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3

 

1567. 6절,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Verse 6. And the land was not able to bear them that they might dwell together, because their substance was great, so that they could not dwell together.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내적, 천적인 것에 속한 것들은 다른 것들과 함께 할 수가 없음을,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속 사람에 의해 습득된 것들은 겉 사람 안에 습득된 것들하고는 함께 할 수가 없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The land was not able to bear them that they might dwell together” signifies that the things belonging to the internal celestial things could not be together with the others; “because their substance was great, so that they could not dwell together” signifies that the things that had been acquired by the internal man could not agree with those acquired in the external man.

 

 

1568.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The land was not able to bear them that they might dwell together.

 

이것은 내적, 천적인 것에 속한 것들은 다른 것, 곧 여기서는 ‘’으로 표상된, 그런 것들하고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This signifies that the things belonging to the internal celestial things could not be together with the others, that is, with those here signified by “Lot.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아브람은 주님, 여기서는 주님의 속 사람을 표상하는 반면, 롯은 주님의 겉 사람, 여기서는 주님의 겉 사람으로부터 분리될 것들을 표상합니다. 이것은 내적인 것과 함께 지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Abram, as before said, represents the Lord, here his internal man; but Lot represents his external man, here the things that were to be separated from the external man, with which the internal things could not dwell.

 

겉 사람 안에는 속 사람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선한 애정(affections of good)이라든지, 거기서 나오는 기쁨과 즐거움(the delights and pleasures)이라든지 말이지요. 이런 건 속 사람의 선(the goods of the internal man) 및 기쁨과 행복(its joys and happiness)의 결과들, 효과들이기 때문인데요, 이렇게 되면, 즉, 겉 사람에게 나타나는 이런 효과들은 속 사람과 완전한 상응 가운데 있게 되고, 그때 이들은 속 사람에게 속하게 됩니다. 겉 사람이 아니고 말입니다. There are many things in the external man with which the internal man can dwell, such as affections of good, and the delights and pleasures thence originating; for these are the effects of the goods of the internal man, and of its joys and happiness; and when they are the effects, they altogether correspond; and they are then of the internal man and not of the external.

 

이것은 알려진 대로, 효과가 아닌, 효과를 일으키는 원인에 속한 것이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면, 얼굴 가득 환히 빛나는 체어리티(charity)는 얼굴이 아닌, 내면에 있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이며, 그것이 얼굴을 빛나게 하고,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어린아이들의 순진무구함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 표정이며, 몸짓이며, 자기들끼리 노는 모습 가운데 나타나는 순진무구함은 그 표정이나 몸짓에 속한 게 아니라 아이들의 영혼을 통해 아이들 안으로 흘러드는 주님의 순진무구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전반적으로 순진무구함이 드러나는 것이며, 이런 것은 다른 모든 케이스들도 같습니다. For the effect, as is known, is not of the effect, but of the effecting cause; as, for example, the charity which shines forth from the face is not of the face, but is of the charity that is within, and which so forms the face, and presents the effect; or as the innocence of little children that shows itself in their looks, gestures, and play with each other, is not of the countenance or the gesture, but is of the innocence of the Lord that flows in through their souls; so that the manifestations of innocence are effects; and it is the same in all other cases.

 

[2] 이런 사실로 분명한 건, 겉 사람 안에는 속 사람과 같이 지내며 함께 할 수 있는 게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From this it is evident that there are many things in the external man that can dwell together and agree with the internal man.

 

하지만 그 반대, 곧 속 사람과 함께 할 수 없거나 같이 지낼 수 없는 것들 또한 무척 많다는 사실입니다. 자아 사랑, 세상 사랑이라는 샘에서 솟아나는 모든 케이스가 다 이런 건데요, 이런 건 모두 그 목적이 자기 자신이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But there are also very many which do not agree, or together with which the internal man cannot dwell; this is the case with all things that spring from the love of self, and from the love of the world, for all such things regard self as the end, and the world as the end.

 

이런 것들과,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the celestial things)들은 서로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 천적인 것들은 주님을 그 목적으로, 주님의 나라 및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속한 모든 것들을 그 목적으로 삼고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With these the celestial things which are of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cannot agree; for these look to the Lord as the end, and to his kingdom and all things that are of him and his kingdom as the ends.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향한 목적은 밖이나 아래를(outward or downward) 향합니다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향한 목적은 안이나 위를(inward or upward) 향합니다. 이 모든 것으로 분명한 건, 이 둘은 서로 절대 함께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The ends of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look outward or downward; but the ends of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look inward or upward; from all which it is evident that they disagree so much that they cannot possibly be together.

 

[3] 겉 사람과 속 사람 간 서로 상응하는 게 뭔지, 서로 함께 할 수 있거나 혹은 함께 할 수 없거나 하는 게 뭔지를 알려면 한 가지만 보면, 즉, 어떤 동기,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지, 혹은 같은 말이지만, 어떤 사랑으로 그러는지를 보면 됩니다. 사랑하는 게 사실은 목적이요, 무엇이든 귀히 여기는 그것이 곧 그런 행동의 근본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That it may be known what makes the correspondence and agreement of the external man with the internal, and what makes the disagreement, one needs only to reflect upon the ends which reign; or what is the same, upon the loves which reign; for the loves are the ends; for whatever is loved is looked to as the end.

 

살아온 삶의 퀄러티가 어떨 것인지, 그 결과, 사후 어떤 상황이 될지를 이런 걸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동기, 무슨 목적으로 살아왔는지, 나는 평생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는지를 가지고 내가 살아온 삶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삶이란 이것 말고 무슨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It will thus be evident of what quality the life is, and what it will be after death; for, from the ends, or what is the same, from the loves which reign, the life is formed; the life of every man is nothing else.

 

영원한 삶(생명)과 함께 할 수 없는 것들, 즉, 영적, 천적 삶, 이것이 영원한 삶인데, 세상 살 동안 제거되지 않아 아직 남아 있는 이런 것들은 저세상에서는 반드시 제거되는데요, 만일 저세상에서도 제거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면, 이런 사람은 영원히 불행해지는 것 말고는 무슨 다른 삶이 없습니다. The things that disagree with eternal life—that is, with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which is eternal life—if not removed in the life of the body, must be removed in the other life; and if they cannot be removed, the man cannot be otherwise than unhappy to eternity.

 

[4]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겉 사람 안에는 속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것들과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과, 전자, 곧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은 후자, 곧 함께 할 수 없는 것들과 도저히 같이 갈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더 나아가, 겉 사람 안에 있는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은 속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며, 이는 곧, 주님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 이는 마치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것으로 빛나는 얼굴, 혹은 체어리티의 얼굴빛 같은 것이며, 혹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어린이들의 표정과 몸짓에 깃든 순진무구함 같은 것이라는 사실들을 지금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These things are now said that it may be known that there are things in the external man which agree with the internal man, and things which disagree; and that those which agree cannot possibly be together with those that disagree; and further, that the things in the external man which agree, are from the internal man, that is, through the internal man from the Lord; like a face that beams from charity, or a face of charity; or like the innocence in the countenance and gestures of little children, as before said.

 

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은 사람과 사람 고유 본성에 속한 것입니다. But the things which disagree are of the man and what is his own.

 

이상 말씀드린 내용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의 의미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it may be known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the land was not able to bear them that they might dwell together.

 

속뜻으로는, 이 본문은 주님에 관한 본문이며, 그래서 주님과, 주님 닮은 모든 것과 이미지 또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와 교회, 그리고 그 나라나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 또한 그래서이며, 이렇게 사람들 안에 있는 것들을 여기서 다루어 나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In the internal sense, the Lord is here treated of; and because the Lord, every likeness and image of him is also treated of—his kingdom, the church, and every man of his kingdom or church; and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men are here set forth.

 

주님이 자신의 힘으로 악, 곧 마귀와 지옥을 정복하시고, 또한 그래서 그 인성(his human essence)에 대하여 천적(celestial)이 되시고, 신성(Divine)이 되시며, 여호와가 되시기 전, 주님께 속한 것들을 지금 주님의 예전 상태와 관련하여 살피고 있습니다. The things appertaining to the Lord, before he from his own power overcame evil, that is, the devil and hell, and so became celestial, Divine, and Jehovah, as to his human essence also, are to be considered relatively to the state in which he then was.

 

 

1569.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Because their substance was great, so that they could not dwell together.

 

이는 속 사람을 통해 습득된 것들은 겉 사람 안에 있는, 겉 사람을 통해 습득된 것들하고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의미라는 것을, 방금 말씀드린 내용을 통해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things that had been acquired by the internal man could not agree with those acquired in the external may be seen from what has just been said.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6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속뜻)

겉 사람 안에 있는 것으로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 안에 있는 것과 함께 갈 수 있는 것들은 속 사람에게 속하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것, 곧 자기 사랑, 세상 사랑에 속한 것들은 속 사람에게 속할 수 없어 둘 사이 분리가 일어난다

 

※ 우리가 사랑하는 그것이 곧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그것을 목적으로 모든 걸 의도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 안에는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 곧 우리 인생 전체를 통해서 해야 할 한 가지 일은, 우리의 겉 사람을 속 사람에게 맞추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영계는 겉과 속이 같이 가는 상태의 나라요, 천국은 속 사람의 상태, 곧 주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삶은 겉과 속이 달라도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서도 늘 속에 맞춰서, 곧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목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겉을 속을 향해 정돈하는 것입니다.

2021-11-17(D4)-매일예배(2236, AC.1567-1569, 창13,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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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H9OSZwv0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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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62. 5절,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Verse 5.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had flock and herd, and tents.

 

아브람의 일행 롯도’, 주님 안에 있었던 겉 사람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겉 사람에게 있는 풍성한 것들을 각각 의미하며, ‘양과 소’는 겉 사람의 소유들을, ‘장막’은 겉 사람의 예배입니다. 겉 사람에게 속한 이런 것들은 스스로를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하고 있었습니다.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signifies the external man that was in the Lord; “had flock and herd, and tents” signifies those things in which the external man abounds; “flock and herd” are the external man’s possessions; “tents” are his worship: these things were separating themselves from the internal man.

