent” 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 “curtains” and “cords” spiritual things thence derived.

 

다시 Again:

 

너희는 그들의 장막과 양 떼를 빼앗으며 휘장과 모든 기구와 낙타를 빼앗아다가 소유로 삼고 Their tents and their flocks shall they take; they shall carry off for themselves their curtains, and all their vessels, and their camels, (렘49:29)

 

게달(아라비아)과 동방 자손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들은 천적이거나 거룩한 것을 소유한 사람들을 표현합니다. speaking of Arabia and the sons of the east, by whom are represented those who possess what is celestial or holy.

 

다시 Again:

 

딸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Into the tent of the daughter of Zion the Lord hath poured out his wrath like fire, (애2:4)

 

신앙의 천적이거나 거룩한 것들의 황폐함에 관한 말씀입니다. speaking of the vastation of the celestial or holy things of faith.

 

[3] 말씀에서 이 ‘장막’이라는 용어를 채택, 천적인 것과 사랑의 거룩한 것들을 표현하는 이유는, 고대에는 예배의 거룩한 의식들을 그들의 장막에서 행했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he term “tent” is employed in the Word to represent the celestial and holy things of love is that in ancient times they performed the holy rites of worship in their tents.

 

그러나 그들이 신성모독의 예배를 장막에서 드림으로써 장막을 모독하기 시작하더니 성막이 세워졌고, 나중에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이런 이유로, 장막은 먼저 성막이, 그 다음엔 성전이 가리키는 모든 것을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But when they began to profane the tents by profane kinds of worship, the tabernacle was built, and afterwards the temple, and therefore tents represented all that was subsequently denoted first by the tabernacle, and afterwards by the temple.

 

같은 이유로, 거룩한 사람을 가리켜 주님의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이라 합니다. For the same reason a holy man is called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of the Lord.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이 같은 걸 상징한다는 것은, 시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That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have the same signification, is evident in David: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One thing have I asked of Jehovah, that will I seek after, that I may remain in the house of Jehovah all the days of my life, to behold Jehovah in sweetness, and to visit early in his temple; for in the day of evil he shall hide me in his tabernacle; in the secret of his tent shall he hide me; he shall set me up upon a rock. And now shall my head be lifted up against mine enemies round about me, and I will offer in his tent sacrifices of shouting. (시27:4-6)

 

[4] 가장 높은 뜻으로는, 주님은 그의 인성과 관련하여,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천인(天人, celestial man)을 그렇게 부르며, 그래서 또한 모든 천적이며 거룩한 것들을 그렇게 부릅니다.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as to his human essence is the “tent,” the “tabernacle,” and the “temple”; hence every celestial man is so called, and also everything celestial and holy.

 

태고 교회는 주님을 자기 뒤에 일어난 교회들보다 훨씬 더 사랑했으며, 그때는 혼자, 즉, 가족 단위로 살면서 자신의 장막에서 참으로 거룩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장막은 성전보다 훨씬 더 거룩하게 여겨졌습니다. 성전은 나중에 신성모독 되었습니다. Now as the most ancient church was better beloved of the Lord than the churches that followed it, and as men at that time lived alone, that is, in their own families, and celebrated so holy a worship in their tents, therefore tents were accounted more holy than the temple, which was profaned.

 

장막 시절의 모든 것을 기념하고, 대신하는 절기가 바로 초막절입니다. 토지 소산을 거둘 때에 그들은 그 절기 동안, 태곳적 사람들처럼 장막에서 지냈습니다. (레23:39-44; 신16:13; 호12:9) In remembrance thereof the feast of tabernacles was instituted, when they gathered in the produce of the earth, during which, like the most ancient people, they dwelt in tents. (Lev. 23:39–44; Deut. 16:13; Hosea 12:9)

 

39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 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40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너희는 매년 이레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일곱째 달에 이를 지킬지니라 42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43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44모세는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 (레23:39-44)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신16:13)

 

네가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기를 명절날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호12:9)

 

 

415. ‘가축 치는 자의 조상’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서 나오는 선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위, 이 장 2절에서 보여드린, ‘양 치는 자’는 이웃 사랑의 선을 상징한다는 데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That by the “father of cattle” is signified the good that is derived from the holy things of love, is evident from what was shown above, at verse 2 of this chapter, where it was shown that a “shepherd of the flock” signifies the good of charity.

 

그런데 여기 보면, ‘양 치는 자’ 대신 ‘조상’을, ‘양 떼’ 대신 ‘가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Here however the term “father” is employed instead of “shepherd,” and “cattle” instead of “flock”;

 

그리고 야발을 가리켜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라 할 때 사용된 단어 ‘가축’이 ‘장막’ 바로 뒤에 나옵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이것은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상징한다는 것과, 가축의 주거지나 우리, 혹은 장막과 가축의 우리에 거주하는 자들의 조상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and the word “cattle,” of which Jabal is said to be the “father,” follows immediately after “tent,” whence it is evident that it signifies the good that comes from the holy of love, and that there is meant a habitation or fold for cattle, or the father of them that dwell in tents and in folds for cattle.

 

그리고 이런 표현들이 사랑의 천적인 것들에서 나오는 선들을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에 나오는 다양한 본문들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And that these expressions signify goods from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is evident from various passages in the Word.

 

예레미야입니다. As in Jeremiah: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 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I will gather the remnants of my flock out of all lands whither I have scattered them, and I will bring them again to their folds, that they may be fruitful and multiply. (렘23:3)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I will feed them in a good pasture, and upon the mountains of the height of Israel shall their fold be; there shall they lie down in a good fold, and in a fat pasture shall they feed upon the mountains of Israel, (겔34:14)

 

여기 ‘우리’와 ‘’은 ‘살지다’로 서술된 사랑의 선들을 가리킵니다. where “folds” and “pastures” denote the goods of love, of which “fatness” is predicated.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He shall give the rain of thy seed wherewith thou shalt sow the ground; and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shall be fat and full of oil; in that day shall he feed thy cattle in a broad meadow, (사30:23)

 

여기 ‘먹을 것’은 천적인 것을, 가축이 그 가운데서 먹게 될 ‘풍성함’은 천적인 것에서 나오는 선들을 상징합니다. where by “bread” is signified what is celestial, and by the “fat” whereon the cattle should feed, the goods thence derived.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11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12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Jehovah hath redeemed Jacob, and they shall come and sing in the height of Zion, and shall flow together to the good of Jehovah, for the wheat, and for the new wine, and for the oil, and for the sons of the flock, and of the herd; and their soul shall be as a watered garden, (렘31:11-12)

 

여기 여호와의 거룩하심이 ‘곡식’과 ‘기름’으로,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선들이 ‘새 포도주’와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 혹은 ‘가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where the holy of Jehovah is described by “wheat” and “oil,” and the goods derived from it by “new wine” and the “sons of the flock and of the herd,” or of “cattle.

 

다시 Again:

 

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The shepherds and the flocks of their cattle shall come unto the daughter of Zion; they shall pitch their tents toward her round about; they shall feed everyone his own space. (렘6:3)

 

시온의 딸’은 천적 교회를 가리키는데, ‘장막’과 ‘양 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The “daughter of Zion” denotes the celestial church, of which “tents” and “flocks of cattle” are predicated.

 

 

416.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상징하고 있음은 야발이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최초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둘째였던 아벨, 그 역시 ‘양 치는 자’였던 아벨의 경우와 같다 할 수 있으며, 야발은 가인에서 시작, 일곱 번째였기 때문입니다. That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 are signifi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Jabal was not the first of those who “dwelt in tents and in folds of cattle,” for it is said likewise of Abel, the second son of Adam and Eve, that he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Jabal was the seventh in the order of descent from Cain.

2021-06-11(D6)-매일예배(창4,20, AC.412-416), '야발,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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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XbAnbGnK8Q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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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19)

 

 

408. 하나의 교회가 더 이상 그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지면, 전과 다르게 새로움이 시작됩니다. 즉, 새 빛이 발(發)하는데요, 이걸 말씀에서는 ‘아침’이라고 합니다. When a church has been so vastated that there is no longer any faith, then and not before, it begins anew, that is, new light shines forth,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morning.

 

이 새 빛 혹은 ‘아침’이 왜 교회가 황폐해질 때까지는 발하지 않는지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동안 신앙과 이웃 사랑의 일들은 모독의 일들과 뒤엉킨 상태로 지내왔습니다. The reason why the new light or “morning” does not shine forth until the church is vastated, is that the things of faith and of charity have been commingled with things profane;

 

그리고 이 일들이 여전히 이런 상태에 있는 한, 무슨 빛이나 이웃 사랑이 시작되기란 불가능합니다. ‘잡초들’이 모든 ‘좋은 씨’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and so long as they remain in this state it is impossible for anything of light or charity to be insinuated, since the “tares” destroy all the “good seed.

 

그러나 신앙이 전혀 없으면, 신앙은 더 이상 모독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선포된 것을 더 이상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But when there is no faith, faith can no longer be profaned, because men no longer believe what is declared unto them;

 

그리고 시인도, 믿지도 않고, 대신 알기만 하는 사람들은 위에서 관찰한 것처럼, 모독을 할 수가 없습니다. and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but only know, cannot profane, as was observed above.

