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2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10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14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15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16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17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8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19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20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THE CONTENTS

 

 

1401. 여기서부터는 실제 있었던 일들이며, 이 모든 내용은 표상(表象), 즉 뭔가를 대신 표현하는 것이고, 각 어휘는 의미심장한 뭔가가 있습니다. True historical things begin here, all of which are representative, and each word significative.

 

아브람에 관한 본 장의 내용은 가장 어린 시절부터 청년 때까지 주님의 상태에 대한 표현입니다. The things related in this chapter concerning Abram represent the Lord’s state from earliest childhood up to youth.

 

주님도 일반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주님 역시 모호한 상태에서 한층 또렷한 상태로 발전되어 가셨습니다. As the Lord was born in the same way as other men, he also advanced from an obscure state to one more lucid.

 

‘하란’은 첫 번째 상태입니다. 불명확한, 모호한 상태이지요. ‘세겜’은 두 번째, ‘모레 상수리나무’는 세 번째, ‘바다를 향해서는 벧엘, 동쪽은 아이인 산’은 네 번째, 그리고 ‘남방 애굽에 이르는 여정’은 다섯 번째 상태입니다. “Haran” is the first state, which was obscure; “Shechem” is the second; “the oak grove Moreh” is the third; “the mountain which had Bethel toward the sea and Ai on the east” is the fourth; and the “journey thence toward the south into Egypt” is the fifth.

 

 

1402. 아브람의 애굽 체류에 대해 언급된 내용은 주님의 첫 번째 가르침에 대한 표현이요, 상징입니다. The things told of Abram’s sojourn in Egypt represent and signify the Lord’s first instruction.

 

‘아브람’은 주님, 아내로서 ‘사래’는 천적인 것에 붙어있고자 하는 진리, 누이로서 ‘사래’는 지성적 진리, ‘애굽’은 기억-지식 [스키엔티아, scientia]입니다. “Abram” is the Lord; “Sarai,” as a wife, is truth to be adjoined to the celestial; “Sarai,” as a sister, is intellectual truth; “Egypt” is memory-knowledge [scientia].

 

기억-지식으로부터 [from memory-knowledges, 아 스키엔티피시스 a scientificis, 학문으로부터] 심지어 천적 진리로까지 나아가는 전체 진행에 관한 묘사입니다. 이것은 신적 질서, 곧, 주님의 휴먼 에센스가 주님의 디바인 에센스와 결합하고, 동시에 여호와가 되시는, 그런 질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The progress memory-knowledges [a scientificis] even to celestial truths is described; this was according to Divine order, that the Lord’s human essence might be conjoined with his Divine essence, and at the same time become Jehovah.

 

 

THE INTERNAL SENSE

 

 

1403. 창세기 첫 장에서 여기까지, 더 정확히는 에벨에 관한 언급이 있는 데까지는 실재 역사는 아니고, 그 안에 속뜻이 있어 천적, 영적 실재들을 가리키도록 역사 이야기처럼 구성한 것입니다. From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up to this point, or rather to the mention of Eber, the historicals have not been true but made-up historicals, which in the internal sense signify celestial and spiritual actualities.

 

그러나 본 장과 이어지는 장들은 꾸민 이야기가 아닌 실재 역사이며, 그 속뜻으로는, 이들 역시 같은 식으로 천적, 영적 실재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은, 이 또한 주님의 말씀이라는 한 가지 생각만으로 읽는다면 누구든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But in this chapter and in those which follow, the historicals are not made-up but true historicals; and in the internal sense these in like manner signify celestial and spiritual actualities, as anyone may see from the single consideration that it is the Word of the Lord.

 

 

1404.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실재했던 이 내용은 그 모든 문장과 단어들 모두,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둘 다 그 안에 담긴 겉 글자의 뜻하고는 완전히 다른 속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고로, 실제 있었던 이야기 그 자체는 대표성을 띤 표상입니다. In these things now before us, which are true historicals, all the statements and word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ve in the internal sense an entirely different signification from that which they b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but the historicals themselves are representative.

 

다루어지는 첫 번째 인물은 아브람인데, 그는 일반적으로는 주님을 표상하지만, 그러나 특별히는, 천적 인간을 표상합니다. 그다음 인물은 이삭으로, 그 역시 같은 식으로, 일반적으로는 주님을, 특별히는 영적 인간을, 야곱 또한 일반적으로는 주님을, 특별히는 자연적 인간을 표상합니다. Abram, who is first treated of, represents in general the Lord, and specifically the celestial man; Isaac, who is afterwards treated of, in like manner represents in general the Lord, and specifically the spiritual man; Jacob also in general represents the Lord, and specifically the natural man.

 

그래서 그들은 주님과 주님의 왕국, 그리고 교회에 관한 것을 표상합니다. Thus they represent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of his kingdom, and of the church.

 

 

1405. 속뜻은, 이미 그동안 명백하게 보아온 (AC.64, 647, 813, 1143) 것처럼, 다음과 같은 건데요,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겉 글자의 뜻으로부터 추상적으로, 마치 겉 글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을 때라야 비로소 모든 것이 이해되는 그런 속성을 가졌습니다. 그 이유는, 속뜻엔 말씀의 혼과 생명이 있기 때문인데, 이건 겉 글자의 뜻이 마치 사라지는 것 같아야만,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But the internal sense, as has already been clearly shown, is of such a nature that all things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to be understood abstractly from the letter, just as if the letter did not exist; for in the internal sense is the Word’s soul and life, which does not become manifest unless the sense of the letter as it were vanishes.

 

그래서 사람이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위와 같이 지각합니다. Thus, from the Lord, do the angels perceive the Word when it is being read by man.

 

 

1406. 본 장에 나오는 실제 일어났던 일들이 표상하는 것은 앞서 전제했던 내용을 보시면 되며, 문장들과 단어들이 상징하는 바는 이어지는 내용과 그 풀이들을 보시면 됩니다. What the historicals in this chapter represent is evident from the contents that have been premised; what is signified by the statements and the words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where they are explained.

 

2021-09-12(D1)-주일예배(2190, 아케이나말씀리딩.창12), '창12, 표상(表象, representative) 교회의 시작'.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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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같은교회.주일예배(9/12, 아케이나말씀리딩.창12), '창12, 표상(表象, representative) 교회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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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6:9-22

 

9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3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5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16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17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18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20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21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22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THE INTERNAL SENSE

 

 

605.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는 ‘노아’라 이름하는 새 교회의 형성입니다. 이 교회의 형성을 방주를 가지고 묘사하고 있는데, 방주 안에는 온갖 종류의 생물들이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The subject now treated of is the formation of a new church, which is called “Noah”; and its formation is described by the ark into which living things of every kind were received.

늘 그렇듯,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는 그 교회에 속한 사람은 많은 시험을 당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을 방주를 띄움, 방주가 흔들거림, 홍수의 물 위로 지체됨 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But as is wont to be the case, before that new church could arise it was necessary that the man of the church should suffer many temptations, which are described by the lifting up of the ark, its fluctuation, and its delay upon the waters of the flood.

그리고 마침내 그가 참된 영적 인간이 되어 자유인이 된 것을 물의 빠짐과, 이어지는 많은 것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And finally, that he became a true spiritual man and was set free is described by the cessation of the waters, and the many things that follow.

말씀의 문자적 의미만 고수하는 사람은 결코 이런 메시지를 볼 수 없습니다. 이 경우가 특히 그런데요,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역사적으로 연결되고,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기 때문입니다. No one can see this who adheres to the sense of the letter only, in consequence (and especially is this the case here) of all things being historically connected, and presenting the idea of a history of events.