 

 

1563. 아브람의 일행 롯도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이것이 ‘주님 안에 있었던 겉 사람을 의미함’은 롯(Lot)이 표상하는 바가 감각적인(sensuous) 사람, 같은 말이지만, 겉 사람임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external man that was in the Lord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on of Lot as being the sensuous man, or what is the same, the external man.

 

누구나 다 그 안에 겉 사람과 속 사람이 있다, 혹은 같은 말이지만, 사람은 겉과 속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얘깁니다. (※ 전에 말씀드린 내용에 대해 보시려면 AC.978, 994-995, 1015 참조) That there is an internal and an external in every man, or what is the same, that man is internal and external, is known to everyone within the church (concerning which see what has been said before, n. 978, 994–995, 1015).

 

겉 사람은 그 생명을 주로 속 사람, 즉, 영이나 혼으로부터 받습니다. The external man receives its life principally from the internal man, that is, from the spirit or soul.

 

겉 사람의 생명 자체가 일반적으로는 속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겉 사람의 유기적 그릇들(organic vessels), 곧 속 사람 특유의 것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담게 되어 있는, 겉 사람에게 있어 속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그릇들이 열리지 않는 한, 겉 사람한테 어떻게든 담길 수가 없습니다. Thence comes its very life in general; but this life cannot be received in its particulars, or distinctly, by the external man, unless its organic vessels are opened, which must be the recipients of the particulars and the singulars of the internal man.

 

※ 일단 무엇이든 뭘 담으려면 먼저 뚜껑이 열려야 하는데 안 열린다는 말이지요.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들은 오직 주님의 생명,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에 대해서만 열리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이라고 다 무조건 나쁜 건 아닙니다. 겉 사람의 모든 감각적 즐거움도 그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주 안에서 그 쓰임새를 따라 누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활짝 열립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한 정욕과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으로 말미암는다면 그때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런 건 생명이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겉 사람의 생명이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데 둘 사이 무슨 불일치가 있어 그릇이 안 열리고, 그래서 속 사람의 생명이 겉 사람에게 흘러들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수용체 노릇을 하게 될 이들 유기적 그릇들은 감각들, 특히 청각과 시각이라는 감각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그릇들이 열리면 속 사람은 속 사람 특유의 것들을 가지고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습니다. These organic vessels, which are to be the recipients, are not opened except by means of the senses, especially those of hearing and sight; and, as they are opened, the internal man can flow in with its particulars and singulars.

 

그릇들은 감각들을 매개로 해서 지식과 즐거움, 기쁨들을 통해서 열립니다. 지식을 통해서는 이해에 속한 것들이, 즐거움과 기쁨을 통해서는 의지에 속한 것들이 열립니다. They are opened with the senses as the media, by means of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and also by means of pleasures and delights; those belonging to the understanding by means of knowledges, and those belonging to the will by means of pleasures and delights.

 

[2] 이런 것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진리와 함께 갈 수 없는 지식은 자기를 겉 사람한테로 슬그머니 밀어 넣을 것이며, 천적 선과 함께 갈 수 없는 만족과 기쁨도 그럴 것이라는 거, 육체적, 세속적, 그리고 땅에 속한 모든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들의 경우도, 그런 것들이 목적이 될 때, 겉 사람을 밖으로, 아래로 끄집어내어 속 사람으로부터 제거되는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From these things it may be seen that it must necessarily happen that such knowledges as cannot agree with spiritual truths will insinuate themselves into the external man; and that such pleasures and delights will insinuate themselves as cannot agree with celestial goods; as is the case with all those things which regard corporeal, worldly, and earthly things as the ends; which, when regarded as ends, draw the external man outward and downward, and so remove it from the internal man.

 

※ 즉, 영적, 천적, 그리고 주님을 향하지 않는, 그와는 정반대로, 육체와 세상, 세속을 향하는 것들은 겉과 속의 하나 됨은커녕, 오히려 분리와 제거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먼저 흩어버리지 않으면 속 사람은 겉 사람과 하나 될 수가,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 되려면 반드시 이런 일들이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Wherefore, unless such things are first dispersed, the internal man cannot possibly agree with the external; so that before the internal man can agree with the external, such things must first be removed.

 

주님과 함께 이런 일들이 제거되거나 분리되는 바로 이런 것이 롯과 아브람 간 서로 헤어지는 걸로 표상되고 있습니다. That with the Lord these things were removed or separated is represented and signified by the separation of Lot from Abram.

 

 

1564.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Had flock and herd, and tents.

 

이것이 겉 사람한테 있는 풍부한 것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바로 아래 설명된 ‘양’(flock), ‘소’(herd) 및 ‘장막’(tents)의 의미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things with which the external man abound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flock,” “herd,” and “tents,” explained just below.

 

여기 나오는 저들은 겉 사람의 소유들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롯은 주님의 겉 사람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They here signify the possessions of the external man; for by Lot, as before said, is represented the Lord’s external man.

 

겉 사람 안에 있는 그의 소유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요, 하나는 속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There are two classes of possessions in the external man, namely, such as can agree with the internal, and such as cannot agree.

 

여기 ‘양과 소와 장막’이 함께 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의 이어지는 7절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7절) By “flock, herd, and tents” are here signified those things which cannot agree, as is evident from what follows—“and there was strife between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nd the herdmen of Lot’s cattle” (verse 7).

 

 

1565. ‘양과 소’가 겉 사람의 소유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과 ‘’의 의미가 선이라는, 343번 및 415번 글을 보면 분명합니다만 그러나 여기서는 분리될 것들, 곧 선이 아닌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여기서는 이것들이 롯의 속성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그것은 곧 아브람과 분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That “flock and herd” signify the possessions of the external ma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flock” and “herd,” as being goods (see n. 343 and 415); but here they signify things that are to be separated, and thus things that are not good, because they are attributed to Lot, who was being separated from Abram.

 

’과 ‘’는 또 선하지 않은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다음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That “flock” and “herd” signify also things not good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passages of the Word.

 

스바냐에서는 In Zephaniah:

 

5해변 주민 그렛 족속에게 화 있을진저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를 치나니 내가 너를 멸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 6해변은 풀밭이 되어 목자의 움막과 양 떼의 우리가 거기에 있을 것이며 (습2:5-6) I will destroy thee, that there shall be no inhabitant. And the sea coast shall be habitations dug out for shepherds, and folds for a flock. (Zeph. 2:5–6)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네가 목자와 그 양 떼를 분쇄하며 네가 농부와 그 멍엣소를 분쇄하며 네가 도백과 태수들을 분쇄하도록 하리로다 (렘51:23) I will disperse in thee the shepherd and the flock; and I will disperse in thee the husbandman and his yoke. (Jer. 51:23)

 

계속해서 In the same:

 

28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공격을 받은 게달과 하솔 나라들에 대한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일어나 게달로 올라가서 동방 자손들을 황폐하게 하라 29너희는 그들의 장막과 양 떼를 빼앗으며 휘장과 모든 기구와 낙타를 빼앗아다가 소유로 삼고 그들을 향하여 외치기를 두려움이 사방에 있다 할지니라 (렘49:28-29) Go ye up to Arabia, and lay waste the sons of the east; their tents and their flocks shall they take. (Jer. 49:28–29)

 

 

1566. ‘장막’이 속 사람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 중인 예배라는 것은 ‘장막’의 의미가 거룩한 예배라는, 414번 글과, 또 롯의 표상이 ‘장막’ 곧, 겉 사람의 예배로 서술되고 있음을 볼 때, 분명합니다. That “tents” are the worship of that which was separating itself from the intern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ent,” as being the holy of worship (n. 414); and also from the representation of Lot, as being the external man, of which “tents”—or worship—are predicated.

 

장막’의 정반대의 뜻이 거룩하지 않은 예배라는 것은 이어지는 다음 구절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in the opposite sense “tents” signify worship not holy, is also evident from the following passages of the Word.

 

호세아에서는 In Hosea: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호9:6) The nettle shall inherit them; thorns shall be in their tents. (Hos. 9:6)

 

하박국에서는 In Habakkuk:

 

7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는도다 8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강들을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들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향하여 성내심이니이까 (합3:7-8) I saw the tents of Cushan; the curtains of the land of Midian were greatly moved; Jehovah was angry against the rivers. (Hab. 3:7–8)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렘6:3) Shepherds with their flocks shall come unto the daughter of Zion; they shall pitch tents against her round about; they shall feed down everyone his space. (Jer. 6:3)

 

시편에서는 In David: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을 치셨으나 (시78:51) He smote all the firstborn in Egypt, the beginning of strength in the tents of Ham. (Ps. 78:51)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84:10) I had rather stand at the threshold in the house of my God, than dwell in the tents of wickedness. (Ps. 84:10)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5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속뜻)

겉 사람의 여러 소유와 예배는 오직 속 사람과 함께할 때만 쓰임 받으며, 만일 그렇지 못할 때는 오히려 속 사람과의 분리를 가중시킨다

 

※ 겉 사람의 것이라고 무조건 다 나쁘며, 역기능을 하고,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순종입니다. 겉 사람에게 속한 감각과 즐거움, 기쁨 및 예배들이 만일 속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면, 속 사람을 섬겨 속 사람을 통한 주님의 뜻 받드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다면 그때는 겉 사람에게 속한 것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주님께 열납되며,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의도가 없고, 그저 육체의 감각과 세상, 세속적 즐거움과 쾌락 추구에만 전념한다면 그때는 아브람의 조카 롯이 결국 아브람과 헤어지는 것처럼 겉 사람은 속 사람과 헤어지게 되며, 이렇게 되면, 겉과 속이 다르게 되어 사후, 영계에서 아주 안타까운 운명을 만나게 됩니다.

 

속 사람 안에는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만 있으며, 그래서 주님은 오직 속 사람을 통해서만 말씀하시고,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주님의 질서는 주님, 속 사람, 겉 사람 순입니다. 이 순서를 잘 기억하고, 반드시 이 순서, 이 질서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2021-11-16(D3)-매일예배(2235, AC.1562-1566, 창13,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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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62. 5절,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Verse 5.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had flock and herd, and tents.

