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3

 

1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And Abram went up out of Egypt, he and his wife, and all that he had, and Lot with him, toward the south. 2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And Abram was very rich in cattle, in silver, and in gold. 3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And he went according to his journeys from the south and even to Bethel, unto the place where his tent was at the first, between Bethel and Ai. 4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Unto the place of the altar which he had made there in the beginning; and there Abram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5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had flock and herd, and tents. 6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And the land was not able to bear them that they might dwell together, for their substance was great, so that they could not dwell together. 7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And there was strife between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nd the herdmen of Lot’s cattle; and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were then dwelling in the land. 8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And Abram said unto Lot, Let there be no contention, I pray, between me and thee, and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for we are men brethren.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Is not the whole land before thee? Separate, I pray, from me; if to the left hand, then I will go to the right; or if to the right hand, then I will go to the left. 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And Lot lifted up his eyes, and saw all the plain of Jordan, that it was all well watered, before Jehovah destroyed Sodom and Gomorrah, like the garden of Jehovah, like the land of Egypt in coming to Zoar. 11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And Lot chose him all the plain of Jordan; and Lot journeyed from the east; and they were separated, a man from his brother. 12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Abram dwelt in the land of Canaan, and Lot dwelt in the cities of the plain, and pitched his tent as far as Sodom. 13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And the men of Sodom were wicked and sinners against Jehovah exceedingly. 14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And Jehovah said unto Abram, after that Lot was separated from him, Lift up now thine eyes, and look from the place where thou art, northward, and southward, and eastward, and westward. 15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For all the land which thou seest, to thee will I give it, and to thy seed, forever. 16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And I will make thy seed as the dust of the earth; so that if anyone can number the dust of the earth, then shall thy seed also be numbered. 17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Arise, walk through the land, in the length of it and in the breadth of it; for unto thee will I give it. 18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And Abram pitched his tent, and came, and dwelt in the oak groves of Mamre, which are in Hebron, and built there an altar unto Jehovah.

 

내용

The Contents

 

1535. 이 장은 주님 안에 있는 겉 사람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겉 사람은 그분의 속 사람과 합쳐질 예정이었습니다. This chapter treats of the external man in the Lord which was to be conjoined with his internal man.

 

겉 사람은 인성(人性, the human essence), 속 사람은 신성(神性, the Divine essence)입니다. The external man is the human essence, the internal is the Divine essence.

 

전자가 여기서 롯(Lot)으로, 후자는 아브람(Abram)으로 각각 표상(表象)되고 있습니다. The former is here represented by Lot, but the latter by Abram.

 

 

1536. 여기서는 겉 사람의 상태, 곧 어린 시절, 처음 지식[시엔티피카 에 코그니시오네스, scientifica et cognitiones, 학문과 지식]을 흠뻑 접하신 후, (1-4절) 속 사람과 함께 하시고자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가심에 관한 설명입니다. There is here described the state of the external man such as it was in childhood, when first imbued with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that it thence advanced more and more to conjunction with the internal man (verses 1 to 4).

 

 

1537. (5-7절) 그러나 그의 겉 사람 안에는 결합을 지연시키는 것들이 여전히 많았습니다. (8-9절) 주님은 이런 것들에게서 분리되기를 원하셨습니다. But that there were still many things in his external man that impeded the conjunction (verses 5 to 7); from which, however, he desired to be separated (verses 8, 9).

 

 

1538. (10-13절) 겉 사람이 주님에게 나타났습니다. 속 사람과 결합했을 때는 아름답게, 결합하지 못했을 때는 그땐 또 그렇게 말이죠. That the external man appeared to the Lord such as it is in its beauty when conjoined with the internal; and also such as it is when not conjoined (verses 10 to 13).

 

 

1539. (14-17절) 겉 사람이 속 사람과 결합했을 때, 즉 주님의 인성이 주님의 신성과 결합했을 때, 모든 힘과 권세[포테스타스 potestas]가 주님에게 주어지리라는 약속 A promise that when the external man was conjoined with the internal, that is, when the Lord’s human essence was conjoined with his Divine essence, all power and authority [potestas] should be given to him (verses 14 to 17).

 

(18절) 주님의 내적 퍼셉션에 관하여 Concerning the Lord’s interior perception (verse 18).

 

속뜻

The Internal Sense

 

1540.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앞장인 12장 말씀부터는 실제 역사의 시작,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The true historicals of the Word began, as before said, with the foregoing chapter—the twelfth.

 

그 시점까지, 그러니까 에벨까지는 꾸민 역사, 스토리 텔링입니다. Up to that point, or rather to Eber, they were made-up historicals.

 

※ 지금까지 밝혀진 지질학적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 전후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으로부터 6천 년 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지구의 시작, 곧 이 행성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 아브라함 전까지 일어난 일을 모두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역사책일 필요가 있나요? 이런 몇 가지 이유로, 이 긴 역사를 짧게 스토리 텔링 식으로 요약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속뜻으로는, 여기 계속되는 아브람 관련 실제 기록은 사실은, 주님, 특히 주님의 일생 중 처음 시절을 의미하는데, 이때는 주님이 아직 겉 사람이 속 사람과 하나로 결합하시기 전, 그러니까 겉 사람이 천적(celestial), 신적(Divine)이 되는 것과 비슷한,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 기록입니다. In the internal sense, the historicals here continued respecting Abram are significative of the Lord, and in fact of his first life, such as it was before his external man had been conjoined with the internal so as to make one thing; that is, before his external man had been in like manner made celestial and Divine.

 

이 실제 기록들은 주님에 관한 표현입니다. 기록들 자체는 표현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의미입니다. The historicals are what represent the Lord; the words themselves are significative of the things that are represented.

 

그러나 실제 기록이기 때문에, 마치 무슨 과거 일지를 읽는 것 같기 때문에, 읽는 사람의 마음이 속뜻을 생각할 수 없으며, 오늘날은 특히나 더 사람들 대부분이,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거기에 속뜻이, 심지어 모든 단어에도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나 명백히 보여드린 대로, 속뜻이 있다는 것은 사실임에도 불구,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의 존재를 인정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속뜻이 글자의 뜻으로부터 너무 물러가 거의 인식할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며, But being historical, the mind of the reader cannot but be held in them; especially at this day, when most persons, and indeed nearly all, do not believe that there is an internal sense, and still less that it exists in every word; and it may be that in spite of the fact that the internal sense has been so plainly shown thus far, they will not even now acknowledge its existence, and this for the reason that the internal sense appears to recede so f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as to be scarcely recognized in it.

 

※ 이것은 마치 길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가 그 안의 영은 못 보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의 겉모습이 너무나도 생생하여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아 버리기 때문인데, 이처럼 성경 말씀도 그 이야기가 너무나 생생하고 재미있어 그만 그 겉모습에 푹 빠져들고 말지, 예를 들어, 요셉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속에 속뜻도 함께 읽기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겉 이야기는 말씀의 몸, 속뜻은 말씀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 실제 기록들이 그들에게 말씀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은 그저 다음과 같은 사실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성경 구절이 속뜻으로부터 분리되면 거기엔 더 이상 무슨 신성이 들어 있지 않아 여느 실제 있었던 일과 다를 바 없는 단순한 일지 수준의 기록물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사실 말입니다. 성경 구절을 성언(聖言)으로 만드는 것은 속뜻, 내적 의미(internal sense)이기 때문입니다. And yet that these historicals cannot be the Word they might know from the mere fact that whe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sense there is no more of the Divine in them than in any other history; whereas the internal sense makes the Word to be Divine.

 

[2] 속뜻이 말씀 그 자체라는 사실은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마2:15)와 같은, 지금까지 밝혀진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합니다. 이 말고도 다른 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That the internal sense is the Word itself is evident from many things that have been revealed, as “out of Egypt have I called my son” (Matt. 2:15); besides many others.

 

또 주님 자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모세와 선지자의 글에 자기에 관하여 어떻게 기록하였는지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걸 볼 때, 말씀에 기록된 내용이 주님과 주님의 나라, 그리고 교회에 관한 게 아니면 말씀이라 할 수 없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The Lord himself also, after his resurrection, taught the disciples what had been written concerning him in Moses and the prophets (Luke 24:27); and thus that there is nothing written in the Word that does not regard him, his kingdom, and the church.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24:27)

 

말씀에는 영적, 천적인 것들이 있습니다만 글자의 뜻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은 대부분 세속적, 육체적, 그리고 땅에 속한 것들이어서 절대로 주님의 말씀을 만들 수 없습니다. These are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of the Word; but the things contained in the literal sense are for the most part worldly, corporeal, and earthly; which cannot possibly make the Word of the Lord.

 

이 시대 사람들은 그런 것 밖에 무슨 다른 걸 지각하지 못하며, 그래서 영적, 천적인 것들의 경우, 그들에게는 거의 금시초문, 듣도 보도 못 한 것들입니다. At this day men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y perceive nothing but such things; and what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are, they scarcely know.

 

하지만 반면, 태고 교회와 고대 교회 사람들의 경우, 그들도 그 시대에 살면서 말씀을 읽었지만 오히려 겉 글자의 뜻에 대해서는 전혀, 마치 허공을, 무(無)를 쳐다보듯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반면, 속뜻에 대해서는 정반대였습니다. It was otherwise with the men of the most ancient and of the ancient church, who, had they lived at this day, and had read the Word, would not have attended at all to the sense of the letter, which they would look upon as nothing, but to the internal sense.