 

즉, 성경은 인류 역사에 대한 일대일 반영의 기록물이라는 입장입니다. 성경의 어떤 사건들은 반드시 실제로 있었던 과거 어떤 사건들이라는 것이지요. 여기, 며칠 전, 창세기 4장 때 내용 일부를 잠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창세기 1장부터 11장, 아브라함 등장 전까지는 실제 역사가 아닌, 고대인들의 문학 양식인 스토리텔링입니다. 즉, 이 기간 등장하는 인명(人名)은 실제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닌, 그 시대에 존재했던 교회의 이름, 교리 혹은 신학의 이름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오로지 사람을 거듭나게 하여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현재까지 밝혀진 지질학적 지구의 연대인 45억 년을 받아들입니다. 즉, 말씀(The Word)을 겉 글자의 뜻(letter sense, external sense)이 아닌, 속뜻(inner sense, internal sense)으로 읽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창세기 1장도 전통적인 육일간의 천지창조로 읽기보다는 한 사람의 거듭남의 여섯 상태, 또는 단계로 읽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어쩌면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가 이 45억 년 전체에 대한 기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구의 연대를 꼭 말씀에 명시적으로 일대일 대응시키실 필요를 느끼지 않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오로지 인류의 구원, 곧 사람의 거듭남에만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 곧 이런 스토리텔링이 그 당시 사람들의 언어 및 문학 스타일이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가장 큰 즐거움은, 모든 것을 대표성을 띤 그림들, 곧 상징성을 띤 어떤 문학적 도구들, 가령, 인물, 사물, 사건 등을 등장시켜, 그걸 역사 형태로, 스토리텔링으로 정돈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일관성이 있는 역사 시리즈일수록, 더 그들의 천부적 재능에 어울렸습니다. But such was the style of the men of that time, and most pleasing to them it was that all things should be wrapped up in representative figures, and that these should be arranged in the form of history; and the more coherent the historical series, the better suited it was to their genius.

고대인들은 오늘날처럼 어떤 사실을 날 것으로, 있는 그대로 다루느라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깊은, 심오한 사고(思考, thoughts)에 힘썼고, 그 결과는 오늘 본문에서 보듯 아주 기름진 결과들을 가져왔습니다. For in those ancient times men were not so much inclined to memory-knowledges as at this day, but to profound thoughts, of which the offspring was such as has been described.

이것이 고대인들의 지혜였습니다. This was the wisdom of the ancients.

 

 

606. ‘홍수’, ‘방주’ 및 이런 이유로, 이들과 관련된 것들이 거듭남과, 거듭남에 앞서 선행하는 시험들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또한 거듭남과 시험을 홍수, 그 범람하는 물에 비유하지요. That the “flood,” the “ark,” and therefore the things described in connection with them signify regeneration, and also the temptations that precede regeneration, is in some degree known among the learned at this day, who also compare regeneration and temptations to the waters of a flood.

 

※ 여기서 말하는 ‘오늘날’은 1750년대 유럽을 말합니다.

 

 

607. 하지만 이 교회의 캐릭터에 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But the character of this church will be described hereafter.

여기서는 살짝, 간략히만 말씀드리면, 태고교회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천적(天的, celestial, heavenly)이었던 반면, 지금 보고 있는 이 교회는 영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That an idea of it may be presented here, it shall be briefly said that the most ancient church was celestial, as already shown, but this church became spiritual.

태고교회는 선과 진리에 관한 퍼셉션(perception)을 가졌었던 반면, 지금 이 고대교회는 퍼셉션이 아닌, 그 자리를 대신하여 다른 종류의 딕테이트(dictate, inner voice), 곧 양심(conscience)이라고 하는 것을 갖게 되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had a perception of good and truth; this, or the ancient church, had not perception, but in its place another kind of dictate, which may be called conscience.

 

[2] 그러나 아직 세상에 알려진 적이 없고, 또 아마 믿기도 어려운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은 내적 호흡(internal respiration)을 했다는 것입니다. 외적 호흡은 그저 암묵적이었고요. But what is as yet unknown in the world, and is perhaps difficult to believe, is that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had internal respiration, and only tacit external respiration.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많은 말을 하는 대신 천사들처럼 생각으로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안색의 무궁한 변화, 특히 입술 주변의 미세한 변화들을 가지고 어떤 정신적 이미지들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Thus they spoke not so much by words, as afterwards and as at this day, but by ideas, as angels do; and these they could express by innumerable changes of the looks and face, especially of the lips.

입술에는, 셀 수 없는 근섬유들이 시리즈로 있는데, 오늘날엔 이 근섬유들을 자유롭게 쓸 수가 없지만, 그 시절 사람들은 자유로웠습니다. 그들은 그 근섬유들을 가지고, 오늘날 사람들이 또렷한 음성으로 한 시간 동안이나 설명해야 할 어떤 아이디어를 일 분도 안 되어 보여주기도, 상징하기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일을 오늘날 우리처럼 단어나 단어의 이런저런 조합, 곧 문장으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충만하고 분명하게 확 이해시킬 수 있었습니다. In the lips there are countless series of muscular fibers which at this day are not set free, but being free with the men of that time, they could so present, signify, and represent ideas by them as to express in a minute’s time what at this day it would require an hour to say by articulate sounds and words, and they could do this more fully and clearly to the apprehension and understanding of those present than is possible by words, or series of words in combination.

이런 이야기는 아마도 믿기 참 어려우시겠지만, 사실입니다. This may perhaps seem incredible, but yet it is true.

또한 이 행성에 속하지 않은 다른 많은 존재가 있는데, 그들은 이런 비슷한 방식의 언어생활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주님의 자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cf. AC.6814, 7359-7360, 7745-7746, 8022-8026, 8247-8248, 10587-10588, 10708-10710) And there are many others, not of this earth, who have spoken and at this day speak in a similar manner; concerning whom,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3] 저로 하여금 이 내적 호흡이 과연 무엇과 같으며,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배울 수 있게 하셨습니다. It has been given me to know the nature of that internal respiration, and how in process of time it was changed.

그들 태고교회 사람들은 천사들, 천사들이 이런 식으로 호흡을 하는데요, 이렇게 천사들이 가진 것과 같은 호흡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사고 속 아주 깊은 데까지 들어갈 수 있었고, 일종의 퍼셉션 같은 것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것은 설명이 불가능한 것인데요, 설령 그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따라서 실제로는 아무도 그걸 믿지 않을 것입니다. As these most ancient people had a respiration such as the angels have, who breathe in a similar manner, they were in profound ideas of thought, and were able to have such perception as cannot be described; and even if it could be described such as it really was, it would not be believed, because it would not be comprehended.

그러나 그들의 후손으로 가면서 이 내적 호흡은 점차 감소, 고갈되어 갔습니다. 끔찍한 신념과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이 내적 호흡은 소름 끼치도록 추한 것 말고는 무슨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생존할 수가 없었고, 그렇게 그들 모두는 쓸어버림을 당했습니다. But in their posterity this internal respiration little by little came to an end; and with those who were possessed with dreadful persuasions and fantasies, it became such that they could no longer present any idea of thought except the most debased, the effect of which was that they could not survive, and therefore all became extinct.

 

 

608. 내적 호흡이 줄어들면서,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것과 거의 똑같은 외적 호흡이 점점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이 외적 호흡과 함께 온 것이 바로 말로 하는 스피치인데, 또렷이 발음되어 잘 들리는 스피치입니다. 생각을 구성하는 개별 아이디어들을 실어나르는 것이 바로 이 스피치, 입 구조, 구강 구조를 사용하는 스피치입니다. When internal respiration ceased, external respiration gradually succeeded, almost like that of the present day; and with external respiration a language of words, or of articulate sound into which the ideas of thought were determined.

이 과정에서 인간의 상태는 급격히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이 전에 가졌던 그런 식으로 사물을 지각할 수가 없었고, 이 퍼셉션을 대신해서, 양심이라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종류의 내적 음성(dictate)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이것, 곧 이 ‘내적 음성’이라는 것은 양심과 흡사하며, 퍼셉션과 양심 사이 거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이 양심과 친숙합니다. Thus the state of man was entirely changed, and became such that he could no longer have similar perception, but instead of perception another kind of dictate which may be called conscience, for it was like conscience, though a kind of intermediate between perception and the conscience known to some at this day.

생각을 구성하는 아이디어들이 이런 형태의 틀 안으로 부어지기 시작하자, 즉, 말로 표현, 발음되기 시작하자, 태고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속사람을 통한 가르침을 받는 대신, 오직 겉사람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And when such determination of the ideas of thought took place, that is to say, into spoken words, they could no longer be instructed, like the most ancient man, through the internal man, but through the external.

