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And 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창6:8)

 

 

598.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의 의미는, 주님은 인류가 이렇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을 예견하셨다는 것입니다. He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signifies that the Lord foresaw that the human race might thus be saved.

 

주님의 자비는 인류 전체의 구원에 관한 것이며, 주님은 인류의 구원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호의, 은혜 역시 그러하며, 그래서 여기 ‘은혜’(grace)가 인류의 구원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The Lord’s mercy involves and looks to the salvation of the whole human race; and it is the same with his “grace,” and therefore the salvation of the human race is signified.

 

노아’는 새 교회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새 교회의 신앙, 곧 체어리티의 신앙 또한 상징합니다. By “Noah” is signified not only a new church, but also the faith of that church, which was the faith of charity.

 

그래서 주님은 이 체어리티의 신앙, 곧 체어리티가 원인인 신앙을 통해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이 신앙에 관해서는 나중에) Thus the Lord foresaw that through the faith of charity the human race might be saved (concerning which faith hereafter).

 

[2] 말씀에서는 ‘자비’와 ‘은혜’를 구분하며, 이 구분은 이것을 받은 사람들에 따릅니다. ‘자비’는 천적인 사람들에게, ‘은혜’는 영적인 사람들에게 쓰입니다. 천적인 사람들은 자비만, 영적인 사람들은 거의 은혜만 압니다. But there is a distinction in the Word between “mercy” and “grace,” and this in accordance with the difference that exists in those who receive them; “mercy” being applied to those who are celestial, and “grace” to those who are spiritual; for the celestial acknowledge nothing but mercy, and the spiritual scarcely anything but grace.

 

천적인 사람들은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며, 영적인 사람들은 자비가 무엇인지 거의 모릅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자비와 은혜는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The celestial do not know what grace is; the spiritual scarcely know what mercy is, which they make one and the same with grace.

 

이것은 두 가지 아주 다른 겸손에서 나옵니다. 가슴(heart)의 겸손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자비를, 머리(thought)의 겸손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만일 후자가 자비를 구한다면, 그건 시험 중이거나 진심이 아닌 말로만 구하는 것입니다. This comes from the ground of the humiliation of the two being so different; they who are in humiliation of heart implore the Lord’s mercy; but they who are in humiliation of thought beseech his grace; and if these implore mercy, it is either in a state of temptation, or is done with the mouth only and not from the heart.

 

노아’라 하는 새 교회는 천적이 아닌 영적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자비’를 입었다 하지 않고, ‘은혜’를 입었다 하는 것입니다. Because the new church called “Noah” was not celestial but spiritual, it is not said to have found “mercy,” but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3] 말씀에서 ‘자비’와 ‘은혜’를 구분하고 있음은, 여호와를 가리켜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다’ 하시는 많은 구절들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That there is a distinction in the Word between “mercy” and “grace”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where Jehovah is called “merciful and gracious. (as in 시103:8; 111:4; 145:8; 욜2:13)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103:8)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시111:4)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시145:8)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욜2:13)

 

이런 구분은 다른 데, 가령 예레미야에서도 마찬가지로 하고 있습니다. The distinction is likewise made in other places, as in Jeremiah:

 

2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3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Thus saith Jehovah, The people which were left of the sword found grace in the wilderness, when I went to give rest to him, to Israel. Jehovah appeared unto me from afar; and I have loved thee with an everlasting love; therefore in mercy have I drawn thee, (렘31:2-3)

 

여기 보면, ‘은혜’는 영적인 퀄러티를, ‘자비’는 천적인 퀄러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where “grace” is predicated of the spiritual, and “mercy” of the celestial.

 

이사야에는 In Isaiah: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Therefore will Jehovah wait that he may give grace unto you, and therefore will he exalt himself that he may have mercy upon you. (사30:18)

 

이 역시, ‘은혜’는 영적인 퀄러티를, ‘자비’는 천적인 퀄러티를 보고 있습니다. Here likewise “grace” regards the spiritual, and “mercy” the celestial.

 

창세기 후반부, 롯이 천사에게 말하는 장면, So in the chapter presently following, where Lot says to the angel: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Behold I pray thy servant hath found grace in thine eyes, and thou hast made great thy mercy which thou hast wrought with me, to make alive my soul. (창19:19)

 

은혜’는 신앙이나 언더스탠딩(understanding, 이해하는 능력) 같은 영적 목표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은 여기 ‘주께 은혜를 입었고’라는 표현을 보면 확실하고요, ‘자비’는 사랑이나 의지 같은 천적 목표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은 천사가 한 말, ‘인자를 베푸셨다’, ‘내 생명을 구원하셨다’라는 표현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grace” relates to spiritual things, which are of faith, or of the understanding, is evident here also in that it is said, he “hath found grace in thine eyes”; and that “mercy” relates to celestial things which are of love, or of the will,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angel is said to have “wrought mercy,” and to have “made alive the soul.

2021-08-17(D3)-매일예배(AC.598, 창6,8), '자비(mercy)와 은혜(grace)의 차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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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Ayh81JR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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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And 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창6:8)

 

 

596. ‘노아’는 새 교회를 상징합니다. By “Noah” is signified a new church.

 

그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는 말씀은, 주님은 인류가 이렇게 구원받게 될 것임을 예견하셨다는 뜻입니다. That he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signifies that the Lord foresaw that the human race might thus be saved.

 

즉, 이것이 인류가 구원받는 방법임을 주님은 예견하셨다는 것입니다.

 

597. ‘노아’는 고대 교회라 하는 새 교회를 상징하는데요, 고대 교회라는 명칭은 홍수 전 존재했던 태고 교회와, 홍수 후 존재했던 이 교회를 구별해 부르기 위한 것입니다. By “Noah” is signified a new church, which is to be called the ancient church, for the sake of distinction between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before the flood, and that which was after the flood.

 

이들 두 교회들의 상태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The states of these two churches were entirely different.

 

태고 교회의 상태는,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거기서 나오는 진리에 관한 일종의 퍼셉션(perception, 지각, 배우지 않고도 주님의 선과 진리를 아는 타고난 능력)을 받은 그런 상태였습니다. The state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such that they had from the Lord a perception of good and the derivative truth.

 

고대 교회, 혹은 ‘노아’의 상태는, 그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일종의 양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The state of the ancient church, or “Noah,” became such that they had a conscience of good and truth.

 

즉, 선량함(goodness)과 진실에 관한 일종의 양심으로 상태가 바뀐 것입니다.

 

태고 교회와 고대 교회 간 상태의 차이는 이런 차이, 곧 퍼셉션을 갖는 것과 양심을 갖는 것 간 차이였습니다. Such as is the difference between having perception and having conscience, such was the difference of state of the most ancient and the ancient churches.

 

퍼셉션은 양심이 아닙니다. 천적(天的, celestial) 천사들은 퍼셉션을, 영적(靈的, spiritual) 천사들은 양심을 갖고 있습니다. Perception is not conscience: the celestial have perception; the spiritual have conscience.

 

태고 교회는 천적이었고, 고대 교회는 영적이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was celestial, the ancient was spiritual.

 

[2] 태고 교회는 영들 및 천사들과 어울려 지냄을 통해, 그리고 비전 및 꿈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고, 그렇게 해서 그들에게는 선과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일반적인 능력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이런 걸 인식하게 되자, 이번에는 이런 퍼셉션 능력으로 얻게 된 무수한 인사이트들(insights, 통찰력)을 통해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들, 말하자면, 엑시엄(axioms, 자명한 이치, 公理)들을 컨펌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인사이트들은 특정 디테일들을 구성하는데, 넓은 카테고리들이 이런 디테일들로 채워지는 그런 것입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had immediate revelation from the Lord by consort with spirits and angels, as also by visions and dreams; whereby it was given them to have a general knowledge of what was good and true; and after they had acquired a general knowledge, these general leading principles, as we may call them, were confirmed by things innumerable, by means of perceptions; and these innumerable things were the particulars or individual things of the general principles to which they related.

 

즉, 천국, 곧 주님의 신적 질서의 나라, 질서정연한 진리 체계가 차곡차곡 각 사람 내면에 자리 잡아갔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가장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원리들이 날마다 컨펌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이 원리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들은 그걸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부합하면 그런 것으로 지각했습니다. Thus were the general leading principles corroborated day by day; whatever was not in agreement with the general principles they perceived not to be so; and whatever was in agreement with them they perceived to be so.

 

즉, 주님의 신적 질서의 근본에 대한 감각이 저변에 깔려 있어 어떤 것이 그 질서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직관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천적 천사들이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Such also is the state of the celestial angels.