 

이것이 바로 오늘날 유대인들의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더불어 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시인하는 주님이 자기들이 그토록 기다려 왔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이 사실을 모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시인도, 믿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This is the case with the Jews at the present day, who in consequence of living among Christians must be aware that the Lord is acknowledged by Christians to be the messiah whom they themselves have expected, and still continue to expect, but yet they cannot profane this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it.

 

그리고 주님에 대하여 들은 모하메드인들과 이방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And it is the same with the Mohammedans and gentiles who have heard about the Lord.

 

이것이 바로 유대 교회가 아무것도 시인도, 믿지도 않을 때까지는 주님이 세상에 오실 수 없으셨던 이유였습니다. It was for this reason that the Lord did not come into the world until the Jewish church acknowledged and believed nothing.

 

 

409. ‘가인’이라 하는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이단 역시 세월이 흘러 황폐해졌는데요, 사랑을 시인했지만, 신앙을 머리 삼고, 사랑보다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이 가인이라는 이단에서 유래한 이단들은 점점 더 곁길로 빠지더니,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에 이르러서는 아예 신앙조차 부인했습니다. The case was the same with the heresy called “Cain,” which in process of time was vastated, for although it acknowledged love, yet it made faith the chief and set it before love, and the heresies derived from this one gradually wandered from it, and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altogether denied even faith.

 

이 지경이 되자 새 빛 혹은 아침이 빛을 발하며, 새 교회가 나왔는데 여기 본문에 보면, 그 이름이 ‘아다와 씰라’이며, 부르기를, ‘라멕의 아내들’이라 하고 있습니다. When this time arrived, a new light, or morning, shone forth, and a new church was made which is here named “Adah and Zillah,” who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그들을 일컬어 라멕의 아내들이라 하고 있습니다. 라멕은 아무 신앙도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의 내적, 외적 교회의 경우와 같은데요, 유대인들 역시 아무 신앙도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 두 교회를, 말씀에 보면 ‘아내들’, 곧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로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레아는 외적 교회를, 라헬은 내적 교회를 표현합니다. They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although he possessed no faith, just as the internal and external church of the Jews, who also had no faith, are also in the Word called “wives,” being represented by Leah and Rachel, the two wives of Jacob—Leah representing the external church and Rachel the internal.

 

이 교회들은 둘로 보이지만 하나입니다. These churches, although they appear like two, are yet only one;

 

내적인 것과 분리된, 외적인 것 혹은 대신하는 것은 단지 무슨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거나 죽은 것인 반면, 외적인 것과 함께 하는 내적인 것은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며, 여기 아다와 씰라가 그런 것처럼 심지어 하나 된 교회, 같은 교회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for the external or representative, separate from the internal, is but as something idolatrous, or dead, whereas the internal together with the external constitute a church, and even one and the same church, as Adah and Zillah do here.

 

하지만 야곱과 그의 후손은 라멕처럼 아무 신앙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그들 가운데 있을 수가 없어 대신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이들은 부정(不貞, infidelity)한 대신 무지하게 살았습니다. As however Jacob and his posterity, like Lamech, had no faith, the church could not remain with them, but was transferred to the gentiles, who lived not in infidelity but in ignorance.

 

교회가 황폐해졌을 때, 그 가운데 진리를 가진 사람들이 남아 있을 경우는,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극히 드뭅니다. 교회는 그 경우, 진리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로 이동하는데요, 오히려 이 사람들이 저 사람들보다 더 쉽게 신앙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The church rarely, if ever, remains with those who when vastated have truths among them [apud se] but is transferred to those who know nothing at all of truths, for these embrace the faith much more easily than the former.

 

 

410. 황폐함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Vastation is of two kinds;

 

먼저, 알면서 알고 싶어 하지 않거나, 보면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과거 유대인들과 오늘날 기독교인들처럼 말입니다. first, of those who know and do not wish to know, or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like the Jews of old, and the Christians of the present day;

 

두 번째는, 무지의 결과인데요, 뭘 알지도 볼 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고대와 현대 이방인들처럼 말입니다. and secondly, of those who, in consequence of their ignorance, neither know nor see anything, like both the ancient and modern gentiles.

 

황폐함의 마지막 때가, 알면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즉, 보면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를 때, 하나의 교회가 새롭게 일어나는데요, 이들이 아니고, 이들이 이방인이라 부르는 사람들한테 일어납니다. When the last time of vastation comes upon those who know and do not desire to know, that is,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then a church arises anew, not among them, but with those whom they call gentiles.

 

이런 일이 홍수 전 태고 교회에 일어났고, 또 홍수 후, 고대 교회, 그리고 유대 교회에도 일어났습니다. This occurred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was before the flood, with the ancient church that was after that event, and also with the Jewish church.

 

새 빛이 그때 빛을 발하고, 전에는 아닌 이유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그때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들이 진리임을 시인도, 믿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new light shines forth then and not before is, as has been said, that then they can no longer profane the things revealed,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that they are true.

 

 

411.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반드시 먼저 마지막 황폐함의 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님은 예언서에서 자주 선언하셨는데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해서는, ‘황폐함’, 혹은 ‘황폐하게 함’으로, That the last time of vastation must exist before a new church can arise, is frequently declared by the Lord in the prophets, and is there called “vastation” or “laying waste,” in reference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그리고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해서는, ‘황무함’으로 일컬으십니다. and “desolation,” in relation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또는 ‘종말’, ‘끊음’으로도 말씀하십니다. (※ 다음 본문들 참조 : 사6:9, 11-12, 23:8-끝절, 24장, 42:15-18, 렘25, 단8, 9:24-끝절, 습1, 신32, 계15, 16 및 이어지는 장들) It is also spoken of as “consummation” and “cutting off.” (See Isa. 6:9, 11–12; 23:8 to the end; 24; 42:15–18; Jer. 25; Dan. 8; 9:24 to the end; Zeph. 1; Deut. 32; Rev. 15; 16; and following chapters.)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1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6:9, 11-12)

 

8면류관을 씌우던 자요 그 상인들은 고관들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었던 두로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 9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딸 다시스여 나일 같이 너희 땅에 넘칠지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11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며 여호와께서 가나안에 대하여 명령을 내려 그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게 하시고 12이르시되 너 학대 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13갈대아 사람의 땅을 보라 그 백성이 없어졌나니 곧 앗수르 사람이 그 곳을 들짐승이 사는 곳이 되게 하였으되 그들이 망대를 세우고 궁전을 헐어 황무하게 하였느니라 14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으라 너희의 견고한 성이 파괴되었느니라 15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16잊어버린 바 되었던 너 음녀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17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 18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 잘 입을 옷감이 되리라 (사23:8-18)

 

※ 이하 참조 본문은 성경을 직접 참조하세요.

2021-06-09(D4)-매일예배(창4,19, AC.408-411),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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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3hpseoCgdV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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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19)

 

 

405. 가인으로부터 여섯 번째 순서인 ‘라멕’은 황폐함을 상징합니다. 더 이상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게 된 결과입니다. By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from Cain, is signified vastation, in consequence of there being no longer any faith;

 

그의 ‘두 아내’는 일종의 새로운 교회의 도래를 상징하며, by his “two wives” is signified the rise of a new church;

 

아다’는 그 교회의 천적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by “Adah,” the mother of its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그리고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각각 상징합니다. and by “Zillah,” the mother of its natural things.

 

 

406. ‘라멕’은 황폐함, 혹은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음을 상징합니다. 이 사실은 이어지는 23절, 24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거기에서,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말하고 있습니다.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or that there was no faith,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verses (23–24), in which it is said that he “slew a man to his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his hurt”;

 

거기서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 혹은 ‘소년’은 이웃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for there, by a “man” is meant faith, and by a “little one” or “little child,” charity.

 

 

407. 보통 한 교회의 상태는 그래서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The state of a church in general is thus circumstanced.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회는 참 신앙으로부터 멀어지다가 결국 신앙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데, 그때를 일컬어 ‘황폐해졌다’고 합니다. In process of time it departs from the true faith until at last it comes to be entirely destitute of faith, when it is said to be “vastated.

 

이런 일이 태고 교회의 경우, 가인파(가인派, Cainites)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또한 홍수 후 고대 교회의 경우와, 뿐만 아니라, 유대 교회의 경우에도 있었습니다. This was the case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among those who were called Cainites, and also with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s well as with the Jewish church.

 

주의 강림(降臨, the Lord’s advent)의 때에, 이런 종말이 다음과 같은 황폐한 상태 가운데 있었는데요,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시기로 예정되어 있던 주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몰랐으며,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 신앙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this last was in such a state of vastation that they knew nothing about the Lord, that he was to come into the world for their salvation, and they knew still less about faith in him.

 

초대 기독교회, 혹은 주님 강림 후 존재했던 교회의 경우 또한 그랬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1750년대 즈음 유럽) 교회의 경우 역시 그 안에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철저하게 황폐해진 상황입니다. Such was also the case with the primitive Christian church, or that which existed after the Lord’s advent, and which at this day is so completely vastated that there is no faith remaining in it.