태고교회 계시들의 자리를 교리들이 계승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육체적 감각들을 가지고 붙들 수 있는 첫 번째가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육체적 감각들은 기억 속 구체적 이미지들로 이미지화 되어 가고, 다시 아이디어들, 생각을 구성하는 것들인데, 다시 이미지화되어 아이디어들이 됩니다. 바로 이 아이디어들이 가르침의 어떤 도로 내지는 틀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And therefore in place of the revelations of the most ancient church, doctrinal things succeeded, which could first be received by the external senses, and from them material ideas of the memory could be formed, and from these, ideas of thought, by which and according to which they were instructed.

※ 그러니까 가령, 청력에 이상이 있어 듣지 못하시는 분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수화를 하거나 글을 사용해서 해야 합니다. 이 경우, 많은 제약이 따르며, 온전한 내용 전달이 어렵습니다. 원래대로라면 100%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을 2, 30% 밖에는 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홍수 이후 세대인 현 인류는 이렇게 아주 투박하고 낮은 수준의, 원시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태고교회의 뒤를 이어 일어난 교회인 고대교회는 전혀 다른 종류의 지니어스(genius, 재능, 타고난 천성)를 갖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인류에게 이 새로운 지니어스 또는 상태를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인류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Hence it was that this church which followed possessed an entirely different genius from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if the Lord had not brought the human race into this genius, or into this state, no man could have been saved.

 

 

609. ‘노아’라 이름하는 교회 사람들의 상태 변화 역시 똑같이 태고교회 사람들의 상태 변화에서 왔기 때문에, 앞서 설명대로, 그들 역시 아무도 더 이상 태고 사람들이 누렸던 방식으로 무슨 가르침을 받거나 내면이 열리거나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내면이 닫히고, 그래서 더 이상 하늘과 교통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예전의 그런 건 다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As the state of the man of this church which is called “Noah” was altogether changed from that of the man of the most ancient church, he could no longer—as said before—be informed and enlightened in the same way as the most ancient man; for his internals were closed, so that he no longer had communication with heaven, except such as was unconscious.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제는 오감을 통한 외적 방식으로밖엔 무엇을 배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Nor, for the same reason, could he be instructed except as before said by the external way of sense or of the senses.

이런 이유로, 태고교회를 위해 만들었던 어떤 계시들과 함께, 신앙에 관한 가르침들이 이 세대의 사용을 위해 보호, 보전된 것은 바로 주님의 섭리입니다. On this account, of the Lord’s providence, doctrinal matters of faith, with some of the revelations to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preserved for the use of this posterity.

‘가인’이 바로 이런 가르침들을 맨 처음 수집, 멸망을 대비, 보전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죽임을 면케 하셨다 하신 이유입니다. (이에 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창4:15 관련 내용인 AC.392-396 참조) These doctrinal things were first collected by “Cain,” and were stored up that they might not be lost; and therefore it is said of Cain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 (concerning which see what was said at that place, Gen.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에녹’은 이런 가르침들을 일종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으로 줄인 사람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아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세대에게만 유용한 것이었으며, 이걸 가리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창5:24 및 AC.521 참조) These doctrinal matters were afterwards reduced into doctrine by “Enoch”; but because this doctrine was of use to no one at that time, but was for posterity, it is said that “God took him.” (See also Gen.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4)

 

지금 설명 중인 후손 또는 교회가 사용할 수 있도록 주님이 따로 보관하신 것이 바로 이들 신앙의 가르침입니다. 퍼셉션은 사라질 것이며, 그래서 이 신앙의 가르침들이 잘 견디고 보존, 후대에 전달되어야 할 것을 주님은 미리 내다보셨습니다. These doctrinal matters of faith are what were preserved by the Lord for the use of this posterity or church; for it was foreseen by the Lord that perception would be lost, and therefore it was provided that these doctrinal things should remain.

 

 

THE CONTENTS

 

 

599.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노아’라는 이름을 가졌던 교회의, 거듭나기 이전 상태입니다.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state of the church called “Noah,” before its regeneration.

 

 

9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These are the births of Noah; Noah was a man righteous and perfect in his generations: Noah walked with God. 10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And Noah begat three sons: Shem, Ham, and Japheth.

 

600. 그 교회의 사람들을 거듭날 수 있었던 사람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9절). 그런 가운데 그 교회에서 세 종류의 교리(doctrine), 신학(theology)이 일어났는데, 그들이 바로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10절). The man of that church is described, that he was such that he could be regenerated (verse 9); but that there arose thence three kinds of doctrine, which are “Shem, Ham, and Japheth” (verse 10).

 

 

11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And the earth was corrupt before God; and the earth was filled with violence. 12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And God saw the earth, and behold it was corrupt, for all flesh had corrupted its way upon the earth. 13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And God said unto Noah, The end of all flesh is come before me, for the earth is filled with violence from their faces, and behold I will destroy them with the earth.

 

601. 태고교회의 남은 후손들은 그들의 끔찍한 종교적 신념(persuasion, 설득, 기만)과 더러운 갈망(yearnings, 욕망) 때문에 아무도 거듭날 수 없었으며 (11-12절), 그들은 결국 이런 걸로 자신을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13절). That the man who was left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could not be regenerated, on account of his direful persuasions and foul yearnings (verses 11–12); whereby he would utterly destroy himself (verse 13).

 

 

14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Make thee an ark of gopher woods; mansions shalt thou make the ark, and shalt pitch it within and without with pitch. 15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And thus shalt thou make it: three hundred cubits the length of the ark, fifty cubits its breadth, and thirty cubits its height. 16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A window shalt thou make to the ark, and to a cubit shalt thou finish it from above; and the door of the ark shalt thou set in the side thereof; with lowest, second, and third stories shalt thou make it.

 

602. 그러나 ‘방주’로 묘사하고 있는 ‘노아’ 교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14절). 그들에게 남아 있는 리메인스를 여러 수치(measures, 측량)로 (15절), 그들의 언더스탠딩(understanding, 이해력)의 여러 특징들은 ‘창’, ‘문’, ‘칸’으로 각각 묘사하고 있습니다 (16절). But the man of the church called “Noah,” who is described by the “ark,” was not so (verse 14); and the remains with him are described by the measures (verse 15);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by the “window,” “door,” and “mansions.” (verse 16)

 

 

17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And I, behold I do bring the flood of waters upon the earth, to destroy all flesh wherein is the breath of lives from under the heavens; everything that is in the earth shall expire.

 

603. 그들은 보호를 받게 되지만 나머지 다른 모든 사람은 악과 거짓의 범람, 홍수로 사라질 것입니다 (17절). That he would be preserved when the rest would perish by an inundation of evil and falsity (verse 17).

 

 

18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And I will set up my covenant with thee; and thou shalt enter into the ark, thou and thy sons, and thy wife, and thy sons’ wives with thee. 19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And of every living thing of all flesh, pairs of all shalt thou make to enter into the ark, to keep them alive with thee; they shall be male and female. 20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Of the fowl after its kind, and of the beast after its kind, of every creeping thing of the ground after its kind, pairs of all shall enter unto thee, to keep them alive. 21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And take thou unto thee of all food that is eaten, and gather it to thee, and it shall be for food for thee and for them. 22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And Noah did according to all that God commanded him; so did he.

 

604. 그들에게 있던 진리와 선이 건짐을 받으며 (18절), 언더스탠딩에 속한 모든 것, 그리고 의지에 속한 모든 것도 건짐을 받을 텐데, 그 방법은 바로 거듭남입니다 (19-20절). 그들은 거듭남을 위한 준비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며 (21절), 그렇게 되었습니다 (22절). And that the truths and goods which were with him would be saved (verse 18); and thus whatever was of the understanding and whatever was of the will, by regeneration (verses 19–20); for receiving which he was to be prepared (verse 21); and that it was so done (verse 22).