 

아브람의 일행 롯도’, 주님 안에 있었던 겉 사람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겉 사람을 풍성하게 하는 것들을 각각 의미하며, ‘양과 소’는 겉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고, ‘장막’은 그의 예배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신들을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하고 있었습니다.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signifies the external man that was in the Lord; “had flock and herd, and tents” signifies those things in which the external man abounds; “flock and herd” are the external man’s possessions; “tents” are his worship: these things were separating themselves from the internal man.

 

 

1563. 아브람의 일행 롯도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이것이 ‘주님 안에 있었던 겉 사람을 의미함’은 롯(Lot)이 표상하는 바가 감각적인(sensuous) 사람, 같은 말이지만, 겉 사람임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external man that was in the Lord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on of Lot as being the sensuous man, or what is the same, the external man.

 

누구나 다 그 안에 겉 사람과 속 사람이 있다, 혹은 같은 말이지만, 사람은 겉과 속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얘깁니다. (※ 전에 말씀드린 내용에 대해 보시려면 AC.978, 994-995, 1015 참조) That there is an internal and an external in every man, or what is the same, that man is internal and external, is known to everyone within the church (concerning which see what has been said before, n. 978, 994–995, 1015).

 

겉 사람은 그 생명을 주로 속 사람, 즉, 영이나 혼으로부터 받습니다. The external man receives its life principally from the internal man, that is, from the spirit or soul.

 

겉 사람의 생명 자체가 일반적으로는 속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겉 사람의 유기적 그릇들(organic vessels), 곧 속 사람 특유의 것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담게 되어 있는, 겉 사람에게 있어 속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그릇들이 열리지 않는 한, 겉 사람한테 어떻게든 담길 수가 없습니다. Thence comes its very life in general; but this life cannot be received in its particulars, or distinctly, by the external man, unless its organic vessels are opened, which must be the recipients of the particulars and the singulars of the internal man.

 

※ 일단 무엇이든 뭘 담으려면 먼저 뚜껑이 열려야 하는데 안 열린다는 말이지요.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들은 오직 주님의 생명,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에 대해서만 열리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이라고 다 무조건 나쁜 건 아닙니다. 겉 사람의 모든 감각적 즐거움도 그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주 안에서 그 쓰임새를 따라 누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활짝 열립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한 정욕과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으로 말미암는다면 그때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런 건 생명이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겉 사람의 생명이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데 둘 사이 무슨 불일치가 있어 그릇이 안 열리고, 그래서 속 사람의 생명이 겉 사람에게 흘러들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수용체 노릇을 하게 될 이들 유기적 그릇들은 감각들, 특히 청각과 시각이라는 감각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그릇들이 열리면 속 사람은 속 사람 특유의 것들을 가지고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습니다. These organic vessels, which are to be the recipients, are not opened except by means of the senses, especially those of hearing and sight; and, as they are opened, the internal man can flow in with its particulars and singulars.

 

그릇들은 감각들을 매개로 해서 지식과 즐거움, 기쁨들을 통해서 열립니다. 지식을 통해서는 이해에 속한 것들이, 즐거움과 기쁨을 통해서는 의지에 속한 것들이 열립니다. They are opened with the senses as the media, by means of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and also by means of pleasures and delights; those belonging to the understanding by means of knowledges, and those belonging to the will by means of pleasures and delights.

 

[2] 이런 것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진리와 함께 갈 수 없는 지식은 자기를 겉 사람한테로 슬그머니 밀어 넣을 것이며, 천적 선과 함께 갈 수 없는 만족과 기쁨도 그럴 것이라는 거, 육체적, 세속적, 그리고 땅에 속한 모든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들의 경우도, 그런 것들이 목적이 될 때, 겉 사람을 밖으로, 아래로 끄집어내어 속 사람으로부터 제거되는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From these things it may be seen that it must necessarily happen that such knowledges as cannot agree with spiritual truths will insinuate themselves into the external man; and that such pleasures and delights will insinuate themselves as cannot agree with celestial goods; as is the case with all those things which regard corporeal, worldly, and earthly things as the ends; which, when regarded as ends, draw the external man outward and downward, and so remove it from the internal man.

 

※ 즉, 영적, 천적, 그리고 주님을 향하지 않는, 그와는 정반대로, 육체와 세상, 세속을 향하는 것들은 겉과 속의 하나 됨은커녕, 오히려 분리와 제거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먼저 흩어버리지 않으면 속 사람은 겉 사람과 하나 될 수가,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 되려면 반드시 이런 일들이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Wherefore, unless such things are first dispersed, the internal man cannot possibly agree with the external; so that before the internal man can agree with the external, such things must first be removed.

 

주님과 함께 이런 일들이 제거되거나 분리되는 바로 이런 것이 롯과 아브람 간 서로 헤어지는 걸로 표상되고 있습니다. That with the Lord these things were removed or separated is represented and signified by the separation of Lot from Abram.

 

2021-11-14(D1)-매일예배(2234, AC.1562-1563, 창13,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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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IPV5Nf_w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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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9

 

THE INTERNAL SENSE

 

 

977.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거듭난 사람(the regenerate man)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도 조금 부언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하면 둘 다 더 잘 이해되지 싶어서입니다. As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regenerate man, a few words shall be said about what he is relatively to the unregenerate man, for in this way both will be apprehended.

 

거듭난 사람의 경우, 선한 것과 참된 것에 관한 어떤 양심(conscience)이 있어 그는 양심으로부터 선을 행하고 진리를 생각하는데요, 그가 행하는 선은 체어리티의 선(the good of charity)이요, 그가 생각하는 진리는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입니다. With the regenerate man there is a conscience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he does good and thinks truth from conscience; the good which he does being the good of charity, and the truth which he thinks being the truth of faith.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양심이 없거나, 있어도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거나 신앙의 진리를 생각하는 그런 양심이 아닌, 자기 자신이나 세상에 관한 사랑에 기반한 양심이며, 그래서 겉으로만 그럴싸하거나 거짓된 양심입니다. The unregenerate man has no conscience, or if any, it is not a conscience of doing good from charity, and of thinking truth from faith, but is based on some love that regards himself or the world, wherefore it is a spurious or false conscience.

 

거듭난 사람의 경우, 그가 양심을 따라 행할 때는 즐거움이 있지만 양심에 어긋나는 걸 하거나 생각할 때는 근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중 정말 많은 사람들이 양심이 뭔지를 모르며, 심지어 양심을 따라 한다는 게 뭔지, 혹은 양심에 어긋나는 걸 한다는 게 뭔지를 모릅니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이 좋아하는 그런 것만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With the regenerate man there is joy when he acts according to conscience, and anxiety when he is forced to do or think contrary to it; but it is not so with the unregenerate, for very many such men do not know what conscience is, much less what it is to do anything either according or contrary to it, but only what it is to do the things that favor their loves.

 

이것이 그들을 기쁘게 하며,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과 반대되는 걸 하게 되면, 그들은 근심하게 됩니다. This is what gives them joy, and when they do what is contrary to their loves, this is what gives them anxiety.

 

거듭난 사람의 경우, 그에게는 새 의지(a new will)와 새 이해(a new understanding)가 있습니다. 이 새 의지와 새 이해가 그의 양심입니다. 즉, 그의 양심 안에 이 둘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를 통해 체어리티의 선과 신앙의 진리로 하여금 일을 하게 하십니다. With the regenerate man there is a new will and a new understanding, and this new will and new understanding are his conscience, that is, they are in his conscience, and through this the Lord works the good of charity and the truth of faith.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경우, 그에게 있는 것은 의지가 아닙니다. 의지 대신 갈망(yearning)이 있으며, 그 결과 모든 악으로 기우는 어떤 경향(proneness)이 있습니다. 또 그에게 있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무슨 머리굴림(reasoning)만 있어 결과적으로 모든 거짓을 향한 구부러짐(falling away)만 있습니다. With an unregenerate man there is not will, but instead of will there is yearning, and a consequent proneness to every evil; neither is there understanding, but mere reasoning and a consequent falling away to every falsity.

 

거듭난 사람의 경우, 그에게는 천적, 영적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그저 육적(corporeal), 세속적 생명만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그가 선한 것, 참된 것을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전에 말한 리메인스를 통해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며, 그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것도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With the regenerate man there i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but with the unregenerate man there is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 and his ability to think and understand what is good and true is from the Lord’s life through the remains before spoken of, and it is from this that he has the faculty of reflecting.

 

거듭난 사람의 경우, 속 사람은 지배적인 반면, 겉 사람은 복종적이고, 순종적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겉 사람이 다스리고, 속 사람은 죽은 듯 조용합니다. 마치 없는 듯 말입니다. With the regenerate the internal man has the dominion, the external being obedient and submissive; but with the unregenerate the external man rules, the internal being quiescent, as if it had no existence.

 

거듭난 사람은 속 사람이 무엇인지, 겉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거나 깊이 생각할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런 것에 관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거의 무지하며, 심지어 이런 걸 깊이 생각할 줄도 모릅니다. 그는 체어리티로 말미암는 신앙의 선과 진리에 대해 낯설기 때문입니다. The regenerate man knows, or has a capacity of knowing on reflection, what the internal man is, and what the external; but of these the unregenerate man is altogether ignorant, nor can he know them even if he reflects, since he is unacquainted with the good and truth of faith originating in charity.

 

이렇게 거듭난 사람의 퀄러티는 어떤지, 그리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퀄러티는 또 어떤지를, 그리고 이들은 서로 정말 여름과 겨울처럼, 빛과 어두움처럼 완전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거듭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지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Hence may be seen what is the quality of the regenerate, and what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at they differ from each other like summer and winter, and light and darkness; wherefore the regenerate is a living, but the unregenerate a dead man.

 

 

978. 속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겉 사람에 대해서 오늘날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있어도 매우 희귀합니다. What the internal man is, and what the external, is at this day known to few, if any.