 

그들은 누군가는 말씀을 다른 식으로 지각한다는 사실에 까무러칠 듯 놀랍니다. They wonder greatly that anyone perceives the Word in any other way.

 

그래서 고대인들의 책들은 모두 그 속뜻 안에 겉 글자의 뜻과는 다른 의미를 갖도록 기록되었습니다. All the books of the ancients were therefore so written as to have in their interior sense a different meaning from that in the letter.

2021-10-29(D6)-매일예배(2223, AC.1535-1540, 창13), '창13, 내용, 속뜻'.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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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QYnGWzsg5w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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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98. 20절,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Verse 20. And Pharaoh commanded the men concerning him; and they sent him away, and his wife, and all that he had.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를 보내었더라’, 기억-지식들이 주님을 떠났음을, ‘그의 아내와’, 천적인 것들과 결합한 진리들로부터도 떠났음을, ‘그의 모든 소유를’, 천적 진리들에 속한 모든 것으로부터도 떠났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And Pharaoh commanded the men concerning him; [and they sent him away]” signifies that memory-knowledges left the Lord; “and his wife” signifies that they also left the truths that were conjoined with celestial things; “and all that he had” signifies that they left all things that belonged to celestial truths.

 

※ 창12부터는 실제 역사요, 이후 끝장인 50장까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야기이지만 이들 모두 한 분 주님을 표상하며, 특히 아브라함은 천적 인간, 이삭은 영적 인간, 그리고 야곱은 자연적 인간을 각각 표상합니다.

 

특히, 창12 아브람은 주님의 어린 시절 상태를 표상합니다. 표상이란, 대신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치 무대 위 배우들처럼, 실제 모습이 어떠하든 무대 위에서는 주어진 배역에 충실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1499.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를 보내었더라 And Pharaoh commanded the men concerning him; [and they sent him away].

 

이 표현이, 기억-지식들이 주님을 떠났다는 의미인 것은, 기억-지식들이라는 ‘바로’의 의미와, 또한 지성적인 것들이라는 ‘사람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합니다. (앞서 보여드린 158번 글처럼) That this signifies that memory-knowledges left the Lor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haraoh,” as being memory-knowledge; and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men,” as being intellectual things (as before shown, n. 158).

 

여기 ‘사람들’은 바로(Pharaoh) 혹은 기억-지식의 속성을 가졌기 때문에, 거기서 비롯되는 지성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The men” here, because attributed to Pharaoh, or to memory-knowledge, signify intellectual things adapted thereto.

 

기억-지식들이 주님을 떠났다는 것은 이런 얘깁니다. As regards memory-knowledges leaving the Lord, the case is this.

 

천적인 것들과 지성적인 진리들 사이에 결합이 일어나고 있을 때, 그래서 후자가 천적이 되어갈 때, 비어 있는 모든 것, 즉 결합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은 스스로 소멸됩니다. 천적인 것의 본성에는 이런 특성도 있습니다. When celestial things are being conjoined with intellectual truths, and these are becoming celestial, then all things that are empty are dissipated of themselves; this is in the nature of the celestial.

 

※ 지성적인 진리들 안에 사랑과 체어리티가 들어 있어야 천적인 것들과 결합할 수 있습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과 체어리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얼핏 지성적인 진리인 줄 알았으나 나중에 보니 겉만 그런 건 알아서 사라지게 됩니다.

 

 

1500. 그의 아내와 And his wife.

 

이것이, 그들이 천적인 것들과 결합한 진리들을 떠났음에 대한, 즉 기억-지식들이 그들을 떠났음에 대한 의미라는 것은, ‘아내’의 의미가 천적인 것과 결합한 진리인 것과(위에서 언급한), 방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left the truths that were conjoined with celestial things, that is to say, that memory-knowledges left them,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ife” as being truth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spoken of above), and also from what has just been said.

 

속이 텅빈 기억-지식들이 천적인 것들을 떠나가는 것은 마치 무익한 것들이 늘 지혜를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마치 알아서 떨어져 나가는 굳은살과 피부 딱지들 같습니다. Empty memory-knowledges leave celestial things, as vain things are wont to leave wisdom; they are as crusts and scales that separate themselves of their own accord.

 

 

1501. 그의 모든 소유를 And all that he had.

 

이것의 의미가 그들이 천적 진리들에 속한 모든 것들을 떠났다라는 것임이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left all things that belonged to celestial truths follows in the series.

 

 

1502. 이 모든 것으로부터 이제 분명한 건, 아브람의 애굽 체류는 주님, 실제로는 주님 어린 시절 배움 말고 다른 걸 표현하거나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From all this it is now evident that Abram’s sojourn in Egypt represents and signifies nothing else than the Lord, and in fact his instruction in childhood.

 

이것은 또한 호세아 및 마태복음의 말씀으로도 확인이 되는데요, This is also confirmed by what is said in Hosea: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호11:1)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2:15) Out of Egypt have I called my son; (Hos. 11:1; Matt. 2:15)

 

또 출애굽기 말씀에서도 and again from what is said in Moses:

 

40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41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출12:40-41) The dwelling of the sons of Israel who dwelt in Egypt was thirty years and four hundred years; and it came to pass at the end of the four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it came to pass on the selfsame day, that all the armies of Jehovah went out from the land of Egypt; (Exod. 12:40–41)

 

위 사백삼십 년이라는 햇수는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부터가 아닌, 아브람의 애굽 체류 때부터 센 기간입니다. which years were not reckoned from Jacob’s going down into Egypt, but from the sojourning of Abram in Egypt, counting from which the years were four hundred and thirty.

 

그래서 ‘애굽에서 불러낸 아들’(호11:1)은 그 속뜻으로는 주님을 의미합니다. Thus by the “son out of Egypt” (in Hosea 11:1) in the internal sense is signified the Lord.

 

이것은 말씀에서는 ‘애굽’의 의미가 기억-지식이라는 사실(AC.1164-1165, 1462에서 보여드린 대로)로 더욱 확실해집니다. This is further confirmed by the fact that in the Word “Egypt” signifies memory-knowledge (as shown, n. 1164–1165, 1462).

 

[2] 이런 아케이나가 들어 있음은, 아브람의 경우, 이번엔 블레셋 체류 때 또 아내를 누이라 한 사례(창20:1-18)와, 이삭의 경우도 그가 블레셋에 체류할 동안 그 역시 아내를 누이라 한 사례(창26:6-13)들로부터도 분명합니다. And that these arcana are contained is also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same is said of Abram during his sojourn in Philistia, namely, that he called his wife his sister (Gen. 20:1–18); and similar things are said of Isaac when he also was sojourning in Philistia, in that he too called his wife his sister (Gen. 26:6–13).

 

1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2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3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4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5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6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7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8아비멜렉이 그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9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10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11아브라함이 이르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12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13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14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15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16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17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18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창20:1-18)

 

6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7그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8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9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10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11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12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창26:6-13)

 

이런 일들은 그 안에 아케이나가 들어 있지 않았으면 말씀과 관련되는 대신 거의 유사 상황들로 정리되었을 겁니다. These things would not have been related in the Word, and with almost the same circumstances, unless these arcana had been concealed within them.

 

게다가 이건 주님의 말씀입니다. 만일 그 안에 주님에 관한 어떤 내적 의미, 속뜻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코 어떤 생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Moreover this is the Word of the Lord, which can in no wise have any life, unless there is an internal sense that has regard to him.

 

[3] 이런 일들 안에 보관되어 있는 아케이나는, 블레셋 체류 시절, 아브람과 이삭에 관한 내용에도 있는 것처럼, 주님의 인성이 신성과 어떻게 결합하였는지, 또는 같은 말이지만, 주님이 어떻게 인성에 대하여까지도 여호와가 되셨는지, 그리고 이런 일이 주님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고,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등의 내용입니다. The arcana which lie stored up in these things, as also in those said concerning Abram and Isaac in Philistia, are—how the Lord’s human essence was conjoined with his Divine essence, or what is the same, how the Lord became Jehovah as to his human essence also; and that his inauguration went on from childhood, which inauguration is here treated of.

 

여기에 더해 더 엄청난 것들, 곧 사람의 믿음조차 초월하는 심오한 아케이나가 들어 있는데, 그 내용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어서 아예 아무 내용도 없다 할 정도입니다. Moreover these things also involve more arcana than man can ever believe; but those which can be told are so few as to be almost nothing.

 

주님에 관한 가장 심오한 아케이나 외에도 거기엔 사람을 가르치고, 사람으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여 천적 인간이 될 수 있게 하는 아케이나도, 또한 마찬가지로 사람을 가르치고 거듭나게 하여 이번에는 영적 인간이 될 수 있게 하는 아케이나도, 그리고 보통은 각 사람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교회를 가르치는 것도 포함됩니다. Besides the most profound arcana concerning the Lord, they also involve arcana concerning the instruction and regeneration of man, that he may become celestial; as also concerning his instruction and regeneration, that he may become spiritual; and not only concerning the instruction of the individual man, but also concerning that of the church in general.

 

그리고 더 나아가 거기에는 천국에 있는 어린이들에 대한 커리큘럼 아케이나 등 한 마디로, 주님의 이미지와 형상을 닮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 관한 커리큘럼 아케이나가 포함됩니다. And, further, they involve arcana concerning the instruction of little children in heaven; in a word, concerning the instruction of all who become images and likenesses of the Lord.