 

그러나 교회의 극소수 핵들은 늘 남아 있는데, 이것은 신앙에 관해서 황폐해진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Yet there always remains some nucleus of a church, which those who are vastated as to faith do not acknowledge;

 

태고 교회의 경우가 그랬는데, 태고 교회의 남은 자들은 홍수 때까지 있었고, 홍수 후에도 계속 있었습니다. and thus it was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of which a remnant remained until the time of the flood, and continued after that event.

 

이들 태고 교회 내 남은 자들을 이름하여 ‘노아’라 하는 것입니다. This remnant of the church is called “Noah.

2021-06-08(D3)-매일예배(창4,19, AC.405-407), '라멕, 황폐함(vastation)'.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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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MsQb5UrG2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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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18)

 

 

404. 이 이름들은 모두 ‘가인’이라 하는 첫 이름에서 유래된 이단들을 상징합니다. All these names signify heresies derived from the first, which was called “Cain”;

 

이들에 관해서는 이름들밖에는 현존하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들에 관한 무슨 언급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but as there is nothing extant respecting them, except the names, it is unnecessary to say anything about them.

 

이 이름들의 기원들로부터 뭔가 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Something might be gathered from the derivations of the names;

 

예를 들면, ‘이랏’은 ‘성의 후손’이라는 것, 그렇다면 ‘에녹’이라는 이단에서 비롯되었나? 뭐 그런 것입니다. for example, “Irad” means that he “descends from a city,” thus from the heresy called “Enoch,” and so on.

2021-06-07(D2)-매일예배(창4,18, AC.404),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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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Ve6AS-9_q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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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창4:17)

 

 

[2]성읍’, ‘궁전’, ‘’, ‘성곽’, ‘성곽 기초석’, ‘성벽’, ‘’, ‘빗장’ 및 그 가운데 ‘성전, 성소’ 또한 천적, 영적 그 자체를 묘사합니다. The celestial and spiritual itself is also described by “cities,” “palaces,” “houses,” “walls,” “foundations of walls,” “ramparts,” “gates,” “bars,” and the “temple” in the midst;

 

에스겔 48장에서 as in Ezekiel 48;

 

1모든 지파의 이름은 이와 같으니라 북쪽 끝에서부터 헤들론 길을 거쳐 하맛 어귀를 지나서 다메섹 경계선에 있는 하살에논까지 곧 북쪽으로 하맛 경계선에 미치는 땅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단의 몫이요 2단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아셀의 몫이요 3아셀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납달리의 몫이요 4납달리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므낫세의 몫이요 5므낫세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에브라임의 몫이요 6에브라임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르우벤의 몫이요 7르우벤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유다의 몫이요 8유다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너희가 예물로 드릴 땅이라 너비는 이만 오천 척이요 길이는 다른 몫의 동쪽에서 서쪽까지와 같고 성소는 그 중앙에 있을지니 9곧 너희가 여호와께 드려 예물로 삼을 땅의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만 척이라 10이 드리는 거룩한 땅은 제사장에게 돌릴지니 북쪽으로 길이가 이만 오천 척이요 서쪽으로 너비는 만 척이요 동쪽으로 너비가 만 척이요 남쪽으로 길이가 이만 오천 척이라 그 중앙에 여호와의 성소가 있게 하고 11이 땅을 사독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구별한 제사장에게 돌릴지어다 그들은 직분을 지키고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될 때에 레위 사람이 그릇된 것처럼 그릇되지 아니하였느니라 12땅의 예물 중에서 그들이 예물을 받을지니 레위인의 접경지에 관한 가장 거룩한 예물이니라 13제사장의 경계선을 따라 레위 사람의 몫을 주되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만 척으로 할지니 이 구역의 길이가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가 각기 만 척이라 14그들이 그 땅을 팔지도 못하며 바꾸지도 못하며 그 땅의 처음 익은 열매를 남에게 주지도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한 것임이라 15이 이만 오천 척 다음으로 너비 오천 척은 속된 땅으로 구분하여 성읍을 세우며 거주하는 곳과 전원을 삼되 성읍이 그 중앙에 있게 할지니 16그 크기는 북쪽도 사천오백 척이요 남쪽도 사천오백 척이요 동쪽도 사천오백 척이요 서쪽도 사천오백 척이며 17그 성읍의 들은 북쪽으로 이백오십 척이요 남쪽으로 이백오십 척이요 동쪽으로 이백오십 척이요 서쪽으로 이백오십 척이며 18예물을 삼아 거룩히 구별할 땅과 연접하여 남아 있는 땅의 길이는 동쪽으로 만 척이요 서쪽으로 만 척이라 곧 예물을 삼아 거룩하게 구별할 땅과 연접하였으며 그 땅의 소산을 성읍에서 일하는 자의 양식을 삼을지라 19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그 성읍에서 일하는 자는 그 땅을 경작할지니라 20그런즉 예물로 드리는 땅의 합계는 길이도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도 이만 오천 척이라 너희가 거룩히 구별하여 드릴 땅은 성읍의 기지와 합하여 네모 반듯할 것이니라 21거룩하게 구별할 땅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에 남은 땅은 군주에게 돌릴지니 곧 거룩하게 구별할 땅의 동쪽을 향한 그 경계선 앞 이만 오천 척과 서쪽을 향한 그 경계선 앞 이만 오천 척이라 다른 몫들과 연접한 땅이니 이것을 군주에게 돌릴 것이며 거룩하게 구별할 땅과 성전의 성소가 그 중앙에 있으리라 22그런즉 군주에게 돌려 그에게 속할 땅은 레위 사람의 기업 좌우편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이며 유다 지경과 베냐민 지경 사이에 있을지니라 23그 나머지 모든 지파는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베냐민의 몫이요 24베냐민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시므온의 몫이요 25시므온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잇사갈의 몫이요 26잇사갈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스불론의 몫이요 27스불론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갓의 몫이며 28갓 경계선 다음으로 남쪽 경계선은 다말에서부터 므리바가데스 샘에 이르고 애굽 시내를 따라 대해에 이르나니 29이것은 너희가 제비 뽑아 이스라엘 지파에게 나누어 주어 기업이 되게 할 땅이요 또 이것들은 그들의 몫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0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쪽의 너비가 사천오백 척이라 31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쪽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32동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 33남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 34서쪽도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 35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겔48)

 

계시록 21장 15절 이하 끝 절까지, 그리고 거기 2절과 10절, ‘거룩한 예루살렘’이라 하는 데 in Revelation 21:15 to the end, where it is also called the holy Jerusalem, verses 2, 10;

 

15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16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17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18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21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6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7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계21:15-27)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10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계21:2, 10)

 

그리고 예레미야 31장 38절에서 and in Jeremiah 31:38.

 

보라, 날이 이르리니 이 성은 하나넬 망대로부터 모퉁이에 이르기까지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38)

 

다윗의 책에서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라 부르고 있습니다. In David it is called “the city of God, the holy place of the tabernacles of the most high; (시46:4)

 

에스겔에서, ‘여호와 삼마’로, in Ezekiel, “the city, Jehovah there, (겔48:35)

 

그리고 이사야에서, 기록되기를 and of which it is written in Isaiah:

 

10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불쌍히 여겼은즉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들의 왕들이 너를 섬길 것이며 14너를 괴롭히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에 엎드려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 The sons of the stranger shall build thy walls, all they that despised thee shall bow themselves down at the soles of thy feet, and they shall call thee the city of Jehovah, the Zion of the holy one of Israel. (사60:10, 14)

 

스가랴에서 In Zechariah: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Jerusalem shall be called the city of truth; and the mountain of Zion, the mountain of holiness, (슥8:3)

 

여기 ‘진리의 성읍’, 혹은 ‘예루살렘’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where the “city of truth,” or “Jerusalem,” signifies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그리고 ‘성산’(聖山, mountain of holiness), 혹은 ‘만군의 여호와의 산’(of Z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and the “mountain of holiness,” or “of Zion,”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3] 신앙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성읍(a city)을 가지고 표현한 것처럼, 모든 교리 관련 일들 또한 그렇게 유다 및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가지고 가리키고 있는데요, 이 성읍들 이름 하나하나가 다 나름의 어떤 교리적인 상징들을 갖고 있지만, 속 뜻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그것을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As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are represented by a city, so also are all doctrinal things signified by the cities of Judah and of Israel, each of which when named has its own specific signification of something doctrinal, but what that is no one can know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성읍’을 가지고 교리와 관련된 것들을 상징하는 것처럼, 이단들 역시 그렇게 상징하는데요, 이 경우, 모든 특정 성읍마다 그 이름에 무슨 특별한 이단적인 견해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As doctrinal things are signified by “cities,” so also are heresies, and in this case every particular city, according to its name, signifies some particular heretical opinion.

