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

 

28. 10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Verse 10.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말씀에서, ‘’ 하면 거의 백 프로 지식(라, cognitiones et scientifica, 앎, 인식 및 학문)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바다’는 지식을 모아놓은 곳, 지식을 저장한 곳을 상징하지요. It is a very common thing in the Word for “waters” to signify 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 and consequently for “seas” to signify a collection of knowledges.

 

이사야입니다. As in Isaiah: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11:9) The earth shall be full of the knowledge [scientia] of Jehovah, as the waters cover the sea. (Isa. 11:9)

 

지식의 결핍을 다루고 있는, 이사야서 다른 데서는 And in the same prophet, where a lack of knowledges [cognitionum et scientificorum] is treated of:

 

5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 6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겠고 애굽의 강물은 줄어들고 마르므로 갈대와 부들이 시들겠으며 (사19:5-6) The waters shall fail from the sea, and the river shall be dried up and become utterly dry, and the streams shall recede. (Isa. 19:5–6)

 

학개서에서는, 새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In Haggai, speaking of a new church:

 

6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2:6-7)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the sea and the dry [land]; and I will shake all nations; and the desire of all nations shall come; and I will fill this house with glory. (Hag. 2:6–7)

 

또한 거듭남의 과정 가운데 있는 사람과 관련, 스가랴에서는 And concerning man in the process of regeneration, in Zechariah:

 

7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슥14:7-8) There shall be one day, it is known to Jehovah; not day, nor night; but it shall come to pass tha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and it shall be in that day that living waters shall go out from Jerusalem, part of them toward the eastern sea, and part of them toward the hinder sea. (Zech. 14:7–8)

 

다윗 또한 지금은 황폐해졌으나 앞으로 거듭나 주님을 섬기게 될 사람을 묘사하면서 David also, describing a vastated man who is to be regenerated and who will worship the Lord:

 

33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34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시69:33-34) Jehovah despiseth not his prisoners; let the heavens and the earth praise him, the seas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therein. (Ps. 69:33–34)

 

’은 뭘 담는 것, 곧, 일종의 리시피언트(recipient)인데, 스가랴를 보면 나옵니다. That the “earth” signifies a recipient, appears from Zechariah: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슥12:1) Jehovah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 of the earth, and formeth the spirit of man in the midst of him. (Zech. 12:1)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10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속뜻)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 안에서 주님은 궁창, 곧 속 사람을 만드시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구분하신 후, 속 사람 안에 두신 주님의 지식을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가게 하십니다. 주님은 이 겉 사람 안에 보관하신 지식으로 나중에 그의 회심(回心)에 사용하실 예정이십니다. 이 지식은 속 사람을 통해서 겉 사람에게 전달된 주님의 선과 진리, 곧 주님의 신성이십니다.

 

※ 주님의 시야는 영원하시며, 무궁하십니다. 주님은 이런 능력으로 섭리하십니다. 우리 역시 타인은 물론, 자신을 향해서도 주님의 이런 시야를 가지고 대해야 하겠습니다. 즉, 사람들의 어떤 표면적인 모습 그 이면에 있는, 주님이 보관하신 주님의 것, 곧 신성을 발견하며, 그 신성에 맞는 예의를 가지고 사람들을, 곧 주님을 대해야, 섬겨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은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뿐이겠습니까?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 주님의 신성이 있으므로 사실은,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마치 주님 대하듯 예의바르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이웃 사랑입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AC.28, 창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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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iA4jRifr_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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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Verse 9.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자기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리고 진리들과 선들이 속 사람으로부터(from), 혹은 속 사람을 통해서(through) 겉 사람 안으로 주님으로부터, 비록 그렇게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흘러들어 온다는 사실이 알려질 때, 그때, 거듭나는 중인 사람 안에서는 그 진리들과 선들, 혹은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이 그의 기억 안에 쌓이게 되며, 그 지식들 가운데로 분류되어 들어가게 됩니다. 겉 사람의 기억 안으로 밀어넣어지고 있는 게 무엇이든, 그게 자연적이든, 아니면 영적, 혹은 천적이든, 그것은 기억-지식으로 거기에 머무르다가, 나중에 주님에 의해 꺼내어지기 때문입니다. When it is known that there is both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 and that truths and goods flow in from, or through,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from the Lord, although it does not so appear, then those truths and goods, or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the good in the regenerating man, are stored up in his memory, and are classed among its knowledges [scientifica]; for whatsoever is insinuated into the memory of the external man, whether it be natural, or spiritual, or celestial, abides there as memory-knowledge, and is brought forth thence by the Lord.

 

이 지식들이 바로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즉, 한곳으로 모인 물이며, 이걸 ‘바다’라 하는 것입니다. 한편, 겉 사람 자신을 가리켜서는 ‘’이라 하고, 이어지는 10절에서는 ‘’이라 하고 있습니다. These knowledges are the “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 and are called “seas,” but the external man himself is called the “dry [land],” and presently “earth,” as in what follows.

 

AC.27, 창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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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ptfqFtBg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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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Verse 6.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혹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가 날(day) 안에 참과 선에 속한 지식을 낳으시고(has brought forth), 빛을 처음으로 주십니다(has given). 이 빛은 곧 주님이시며, 선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십니다. 주님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그 어떤 선과 진리도 있을 수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 후에, 주님은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어떤 구별을 두시는데(makes), 그 결과,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들(the knowledges, [cognitiones])과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들(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사이에 일종의 구별이 생깁니다. After the spirit of God, or the Lord’s mercy, has brought forth into day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and has given the first light, that the Lord is, that he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and that there is no good and truth but from him, he then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consequently between the knowledges [cognitiones] that are in the internal man, and 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that belong to the external man.

 

속 사람은 ‘궁창’(穹蒼, an expanse),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궁창 위의 물’,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이라 합니다. The internal man is called an “expanse”; the knowledge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above the expanse”; and the memory-knowledges of the ex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

 

[2] 사람은 거듭남이 진행되기 전에는 무슨 속 사람 같은 게 있는지조차도 모릅니다. 속 사람 같은 내면세계는커녕 오히려 겉 사람의 본성과 퀄리티 같은 거에 더 익숙해져 있지요. Man, before he is being regenerated, does not even know that any internal man exists, much less is he acquainted with its nature and quality.

 

그는 생각하기를, ‘속 사람, 겉 사람은 서로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합니다. He suppose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to be not distinct from each other.

 

그 자신 이미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일에 푹 잠겨 있으므로, 속 사람 같은 내면의 일들 역시 그런 식으로, 혼란스럽고 모호한 그 어떤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For, being immersed in bodily and worldly things, he has also immersed in them the things that belong to his internal man, and has made of things that are distinct a confused and obscure unit.