 

이런 것들은 겉뜻, 글자 상으로는 절대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역사 서술이 이런 아케이나를 베일로 가려 흐릿하게, 모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케이나는 오직 속뜻, 내적 의미로만 나타납니다. These things do not at all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for the reason that the historical narrative veils them over and obscures them; but they appear in the internal sense.

 

 

※ 이상으로, 오늘 본문 20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속뜻)

주님이 질서를 따라 어린 시절에서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시려 하자 그동안 함께 했던 세상 지식들이 주님도, 주님과 함께 해야 하는 진리도, 그리고 천국과 관련된 모든 것도 다 떠났다

 

※ 즉, 얼핏 보기에는 유익할 것 같았던 세상 기억-지식들이 그러나 주제가 영적으로 옮겨지면 본색이 드러나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마6:24 참조)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24)

2021-10-27(D4)-매일예배(2221, AC.1498-1502, 창12,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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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eIBSeGl-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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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94. 19절,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Verse 19. Why saidst thou, She is my sister? And I might have taken her to me for a woman. And now behold thy wife; take her and go.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그때 그는 자기가 지성적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아는 게 없었음을, Why saidst thou, She is my sister?” signifies that he then knew no otherwise than that he had intellectual truth;

 

※ 즉, 자기에게는 오직 지성적 진리만 있는 줄 알았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자기는 어린 시절 주님입니다. 그리고 참고로, 지성적 진리(知的, intellectual truth, 포츠 역, 1888-1902)를 최근 쿠퍼 역에서는 직관적 진리(intuitive truth)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그는 그래서 천적인 것하고만 결합해야 하는 진리를 하마터면 욕보일 뻔했다는 것, and I might have taken her to me for a woman” signifies that so he might have done violence to the truth that was to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 여기 ‘천적인 것’(what is celestial)이란 쿠퍼 역에 의하면 ‘천국 퀄러티’(a heavenly quality), 즉, 쿠퍼는 이 진리를 세상이 아닌, 천국에 어울리는 진리라고 보았습니다. 참고로, 여기 아브람은 어린 시절 주님 및 남편으로서의 선을,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남편인 선과 함께 하는, 아내로서의 진리를 의미하며, 그래서 이 진리는 아주 특별한 진리, 곧 선이신 주님하고만 있어야 하는 그런 진리인데, 어린 시절 주님은 그 사실을 천진난만하게 모르신 것입니다 ^^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진리는 천적인 것하고만 결합해야 함을 각각 의미합니다. and now behold thy wife; take her and go” signifies that truth was to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1495.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Why saidst thou, She is my sister?

 

이 표현이, 그때 그는 자기가 지성적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아는 게 없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누이’의 의미가 지성적 진리인 것과, 또 아브람이 그렇게 (13절을 보면 분명한 것처럼) 말한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이것은 진리의 천적인 것이 욕을 당하고 해를 입는 대신 보호를 받고 보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he then knew no otherwise than that he had intellectual trut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sister” as being intellectual truth; and also from the fact that Abram had said so (as is evident from verse 13), which was done to the end that the celestial might not suffer any violence, but might be saved.

 

※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7:6) 말씀처럼 세상 지식과 학문이 천적인 것을 중간 연결고리들 없이 바로 접하게 되면 비록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어린 시절, 주님이 기억-지식들을 배우셨을 때, 주님은 그저 아시기를, 이 지식들은 오직 지성적 인간을 위해서만 있는 줄, 즉, 이 지식들을 가지고 있으면 바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줄 아셨다는 것과, 그러나 나중에 밝혀지기를, 그게 아니고 지식들은 그로 하여금 천적인 것들을 얻게 하려고 존재한다는 것과, 그래서 천적인 것들이 해를 입지 않고 대신 보호받을 수 있도록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From all this it is evident that when the Lord as a child learned memory-knowledges, he first of all knew no otherwise than that those knowledges were solely for the sake of the intellectual man, that is, in order that he might get to know truths from them; but it was afterwards disclosed that they had existed in order that he might attain to celestial things; and this took place to prevent celestial things from suffering violence, and in order that they might be saved.

 

※ 우리 역시 처음엔 세상 학문과 지식이 풍성하면 바로 무슨 경지에 이른 듯하여 천국의 비밀과 신에 대하여 다 알게 될 것 같지만, 그러나 시간이 흘러 철이 들고 정신을 차리게 되면 그게 아니고, 세상 학문과 지식은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향하게 하려고, 그래서 한 단계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내게 주어진 것이라는, 실상을 깨닫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바로 천국에 대한 지식에 뛰어들게 되면 결과적으로는 불행해지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보호하여 우리로부터 아케이나를 분리, 보호하시는 것은, 마치 유대인으로부터 아케이나를 철저히 봉하신 이유가 그들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케이나를 접하게 되면 반드시 신성모독으로 멸망할 것을 아셨기 때문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교육을 받는 동안 어떤 진보, 나아감이 있는데요, 먼저 기억-지식에서 이성적 진리(rational truth)로, 이성적 진리에서 지성적 진리(intellectual truth)로, 지성석 진리에서 이윽고 천저 진리(天的, celestial truth)의 순이며, 이 천적 진리가 여기서 말하는 ‘아내’인 것입니다. When man is being instructed, there is a progression from memory-knowledges to rational truths; further, to intellectual truths; and finally, to celestial truths, which are here signified by the “wife.

 

※ 포츠 역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을 쿠퍼 역에서는 ‘사실’(fact)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 ‘이성적’으로 번역한 ‘rational’은 역자마다 번역이 다양한, 즉 번역이 쉽지 않은 표현입니다. 사전에는 ‘합리적인’, ‘이성적인’으로 나와 있습니다. 저는 ‘이성적인’(理性)으로 번역하겠습니다.

 

이 진행에서 만일 지성적 진리가 중간 매체 역할을 하지 않고 기억-지식과 이성적 진리에서 바로 천적 진리로 가게 되면, 천적 진리는 욕을 당하게 되는데요, 중간 연결 매체인 지성적 진리가 없으면 천적 진리와, 기억-지식을 써서 얻어지는 이성적 진리 간 연결고리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If the progression is made from memory-knowledges and rational truths to celestial truths without intellectual truths as media, the celestial suffers violence, because there can be no connection of rational truths—which are obtained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with celestial truths, except by means of intellectual truths, which are the media.

 

※ 그래서 제가 지인들께 무슨 사전 준비나 친절한 설명 없이 바로 아케이나를 말씀드리면 다들 어리둥절 못 알아들으시고, 경계하시거나 반감을 품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아케이나 입장에서는 욕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복음서 주님의 여러 비유들처럼 사람들 눈높이에 맞춰 사례를 들어가며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해야 합니다. 공용복 선생이 이런 걸 참 잘하셨습니다.

 

천적 진리가 무엇인지, 지성적 진리가 무엇인지는 곧 아시게 됩니다. What celestial truths are, and what intellectual truths are, will be seen presently.

 

[2]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아실 수 있도록, 질서(order)라는 것에 관해 뭔가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That it may be known how these things stand, something shall be said respecting order.

 

질서란, 천적인 것이 영적인 것 안으로 흘러들어 그것을 그 자체에 맞추는 것이며, 그렇게 이번에는 영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 안으로, 이성적인 것은 기억-지식 안으로 흘러들어 각각 그 자체에 맞추는 것입니다. The order is for the celestial to inflow into the spiritual and adapt it to itself; for the spiritual thus to inflow into the rational and adapt it to itself; and for the rational thus to inflow into the memory-knowledge and adapt it to itself.

 

※ ‘그것을 그 자체에 맞추다’, 즉, ‘영적인 것으로 하여금 그 본래의 목적에 맞추게 하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것 안으로 천적인 것이 흘러들어갈 때 일어나는 변화를 말하는 것으로, 영적인 것 본래의 목적, 곧, 영적인 것의 순기능인 주님께 나아가는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을 감당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식으로, 차례대로 영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 안으로, 이성적인 것이 기억-지식 안으로 흘러들어 갈 때 저마다 그 본래의 역할과 기능을 회복하게 되어 올바른 쓰임새들이 되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질서’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주 어린 시절 막 배움을 시작했을 때는, 그때도 질서는 동일하지만, 그러나 보이기는 정반대인 것처럼, 즉, 먼저 기억-지식에서 이성적인 걸로, 이성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그렇게 해서 최종 천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But when a man is being instructed in his earliest childhood, the order is indeed the same, but it appears otherwise, namely, that he advances from memory-knowledges to rational things, from these to spiritual things, and so at last to celestial things.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 가장 내적인 천적인 것을 향한 어떤 길이 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it so appears is that a way must thus be opened to celestial things, which are the inmost.

 

모든 가르침은 단순히 어떤 길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열릴 때, 같은 말이지만, 그릇들이 열릴 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질서대로 그 안으로 흘러들어 가는 것이 있는데, 천적, 영적인 것에서 오는 이성적인 것이, 그리고 이 이성적인 것에는 천적, 영적인 것이, 그리고 이 천적, 영적인 것에는 천적인 것이 차례대로 흘러들어 옵니다. All instruction is simply an opening of the way; and as the way is opened, or what is the same, as the vessels are opened, there thus flow in, as before said, in their order, rational things that are from celestial spiritual things; into these flow the celestial spiritual things; and into these, celestial things.

 

이들 천적, 영적인 것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주고 있으며, 또 앞으로 열릴 그릇들을 위해 자신을 준비하고 형성합니다. 이런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요, 그들 안에서 보면 기억-지식과 이성적인 것은 죽은 상태라는 사실과, 그러면서도 그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들 안으로 흘러들어 온 내적 생명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Thes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re continually presenting themselves, and are also preparing and forming for themselves the vessels which are being opened; which may also be seen from the fact that in themselves the memory-knowledge and rational are dead, and that it is from the inflowing interior life that they seem to be alive.