 

이제 아래 이어지는 말씀들을 통해 이런 사실들을 보여만 줄 건데요, 여기 보면, 일반적으로 ‘성읍’이라는 것을 통해 어떤 교리적인 것, 혹은 이단적인 것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At present we shall only show from the following passages of the Word, that in general a “city” signifies something doctrinal, or else heretical.

 

[4] 이사야에 보면, Thus we read in Isaiah: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멸망의 성읍이라 칭하리라 In that day there shall be five cities in the land of Egypt speaking with the lip of Canaan, and swearing to Jehovah Zebaoth; one shall be called the city Heres, (사19:18)

 

여기서 다루어진 주제는 주님 오실 때, 영적인 일들과 천적인 일들에 관한 기억-지식인데요, (이 내용이 주님의 오심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은, 이 이사야 19장 1절에,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where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memory-knowledge of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비전, 곧 환상의 골짜기를 다룬 말씀에서도 다시 반복되며, So again, when treating of the valley of vision, that is, of fantasy:

 

소란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 Thou art full of tumults, a tumultuous city, an exulting city. (사22:2)

 

예레미야에서는, ‘남쪽에 있는’, 곧 진리의 빛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그리고 그것을 끝내시면서 In Jeremiah, speaking of those who are “in the south,” that is, in the light of truth, and who extinguish it:

 

네겝의 성읍들이 봉쇄되어 열 자가 없고 유다가 다 잡혀가되 온전히 잡혀가도다 The cities of the south have been shut up, and none shall open them. (렘13:19)

 

8여호와께서 딸 시온의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무너뜨리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벽과 성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그들이 함께 쇠하였도다 9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부서져 파괴되고 왕과 지도자들이 율법 없는 이방인들 가운데에 있으며 그 성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Jehovah hath purposed to destroy the wall of the daughter of Zion; therefore he maketh the rampart and the wall to lament; they languished together. Her gates are sunk into the ground; he hath destroyed and broken her bars, (애2:8-9)

 

여기서는 누구라도 ‘성벽’, ‘성곽’, ‘성문’, ‘빗장’이 교리적인 것들만 의미함을 보실 수 있습니다. where anyone may see that by a “wall,” a “rampart,” “gates,” and “bars,” doctrinal things only are meant.

 

[5] 비슷한 방식으로 이사야에서 In like manner in Isaiah:

 

1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2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This song shall be sung in the land of Judah, We have a strong city; salvation will set the walls and the bulwark; open ye the gates, that the righteous nation which keepeth fidelities may enter in. (사26:1-2)

 

1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2주께서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며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 하시며 외인의 궁성을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원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3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 I will exalt thee, I will confess to thy name, for thou hast made of a city a heap, of a defensed city a ruin; a palace of strangers shall not be built of the city forever. Therefore shall the strong people honor thee, the city of the terrible nations shall fear thee, (사25:1-3)

 

이들 구절에는 어떤 특정 성읍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in which passage there is no reference to a particular city.

 

발람의 예언에 In the prophecy of Balaam:

 

18그의 원수 에돔은 그들의 유산이 되며 그의 원수 세일도 그들의 유산이 되고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19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 하고 Edom shall be an inheritance, and out of Jacob shall one have dominion, and shall destroy the residue of the city. (민24:18-19)

 

여기 나오는 ‘성읍’이 어떤 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틀립없이 명백합니다. where it must be plain to everyone that “city” here does not mean a city.

 

이사야에 In Isaiah:

 

10약탈을 당한 성읍이 허물어지고 집마다 닫혀서 들어가는 자가 없으며 11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도다 The city of emptiness is broken; every house is shut, that the cry over wine in the streets cannot enter, (사24:10-11)

 

여기 ‘약탈을 당한 성읍’은 텅 빈 교리를 가리킵니다. where the “city of emptiness” denotes emptinesses of doctrine;

 

그리고 여기 ‘거리’는 여기서도 다른 데서처럼 거짓이든 참이든 성읍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and “streets” signify here as elsewhere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city, whether falsities or truths.

 

계시록에 In John:

 

17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 19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When the seventh angel poured out his vial, the great city was divided into three parts, and the cities of the nations fell. (계16:17, 19)

 

큰 성’은 어떤 이단적인 것을 가리키며, ‘만국의 성들’ 역시 너무나 그러함은 누가 보더라도 틀림없이 분명합니다. That the “great city” denotes something heretical, and that the “cities of the nations” do so too, must be evident to everyone.

 

또 이 큰 성은 요한이 본 여자(계17:18)였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It is also explained that the great city was the woman that John saw; (Rev. 17:18)

 

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계17:18)

 

그리고 이 여자는 앞서 지금까지 보아오신 그런 캐릭터의 교회임을 가리킵니다. and that the woman denotes a church of that character has been shown before.

 

 

403. 우리는 지금까지 ‘성’(城, city)이 뭘 상징하는지 보았습니다. We have now seen what a “city” signifies.

 

하지만 창세기 가운데 이 부분들은 모두 일종의 역사서술식으로 되어 있어서 말씀을 글자의 뜻으로만 읽으시는 분들한테는 이 모든 게 틀림없이 예를 들면, 가인이 성 하나를 건설하였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하였다는 식일 것입니다. 글자의 뜻으로만 읽을 경우, 분명히 그 땅에는 이미 인구가 많았음을 가정해야 합니다. 가인은 아담의 첫 번째 아들일 뿐인데 말입니다. But as all this part of Genesis is put into a historical form, to those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it must seem that a city was built by Cain, and was called Enoch, although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they must also suppose that the land was already populous, notwithstanding that Cain was only the firstborn of Adam;

 

역사서술식 기록들은 그 안에 다 이런 문제점들을 갖고 있습니다. the historical series has this in it.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관찰한 것처럼, 태곳적 사람들은 모든 걸 이렇게 일종의 역사 형태, 어떤 대표성을 띠는 걸 가지고 정리하는 데 아주 익숙했는데요, 이런 일이 그들에게는 굉장히 고차원적인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걸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But as we observed above,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accustomed to arrange all things in the form of a history, under representative types,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highest degree, for it made all things seem to be alive.

2021-06-06(D1)-주일예배(창4,17, AC.402.2-403), '에녹을 낳은지라, 성을 쌓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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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창4:17)


399.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는 말씀이 상징하는 것은 이런 스키즘(schism, 分立) 혹은 이단이 스스로 또 다른 이단을 낳고, 이름을 ‘에녹’이라 하였다 입니다. The words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signify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that was called “Enoch.

성을 쌓고’가 상징하는 것은 거기서 나오는 모든 교리적이고 이단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스키즘이나 이단을 ‘에녹’이라 하였으므로 말씀하시기를,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하신 것입니다. By “the city which he built” is signified all that was doctrinal and heretical therefrom, and because the schism or heresy was called “Enoch,” it is said that “the name of the city was called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400.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는 말씀이 상징하는 것은 이런 스키즘이나 이단이 스스로 또 다른 이단을 낳고, 이름을 ‘에녹’이라 하였다 입니다. 이것은 앞서 언급되어 온 것들로부터, 그리고 첫 번째 절에 서술된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가 가인을 낳았다’로부터도 분명합니다. That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signifies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aid, as well as from what is stated in the first verse, that the man and Eve his wife produced Cain;

그래서 이제 뒤에 나오는 내용들은 임신 및 해산과 유사합니다. 그것이 교회에 관한 것이든 이단에 관한 것이든 이것들은 그렇게 하나의 계보를 형성하는데요, 서로 비슷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so that the things which now follow are similar conceptions and births, whether of the church, or of heresies, whereof they formed a genealogy, for these are similarly related to each other.

하나의 이단이 태동하는 곳에는 한 무리의 이단이 생겨납니다. From one heresy that is conceived there are born a host of them.


401. ‘에녹’으로 불렸던 이단은 모든 교리적, 혹은 이단적 가르침을 가진 이단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이 이름을 보면 분명한데요, 이 ‘에녹’이라는 이름의 뜻은, 그 가르침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개시되었다입니다. That it was a heresy with all its doctrinal or heretical teaching that was called “Enoch” is in some measure evident from this name, which means the instruction so begun or initiated.


402. ‘성을 쌓고’가 상징하는 것은 그 이단에서 나오는 모든 교리적이고 이단적인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성(城, a city) 이름이 나오는 모든 구절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by the “city that was built” is signified all the doctrinal and heretical teaching that came from that heresy, is evident from every passage of the Word in which the name of a city occurs;

그 구절들 중 단 한 곳도 성을 의미하지조차 않고, 항상 무슨 교리나 아니면 이단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for in none of them does it ever mean a city, but always something doctrinal or else heretical.

천사들은 성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그리고 어떤 성의 이름에 관해서 거의 모릅니다. The angels are altogether ignorant of what a city is, and of the name of any city;

위에서 보여드린 대로, 천사들은 그 생각이 영적이고 천적이어서, 성에 관한 한 조각 생각조차 가질 수도,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since they neither have nor can have any idea of a city, in consequence of their ideas being spiritual and celestial, as was shown above.

그들은 그저 성과 성 이름의 상징만 지각합니다. They perceive only what a city and its name signify.