 

그런 까닭으로, 먼저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 하시고, 이어서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십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라’ 하십니다. 뒤에 나오는 구절들에서 말이지요. Therefore it is first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then,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but not,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as is afterwards said in the next verses: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1:7-8)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Gen.1:7–8)

 

[3] 그래서 전체 거듭남의 과정 가운데 사람이 이제 다음으로 관찰하게 되는 사실은, 먼저 속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속 사람에게 속한 일들은 선과 진리이며, 그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이라는 사실 등입니다. The next thing therefore that man observe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is that he begins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man, or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which are of the Lord alone.

 

그런데 이렇게 거듭나고 있는 가운데 재미있는 사실은, 겉 사람의 경우, 그 본성상 사람은 지금 자기가 행하는 선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로 여전히 안다는 것입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로 여전히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듭남이 시작되었어도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주님은 처음부터 감안하고 계십니다. 그는 자기 것으로 이렇게 하는 줄 알지만 주님은 그 사람의 이런 착각까지도, 그의 겉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사용하셔서 결국은 그를 주님 쪽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이 바로 ‘궁창 아래의 물’이 먼저 언급되고, ‘궁창 위의 물’이 뒤를 따르는 이유입니다. Now as the external man, when being regenerated, is of such a nature that he still supposes the goods that he does to be done of himself, and the truths that he speaks to be spoken of himself, and whereas, being such, he is led by them of the Lord, as by things of his own, to do what is good and to speak what is true, therefore mention is first made of a distinction of the waters under the expanse, and afterwards of those above the expanse.

 

이것이 바로 하늘의 신비입니다. 사람의 미련함, 어리석음, 연약함과 그에 따른 오류 같은 것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인도되어 선과 진리의 일들로 구부려지는 신비,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들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전체적이든 세부적이든, 겉 사람에게서 속 사람까지, ‘땅’에서 ‘하늘’까지 주님의 섭리 아래 한 사람의 거듭남으로 인도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비 중 신비입니다. It is also an arcanum of heaven, that man, by things of his own, as well by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by cupidities, is led and bent by the Lord to things that are true and good, and thus that every movement and moment of regeneration,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proceeds from evening to morning, thu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or from “earth” to “heaven.” Therefore the expanse, or internal man, is now called “heaven.”

 

 

25. ‘하늘을 폈으며 땅을 펼쳤고’라는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때, 예언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공통구와 같은 것입니다. To “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 is a common form of speaking with the prophets, when treat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이사야에서처럼 말입니다. As in Isaiah:

 

24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am Jehovah that maketh all things,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lone, that spreadeth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또 주의 오심을 드러내어 말하는 아래와 같은 구절을 보면, And again, where the advent of the Lord is openly spoken of:

 

3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사42:3)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Isa. 42:3)

 

즉, 주님은 사람들의 오류나 틀린 생각을 바로잡으시지도, 재산이나 권력 등에 대한 탐욕을 끄지도 않으시고 대신, 그것들을 진리와 선 쪽으로 방향을 구부러지게 하십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이지요. 주님은 우리를 아프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이 주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that is, he does not break fallacies, nor quench cupidities, but bends them to what is true and good; and therefore it follows:

 

5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42:5) Jehovah God createth the heavens, and stretcheth them out; he spreadeth out the earth, and the productions thereof; he giveth breath unto the people upon it, and spirit to them that walk therein (Isa. 42:5)

 

내용이 같은 구절들은 반복해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Not to mention other passages to the same purport.

 

 

26.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저녁’, ‘아침’, ‘날’의 의미는 앞서 5절에서 다룬 것과 같습니다. The meaning of “evening,” of “morning,” and of “day,” was shown above at verse 5.

 

AC.24-26, 창1,6-8,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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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6U5cQiazew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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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22. 5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Verse 5.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저녁’이 의미하는 것과, ‘아침’이 의미하는 것을 이제 설명할 수 있습니다. What is meant by “evening” and what by “morning” can now be discerned.

 

저녁’은 모든 선행 상태, 앞서 있었던 모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는 그늘진 상태, 거짓의 상태, 아무런 신앙이 없는 상태입니다. ‘아침’은 모든 후속 상태, 앞으로 진행될 상태를 말합니다. 빛의 상태, 진리의 상태, 신앙에 관한 지식의 상태입니다. Evening” means every preceding state, because it is a state of shade, or of falsity and of no faith; “morning” is every subsequent state, being one of light, or of truth and of the knowledges of faith,

 

저녁’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본성에 속한 모든 걸 의미합니다. 반면에, ‘아침’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 주님께 속한 것을 말합니다. 다윗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Evening,” in a general sense, signifies all things that are of man’s own; but “morning,” whatever is of the Lord, as is said through David: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 and his word was on my tongue; the God of Israel said, 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 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 when the sun ariseth, even a morning without clouds, when from brightness, from rain, 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 (2 Sam. 23:2–4)

 

아무 신앙이 없는 때를 ‘저녁’이라, 신앙의 때를 ‘아침’이라 하였으므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이 ‘아침’이요, 주님이 떠나가실 때, 그때는 신앙이 없는 때이므로, ‘저녁’이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에서처럼 말입니다. 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26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단8:14, 26)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

 

같은 식으로, 말씀에서 ‘아침’은 모든 주님의 오심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며,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새 창조에 관한 표현입니다. In like manner “morning” is used in the Word to denote every coming of the Lord; consequently it is an expression of new creation.

 

 

23. 때 자체를 가리키는데 ‘’(day)이 사용되는데, 말씀에서 이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be used to denote time itself.

 

이사야에서처럼, As in Isaiah: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사13:6, 9, 13, 22)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Behold, the day of Jehovah cometh.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 Her time is near to come, 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 (Isa. 13:6, 9, 13, 22)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15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사23:7, 15) 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 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 (Isa. 23:7, 15)

 

’이 때를 가리키는데 사용되기 때문에, 이 표현은 또한 그 때의 상태를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예레미야에서처럼 말입니다. As “day” is used to denote time, it is also used to denote the state of that time, as in Jeremiah: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렘6:4) Woe unto us, for the day is gone down, 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are stretched out. (Jer. 6:4)

 

20여호와의 진노가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끝날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25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렘23:20, 25) If ye shall make vain my covenant of the day, and my covenant of the night, so that there be not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 (Jer. 23:20, also 25)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AC.22-23, 창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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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e8_HjwMR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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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9. 9절,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Verse 9. Is not the whole land before thee? Separate, I pray, from me; if to the left hand, then I will go to the right; and if to the right hand, then I will go to the left.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모든 선을, Is not the whole land before thee?” signifies all good.

 

나를 떠나가라’, 그 선은 하나 되지 못하는 것들(what is discordant), 함께 할 수 없는 것들,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이 전부 사라지지 않는 한, 나타날 수 없음을,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분리(separation), 헤어짐을 각각 의미합니다. Separate, I pray, from me,” signifies that the good cannot appear unless what is discordant is made none; “if to the left hand, then I will go to the right; and if to the right hand, then I will go to the left,” signifies separation.

 

 

1580.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Is not the whole land before thee?