 

[3] 태고 교회의 보편적 원리들, 곧 엑시엄들은 천적이며, 영원한 진리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주님이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신다.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 말미암는다.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 말미암는다. 사람의 것(own, 사람에게 고유한 것)은 악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그 자체로 죽은 것이다 등등... 그외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heavenly and eternal truths—as that the Lord governs the universe, that all good and truth is from the Lord, that all life is from the Lord, that man’s own is nothing but evil, and in itself is dead; with many others of similar character.

 

태고 교회 사람들은 이런 진리들, 원리들을 컨펌하고 지지하는 수많은 것들, 생각들에 관한 퍼셉션을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And they received from the Lord a perception of countless things that confirmed and supported these truths.

 

그들에게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랑이었습니다. With them love was the principal of faith.

 

그들로 하여금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지각할 수 있도록 주님이 그들을 북돋워 주신 방법은 바로 사랑입니다. 앞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cf. AC.32:2, 202, 398) By love it was given them of the Lord to perceive whatever was of faith, and hence with them faith was love, as was said before.

 

그러나 고대 교회의 경우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을 받고 말씀드리겠습니다. But the ancient church became entirely different,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2021-08-16(D2)-매일예배(AC.596-597, 창6,8), '태고 교회와 고대 교회의 차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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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_ahFylQ344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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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I will destroy man whom I have created, 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both man and beast, and creeping thing, and fowl of the heavens; for it repenteth me that I have made him. (창6:7)

 

 

591. ‘이르시되 내가 사람을 쓸어버리되’는 인류가 전멸을 자초할 것을,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는 태고 교회의 후손이었던 사람들을,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는 그들의 의지 안에 무엇이 있든지 그것이 그들을 전멸시킬 것이라는 것, ‘공중의 새까지’는 그들의 지적 능력 또는 사고 능력 안에 무엇이 있든지를,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는 위에서(cf. AC.587-588) 살핀, 불쌍히 여기심을 각각 상징합니다. Jehovah said, I will destroy man” signifies that man would extinguish himself; “whom I have created, 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he man of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both man and beast and creeping thing” signifies that whatsoever is of the will would extinguish him; “and fowl of the heavens” is whatever is of the understanding or thought; “for it repenteth me that I have made them” signifies as before compassion.

 

 

592. 이르시되 내가 사람을 쓸어버리되 Jehovah said, I will destroy man.

 

이 말씀은, 인류가 전멸을 자초할 것이라는 의미임은 위(cf. AC.588)에서 말씀드린 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즉, 여호와이신 주님에 관한 서술을, 그가 벌을 주신다, 그가 유혹하신다, 그가 악을 시행하신다, 그가 파괴하시거나 죽이시며, 저주하신다 한다는 것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man would extinguish himself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explained before, namely, that it is predicated of Jehovah or the Lord that he punishes, that he tempts, that he does evil, that he destroys or kills, and that he curses.

 

예를 들면, 그는 유다의 장자 엘과, 또 다른 아들 오난을 죽이셨고, (창38:7, 10) 애굽의 모든 초태생(初胎生, firstborn)을 치셨습니다. (출12:12, 29) As for example, that he slew Er, Judah’s firstborn; and Onan, another son of Judah (Gen. 38:7, 10); that Jehovah smote all the firstborn of Egypt (Exod. 12:12, 29).

 

7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10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창38:7, 10)

 

12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29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출12:12, 29)

 

예레미야에서도 And so in Jeremiah: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여움과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시체로 이 성을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Whom I have slain in mine anger and in my wrath. (렘33:5)

 

다윗의 글에 In David:

 

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He cast upon them the wrath of his anger; vehement anger, and fury and straitness, a sending of evil angels. (시78:49)

 

아모스에 In Amos: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Shall evil befall a city, and Jehovah hath not done it? (암3:6)

 

계시록에 In John:

 

15:1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7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16:1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Seven golden vials full of the wrath of God who liveth forever and ever. (계15:1, 7; 16:1)

 

이 모든 골치아픈 일들이 다 여호와로 말미암는다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완전 정 반대인데도 말입니다. All these things are predicated of Jehovah, although entirely contrary to his nature.

 

앞서 말씀드린 이유로, 이런 속성들이 다 여호와께 속한 걸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사람들이 가장 먼저 형성해야 하는,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은,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주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정돈하신다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나서 배우게 되는 것은, 어떤 악도, 주님으로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죽이시고 하는 건 더더욱 아니지요. 오히려 악을 자초하는 장본인은 바로 사람 자신입니다. 그가 악을 자신에게로 가져와 자신을 망치게 하고, 파괴하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를 부추기고 꾀는 것은 그가 아니라 사실은 악한 영들이지만, 그러나 사람은 자기가 그렇게 했다고, 자기가 그렇게 한 장본인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냥 자기가 한 게 되는 것입니다. They are predicated of him for the reason explained before; and also in order that men may first form the very general idea that the Lord governs and disposes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nd may afterwards learn that nothing of evil is from the Lord, much less does he kill; but that it is man who brings evil upon himself, and ruins and destroys himself—although it is not man, but evil spirits who excite and lead him; and yet it is man, because he believes that he is himself the doer.

 

그래서 여기 지금 여호와를 가리켜 그가 ‘사람을 쓸어버리신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자신을 파괴하고 끝내는 것은 바로 사람인 자기 자신인데도 말입니다. So now here it is said of Jehovah that he would “destroy man,” when in fact it was man who would destroy and extinguish himself.

 

[2] 이 경우, 내세에서는 실제로 어떤 상태일까 하는 것은, 지옥의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아주 명확하게 알 수 있는데요, 그들은 자기들이 받고 있는 형벌에 뒤따르는 모든 부정적인 결과들에 대해 끝없이 애통해 하며, 주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The state of the case may be very evident from those in the other life who are in torment and in hell, and who are continually lamenting and attributing all the evil of punishment to the Lord.

 

악령들의 세계에는 남을 해하고 벌주며 처벌하는 걸 즐거움으로, 심지어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바로 주님이시라고 생각합니다. So in the world of evil spirits there are those who make it their delight, even their greatest delight, to hurt and punish others; and those who are hurt and punished think it is from the Lord.

 

하지만 그들은 어떠한 나쁜 일도 절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는 말을 듣고, 또 눈으로 확인도 합니다. 정반대로, 이 모든 일은 그들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거, 내세의 모든 것은 정돈과 균형의 상태 가운데 있는데, 바로 악은 악을 행한 자에게로 돌아오고, 그 악에 대한 형벌의 비극으로 바뀐다는 거, 이것이 악은 어떻게 도울 수가 없는 이유이며, 이런 작용-반작용의 법칙, 질서는 피할 수가 없는 이유라는 말을 듣습니다. But they are told, and it is shown them, that not the least of evil is from the Lord, but they bring it upon themselves; for such is the state and such the equilibrium of all things in the other life that evil returns upon him who does evil, and becomes the evil of punishment; and for the same reason it is inevitable.

 

이런 균형, 이런 질서는 악을 고치기 위해, 악을 치료하기 위해 허용되는 것이라는 말을 그들은 듣습니다. This is said to be permitted for the sake of the amendment of the evil.

 

여기 허용이라는 말은 용인하다, 참다, 겪다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한결같이 모든 악의 형벌을 선으로 돌리시며, 주님으로부터는 선말고 다른 무엇은 없으시다는 말도 듣습니다. But still the Lord turns all the evil of punishment into good; so that there is never anything but good from the Lord.

 

지금까지 허용이 무엇인지, 즉 이런 종류의 용인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허용되었다는 건, 허용하신 분에 의해, 그가 허용하셨기 때문에 행해진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But hitherto no one has known what permission is; what is permitted is believed to be done by him who permits, because he permits.

 

사람들이 보는 것은 용인된 일입니다. 그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분에 의해 실행되어진, 쉽게 말해 그분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요.

 

그러나 사실은 아주 다른데요,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을 받아 나중에(cf. AC.2447) 말씀드리겠습니다. But the fact is quite otherwise,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2021-08-14(D7)-매일예배(AC.591-592, 창6,7),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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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ME7wO5fzZ_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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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And it repented Jehovah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it grieved him at his heart. (창6:6)

 

 

588. 실제로 주님에 대하여 이런 주장들을 하기 때문에, 후회와 근심 또한 주님의 속성, 성품이라고 하는 일이 이어집니다. 어떤 한 가지 주장은 또 다른 주장을 낳기 때문인데요. 이런 건, 말씀에 나오는 다음 본문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But as even such things as these are predicated of the Lord, it follows that repentance also and grief may be predicated of him; for the predication of the one follows from that of the other, as plainly appears from the following passages in the Word.