2021-09-05(D1)-주일예배(2184, 아케이나말씀리딩.창6,9-22), '노아, 셈, 함, 야벳, 방주, 끝 날, 홍수, 멸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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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같은교회.주일예배(9/5, 창립 8주년, 아케이나말씀리딩.창6:9-22), '노아, 셈, 함, 야벳, 방주, 끝

#스베덴보리, #천계비의, #창세기, #아케이나말씀리딩 ATWR : Arcana The Word Reading 아케이나 말씀 리딩 원고 : https://bygracetistory.tistory.com/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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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2:1-17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73. 사람은 먼저 죽은 상태에서 영적(靈的, spiritual) 상태가 되고, 그 다음엔 천적(天的, celestial)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이제부터 다루는 내용입니다. (1절) When from being dead a man has become spiritual, then from spiritual he becomes celestial, as is now treated of (verse 1).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74.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이날에 주님이 안식하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 싸움이란, 싸움을 거는 쪽이 있어야 성립이 되는데, 싸움을 거는 쪽이 포기하고 가버리니 이제는 더 이상 싸울 일이 없게 되고, 그러면 드디어 쉴 수 있게 됩니다. 거듭남의 과정 중 언뜻 보면 우리가 싸운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안에서 주님이 대신 싸우신 겁니다. 그러므로 실상은 주님이 쉬실 수 있게 된 것이며, 그래서 주님이 안식하신다 하는 것입니다.

 

※ 이 상태가 바로 일곱째 날 안식의 상태요, 이것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입니다. 또한 이 상태를 수도(修道) 용어로는 ‘완덕(完德)의 경지’라고 합니다.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 ‘내력’은 ‘아담의 계보’(창5:1), ‘노아의 족보’(창6:9)처럼 앞으로 주님이 하실 일의 설계도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의 거듭남을 도와 그를 먼저 영적 인간이 되게 하신 후, 다시 천적 인간이 되게 하셔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일입니다.

 

※ 여기서부터 주님의 칭호가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참고로, ‘여호와’는 주님의 신성을 천적으로, ‘하나님’은 주님의 신성을 영적으로 부르는 칭호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는 주님의 인성을 천적으로, ‘그리스도’는 주님의 인성을 영적으로 부르는 칭호입니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

 

75. 이 사람, 곧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적인 면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을, 안개로 적신 땅에서 나는 ‘초목’과 ‘채소’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watered by the mist (verses 5–6).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76. 그의 생명을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77절. ‘동방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의 지성을 가리키며,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는 진리에 관한 퍼셉션(perceptions, 知覺)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에 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 나무’는 사랑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곧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각각 의미합니다. (8-9절) Afterwards his intelligence is described by the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which the trees pleasant to the sight are perceptions of truth, and the trees good for food are perceptions of good. Love is meant by the tree of lives, faith by the tree of knowledge [scientiae] (verses 8–9).

 

※ 퍼셉션은 학습 없이도 아는, 타고나는 지각 능력이며, 특별히 주님의 선과 진리를 직관하는 통찰력입니다. 천적 인간들, 곧 아담 교회, 태고 교회 사람들은 주님에게 속한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 에덴동산에 대한 위 본문은 천적 인간에 대한 설명입니다. 에덴동산 전체 설계의 큰 틀, 곧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 곧 주님의 신성으로 설계되고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0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where there is gold.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there is bdellium and the onyx stone.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78. ‘동산을 적시는 강’은 지혜를 가리킵니다. Wisdom is meant by the river in the garden.

 

네 개의 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선과 진리를, 두 번째는 모든 선과 진리, 혹은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 [cognitio]을 가리킵니다. From thence were four rivers, the first of which is good and truth; the second is the knowledge [cognitio] of all things of good and truth, or of love and faith.

 

이 둘은 속 사람에게 속합니다. 세 번째는 이성을, 네 번째는 기억-지식[scientia]을 가리키며, 이 둘은 겉 사람에게 속합니다. These are of the internal man. The third is reason, and the fourth is memory-knowledge [scientia], which are of the external man.

 

모든 것이 지혜로부터 나오며, 지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10-14절) All are from wisdom, and this is from love and faith in the Lord (verses 10–14).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79. 천적인 사람은 그런 동산입니다. The celestial man is such a garden.

 

이 동산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은 동산 안 모든 것을 사람들이 즐기도록은 허락하셨으나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는 못하게 하셨습니다. (15절) But as the garden is the Lord’s, it is permitted this man to enjoy all these things, and ye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verse 15).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80. 그는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퍼셉션을 가지고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허락되지만, 반면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오는 걸 가지고 그러거나, 사람의 감각과 기억-지식들 [sensualia et scientifica]을 가지고 신앙의 미스터리들을 탐구하거나 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런 짓들은 그의 천적 본성의 죽음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16-17절) He is also permitted to acquire a 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from the Lord, but he must not do so from himself and the world, nor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which would cause the death of his celestial nature (verses 16–17).

 

 

 

창2:18-25

 

131. 여기서부터는 태고 교회의 후손들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본성(本性, proprium)을 향해 기울어진 사람들입니다.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nclined to their own,3 is here treated of.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132. 인간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해 하기보다는 혼자 힘으로 세상의 인도함을 받거나 본성을 따라 살기를 더욱 원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런 인간에게 부여된 인간의 본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18절) Since man is such as not to be content to be led by the Lord, but desires to be led also by himself and the world, or by his own, therefore the own which was granted him is here treated of (verse 18).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133. 그래서 먼저 그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고 그에게 선에 관한 애정들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주십니다. 이것들은 주님이 그에게 무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자기 본성을 향해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19-20절) And first it is given him to know the affections of good and the knowledges of truth with which he is endowed by the Lord; but still he inclines to his own (verses 19–20).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 the place thereof.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134. 이런 이유로, 인간은 자기 본성이라는 상태 안으로 깊이 박혀 있으며, 그래서 그에게 어떤 또 하나의 본성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이 새로운 본성을 여자로 빚어지는 갈빗대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21-23절) Wherefore he is let into a state of his own, and an own is given him, which is described by the rib built into a woman (verses 21 to 23).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135.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본성과 붙어 있게 되고, 그렇게 해서 이 둘은 하나로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re adjoined to the man’s own, so that they appear as a one (verse 24).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순진함이 이 본성 안으로 스며드는데요, 이 일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여전히 안 받아들여지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25절) And innocence from the Lord is instilled into this own,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 (verse 25).

2021-08-29(D1)-주일예배(2177, ATWR.창2), '일곱째 날,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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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LNvXuIkq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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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These are the births of Noah; Noah was a man righteous and perfect in his generations: Noah walked with God. (창6:9)

 

 

613. ‘당대에’(generations)가 신앙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은 글자의 뜻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글자의 뜻으로 말씀을 보게 되면 역사적으로, 즉 실제 일어난 역사 중 언제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 건지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오직 내적 의미만 다루기 때문에, 이 표현은 신앙에 관한 ‘당대에’, 즉, ‘신앙의 발전 단계 중 어느 한 단계에’라는 의미입니다. That the “generations” are those of faith, does not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which is historical; but as internal things only are here treated of, generations of faith are signified.

 

NCE(New Centry Edition)에서는, 이 ‘당대에’(generation)를 ‘종교적 발전의 한 단계’(a stage of religious development)로, 내포된 메시지를 ‘신앙의 여러 속성들’(attributes of faith)로 풀고 있습니다.


당대에’가 여기서 의미하는 게, ‘연결’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로도 또한 분명합니다. It is also evident from the connection that the generations here are no others.

말씀 다른 구절들, 가령 이사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It is the same in other passages of the Word, as in Isaiah: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They that shall be of thee shall build the waste places of old; thou shalt raise up the found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and thou shalt be called the repairer of the breach, the restorer of paths to dwell in. (사58:12)

 

이 모든 것들은 신앙에 속한 것들, 곧 신앙의 여러 면들을 상징합니다. ‘오래 황폐된 곳들’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황폐해진, 신앙의 천적 퀄러티들을, ‘역대의 파괴된 기초’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신앙의 영적 퀄러티들의 기초들을 각각 상징합니다. 이것들은 고대 이래로 폐허가 되었는데, 이 또한 상징하는 바입니다. All these things signify what is of faith; the “waste places of old” signify celestial things of faith; the “found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spiritual things of faith, which had lapsed from the ancient times that are likewise signified.

 

계속해서 Again: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They shall build the old wastes, they shall raise up the former desolations, they shall renew the waste cities, the desol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사61:4)

 

유사한 상징이지요. with similar signification.

계속해서 And again: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They shall not labor in vain, nor bring forth for trouble; for they are the seed of the blessed of Jehovah, and their offspring with them. (사65:23)

 

여기서도 ‘생산한 것’, 즉 자녀를 낳은 것은 신앙에 속한 것들, 곧 신앙의 속성들에 대한, ‘수고’는 사랑에 속한 것들, 곧 사랑의 속성들에 대한 서술입니다. Here also “bringing forth” [generare] is predicated of the things of faith; “laboring,” of those of love.