 

다들 이 둘은 하나며 같은 것이라고 여기는데, 이는 사람들이 선을 행하는 것도, 진리를 생각하는 것도 다 자기가 하는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는 게 사람들의 고유 본성이지요. 하지만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다른 건 마치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It is generally supposed that they are one and the same, and this chiefly because men believe that they do good, and think truth from what is their own, for it is the nature of man’s own to believe this; whereas the internal man is as distinct from the external as heaven is from earth.

 

배운 사람이든 무학자이든 이 주제에 관해 좀 생각하게 해보면, 속 사람에 관해서는, ‘생각’(thought)이라고밖에는 무슨 다르게 생각하지를 못합니다. 그건 안에(within) 있으니까요. 그리고 겉 사람에 관해서는, 그건 ‘’(body), 감각(sense)과 쾌락(pleasure)이라는 생명을 가진 몸이다, 왜냐하면, 그건 밖이니까(without) 합니다. Both the learned and the unlearned, when reflecting on the subject, have no other conception respecting the internal man than its being thought, because it is within; and of the external man that it is the body, with its life of sense and pleasure, because this is without.

 

그러나 이렇게 속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생각은 거기, 곧 속 사람에 속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속 사람 안에는 주님의 것인 선과 진리들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 속 사람 안에는 주님에 의해 이식되어 심긴 양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악인들, 심지어 가장 악한 사람들 및 양심을 외면하는 사람들 역시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아는 걸 보면, 사람의 생각은 속 사람에게 속한 게 아닌, 겉 사람에게 속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Thought, however, which is thus ascribed to the internal man, does not belong thereto; for in the internal man there are nothing but goods and truths which are the Lord’s, and in the interior man conscience has been implanted by the Lord; and yet the evil, and even the worst of men, have thought, and so have those who are devoid of conscience, which shows that man’s thought does not belong to the internal, but to the external man.

 

이 감각과 쾌락의 생명을 가진 몸은 겉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영들 역시 똑같이 일종의 겉 사람을 소유한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비록 이 세상 살 동안 가졌던 그런 몸을 영들은 이젠 갖고 있지 않은데도 말입니다. That the body, with its life of sense and pleasure, is not the external man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spirits equally possess an external man, although they have no such body as they had during their life in this world.

 

모든 사람에게는 천사의 천국(the angelic heaven)과 상응하는 어떤 천적, 영적인 것이, 그리고, 천사 같은 영들의 천국(the heaven of angelic spirits)과 상응하는 어떤 이성적인 것(a rational)이, 그리고 영들의 천국(the heaven of spirits)과 상응하는 어떤 감각적인 내면(an interior sensuous)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아무도 속 사람이 무엇인지, 겉 사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But what the internal man is, and what the external, no one can possibly know unless he knows that there is in every man a celestial and a spiritual that correspond to the angelic heaven, a rational that corresponds to the heaven of angelic spirits, and an interior sensuous that corresponds to the heaven of spirits.

 

세 천국이 있고, 사람 안에도 역시 그 수만큼의, 아주 완전히 서로 다른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있는 사람은 사후, 제일 먼저 영들의 천국에 있게 되고, 이후 주님에 의해 천사 같은 영들의 천국으로 올라갔다가 마침내 천사의 천국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그 사람 안에 천국과 같은 수만큼의 뭔가가 있지 않으면, 그리고 천국과 상응하는 그것의 상태가 천국과 같지 않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For there are three heavens, and as many in man, which are most perfectly distinct from each other; and hence it is that after death the man who has conscience is first in the heaven of spirits, afterwards is elevated by the Lord into the heaven of angelic spirits, and lastly into the angelic heaven, which could not possibly take place unless there were in him as many heavens, with which and with the state of which he has the capacity of corresponding.

 

이 일로 저는 속 사람을 구성하는 게 무엇인지, 또 겉 사람을 구성하는 게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From this I have learned what constitutes the internal, and what the external man.

 

속 사람은 천적, 영적인 것으로, 내면(interior) 혹은 중간(intermediate)은 이성적인 것(what is rational)으로, 그리고 겉 사람은 감각적인 것(what is sensuous), 그런데 몸에 속한 대신 몸과 관련된 것들로 각각 형성됩니다. 이상의 내용은 사람뿐 아니라 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The internal man is formed of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the interior or intermediate man, of what is rational; and the external man of what is sensuous, not belonging to the body, but derived from bodily things; and this is the case not only with man, but also with spirits.

 

지식인들처럼 표현하자면, 세 가지, 속, 내면 및 겉 사람은 마치 목적, 원인 및 결과와 같습니다. 그리고 다들 잘 알고 있듯 원인 없는 결과 없고, 목적 없는 원인 없습니다. To speak in the language of the learned, these three, the internal, the interior, and the external man, are like end, cause, and effect; and it is well known that there can be no effect without a cause, and no cause without an end.

 

결과, 원인 및 목적은 외면과 내면, 그리고 가장 안쪽처럼 서로 구별됩니다. Effect, cause, and end, are as distinct from each other as are what is exterior, what is interior, and what is inmost.

 

엄밀히 말씀드리자면, 감각적인 사람은, 이 감각적인 사람은 그 사고가 감각적인 것들을 기반으로 하는 사람인데요, 이 사람이 겉 사람입니다. 영적, 천적인 사람은 속 사람, 그리고 이성적인 사람은 이 둘 사이 중간 사람으로, 속과 겉 간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Strictly speaking, the sensuous man—or he whose thought is grounded in sensuous things—is the external man, and the spiritual and celestial man is the internal man, and the rational man is intermediate between the two, being that by which the communication of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is effected.

 

저는 이런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음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겉의 것들 가운데 살고 있으며, 겉의 것들을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I am aware that few will apprehend these statements, because men live in external things, and think from them.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을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여기며, 몸이 죽을 때, 자신들도 함께 죽는다 믿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때 그들은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는데도 말입니다. Hence it is that some regard themselves as being like the brutes, and believe that on the death of the body they will die altogether, although they then first begin to live.

 

선한 사람들은 사후, 가장 먼저 영들의 세계 혹은 영들의 천국에서 어떤 감각의 삶을 삽니다. 그러다가 천사 같은 영들의 천국에서는 내면적 감각의 삶을 살고, 그리고 드디어 천사의 천국에서 가장 내적 감각의 삶을 삽니다. 이 속 사람의 삶은 그 삶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사람은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천사의 삶입니다. After death, those who are good, at first live a sensuous life in the world or heaven of spirits, afterwards an interior sensuous life in the heaven of angelic spirits, and lastly an inmost sensuous life in the angelic heaven, this angelic life being the life of the internal man, and concerning which scarcely anything can be said that is comprehensible by man.

 

거듭난 사람은 선과 진리 및 영적 전쟁의 본성을 깊이 생각해봄으로써 그런 삶이 있음을 알 수도 있지 싶습니다. 주님이 속 사람을 통해서 체어리티의 선과 신앙의 진리가 겉 사람 안에 있게 하신 이후부터는 그것이 사람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The regenerate may know that there is such a life by reflecting on the nature of the good and the true, and of spiritual warfare, for it is the life of the Lord in man, since the Lord—through the internal man—works the good of charity and the truth of faith in his external man.

 

그때 그의 사고와 어펙션(affection, 애정)에 지각되는 것은 어떤 일반적인 것인데, 그 안에는 속 사람한테서 나오는 셀 수 없는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천사의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지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What is thence perceived in his thought and affection is a certain general which contains innumerable things that come from the internal man, and which the man cannot possibly perceive until he enters the angelic heaven.

 

(이 일반적인 것과 그 경험에서 나오는 본성에 관하여는 위 AC.545 참조) (Concerning this general and its nature, see above, n. 545, from experience.)

 

여기서 말씀드린 속 사람에 관한 내용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구원받기 위해 이런 걸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The things here said about the internal man, being above the apprehension of very many, are not necessary to salvation.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게 있으며,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It is sufficient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 and to acknowledge and belie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979. 거듭난 사람에 관한, 그리고 겉 사람에게로 흐르는 속 사람의 인플럭스에 관한 이런 관찰을 먼저 좀 하는 이유는, 본 장이 거듭난 사람과, 겉 사람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 속 사람 및 겉 사람의 복종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se observations on the state of the regenerate man, and on the influx of the internal man into the external, have been premised because this chapter treats of the regenerate man, of the dominion of the internal man over the external, and of the submission of the external man.

AC.978, 창9, '창9, 속뜻'.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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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Q-YzN7ER8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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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16.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Verse 1.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coelum] and the earth.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 합니다. 천지가 처음 시작된 때이지요.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 “the beginning.

 

이때를 선지자들은 말씀 여러 곳에서 ‘옛날’(days of old), ‘영원’(days of eternity) 등으로 불렀습니다. 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 “days of old” [antiquitatis] and also the “days of eternity.

 

태초’라는 표현, ‘처음, 시작’이라는 표현에는 또 사람의 거듭남 전체 과정 중 그 첫 번째 기간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람은 그때 새롭게 태어나며,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The “beginning” 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그래서 거듭남 그 자체를 가리켜 사람의 ‘새 창조’라고 합니다.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 “new creation” of man.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등 이런 표현들은 거의 모든 선지서, 거의 모든 데서 약간의 상징적 차이들은 있지만, 공통적으로 거듭남을 가리킵니다.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to “make,” 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이사야처럼 말입니다. As in Isaiah: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래서 주님은 같은 성경에서, ‘구속자’(redeemer), ‘태에서부터 지으신 이’(former from the womb), ‘지으신 이’(maker), ‘창조자’(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43:15)

 

시편에서는 In David: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시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하늘’(heaven)은 속 사람을, ‘’(earth)은 거듭남 이전 겉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은 앞으로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보시게 됩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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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a2ieKXEVG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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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ternal Sense

 

14. 후속 작업에서, 주(主, the Lord)라는 이름은 온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이름 앞뒤로 무슨 다른 형용 없이 오직 ‘’로만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In the following work, by the name Lord is meant the savior of the world, Jesus Christ, and him only; and he is called “the Lord” without the addition of other names.

 

온 천국에 걸쳐 그분은 주(主)로 시인 및 흠모의 대상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오직 그분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Throughout the universal heaven he it is who is acknowledged and adored as Lord, because he has all sovereign power in the heavens and on earth.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다음과 같이 부르라 명하셨습니다. He also commanded his disciples so to call him, saying,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요13:13)

 

그래서 부활 후, 제자들은 그분을 ‘’라 하였습니다. And after his resurrection his disciples called him “the Lord.