 

[2]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을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가라앉으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 Mine anger shall be consummated, I will make my wrath to rest, and it shall repent me. (겔5:13)

 

여기, ‘’(anger)와 ‘’(wrath)을 여호와께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가라앉음’(repentance) 또한 사용되고 있습니다. Here, because “anger” and “wrath” are predicated, “repentance” is predicated also.

 

스가랴입니다. In Zechariah:

 

14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나를 격노하게 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으나 15이제 내가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As I thought to do evil when your fathers provoked me to anger, saith Jehovah Zebaoth, and it repented me not, so again I will think in those days to do good unto Jerusalem and to the house of Judah. (슥8:14-15)

 

여기 보면, 여호와가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주님은 결코 악을 행하실 생각조차 하실 수 없으시며, 오직 각 사람과 모두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이신데도 말입니다. Here it is said that Jehovah “thought to do evil,” and yet he never thinks to do evil to any, but good to all and to everyone.

 

모세의 글, 모세가 여호와께 나아가 관용을 구할 때에 In Moses, when he prayed forbearance of the face of Jehovah:

 

12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4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Turn from the wrath of thine anger and repent thee of this evil against thy people; and Jehovah repented of the evil which he said he would do unto his people. (출32:12, 14)

 

여기서도 ‘맹렬한 노’(wrath of anger)라는 표현을 여호와께 사용하고 있고, 그 결과, ‘뜻을 돌이키사’(repentance)라는 표현 역시 뒤따르고 있습니다. Here also the “wrath of anger” is attributed to Jehovah, and consequently “repentance.

 

요나서에서, 니느웨 왕의 말입니다. In Jonah, the king of Nineveh said: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Who knoweth whether God will not turn and repent, and turn from the heat of his anger, that we perish not? (욘3:9)

 

여기서도 비슷하게 ‘’(anger)라는 표현 때문에 ‘뜻을 돌이키시고’(repentance)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Here similarly “repentance” is predicated because “anger” is.

 

[3] 호세아입니다. In Hosea:

 

8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My heart is turned within me; my repentings are kindled together; I will not execute the wrath of mine anger; (호11:8-9)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본문, ‘마음에 근심하시고’와 똑같은 말씀,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가 나오네요. where likewise it is said of the heart that “repentings were kindled,” just as in the passage we are considering it is said that he “grieved at heart.

 

긍휼’(repentings)은 누가 봐도 큰 자비를 가리킵니다. Repentings” plainly denote great mercy.

 

그래서 요엘서에는 So in Joel: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Turn unto Jehovah your God; for he is gracious and compassionate, slow to anger and plenteous in mercy, and repenteth of the evil; (욜2:13)

 

여기 ‘뜻을 돌이켜’(repent) 역시 두말할 것도 없이 자비를 가리킵니다. where also to “repent” manifestly denotes mercy.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If so be they will hearken, and turn every man from his evil way, and it repent me of the evil, (렘26:3)

 

이 역시 자비, 불쌍히 여기심을 상징합니다. signifying to have mercy.

 

계속해서 Again: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If that nation turn from their evil, it shall repent me of the evil; (렘18:8)

 

이 또한 ‘뜻을 돌이키겠고’(repent)는 그들이 만일 돌아오면 불쌍히 여기시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where also to “repent” denotes to have mercy provided they would turn.

 

자기한테서 주님의 자비가 떠나버리게 한 장본인은 바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결코 먼저 사람을 떠나시지 않습니다. For it is man who turns the Lord’s mercy away from himself: the Lord never turns it away from man.

 

 

589. 이들과 다른 많은 구절들을 보고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말씀(the Word)은 인간의 수준(appearances)으로 기술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에게 맞춰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From these and many other passages it is evident that the Word was spoken according to the appearances with man.

 

그래서 말씀이 기술된 이런 수준을 가지고 거짓된 원리들(false principles)을 컨펌(confirm, 증거를 들어 사실임을 보여주다, 확인하여주다)하고픈, 잘못된 전제들(false premises)을 뒷받침(support)하고픈 사람은 수없이 많은 말씀 구절들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Whoever therefore desires to confirm false principles by the appearances according to which the Word was spoken, can do so by passages without number.

 

그러나 잘못된 가정들(false assumptions)을 증명하기 위해 말씀을 사용하는 것은 말씀을 액면가(face value)로 사용하는 것, 말씀을 겉글자의 뜻 그대로 사용하는 것하고는 아주 다릅니다. 또다른 사람은 말씀에 있는 것을 단순히 믿는 사람입니다. But it is one thing to confirm false principles by the Word, and another to believe in simplicity what is in the Word.

 

잘못된 가정들을 컨펌하는 사람은 먼저 그가 절대 포기하거나 부분적으로라도 물러설 마음이 없는 어떤 원리를 골라 시작합니다. 대신 그는 말씀을 포함, 모든 가용(可用, available) 소스들로부터 증거들을 긁어모아 차곡차곡 쌓습니다. 더 이상 진리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그 원리, 전제, 가정에 철저하게 스스로 사로잡힙 때까지 말이지요. 한 마디로, 이런 사람은 진리 앞에 장님이 될 때까지 이런 짓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He who confirms false principles, first assumes a principle which he will not at all recede from, nor in the least yield, but scrapes together and accumulates confirmations wherever he can, thus also from the Word, until he so strongly persuades himself that he can no longer see the truth.

 

똑같이 말씀을 겉글자의 뜻으로 받지만, 그러나 단순한 마음(simple heart)으로 그걸 믿는 사람은 저 사람처럼 무슨 원리를 붙잡으면서 시작하는 게 아니고, 즉, 자기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말씀을 이용해 먹으려는 동기가 아닌, ‘이건 주님이 하신 말씀이야. 그러니까 진리야.’라는 생각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만일 그 말씀의 속뜻을 말씀의 다른 구절들을 가지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그는 잠자코 따르며, 마음으로 즐거워 합니다. But he who simply or with simple heart believes, does not first assume principles, but thinks that because the Lord has thus said it is true; and if instructed from other sayings of the Word how it is to be understood, he acquiesces and rejoices in his heart.

 

주님은 화를 내시며, 벌하시고, 후회하시거나 근심하시는 분이시며, 그래서 우리는 악을 두려워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고 믿되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하게 믿는 것은 전혀 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은 크고 작은 모든 걸 보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단 이런 믿음을 갖게 되면, 그는 다른 모든 영역에서 눈이 밝아지며, 현세가 아니면 내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Even the man who in simplicity believes that the Lord is angry, punishes, repents, and grieves, and so believing is afraid of evil and does good, takes no harm; for this belief causes him to believe also that the Lord sees everything; and being in such a belief he is afterwards enlightened in other matters of faith, if not before, then in the other life.

 

자기들이 사랑한 가정들(assumptions)과, 아주 역겨운 자기 사랑 및 탐욕으로 스스로를 속인 사람들의 경우는 아주 다릅니다. Very different is the case with those who in agreement with a foul love of self or of the world persuade themselves to believe certain things that are deduced from the principles they have already adopted.

 

 

590. ‘후회’(repenting)는 지혜와, ‘마음에 근심함’(grieving at heart)은 사랑과 각각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인간의 이해(apprehension)로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없고, 다만 인간의 경험 수준, 겉모습 수준에서만 가능합니다. That “repenting” has reference to wisdom, and “grieving at heart,” to love, cannot be explained to human apprehension, save in accordance with the things that are with man, that is, by means of appearances.

 

인간의 사고(thought) 속에 들어있는 모든 생각(idea)은 지적 능력(understanding, intellect) 및 의지, 다르게는, 사고와 그 사고에 대한 사랑과 관계된 무엇입니다. In every idea of thought in man there is something from the understanding and from the will, or from his thought and his love.

 

어떤 생각이든지 어느 정도 그의 의지나 그 의지에서 나온 사랑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면 그건 생각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은 전혀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Whatever idea does not derive anything from his will or love is not an idea, for otherwise than from his will he cannot think at all.

 

사고와 의지 사이엔 영원히 떼어놓을 수 없는 일종의 결혼 같은 게 있는데, 사람의 사고 속 생각들에도 타고나거나 후천적으로 생겨나는, 의지 혹은 사랑에 속한 일들이 있습니다. There is a kind of marriage, perpetual and indissoluble, between the thought and the will, so that in the ideas of man’s thought there inhere or adhere the things that are of his will or his love.

 

인간에게 속한 이런 일들을 잘 관찰하면, 주님의 자비 그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즉, 지혜와 사랑인데요, 어느 정도 살짝 아는 것, 얼핏 짐작하는 것은 가능하지 싶습니다. From this state of things in man it may as it were be known, or rather it seems possible to form some idea of what is contained in the Lord’s mercy, namely, wisdom and love.