 

이 표현의 의미가 모든 선(all good)이라는 것은 ‘’(land)이 가지는 어떤 좋은 뜻(a good sense)과, 여기서는 가나안 땅의 의미, 곧, 천적이며, 그래서 또한 선한, 그런 의미임을 볼 때 분명히 그렇습니다. (※ 관련 글은 저 위 566, 620, 636, 662번 글 참조) That this signifies all goo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land” in a good sense, and here of the land of Canaan, which is the celestial, and therefore also good (concerning which see above, n. 566, 620, 636, 662).

 

※ ‘가나안 땅’은 좋은 뜻으로는 천적인 것, 선, 천국과 교회, 더 나아가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 말씀(the Word)에서는 하나의 용어가 완전히 정반대의 의미를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좋은 뜻으로는’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은 겉 사람, 특히 겉 사람 안에 있는, 하나 되지 못하는 것들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마치 사람이 자기 안에 좀 털어버렸으면 하는 무슨 악이 있음을 지각할 때나 시험(temptations) 중, 혹은 갈등(combats) 중일 때 보이는 경향과 같지요. The internal man here addresses the external, but those things in the external man which disagree; as a man is wont to do when he perceives some evil in himself from which he desires to be separated, as is the case in temptations and combats.

 

이런 것은 시험 또는 갈등 가운데 있어 본 적이 있는 사람들, 자기 안에 하나 되지 못하는 것들이 있음을 지각하는 사람들은 다 아는 얘깁니다. 사람들이 이런 영적 갈등, 전투(combats) 중에 있는 한은, 비록 그런 것들로부터 분리될 수는 없지만, 여전히 분리되길 원하며, 종종 그 악에 대하여 분노, 아주 쫓아내 버리길 원하는 정도까지 가기 때문입니다. For it is known to those who have been in temptations and combats, that they perceive in themselves things which disagree; from which, so long as there is combat, they cannot be separated; but still they desire separation, and sometimes to such a degree that they are angry with the evil, and desire to expel it.

 

※ 자기한테서 수시로 나타나거나 끈질기게 안 고쳐지는 어떤 악한 습관, 반복된 언행, 태도, 부정적인 사고 등에 대해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걸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겉 사람에 있는 것들이며, 그 중에서도 속 사람과 같이 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게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These are the things that are here signified.

 

 

1581. 나를 떠나가라 Separate, I pray, from me.

 

이 표현은, 선은 자기와 어울리지 못하는 것(what is discordant)이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지(quiescence) 않는 한, 나타날 수 없다는 의미인데요, 이는 방금까지 말씀드린 내용, 곧, 속 사람은 겉 사람 안에 있는, 속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자신한테서 분리되기를 원한다는, 왜냐하면, 그것이 완전히 분리되기 전까지는, 속 사람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선은 결코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내용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good cannot appear unless what is discordant is made null is evident from what has just been said; namely, that the internal man desires that which disagrees, in the external man, should separate itself; for until it has been separated, the good which continually flows in from the internal man, that is, from the Lord through the internal man, cannot appear.

 

그러나 이 분리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이것은 분리가 아닌,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알려진 것입니다. But as regards this separation, it is to be known that it is not separation, but quiescence.

 

주님 말고 그 어느 누구도 겉 사람 안에 있는 악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With no one, except the Lord, can the evil that is in the external man be separated.

 

사람은 일단 한번 접한 것은 그게 무엇이든 그의 안에 남습니다. 단지 그게 쥐죽은 듯 조용히 있을 때는 마치 그게 분리된 것처럼 여겨지는데, 그것은 그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가만히 있기 때문입니다. Whatever a man has once acquired, remains; but it seems to be separated when it is quiescent, for thus it appears to be none.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쥐죽은 듯이 있는 상태가 되는 것도,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그런 상태가 되면, 비로소 주님으로부터 선이 흘러들어오며, 이 선이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Neither does it become quiescent so as to appear as none, except from the Lord; and when it does thus become quiescent, then for the first time do goods flow in from the Lord, and affect the external man.

 

이런 상태가 천사들의 상태입니다. 그들이 아는 건 그저 악이 자기들한테서 분리되어 왔다는 것뿐입니다. 사실은 악으로부터 일종의 보류 상태, 그래서 악이 아무 활동도 안 하는 상태에 있을 뿐이고, 그래서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인데 말이지요.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겉으로 보이는 양상, 곧 겉으로 볼 땐, 마치 악과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천사들이 곰곰 생각하면 아는 것입니다. Such is the state of the angels; nor do they know otherwise than that evil has been separated from them; whereas there is only a withholding from the evil, thus a quiescence, so that it appears as none; consequently this is an appearance, as also the angels know when they reflect.

 

 

1582.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If to the left hand, then I will go to the right; and if to the right hand, then I will go to the left.

 

이 표현이 분리를 의미함은 ‘’(右, the right)와 ‘’(左, the left)의 의미에서 옵니다. That this signifies separa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right” and “the left.

 

우와 좌는 그저 상대적인 용어들입니다. Right and left are merely relative terms.

 

이 용어들은 어떤 고정된 방위나 어떤 장소를 콕집어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서와 동, 북과 남, 어느 쪽도 사람이 어디를 바라보고 서 있느냐에 따라 우 또는 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They do not designate a fixed quarter, or a definite place; a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east as well as the west, the south as well as the north, may be on the right or on the left, according to the way in which one is looking.

 

이건 장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The same is true also of place.

 

가나안 땅을 가리켜 오른쪽이다, 왼쪽이다 할 수 없습니다.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The land of Canaan could not be said to be on the right or on the left, except relatively.

 

주님이 계신 곳, 그곳이 어디이든 거기가 중심입니다. 오른쪽, 왼쪽은 거기를 중심으로 해서 정해집니다. Wherever the Lord is, there is the center; and the right and the left are determined from that.

 

그래서 주님을 표상하는 아브람이 이쪽 혹은 저쪽, 어느 쪽으로 물러나든 그는 여전히 주님을 표상하며, 그렇게 또한 땅(land)도 표상합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 안에 있든 어디 다른 데 있든 마찬가지, 같은 것, 곧, 아브람은 주님을 표상합니다. 식탁에 계신 분이 가장 높은 위엄을 가지신 분인 것처럼, 가장 높은 자리는 그 분이 앉는 자리요, 오른쪽, 왼쪽은 그때 정해지는 것입니다. Thus whether Abram, by whom the Lord was represented, withdrew this way or that way, still the representation was with him, and so also was the land; so that it was the same thing whether Abram was in the land of Canaan, or was elsewhere; just as it is with the one at table who is of the highest dignity, the highest place is wherever he sits, and the places to the right and the left are reckoned from that.

 

그래서 우냐 좌냐 하는 것은 선택하라는 한 형태요, 그래서 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To go to the right or the left, was therefore a form of offering the choice by which there was signified separation.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9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속뜻)

주님의 모든 선은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가는데, 이때 겉 사람 안에 이 흐름을 막는 일체의 것, 곧, 주님의 선과 함께 할 수 없는 악이 있으면, 즉, 활동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선이 내 생활 속에 나타나게 하고 싶으면 나는 악에서 물러나야 하며, 악이 내 안에서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게 해야 합니다.