 

※ 다음은 ‘주님의 교리’ 1번 글 참조 본문입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1-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3:19)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46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12:36, 46)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17:5)

 

 

15. 천국 전체가 주님 아닌 다른 아버지는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이 사실을 주님은 다음과 같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Lord, because he and the father are one, as he himself has said: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요14:6,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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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CPr1rCGOs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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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9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10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bearing fruit after it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the earth brought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fter its kind, an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20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21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in which is fruit;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wherein is a living soul, every green herb for food; and it was so. 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The Contents

 

6. 육 일, 또는 기간들은, 사람의 거듭남 관련, 수많은 일련의 상태들인데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in general as follows.

 

 

7. 첫 번째 상태는 선행 상태인데, 두 가지, 유아기부터 거듭남 바로 직전까지의 상태를 포함합니다. The first state is that which precedes, including both the state from infancy, and that immediately before regeneration.

 

이 상태를 일컬어 ‘혼돈’, ‘공허’, 그리고 ‘흑암’이라 합니다. This is called a “voi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이때 첫 움직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자비인데요,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가 그것입니다. And the first motion, which is the Lord’s mercy, is “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8. 두 번째 상태는 주님의 것과 사람의 것 사이, 하나의 구분이 생기는 때입니다. The second state is when a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os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nd those which are proper to man.

 

주님의 것은 이름하여 말씀에서 ‘리메인스’라 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특별히 신앙 관련 지식이며, 이 지식은 유아기부터 배워 온, 그래서 차곡차곡 쌓인, 그러나 사람이 이 두 번째 상태에 이를 때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지식입니다.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and here are especially knowledges of faith, which have been learned from infancy, and which are stored up, and are not manifested until the man comes into this state.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혹은 슬픔 없이는 좀처럼 존재하지 않는데요, 이런 일이 일어나면 몸과 세상, 즉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일은 마치 죽은 것처럼 휴면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At the present day this state seldom exists without temptation, misfortune, or sorrow, by which the things of the body and the world, that is, such as are proper to man, are brought into quiescence, and as it were die.

 

그렇게 겉 사람에게 속한 일은 속 사람에게 속한 일로부터 분리됩니다. Thus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are separated from those which belong to the internal man.

 

속 사람에게 있는 것이 '리메인스'이며, 주님이 이렇게 쓰시려고 이때까지 보관해 오신 것입니다. In the internal man are the remains, stored up by the Lord unto this time, and for this use.

 

 

9. 세 번째 상태는 뉘우침의 상태입니다. 이때 사람은 그의 속 사람으로 말미암아 신앙적인 말, 종교적인 말도 하고, 체어리티(charity, 선행, 이웃 사랑)의 일 같은 선한 일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은 활력,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가 이런 일이 자기한테서 나오는 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이런 선을 가리켜 ‘’, 그리고 ‘씨 맺는 채소’, 나중에는 ‘열매 맺는 나무’라 합니다. These goods are called the “tender grass,” and also the “herb yielding seed,” and afterwards the “tree bearing fruit.

 

 

10. 네 번째 상태 때, 사람은 애정 어린 사랑의 사람, 조명받은 신앙의 사람이 됩니다. The fourth state is when the man becomes affected with love, and illuminated by faith.

 

그는 앞서 실제로 경건하게 담론하고 선을 행했지만 그건 그가 수고한 시험과 엄격함의 결과로 그런 것이지, 신앙이나 체어리티로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의 속 사람 안에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불이 켜진 까닭에, 이를 가리켜 ‘두 큰 광명체’라 합니다. He indeed previously discoursed piously, and brought forth goods, but he did so in consequence of 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 and not from faith and charity; wherefore faith and charity are now enkindled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alled two “luminaries.

 

 

11. 다섯 번째 상태 때, 사람은 신앙으로 담론을 하며, 그래서 자기가 지금 진리 안에, 선 안에 있음을 확실히 압니다.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이제 활력, 곧, 생명력이 있으며, 그래서 이를 가리켜 ‘바다의 물고기’, 그리고 ‘하늘의 새’라 합니다. The fifth state is when the man discourses from faith,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ruth and good: the things then produced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heavens.

 

 

12. 여섯 번째 상태 때, 사람은 신앙으로, 그리고 그래서 사랑으로 진실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합니다. 이제부터 그가 행하는 일들을 가리켜 ‘생물’이라, ‘짐승’이라 합니다. The sixth state is when, from faith, and thence from love, he speaks what is true, and does what is good: the things which he then brings forth are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이렇게 그가 즉시, 그리고 신앙과 사랑, 둘 다로 행하기 때문에, 그는 영적인 사람이 되었으며, 그를 가리켜 ‘형상’이라 합니다.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at once and together from both faith and love,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그의 영적 삶은, 신앙의 지식이 속한, 그리고 체어리티의 일이 속한 그런 것, ‘먹을거리’라고 하는, 그런 것으로 밝아지고, 지속되며, 그의 자연적 삶 역시 몸과 감각에 속한 것으로 밝아지고, 지속됩니다. 그래서 사랑이 우위를 점하여 그가 천적 인간(天的, a celestial man)이 될 때까지 둘 사이엔 전투가 일어납니다. His spiritu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such things as belo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nd to works of charity, which are called his “food”; and his natur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those which belong to the body and the senses; whence a combat arises, until love gains the dominion, and he becomes a celestial man.

 

 

13. 거듭남 가운데 있다고 해서 모두가 다 이 상태에까지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do not all arrive at this state.

 

오늘날 절대다수가 겨우 첫 번째 상태에, 일부가 겨우 두 번째, 그리고 그렇게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이 여섯 번째 상태는 아주 소수, 일곱 번째 상태까지 도달하는 경우는 그야말로 희귀한 경우입니다. The greatest part, at this day, attain only the first state; some only the second; others the third, fourth, or fifth; few th sixth; and scarcely anyone the seventh.

AC.6-13, 창1, '창1, 본문 및 개요'.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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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y_qjGrKO_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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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58. 4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Verse 4. Unto the place of the altar which he had made there in the beginning; and there Abram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제단이 있는 곳으로’, 예배(worship)에 관한 거룩한 것들을, ‘그가 처음으로 쌓은’, 주님의 어린 시절, 주님이 가지고 계셨던 것을, ‘아브람이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 상태에서 드린 내적 예배를 각각 의미합니다. Unto the place of the altar” signifies the holy things of worship; “which he had made in the beginning” signifies which he had when a child; “and there Abram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signifies the internal worship in that state.

 

 

1559. 제단이 있는 곳으로 Unto the place of the altar.

 

이것이 ‘예배에 관한 거룩한 것들’에 관한 의미임은 ‘제단’의 의미가 예배에 관한 주된 표상(principal representative)인 점을, 제단하면 예배임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AC.921 참조) That this signifies the holy things of worship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n “altar” as being the principal representative of worship (concerning which, see n. 921).

 

 

1560. 그가 처음으로 쌓은 Which he had made in the beginning.

 

이것이 ‘주님이 아이였을 때 가지셨던’이라는 의미임은 앞장 8절의 내용을 보시면 됩니다. That this signifies which he had when a child,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in the preceding chapter at verse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12:8)

 

여기서는 ‘처음으로’(in the beginning)라 하고, 앞절에서는 ‘전에’(at the first)라 하는 이유는, 그때가 주님이 지식으로 가득 채워지시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It is here said, “in the beginning,” and in the preceding verse, “at the first,” because that was before the Lord had been imbued with knowledges.

 

사람이 가르침을 받기 이전 모든 상태를 ‘’(the first)[라. 이니티움 initium]이라 하고, 그가 가르침을 받기 시작할 때를 ‘처음’(the beginning)[라. 프링치피움 principium]이라 합니다. All the state before a man is instructed, is “the first” [initium]; and when he begins to be instructed, it is “the beginning” [principium].

 

 

1561. 아브람이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here Abram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이것이 ‘그 상태에서 드린 내적 예배’라는 의미임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의 의미를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AC.440, 1455 참조) That this signifies the internal worship in that stat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calling on the name of Jehovah” (explained above, n. 440, 1455).

 

여기서도 역시, 그 유사한 상태들 때문에, ‘제단’이 언급되고 있으며, 이르기를,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하고 있습니다. 앞장 8절의 경우처럼 말이지요. 다만 그 차이가 있다면, 앞장 8절이 뿌연 상태였다면 지금 여기는 또렷한 상태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Here too, because of the similarity of the states, mention is made of an “altar,” and it is said that he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as was the case in the preceding chapter, verse 8; but there is this difference, that as compared with the former, the state here described is a lucid one.

 

위에 묘사된 상태에서 지식이 이식되어 뿌리를 내리면, 그 지식은 상태를 명료하게 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선이 지식을 통해 먼젓번 천적 상태와 조인이 될 때, 그때 그 활동이 지금 우리 앞에 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배 자체가 어떤 활동으로서, 그 안에 들어 있는 천적인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When knowledges are implanted in the state described above, they make it lucid; and when truth and good are conjoined with the former celestial state by means of knowledges, its activity is then described as in the words now before us; for worship itself is nothing but a certain activity coming forth from the celestial which is within.

 

천적인 것 그 자체는 활동 없이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The celestial itself cannot possibly exist without activity.

 

예배는 그 첫 번째 활동입니다. 천적인 것은 그 자신을 이런 식으로 드러내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천적인 것은 이런 것, 곧 주님을 예배하는 데서 기쁨을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Worship is its first activity; for it puts itself forth in this way, because it perceives joy in it.