후자의 경우, 그들을 가리켜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라, 전자를 가리켜는 ‘후손’이라 하고 있습니다. Of the latter it is said that they are “the seed of the blessed of Jehovah”; of the former, that they are “offspring.

 

이처럼 말씀에서 ‘당대’, ‘역대’, ‘자손’, ‘후손’ 등의 표현은 모두 신앙과 관련된 표현들입니다. 단순한 무슨 역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614.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가 신앙의 교리, 신앙에 관한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며’라는 동일한 표현으로 언급되었던 에녹에 대한 내용(창5:22, 24, AC.519)을 보면 되는데요, 거기 보면, 이 표현은 후손들의 사용을 위해 보전된, 즉, 나중에 일어날 후손들로 하여금 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따로 보관하신 신앙의 교리를 상징했습니다. That “to walk with God” signifies the doctrine of faith, may be seen from what was said before respecting Enoch (chapter v. 22, 24), of whom also it is said that he “walked with God”; and there it signifies the doctrine of faith preserved for the use of posterity.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2, 24)


그리고 지금 이들이 바로 그 후손이기 때문에, 이 주제가 지금 다시 거론된 것입니다. And as this is the posterity for whose use it was preserved, the subject is now here taken up again.

 

 

615. 이 교회 사람의 퀄리티가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즉, 본 절은 이 교회 사람들의 전체적인 모습, 일반적인 모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모습이 된 건 아니고, 앞으로 될 모습입니다. 뒤에 이어지는 여러 장을 통해 이제 그 형성 과정을 보게 되는데요, (AC.838, 977-979) 즉,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통해, 이들은 체어리티의 사람들, 체어리티라는 감정, 정서를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며, 이렇게 이들은 체어리티 가운데 어떤 행동들을 하게 되고, 그 결과, 체어리티와 연결된 선량함을 통해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The quality of the man of this church is here described in general; not that he was such as yet—for his formation is treated of in what follows—but that such he might become: that is to say, that by knowledges of faith he could be endowed with charity, and so act from charity, and from the good of charity know what is true.

 

전에는, 즉, 이들의 선조인 태고 교회 사람들은 퍼셉션이라는 타고나는 능력으로 무슨 학습 없이도 선과 진리를 직관하며,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면, 이제 이들 홍수 후 세대인 노아 교회부터는 선과 진리를 이런 방식으로 알게 됩니다. 퍼셉션의 자리를 이제 이런 방식, 곧 신앙의 체어리티를 경유하는 방식이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체어리티의 선 혹은 ‘의인이요’(righteous, just)가 먼저 나오고, 체어리티의 진리 혹은 ‘완전한’(perfect, upright)이 그 뒤를 잇는 것입니다. For this reason the good of charity or “righteous” precedes, and the truth of charity or “perfect” follows.

체어리티는 앞서 말씀드렸듯(AC.325, 351), 이웃(our fellow human beings)을 향한 사랑이요, 자비입니다. 이것은 태고 교회가 주님을 향해 직접(directed) 가졌던 주님 사랑의 낮은 단계입니다. Charity, as before said,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and it is a lower degree of the love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love to the Lord.

이제 보시듯, 사랑은 내리막이 되었고, 더욱 외적, 곧 더욱 피상적이 되었는데, 이걸 가리켜 체어러티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Thus love now descended and became more external, and is to be called charity.

2021-08-22(D1)-주일예배(AC.613-615, 창6,9), '노아, 당대에, 하나님과 동행'.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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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FifBAMWg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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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I will destroy man whom I have created, 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both man and beast, and creeping thing, and fowl of the heavens; for it repenteth me that I have made him. (창6:7)

 

 

593.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Whom I have created, 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이 본문이 태고 교회의 후손이었던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은, 이 사람을 일컬어, 그는 주께서 ‘창조하신’(created), 즉, 거듭나게 하신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나중에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이 될 때까지 ‘만드신’(made), 즉, 완벽하게 하신, 또는 거듭나게 하신 사람이었다라는 표현 뿐 아니라, ‘지면(地面)에서’(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man from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is evident not only from its being said, the man whom he had “created,” that is, whom he had regenerated; and afterwards whom he had “made,” that is, had perfected, or regenerated until he became celestial; but also from its being said “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지(地)’, 곧 ‘’(ground)은 앞서(cf. AC.566-567) 보여드린 대로, 교회가 있는 지역입니다. The “ground” is where the church is, as has been shown before.

 

다음 사실 또한 그 분명한 증거가 되는데요, 이 본문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자신들의 갈망(yearnings)에 침수시킨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교리적인 것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The same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ose are treated of who immers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in their yearnings; and those who had not doctrinal things of faith could not do so.

 

즉, ‘내가 지면에서 창조한 사람’이라는 이 표현은 한편으로, 신앙의 가르침과 자신들의 욕구를 합친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이며, 참 신앙의 교리가 무엇인지도 몰라 접근도 못하는 사람들은 절대 이런 행위(offense, 위법 행위, 범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런 짓을 하는 사람들의 예로는, 자신의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말씀(the Word) 또는 어떤 종교적인 이슈를 사사로이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 되겠습니다.

 

교회 밖 사람들은 진리와 선에 관해 무지하며, 이런 사람들은 신앙의 진리와 선에 다소 반대되는 말과 행실 중에도 일종의 이노센스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무슨 환상, 곧 그것이 진리요 선인 줄 믿는 그런 것으로 가득 찬 나머지 어떤 열심을 가지고 워십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They who are outside the church are in ignorance of truth and good, and those who are in ignorance may be in a kind of innocence while speaking and acting somewhat contrary to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for they may act from a certain zeal for the worship with which they have been imbued from infancy, and which they therefore believe to be true and good.

 

그러나 그 가운데 신앙의 교리를 가진 사람들의 경우는 아주 다릅니다. But the case is entirely different with those who have the doctrine of faith among them.

 

그들은 진리를 거짓과, 거룩한 것을 신성모독과 섞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These can mingle truths with falsities, and holy things with profane.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운명은 내세에서는 소위 이방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운명보다도 훨씬 더 나쁜데,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허락하심을 받아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Hence their lot in the other life is much worse than the lot of those who are called gentiles, concerning whom,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594.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 Both man and beast, and creeping thing.

 

이 말씀의 뜻이, 의지와 관련된 무엇이든지 그것이 그를 끝낸다라는 것임은 ‘사람’(man), ‘가축’(beast), 그리고 ‘기는 것’(creeping thing)의 상징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whatsoever is of the will would extinguish him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man,” of “beast,” and of “creeping thing.

 

사람은 오직 의지(will)와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 intellect)이 있어 사람이며, 이것이 있어 사람은 짐승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 외 다른 모든 면은 짐승과 매우 유사합니다. Man is man solely from the will and understanding, by which he is distinguished from brutes; in all other respects he is very similar to them.

 

그런데 지금 저들의 경우는, 모든 선한 의지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전부 사라졌습니다. In the case of these men all will of good and understanding of truth had perished.

 

선한 의지 대신 제정신이 아닌 갈망이,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 대신 정신나간 환상이 각각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이런 갈망과 환상이 서로 뒤섞이자 그들의 상황은 마치 리메인스가 파괴된 것 같았으며, 그렇게 그들은 종말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In place of a will of good there followed insane yearnings, in place of an understanding of truth insane fantasies; and these were commingled with their yearnings, so that after they had thus as it were destroyed remains, they could not but be extinguished.

 

의지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켜 ‘가축’과 ‘기는 것’이라 한다는 것은, 짐승과 기는 것에 관해 전에 말씀드린 내용(cf. AC.44-46, 246)을 보시면 됩니다. That all things of the will are called “beasts” and “creeping things”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before concerning beasts and creeping things.

 

그러나 여기서는, 지금 다루고 있는 사람의 캐릭터 때문에, ‘가축’이 선한 어펙션(affections, 애정, emotions)이 아닌, 악한 것, 곧 악한 갈망을, ‘기는 것’은 쾌락(pleasures), 곧 육체적, 감각적 쾌락을 각각 상징합니다. But here, because of the character of the man treated of, good affections are not signified by “beasts,” but evil, consequently yearnings; and by “creeping things,” pleasures, both bodily and sensuous.