 

※ 주님 말고는 그 어떤 사람도 자기 안에 한번 자리한 악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천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 악이 고개를 들지 못하게,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게 할 수는 있습니다. 내가 그때마다 꾹꾹 누르거나 그때마다 물러나 악이 내 안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이 내 삶에 나타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1-28(D1)-주일예배(2243, AC.1579-1582, 창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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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HDA76AAMY4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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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21. 4, 5절,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Verses 4, 5.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빛을 일컬어, ‘좋았더라’, 곧, ‘’(good)이라 합니다. 이 빛이 주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인데, 주님은 선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Light is called “good,” because it is from the Lord, who is good itself.

 

어둠’은 그동안 빛인 줄 알았던 모든 걸 의미합니다. 사람에게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그동안 악은 선인 것처럼, 거짓은 진리인 것처럼 행세해 왔습니다만, 이제 보니 그것들은 그저 어둠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들은 그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그런 것들이었고, 여전히 남아 있는 어둠일 뿐입니다.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

 

※ 사람은 자기가 이해하고 그에 따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진리로 여기며, 또 자기가 의도하고 그에 따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선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주님께 속한 것이면, 그것은 ‘’으로 비교됩니다. 낮은 빛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이면, 그것은 ‘’으로 비교됩니다. 밤은 어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Whatsoever is of the Lord is compared to “day,” because it is of the light; and whatsoever is man’s own is compared to “night,” because it is of darkness.

 

이런 비교, 이런 대비가 말씀에는 아주 자주 나옵니다. These comparisons frequently occur in the Word.

 

AC.21, 창1,4-5,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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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k1DgfdRrxF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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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75. 8절,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Verse 8. And Abram said unto Lot, Let there be no contention, I pray, between me and thee, and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for we are men brethren.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는 속 사람이 겉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의미입니다. Abram said unto Lot” signifies that the internal man said thus to the external.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는 둘 사이 하나 되지 못함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한 친족이라’는 그들 가운데 하나 됨이 있었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Let there be no contention, I pray, between me and thee, and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signifies that there ought to be no disagreement between the two; “for we are men brethren” signifies that in themselves they were united.

 

 

1576.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Abram said unto Lot.

 

이 말의 의미가 속 사람이 겉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라는 의미임은 여기 아브람은 속 사람을, 롯은 겉 사람을 각각 표상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이 겉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곧 분리되게 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internal man said thus to the external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on of Abram, as being here the internal man; and from the representation of Lot, as being the external man that was to be separated.

 

아브람이 속 사람을 표상한다는 것은 그가 롯과 관련되어 언급되기 때문인데, 롯은 겉 사람 안에 있는, 곧 분리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That Abram represents the internal man is because he is spoken of relatively to Lot, who is that in the external man which was to be separated.

 

전에 말씀드린 대로, 겉 사람 안에는 함께 할 수 있는 것들과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There are in the external man, as before said, things that agree, and things that disagree.

 

여기서 ‘’은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반대로 겉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을 포함해서,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이들은 속 사람과 함께 하나를 이루며, 속 사람에게 속하기 때문입니다. By “Lot” are here meant the things that disagree; by “Abram,” therefore, are meant those which agree, including those which are in the external man; for these together with the internal man constitute one thing, and they belong to the internal man.

 

 

1577. 나나 너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Let there be no contention, I pray, between me and thee.

 

이 말의 의미가 둘 사이 하나 되지 못함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의미라는 것은 이미 드린 말씀으로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re ought to be no disagreement between the two is evident from what has already been said.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함께 함 또는 하나 됨에 관한 아케이나는 지금까지 들을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The arcana relating to the agreement or union of the internal man with the external are more than can ever be told.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하나 된 적이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가 될 수도, 하나로 있을 수도 말이지요. 오직 주님만이 그러셨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With no man have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ever been united; nor could they be united, nor can they be, but with the Lord only, for which cause also he came into the world.

 

거듭난 사람들의 경우는 마치 이 둘이 하나 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함께 하는 것들은 주님의 것이고, 함께 하지 않는 것들은 사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With men who have been regenerated, it appears as if they were united; but these belong to the Lord; for the things which agree are the Lord’s, but those which disagree are man’s.

 

※ 즉, 주님이 허락하셔서, 주님이 도우셔서 거듭날 수 있었다는 것이지, 절대 그들이 잘나서, 그들의 무슨 공로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겉과 속의 하나 됨은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2] 속 사람 안에는 두 가지, 곧,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있어 이 둘이 하나를 이룹니다. 영적인 것이 천적인 것으로부터 올 경우엔 말입니다. 같은 말이지만, 속 사람 안엔 두 가지, 선과 진리가 있어 이 둘이 하나를 이룹니다. 진리가 선으로부터 올 경우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역시 같은 얘깁니다만, 속 사람 안엔 두 가지, 사랑과 신앙이 있어 이 둘이 하나를 이룹니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올 경우엔 말입니다. 계속해서 같은 말입니다만, 속 사람 안엔 두 가지, 의지와 이해가 있어 이 둘이 하나를 이룹니다. 이해가 의지로부터 올 경우엔 말입니다. There are two things in the internal man, namely, the celestial and the spiritual, which two constitute a one when the spiritual is from the celestial; or what is the same, there are two things in the internal man, good and truth; these two constitute a one when the truth is from good; or what is also the same, there are two things in the internal man, love and faith; these two constitute a one when the faith is from love; or what is again the same, there are in the internal man two things,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and these two constitute a one when the understanding is from the will.

 

이는 빛이 나오는 해를 보면 계속해서 더 잘 명료하게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This may be apprehended still more clearly by considering the sun, from which is light.

 

만일 해에서 나오는 빛 가운데 열과 광력(光力, illuminating power), 이 둘이 있으면, 봄철, 만물은 그로 인해 무럭무럭 생장(生長)합니다. 그러나 빛은 있는데 그 안에 해에서 나오는 열이 없으면, 겨울철, 만물은 쇠잔하여 죽게 됩니다. If in the light from the sun there are both heat and illuminating power, as in the springtime, all things are thereby made to vegetate and to live; but if there is not heat from the sun in the light, as in the time of winter, then all things become torpid and die.

 

[3] 이 모든 것으로 속 사람을 이루는 게 무엇인지가 분명하며, 그때 겉 사람을 이루는 것이 나타납니다. From all this it is evident what constitutes the internal man; and what constitutes the external thence appears.

 

겉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자연적입니다. 겉 사람이라는 자체가 자연적인 사람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In the external man all is natural; for the external man itself is the same as the natural man.