 

모든 사랑의 선과 체어리티의 선은 그 자체가 본질적, 필수적 활동입니다. All the good of love and of charity is essential activity itself.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4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속뜻)

지식을 통해 이젠 명료한 상태가 되신 주님은 어린 시절 주님이 가지고 계셨던 그 천적인 것들과 결합, 참된 예배의 기쁨을 맛보셨다

 

※ 창세기 12장부터는 표상교회의 시작입니다.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대신 표현’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이후 주님의 초림 때까지의 모든 말씀(The Word)은 표상으로 읽어야 합니다. 즉,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주님의 어린 시절을 표상합니다. 하란을 출발, 가나안을 거쳐 애굽에 내려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가나안으로 올라오는 이 일련의 여정은, 주님의 어린 시절, 주님의 지식과 이성, 지성이 어떻게 발전하셨는지, 어떻게 세상 여느 어린이들처럼 시작하셨는지, 그러나 또 다른 점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빠른 성취를 이루실 수 있었는지 등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2021-11-07(D1)-주일예배(2228, AC.1558-1561, 창13,4),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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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28_G2FGsP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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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53. 3절,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Verse 3. And he went according to his journeys, from the south and even to Bethel, unto the place where his tent was at the first, between Bethel and Ai.

 

그가 길을 떠나’, 질서(order)를 따라, ‘네게브(남쪽, the south)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며’, 총명의 빛(the light of intelligence)으로부터 출발, 지혜의 빛(the light of wisdom) 안으로,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어린 시절 주님이 지식으로 채워지시기 전, 가지고 계셨던 거룩한 것들에, ‘벧엘과 아이 사이’, 여기, 곧 앞 내용처럼, 지식의 천적(天的, celestial)인 것들, 그리고 세속적인 것들을 각각 의미합니다. He went according to his journeys” signifies according to order; “from the south and even to Bethel” signifies from the light of intelligence into the light of wisdom; “unto the place where his tent was before” signifies to the holy things which there were before he was imbued with knowledges; “between Bethel and Ai” signifies here, as before, the celestial things of knowledges, and worldly things.

 

 

1554. 그가 길을 떠나 He went according to his journeys.

 

이것이 ‘질서를 따라, 순서대로’라는 의미임은, ‘’(journeys)의 의미가 다음 단계들로 더욱 나아감이라는 사실에서(관련, AC.1457 참조) 비롯됩니다. 그리고 이 일들이 질서를 따라, 순서대로 일어났기 때문에 여기 ‘’은 그밖에 무슨 다른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according to order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journeys” as being further progressions (concerning which, see n. 1457); and as these were made according to order, “journeys” here signify nothing else.

 

아주 어린 시절부터 주님은 모든 신적 질서(Divine order)를 따라 천적인 것들을 향해 나아가셨으며, 아브람에 관한 기록을 통해 이런 질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그 속뜻입니다. From his earliest infancy the Lord advanced according to all Divine order to celestial things, and into celestial things; and in the internal sense, the nature of this order is described by what is said concerning Abram.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지음 받는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질서를 따라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질서는 사람마다 매우 다양한데요, 그것은 각 사람의 성정과 타고남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According to such order also are all led who are being created anew by the Lord; but this order is various with men, according to the nature and genius of each one.

 

그러나 사람이 거듭날 동안 이 질서가 사람을 어떻게 인도하는지는 그 어떤 사람한테도, 심지어 천사들한테도 대략적으로만 허락됩니다. 오직 주님만 홀로 아십니다. But the order by which a man is led while being regenerated is known to no man, and not even to the angels, except obscurely, but to the Lord alone.

 

 

1555. 네게브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며 From the south and even to Bethel.

 

이것이 ‘총명의 빛으로부터 출발, 지혜의 빛 안으로’라는 의미임은, ‘네게브’의 의미가 총명의 빛, 혹은 같은 말이지만, 내면을 비추는 빛의 상태(AC.1458번 글 참조)라는 점과, ‘벧엘’의 의미가 지식들로 말미암아 열리는 천적인 빛(AC.1453번 글 참조)이라는 점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from the light of intelligence into the light of wisdom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south” as being the light of intelligence, or what is the same, a state of light as to the interiors (spoken of before, n. 1458);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Bethel” as being celestial light arising from knowledges (concerning which before, n. 1453).

 

이것을 총명의 빛이라 하는데, 이 빛은 신앙에 관한, 선과 진리의 지식으로 얻어지는 빛입니다. 반면, 지혜의 빛은 그렇게 살 때, 즉, 총명의 빛으로 살 때 생기는 생명의 빛입니다. That is called the light of intelligence which is procured by means of the knowledges of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but the light of wisdom is that of the life which is thence acquired.

 

총명의 빛은 지적(intellectual) 파트, 혹은 이해(the understanding)에 관한 것이지만, 지혜의 빛은 의지(the will) 파트, 혹은 생명(삶)에 관한 것입니다. The light of intelligence regards the intellectual part, or the understanding; but the light of wisdom regards the will part, or the life.

 

[2] 거의 없지만, 만약 있다면, 극소수의 사람만이 사람이 어떻게 참된 지혜에 이르게 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Few, if any, know how man is brought to true wisdom.

 

총명은 지혜가 아니며, 지혜로 인도되는 그 어떤 것입니다. 무엇이 참이요 선인지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곧 참되고 선한 사람인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건 실제로 그렇게 되어야, 실제로 지혜로와야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Intelligence is not wisdom, but leads to wisdom; for to understand what is true and good is not to be true and good, but to be wise is to be so.

 

지혜는 오직 삶으로만, 사람이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만, 지혜롭다 할 수 있는 겁니다. Wisdom is predicated only of the life—that the man is such.

 

사람은 아는 거, 곧, 지식을 통해서 지혜나 생명을 접하게 됩니다. A man is introduced to wisdom or to life by means of knowing [scire et nosse], that is, by means of knowledges [scientiae et cognitiones].

 

※ 그렇다고 지적 추구, 지식 습득이 소용 없다거나 무슨 저급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지혜에 이르려면 일단 뭘 배워 아는 게 있어야 하기 때문이며, 지식이라는 징검다리를 통해 천적 지혜, 주님의 지혜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지식의 쓰임새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두 파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의지(the will), 즉, 마음먹는 능력, 결심하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the understanding), 즉, 이해하는 능력, 배우는 능력입니다. 의지가 메인 파트고, 이해는 보조입니다. In every man there are two parts,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the will is the primary part, the understanding is the secondary one.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사후 삶(死後, life after death)은 그의 의지 파트를 따른다는 겁니다. 지적(intellectual) 파트가 아니고 말입니다. Man’s life after death is according to his will part, not according to his intellectual part.

 

의지는 사람 안에서 그의 유아기부터 어린시절까지 주님에 의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밀어넣으시는 이노센스(innocence, 순진)에 의해, 그리고 부모, 보모(保姆, nurse) 및 같은 연령대 어린이들을 향한 체어리티(charity, 자선, 관용, 너그러움)에 의해, 그리고 사람이 전혀 알 수 없는, 천적인, 다른 많은 일들에 의해 일어납니다. The will is being formed in man by the Lord from infancy to childhood, which is effected by means of the innocence that is insinuated, and by means of charity toward parents, nurses, and little children of a like age; and by means of many other things that man knows nothing of, and which are celestial.

 

사람이 유아 및 어린이일 동안, 먼저 사람 안에 이들 천적인 것들이 주입되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Unless these celestial things were first insinuated into a man while an infant and a child, he could by no means become a man.

 

첫 번째 면(plane)은 이렇게 형성됩니다. Thus is formed the first plane.

 

[3] 그러나 사람은 또한 이해하는 능력이 부여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닌 것처럼, 의지만으로도 그렇습니다. 반드시 의지와 이해하는 능력이 함께 해야 사람입니다. 또 이해하는 능력은 지식 없이는 생기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어린 시절 주님은 서서히 지식으로 가득 채워져나가야만 하셨습니다. But as a man is not a man unless he is endowed also with understanding, will alone does not make the man, but understanding together with will; and understanding cannot be acquired except by means of knowledges [scientiae et cognitiones] and therefore he must, from his childhood, be gradually imbued with these.

 

두 번째 면은 이렇게 형성됩니다. Thus is formed the second plane.

 

이 지적 파트가 학습을 통해 지식들, 특별히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을 얻게 되는 이때가 일단은 사람의 거듭남의 시동이 걸릴 수 있는 때가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그의 안에서 거듭남이 시작이 되고, 진행이 되면, 이때 주님에 의해 진리와 선이 이식(移植, implant)됩니다. 이 이식은 주님에 의해 그의 유아 시절부터 무상으로 공급되어 온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을 가지고 일어나며, 이 이식의 결과, 그의 지적인 것들과 그의 천적인 것들이 하나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이 그것들과 결합하시면서, 사람은 이번에는 체어리티를 무상으로 공급받으며, 드디어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이 체어리티는 양심에 속하게 됩니다. When the intellectual part has been instructed in knowledges [scientiae et cognitiones], especially in the knowledges of truth and good, then first can the man be regenerated; and, when he is being regenerated, truths and goods are implanted by the Lord by means of knowledges in the celestial things with which he had been endowed by the Lord from infancy, so that his intellectual things make a one with his celestial things; and when the Lord has thus conjoined these, the man is endowed with charity, from which he begins to act, this charity being of conscience.

 

이런 방법으로, 사람은 처음으로 새 생명을 받습니다. 이 일은 이렇게 차근차근 일어납니다. In this way he for the first time receives new life, and this by degrees.

 

이 생명의 빛을 지혜라 하며, 첫 자리를 차지하고, 총명 위에 자리를 잡습니다. The light of this life is called wisdom, which then takes the first place, and is set over the intelligence.

 

이렇게 세 번째 면이 형성됩니다. Thus is formed the third plane.

 

사람이 몸 안에 있을 동안 이렇게 되면, 사후에도 계속해서 완벽해지는 가운데 있게 됩니다. When a man has become like this during his bodily life, he is then in the other life being continually perfected.

 

이상의 내용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총명의 빛이 무엇이며, 지혜의 빛이 무엇인지 하는 것입니다. These considerations show what is the light of intelligence, and what the light of wisdom.

 

 

1556.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Unto the place where his tent was before.