 

가축’과 ‘기는 것’이 그런 걸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을 가지고 더 이상 깊이 확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앞서 이미 충분히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AC.45-46, 142-143을 보시기 바랍니다.) That such things are signified by “beasts” and “creeping things” needs no further confirmation from the Word, because they have been treated of before (see n. 45–46, 142–143).

 

 

595. 공중의 새가 이해하는 능력, 곧 사고력에 관계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의 내용을 보시면 됩니다. (cf. AC.40) That the fowl of the heavens signifies whatever is of the understanding, that is, of thought, may also be seen above (n. 40).

2021-08-15(D1)-주일예배(AC.593-595, 창6,7), '창조한 사람, 지면, 가축, 기는 것, 공중의 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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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8FrG6yjWu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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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My spirit shall not reprove man forever, for that he is flesh; and his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창6:3)

 

 

57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가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은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을 것임을,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는 그들이 육(肉, flesh)-중심의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는 그들은 남은 신앙의 리메인스(remains, traces)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By “Jehovah’s saying my spirit shall not always reprove man” is signified that man would not be so led any longer; “for that he is flesh” signifies because he had become corporeal; “and his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signifies that he ought to have remains of faith.

 

이것은 또한 앞으로 다가올 교회의 미래에 관한 예언입니다. It is also a prediction concerning a future church.

 

 

57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라는 표현이 사람들이 더 이상 그렇게 인도함을 받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본문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앞선 본문을 보면, 그들은 종교적 가르침이나 진리를 자신들의 고유한 욕망으로 뒤섞어 결국 자신들의 길의 오류를 더 이상 볼 수도, 무엇이 악인지를 알 수도 없는 지경까지 자신들의 캐릭터를 발전시켰습니다. 선과 진리를 지각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은 그들의 자기기만에 의해 심지가 꺼지듯 꺼지고 말았는데요, 그것은 그들이 참이라고 믿었던 유일한 것들이라고는 그저 자기들의 이론에 딱 맞는 것들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뒤에 나오는 본문을 보면, 그 교회 사람들이 홍수 후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퍼셉션의 자리를 대신하여 그들 가운데 일어난 것은 양심이었습니다. 이 양심으로 그들은 비로소 가책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That by Jehovah’s saying my spirit shall not forever reprove man is signified that man would not be so led any longer, is evident from what has gone before and from what follows; from what has gone before in that men had become such, through the immersion of the doctrinal things or truths of faith in yearnings, that they could no longer be reproved, that is, know what evil is; all capacity to perceive truth and good having been extinguished through their persuasions, so that they believed that only to be true that was in conformity with their persuasions; and in regard to what follows, that after the flood the man of the church became different, in that with him conscience succeeded in place of perception, through which he could be reproved.

 

여호와의 영의 책망’은 그래서 내적 음성, 곧, 퍼셉션 혹은 양심을 상징하며, ‘여호와의 영’은 흘러들어 오는 진리와 선, 곧 인플럭스(influx, 入流)를 상징합니다. 이사야도 그렇게 말합니다. Reproof by the spirit of Jehovah” therefore signifies an inward dictate, a perception, or a conscience; and the “spirit of Jehovah” signifies the influx of what is true and good; as also in Isaiah: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 I will not contend to eternity, neither will I be forever wroth, for the spirit would overwhelm before me, and the souls I have made. (사57:16)

 

 

574. ‘’(肉, flesh, 살)은 사람이 육-중심(body-centered)이 된 것을 상징하는데요, 이것은 말씀에서 ‘’이 상징하는 것을 보면 됩니다. 거기 보면, 두 가지, 곧 일반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구체적으로는 육-중심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That “flesh” signifies that man had become corporeal, appears from the signification of “flesh” in the Word, where it is used to signify both every man in general, and also, specifically, the corporeal man.

 

요엘서에서, 모든 사람을 넌지시 나타내기 위해 쓰였습니다. It is used to signify every man, in Joel: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I will pour out my spirit upon all flesh, and your sons and your daughters shall prophesy, (욜2:28)

 

만민’(flesh)은 사람들을, ‘’은 주님에게서 나와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선과 진리, 곧 인플럭스를 나타냅니다. where “flesh” signifies man, and “spirit” the influx of truth and good from the Lord.

 

다윗의 글입니다. In David: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Thou that hearest prayers, unto thee shall all flesh come, (시65:2)

 

여기 ‘육체’는 모든 사람을 상징합니다. where “flesh” denotes every man.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Cursed is the man that trusteth in man, and maketh flesh his arm, (렘17:5)

 

육신’은 사람을, ‘’은 파워를 상징합니다. where “flesh” signifies man, and “arm” power.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4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 터이므로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모든 육체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5모든 육체는 나 여호와가 내 칼을 칼집에서 빼낸 줄을 알지라 칼이 다시 꽂히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That all flesh may know. (겔21:4-5)

 

스가랴입니다. In Zechariah: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Be silent, all flesh, before Jehovah, (슥2:13)

 

여기 ‘육체’는 모든 사람을 상징합니다. where “flesh” denotes every man.

 

[2] 육(flesh)은 특별히 육-중심적인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이 이사야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it signifies specifically the corporeal man, is evident from Isaiah: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The Egyptian is man and not God, and his horses are flesh and not spirit, (사31:3)

 

그들의 지식은 육-중심 수준임을 상징합니다. 여기 및 말씀 어디에서나 ‘말들’은 합리적 수준, 이성적 수준을 나타냅니다. signifying that their memory-knowledge is corporeal; “horses” here and elsewhere in the Word denoting the rational.

 

계속해서 Again:

 

오른쪽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왼쪽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He shall withdraw to the right hand, and shall be hungry; and he shall devour on the left hand, and they shall not be satisfied; they shall eat everyone the flesh of his own arm, (사9:20)

 

고기’는 사람의 고유한 것들, 곧 육-중심의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signifying such things as are man’s own, which are all corporeal.

 

같은 이사야입니다. In the same:

 

그의 숲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자가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이라 He shall consume from the soul, and even the flesh, (사10:18)

 

여기 ‘’은 그를 온통 사로잡고 있는 육-중심의 모든 걸 상징합니다. where “flesh” signifies corporeal things.

 

계속해서 Again:

 

5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The glory of Jehovah shall be revealed, and all flesh shall see it together; the voice said, Cry; and he said, What shall I cry? All flesh is grass, (사40:5-6)

 

여기 ‘육체’는 모든 육-중심, 몸-오리엔티드된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flesh” here signifies every man who is corporeal.

 

[3] 같은 이사야입니다. In the same: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죽임 당할 자가 많으리니 In fire will Jehovah dispute, and with his sword with all flesh, and the slain of Jehovah shall be multiplied, (사66:16)

 

’은 왜곡된 욕망에 가해지는 형벌을, ‘’은 거짓에 가해지는 형벌을, 그리고 ‘혈육’(flesh)은 육-중심, 몸 관련 일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가해지는 형벌을 각각 상징합니다. where “fire” signifies the punishment of yearnings; the “sword,” the punishment of falsities; and “flesh” the corporeal things of man.

 

다윗의 글입니다. In David: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God remembered that they were flesh, a breath that passeth away, and cometh not again, (시78:39)

 

이 말씀은 광야에서 살(flesh)과 고기(meat)를 탐했던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몸-중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육(flesh)에 대한 그들의 갈망은 그들은 그저 육-중심, 몸 수준 보상만 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speaking of the people in the wilderness desiring flesh, because they were corporeal; their desiring flesh represented that they desired only things corporeal (Num. 11:32–34).