 

그래서 선지자들, 특히 이사야 같은 경우, 어디서나 거의 항상 두 가지 표현을 써서 모든 것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천적인 것을 각각 포함하지요. Thus in the prophets, especially in Isaiah, there are almost everywhere double expressions concerning everything; one involving what is spiritual, the other what is celestial.

 

주님의 자비, 영적 측면이 지혜요, 천적 측면이 사랑입니다. The spiritual of the Lord’s mercy is wisdom; the celestial is love.

2021-08-13(D6)-매일예배(AC.588-590, 창6,6), '인간의 수준으로 기록된 말씀(the Word)'.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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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HIlcfvxmN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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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And it repented Jehovah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it grieved him at his heart. (창6:6)

 

 

586a. ‘한탄하사(후회, repent)는 자비(mercy)를 상징하며, ‘마음에 근심하시고’ 역시 같은 걸 상징합니다. ‘한탄하사’는 지혜와 관련이 있고, ‘마음에 근심하시고’는 사랑과 관련이 있습니다. That he “repented” signifies mercy; that he “grieved at the heart,” has a like signification; to “repent” has reference to wisdom; to “grieve at the heart” to love.

 

 

587.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가 자비를 상징하며, ‘마음에 근심하시고’ 역시 같은 상징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 곧 결론지을 수 있는데요, 여호와는 결코 후회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만물을 온전히 영원부터 예견(豫見, foresee)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람을 지으셨을 때, 즉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온전하게 하사 천적 인간이 되게 하셨을 때에도 그는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지금 여기서 설명 중인 이런 인종이 될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그는 이런 것을 예견하셨고, 그래서 후회하실 수 없으십니다. That it repented Jehovah that he made man on the earth signifies mercy, and that “he grieved at the heart” has a like signification, is evident from this, that Jehovah never repents, because he foresees all things from eternity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nd when he made man, that is, created him anew, and perfected him till he became celestial, he also foresaw that in process of time he would become such as is here described, and because he foresaw this he could not repent.

 

사무엘이 한 말을 보면, 이런 사실이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This appears plainly from what Samuel said: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The invincible one of Israel doth not lie, nor repent, for he is not a man that he should repent. (삼상15:29)

 

모세의 글에는 And in Moses: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God is not a man that he should lie, or the son of man that he should repent; hath he said, and shall he not do? Or hath he spoken, and shall he not make it good? (민23:19)

 

오히려 ‘후회하다’라는 것은 자비로워짐, 불쌍히 여김을 상징합니다. But to “repent” signifies to be merciful.

 

여호와의 자비(mercy), 곧 주님의 자비는 인류를 향하여 주님이 행하신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인류는 주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상태에 있으며, 주님은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을 저마다의 상태에 따라 불쌍히 여기십니다. 주님은 벌을 받게 되어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선의 즐거움을 누리게(grant) 된 사람 또한 불쌍히 여기십니다. 벌(punishment)은 자비의 한 가지 행위인데, 그 이유는 자비는 벌에 포함된 모든 악을 선으로 구부리기 때문입니다. 선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 또한 자비의 한 가지 행위인데, 아무도 어떤 종류의 선도 결코 자기 공로로 얻을(earn)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류 전체가 악하며, 모든 사람은 그냥 방치되면 지옥을 향해 거꾸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옥 밖으로 사람을 끌어당기시는 것이 자비이며, 이것이 순수한 자비인 것은, 주님은 이 일에 어떤 사람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The mercy of Jehovah, or of the Lord, includes everything that is done by the Lord toward mankind, who are in such a state that the Lord pities them, each one according to his state; thus he pities the state of him whom he permits to be punished, and pities him also to whom he grants the enjoyment of good; it is of mercy to be punished, because mercy turns all the evil of punishment into good; and it is of mercy to grant the enjoyment of good, because no one merits anything that is good; for all mankind are evil, and of himself everyone would rush into hell, wherefore it is of mercy that he is delivered thence; nor is it anything but mercy, inasmuch as he has need of no man.

 

자비를 미세리코르디아(misericordia, 라틴, 자비)라 합니다. 인간을 지옥의 비참(miseries)(주1)에서 건져주시기 때문이며, 인류가 처한 비참한 상태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자비는 비참 가운데 있는 전 인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Mercy has its name from the fact that it delivers man from miseries1 and from hell; thus it is called mercy in respect to mankind, because they are in such a state of misery, and it is the effect of love toward them all, because all are so.

 

 

588. 주님에 대하여, ‘후회하신다’, ‘마음에 근심하신다’ 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자비 한가운데 이런 것들이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 주님의 ‘후회’, ‘근심’이라는 표현은, 말씀 여러 다른 구절처럼 그래 보이는 겉모습을 따른 것입니다. But it is predicated of the Lord that he “repents,” and “is grieved at heart,” because there appears to be such a feeling in all human mercy, so that what is said here of the Lord’s “repenting” and “grieving” is spoken according to the appearance, as in many other passages in the Word.

 

주님의 자비가 어떤 것인지, 곧 주님의 자비의 본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인간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주님에 대한 것은 인간의 이해를 무한히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자비, 곧 후회하고 근심하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나름의 이해를 가지고 자비에 대한 개념을 잡지 않으면, 그는 결코 자비에 대한 어떤 개념도 가질 수 없으며, 그래서 어떤 것도 배울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곧 주님의 속성을 서술할 때, 왜 종종 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하는지 하는 이유입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 또는 주님이 벌하신다, 시험하신다, 파괴하신다, 화내신다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주님은 결코 누구를 벌하시지도, 결코 누구를 시험에 빠트리시지도, 결코 누구를 파멸에 이르게 하시지도, 그리고 결코 화를 내시지도 않으시는데 말입니다. What the mercy of the Lord is none can know, because it infinitely transcends the understanding of man; but what the mercy of man is we all know to be to repent and grieve; and unless a man were to form his idea of mercy according to his own apprehension, he could not have any conception of it, and thus he could not be instructed; and this is the reason why human properties are often predicated of the attributes of Jehovah or the Lord, as that Jehovah or the Lord punishes, leads into temptation, destroys, and is angry; when yet he never punishes anyone, never leads any into temptation, never destroys any, and is never angry.

2021-08-12(D5)-매일예배(AC.586a-588, 창6,6), '여호와께서 후회하시다, 근심하시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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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oGuVkeNV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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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And Jehovah saw that the evil of man was multiplied on the earth, and that all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every day. (창6:5)

 

 

584.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을 보시고’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지기 시작했음을,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는, 진리와 선에 관한 퍼셉션이 전혀 없었음을 각각 상징합니다. Jehovah saw that the evil of man was multiplied on the earth” signifies that there began to be no will of good; “all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every day” signifies that there was no perception of truth and good.

 

 

585.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지기 시작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위에서 말씀드린 내용(cf. AC.568), 즉, 진정한 의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대신 탐욕(cupidity), 욕구(desire)만 남았다는 사실을 통해 분명하고요, ‘세상에 있는 사람’이 상징하는 것을 통해서도 그렇습니다. That by the evil of man being multiplied in the earth is signified that there began to be no will of good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bove, namely, that there was no longer any will, but only cupidity;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man in the earth.

 

’, ‘세상’은 글자의 뜻으로는, 사람이 사는 곳을 말합니다. In the literal sense the “earth” is where man is.

 

’은 속뜻으로는, 사랑이 있는 곳, 그리고 사랑은 의지 혹은 욕망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의지 그 자체를 의미하기 위해 ‘’이 사용된 것입니다. In the internal sense it is where the love is, and as love is of the will, or of the cupidity, the earth is taken to mean the will itself of man.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은 의지입니다. 알고 있고, 이해한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은 다 그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그는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의도하지 않은 뭔가를 말하거나 하고 있을 때조차 거기엔 여전히 그의 의지와 관계된 뭔가가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말이나 행위하고는 직접적 관련은 없어 보이나 사실은 은밀히 그를 움직이는 무슨 숨은 동기,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For man is man from willing, and not so much from knowing and understanding, because these flow out from his will; whatever does not flow out from his will he is willing neither to know nor understand; nay, even when he is speaking or doing something that he does not will, still there is something of the will remote from the speech or action that governs him.

 

가나안 땅’이라든지, ‘거룩한 땅’ 같은 표현을 써서 사실은 사랑, 그리고 결과적으로 천적(天的, the celestial) 인간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말씀 여러 곳에서 이런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요, 같은 식으로, 세상 여러 나라들 역시 그들의 사랑, 곧 일반적으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만 이 주제는 아주 많이 반복되기 때문에 여기서 이걸 다루느라 머무를 필요는 없지 싶습니다. That the “land of Canaan,” or the “holy land,” denotes love, and consequently the will of the celestial man, might be confirmed by many passages from the Word; in like manner, that the lands of various nations denote their loves, which in general are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but as this subject so often recurs, it need not be dwelt upon here.