 

속 사람에게 속한 천적, 영적인 것이 겉 사람에게 속한 자연적인 것 안으로 흘러들어와 마치 하나가 된 듯 움직일 때, 이때 속 사람은 겉 사람과 하나가 되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The internal man is said to be united to the external when the celestial spiritual of the internal man flows into the natural of the external, and makes them act as a one.

 

그 결과, 자연적인 것은 또한 천적, 영적인 것이 되는데, 천적, 영적인 것의 입장에서 보면, 더 낮은 단계입니다. 같은 말이지만, 겉 사람 역시 천적, 영적인 것이 되는데, 천적, 영적인 것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겉, 바깥 단계가 됩니다. As a consequence of this the natural also becomes celestial and spiritual, but a lower celestial and spiritual; or what is the same, the external man becomes celestial and spiritual, but a more external celestial and spiritual.

 

[4] 속 사람과 겉 사람은 둘 다 뚜렷이 구별됩니다. 천적, 영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자연적인 것들은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are altogether distinct, becaus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re what affect the internal man, but natural things are what affect the external.

 

뚜렷이 구별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즉, 속 사람에게 속한 천적, 영적인 것이 겉 사람에게 속한 자연적인 것 안으로 흘러들어와 그것을 그 고유 본성으로 둘 때, 이들은 하나 된 상태에 있습니다. But though distinct, they are still united, namely, when the celestial spiritual of the internal man flows into the natural of the external, and disposes it as its own.

 

※ 즉, 마치 두 종류의 나무를 그 좋은 부분만 더욱 특화하기 위해 접붙이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밀감나무를 탱자나무에 접을 붙여 병충해에도 강하고 씨 없는 귤을 생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만 속 사람은 겉 사람과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이 둘 사이의 하나 됨은 주님이 그렇게 하셨거나 그렇게 하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In the Lord alone the internal man was united to the external; this is not the case in any other man, except so far as the Lord has united and does unite them.

 

사랑과 체어리티만이, 혹은 선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랑과 체어리티, 즉, 어떠한 선도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Love and charity only, or good, is what unites; and there is never any love and charity, that is, any good, except from the Lord.

 

이것이 바로 아브람의 말,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는 말 속에 담긴 하나 됨입니다. Such is the union that is intended in these words of Abram: “Let there be no contention between me and thee, and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5]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라고 말하는 건 이런 경우입니다. 속 사람 안에는 두 가지, 천적, 영적인 것, 전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를 만드는 두 가지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또 겉 사람 안에도 자연적 선이라고 하는 천적인 것과, 자연적 진리라고 하는 영적인 것, 두 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It is said, “Between me and thee, and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for the case is thus: as there are two things in the internal man, namely, the celestial and the spiritual, which as before said make a one, so also are there in the external man, its celestial being called natural good, and its spiritual natural truth.

 

나나 너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는 말은 선과 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속 사람의 선은 겉 사람의 선과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라는 걸 의미하며,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는 말은 진리와 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속 사람의 진리는 겉 사람의 진리와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Let there be no contention between me and thee” has reference to good, meaning that the good of the internal man should not disagree with the good of the external man; and “Let there be no contention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has reference to truth, meaning that the truth of the internal man should not disagree with the truth of the external man.

 

 

1578. 우리는 한 친족이라 For we are men brethren.

 

이 말의 의미가 둘이 함께 하나가 되어 있음이라는 것은, ‘친족’(man brother)의 의미가 하나 됨, 곧, 진리와 선의 하나 됨이라는 걸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are united together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man brother,” as being union, and in fact the union of truth and good.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8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속뜻)

속 사람이 겉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였으니 어떤 경우에도 이 하나 됨을 해치는 일이 없게 하자. 내 안에 있는 천적, 영적인 것들과 네 안에 있는 자연적 선과 진리들 사이에 늘 하나가 되게 하자.’

 

※ 겉 사람 안에도 두 종류, 곧 속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것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말에 주목하여, 주님으로 말미암은 속 사람, 곧 천적, 영적인 것과 함께 할 수 있는 겉 사람의 것은 더욱 힘쓰고, 함께 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는 물러서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2021-11-24(D4)-매일예배(2241, AC.1575-1578, 창13,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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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kb1ZzcH8zx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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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70. 7절,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Verse 7. And there was strife between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nd the herdmen of Lot’s cattle; and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were then dwelling in the land.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할 수 없었음을,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 천적인 것들을, ‘롯의 가축의 목자’, 감각적인 것들을,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겉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들을 각각 의미합니다. There was strife between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nd the herdmen of Lot’s cattle” signifies that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man did not agree;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re the celestial things; “the herdmen of Lot’s cattle” are the sensuous things; “and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were then dwelling in the land” signifies evils and falsities in the external man.

 

 

1571.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There was strife between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nd the herdmen of Lot’s cattle.

 

이 말의 의미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할 수 없었다라는 것은, ‘가축의 목자’가 예배에 속한 것들을 가르치는 자라는, 누구나 다 알고 있어 굳이 말씀에서 찾아 따로 확인시켜드릴 필요조차 없는, 이런 걸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did not agre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herdmen [or shepherds—pastores] of cattle,” as being those who teach, and thus things that are of worship, as may be known to everyone; it is therefore unnecessary to confirm this from the Word.

 

※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는 속 사람의 예배를, 롯의 가축의 목자는 겉 사람의 예배를 각각 가르치므로 도저히 둘이 함께 할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히 알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서 5절에 나오는 ‘장막’이라고 하는 것과 관련되며, 그 내용의 포인트는 그것들이 바로 예배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These things relate to what were called “tents” in the preceding verse 5; and it was there pointed out that these signify worship.

 

본 절 바로 앞 절인 6절에서 말씀드린 것은, 5절에 나오는 ‘양과 소’라고 한 것과 관련됩니다. 그 구절을 곰곰 생각해 보시면, 이 구절들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나 습득한 것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에 또한 포인트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What is said in verse 6, that immediately precedes these words, relates to what were called “flock and herd” in verse 5; and in the consideration of that verse it was also pointed out that these denote possessions or acquisitions.

 

※ 5절의 ‘양과 소와 장막’, 6절의 ‘소유’ 모두 사실은 예배, 곧 속 사람의 예배, 겉 사람의 예배와 관련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예배를, 즉, 속 사람의 예배와 겉 사람의 예배를 다루며, 또 이들은 서로 함께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본 절에 이르기를,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라고 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속 사람을, 롯은 겉 사람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As worship is here treated of, namely, that of the internal man and of the external, and as these did not yet agree, it is here said that “there was strife between the herdmen”; for Abram represents the internal man, and Lot the external.

 

예배에 있어,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불일치의 본성과 퀄러티는 특히 눈에 띄며, 이는 세세한 것 하나까지도 다 그렇습니다. 예배 때, 속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들에 주목하길 원하지만, 겉 사람은 세상에 속한 것들에 주목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배 전반, 어느 것이 우위를 점하느냐 하는 이런 불일치가 생기며, 천국에서는 이런 불일치는 가장 작은 것일지라도 굉장히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In worship the nature and quality of the disagreement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are especially discernible, and this even in every single thing of worship; for when in worship the internal man desires to regard the ends that belong to the kingdom of God, and the external man desires to regard the ends that belong to the world, there thus arises a disagreement which manifests itself in the worship, and that so plainly that the smallest bit of such disagreement is noticed in heaven.