 

※ 우리가 더 이상 세상 지식과 인간 이성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대신 자유롭게 영적, 천적 사고를 할 수 있다면, 그 상태가 바로 세상 지식과 인간 이성이 힘을 다한,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죽은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 실제로 우리의 사후(死後), 우리가 세상에서 습득한 모든 지식과 경험은 휴면상태에 들어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며, 위와 같은 일이 사후에는 이렇게 구현됩니다. 세상 지식과 경험, 겉 사람의 이성은 그 역할과 기능을 다 하였으므로 이제는 쓸데가 없어져 따로 보관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고와 판단력에 있어 누구에게나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This can become manifest to anyone from the thought, and the faculty of judgment.

 

※ 위 문장은 아래 단락 [3]에 포함되어야 할 듯...

 

[3] 이런 것들 안에 모든 예술과 과학의 심오한 아케이나가 감추어져 있으며,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그 만분의 일도 탐구 불가능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꼭 성인들만의 일도 아닙니다. 어린아이들한테도 해당되며, 그 모든 사고와 거기서 나오는 모든 언어표현도 그들로 가득가득합니다. (이것은 사람은, 심지어 가장 위대한 학자라 할지라도 못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안의 천적, 영적인 것들이 이 모든 것을 향해 나오며, 흘러들고, 만들지 않는 한, 도저히 해당되지 않을 것입니다. In these lie hidden all the arcana of analytical art and science, which are so many that they can never explored even as to the tenthousandth part; and this not with the adult man only, but also with children, whose every thought and derivative expression of speech is most full of them (although man, even the most learned, is not aware of this), and this could not possibly be the case unless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within were coming forth, flowing in, and producing all these things.

 

※ 즉 이 세상 모든 일에 하늘로부터 천적, 영적 흐름이 있어 겉으로 보이는 이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 지성은 물론, 만물의 생장 등 모든 일상 활동의 배경에는 이런 천적, 영적 배경이 있다는 말입니다.

2021-10-22(D6)-매일예배(2217, AC.1494-1495, 창12,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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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ASC6cud4X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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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90. 18절,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Verse 18. And Pharaoh called Abram, and said, What is this that thou hast done unto me? Why didst thou not tell me that she is thy wife?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주께서 생각에 잠기셨음을,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그것이 그를 슬프게 하였음을,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천적인 것과 결합하려는 진리 말고 다른 그 어떤 진리도 가질 필요가 없었음을 그가 알고 있었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And Pharaoh called Abram” signifies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and said, What is this that thou hast done unto me?” signifies that it grieved him; “Why didst thou not tell me that she is thy wife?” signifies seeing that he knew that he ought not to have any other truth than that which would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1491.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And Pharaoh called Abram.

 

이 표현이 주님이 생각에 잠기셨음을 의미함이라는 것은 ‘바로’(Pharaoh)의 의미가 기억-지식이라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haraoh” as being memory-knowledge.

 

기억-지식 자체, 즉, 기억-지식의 일들을 일컬어, 이 지식은 주님이 어린 시절에 습득하신 것인데, 여기서 ‘바로’라 하고 있습니다. 주님에게 말을 거는 건 기억-지식입니다. 즉, 그 지식을 통해서 그렇게 말을 거시는 분은 여호와이시지요. The memory-knowledge itself, that is, the matters of memory-knowledge, which the Lord acquired when a child, are here called “Pharaoh”; thus it is that knowledge itself which thus addresses the Lord, that is, it is Jehovah who does so by means of that knowledge.

 

※ 지식이 말을 건다는 건, 그 지식이 생각났다, 기억이 났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바로라는 지식이 기억이 나 생각에 잠기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표현의 의미는 주님이 생각에 잠기셨다라는 것입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ese things signify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정신적 관찰, 곧 생각에 잠기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식, 즉, 바로라고 하는 지식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Mental observation comes by means of memory-knowledge, thus by means of Pharaoh, by whom, as before said, this knowledge is signified.

 

 

1492.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And said, What is this that thou hast done unto me?

 

이 표현을 보고, ‘아, 주님이 그걸 생각하고 무척 슬퍼하셨구나...’ 알 수 있는 것은 이 표현 전반에 실린 분(忿)이 느껴지는 분위기를 볼 때 분명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큰 슬픔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it grieved him is also evident from the very indignation in which this is said: the grief itself is thus expressed.

 

속뜻이라는 게 이런 겁니다. 어펙션(affection) 자체는 말 속에 숨어 겉으로는 안 보이지만 사실은 말을 구성하는 것이지요. 겉 글자로 되어 있는 단어들은 속뜻을 아는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마치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The internal sense is such that the affection itself that lies hidden in the words is what constitutes it; the words of the letter are not attended to, but are as if they had no existence.

 

이 말 속 어펙션은 말하자면, 기억-지식의 분(忿)이요, 주님의 큰 슬픔입니다. 이 슬픔은, 주님이 어린 시절 즐거움과 큰 기쁨으로 배우셨던 그 기억-지식들과 이젠 이별해야 한다,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그런 슬픔입니다. The affection in these words is the indignation as it were of the memory-knowledge, and the Lord’s grief; and in fact grief from this, that the memory-knowledges which he had learned with pleasure and delight should be thus destroyed.

 

이 경우는 다음과 같은 건데요, 아이들이 뭘 좋아하길래 그 부모들이 보니 너무 위험해 보여 아이들에게서 그걸 빼앗을 때, 그때 아이들이 느끼는 큰 슬픔 같은 그런 것입니다. The case herein is like that of little children who when they love something their parents see to be hurtful to them, and it is taken away from them, are thereby grieved.

 

※ 어린 시절에 배운 세상 지식 하나 단절한다는 게, 헤어진다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슬퍼하시나 싶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면, 많이 사랑하지 않았으면 헤어질 때도 별로 서운하지 않은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무덤덤함은 사실은 우리의 냉정함을, 우리가 처음 무엇을 배울 때, 우리는, 주님과 달리 우리는 무슨 그리 큰 고마움도, 기쁨도, 반가움도 없이 그저 태어났으니까 산다,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으니 등교한다, 수업시간이 되었으니 교실에 앉아 있다... 등과 같은 수동적 삶을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린 시절에도 확실히 다르셨습니다. 여느 어린이들은 우리와 같이 저랬다면 주님은 비록 세상 지식, 바로와 애굽을 배우실지라도 그 지식으로 지성을 접하고, 그 지성으로 영적, 천적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아셨기에 정말 소중히 여기시고 정성을 다해 배우셨음을, 세상 학문과 지식에 대하여도 주님은 정말 기뻐하고 사랑하셨음을 오늘 본문에서 보면서, 나는 어땠나, 나는 그동안 무슨 공부를 할 때 어떤 태도로 임했나를 돌이키게 됩니다.

 

비록 세상 학문이라 하더라도 그걸 통해 영적, 천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성을 얻을 수만 있다면, 선용(善用)을 통한 주님의 질서와 순서 가운데 머무를 수만 있다면, 그래서 세상 학문과 지식이 그 쓰임새를 다하고 마침내 헤어질 때가 오더라도 냉냉함과 무덤덤함 대신 오늘 본문 주님처럼 저렇게 큰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슬퍼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에 잠겨 봅니다.

 

무엇 또는 누구와 헤어질 때, 평소 많이 사랑하였으면 크게 슬퍼할 것이요, 적게 사랑하였으면 덤덤할 것입니다. 사람은 헤어질 때 모습을 보고 그는 평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493. 그를 네 아내라고 That she was thy wife.

 

이것이 상징하는 건, 그는 천적인 것과 결합했어야 할 진리 아닌 다른 진리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것은 ‘아내’의 의미가 천적인 것과 결합해야 하는 진리임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위 12절 참조) That this signifies that he ought to have no other truth than that which was to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wife” as being the truth that was to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concerning which above, at verse 12).

 

여기서는 주님이 지성을 향해, 그리고 그렇게 해서 지혜를 향해 나아가신 순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성에 대하여 지혜 자체가 되신 것처럼 인성에 대하여도 지혜 자체가 되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There is here described the order in which the Lord advanced to intelligence, and thus to wisdom; so that, as he was wisdom itself as to his Divine essence, so he should become wisdom itself as to his human essence.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8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속뜻)

주님은 이제 세상 학문과 헤어지실 때가 되어 깊이 생각에 잠기셨고 많이 슬퍼하셨다. 주님의 천적 진리를 향한 여정에 더 이상 세상 지식은 함께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이제 우리는 어른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성장, 성숙한 어른이면, 우리는 천국과 주님을 향하는데 별 도움 안되는 것들하고는 마땅히 결별해야 합니다. 주님과 결합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하면서 스마트폰과 인터넷, 유튜브와 세상 뉴스는 또 붙들고 놓지 않는 사람... 본인도 참 괴롭겠지만 타인 보기에도 참 민망한 사람입니다.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2021-10-20(D4)-매일예배(2216, AC.1490-1493, 창12,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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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we7MTCObb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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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90. 18절,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Verse 18. And Pharaoh called Abram, and said, What is this that thou hast done unto me? Why didst thou not tell me that she is thy wife?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주께서 생각에 잠기셨다는 뜻입니다.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그것이 주님을 슬프게 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천적인 것과 결합하려는 진리 말고 다른 그 어떤 진리도 가질 필요가 없음을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And Pharaoh called Abram” signifies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and said, What is this that thou hast done unto me?” signifies that it grieved him; “Why didst thou not tell me that she is thy wife?” signifies seeing that he knew that he ought not to have any other truth than that which would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1491.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And Pharaoh called Abram.