 

이런 이유들로, 이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보는데요, ‘땅(세상) 위 사람의 죄악’은 그의 자연적 악, 곧 그의 의지를 표현하는 세속적 악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이 악을 ‘불어났다’, ‘배가되었다’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그 정도로 타락하지는, 즉, 철저하게 사악하지는 않았기 때문인데, 선행을 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기적인 목적으로였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라는 표현을 통해 도착(倒錯, perversion), 왜곡(corruption)의 완성, 즉, 철저하게 부패하고, 변질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Hence it appears that by “the evil of man on the earth” is signified his natural evil, which is of the will, and which is said to be “multiplied” because it was not so depraved in all but that they wished good for others, yet for the sake of themselves; but that the perversion became complete is signified by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the heart.

 

 

586.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다’가 상징하는 것은 진리와 선에 관한 퍼셉션(perception, 지각, 영적 통찰)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리고 보여드린 대로 (cf. AC.560, 570),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앙에 관한 가르침들로 하여금 그들의 아주 더러운 갈망(yearnings)에 잠기게 하였고, 이런 일이 벌어진 결과, 모든 퍼셉션은 사라졌으며, 그 자리를 대신 끔찍한 자기기만(persuasion), 즉, 가장 뿌리 깊고 치명적인 환상들이 차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을 질식시켜 멸망케 한 것입니다.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the heart was only evil every day signifies that there was no perception of truth and good, for the reason, as before said and shown, that they immers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in their filthy yearnings, and when this occurred all perception was lost, and in place thereof a dreadful persuasion succeeded, that is, a most deep-rooted and deadly fantasy, which was the cause of their extinction and suffocation.

 

이 끔찍한 자기기만, 죽음을 초래하는 신념이 바로 여기서 말씀하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 곧 그들이 마음으로 생각하고 고안해낸 것이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는 계획’, 곧 마음이 날조(fabricate), 조작하는 것이 ‘생각’, 사고(thoughts) 없이 언급될 때, 그것은 자기 사랑 혹은 갈망의 악, 곧 자기 사랑이나 욕망과 연결된 악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장에서 노아가 번제를 드린 후, 여호와께서 하신 아래 말씀에 나옵니다. This deadly persuasion is here signified by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the heart”; but by “the imagination of the heart,” without the word “thoughts,” is signified the evil of the love of self, or of yearnings, as in the following chapter, where Jehovah said, after Noah had offered a burnt offering: “I will not again curse the ground for man’s sake, because the imagination of the heart of man is evil from his childhood” (Gen. 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8:21)

 

계획’(imagination), 곧 제작(fabrication)은, 사람이 자기를 위해 지어내는 것, 곧 자기 마음 안을 꾸미며, 자기가 참이라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에 그 예가 있습니다. An “imagination” is that which man invents for himself, and of which he persuades himself; as in Habakkuk: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What profiteth a graven image, that the fashioner thereof hath graven it, the molten image and teacher of lies, that the fashioner trusteth to his imagination, to make dumb idols? (합2:18)

 

새긴 우상’, 조각물은 사람이 속으로 품고 생각해낸 것들에 기반을 둔 거짓된 설득, 신념, 자기기만을 상징합니다. ‘새겨 만든 자’, 제작자는 자기-설득된 사람, 곧 위에서 설명한 ‘계획’으로 설득된 사람입니다. A “graven image” signifies false persuasions originating in principles conceived and hatched out by one’s self; the “fashioner” is one who is thus self-persuaded, of whom this “imagination” is predicated.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O your perversity! Shall the potter be reputed as the clay, that the work should say to him that made it, He made me not; and the thing fashioned say to him that fashioned it, He had no understanding?; (사29:16)

 

여기 ‘빚음을 받은 물건’은 사람의 것에 기반한 사고와, 거짓과 거기서 나온 것에 의한 설득, 곧 자아중심적 사고와, 거짓을 참이라 하는, 거기서 나온 확신을 상징합니다. the “thing fashioned” here signifies thought originating in man’s own, and the persuasion of what is false thence derived.

 

빚음을 받은 물건’이나 ‘계획된’, 곧 제작(fabrication)이나 디자인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마음이나 의지로 고안한 것, 그리고 또 생각이나 신념(persuasion)으로 발명한 것입니다. 다윗의 글입니다. A “thing fashioned” or “imagined,” in general, is what a man invents from the heart or will, and also what he invents from the thought or persuasion, as in David: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Jehovah knoweth our fashioning [figmentum], he remembereth that we are dust. (시103:14)

 

모세의 글입니다. In Moses: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 I know his imagination that he doeth this day, before I bring him into the land. (신31:21)

2021-08-11(D4)-매일예배(AC.584-586, 창6,5),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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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YUuRfSgeJ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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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There were Nephilim in the earth in those days; and most especially after the sons of God went in unto the daughters of man, and they bare to them; the same became mighty men, who were of old, men of renown. (창6:4)

 

 

580. ‘네피림’은, ‘아, 나는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 아, 나는 얼마나 탁월한 사람인가...’ 하는 신념(persuasion)과 망상(delusions)에 사로잡혀, 거룩하거나 참된 어떤 것도 하찮게 여긴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는, 이런 일이 그들이 신앙에 관한 가르침을 그들의 갈망(yearnings)과 욕구(appetites)에 잠기게 하여, 거짓된 것을 신념화했을 때 일어났음을 말합니다. ‘그들은 용사라’는 그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는 전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By “Nephilim” are signified those who through a persuasion of their own loftiness and preeminence made light of all things holy and true; “and especially after the sons of God went in unto the daughters of man, and they bare to them” signifies that this occurred when they immersed the doctrinals of faith in their yearnings, and formed persuasions of what is false; they are called “mighty men” from their love of self; “of old, men of renown” signifies that there had been such before.

 

 

581. ‘네피림’ 하면, ‘아, 나는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 아, 나는 얼마나 탁월한 사람인가...’ 하는 신념과 망상에 사로잡혀, 거룩하거나 참된 어떤 것도 하찮게 여긴 사람들을 말한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것과 뒤에 이어지는 내용, 즉,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라는 말씀을 통해, 그들이 신앙에 관한 가르침을 그들의 갈망과 욕구에 잠기게 하여, 거짓된 것을 신념화하였음을 상징한다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by the “Nephilim” are signified those who through a persuasion of their own loftiness and preeminence made light of all things holy and true, appears from what precedes and what follows, namely, that they immersed the doctrinals of faith in their yearnings, signified by the “sons of God going in unto the daughters of man, and their bearing unto them.

 

그들 자신 및 그들이 가진 환상과 관련된 신념과 망상은 그와 관련된 것들이 축적되면 축적될수록 증가하다가 결국 되돌릴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갑니다. 이런 상태에서, 이번엔 여기다 신앙의 교리들, 신앙적인 가르침들까지 보태어지면 원리에 가까운 가장 강력한 엉뚱한 종교적 신념들이 생겨나고, 이것이 하나의 입장이 되면, 이번에는 거룩하고 참된 모든 것의 가치를 무시해 버리고 마는 상태가 되는데, 이 상태가 바로 ‘네피림’인 것입니다. Persuasion concerning self and its fantasies increases also according to the multitude of things that enter into it, till at length it becomes indelible; and when the doctrinals of faith are added thereto, then from principles of the strongest persuasion they make light of all things holy and true, and become “Nephilim.

 

이 네피림이라는 인종(race)은, 홍수 전에 살았는데, 자기들이 가진 끔찍한 환상, 망상으로 모든 영들을 질식시켜 죽이는 그런 인종입니다. (cf. AC.562-563) 이들에게서 쏟아져나오는 이 망상은 질식시키는 독가스 같은 것인데, 영들은 여기에 한 번 걸리면 생각하는 능력을 완전히 빼앗겨 거의 반 죽은 상태가 되지요. 주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런 독을 가진 인종으로부터 영들의 세계를 해방하여 주지 않으셨으면, 거기에 아무도 존재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들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인류는 사라졌을 것입니다. That race, which lived before the flood, is such that they so kill and suffocate all spirits by their most direful fantasies (which are poured forth by them as a poisonous and suffocating sphere) that the spirits are entirely deprived of the power of thinking, and feel half dead; and unless the Lord by his coming into the world had freed the world of spirits from that poisonous race, no one could have existed there, and consequently the human race, who are ruled by the Lord through spirits, would have perished.

 

그래서 그들은 지금 지옥 왼쪽 발뒤꿈치 아래, 안개 속 육중하고 거대한 바위 밑에 격리되어, 그곳을 빠져나갈 어떤 시도도 할 수 없습니다. They are therefore now kept in a hell under as it were a misty and dense rock, under the heel of the left foot, nor do they make the slightest attempt to rise out of it.