 

※ 지상에서는 다소 좀 석연찮은 요소, 동기, 예를 들면, 목사가 교인들에게 주님의 메시지 전달에 주목하기보다 자기가 하고픈 말을 말씀으로 살짝 포장하여 한다든지, 신령과 진정,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 주목하기보다 교회 외형이나 내부 치장 등에 신경 쓰며, 찾아오는 손님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뭘 과시하는 등의 석연찮은 동기들을 가진 채 예배를 드려도 아무 일이 안 일어나지만 천국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 간 다툼’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strife between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nd the herdmen of Lot’s cattle.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라는 어구가 추가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The cause is also subjoined, namely, that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were then dwelling in the land.

 

 

1572.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는 속 사람에게 속한 천적인 것들이며, ‘롯의 가축의 목자’는 겉 사람에게 속한 감각적인 것들이라는 사실은 이미 쭈욱 말씀드린 걸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re the celestial things which are of the internal man, and that “the herdmen of Lot’s cattle” are the sensuous things which are of the external man is evident from what has already been said.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로 표현된 천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게 속한 예배의 천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By the celestial things which are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re meant the celestial things in worship which are of the internal man.

 

롯의 가축의 목자’는 겉 사람에게 속한 예배의 감각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속 사람에게 속한 예배의 천적인 것들하고는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By “the herdmen of Lot’s cattle” are meant the sensuous things that are in worship, which are of the external man, and do not agree with the celestial things of the worship of the internal man.

 

이런 것들이 어째서 그런지는 이미 보여드린 것들로 확실합니다. How these things stand is evident from what has already been shown.

 

 

1573.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And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were then dwelling in the land.

 

이것의 의미가 겉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임은 ‘가나안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앞에 1444번 글 참조) 유전한 악을 의미하고, ‘브리스 사람’은 거기서 나온 거짓을 의미한다는(※ 아래 내용 참조) 걸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evils and falsities in the external ma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Canaanite” as being the hereditary evil from the mother in the external man (as before shown, n. 1444);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Perizzite” as being the derivative falsity (concerning which see below).

 

주님에게는 그의 겉 사람 안에 어머니로 말미암은 유전 악이 있으셨다는 사실은 위 1414번, 1444번 글에서 보실 수 있으며, 거기서 나오는 거짓이 있으셨음은 그 필연적 결과입니다. 악이 유전되는 곳에 거짓 또한 있으며, 이는 후자는 전자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That there was with the Lord an evil heredity from the mother in his external man may be seen above (n. 1414, 1444); and that there was falsity from this is a necessary consequence; for where there is hereditary evil, there is also falsity; the latter being born of the former.

 

그러나 악에서 비롯되는 거짓은 사람이 지식(scientifica et cognitiones, 비종교적 지식과 종교적 지식)으로 가득 채워지지 않고서는 태어날 수 없습니다. But the falsity that is from evil cannot be born until the man has been imbued with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악은 이런 지식들 안으로 흘러들어 그 안에서 활동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의지 파트에 속한 악이 지적 파트에 있는 거짓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 거짓 또한 유전적이었습니다. 유전한 악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 거짓의 원리들(principles of falsity)에서 나오는 거짓이 아닌, 겉 사람 안에 있었으며, 거기는 속 사람이 보기에는 거짓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Evil has nothing but these into which it may operate or flow; for in this way the evil which is of the will part is turned into falsity in the intellectual part; so that this falsity also was hereditary, because it was born of what was hereditary, and yet was not the falsity that is derived from principles of falsity; but it was in the external man, and there the internal man could see it to be false.

 

[2] 그리고 아브람의 애굽 체류 전으로 표상된, 주님이 지식을 충분히 습득하시기 전에는 아직 어머니로부터 유전하신 악이 있었기 때문에, 전 장 6절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하였고, 브리스 사람에 대한 언급은 아직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가 지식을 습득하신 후이시라 이르기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가나안 사람’은 악을, ‘브리스 사람’은 거짓을 의미함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And because there was hereditary evil from the mother before the Lord had been imbued with knowledges, or before Abram sojourned in Egypt, it is said in the preceding chapter, verse 6, that “the Canaanite was in the land,” but not the Perizzite; but here, after he had been imbued with knowledges, it is said that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dwelled in the land”; from which it is evident that by “the Canaanite” is signified evil, and by “the Perizzite” falsity.

 

이 사실에서 또한 분명한 건,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에 대한 언급이 무슨 역사적 기록을 하는 중에 나온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언급 전후로 무슨 아무런 관련도 없이 갑자기 난데없이 툭 등장하는 걸 보면 그렇습니다. 전장 6절의 가나안 사람에 대한 언급도 그렇습니다. 이 모든 걸 통해 보면 여기엔 속뜻이 아니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무슨 아케이나가 숨겨져 있음이 분명합니다. It is also evident from this, that the mention of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is not in any historical series, for in what goes before and in what follows they are not treated of at all; and the same is true of the mention of the Canaanite in the foregoing chapter, verse 6; from all which it is evident that some arcanum lies hidden here which cannot be known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3] 주님에게 어머니로부터 유전한 악이 있었다 하는 말에 아마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여기 보면 분명히 그렇다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이 속뜻으로는 주님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사실이 그렇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Its being said that there was with the Lord hereditary evil from the mother may cause surprise, but as it is here so plainly declared, and as the Lord is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it cannot be doubted that so it was.

 

사람이면 어느 누구도 부모를 통해 악의 유전 없이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For no human being can possibly be born of another human being without thence deriving evil.

 

그러나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유전 악이요, 어머니로부터의 유전 악은 또 별개입니다. But the hereditary evil derived from the father is one thing, and that from the mother is another.

 

아버지로부터 유전한 악은 더욱 내적(內的, internal)이며,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것은 뿌리 뽑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경우는 그런 악이 아니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 여호와로 말미암아 태어나셨기 때문이며, 그래서 내적으로는 신성(Divine) 곧 여호와이셨습니다. The hereditary evil from the father is more internal, and remains to eternity, for it cannot possibly be eradicated; but the Lord had not such evil, because he was born of Jehovah the Father, and thus as to internals was Divine or Jehovah.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유전한 악은 겉 사람에 속합니다. 주님의 경우가 바로 이 경우였으며, 그래서 일컫기를,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하였고, 여기서 비롯된 거짓을 ‘브리스 사람’이라 한 것입니다. But the hereditary evil from the mother is of the external man; this did exist with the Lord, and it is called “the Canaanite in the land”; and the falsity from this is “the Perizzite.