그래서 ‘거룩한 성’, 또한 일명, ‘거룩한 예루살렘’인데요, 이 역시 천사들에게는 그냥 주님의 왕국, 혹은 특별히 그 왕국에 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의미 말고는 전혀 없습니다. Thus by the “holy city,” which is also called the “holy Jerusalem,” nothing else is meant than the kingdom of the Lord in general, or in each individual in particular in whom is that kingdom.

‘성’, ‘시온산’ 역시 비슷하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The “city” and “mountain of Zion” also are similarly understood;

후자는 신앙의 천적인 면을, 전자는 영적인 면을 가리킵니다. the latter denoting the celestial of faith, and the former its spiritual.

[2] ‘성읍들’, ‘궁전들’, ‘집들’, ‘성곽들’, ‘성곽 기초석들’, ‘성벽들’, ‘문들’, ‘빗장들’ 및 그 가운데 ‘성전, 성소’ 또한 천적, 영적 그 자체를 묘사합니다. The celestial and spiritual itself is also described by “cities,” “palaces,” “houses,” “walls,” “foundations of walls,” “ramparts,” “gates,” “bars,” and the “temple” in the midst;

에스겔 48장에서 as in Ezekiel 48;

1모든 지파의 이름은 이와 같으니라 북쪽 끝에서부터 헤들론 길을 거쳐 하맛 어귀를 지나서 다메섹 경계선에 있는 하살에논까지 곧 북쪽으로 하맛 경계선에 미치는 땅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단의 몫이요 2단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아셀의 몫이요 3아셀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납달리의 몫이요 4납달리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므낫세의 몫이요 5므낫세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에브라임의 몫이요 6에브라임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르우벤의 몫이요 7르우벤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유다의 몫이요 8유다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너희가 예물로 드릴 땅이라 너비는 이만 오천 척이요 길이는 다른 몫의 동쪽에서 서쪽까지와 같고 성소는 그 중앙에 있을지니 9곧 너희가 여호와께 드려 예물로 삼을 땅의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만 척이라 10이 드리는 거룩한 땅은 제사장에게 돌릴지니 북쪽으로 길이가 이만 오천 척이요 서쪽으로 너비는 만 척이요 동쪽으로 너비가 만 척이요 남쪽으로 길이가 이만 오천 척이라 그 중앙에 여호와의 성소가 있게 하고 11이 땅을 사독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구별한 제사장에게 돌릴지어다 그들은 직분을 지키고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될 때에 레위 사람이 그릇된 것처럼 그릇되지 아니하였느니라 12땅의 예물 중에서 그들이 예물을 받을지니 레위인의 접경지에 관한 가장 거룩한 예물이니라 13제사장의 경계선을 따라 레위 사람의 몫을 주되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만 척으로 할지니 이 구역의 길이가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가 각기 만 척이라 14그들이 그 땅을 팔지도 못하며 바꾸지도 못하며 그 땅의 처음 익은 열매를 남에게 주지도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한 것임이라 15이 이만 오천 척 다음으로 너비 오천 척은 속된 땅으로 구분하여 성읍을 세우며 거주하는 곳과 전원을 삼되 성읍이 그 중앙에 있게 할지니 16그 크기는 북쪽도 사천오백 척이요 남쪽도 사천오백 척이요 동쪽도 사천오백 척이요 서쪽도 사천오백 척이며 17그 성읍의 들은 북쪽으로 이백오십 척이요 남쪽으로 이백오십 척이요 동쪽으로 이백오십 척이요 서쪽으로 이백오십 척이며 18예물을 삼아 거룩히 구별할 땅과 연접하여 남아 있는 땅의 길이는 동쪽으로 만 척이요 서쪽으로 만 척이라 곧 예물을 삼아 거룩하게 구별할 땅과 연접하였으며 그 땅의 소산을 성읍에서 일하는 자의 양식을 삼을지라 19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그 성읍에서 일하는 자는 그 땅을 경작할지니라 20그런즉 예물로 드리는 땅의 합계는 길이도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도 이만 오천 척이라 너희가 거룩히 구별하여 드릴 땅은 성읍의 기지와 합하여 네모 반듯할 것이니라 21거룩하게 구별할 땅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에 남은 땅은 군주에게 돌릴지니 곧 거룩하게 구별할 땅의 동쪽을 향한 그 경계선 앞 이만 오천 척과 서쪽을 향한 그 경계선 앞 이만 오천 척이라 다른 몫들과 연접한 땅이니 이것을 군주에게 돌릴 것이며 거룩하게 구별할 땅과 성전의 성소가 그 중앙에 있으리라 22그런즉 군주에게 돌려 그에게 속할 땅은 레위 사람의 기업 좌우편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이며 유다 지경과 베냐민 지경 사이에 있을지니라 23그 나머지 모든 지파는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베냐민의 몫이요 24베냐민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시므온의 몫이요 25시므온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잇사갈의 몫이요 26잇사갈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스불론의 몫이요 27스불론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갓의 몫이며 28갓 경계선 다음으로 남쪽 경계선은 다말에서부터 므리바가데스 샘에 이르고 애굽 시내를 따라 대해에 이르나니 29이것은 너희가 제비 뽑아 이스라엘 지파에게 나누어 주어 기업이 되게 할 땅이요 또 이것들은 그들의 몫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0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쪽의 너비가 사천오백 척이라 31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쪽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32동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 33남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 34서쪽도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 35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겔48)

계시록 21장 15절 이하 끝 절까지, 그리고 거기 2절과 10절, ‘거룩한 예루살렘’이라 하는 데 in Revelation 21:15 to the end, where it is also called the holy Jerusalem, verses 2, 10;

15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16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17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18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21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6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7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계21:15-27)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10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계21:2, 10)

그리고 예레미야 31장 38절에서 and in Jeremiah 31:38.

보라, 날이 이르리니 이 성은 하나넬 망대로부터 모퉁이에 이르기까지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38)

다윗의 책에서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라 부르고 있습니다. In David it is called “the city of God, the holy place of the tabernacles of the most high;” (시46:4)

에스겔에서, ‘여호와 삼마’로, in Ezekiel, “the city, Jehovah there,” (겔48:35)

그리고 이사야에서, 기록되기를 and of which it is written in Isaiah:

10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불쌍히 여겼은즉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들의 왕들이 너를 섬길 것이며 14너를 괴롭히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에 엎드려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 The sons of the stranger shall build thy walls, all they that despised thee shall bow themselves down at the soles of thy feet, and they shall call thee the city of Jehovah, the Zion of the holy one of Israel. (사60:10, 14)

스가랴에서 In Zechariah: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Jerusalem shall be called the city of truth; and the mountain of Zion, the mountain of holiness, (슥8:3)

여기 ‘진리의 성읍’, 혹은 ‘예루살렘’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where the “city of truth,” or “Jerusalem,” signifies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그리고 ‘성산’(聖山, mountain of holiness), 혹은 ‘만군의 여호와의 산’(of Z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and the “mountain of holiness,” or “of Zion,”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3] 신앙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성읍(a city)을 가지고 표현한 것처럼, 모든 교리 관련 일들 또한 그렇게 유다 및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가지고 가리키고 있는데요, 이 성읍들 이름 하나하나가 다 나름의 어떤 교리적인 상징들을 갖고 있지만, 속 뜻(the internal sense)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그것을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As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are represented by a city, so also are all doctrinal things signified by the cities of Judah and of Israel, each of which when named has its own specific signification of something doctrinal, but what that is no one can know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성읍들’(cities)을 가지고 교리와 관련된 것들을 상징하는 것처럼, 이단들 역시 그렇게 상징하는데요, 이 경우, 모든 특정 성읍마다 그 이름에 무슨 특별한 이단적인 견해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As doctrinal things are signified by “cities,” so also are heresies, and in this case every particular city, according to its name, signifies some particular heretical opinion.

이제 아래 이어지는 말씀들을 통해 이런 사실들을 보여만 줄 건데요, 여기 보면, 일반적으로 ‘성읍’(a city)이라는 것을 통해 어떤 교리적인 것, 혹은 이단적인 것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At present we shall only show from the following passages of the Word, that in general a “city” signifies something doctrinal, or else heretical.