 

그래서 영들의 세계는 이 가장 위험한 무리로부터 안전합니다. 이들에 관한, 그리고 이런 종류의 신념, 망상이 왜 독과 같은 것인지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cf. AC.1265-1272) Thus is the world of spirits free from this most dangerous crew, concerning which and its most poisonous sphere of persuasions,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네피림’이라 하는 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거룩하고 참된 모든 것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These are they who are called “Nephilim,” and who make light of all things holy and true.

 

말씀에 그들에 대한 언급이 더 나오는데요, 그들의 후손은 ‘아낙 족속’으로, ‘르바임’으로 불렸습니다. Further mention is made of them in the Word, but their descendants were called “Anakim” and “Rephaim.

 

그들을 ‘아낙 자손’으로 불렀음이 모세의 글에 나옵니다. That they were called “Anakim” is evident from Moses: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There we saw the Nephilim, the sons of Anak, of the Nephilim, and we were in our own eyes as grasshoppers, and so we were in their eyes. (민13:33)

 

그들을 또한 ‘르바임’으로도 불렀음이 모세의 글에 나옵니다. That they were called “Rephaim” appears also from Moses:

 

10이전에는 에밈 사람이 거기 거주하였는데 아낙 족속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크므로 11그들을 아낙 족속과 같이 르바임이라 불렀으나 모압 사람은 그들을 에밈이라 불렀으며 The Emim dwelt before in the land of Moab, a people great, and many, and tall, as the Anakim, who also were accounted Rephaim, as the Anakim, and the Moabites call them Emim. (신2:10-11)

 

네피림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 반면, 르바임은 계속 나오는데, 선지자들은 르바임을 바로 위에서 다룬 저런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입니다. The Nephilim are not mentioned any more, but the Rephaim are, who are described by the prophets to be such as are above stated; as in Isaiah:

 

아래의 스올이 너로 말미암아 소동하여 네가 오는 것을 영접하되 그것이 세상의 모든 영웅을 너로 말미암아 움직이게 하며 열방의 모든 왕을 그들의 왕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 Hell low down has been in commotion for thee, to meet thee in coming, it hath stirred up the Rephaim for thee, (사14:9)

 

르바임 같은 영들이 거주하는 지옥을 설명합니다. speaking of the hell which is the abode of such spirits.

 

다시 이사야입니다. In the same: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Thy dead shall not live, the Rephaim shall not arise, because thou hast visited and destroyed them, and made all their memory to perish, (사26:14)

 

여기서도 그들의 지옥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다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where also their hell is referred to, from which they shall no more rise again.

 

계속 이사야입니다. In the same: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Thy dead shall live, my corpse, they shall rise again; awake and sing, ye that dwell in the dust, for the dew of herbs is thy dew; but thou shalt cast out the land of the Rephaim; (사26:19)

 

르바임의 땅’은 위에서 말한 지옥입니다. the land of the Rephaim” is the hell above spoken of.

 

다윗의 글입니다. In David: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Wilt thou show a wonder to the dead? Shall the Rephaim arise, shall they confess to thee? (시88:10)

 

르바임의 지옥에 대해 같은 뜻으로 말하면서, 그들은 절대 일어나지 못하며, 그들의 아주 끔찍한 독과 같은 망상으로 영들의 세계를 들끓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speaking in like manner concerning the hell of the Rephaim, and that they cannot rise up and infest the sphere of the world of spirits with the very direful poison of their persuasions.

 

그러나 주님은 인류가 더 이상 그런 끔찍한 망상과 신념에 푹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But it has been provided by the Lord that mankind should no longer become imbued with such dreadful fantasies and persuasions.

 

홍수 전을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들로 하여금 그런 뒤틀린 생각들을 흡수하게 했던 본성(nature)과 정신(genius)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아직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으나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cf. AC.927) 밝힐 것입니다. Those who lived before the flood were of such a nature and genius that they could be imbued, for a reason as yet unknown,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582.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After that the sons of God came in unto the daughters of men, and they bare to them.

 

이 말씀은, 그들이 신앙에 대한 가르침들을 자신들의 타락한 갈망을 가지고 합쳐버린 바로 그때, 그들은 네피림이 되었다는 뜻으로, 이런 사실은 위 2절의 내용, 즉,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앙의 가르침들을, ‘딸들’은 갈망을 각각 상징함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became Nephilim when they had immersed the doctrinals of faith in their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nd shown above in verse 2, namely, that the “sons of God” signify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and that “daughters” signify yearnings.

 

그 결과는, 신앙의 거룩한 속성들을 하찮게 여기고, 모독하는 것밖에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곧 물질만능주의로 되어 있는 인간의 갈망은 거룩하고 참된 것하고는 완전히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The birth thereby produced must needs make light of and profane the holy things of faith, for the yearnings of man, being those of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are altogether contrary to what is holy and true.

 

지금은 사람 안에 갈망이 만연합니다. 거룩하고 참되며, 또 그런 걸로 인식되는 무언가가 갈망에 잠기면, 사람은 끝입니다. 갈망은 뿌리뽑히거나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망은 모든 생각(idea)에 착 달라붙습니다. 예를 들면, 저세상에서는 생각으로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거룩하고 참된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모독과 거짓이 그 생각과 결합하고, 이런 이상한 일은 즉시 지각됩니다. Now in man yearnings prevail, so that when what is holy and true, and is acknowledged to be such, is immersed in yearnings, it is all over with the man, for the yearnings cannot be rooted out and separated; they cling to every idea, and in the other life it is ideas that are communicated from one to another, so that as soon as any idea of what is holy and true is brought forth, what is profane and false is joined to it, which is instantly perceived.

 

이런 이유로,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분리되어 지옥으로 던져지게 됩니다. Therefore such persons have to be separated and thrust down into hell.

 

 

583. 네피림을 일컬어 ‘용사’라 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말씀 여러 곳에서 그런 사람을 가리켜 ‘용사’라 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That the Nephilim are called “mighty men” from the love of self, is evident from various passages of the Word, where such are called “mighty”; as in Jeremiah:

 

바벨론의 용사는 싸움을 그치고 그들의 요새에 머무르나 기력이 쇠하여 여인 같이 되며 그들의 거처는 불타고 그 문빗장은 부러졌으며 The mighty ones of Babel have ceased to fight, they sit in their holds, their might faileth, they are become as women, (렘51:30)

 

여기 ‘바벨론의 용사’는 자기 사랑의 덫에 걸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where the “mighty ones of Babel” denote those who are eaten up with the love of self.

 

같은 예레미야입니다. In the same:

 

칼이 자랑하는 자의 위에 떨어지리니 그들이 어리석게 될 것이며 칼이 용사의 위에 떨어지리니 그들이 놀랄 것이며 A sword is against the liars, and they shall be insane, a sword is against her mighty ones, and they shall be dismayed. (렘50:36)

 

5그들이 놀라 물러가며 그들의 용사는 패하여 황급히 도망하며 뒤를 돌아보지 아니함은 어찜이냐 두려움이 그들의 사방에 있음이로다 6발이 빠른 자도 도망하지 못하며 용사도 피하지 못하고 그들이 다 북쪽에서 유브라데 강가에 넘어지며 엎드러지는도다 9말들아 달려라 병거들아 정신없이 달려라 용사여 나오라 방패 잡은 구스 사람과 붓 사람과 활을 당기는 루딤 사람이여 나올지니라 하거니와 I saw them dismayed, and turning away back, their mighty ones were broken in pieces, and have been put to flight, and looked not back; fear was round about; the swift shall not flee away, nor the mighty one escape; come up, ye horses, and rage, ye chariots, and let the mighty ones go forth, Cush, Put, the Lydians, (렘46:5-6, 9)

 

사람을 속이는 합리화에 관한 말씀입니다. speaking of persuasion from reasonings.

 

계속해서 Again:

 

14너희가 어찌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용사요 능란한 전사라 하느냐 15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모압이 황폐하였도다 How say ye, We are mighty, and men of strength for war? Moab is laid waste. (렘48:14-15)

 

성읍들이 점령을 당하며 요새가 함락되는 날에 모압 용사의 마음이 산고를 당하는 여인 같을 것이라 The city is taken, and the strongholds, it has been seized, and the heart of the mighty men of Moab in that day is become as the heart of a woman in her pangs. (렘48:41)

 

같은 뜻으로 말씀하시기를 In like manner it is said:

 

에돔 용사의 마음이 진통하는 여인 같이 되리라 하시니라 The heart of the mighty ones of Edom. (렘49:22)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 Jehovah hath redeemed Jacob, and hath avenged him from the hand of him that was mightier than he, (렘31:11)

 

여기 ‘강한 자’는 다른 말, 히브리 말 표현입니다. where “mighty” is expressed by another term.