 

이렇게 주님도 여느 사람들처럼 태어나셨고, 여느 사람들이 갖는 연약함을 가지셨습니다. Thus was the Lord born as are other men, and had infirmities as have other men.

 

[4] 주님이 어머니로부터 유전 악을 물려받은 게 분명한 것은 주님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악 없이 시험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시험받는 사람 안에는 악이 있으며, 악을 통해서 그는 시험을 받는 것입니다. That he derived hereditary evil from the mother is clearly evident from the fact that he underwent temptations; no one can possibly be tempted who has no evil; it is the evil in a man which tempts, and through which he is tempted.

 

주님이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 그리고 주님은 여느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보다 수천 배 더 극심한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 또 주님은 그 시험들을 홀로 견디시고, 악을, 마귀와 지옥 전체를 혼자 힘으로 극복하셨다는 것 등은 모두 확실한 사실입니다. That the Lord was tempted, and that he underwent temptations a thousandfold more grievous than any man can ever endure; and that he endured them alone, and overcame evil, or the devil and all hell, by his own power, is also evident.

 

이런 시험들에 관하여 누가복음에 기록하기를 Concerning these temptations we read thus in Luke: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13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눅4:1-2, 13-14) Jesus was led in the spirit into the wilderness, being forty days tempted by the devil, so that he did not eat in those days. But after the devil had ended every temptation, he departed from him for a season. Thence he returned in the power of the spirit into Galilee. (Luke 4:1–2, 13–14)

 

[5] 그리고 마가복음에서는 And in Mark:

 

12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1:12-13) The spirit impelling Jesus made him go forth into the wilderness. And he was in the wilderness forty days, being tempted, and he was with the wild beasts; (Mark 1:12–13)

 

여기 ‘들짐승’은 지옥을 의미합니다. where hell is signified by “the wild beasts.

 

게다가, 주님은 죽을 정도로 시험을 받으셨고, 그래서 흘리시는 땀방울은 핏방울이 되었습니다. Moreover, he was tempted even unto death, so that his sweat was drops of blood: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눅22:44) And being in an agony, he prayed the more earnestly; and his sweat became as drops of blood falling down upon the earth. (Luke 22:44)

 

[6] 어떤 천사도 악마에게 시험을 당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가 주님 안에 있는 동안은 악한 영들은 그에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멀리 떨어진 데에서조차 악한 영들은 천사들을 보면 큰 두려움과 전율로 즉시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No angel can ever be tempted of the devil; because, while he is in the Lord, evil spirits cannot approach him, even distantly, without being instantly seized with horror and terror.

 

만일 주님이 어머니로부터 유전한 악 없이 신성만 가지고 태어나셨으면 지옥은 주님에게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Much less would hell have been able to approach the Lord if he had been born Divine; that is, without evil adhering from the mother.

 

[7] 주님이 또한 인류의 불법과 악을 담당하셨다라는 것은 설교자들의 공통된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불법과 악을 자신에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유전적인 방법 말고는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신성은 악에 민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It is likewise a common expression with preachers, that the Lord also bore the iniquities and evils of the human race; but for him to admit into himself iniquities and evils, except by the hereditary way, is utterly impossible; for the Divine is not susceptible of evil.

 

그래서 그분이 자신의 힘으로 악을 정복할 수 있기 위하여 - 이 일은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 그리고 홀로 의가 되실 수 있도록, 주님은 기꺼이 여느 사람들처럼 태어나고자 하셨습니다. And therefore in order that he might conquer evil by his own powers—which no man has been able to do, or is able to do—and so might alone become righteousness, he was willing to be born as are other men.

 

만일 이런 게 아니었으면, 주님은 사람으로 태어나실 필요도 없으셨습니다. 그냥 주님은 출생 없이 인성(the human essence)으로만 계실 수도, 곧 때때로 그러셨던 것처럼, 가령 태고교회 때 나타나신 것이나 선지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그렇게 계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을 옷 입으신 후, 악과 싸워 악을 정복하고 나서 자신 안의 신성(the Divine essence)과 인성을 결합하고자 하는 부수적인 목적을 위해 주님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If it had not been for this, there would have been no need of his being born; for the Lord could have assumed the human essence without birth, as he did sometimes assume it, when seen by the most ancient church, and likewise by the prophets; but for the additional purpose of putting on evil, against which he might fight, and which he might conquer, and might thus conjoin in himself the Divine essence with the human essence, he came into the world.

 

[8] 그러나 주님은 실제로 그 본성 상 어떠한 악도 없으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But the Lord had no evil that was actual, or his own, as he also says in John: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요8:46) Which of you convicteth me of sin? (John 8:46)

 

지금까지 쭈욱 말씀드린 내용을 통해 정말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라는, 바로 앞 선행 표현의 의미가 무엇인지 하는 것을 말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it is now clearly evident what is signified by there being “strife between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nd the herdmen of Lot’s cattle,” which words immediately precede.

 

그 이유는 바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입니다. The reason was that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were then dwelling in the land.

 

 

1574. ‘가나안 사람’의 의미가 겉 사람 안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유전한 악이라는 것은 전에 보여드렸습니다. (※ 1444번 글 참조) 그러나 ‘브리스 사람’의 의미는 악에서 나오는 거짓이라는 것은 말씀에서 브리스 사람들이 나오는 다른 구절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the Canaanite” signifies the hereditary evil from the mother, in the external man, was before shown (n. 1444); but that “the Perizzite” signifies the falsity that is from evil, is evident from other passages in the Word where the Perizzite is named.

 

야곱에 관한 다음과 같은 본문에서 As in the following concerning Jacob: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창34:30) Jacob said to Simeon and Levi, Ye have troubled me, to make me to stink among the inhabitants of the land, among the Canaanites and the Perizzites; and I am mortals of number [i.e., few], and they will gather themselves together against me and smite me; and I shall be destroyed, I and my house; (Gen. 34:30)

 

여기도 같은 식으로, ‘가나안 족속’은 악을, ‘브리스 족속’은 거짓을 각각 의미합니다. where in like manner evil is signified by “the Canaanite,” and falsity by “the Perizzite.

 

[2] 여호수아에서는 In Joshua: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수17:15) Joshua said to the sons of Joseph, If thou be much people, get thee up to the forest, and cut down for thyself there in the land of the Perizzite and of the Rephaim, if Mount Ephraim is too narrow for thee; (Josh. 17:15)

 

여기서도 ‘브리스 족속’은 거짓의 원리들을, ‘르바임 족속’은, 이것은 그들이 근절시켜야 하는 것들인데, 거짓에 속한 설득들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의미로 ‘에브라임 산지’는 지성이기 때문입니다. where principles of falsity are signified by “the Perizzite,” and persuasions of falsity by “the Rephaim,” which they were to extirpate; for in the spiritual sense “Mount Ephraim” is intelligence.