 

이 표현이 주님이 생각에 잠기셨음을 의미함이라는 것은 ‘바로’(Pharaoh)의 의미가 기억-지식이라는 걸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haraoh” as being memory-knowledge.

 

기억-지식 자체, 즉, 기억-지식의 일들을 일컬어, 주님 어린 시절 습득하신 것인데, 여기서 ‘바로’라 하고 있습니다. 주님에게 말을 거는 것은 기억-지식 자체입니다. 즉, 그 지식을 통해서 그렇게 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지요. The memory-knowledge itself, that is, the matters of memory-knowledge, which the Lord acquired when a child, are here called “Pharaoh”; thus it is that knowledge itself which thus addresses the Lord, that is, it is Jehovah who does so by means of that knowledge.

 

※ 지식이 말을 건다는 건, 그 지식이 생각났다, 기억이 났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바로라는 지식이 기억나 생각에 잠기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표현의 의미는 주님이 생각에 잠기셨다라는 것이지요. Hence it is evident that these things signify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정신적 관찰, 곧 생각에 잠기는 것은 지식, 즉, 바로라고 하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지식을 의미하는 바로를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Mental observation comes by means of memory-knowledge, thus by means of Pharaoh, by whom, as before said, this knowledge is signified.

 

2021-10-19(D3)-매일예배(2215, AC.1490-1491, 창12,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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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YeCX88Jd_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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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86. 1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Verse 17. And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and his house, because of the word of Sarai, Abram’s wife.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기억-지식들이 파괴되었음을, ‘그 집에’, 그가 모았던,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천적인 것에 인접해 있어야 했던 진리 때문에를 각각 의미합니다.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signifies that the memory-knowledges were destroyed; “and his house” signifies which he had collected; “because of the word of Sarai, Abram’s wife” signifies because of the truth that was to be adjoined to the celestial.

 

※ 주님의 허락으로 영안이 열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영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우리처럼 그 사람의 몸을 보고 있지만 말입니다. 또한 이처럼 우리 안의 천사들은 말씀을 속뜻으로 읽습니다. 비록 우리 눈을 통해 겉 글자로, 사람의 언어로 읽지만 말입니다.

 

※ 말씀의 아케이나에 접근 혹은 도달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최대한 쉽게 풀어쓰려고 쓴 것이겠지만...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이 아파트만한 돌더미, 흙더미를 죽을힘을 다해 뒤져 겨우 엄지손톱만 한 금광석을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발견이라도 하면, 아니 반드시 발견하게 하시는데, 그때 그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 이제부터라도 라틴어를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 중입니다. 포츠(Potts, 1888-1902)는 왜 클라우즈(Clowes, 1774-1806)의 초역을 재역했을까요? 그리고 NCE(2010)를 낸 쿠퍼(Cooper)는 왜 바로 라틴 원전(1749-1756)으로 갔을까요? 책 ‘천국과 지옥’을 번역한 김은경은 수많은 영역본이 있었음에도 왜 바로 라틴 원전으로 한(韓)역했을까요? 번역은 가급적 원전을 가지고 직접 해야지 역본을 가지고 하면 아주 엉뚱한 게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 전달 게임’처럼 말이지요. 한글 성경도 개역의 경우, 영역, 한(漢)역을 가지고 한 결과, 많은 오역이 있어 이번 개역개정의 경우는 직접 히브리어, 헬라어 원전으로 번역한 것처럼 말입니다.

 

※ 위 괄호 안 연도들은 스베덴보리의 저술들, 특히 아케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주석) 저술 및 번역에 소요된 기간을 뜻합니다.

 

 

1487.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And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이것이 기억-지식들이 파괴되었음을 의미함이라는 것은 ‘바로’의 의미가 일반적으로는 기억-지식이며, 결과적으로는 그런 지식에 속한 기억-지식이라는 것을 보면, 그리고 ‘큰 재앙을 내리심’의 의미가 파괴됨이라는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memory-knowledges were destroy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haraoh” as being memory-knowledge in general, consequently the memory-knowledges that belong to such knowledge;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being “smitten with plagues” as being to be destroyed.

 

기억-지식들과 관련하여 이 경우는 이렇습니다. As regards memory-knowledges the case is this.

 

어린 시절, 이 기억-지식들은 그저 단순히 알려는 목적 외에 무슨 다른 거 없이 습득되지만, 주님의 경우는 진리에 대한 기쁨과 애정으로 습득되었습니다. In childhood they are acquired for no other end than that of knowing; with the Lord, they were acquired from the delights and affection of truth.

 

어린 시절 습득한 기억-지식들은 그 수가 엄청나지만, 나중에 주님에 의해 쓰임 받기 위해 질서정연하게 배치됩니다. 먼저는, 생각하는 능력이 생기게 하시려고, 두 번째는, 생각의 재료가 될 수 있게 하시려고, 끝으로, 이게 그 원하시는 건데요, 다시 말해서, 삶 자체가 쓰임새로 구성되며, 쓰임새의 삶이 되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The memory-knowledges acquired in childhood are very numerous, but are disposed by the Lord into order so as to serve for use; first, to give the ability to think; then that they may be of use by means of thought; and lastly that this may take effect, that is to say that the very life may consist in use, and be a life of uses.

 

※ 쓰임새의 삶을 위해 지식을 습득하는 좋은 예는, 예를 들면,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돌보기 위해 법을 공부하여 판검사가 되고자 하는 경우, 또는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고자 하는 경우 등이 있겠습니다.

 

이것이 어린 시절 습득한 기억-지식들에 의해 수행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게 없으면, 겉 사람은 결코 속 사람과 상호결합할 수 없으며, 동시에 쓰임 받을 수도 없습니다. These are the things performed by the memory-knowledges that are acquired in childhood; and without them the external man can never be conjoined with the internal, and at the same time become use.

 

사람이 쓰임새의 사람이 될 때, 즉 그가 모든 걸 그 쓰임새에 따라 생각하고, 그 쓰임새대로 행할 때, (만일 대세를 따르지 않고, 대신 그런 쓰임새의 실천을 통해 습득된 성품에서 나오는 조용함 가운데 있다면, 그 처음 용도, 곧 사람으로 하여금 합리와 이성의 사람이 되게 하려던) 기억-지식들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어 파괴됩니다. When man becomes use, that is, when he thinks all things from the end of use, and does all things for the end of use—if not by manifest reflection, still by tacit reflection from a nature acquired by so doing—then the memory-knowledges which have served the first use—that the man may become rational—being no longer of service, are destroyed; and so on.

 

※ ‘대세를 따른다’는 것은 누구나 다 지식의 습득과 추구를 자기 사랑을 위해 한다는 것이며, ‘합리와 이성의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은 그 지식이 머리에만 저장되어 있는 사람이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 ‘기억-지식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쓰임새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회유와 저급한 시도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 주님으로 말미암은 공동선 앞에서는 세속과 세상의 얄팍한 잔머리는 설 데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여기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들입니다. These are the things here meant by the words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2021-10-15(D6)-매일예배(2212, AC.1486-1487, 창12,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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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J36PdxDo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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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84a. 16절,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Verse 16. And he did well unto Abram for her sake; and he had flock and herd, and he-asses and menservants, and maidservants and she-asses, and camels.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주님의 어린 시절, 기억-지식이 증가하였음을,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일반적으로 기억-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각각 의미합니다. He did well unto Abram for her sake” signifies that memory-knowledges were multiplied with the Lord; “and he had flock and herd, and he-asses and menservants, and maidservants and she-asses, and camels” signifies all the things in general that belong to memory-knowledges.

 

 

1485.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And he did well unto Abram for her sake.

 

이 말씀이 주님의 어린 시절, 기억-지식이 증가하였음이라는 것은, ‘후대하다’의 의미가 풍성해짐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memory-knowledges were multiplied with the Lor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doing well unto” as being to enrich.

 

이것은 어린 시절 주님의 모습인 아브람을 후대한 ‘바로’, 곧 기억-지식에 관해, 그리고 이것은 또 사래, 즉 주님이 원하셨던 지적 진리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This is said of the memory-knowledge that is signified by “Pharaoh,” that it did well unto Abram, that is to the Lord when a child; and this for her sake, that is, for the sake of the intellectual truth that he desired.

 

이런 풍성함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진리에 대한 욕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It was this desire for truth from which the enriching came.

 

 

1486.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And he had flock and herd, and he-asses and menservants, and maidservants and she-asses, and camels.

 

이 표현이 일반적으로 기억-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의미함은, 이것들이 말씀에 나올 때의 의미들을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That these words signify all things in general that belong to memory knowledge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ll these things in the Word.

 

하지만 이 모든 걸 하나하나 자세히, 즉, ‘양과 소’, ‘수나귀와 남종’, ‘여종과 암나귀’ 및 ‘낙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드리는 건 너무 지루할 것 같습니다. But it would be too tedious to show what is signified by each in particular, as what by the “flock and herd,” the “he-asses and menservants,” the “maidservants and she-asses,” and the “camels.

 

각각은 그 나름의 고유한 의미들이 있습니다. Each has its own peculiar signification.