 

32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33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34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민11:32-34)

 

 

575.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라는 표현은, 그들이 남겨진 신앙의 리메인스(remains), 신앙의 흔적들(traces)을 가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전 장 3절과 4절에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그들의 때(times)와 상태(states)를 상징한다(cf. AC.482, 487-488)는 것과, 태고인들은 그 교회의 상태와 상태 변화들(cf. AC.487:2)을 상징하기 위해 숫자들의 서로 다른 조합들을 사용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지금은 그들이 그 교회와 관련된 일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던 그 숫자 조합 방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That by the days of man being a hundred and twenty years is signified that he ought to have remains of faith, appears from what has been said in the foregoing chapter (Gen. 5:3–4), concerning “days” and “years” signifying times and states; and also from the circumstance of the most ancient people from numbers variously compounded signifying states and changes of states in the church; but the nature of their ecclesiastical computation is now totally lost.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3-4)

 

본 절 이 ‘백이십 년’이라는 표현에 나오는 숫자 역시 같은 방식이며, 그래서 그 의미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one, 1)에서 ‘열둘’(twelve, 12) 및 기타 등등 그 각각의 숫자에 감춰진 의미들부터 먼저 알지 않고서는 말입니다. Here in like manner numbers of years are mentioned, whose signification it is impossible for anyone to understand, unless he be first acquainted with the hidden meaning of each particular number from “one” to “twelve,” and so on.

 

분명한 건, 그 안에 뭔가 비밀스러운 게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백이십 년’이라는 인간의 수명과 선행절들하고는 맞지가 않기 때문이며, 홍수 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봐도 사람들이 딱 백이십 년만 산 게 아닙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셈의 경우,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라고 되어 있고,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은 후, ‘사백삼 년’을, 셀라는 에벨을 낳은 후, ‘사백삼 년’을, 에벨은 벨렉을 낳은 후, ‘사백삼십 년’을, 그리고 노아는 홍수 후, ‘삼백오십 년’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It plainly appears that they contain within them something else that is secret, for that men were to live a “hundred and twenty years” has no connection with the preceding part of the verse, nor did they live one hundred and twenty years, as is evident from the people after the flood (chapter 11), where it is said of Shem that “he lived after he begat Arphaxad five hundred years”; and that Arphaxad lived after be begat Selah “four hundred and three years”; and that Selah lived after he begat Eber “four hundred and three years”; and that Eber lived after he begat Peleg “four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that Noah lived after the flood “three hundred and fifty years” (Gen. 9:28), and so on.

 

그러나 숫자 ‘백이십’(one hundred and twenty, 120) 안에 들어있는 의미는 ‘’(ten, 10)과 ‘열둘’(twelve, 12)의 의미로만 나타나는데, 이 둘이 곱해져서 백이십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들 숫자를 이루는 숫자 성분들의 상징으로부터, ‘백이십 년’은 신앙의 리메인스를 상징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But what is involved in the number “one hundred and twenty,” appears only from the meaning of “ten” and “twelve,” which being multiplied together make one hundred and twenty,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se component numbers it may be seen that “one hundred and twenty” signifies the remains of faith.

 

말씀에서 숫자 ‘’은 ‘십분의 일’(tenths, tithes 십일조)과 함께 리메인스를 상징하고 표현합니다. 이 리메인스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속사람 안에 보관되는데, 이것은 오직 주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한편, 숫자 ‘열둘’은 신앙, 혹은 신앙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숫자 ‘백이십’이 이들 숫자 성분들의 조합으로 신앙의 리메인스를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The number “ten” in the Word, as also “tenths,” signify and represent remains, which are preserved by the Lord in the internal man, and which are holy, because they are of the Lord alone; and the number “twelve” signifies faith, or all things relating to faith in one complex; the number therefore that is compounded of these, signifies the remains of faith.

 

 

576. 숫자 ‘’, 그리고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에 나오는 다음 구절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number “ten,” and also “tenths,” signify remains,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passages of the Word:

 

9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10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Many houses shall be a desolation, great and fair, without an inhabitant; for ten acres of vineyard shall yield one bath, and the seed of a homer shall yield an ephah, (사5:9-10)

 

영적, 천적인 것들이 황폐해지는 것에 관한 본문입니다. ‘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는 영적인 것들의 리메인스가 아주 보잘 것 없을 것을,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는 천적인 것들의 리메인스 또한 그럴 것임을 상징합니다. speaking of the vastation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ten acres of vineyard making a bath” signifies that the remains of things spiritual were so few; and “the seed of a homer yielding an ephah” signifies that there were so few remains of things celestial.

 

같은 이사야 본문입니다. In the same: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And many things are forsaken in the midst of the land, yet in it shall be a tenth part, and it shall return, and nevertheless it shall be consumed; (사6:12-13)

 

여기 ‘이 땅 가운데에’는 속사람을, ‘그 중에 십분의 일이’는 그 리메인스가 아주 적음을 상징합니다. where the “midst of the land” signifies the internal man; a “tenth part” signifies the smallness of the remains.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10너희는 공정한 저울과 공정한 에바와 공정한 밧을 쓸지니 11에바와 밧은 그 용량을 동일하게 하되 호멜의 용량을 따라 밧은 십분의 일 호멜을 담게 하고 에바도 십분의 일 호멜을 담게 할 것이며 14기름은 정한 규례대로 한 고르에서 십분의 일 밧을 드릴지니 기름의 밧으로 말하면 한 고르는 십 밧 곧 한 호멜이며 (십 밧은 한 호멜이라)Ye shall have balances of justice, and an ephah of justice, and a bath of justice: the ephah and the bath shall be of one measure, the bath to contain the tenth of a homer, and an ephah the tenth of a homer; the measure thereof shall be after the homer; and the ordinance of oil, a bath of oil, the tenth of a bath out of a kor, ten baths to the homer, for ten baths are a homer; (겔45:10-11, 14)

 

이 구절에서는 여호와의 거룩한 속성들을 도량형 용어들을 써서 표현하되, 신성한 퀄러티들은 각기 다른 카테고리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여기 ‘’(ten, 10)은 천적,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영적 리메인스를 상징합니다. 여기 나오는 도량형 용어들과 관련 숫자들이 만일 그 안에 무슨 감춰진 신성한 속뜻이 없다면 뭐하러 이렇게 장황하게 기록했겠습니까? 이것은 하늘의 예루살렘과 새 성전을 다루는 에스겔 45장과 그 앞장들에도, 그리고 다른 예언서들과 유대 종교의 다양한 의식, 의전들에도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in this passage the holy things of Jehovah are treated of by measures, whereby are signified the kinds of the holy things; by “ten” are here signified the remains of celestial and of the derivative spiritual things; for unless such holy arcana were contained herein, what could be the use or intent of describing so many measures determined by numbers, as is done in this and the former chapters in the same prophet, where the subject is the heavenly Jerusalem and the new temple?

 

[2] 아모스입니다. In Amos:

 

2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3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The virgin Israel is fallen, she shall no more rise. Thus saith the Lord Jehovih, The city that went out a thousand shall have a hundred remaining, and that which went out a hundred, shall have ten remaining to the house of Israel, (암5:2-3)

 

리메인스 본문입니다. 리메인스 중에서도 가장 적은 리메인스가 남는다는 내용인데요, ‘십분의 일의 일’, 즉, 리메인스의 리메인스만 남는다는 말씀입니다. where, speaking of remains, it is said that very little would be left, being only a “tenth part,” or remains of remains.

 

계속해서 아모스입니다. Again:

 

8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 여호와가 당신을 두고 맹세하셨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에 가득한 것을 원수에게 넘기리라 하셨느니라 9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 I abhor the pride of Jacob and his palaces, and will shut up the city, and its fullness, and it shall come to pass if there shall be left ten men in one house they shall even die, (암6:8-9)

 

리메인스가 거의 남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speaking of remains which should scarcely remain.

 

모세의 글입니다. In Moses: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An Ammonite or Moabite shall not come into the congregation of Jehovah, even the tenth generation of them shall not come into the congregation of Jehovah to eternity; (신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신앙의 천적, 영적 신성모독을 상징하며, 그들의 ‘리메인스’에 관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cf. AC.468, 530, 560-561) an Ammonite and a Moabite” signify the profanation of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the “remains” of which are spoken of in what precedes.

 

[3]십일조’(tenths, tithes) 또한 리메인스를 표현한다는 사실은 앞에서 다룬 내용을 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Hence it appears also that “tenths” represent remains.