[4] 이사야에 보면, Thus we read in Isaiah: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멸망의 성읍이라 칭하리라 In that day there shall be five cities in the land of Egypt speaking with the lip of Canaan, and swearing to Jehovah Zebaoth; one shall be called the city Heres, (사19:18)

여기서 다루어진 주제는 주님 오실 때, 영적인 일들과 천적인 일들에 관한 기억-지식인데요, (이 내용이 주님의 오심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은, 이 이사야 19장 1절에,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where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memory-knowledge of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비전, 곧 환상의 골짜기를 다룬 말씀에서도 다시 반복되며, So again, when treating of the valley of vision, that is, of fantasy:

소란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 Thou art full of tumults, a tumultuous city, an exulting city. (사22:2)

예레미야에서는, ‘남쪽에 있는’, 곧 진리의 빛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그리고 그것을 끝내시면서 In Jeremiah, speaking of those who are “in the south,” that is, in the light of truth, and who extinguish it:

네겝의 성읍들이 봉쇄되어 열 자가 없고 유다가 다 잡혀가되 온전히 잡혀가도다 The cities of the south have been shut up, and none shall open them. (렘13:19)

8여호와께서 딸 시온의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무너뜨리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벽과 성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그들이 함께 쇠하였도다 9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부서져 파괴되고 왕과 지도자들이 율법 없는 이방인들 가운데에 있으며 그 성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Jehovah hath purposed to destroy the wall of the daughter of Zion; therefore he maketh the rampart and the wall to lament; they languished together. Her gates are sunk into the ground; he hath destroyed and broken her bars, (애2:8-9)

여기서는 누구라도 ‘성벽’, ‘성곽’, ‘성문’, ‘빗장’이 교리적인 것들만 의미함을 보실 수 있습니다. where anyone may see that by a “wall,” a “rampart,” “gates,” and “bars,” doctrinal things only are meant.

[5] 비슷한 방식으로 이사야에서 In like manner in Isaiah:

1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2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This song shall be sung in the land of Judah, We have a strong city; salvation will set the walls and the bulwark; open ye the gates, that the righteous nation which keepeth fidelities may enter in. (사26:1-2)

1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2주께서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며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 하시며 외인의 궁성을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원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3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 I will exalt thee, I will confess to thy name, for thou hast made of a city a heap, of a defensed city a ruin; a palace of strangers shall not be built of the city forever. Therefore shall the strong people honor thee, the city of the terrible nations shall fear thee, (사25:1-3)

이들 구절에는 어떤 특정 성읍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in which passage there is no reference to a particular city.

발람의 예언에 In the prophecy of Balaam:

18그의 원수 에돔은 그들의 유산이 되며 그의 원수 세일도 그들의 유산이 되고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19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 하고 Edom shall be an inheritance, and out of Jacob shall one have dominion, and shall destroy the residue of the city. (민24:18-19)

여기 나오는 ‘성읍’이 어떤 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틀립없이 명백합니다. where it must be plain to everyone that “city” here does not mean a city.

이사야에 In Isaiah:

10약탈을 당한 성읍이 허물어지고 집마다 닫혀서 들어가는 자가 없으며 11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도다 The city of emptiness is broken; every house is shut, that the cry over wine in the streets cannot enter, (사24:10-11)

여기 ‘약탈을 당한 성읍’은 텅 빈 교리를 가리킵니다. where the “city of emptiness” denotes emptinesses of doctrine;

그리고 여기 ‘거리’는 여기서도 다른 데서처럼 거짓이든 참이든 성읍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and “streets” signify here as elsewhere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city, whether falsities or truths.

계시록에 In John:

17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 19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When the seventh angel poured out his vial, the great city was divided into three parts, and the cities of the nations fell. (계16:17, 19)

‘큰 성’은 어떤 이단적인 것을 가리키며, ‘만국의 성들’ 역시 너무나 그러함은 누가 보더라도 틀림없이 분명합니다. That the “great city” denotes something heretical, and that the “cities of the nations” do so too, must be evident to everyone.

또 이 큰 성은 요한이 본 여자(계17:18)였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It is also explained that the great city was the woman that John saw; (Rev. 17:18)

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계17:18)

그리고 이 여자는 앞서 지금까지 보아오신 그런 캐릭터의 교회임을 가리킵니다. and that the woman denotes a church of that character has been shown before.


403. 우리는 지금까지 ‘성’(城, city)이 뭘 상징하는지 보았습니다. We have now seen what a “city” signifies.

하지만 창세기 가운데 이 부분들은 모두 일종의 역사서술식으로 되어 있어서 말씀을 글자의 뜻으로만 읽으시는 분들한테는 이 모든 게 틀림없이 예를 들면, 가인이 성 하나를 건설하였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하였다는 식일 것입니다. 글자의 뜻으로만 읽을 경우, 분명히 그 땅에는 이미 인구가 많았음을 가정해야 합니다. 가인은 아담의 첫 번째 아들일 뿐인데 말입니다. But as all this part of Genesis is put into a historical form, to those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it must seem that a city was built by Cain, and was called Enoch, although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they must also suppose that the land was already populous, notwithstanding that Cain was only the firstborn of Adam;

역사서술식 기록들은 그 안에 다 이런 문제점들을 갖고 있습니다. the historical series has this in it.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관찰한 것처럼, 태곳적 사람들은 모든 걸 이렇게 일종의 역사 형태, 어떤 대표성을 띠는 걸 가지고 정리하는 데 아주 익숙했는데요, 이런 일이 그들에게는 굉장히 고차원적인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걸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But as we observed above,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accustomed to arrange all things in the form of a history, under representative types,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highest degree, for it made all things seem to be alive.

2021-06-05(D7)-토요예배(창4,17, AC.399-403), '에녹을 낳은지라, 성을 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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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hFFN26OdV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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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397.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라는 말씀은 신앙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과 분리되었음을 상징합니다. By the words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is signified that faith was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놋 땅에 거주하더니’는 진리와 선의 바깥쪽을 상징합니다. he dwelt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에덴 동쪽’은 지적인 마음 근처입니다. 전에 사랑이 다스렸던 곳이지요. toward the east of Eden” i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reigned before.

 

 

398. ‘여호와 앞을 떠나는 것’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과 분리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14절 설명(※ n. 387)을 참조하세요. That to “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may be seen in the explication of verse 14;

 

놋 땅에 거주하는 것’은 진리와 선의 바깥쪽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이라는 말의 상징을 보면 분명한데요, 이 ‘’은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that to “dwell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Nod,” which is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그리고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진리와 선을 다 빼앗기는 것입니다. 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and that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is to be deprive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에덴 동쪽’은 지적인 마음 근처입니다. 전에 사랑이 다스렸던 곳이며, 또 합리적인 마음 근처입니다. 체어리티가 다스렸던 곳이지요. 이러한 사실은 ‘에덴 동쪽’의 상징, 곧, ‘동쪽’은 주님을, ‘에덴’은 사랑을 상징한다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보시면 분명합니다. That “toward the east of Eden” signifie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had previously reigned, and also near the rational mind, where charity had previously reig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of the signification of “the east of Eden,” namely, that “the east” is the Lord, and “Eden” love.

 

의지와 이해력으로 구성되는 마음이, 태고교회 사람들의 경우에는 하나였습니다. With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mind, consisting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was one;

 

의지가 모든 것의 전부였고, 이해력은 의지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for the will was the all in all, so that the understanding was of the will.

 

이것은 그들은 의지에 속한 사랑과 이해력에 속한 신앙 간 아무 구분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전부였고, 신앙은 사랑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This was because they made no distinction between love, which is of the will, and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because love was the all in all, and faith was of love.

 

그러나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후, 의지는 더 이상 다스릴 수 없게 되었고, 이런 마음에서는 반대로 의지 대신 이해력이, 혹은 사랑 대신 신앙이 다스렸기 때문에, 그는 ‘에덴 동쪽에 거주하였다’ 하는 것입니다. But after faith was separated from love, as was the case with those who were called “Cain,” no will reigned any longer, and as in that mind the understanding reigned instead of the will, or faith instead of love, it is said that he “dwelt toward the east of Eden”;

 

방금 보았던 것처럼, 신앙을 구별하셨기 때문에, ‘가인에게 표를 주셨기’ 때문에, 인류의 유익을 위해 신앙은 보전될 수 있었습니다. for as was just now observed, faith was distinguished, or “had a mark set upon it,” that it might be preserved for the use of mankind.

2021-06-04(D6)-매일예배(창4,16, AC.397-398),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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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PGAmdbHY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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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창4:15)

 

 

394. 이제 이것을 미리 아셨고, 정하셨기 때문에, 인류가 영원한 사망으로 소멸하지 않도록 여기 선언하십니다. ‘아무도 가인을 건드리면 안 된다!’ 이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상징합니다. Now as this was foreseen, and was provided, lest the human race should perish in eternal death, it is here declared that none should do violence to Cain, by whom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그리고 더 나아가 그에게 어떤 표를 주셨는데요, 이 표의 의미는, 주님이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신앙을 구별하셨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보존되도록 지키시기 위해서지요. (비록 가인의 신앙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and further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which mean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o secure its preservation.

 

이런 사실들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아케이나이며,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결혼과 고자(鼓子, eunuch)에 관하여 하신 말씀 중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These are arcana hitherto undiscovered, and are referred to by the Lord in what he said respecting marriage, and eunuchs, in Matthew: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There are eunuchs who were so born from their mother’s womb; and there are eunuchs who were made eunuchs of men; and there are eunuchs who have made themselves eunuchs for the kingdom of God’s sake; he that is able to receive it let him receive it. (마19:12)

 

천국의 결혼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고자’라 합니다. Those in the heavenly marriage are called “eunuchs”;

 

그래서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들은 천적 천사들을 닮았습니다. those so “born from the womb,” are such as resemble the celestial angels;

 

사람이 만든’ 고자들은 영적 천사들과 비슷합니다. those “made of men,” are such as are like the spiritual angels;

 

스스로 된’ 고자들은 천사 같은 영들과 비슷한데, 체어리티보다 순종으로 행합니다. and those “made so by themselves,” are like angelic spirits, who act not so much from charity as from obedience.