 

일반적으로 이들은 지식에 관한 기억-지식 및 기억-지식에 속한 모든 걸 의미합니다. In general they signify all things that belong to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and to memory-knowledges.

 

그 각각을 좀 보면, 기억-지식은 ‘수나귀와 남종’으로, 그 즐거움은 ‘여종과 암나귀’로, ‘낙타’는 일반적으로 섬기는 일을, ‘양과 소’는 소유물을 각각 의미하는 등, 말씀 전반에 걸쳐 그렇습니다. Regarded in themselves, memory-knowledges are “he-asses and menservants”; their pleasures are “maid-servants and she-asses”; “camels” are general things of service; “flock and herd” are possessions; and so in the Word throughout.

 

겉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건 그게 무엇이든 오직 섬김에 관한, 즉, 속 사람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All things whatever that are in the external man, are nothing but things of service, that is, they are for the service of the internal man.

 

그래서 그것은 모두 기억-지식에 관한 것이며, 기억-지식은 오직 겉 사람에게 속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 기억-지식은 몸의 오감을 통해 땅과 세상에서 애써 모은 것들이기 때문이며, 그렇게 모은 이유는, 이 기억-지식이 속 사람이나 합리적인 사람을 섬길 수 있도록, 그리고 다시 영적인 사람을, 그리고 다시 천적인 사람, 최종적으로는 주님을 섬기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So it is with all memory-knowledges, which belong solely to the external man; for they are procured from earthly and worldly things by means of sensuous impressions, in order that they may serve the interior or rational man, and this the spiritual man, this the celestial, and this the Lord.

 

그렇게 이 지식은 그 질서대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더 외적인 것일수록 더 내적인 것에 종속된 것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일반적으로나 구체적으로나 모든 것은, 그게 무엇이든 그 질서에 종속되어 결국 주님을 향합니다. Thus are they subordinated one to another, as are the more external things to the more internal, in their order; and thus all things whatever,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in their order, subordinated to the Lord.

 

그래서 기억-지식은 가장 낮고, 가장 바깥에 있는 것이며, 그 순서에 따라 거기는 그거보다는 더 내적인 것의 종점입니다. 기억-지식의 위치가 가장 낮고, 가장 바깥이기 때문에, 기억-지식은 봉사와 섬김에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지 싶습니다. Memory-knowledges are therefore the lowest and outermost things, in which are terminated in their order the things that are more interior; and because they are the lowest and outermost things, they must be pre-eminently things of service.

 

누구나 다 이 기억-지식의 쓰임새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거나 자문을 해보면 이 기억-지식이 왜 섬기는 일에 사용되는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지식의 쓰임새를 깨닫게 되면, 그 쓰임새의 퀄러티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Everyone may know for what such knowledges may be serviceable, if he reflects or inquires in himself for what use they are; and when he is thus reflecting upon their use, he can also apprehend the quality of the use.

 

모든 기억-지식은 나름 어떤 쓰임새를 위해 존재해야 하며, 바로 이것이 그것의 존재 이유입니다. Every memory-knowledge must be for the sake of some use, and this is its service.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6절과 그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속뜻)

어린 시절 주님은 천적 진리를 얻기 위해 먼저 자연적, 지적 진리를 구하셨고, 그래서 관련된 모든 것, 곧 기억-지식과 그 즐거움, 그리고 그 지식의 쓰임새 등으로 풍성해지셨다.

 

2021-10-14(D5)-매일예배(2211, AC.1484a-1486, 창12,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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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vo_3UekE6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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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81. 15절,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Verse 15. And the princes of Pharaoh saw her, and praised her to Pharaoh; and the woman was taken to Pharaoh’s house.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의 고관들’로 표현된 중심계율들을,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들이 즐거워하였음을,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그들이 마음의 보다 낮은 부분에 매혹되었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The princes of Pharaoh saw her” signifies the primary precepts, which are “the princes of Pharaoh”; “and they praised her to Pharaoh” signifies that they were pleasing; “and the woman was taken to Pharaoh’s house” signifies that they captivated the lower mind [animus].

 

 

1482.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The princes of Pharaoh saw her.

 

이 말씀이 ‘바로의 고관들’로 표현된 중심계율들을 의미함은 ‘고관들’과 ‘바로’의 의미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primary precepts, which are “the princes of Pharao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rinces,” and of “Pharaoh.

 

말씀의 두 가지 측면, 곧 역사서술 및 예언적인 면에서, ‘고관들’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의미하고, ‘바로’는 ‘애굽’과 그 의미하는 바가 같은데, 여기서는 ‘애굽’ 혹은 ‘바로’가 가장 좋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어린 시절, 처음 습득한 지식 중 기억-지식에 대한 서술이기 때문입니다. In both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princes” signify the things which are primary; and “Pharaoh” signifies the same as “Egypt”; and here “Egypt,” or “Pharaoh,” is used in the best sense, because predicated of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which the Lord first acquired in childhood.

 

이들이 말씀에서는 중심계율들의 의미인 것은, 이런 것들이 그 속뜻 상으로 가지는 상징 때문입니다. That they were primary precepts from the Wor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se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일반적으로, 말씀에서 ‘바로’나 ‘애굽’이나 같은 걸 상징한다는 건 많은 구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요, 마치 다른 나라 군주들이 그 나라의 이름으로 불리듯 군주들 또한 그 나라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고관들’은 이사야에서처럼 제일 중요한 걸 상징합니다. That, speaking generally, by “Pharaoh” in the Word is signified the same as by “Egypt” may be confirmed from many passages; as also that by the kings of other kingdoms, who are named, the same is signified as by the names of the kingdoms; but by “princes” are signified their primary things, as in Isaiah:

 

11소안의 방백은 어리석었고 바로의 가장 지혜로운 모사의 책략은 우둔하여졌으니 너희가 어떻게 바로에게 이르기를 나는 지혜로운 자들의 자손이라 나는 옛 왕들의 후예라 할 수 있으랴 13소안의 방백들은 어리석었고 놉의 방백들은 미혹되었도다 그들은 애굽 종족들의 모퉁잇돌이거늘 애굽을 그릇 가게 하였도다 (사19:11, 13) The princes of Zoan are foolish, the wise counselors of Pharaoh; how say ye unto Pharaoh, I am the son of the wise, the son of ancient kings? The princes of Zoan are become fools, the princes of Noph are deceived. (Isa. 19:11, 13)

 

여기 ‘소안의 방백’과 ‘바로의 가장 지혜로운 모사’는 가장 중요한 기억-지식을 가리키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애굽에서는 지혜가 가장 번창하였으므로, 지혜를 가리켜 ‘지혜로운 자들의 자손’, ‘옛 왕들의 후예’라 부르고 있습니다. Here “the princes of Zoan,” and “the wise counselors of Pharaoh,” denote the primary memory-knowledges; and as wisdom first flourished in Egypt, as before said, it is called “the son of the wise,” and “the son of ancient kings.

 

이렇게 말씀에 자주 나오는 ‘고관(高官)’(프린세스, 백관 (百官), 방백(方伯), 대신(大臣) 등)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So “princes” frequently denote in the Word primary things.

 

 

1483.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And they praised her to Pharaoh.

 

이 말씀은 그들이 기뻐하였다는 건데요, 굳이 무슨 설명이 필요 없지 싶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were pleasing may be seen without explication.

 

 

1484.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And the woman was taken to Pharaoh’s house.

 

이 말씀이 그들은 마음의 더 낮은 부분에 매혹되었다라는 의미임은 ‘여인’의 의미와, ‘’(house)의 의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captivated the lower min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oman,”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house.

 

여인’은 진리, 여기서는 기억-지식들 안에 있었던, 어린 시절 주님이 사로잡히실 정도로 즐거워했던 진리를 의미합니다. A “woman” signifies truth, here the truth that was in the memory-knowledges with the delights of which the Lord was captivated in childhood.

 

진리에 관한 즐거움은 ‘누이’로 상징된 지적 진리(the intellectual truth)로부터 오는 것들입니다. The delights of truth are those which come from the intellectual truth which is signified by a “sister.

 

’은 앞서 710번 글에서 보여드린 대로, 사람, 특히 사람의 의지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마음의 더 낮은 부분, 곧, 앎과 배움에 관한 애정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A “house” signifies the things that are in man, especially those which are of his will, as before shown (n. 710); here therefore those which are of the lower mind, or of the affection of knowing and learning.

 

 

710. 창7:1,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Enter thou and all thy house into the ark.

 

이 말씀이 의지에 속한 것들을 상징하고 있음이 그래서 분명한 것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things that are of the will is therefore evident.

 

이해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는 전장에서는 다르게 표현되고 있는데요, 즉, 18절 말씀입니다.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창6:18) In the preceding chapter, where th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re meant, it is expressed differently, namely: “Thou shalt come into the ark, thou and thy sons, and thy wife, and thy sons’ wives with thee.” (verse 18)

 

’이 의지와 의지에 속한 것을 상징함은 말씀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예레미야입니다. That a “house” signifies the will and what is of the will is evident in various places in the Word; as in Jeremiah:

 

그들의 집과 밭과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라 (렘6:12) Their houses shall be turned over unto others, their fields and their wives together. (Jer. 6:12)

 

여기 ‘’과 ‘’, 그리고 ‘아내’는 의지에 속한 것들에 관련됩니다. Here “houses” and also “fields” and “wives” relate to things which are of the will.