 

네피림이었던 아낙 자손이 ‘강대한 나라들’이었음은 모세의 글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Anakim, who were of the Nephilim, were called “mighty ones” is evident from Moses:

 

1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2크고 많은 백성은 네가 아는 아낙 자손이라 그에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 Thou passest over Jordan today, to go in to possess nations greater and more numerous than thyself, cities great and fortified to heaven, a people great and tall, the sons of the Anakim, whom thou knowest, and of whom thou hast heard; who shall stand before the sons of Anak? (신9:1-2)

2021-08-10(D3)-매일예배(AC.580-583, 창6,4), '네피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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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G9mhStcx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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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My spirit shall not reprove man forever, for that he is flesh; and his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창6:3)

 

 

577. ‘열둘’이라는 숫자가 신앙, 혹은 사랑의 속성들과 그 속성에서 대략적으로 파생된 신앙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말씀 여러 구절, 곧 여러 현상을 통해 또한 확인할 수 있는데요, 가령, 야곱의 ‘열두’ 아들과 그들의 이름이라든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든지, 그리고 주님의 ‘열두’ 제자 등등... 그러나 이와 관련된 내용은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나중에(cf. AC.3858, 3913:1), 특히 창세기 29장과 30장을 다룰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That the number “twelve” signifies faith, or the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faith in one complex, might also be confirmed by many passages from the Word, as from the “twelve” sons of Jacob and their names, the “twelve” tribes of Israel, and the Lord’s “twelve” apostles; but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especially in Genesis 29 and 30.

 

 

578. 이 숫자들을 살핀 것만으로도 주님의 말씀은 그 심장과 내면 깊숙이 무엇이 들어 있으며, 육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얼마나 많은 아케이나가 그 안에 봉인되어 있는지가 분명해졌습니다. From these numbers alone it is evident what the Word of the Lord contains in its bosom and interior recesses, and how many arcana are concealed therein which do not at all appear to the naked eye.

 

말씀 어디서나 그렇습니다. 모든 말씀에 다 그런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And so it is everywhere: there are like things in every word.

 

 

579. 여기서 다룬 홍수 전 세대의 경우, 리메인스가 아주 적거나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cf. AC.660, 661:2) 그들에 대해 주로 다루게 될 때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리메인스가 전혀 보존될 수 없었기 때문에 ‘노아’라는 새 교회의 출현이 여기 예언된 것인데요, 이들은 리메인스를 가지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에 관하여도 역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cf. AC.635, 737, 1050) That with the antediluvians here treated of there were few and almost no remains, will be manifest from w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said of them hereafter; and as no remains could be preserved among them, it is here foretold of the new church called “Noah” that it should have remains; concerning which also,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2021-08-09(D2)-매일예배(AC.577-579, 창6,3), '열둘, 숫자에 담긴 아케이나, 리메인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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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2KERgcf8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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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And the sons of God saw the daughters of man that they were good; and they took to themselves wives of all that they chose. (창6:2)

 

 

569.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앙의 교리, 가르침(teachings)을 상징합니다. By the “sons of God” are signifi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여기 나오는 ‘딸들’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갈망, 욕망(cravings)을 상징합니다. By “daughters,” here as before, yearnings.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는 신앙의 가르침과 사람의 욕망 둘을, 그 욕망이 무엇이든, 어떤 종류든 상관없이 이 둘을 단단히 묶었다는 뜻입니다. By the “sons of God seeing the daughters of man that they were good, and taking to themselves wives of all that they chose” is signified that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conjoined themselves with yearnings, in fact with any yearnings whatever.

 

※ 여기 둘을 묶었다, 결합하게 했다, 또는 잠기게 했다 하는 표현의 뜻은, 신앙의 교리, 신학, 가르침을 자신의 갈망, 자신의 욕구, 욕망을 해소, 해결하는 방편으로 이용했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의 진리, 곧 주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주님의 말씀이며, 주님이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순전함으로 따라야 하는데, 이들은 그럴 마음은 전혀 없고, 대신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만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주님의 것에 사사로이 사람의 것을 섞는 신성모독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자기 사랑의 모습이며, 결코 주님 사랑이 아닙니다.

 

 

570. ‘하나님의 아들들’이 신앙의 가르침을 상징한다는 것은, ‘아들들’의 상징을 보면 분명합니다. (바로 위, 그리고 앞 장 4절, ‘아들들’은 교회의 진리를 상징한다는 내용 참조, AC.489) That by the “sons of God” are signified doctrinal things of fait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sons” (concerning which just above, and also in the preceding chapter, verse 4, where “sons” signify the truths of the church).

 

교회의 진리는 교리 형태의 가르침으로 되어 있으며, 본 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 진리를 참으로 여겼습니다. 태고인들을 통해 구전(口傳)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진리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부르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갈망을 가리켜 ‘사람의 딸들’이라 부르기 때문에, 비교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기도 합니다. The truths of the church are doctrinal things, which regarded in themselves were truths because those here treated of had them by tradition from the most ancient people, and therefore they are called the “sons of God”; they are so called also relatively, because yearnings are called the “daughters of man.

 

본 절에서는 이 교회 사람들의 퀄러티(캐릭터)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즉, 이들은 본래 거룩했던, 교회의 진리를 자기들의 갈망으로 잠기게 했고, 그렇게 더럽혔으며, 그런 식으로, 그들은 자기들이 강하게 붙들고 있는 원리들을 더욱 더 신념으로 확고하게 삼았습니다. The quality of the members of this church is here described, namely, that they immersed the truths of the church, which were holy, in their yearnings, and thereby defiled them; and in this way they confirmed the principles of which they were so strongly persuaded.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면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주제에 관해 자신을 확신시키고자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진리임을 모든 그럴듯한 것들을 가지고, 심지어는 주님의 말씀으로부터도 가지고 와서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채택한 원리들과 신념들에 착 달라붙어 있는 한, 우리는 모든 것을 그것들과 일치시키려 하고 조화시키려 합니다. How this occurred may be easily conceived by anyone, from observing what passes in himself and others: those who persuade themselves in regard to any subject, confirm themselves in such persuasion by everything which they imagine to be true, even by what they find contained in the Word of the Lord; for while they cling to principles which they have received, and have become persuaded of, they make everything favor and assent to them.

 

우리가 우리 자신에 빠져들면 들수록, 우리는 점점 더 완고하게 그 입장을 고수합니다. And the more anyone is under the influence of self-love, the more firmly he holds them.

 

이런 설명이 지금 논의 중인 인종(人種, race)에 딱 맞습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우리가 그들의 가공할 신념들을 다루게 될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cf. AC.573, 580-586a, 607:3, 619-637, 659-662, 792-813) 참 말씀드리기 생소한 것은,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랬다면 그들은 그들 주위 영들의 모든 합리적인 능력들을 죄다 죽여버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욕망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했습니다. Such was this race, concerning whom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when we come to treat of their direful persuasions, which strange to say are such that they are never allowed to flow in by reasonings, but only from yearnings, for otherwise they would kill everything rational in the spirits present.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그들이 신앙의 가르침들과 그들의 욕망 둘을 하나로, 실제로 어떤 종류의 무슨 욕망이든지, 이 둘을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Hence it appears what is signified by the “sons of God seeing the daughters of man, that they were good, and taking to themselves wives of all that they chose,” namely, that they conjoin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with their yearnings, in fact with any yearnings.

 

 

571. 사람이 정신 나간 욕망 가운데 신앙의 진리를 침수시키는 그런 캐릭터가 될 때, 그는 진리를 모독하며, 자신에게서 리메인스를 빼앗습니다. 비록 이들 리메인스가 사람 안에 머물지라도 그는 이 리메인스를 양심으로 데리고 가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순간, 그는 이미 더럽혀진 사고(思考, thoughts)로 또 다시 리메인스를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신성모독은 일종의 굳은살을 만들어 모든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마치 댐처럼 차단, 흡수해버리고 맙니다. When a man is of such a character that he immerses the truths of faith in his insane yearnings, he then profanes the truths, and deprives himself of remains, which although they remain cannot be brought forth, for as soon as they are brought forth they are again profaned by things that are profane; for profanations of the Word produce as it were a callosity, which causes an obstruction, and absorbs the goods and truths of remains.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훼손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거짓된 원리, 가정(assumptions)에 사로잡혀있는 사람한테는 진리가 들어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에는 영원한 산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Therefore let man beware of the profanation of the Word of the Lord, which contains the eternal truths wherein is life, although one who is in false principles does not believe that they are truths.