 

 

39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씀은, (심지어 분리된 신앙일지라도) 그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됨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상징이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라는 것과, ‘일곱(7)’의 상징이 신성한 것임을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That the words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signify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sacrileg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Cain,” which is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seven,” which is what is sacred.

 

숫자 ‘일곱’은 잘 알려진 대로 아주 거룩하게 여겨집니다. 육일간의 창조와 일곱 번째 날 때문인데요, 이 날이 바로 천인(天人, the celestial man)이며, 이 천인 안에 평화와 쉼, 그리고 안식이 있습니다. The number “seven” was esteemed holy, as is well known, by reason of the six days of creation, and of the seventh, which is the celestial man, in whom is peace, rest, and the sabbath.

 

그래서 이 숫자는 유대 교회의 예전에서 아주 자주 나오며, 이 숫자가 나오는 곳마다 신성함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 기간이 아주 길든지 짧든지 둘 다 숫자 ‘7’로 구별하며, 아래 다니엘 본문처럼 메시아의 오심을 가리키는 아주 장구한 시간 간격을 가리켜 ‘이레’라 하였습니다. Hence this number occurs so frequently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nd is everywhere held sacred, and hence also both greater and less periods of time were distinguished into sevens, and were called “weeks,” such as the great intervals of time to the coming of the messiah; (단9:24-25)

 

24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단9:24-25)

 

창세기 본문에서, 라반과 야곱은 칠 년의 기간을 ‘칠 일’이라 하였습니다. and the time of seven years called a “week” by Laban and Jacob. (창29:27-28)

 

27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28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창29:27-28)

 

같은 이유로, 어디서든 이 ‘7’이라는 숫자가 나오는 곳이면 모두 거룩, 혹은 신성불가침의 의미로 여겨집니다. For the same reason, wherever it occurs, the number seven is accounted holy or inviolable.

 

그래서 시편을 보면, Thus we read in David: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Seven times a day do I praise thee. (시119:164)

 

이사야에서, In Isaiah: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The light of the moon shall be as the light of the sun, and the light of the sun shall be sevenfold, as the light of seven days, (사30:26)

 

여기 ‘’는 사랑을, ‘’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가리키는데, 사랑으로 있게 될 신앙입니다. where the “sun” denotes love, and the “moon” faith from love, which should be as love.

 

사람의 거듭남의 기간이 일곱 번째 날, 곧 천인이 되기 전, 숫자 ‘6’으로 구별되듯, 그가 황폐해지는 기간, 곧 천적인 것이 전혀 남지 않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 또한 그렇습니다. As the periods of man’s regeneration are distinguished into six, before the seventh arrives, that is, the celestial man, so also are the periods of his vastation, up to the time when nothing celestial remains.

 

유대인들의 여러 번 포로 생활과, 마지막 혹은 바벨론 유수, 곧 십 년씩 일곱 번, 칠십 년간 지속된 기간은 이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This was represented by the several captivities of the Jews, and by the last or Babylonish captivity, which lasted seven decades, or seventy years.

 

또한 땅은 안식년을 가져야 한다고 여러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It is also said several times that the earth should rest on its sabbaths.

 

같은 내용이 다니엘서, 느부갓네살을 통해서도 표현되고 있습니다. The same is represented by Nebuchadnezzar, in Daniel:

 

16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23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어 없애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풀 가운데에 두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들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였나이다 32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His heart shall be changed from man, and a beast’s heart shall be given unto him, and seven times shall pass over him. (단4:16, 23, 32)

 

그리고 계시록, 마지막 때의 황폐함에 관하여 And in John, concerning the vastation of the last times:

 

1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6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7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8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I saw another sign in heaven, great and marvelous, seven angels, having the seven last plagues; (계15:1, 6-8)

 

그 내용은 and that: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The gentiles should tread the holy city under foot forty and two months, or six times seven. (계11:2)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I saw a book written within and on the back, sealed with seven seals. (계5:1)

 

같은 이유로, 징벌의 가혹함과 더함을 숫자 ‘7’로 표현했습니다. For the same reason the severities and augmentations of punishment were expressed by the number seven;

 

모세의 책에서처럼 as in Moses:

 

18또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21너희가 나를 거슬러 내게 청종하지 아니할진대 내가 너희의 죄대로 너희에게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24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칠 배나 더 치리라 28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칠 배나 더 징벌하리니 If ye will not yet for all this obey me, then I will chastise you sevenfold for your sins. (레26:18, 21, 24, 28)

 

그리고 다윗의 책에서 And in David: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Render unto our neighbors sevenfold into their bosom. (시79:12)

 

신앙을 범하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이었기 때문에,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십니다. 가인의 신앙도 (나중에는) 예배가 될 것이라 전해져 왔기 때문입니다. Now as it was a sacrilege to do violence to faith—since as has been said it was to be of service—it is said that “whosoever should slay Cain, vengeance should be taken on him sevenfold.

 

 

396.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는 말씀은, 주님은 (가인의) 신앙일지라도 보전될 수 있도록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셨음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의 상징과, 그리고 누군가에게 ‘표를 주사’의 상징을 보면 분명한데요, 이 ‘표를 주는’ 것은 구별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That “Jehovah set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mite him” 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mark,” and of “setting a mark” on anyone, as being a means of distinction.

 

그래서 에스겔에서 Thus in Ezekiel: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Jehovah said, Go through the midst of the city, through the midst of Jerusalem, and make a mark on (or designate) the foreheads of the men groaning and sighing for all the abominations, (겔9:4)

 

여기 ‘이마에 표를 그리라’는 그들의 이마에 무슨 표나 선을 그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들을 구별하시는 것입니다. where by “marking out the foreheads,” is not meant a mark or line upon the front part of their heads, but to distinguish them from others.

 

그래서 계시록에서 말씀하시기를 So in John, it is said that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The locusts should hurt only those men who had not the mark of God on their foreheads, (계9:4)

 

여기서도 표 받는 것은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lso to have the mark means to be distinguished.

 

[2] 계시록 다른 곳에서도 보면,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계13:16)라고 되어 있습니다. And in the same book we read of a “mark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계13: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계13:16)

 

유대 교회에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를 삼는’ 것 역시 같은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모세의 책, 관련 내용을 보면 The same thing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binding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concerning which we read in Moses: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Hear, O Israel, Jehovah our God is one Jehovah; (신6:4, 8)

 

13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18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and thou shalt love Jehovah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strength, and thou shalt bind these words for a sign upon thy hand, and they shall be as frontlets between thine eyes. (신11:13, 18)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랑에 관한 계명을 다른 어떤 계명보다도 더 높이 구별해야 함을 표현하였으며, 이렇게 ‘손목과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면 그 상징하는 바가 아주 뚜렷해집니다. By this was represented that they should distinguish the commandment respecting love above every other, and hence the signification of “marking the hand and the forehead” becomes manifest.

 

[3] 그래서 이사야에서 So in Isaiah:

 

18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19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징조를 세워서 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를 여러 나라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 I come to gather all nations and tongues; and they shall come and shall see my glory; and I will set a mark upon them. (사66:18-19)

 

그리고 다윗의 책에서 And in David:

 

16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17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O turn unto me, and have mercy upon me, give thy strength unto thy servant, and save the son of thy handmaid. Set upon me a mark for good, and they that hate me shall see and be ashamed. (시86:16-17)

 

이 여러 구절들을 통해서 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From these passages the meaning of a mark is now evident.

 

지금까지 살펴본 이유로, 앞으로는 가인이라고 하는 어떤 특별한 한 사람에게 무슨 눈에 보이는 표를 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말씀의 속뜻에는 글자의 뜻에 들어있는 것하고는 아주 다른 게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Let no one therefore imagine that any mark was set upon a particular person called Cain, for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contains things quite different from those contained in the sense of the letter.

2021-06-03(D5)-매일예배(창4,15, AC.394-396), '칠(7, 일곱), 가인에게 표를 주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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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CjnudT-Ij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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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창4:15)

 

 

392.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씀은 심지어 그렇게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신앙에 대한 폭력은 신성모독이 될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By “vengeance being taken sevenfold on anyone who slays Cain” is signified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a sacrilege;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는 말씀은 주님은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셔서 신앙이 보존될 수 있게 하셨음을 상징합니다.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393. 우리는 이 말씀들의 속뜻 설명을 계속하기에 앞서 먼저 어떻게 이 경우가 신앙과 연결되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Before we proceed to elucidat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s before us, it is necessary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faith.

 

태고교회는 사랑의 신앙 말고는 그 어떤 신앙도 모르는, 그래서 신앙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리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신앙에 관한 모든 것을 주님의 사랑을 통한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f such a character as to acknowledge no faith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insomuch that they were unwilling even to mention faith, for through love from the Lord they perceived all things that belong to faith.