 

다시 Again: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밭을 일구고 그 열매를 먹으라 (렘29:5, 28) Build ye houses and dwell in them; and plant gardens and eat the fruit of them. (Jer. 29:5, 28)

 

여기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기’는 의지에 관련되고, ‘밭을 일구기’는 이해와 관련됩니다. 다른 구절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Here “building houses and dwelling in them” relates to the will; “planting gardens” to the understanding: and it is the same in other passages.

 

그리고 ‘여호와의 집’은 아주 자주 사랑이 중심원리인 교회를 상징하는 곳으로 언급되는데, 특별히 ‘유다의 집’은 천적 교회를, ‘이스라엘의 집’은 영적 교회를 상징합니다. And the “house of Jehovah” is frequently mentioned as signifying the church wherein love is the principal; the “house of Judah” as signifying the celestial church; and the “house of Israel” as signifying the spiritual church.

 

’이 교회를 상징하기 때문에, 교회에 속한 사람의 마음 또한 ‘’으로 상징됩니다. (의지와 이해에 속한, 혹은 체어리티와 신앙에 속한 것들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As “house” signifies the church, the mind of the man of the church (wherein are the things of the will and of the understanding, or of charity and faith) is also signified by “house.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5절과 그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세속의 중심계율들도 주님의 진리를 보고 즐거워하며 거기에 매료되어 매혹되었다

 

2021-10-12(D3)-매일예배(2210, AC.1481-1484, 창12,15),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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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nTdjDDJJc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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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2

 

1474. 13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Verse 13. Say, I pray, thou art my sister, that it may be well with me for thy sake, and that my soul may live because of thee.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지적(知的, intellectual) 진리, 이해하기 쉬운(intuitive) 진리를 말하며, 그게 ‘누이’(sister)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그럴 경우, 천적인 것(天的, the celestial)이 해를 입지 않을 것임을,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그럴 경우, 천적인 것이 보존될 것임을 각각 의미합니다. Say, I pray, thou art my sister” signifies intellectual truth which is a “sister”; “that it may be well with me for thy sake” signifies that so the celestial could have no violence done to it; “and that my soul may live because of thee” signifies that so the celestial could be saved.

 

 

1475.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Say, I pray, thou art my sister.

 

이 표현이 지적 진리, 이해하기 쉬운 진리를 상징하며, ‘누이’가 바로 그런 뜻이라는 것은, ‘누이’의 상징, 곧, 천적 진리가 ‘아내’(wife)일 때, ‘누이’는 지적 진리라는, 이후 이 상징에 대한 계속될 내용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intellectual truth, which is a “sister,”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sister” as being intellectual truth when celestial truth is a “wife,” concerning which hereafter.

 

상황은 이렇습니다. 즉, 기억-지식, 곧, 세속적 지식의 본성은 천적인 것들 속으로 직접 들어가 그저 조사하는 게 전부라는 것, 그러나 이것은 질서에 반(反)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건 천적인 것들에 대한 일종의 폭력, 해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These things stand thus: it is the nature of memory-knowledge to desire nothing more than to introduce itself into celestial things and explore them; but this is contrary to order, for it thus does violence to celestial things.

 

천적인 것, 곧, 천국과 주님에게 속한 것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왕이나 대통령 앞에서는 극진한 예를 갖추듯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곧, 주님 자신이므로 최상의 예를 갖춰야 합니다. 영적 질서, 순서를 우습게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을, 천적인 것을 함부로 여기는 것이며,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질서란 이런 것입니다. 천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통해 이성적인 것(理性, the rational) [인 스피엔티피쿰 in scientificum]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기억-지식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해서 하늘에 속한 것이 세속적인 것 속에 깃드는 것이며, 이런 순서, 이런 질서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Order itself is that the celestial by means of the spiritual introduces itself into the rational, and thus into the memory-knowledge [in scientificum], and adapts this to itself; and unless this order is observed, there cannot possibly be any wisdom.

 

또 지금 보고 있는 이 본문에는 주께서 어떻게 모든 질서에 따라, 곧, 철저히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아버지께 가르침을 받으셨는가, 그 다음, 어떻게 주님의 겉 사람은 속 사람과 결합하셨나, 즉, 어떻게 신성(Divine), 곧 속 사람이 되셨나,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신성, 인성 양쪽 다 그 퀄러티에 있어 여호와가 되셨나 하는 아케이나가 들어 있습니다. 이런 일이 지식을 통해 일어났으며, 이렇게 지식이라는 것은 일종의 도구인 것입니다. In the passage before us are also contained the arcana as to how the Lord was instructed by his Father according to all order; and thus how his external man was conjoined with his internal, that is, how his external man was made Divine, like the internal; thus how he became Jehovah as to each essence; which was done by means of knowledges, which are the means.

 

도구로서의 지식이 없으면, 겉 사람은 심지어 사람도 될 수 없습니다. Without knowledges as means, the external man cannot even become man.

 

지식은 가장 바깥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이 그릇이 있어야 무슨 출발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476.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That it may be well with me for thy sake.

 

이 표현이, 그러면 천적인 것이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건, 위에서 말씀드린 걸로 분명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질서, 순서라는 건, 먼저 천적인 것이 영적인 것 안으로, 영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 안으로, 그리고 끝으로, 이성적인 것은 기억-지식, 곧 실제 지식, 일상 지식의 내용 안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so the celestial could have no violence done to it,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above; for as has been repeatedly said, the order is that the celestial flows into the spiritual, the spiritual into the rational, and this into the faculty of memory-knowledge.

 

이런 순서, 질서라야 영적인 것은 천적인 것에, 이성적인 것은 영적인 것에, 그리고 기억-지식은 이성적인 것에 각각 그 목적에 따라 수용됩니다. When there is this order, then the spiritual is adapted by the celestial, the rational by the spiritual, and the memory-knowledge by the rational.

 

그래서 보통 기억-지식, 즉, 사실에 기반을 둔 지식은 가장 바깥 용기가 됩니다. 같은 말이지만, 기억-지식은 개별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이성적인 것, 곧, 생각(ideas)을 담는 가장 바깥 용기가 되며, 그렇게 순서대로 이성적인 생각은 영적인 생각을, 영적인 생각은 천적인 생각을 담는 용기, 그릇이 됩니다. The memory-knowledge in general then becomes the ultimate vessel; or what is the same, memory-knowledges, specifically and particularly, become the ultimate vessels which correspond to rational things, rational things to spiritual things, and spiritual things to celestial things.

 

이런 순서일 때는, 천적인 것이 해를 입을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천적인 것은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When this is the order, the celestial cannot suffer any violence; otherwise, it does so suffer.

 

어린 시절, 주님의 훈육, 교육이 여기 본 절에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속뜻으로 본 절은 주님의 성장 과정이 어땠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As in the internal sense the Lord’s instruction is here treated of, the method of his progress therein is here described.

 

 

1477.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That my soul may live because of thee.

 

이 표현이 그렇게 해서 천적인 것이 안전할 것이라는 것은, ‘목숨’(soul)의 상징이 천적인 어떤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적인 것은 생명 그 자체이므로 목숨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us the celestial could be sav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soul” as being the celestial; for this is the soul itself, because the very life itself.

 

그래서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라는 표현의 의미가 분명해지는데요, 그것은 이어지는 내용, 곧 천적 혹은 신적인 것(Divine things)은, 주님이 영적 시험들을 견디시고, 그래서 어머니로부터 유전하신 악을 떼어내실 때까지는 본성상 하나 되기 위해 주님과 인접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Hence it is evident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that my soul may live because of thee.” It will be evident from what follows, that celestial or Divine things were not so adjoined to the Lord that they made one essence, until he endured temptations, and thus expelled the evil heredity from the mother.

 

한편, 본 절과 이어지는 절에서는 천적인 것, 곧 주님의 천적 코어가 어떻게 해를 입지 않고, 보전되는지 하는 내용이 다루어집니다. Here and in the following verses it is described how meanwhile the celestial itself suffered no violence, but was saved.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절의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도 어린 시절, 무엇을 배우실 때, 바로 천적인 단계로 점프하지 않으시고, 대신 이성(理性)과 합리(合理)를 거치셨다. 그래서 여호와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으셨다.

 

2021-10-08(D6)-매일예배(2207, AC.1474-1477, 창12,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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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mGicGTv0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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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2

 

1471. 12절,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Verse 12.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e Egyptians shall see thee, that they will say, This is his wife, and they will kill me, and will make thee to live.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지식들 중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이 기억-지식이 천적 지식을 볼 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즉, 기억-지식의 눈에는 천적 지식이 어떻게 보일 것인지에 대한 묘사입니다.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e Egyptians shall see thee” signifies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which is described as to what it is when they see celestial knowledges;

 

※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 말은 지식 중 기억-지식을 상징합니다. 기억-지식이 천적 지식을 볼 때, 어떨 것인지 하는 설명이지요. 위 표현이 바로 이런 의미임은 ‘애굽’의 의미를 보면 분명한데요, ‘애굽’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식 중 기억-지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서 또 분명한 건, ‘애굽 사람이 볼 때에’라는 말의 의미가 곧, 이 기억-지식이 본 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로 그런 거라는 말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which is described as to what it is when they see celestial knowledge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Egypt,” which is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as before shown; and from this it is evident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when the Egyptians see,” namely, that this memory-knowledge is such as is described in this verse.