 

[3] 사사기에서는 In the book of Judges:

 

1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3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4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 (사1:1-4) After the death of Joshua, the sons of Israel also asked of Jehovah, Who shall go up for us first against the Canaanite, to fight against him? And Jehovah said, Judah shall go up; behold I have given the land into his hand. And Judah said unto Simeon his brother, Come up with me into my lot, and let us fight against the Canaanite; and I likewise will go with thee into thy lot. And Simeon went with him. And Judah went up; and Jehovah gave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into their hand; (Judg. 1:1–4)

 

여기서 ‘유다’는 마찬가지로 천적인 것들에 대한 주님을, ‘시므온’은 거기서 파생된 영적인 것들을 각각 의미하며, ‘가나안 족속’은 악이고, ‘브리스 족속’은 거짓인데, 이것들은 정복되었습니다. where by “Judah” likewise is represented the Lord as to celestial things, and by “Simeon” as to the derivative spiritual things; “the Canaanite” is evil, and “the Perizzite” falsity, which were overcome.

 

이는 응답, 혹은 위 설명 정도로도 이해가 되는 신성한 신탁(Divine oracle)이었습니다. This was the response, or Divine oracle, which, with this explanation, is understood.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7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속뜻)

어린 시절 주님의 속 사람에 속한 천적인 것들과 겉 사람에 속한 감각적인 것들은 이제 더 이상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에굽 체류를 끝낸, 즉 지식을 충분히 습득하신 주님 안에는 어머니로부터 유전하신 악과 거짓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는 굳이 사람들처럼 태어나지 않으시고도 얼마든지 인성으로 계실 수 있으셨을 텐데도, 그러나 주님은 인류의 악과 거짓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그리고 그러려면 악에게 시험을 받으셔야 하고, 또 그러려면 악이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어야겠기에 어머니를 통한 유전 악을 굳이 옷처럼 입고 오신 것입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1-21(D1)-주일예배(2240, AC.1570-1574, 창13,7),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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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Gy1C_p3uA1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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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20.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Verse 3.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라는 것이 뭔가 더 높은 차원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 때부터 시작됩니다. The first state is when the man begins to know that the good and the true are something higher.

 

온통 겉 사람 뿐이기만 한 사람들은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선이라고 여기며, 그리고 또 이런 자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인 모든 걸 진리로 여깁니다. 그런 선들은 악이요, 그런 진리들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Men who are altogether external do not even know what good and truth are; for they fancy all things to be good that belong to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nd all things to be true that favor these loves; not being aware that such goods are evils, and such truths falsities.

 

그러나 그에게 뭔가가 다시 시작될 때, 그때 그는 그동안 자기가 믿어왔던 선이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빛 가운데로 더욱더 다가갈 때, 이 빛이 바로 주님이신데, 이분이 바로 선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또한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

 

인간은 주님을 스스로 계시는 분으로 알아야 함을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가르치십니다. That men ought to know that the Lord exists he himself teaches in John: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사람은 주님의 존재,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는 위의 말씀과, 또 주님은 선 또는 생명 그 자체시며, 진리 또는 빛 그 자체시라는 사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주님이 아니면 선도,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Also, that the Lord is good itself, or life, and truth itself, or light, and consequently that there is neither good nor truth except from the Lord, is thus declared: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1:1, 3-4, 9)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He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John 1:1, 3–4, 9)

AC.20, 창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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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DAg-125I6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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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17.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Verse 2.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byssi]; and the spirit of God was brood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거듭남 이전 상태의 사람을 가리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은 선과 진리의 씨 심긴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의 마음을, ‘혼돈’은 그 땅에 선이 전혀 없음을, ‘공허’는 진리가 전혀 없음을 각각 가리킵니다. Before his regeneration, man is called the “earth void and empty,” and also the “ground” wherein nothing of good and truth has been sown; “void” denotes where there is nothing of good, and “empty” where there is nothing of truth.

 

그래서 그 결과, 이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흑암’의 상태, 곧 주님 신앙에 속한 모든 것과 영적, 천국적(heavenly) 삶에 속한 모든 것에 매우 어리석고 무지한 심각한 상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Hence comes “thick darkness,” that is, stupidity, and an ignorance of all things belonging to faith in the Lord, and consequently of 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

 

주님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예레미야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Such a man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through Jeremiah: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렘4:22-23) My people is stupid,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foolish sons, and are not intelligent;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I beheld the earth, and lo a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18. ‘깊은 위에 있고’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비롯되는 거짓을 말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전적으로 이런 상태이며, 그 가운데 완전히 잠겨 있습니다. The “faces of the deep” are 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e falsities thence originating, of which he wholly consists, and in which he is totally immersed.

 

이 상태에서는 빛이라는 게 전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깊다’, 뭔가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하는 것입니다. In this state, having no light, he is like a “deep,” or something obscure and confused.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말씀 여러 곳에서는 ‘깊음들’, ‘바다 깊은 곳들’이라 하셨는데, 그것은 사람에게 거듭남이 시작되면서 바짝 ‘마르게 될’, ‘소진될’ 것입니다. Such persons are also called “deeps,” and “depths of the sea,” in many parts of the Word, which are “dried up,” or “wasted,” before man is regenerated.

 

이사야에서처럼 말입니다. As in Isaiah: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사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런 사람은 또 천국에서 보면 마치 까만 덩어리처럼, 활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주 극심한 궁핍 덩어리로 보입니다. Such a man also, when seen from heaven, appears like a black mass, destitute of vitality.

 

마찬가지로 보통은 같은 표현을 써서 사람의 황폐함을 나타내는데요, 선지자들이 자주 그랬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태는 주님의 자비로 다음 단계인 거듭남을 향해 나아갑니다. 사람은 거듭남이 시작되면 진리라는 게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선이라는 것을 통해 마음에 감동이 시작되는데요, 그런데 이때 먼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 안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싫어하고 반발하는 일체의 요소들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즉, 옛사람이 죽어야 하는 것이지요. 새사람이 그 안에 잉태되려면 반드시 이런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The same expressions likewise in general involve the vastation of man, frequently spoken of by the prophets, which precedes regeneration; for before man can know what is true, and be affected with what is good, there must be a removal of such things as hinder and resist their admission; thus the old man must needs die, before the new man can be conceived.

 

 

19. ‘하나님의 영’, 이 표현은 주님의 자비를 가리키는 표현인데요,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 ‘품으시니라’ 하신 것입니다. 마치 암닭이 알을 품에 품는 것처럼 말입니다.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운행하시는 ‘수면 위’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이 사람 안에 숨기시고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시며 보관하여 오신 것들인데요, 말씀 전체를 통하여, 이것을 가리켜 ‘리메인스’(remains), 혹은 ‘남은 자’(a remnant)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 이루어지며, 외적인 일들, 겉의 일들이 황폐해질 때까지, 결코 빛으로, 낮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런 것입니다.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 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 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 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이 지식을 가리켜 여기서 ‘수면 위’라 하신 것입니다.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 “the faces of the waters.

AC.17-19,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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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pGHTrKDB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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