 

우리가 앞에서 지금까지 말해 온 천적 천사들 또한 그렇습니다. Such also are the celestial angels of whom we have spoken above.

 

그러나 인류는 이런 캐릭터로 있을 수 없을 것이며, 앞으로 주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 신앙을 따로 무슨 교리화하리라는 것이 예견되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대안이 제공되었는데요, 그것은 그들은 실제로 분리될 것이며, 그 후 인류는 신앙을 통해, 즉, 신앙에 관한 지식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이웃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먼저 지식 [cognitio]이나 들음이 오고, 이걸 통해서 그 다음은 이웃 사랑, 즉,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가 주님에 의해 주어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때 이 이웃 사랑은 신앙과 분리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신앙의 원칙을 형성합니다.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human race could not be of this character, but would separate faith from love to the Lord, and would make of faith a doctrine by itself, it was provided that they should indeed be separated, but in such a way that through faith, that is, through the knowledges of faith, men might receive from the Lord charity, so that knowledge [cognitio] or hearing should come first, and then through knowledge or hearing,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might be given by the Lord, which charity should not only be inseparable from faith, but should also constitute the principal of faith.

 

이제 그들이 전에 태고교회 때 가졌던 퍼셉션 대신, 그 자리를 양심이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이 양심은 이웃 사랑과 결합한 신앙을 통해 습득하는 것이며, 이 양심은 무엇이 참인지를 퍼셉션으로 아는 게 아니라 그것이 참이라 하니 참인 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And then instead of the perception they ha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ere succeeded conscience, acquired through faith joined to charity, which dictated not what is true, but that it is true, and this because the Lord has so said in the Word.

 

홍수 후 교회들은 상당 부분 이런 특성들이었으며, 주의 강림 후 첫 교회들, 초대 교회들 역시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영적 천사들과 천적 천사들이 서로 구분이 됩니다. The churches after the flood were for the most part of this character, as also was the primitive or first church after the Lord’s advent, and by this the spiritual angels are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2021-06-02(D4)-매일예배(창4,15, AC.392-393), '창4,15 이해를 위한 사전 설명'.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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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6rAkqc2PX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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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창4:14)

 

 

385.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은 교회의 모든 진리로부터 분리됨을 상징합니다. To be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는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으로부터 분리됨을 상징합니다. to be “hid from thy faces”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faith of love;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는 무엇이 참이요 선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파괴할 것을 상징합니다.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signifies that all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386.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이 교회의 모든 진리로부터 분리됨이라는 것은 ‘’의 상징을 보면 분명한데요, ‘’은 진실한 뜻으로는 교회, 혹은 교회에 속한 사람이며, 그래서 앞서 밝힌 대로, 교회가 천명하는 모든 것입니다. That to be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i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ground,” which, in the genuine sense, is the church, or the man of the church, and therefore whatever the church professes, as shown above.

 

어떤 말의 의미는 다루는 주제에 따라 필연적으로 달라지는데요, 그래서 심지어 잘못된 신앙, 예를 들면, 스키즘이나 이단 같은 신앙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라 합니다. The meaning of a word necessarily varies with the subject treated of, and therefore even those who wrongly profess faith, that is who profess a schism or heresy, are also called “ground.

 

하지만 여기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은 더 이상 교회의 진리들 안에 있을 수 없음을 상징합니다. Here however to be “driven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o be no longer in the truth of the church.

 

 

387.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가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으로부터 분리됨을 상징한다는 것은, ‘주의 낯’의 상징으로부터 분명합니다. That to be “hid from thy faces”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faces of Jehovah.

 

주의 낯’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비입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이 자비에서 나와서 진행합니다. 이런 이유로, 여기서 그의 ‘’은 신앙의 선을 상징합니다. The “face of Jehovah,” as before said, is mercy, from which proceed all the goods of the faith of love, and therefore the goods of faith are here signified by his “faces.

 

 

388.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무엇이 참이요 선인지를 알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means as before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389.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가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파괴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에 뒤이어 나오는데요, That “everyone finding him would slay him” signifies that every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follows from what has been said.

 

이런 경우 때문입니다. For the case is this.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서 이웃 사랑을 빼앗을 때, 그는 주님에게서 자신을 분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주님과 결합하게 하는 유일한 것은 바로 이웃 사랑, 즉,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When a man deprives himself of charity, he separates himself from the Lord, since it is solely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that conjoin man with the Lord.

 

이웃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곳, 그곳에는 괴리가 있으며, 괴리가 있는 곳에 사람은 자기 자신 혹은 본성으로 남게 됩니다. Where there is no charity, there is disjunction, and where there is disjunction, man is left to himself or to his own;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것은 거짓되며, 무슨 마음을 먹든지 그것은 악합니다. and then whatever he thinks is false, and whatever he wills is evil.

 

이것이 바로 사람을 죽이거나 남은 삶 가운데 아무것도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These are the things that slay man, or cause him to have nothing of life remaining.

 

 

390.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죽임을 당할까 봐 끝없이 두려워합니다. 아래 모세의 글에 기록된 것처럼 말입니다. Those who are in evil and falsity are in continual dread of being slain, as is thus described in Moses:

 

33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36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원수들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37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 같이 서로 짓밟혀 넘어지리니 너희가 원수들을 맞설 힘이 없을 것이요 Your land shall be a desolation, and your cities a waste, and upon them that are left of you I will bring softness into their heart in the land of their enemies, and the sound of a driven leaf shall chase them, and they shall flee as fleeing from a sword, and they shall fall when none pursueth, and shall stumble everyone upon his brother, as it were before a sword, when none pursueth. (레26:33, 36-37)

 

이사야에 In Isaiah:

 

16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 17땅의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이르렀나니 18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19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20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The treacherous deal treacherously, yea, in the treachery of the treacherous they deal treacherously.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he who fleeth from the noise of the fear shall fall into the pit, and he that cometh up out of the midst of the pit shall be taken in the snare; the transgression thereof shall be heavy upon it, and it shall fall, and not rise again. (사24:16-20)

 

예레미야에 In Jeremiah: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두려움을 네 사방에서 네게 오게 하리니 너희 각 사람이 앞으로 쫓겨 나갈 것이요 도망하는 자들을 모을 자가 없으리라 Behold, I bring a dread upon thee, from all thy circuits shall ye be driven out every man toward his faces, and none shall gather up him that wandereth. (렘49:5)

 

이사야에 In Isaiah:

 

16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17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 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We will flee upon the horse, therefore shall ye flee; and, we will ride upon the swift, therefore shall they that pursue you be rendered swift; one thousand shall flee at the rebuke of one, at the rebuke of five shall ye flee. (사30:16-17)

 

이들과 말씀 다른 구절들에서, 거짓과 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묘사하기를, ‘도망하다’, ‘죽임을 당할까 봐 두려워하다’ 하고 있습니다. In these and other passages of the Word, those who are in falsity and evil are described as “fleeing,” and as in “fear of being slain.

 

그들은 모든 사람에 대해 겁을 먹는데요, 자신들을 지켜 줄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They are afraid of everybody, because they have no one to protect them.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모두가 자기들의 이웃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그렇게들 서로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All who are in evil and falsity hate their neighbor, so that they all desire to kill one another.

 

 

391. 사후(死後) 세계 악한 영들의 상태를 보면,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무서워하고 있음이 아주 분명합니다. The state of evil spirits in the other life shows most clearly that those who are in evil and falsity are afraid of everybody.

 

스스로에게서 모든 이웃 사랑을 빼앗아 온 사람들은 정처 없이 방황하며, 이리저리 도망을 다닙니다. Those who have deprived themselves of all charity wander about, and flee from place to place.

 

그들이 어디, 가령, 어느 소사이어티들을 가든지 그 소사이어티들은 이들이 그저 다가오기만 할 뿐인데도 이들의 캐릭터를 즉시 지각합니다. 그런 것이 저 세계에 존재하는 퍼셉션이기 때문입니다. Wherever they go, if to any societies, these at once perceive their character by their mere coming, for such is the perception that exists in the other life;

 

그들은 이들을 쫓아낼 뿐만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죽이려고까지 하는 적대감을 가지고 그들을 응징합니다. and they not only drive them away, but also severely punish them, and with such animosity that they would kill them if they could.

 

악한 영들은 서로 응징하고, 고통을 주는 것에서 가장 큰 기쁨을 얻습니다. Evil spirits take the greatest delight in punishing and tormenting one another;

 

그것이 그들의 가장 큰 만족감입니다. it is their highest gratification.

 

악과 거짓 자체가 이런 것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지금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원하든 자기한테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Not until now has it been known that evil and falsity themselves are the cause of this, for whatever anyone desires for another returns upon himself.

 

거짓은 그 안에 거짓에 대한 형벌이 들어 있으며, 악도 그 안에 악에 대한 형벌이 들어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들 안에 이런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Falsity has in itself the penalty of falsity, and evil has in itself the penalty of evil, and consequently they have in themselves the fear of these penalties.

 

2021-06-01(D3)-매일예배(창4,14, AC.385-391),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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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Yq2N3_Mtfvs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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