 

즉, 종교적 개념에 대한 스터디를 상징합니다. 말씀대로 살기 위해 말씀 공부를 하는 게 아닌, 그저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종교적 추구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천국에 관한 사실들을 접하는 바로 그때 이런 스터디가 발생하는데, 위 표현은 바로 이런 걸 묘사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건, 오래 신앙생활을 해 온 우리 역시 이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위 표현이 이런 의미임은 ‘애굽’의 의미가 종교적 개념에 관한 스터디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앞서 글 번호 1164-1165, 1194-1195 및 1462번 글에서 설명했습니다. 이런 사실로, 이제 ‘애굽 사람이 볼 때에’라는 말의 의미를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본 절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스터디의 속성,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NCE)

 

기억-지식은 그 안에 뭔가 자연적인 게 있습니다. 어린애들이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할 때, 잘 보면, 뭔가 하나의 흐름, 곧, 더 좋은 게 있으면 더 그걸 원하는, 심지어 그게 천국 및 하나님에 관한 거라는 말을 들어도 여전히 더 원하는 그런 게 있습니다.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is attended with this, and it is something natural in it, as is manifested in children when they first begin to learn, namely, that the higher things are, the more they desire them; and still more when they hear that they are celestial and Divine.

 

그러나 어린애들의 이런 순박한 욕심에도 불구하고, 이런 즐거움은 자연적이며, 겉 사람에 속한 욕망 가운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But this delight is natural, and arises from a desire that is of the external man.

 

종교적 개념들에 관한 지식에는 이런 특성이 내재해 있으며, 이런 특성은 그런 지식에 속한 일종의 땅에 속한 요소입니다. 이런 경향은 어린애들이 배우기를 막 시작할 때 두드러지는데요, 어떤 주제가 확 눈에 띄면 띨수록 그들은 그걸 더욱 알고 싶어 하지요. 그 주제가 천국이나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더 그럽니다. 어린애들의 이런 모습이 얼핏 참 순전해 보이지만 그러나 거기 들어 있는 흥분은 땅에 속한 것이요, 겉 사람에 속한 탐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NCE)

 

주님과 달리 여느 사람들의 경우, 이 욕구로 인해 단지 지식 중 기억-지식에 있는 즐거움만 느끼게 됩니다. 그 이상의 무엇 없이 말이죠. 그리고 설령 무슨 즐거움을 느낀다 하더라도 이 지식 중 기억-지식은 단지 어떤 용도로 사용된다는 목적밖엔 없는, 뭘 전달하는 도구요, 매체에 불과한 것입니다. 즉, 지식이란, 하나의 그릇으로서 천적, 영적인 것들을 섬기는 것이며, 그런 때에야 비로소 지식은 처음으로 제대로 쓰임을 받는 것이고, 그런 때에야 비로소 하늘의 참된 기쁨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With other men this desire causes them to feel delight in the mer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without any further end; when yet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is nothing but an instrumental agency having for its end a use, namely, that the knowledges may serv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s vessels; and when they are thus serving, they are then for the first time in their use, and receive from the use their delight.

 

주님과 달리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탐욕은 그들로 하여금 그저 종교적 지식 그 자체에 대한 스터디로만 만족하게 합니다. 무슨 다른 좀 더 나은 목적 없이 말이죠. 실상은 이렇습니다. 이런 지식에 대한 학습의 결과, 지식이란 그저 무슨 도구, 곧, 어떤 용도를 수행하기 위해 고안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지식은 천적, 영적인 것들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 섬기도록 의도된 것입니다. 지식이 이런 목적으로 쓰임 받을 때, 비로소 지식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사용 가운데 있는 것이며, 지식이 제공하는 모든 참된 기쁨은 이처럼 지식이 올바로, 제대로 쓰임 받을 때 오는 것입니다. (NCE)

 

누구라도 만일 그가 주의만 기울이면 알 수 있는 사실은, 지식 중 기억-지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수단일 뿐이며, 사람은 이것으로 합리적이 되며, 이어 영적이 되고, 마침내 천적이 되는 그런 거라는 걸 말입니다. 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의 겉 사람은 속 사람과 인접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이게 바로 그가 지식의 올바른 용도 안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Anyone can see, if he pays attention, that in itself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is nothing but a means whereby a man may become rational, and thence spiritual, and at last celestial; and that by means of the knowledges his external man may be adjoined to his internal; and when this is done, he is in the use itself.

 

신중한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은, 종교적 지식의 축적 그 자체는 그저 이성적이 되며, 영적이 되고, 마침내 천적이 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때 지식은 우리의 겉으로 하여금 우리의 속과 접촉할 수 있게 하며,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지적 탐구는 그 참된 목적을 섬기게 됩니다. (NCE)

 

속 사람은 오직 그 용도, 쓰임새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The internal man regards nothing but the use.

 

결국, 속 사람은 쓰임새 있는 지적 탐구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NCE)

 

또한 이를 위해 주님은 어린 시절과 청년기에 지각하는 기쁨을 기억-지식에 서서히 주입하십니다. For the sake of this end also, the Lord insinuates the delight that childhood and youth perceives in memory-knowledges.

 

같은 이유로, 주님은 어린 시절과 청년기, 사람이 뭔가를 배울 때 즐거움을 느끼게 하십니다. (NCE)

 

하지만 사람이 그의 기쁨을 기억-지식으로만 구성하기 시작할 때, 그런게 바로 육체적 탐욕이며, 그걸로 그는 휩쓸리게 됩니다. 그 휩쓸리는 정도만큼, 즉, 기억-지식에서만 기쁨을 찾으려 하는 만큼, 그에 비례해서 그는 천적인 것으로부터 끊어지며, 그에 정비례하여 그 기억-지식들로 인해 그는 주님을 향하여는 닫히고, 결국 물질적 존재가 되고 맙니다. But when a man begins to make his delight consist in memory-knowledge alone, it is a bodily cupidity which carries him away, and in proportion as he is thus carried away (that is, makes his delight consist in mere memoryknowledge), in the same proportion he removes himself from what is celestial, and in the same proportion do the memory-knowledges close themselves toward the Lord, and become material.

 

하지만 우리가 그저 배우는 데에만 우리의 즐거움을 두기 시작하면, 그것이야말로 육체적 욕망이어서 우리는 거기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우리가 그저 배움에서만 즐거움을 찾는 한, 그만큼 우리는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천국으로부터 끊어질수록 우리가 아는 사실들은 셔터 내리듯 주님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 물질의 세계에 참여하게 됩니다. (NCE)

 

반대로, 쓰임 받아야지 하는 목적들을 가지고 습득된 기억-지식들, 곧, 인간 사회를 위해, 지상에 있는 주님의 교회를 위해, 그리고 천국에 있는 주님의 나라를 위해, 무엇보다도 주님 자신을 위해 쓰임 받아야지 하는 목적에 비례하여 더 많은 지식이 주님을 향하여 활짝 열립니다. But in proportion as the memory-knowledges are learned with the end of use—as for the sake of human society, for the sake of the Lord’s church on earth, for the sake of the Lord’s kingdom in the heavens, and still more for the Lord’s own sake—the more are they opened toward him.

 

또한 이런 이유로 천사들 역시 그 가진 모든 지식에도 불구, 만일 그것이 제대로 된 사용과 거리가 먼 그런 지식이면 아무 것도 아닌 걸로 여겨지게 됩니다. 천사들의 지식 역시 모든 지식에 관한 기억-지식들로서, 인간과는 차원이 달라 그 만 분의 일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인데도 말입니다. On this account also the angels, who are in the memory-knowledge of all knowledges, and indeed to such a degree that scarcely one part in ten thousand can be presented to the full apprehension of man, yet esteem such knowledge as nothing in comparison with use.

 

지금까지 말씀드린 걸로, 오늘 본문,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it may be seen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When the Egyptians shall see thee, they will say, This is his wife; and they will kill me, and will make thee to live.

 

이런 내용을 말씀드린 건, 어린 시절 주님은 이걸 아셨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셨다는 것, 곧, 만일 주님이 기억-지식 추구에만 관심이 있어 거기에만 골몰하셨다면 이 기억-지식은 더 이상 천적인 것을 위한 지식이 아닌, 즉, 주님은 더 이상 천국에 관한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우리 같은 어린이로 성장하셨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These things were said because the Lord when a child knew this and thought in this way, namely, that if he should be carried away by a mere desire for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this memory-knowledge is of such a character that it would care no more for celestial things, but only for the knowledges [cognitiones] which the desire for memory-knowledge would carry away.

 

이 주제들에 관하여는 뒤에 계속 됩니다. On these subjects more follows. (AC.1472)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그들, 즉, 기억-지식들은 이 지식들을 보고 천적(天的, celestial)이다, 천국에 관한 지식들이다 할 거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아내’가 천적인 것들과 인접한 진리를 가리키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는 그의 아내라’가 천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And they will say, This is his wife.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will call the knowledges celesti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wife” as being the truth that was adjoined to celestial things; hence “this is his wife” signifies that which is celestial. (AC.1473)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하지만 그들, 곧 기억-지식들은 이런 천적인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지 종교적 개념들에 대한 지적 탐구에만 몰두할 거라는 말입니다. 이게 지금까지 다룬 내용입니다. And they will kill me, and will make thee to live.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would not care for celestial things, but only for mere knowledges is evident from what has just been said. (AC.1474)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2절의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억-지식들도 주님과 함께 있는 진리들이 천적인 것을 알아보지만 그러나 거기엔 관심이 없고, 오직 종교적 지식에 대한 지적 탐구에만 전념할 것이다

 

2021-10-06(D4)-매일예배(2206, AC.1471-1474, 창12,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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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_15wX3iXT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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