 

이것이 ‘어린 시절 주님이 지식으로 채워지시기 전 주님 안에 있었던 거룩한 것들에’라는 의미임은, ‘장막’(tent)의 의미가 신앙의 거룩한 것들인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 AC.414, 1452 및 방금전까지 말씀드린 것 참조). 그래서 이것의 의미가 ‘지식으로 채워지시기 전 주님이 가지고 계셨던 천적인 것들에’임은 앞 장에서 말씀드린,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창12:8) 내용으로 분명합니다. 이때는 애굽으로 출발하시기 전, 그러니까 주님이 지식으로 채워지시기 전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o the holy things which there were before he was imbued with knowledge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tent,” which is the holy things of faith (concerning which, n. 414, 1452, and from what has just been said); it thus signifies to the celestial things which the Lord had before he was imbued with knowledges, as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in the preceding chapter: “and Abram removed from thence unto the mountain on the east of Bethel, and pitched his tent” (verse 8); which was before he departed into Egypt, that is, before the Lord was imbued with knowledges.

 

 

1557. 벧엘과 아이 사이 Between Bethel and Ai.

 

이것이 ‘지식의 천적인 것들과, 그리고 세속적인 것들’을 의미함은 ‘벧엘’의 의미, 곧 지식으로 말미암은 지혜의 빛인 점(AC.1453 참조)과, ‘아이’의 의미가 세속적인 것들에서 나오는 빛인 점을(AC.1453 계속 참조) 볼 때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celestial things of knowledges, and worldly thing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Bethel,” which is the light of wisdom by means of knowledges (see n. 1453);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Ai,” which is the light from worldly things (also spoken of in n. 1453).

 

거기 언급된 걸 보면, 그때 주님의 상태는 아이같은 순진한 상태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이의 상태는 세속적인 것들이 섞여있는 상태인데요, 세속적인 것들은 진리와 선이 지식을 통해 천적인 것들에 심기기 전까지는 사라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사람은 천적인 것이 무엇인지, 세속적인 무엇인지를 알 때까지는 천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From what is there said, it may be seen what the Lord’s state then was, namely, that it was childlike; and the state of a child is such that worldly things are present; for worldly things cannot be dispersed until truth and good are implanted in celestial things by means of knowledges; for a man cannot distinguish between celestial and worldly things until he knows what the celestial is, and what the worldly.

 

지식은 평범하고 흐릿한 아이디어를 또렷하게 하며, 지식으로 그 아이디어를 더 또렷하게 할수록 세속적인 것들이 더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Knowledges make a general and obscure idea distinct; and the more distinct the idea is made by means of knowledges, the more can the worldly things be separated.

 

[2] 하지만 아이같은 상태는 여전히 거룩합니다. 순진하기(純眞, innocent) 때문이지요. But still that childlike state is holy, because it is innocent.

 

무지(無知, ignorance) 안에 순진이 있을 때, 무지하다고 해서 결코 거룩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거룩은 순진한 무지 안에 거주하기 때문입니다. Ignorance by no means precludes holiness, when there is innocence in it; for holiness dwells in ignorance that is innocent.

 

주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경우, 거룩은 무지 안에서 홀로 거주할 수 있습니다. 무지가 아니면 그들은 절대 거룩할 수 없습니다. With all men, except with the Lord, holiness can dwell solely in ignorance; and if not in ignorance, they have no holiness.

 

가장 높은 총명과 지혜의 빛 안에 있는 천사들 본인의 경우에도 거룩은 여전히 무지 안에 거주합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자기들이 무엇을 알고 있든지 그것은 다 주님으로 말미암았음을 알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With the angels themselves, who are in the highest light of intelligence and wisdom, holiness also dwells in ignorance; for they know and acknowledge that of themselves they know nothing, but that whatever they know is from the Lord.

 

그들은 또 알고 인정하기를, 그들의 모든 기억-지식과 총명, 그리고 지혜는 주님의 무한하신 지식과 총명, 그리고 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런 것이 무지입니다. They also know and acknowledge that all their memory-knowledge, intelligence, and wisdom, is as nothing in comparison with the infinite knowledge, intelligence, and wisdom of the Lord; thus that it is ignorance.

 

자기가 습득한 것들을 초월하는, 자기가 미처 습득하지 못한 것들이 무한히 존재한다, 무한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천사들의 상태인 거룩한 무지 가운데 있을 수 없습니다. He who does not acknowledge that there are infinite things with which he is not acquainted, beyond those with which he is acquainted, cannot be in the holiness of ignorance in which are the angels.

 

[3] 거룩한 무지라는 건 남들보다 더 무지, 무식해지는 걸로 되는 게 아니고, 대신 몇 가지, 곧 사람이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자기가 아는 것에 비해 모르는 것은 무한하고, 특히 자기가 기억하고 이해하는 것들은 천적인 것들에 비하면, 즉 이해에 속한 것들은 생명에 속한 것들에 비하면 정말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그런 걸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The holiness of ignorance does not consist in being more ignorant than others; but in the acknowledgment that of himself a man knows nothing, and that the things he does not know are infinite in comparison with those he does know; and especially does it consist in his regarding the things of the memory and of the understanding as being of but little moment in comparison with celestial things; that is, th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in comparison with the things of the life.

 

주님의 경우, 주님은 인성(things human)을 신성(things Divine)과 결합해나가실 때, 질서를 따라 진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은 처음 어린시절 가지셨던 그 천적 상태에 도착하셨습니다. 이 상태는 세속적인 것들도 있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As regards the Lord, as he was conjoining things human with things Divine, he advanced according to order; and he now for the first time arrived at the celestial state such as he had had when a child; in which state worldly things also were present.

 

이 상태에서 여전히 더욱 더 천적 상태로 나아기심으로써, 주님은 마침내 유아기 천적 상태에 이르셨고, 이 상태에서 주님은 그 인성(the human essence)을 신성(the Divine essence)과 온전히 결합하셨습니다. By advancing from this into a state still more celestial, he at length came into the celestial state of infancy, and in this he fully conjoined the human essence with the Divine essence.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3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속뜻)

어린 시절 주님은 부지런히 접하신 모든 지식으로 총명해지시고, 그 총명의 빛으로 지혜의 빛, 곧 어린 시절 간직하신 천적인 것들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셔서 마침내 도달, 인성과 신성을 하나되게 하셨다

 

※ 주님 안에서 지식, 곧 세상 지식과 종교적 지식이 바른 쓰임새 가운데 있음을, 즉, 주님을 지성에서 영성으로, 총명에서 지혜로 인도하도록 사용됨을 봅니다. 우리도 거듭남 가운데 있는 동안 주님이 허락셔서 접하게 되는 많은 지식들을 그렇게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듭 반복되지만, 주님은 한눈팔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이미 인성과 신성의 결합에 이르셨습니다. 우리도 주님 본받아 거룩한 집중, 신성한 몰입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021-11-05(D6)-매일예배(2226, AC.1553-1557, 창13,3),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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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_4sly6atnw8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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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49. 2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Verse 2. And Abram was very rich in cattle, in silver, and in gold.

 

아브람에게 가축이 풍부하였더라’, 그때 주님에게 풍부하셨던 선(goods)을, ‘’, 진리(truths)를, ‘’, 진리로 말미암는 선을 각각 의미합니다. Abram was very rich in cattle” signifies the goods with which the Lord was then enriched; “in silver” signifies the truths; “and in gold” signifies the goods from truths.

 

 

1550. 아브람에게 가축이 풍부하였더라 Abram was very rich in cattle.

 

이것의 의미가 선인 것은 ‘가축’(cattle)과 ‘양 떼’(flock)의 의미가 선이기 때문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good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cattle,” and of “flock,” as being good (concerning which above, n. 343, 415).

 

 

1551. 은이 In silver.

 

이것의 의미가 진리인 것은 ‘’의 의미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ruth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silver” as being truth.

 

태고인(太古人)들은 사람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금속에 비유했습니다. 가장 내적, 천적 선은, 이것은 주님 사랑에 속한 선인데, 금(金, gold)에, 이 선으로 말미암는 진리는 은(銀, silver)에, 가장 낮은, 자연적 선은 동(銅, copper)에, 더 낮은 진리는 철(鐵, iron)에, 그들은 그저 단순히 비유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compared the goods and truths in man to metals; the inmost or the celestial goods, which are of love to the Lord, to gold; the truths which are from these, to silver; but the lower or natural goods, to copper; and the lower truths, to iron; nor did they simply compare them, but they likewise called them so.

 

그래서 기간들, 시대들 역시 같은 금속으로 비유되었는데, 각각 황금, 은, 동, 그리고 철 시대라 했습니다. 이 순서는 시대들이 이 순서로 다른 것의 뒤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Hence periods of time were also likened to the same metals, and were called the golden, the silver, the copper, and the iron ages; for the ages followed one another in this order.

 

황금 시대는 태고 교회 때를 말하는데, 태고 교회는 천적 인간이었습니다. 은 시대는 고대 교회 때를 말하며, 고대 교회는 영적 인간이었습니다. 동 시대는 그 다음 교회 때였으며, 그 다음이 철 시대였습니다. The golden age was the time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a celestial man; the silver age was the time of the ancient church, which was a spiritual man; the copper age was the time of the succeeding church; and to this succeeded the iron age.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이 본 우상도 유사한 걸 상징하고 있습니다. Similar things are also signified by the statue seen by Nebuchadnezzar in a dream, whose “head was of good gold, the breast and arms of silver, the belly and thighs of brass, the legs of iron” (Dan. 2:32–33).

 

32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33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단2:32-33)

 

이런 것이 시리즈로 전개되는 거나, 교회의 기간들, 시대들이 이 순서로 서로 이어지는 것이 같은 선지자, 같은 장을 보면 거기에 나옵니다. That this was to be the series, or that the periods of the church succeeded one another in this order, is evident from the same prophet, and in the same chapter.

 

[2] 말씀에서 ‘’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그 속뜻은 진리를, 그 반대는 거짓을 각각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 구절들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That in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silver,” wherever named, signifies truth, and in the opposite sense falsity,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passages.

 

이사야에서 In Isaiah:

 

내가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니 (사60:17) For brass I will bring gold, and for iron I will bring silver, and for wood brass, and for stones iron; I will also make thine officers peace, and thine exactors righteousness; (Isa. 60:17)

 

이 본문에서 각 금속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where it is evident what each metal means.