2021-08-07(D7)-토요예배(AC.569-571, 창6,2), '홍수를 자초한 사람들의 퀄러티(캐릭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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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azWW7mOKF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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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And it came to pass that man began to multiply himself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and daughters were born unto them. (창6:1)

 

 

566. [4] 에스겔에서 In Ezekiel:

 

41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나오게 하고 너희가 흩어진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낼 때에 내가 너희를 향기로 받고 내가 또 너희로 말미암아 내 거룩함을 여러 나라의 목전에서 나타낼 것이며 42내가 내 손을 들어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고 I will gather you out of the lands wherein ye have been scattered,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when I shall bring you again into the ground of Israel, into the land for which I lifted up my hand to give it to your fathers, (겔20:41-42)

 

이스라엘 ‘’(ground)은 내적 예배를 상징합니다. 내적 예배가 없는 곳은 여러 ‘나라’(land)라고 합니다. where “ground” signifies internal worship; it is called “land” when there is no internal worship.

 

말라기에서 In Malachi:

 

1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I will rebuke him that consumeth for your sakes, and he shall not corrupt for you the fruit of the ground, nor shall the vine be bereaved for you in the field and all nations shall call you blessed, because ye shall be a delightsome land, (말3:11-12)

 

너희 ‘’(land)은 컨테이너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토지’(ground)가 교회, 혹은 교리를 가리킬 때, ‘’(land)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where “land” denotes the container, and therefore it plainly denotes man, who is called “land” when “ground” denotes the church, or doctrine.

 

[5] 모세의 글에서 In Moses: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Sing, O ye nations, his people, he will make expiation for his ground, his people, (신32:43)

 

이것은 분명히 이방인들, 곧 유대인이 아닌 나라들의 교회를 상징하며, 그걸 가리켜 자기 ‘’(ground)이라 하고 있습니다. evidently signifying the church of the gentiles, which is called “ground.

 

이사야에서 In Isaiah: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Before the child shall know to refuse the evil and choose the good, the ground shall be forsaken, which thou abhorrest in presence of both her kings, (사7:16)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ground will be forsaken)를 통해 교회, 혹은 신앙에 관한 참된 교리를 위해 준비된 땅이 황폐해질 것을 말하면서, 주님의 강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speaking of the advent of the Lord; that the “ground will be forsaken” denotes the church, or the true doctrine of faith.

 

’(ground)과 ‘’(field)이라는 말들은 곡식 심기와 연결되어 사용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사야에서처럼 말입니다. That “ground” and “field” are so called from being sown with seed is evident; as in Isaiah:

 

23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24밭 가는 소와 어린 나귀도 키와 쇠스랑으로 까부르고 맛있게 한 먹이를 먹을 것이며 Then shall he give rain of thy seed wherewith thou shalt sow the ground; the oxen also and the young asses that labor on the ground. (사30:23-24)

 

그리고 요엘입니다. And in Joel: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The field is laid waste, and the ground hath mourned, because the corn is laid waste. (욜1:10)

 

이런 걸 보면, 히브리말로 ‘아담’이라고 하는 ‘사람’은 ‘토지’(ground)에서 왔으며, 교회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ence then it is evident that “man,” who in the Hebrew tongue is called “Adam,” from “ground,” signifies the church.

 

 

567. 참된 신앙에 관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사는 지역 전부를 총체적으로 아울러 교회 지역이라고 합니다. 전에 유대 교회가 있었던 가나안 땅 같은 곳이지요. 지금 기독 교회가 있는 유럽 또한 그렇습니다. 그 외의 지역과 나라들은 교회 지역이 아니며, 이것이 곧 오늘 본문, ‘땅 위’(faces of the ground)의 의미입니다. All that region is called the region of the church where those live who are instructed in the doctrine of true faith; as the land of Canaan, when the Jewish church was there, and Europe, where the Christian church now is; the lands and countries outside of this are not the region of the church, or the “faces of the ground.

 

홍수 전 교회들이 있었던 곳은 에덴동산에서 발원한 강들로 둘러싸인 땅들을 보고도 알 수 있겠는데요, 이 강들은 말씀 여러 곳에서 가나안 땅 경계로 자주 언급된 강들입니다. (cf. 창15:18; 신1:7; 11:24; 수1:4; 왕상5:9) Where the church was before the flood, may also appear from the lands which the rivers encompassed that went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by which in various parts of the Word are likewise described the boundaries of the land of Canaan;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15:18)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방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네겝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신1:7)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의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라 (신11:2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수1:4)

 

또 동으로 가서 거주하면서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광야 지경까지 다다랐으니 이는 길르앗 땅에서 그 가축이 번식함이라 (대상5:9)

 

그 장소는 또한 이어지는 내용들, 가령, 네피림이 ‘거기에’(in the land) 있었다는 사실과, 그들이 가나안 땅에 거주했다는 민수기 13장 33절 말씀,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에 관한 말씀 등으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and also from what follows concerning the Nephilim that were “in the land”; and that these Nephilim dwelt in the land of Canaan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the sons of Anak: that they were “of the Nephilim” (Num. 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13:33)

 

 

568. ‘딸들’(daughters)이 그런 사람의 의지 안에 거주하는 것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갈망, 욕망을 상징한다는 것은, 그동안 ‘자녀들’(sons and daughters) 관련, 앞장에서 다루어 온 내용들(AC.489-491, 창5:4)을 보면 분명하며, 거기서 ‘아들들’(sons)은 진리를, ‘딸들’(daughters)은 선을 각각 상징합니다. That “daughters” signify such things as are of the will of that man, consequently yearnings,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nd shown concerning “sons and daughters” in the preceding chapter (Gen. 5:4), where “sons” signify truths, and “daughters,” goods.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딸들’, 혹은 선은 의지에 속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런 사람이면 그의 인식능력도, 그의 의지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자녀들’입니다. Daughters,” or goods, are of the will, but such as a man is, such is his understanding and such his will, thus such are the “sons and daughters.

 

※ 즉, 우리의 지적 능력과 의지가 어떤 모습일지는 우리의 캐릭터가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자녀들’ 또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다루는 사람은 부패한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은 의지랄 게 없으며, 대신 원색적 욕망만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걸 의지로 여기며, 실제로 그렇게 부릅니다. The present passage treats of man in a corrupt state, who has no will, but mere cupidity instead of will, which is supposed by him to be will, and is also so called.

 

어떤 것에 대한 설명은 설명하고 있는 그것의 퀄러티와 일치합니다. 여기서 딸들이 설명하고 있는 사람은 앞서 지금까지 죽 설명해온 대로 부패한 사람입니다. (cf. AC.560, 562-563, 565) What is predicated is in accordance with the quality of the thing whereof it is predicated, and that the man of whom the daughters are here predicated was a corrupt man, has been shown before.

 

딸들’은 의지 안에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선을 위한 게 전혀 없으면, 그때는 갈망(yearnings)을 상징하게 되며, ‘아들들’은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 안에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진리에 관한 이해가 전혀 없으면, 그때는 환상(fantasies)을 상징합니다. 왜 이런가 하는 것은, 성(sex)의 본성 때문입니다. 여성은 태생적으로 의지나 탐욕(cupidity)이 이해하는 능력을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The reason why “daughters” signify the things of the will, and, where there is no will of good, yearnings; and why “sons” signify th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nd, where there is no understanding of truth, fantasies, is that the female sex is such, and so formed, that the will or cupidity reigns in them more than the understanding.

 

여성의 몸 모든 섬유조직이 다 이런 기질(disposition), 이런 성향이며, 이것이 여성의 본성인 반면, 남성은 지성(intellect) 또는 이성(reason)이 우위를 나타내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성의 몸 모든 섬유조직이 다 이런 기질, 이런 성향이며, 이것이 남성의 본성입니다. Such is the entire disposition of their fibers, and such their nature, whereas the male sex is so formed that the intellect or reason rules, such also being the disposition of their fibers and such their nature.

 

두 사람 간 결혼이 그래서 각 사람 안의 의지와 이해하는 능력 간 결혼과 비슷한 것입니다. 오늘날엔 선을 위한 의지는 없고, 대신 탐욕(cupidity)만 있으며, 약간의 지성이나 이성만 가능한데, 이것이 바로 유대 교회에 있는 그 많은 법들이 왜 남편의 특권(prerogative)과 아내의 복종에 관한 것인지 하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Hence the marriage of the two is like that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in every man; and since at this day there is no will of good, but only cupidity, and still something intellectual, or rational, can be given, this is why so many laws were enacted in the Jewish church concerning the prerogative of the husband [vir], and the obedience of the wife.

2021-08-06(D6)-매일예배(AC.566-568, 창6,1), '땅 위, 딸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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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7KWMMXap4Qc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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