 

거기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곧, 주님의 오심과 주님의 천적 나라, 그리고 교회입니다.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자연적 선 대신 천적 선을,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자연적 진리 대신 영적 진리를,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육(肉)적 선(corporeal good) 대신 자연적 선을, ‘철로 돌을’, 감각적 진리(sensuous truth) 대신 자연적 진리를 각각 의미합니다. The Lord’s coming, and his celestial kingdom and church, are there treated of; “gold for brass” is celestial good instead of natural good; “silver for iron” is spiritual truth instead of natural truth; “brass for wood” is natural good instead of corporeal good; “iron for stones” is natural truth instead of sensuous truth.

 

같은 데서 In the same: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1) Ho, everyone that thirsteth, go ye to the waters; and he that hath no silver; go ye, buy and eat; (Isa. 55:1)

 

돈 없는 자’, 교회 내 많은 사람들처럼, 그리고 교회 밖 나라들처럼 진리에 대해선 무지하지만 체어리티의 선(the good of charity, 이웃 사랑의 선, 즉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he that hath no silver” is he who is in ignorance of truth, and yet in the good of charity, like many within the church, and the nations outside the church.

 

[3] 이번에도 같은 데서 In the same: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먼 곳에서 네 자손과 그들의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라 (사60:9) The isles shall wait for me, and the ships of Tarshish in the beginning, to bring thy sons from far, their silver and their gold with them, unto the name of Jehovah thy God, and to the holy one of Israel. (Isa. 60:9)

 

여기서는 새 교회, 특별히는 이방인의 교회를, 보편적으로는 주님의 나라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스의 배들’, 지식을, ‘’, 진리를, ‘’, 선을 각각 가리킵니다. 이들은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Here a new church, or that of the gentiles, is treated of specifically, and the Lord’s kingdom universally; “the ships from Tarshish” denote knowledges; “silver,” truths; and “gold,” goods; for these are the things which they shall “bring to the name of Jehovah.

 

에스겔에서 In Ezekiel:

 

네가 또 내가 준 금, 은 장식품으로 너를 위하여 남자 우상을 만들어 행음하며 (겔16:17) Thou didst take the vessels of thine adorning of my gold and of my silver, which I had given thee, and madest for thee images of a male. (Ezek. 16:17)

 

여기 ‘’은 천적인 것에 관한 지식을, ‘’은 영적인 것에 관한 지식을 각각 가리킵니다. Here “gold” denotes the knowledges of celestial things; “silver,” those of spiritual things.

 

같은 데서 In the same: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모시와 수 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올랐느니라 (겔16:13) Thou wast adorned with gold and silver, and thy raiment was fine linen and silk, and broidered work. (Ezek. 16:13)

 

이는 예루살렘에 관한 내용인데, 예루살렘은 주님의 교회를 상징하며, 그 꾸밈, 단장이 여기 묘사되고 있습니다. This is said of Jerusalem, by which the Lord’s church is signified, and the adornment of which is thus described.

 

다시 Again:

 

3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4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겔28:3-4) Behold, thou art wise, there is no secret that they have hidden from thee; in thy wisdom and in thine intelligence thou hast gotten thee riches, and hast gotten gold and silver into thy treasures. (Ezek. 28:3–4)

 

이 본문은 두로에 관한 것인데, 여기서 ‘’은 지혜의 풍부함을, ‘’은 많은 총명을 가리킴이 명백합니다. This is said of Tyre, and it is plain that here “gold” is the wealth of wisdom, and “silver” the wealth of intelligence.

 

[4] 요엘에서 In Joel:

 

곧 너희가 내 은과 금을 빼앗고 나의 진기한 보물을 너희 신전으로 가져갔으며 (욜3:5) Ye have taken my silver and my gold, and have carried into your temples my goodly desirable things. (Joel 3:5)

 

이 본문은 두로와 시돈, 그리고 블레셋에 관한 겁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신전으로 옮긴 ‘은과 금’은 지식을 의미합니다. This is said concerning Tyre, Zidon, and Philistia; by which are signified knowledges, which are “the gold and the silver” that they have carried into their temples.

 

학개에서 In Haggai:

 

7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9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2:7-9) The choice of all nations shall come, and I will fill this house with glory; the silver is mine, and the gold is mine; the glory of this latter house shall be greater than that of the former; (Hag. 2:7–9)

 

이 본문은 주님의 교회에 관한 건데, 특별히 ‘’과 ‘’에 대해 서술된 부분이 그렇습니다. where the Lord’s church is treated of, concerning which “gold” and “silver” are predicated.

 

말라기에서 In Malachi: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말3:3) He shall sit as a smelter and purifier of silver, and shall purify the sons of Levi; (Mal. 3:3)

 

이 본문은 주님의 오심에 관한 본문입니다. where the Lord’s coming is treated of.

 

다윗의 글에서 In David: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12:6) The discourses of Jehovah are pure discourses, silver smelted in a crucible of earth, smelted seven times; (Ps. 12:6)

 

일곱 번 단련한 은’, 신적 진리를 가리킵니다. the “silver purified seven times” denotes Divine truth.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갈 때, 그들에게 내리신 명령에 관하여 In respect to the command given to the sons of Israel, when they were to go out of Egypt: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 (출3:22); 2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3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출11:2-3); 35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36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출12:35-36) Every woman shall borrow of her neighbor, and of her that is a guest in her house, vessels of silver and vessels of gold, and garments; and ye shall put them upon your sons, and upon your daughters, and shall spoil the Egyptians; (Exod. 3:22; 11:2–3; 12:35–36)

 

이 말씀에 몇 가지 아케이나가 들어 있지 않았으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훔치고, 취했다는 말을 듣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는데, 그래서 보면, 아케이나라 할 수 있는 것이, ‘’, ‘’ 및 ‘의복’, 그리고 ‘애굽’의 의미이지 싶고, 또 알 수 있는 게, 여기 묘사된 것과 너무나 똑같은 정황이, 아브람이 애굽에서 얻은 은금이 풍부하였다는 오늘 본문에서도 반복되는 걸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everyone can see that the sons of Israel would by no means have been told thus to steal, and to spoil the Egyptians, unless some arcana were thus to be represented; but what the arcana are may be seen from the signification of “silver,” of “gold,” and of “garments,” and of “Egypt”; and it may also be seen that much the same was there represented as is here represented by Abram, who was rich in silver and gold from Egypt.

 

[5]’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래서 정반대로는 거짓을 의미합니다. 거짓의 사람들은 거짓을 진리라 여기는데, 예언서들을 보면 나옵니다. As “silver” signifies truth, so in the opposite sense it signifies falsity; for they who are in falsity think that falsity is truth; as is also evident in the prophets.

 

신명기에 In Moses:

 

25너는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네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올무에 걸릴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26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신7:25-26) Thou shalt not covet the silver and the gold of the nations, nor take it unto thee, lest thou be snared therein; for it is an abomination to Jehovah thy God; detesting thou shalt detest it; (Deut. 7:25–26)

 

그들의 금’은 악을, 그들의 ‘’은 거짓을 각각 가리킵니다. the gold of the nations” denotes evils, and their “silver” falsities.

 

다시 Again: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 (출20:23) Ye shall not make with me gods of silver, and gods of gold shall ye not make unto you; (Exod. 20:23)

 

속뜻으로 이 본문은 거짓과 광적 갈망(狂的, yearnings) 말고 다른 걸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은 신상’, 거짓을, ‘금 신상’, 광적 갈망을 각각 의미합니다. by which in the internal sense nothing else is signified than falsities and yearnings; “gods of silver” are falsities; and “gods of gold” are yearnings.

 

이사야에서 In Isaiah:

 

너희가 자기 손으로 만들어 범죄한 은 우상, 금 우상을 그 날에는 각 사람이 던져 버릴 것이며 (사31:7) In that day shall they cast away every man his idols of silver and his idols of gold, which your own hands have made unto you for a sin; (Isa. 31:7)

 

은 우상, 금 우상’, 앞에 나오는 것과 유사한 것을, ‘자기 손으로 그들을 만들었다’, 그런 것이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임을 각각 의미합니다. idols of silver and idols of gold” denote similar things as before; “your own hands have made them” means that they are from man’s own.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8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가르침은 나무뿐이라 9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기술공과 은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옷을 입었나니 이는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이거니와 (렘10:8-9) They are become brutish and foolish; a teaching of vanities is that stock; silver beaten out is brought from Tarshish, and gold from Uphaz, the work of the artificer and of the hands of the founder; blue and crimson are their clothing, it is all the work of the wise; (Jer. 10:8–9)

 

이 역시 같은 걸 가리킨다는 것은 너무나도 확실합니다. denoting the like things, as is very evident.

 

 

1552. And in gold.

 

이것의 의미가 진리로 말미암는 선이라는 것은 ‘’의 의미가 천적 선, 혹은 지혜의 선, 사랑의 선임을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방금 막 본 것과, 또 전에 본 것을 보면 말이지요. (AC.113) That this signifies goods from truth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gold” as being celestial good, or the good of wisdom and of love, as is evident from the things just shown, and also from those shown before (n. 113).

 

여기, 선이 진리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앞 장에서 말씀드린 것, 곧 주님이 지성적 진리들과 천적인 것들을 결합하셨다는 내용에 이어집니다. That the goods here are from truths follows from what was said in the foregoing chapter, that the Lord conjoined intellectual truths with celestial things.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2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속뜻)

어린 시절 주님은 선과 진리, 그리고 그 진리로 말미암는 선이 풍부하셨다

 

※ 비록 어린 시절이었어도 주님은 영적, 천적 목표가 뚜렷, 한눈팔지 않으신 결과, 선과 진리, 그리고 그 진리에 따른 선이 풍부하신 것을 보며, 우리도 주님 주신 어떤 영적 목표를 붙들고 망설임 없이, 거침없이 직진, 시간과 세월을 아껴 무슨 쓰임새의 삶을 살다 가야 하겠습니다.

 

2021-11-02(D3)-매일예배(2225, AC.1549-1552, 창13,2),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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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_9mOJR8Uo4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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