 

십일조 내용이 말라기에도 이렇게 있습니다. And so in Malachi: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Bring ye all the tithes [tenths] into the treasure house, that there may be booty in my house, and let them prove me, bestir ye in this, if I will not open for you the cataracts of heaven, and pour you out a blessing; (말3:10)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는 속사람 안에 있는 리메인스를 상징합니다. 리메인스는 ‘양식’(booty, plunder)에 비유되는데요, 수많은 악과 거짓 가운데 슬며시 넣어두는 스텔스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리메인스를 통해 모든 복이 옵니다. that there may be booty in my house” signifies remains in the internal man, which are compared to “booty,” because they are insinuated as by stealth among so many evils and falsities; and it is by these remains that all blessing comes.

 

모든 사람의 체어리티가 그 속사람 안에 있는 리메인스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은 유대 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그들이 모든 십일조 드리기를 마쳤을 때에, 그들은 그 십일조를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야 했습니다. That all man’s charity comes by the remain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was also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is statute: that when they had made an end of tithing all the tithes, they should give to the Levite, to the stranger, to the fatherless, and to the widow. (신26:12 seq.)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신26:12)

 

[4] 리메인스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까닭에, 십일조 또한 ‘여호와의 성물’로 불립니다. 모세의 글입니다. Inasmuch as remains are of the Lord alone, therefore the tenths are called “holiness to Jehovah”; as in Moses:

 

30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31또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 All the tenths of the land, of the seed of the land, of the fruit of the tree, they are Jehovah’s, holiness to Jehovah: all the tenths of the herd and of the flock, whatsoever passeth under the shepherd’s rod, the tenth shall be holiness to Jehovah. (레27:30-31)

 

십계명이 ‘’ 계명, 혹은 ‘’ 가지 말로 되어 있는 것과, 여호와께서 그것을 돌판에 쓰신 것은 리메인스를 상징하며, 그것을 여호와의 손으로 쓰신 것은 리메인스는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이라는 거, 그리고 그것을 돌판에 쓰신 것은 리메인스를 속사람 안에 두셨음을 각각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That the Decalogue consisted of “ten” precepts, or “ten” words, and that Jehovah wrote them on tables (Deut. 10:4), signifies remains, and their being written by the hand of Jehovah signifies that remains are of the Lord alone; their being in the internal man was represented by the tables.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신10:4)

2021-08-08(D1)-주일예배(AC.572-576, 창6,3), '나의 영이 영원히..., 육신이 됨이라, 백이십 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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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eqGLJl1yy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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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6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Genesis 6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547. 저세상 삶 안으로 들어오는 영혼들 모두가 천국과 천국 기쁨의 본질에 관하여 무지합니다. The souls who come into the other life are all ignorant of the nature of heaven and of heavenly joy.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기쁨을 다음과 같은 것일 거라고 아무렇게나 가정하는데요, 자기들이 어떤 삶을 살았든, 심지어 자기들이 이웃을 증오하며 살았든, 간음과 간통의 삶을 살았든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그런 것으로 말이지요. 사람들의 이런 모습은 그들 대부분이 천국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곧, 천국은 상호 순결한 사랑의 나라이며, 천국의 기쁨은 그런 사랑에서 나오는 행복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Very many suppose it to be a kind of joy into which any can be admitted no matter how they have lived, even those who have borne hatred against their neighbor and have passed their lives in adulteries, being quite unaware of the fact that heaven is mutual and chaste love, and that heavenly joy is the derivative happiness.

 

 

548. 저는 세상에서 갓 들어온 신참 영들과 영원한 삶의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은 이 나라의 주님이 누구시며, 이 나라의 속성과 형태에 관해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꼭 아셔야 하는데요, 그것은 마치 이 세상에서도 다른 나라에 가는 사람들은 특별히 그 나라의 왕이 누구며, 어떤 사람인지, 그 나라 정부는 어떤 정부인지 등등 그 나라에 속한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여기는 이제 여러분이 영원히 살아가게 될 나라로서 여러분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I have sometimes spoken with spirits fresh from the world concerning the state of eternal life, telling them how important it was for them to know who is the Lord of that kingdom, and what is the nature and form of its government, just as those in this world who go into another kingdom are especially interested to know who and of what sort is the king, what is the nature of the government, and many other things that belong to the kingdom; and how much more should they be interested in this kingdom, where they are to live forever.

 

저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님은 천국과 유니버스 둘 다를 다스리시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하나를 다스리시는 분이 다른 쪽도 다스리셔야 하기 때문인데요, 여러분이 지금 있는 이 나라는 주님의 나라이며, 이 나라의 법은 영원한 진리들이고, 그 모든 것은 하나의 위대한 법, 곧 사람들은 주님을 무엇보다도 사랑해야 하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법, 심지어 지금은 자기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는 법에 베이스를 두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천사가 되고 싶으면, 여러분은 이 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I told them that the Lord alone rules both heaven and the universe, for he who rules the one must rule the other; and that the kingdom in which they were now is the Lord’s kingdom, the laws of which are eternal truths, all of which are based on the one great law that men shall love the Lord above all things and their neighbor as themselves, and now even more than themselves, for if they would be as the angels this is what they must do.

 

이 모든 말을 듣고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아직 몸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이런 종류의 말들을 계속해서 들었지만 계속해서 안 믿었기 때문입니다. To all this they could make no reply, because in their bodily life they had heard something of the kind, but had not believed it.

 

그들은 천국에 이런 사랑이 있다는 사실과,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 그동안 알고는 있었는데, 여기 와보니 여기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사람이 이웃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들을 듣고는 경이로워했습니다. They marveled that there is such love in heaven, and that it is possible for anyone to love his neighbor more than himself, seeing that they had heard that they were to love their neighbor as themselves.

 

그러나 그들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저세상에서는 모든 선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된다는 것과, 몸 안에 있는 삶은, 사람이 몸의 일 안에 있을 수밖에 없는 태생적 이유로, 이웃을 자기 몸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게 만든다는 것, 그러나 이런 몸을 벗게 되면, 사랑은 더욱 순수해지다가 마침내 천사처럼 사랑하게 되는데, 이 사랑은 이웃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But they were instructed that in the other life all goods are immeasurably increased, and that the life in the body is such that men can go no further than loving the neighbor as themselves because they are in the things of the body, but that when these are removed, the love becomes purer, and at last angelic, which consists in loving the neighbor more than themselves.

 

이런 사랑의 가능 여부는 다음과 같은 실제 예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가령, 먼저, 결혼애입니다. 이것은 결혼한 배우자가 크게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 대신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들한테서 볼 수 있는 사랑입니다. 다음은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입니다. 어머니는 자기 자녀의 배고픔을 자기가 대신 담당, 유일한 식량을 흔쾌히 자녀에게 먹이고, 자기는 기꺼이 굶주림을 선택합니다. 이것은 심지어 새나 짐승들도 같습니다. 신실한 우정을 통해서도 이런 사랑을 볼 수 있는데요, 친구를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참된 우정을 흉내 내는, 짐짓 정중함을 가장한 꾸민 우정에서조차 그렇습니다. 심지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큰소리치며 하더라도 좋게 대하며, 더 나은 것으로 제공하면서 말이지요. The possibility of such love is evident from the conjugial love that exists with some persons, who would suffer death rather than let their married partner be injured; and also from the love of parents for their children, in that a mother will endure starvation rather than see her infant hunger, and this even among birds and animals; and likewise from sincere friendship, in that perils will be undergone for our friends; and even from polite and feigned friendship, that would emulate real friendship in offering the better things to those to whom we wish well, making great professions even when they do not come from the heart.

 

최종적인 예는 바로 사랑 그 자체에 있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에서 기쁨을 발견합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사랑 그 자체를 위해서 말이지요. And finally its possibility is evident from the very nature of love, which finds its joy in being of service to others, not for the sake of self but for the love’s own sake.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 사람들, 그리고 육체적 삶 가운데 이익을 얻기 위해 탐욕적이었고, 욕심 많은 삶을 산 사람들한테는 정말 이해 불가한 것입니다. But all this could not be comprehended by those who loved themselves more than others, and who in the bodily life had been greedy for gain, and least of all by the avaricious.

 

 

549. 천사 같은 상태란 누구나 자신의 진복(眞福, bliss)과 행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그런 것입니다. The angelic state is such that everyone communicates his own bliss and happiness to others.

 

저세상에서는 모든 어펙션들과 생각들을 가장 아름답고 정교하게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지각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기쁨을 모두와, 그리고 모두는 각 개인과 이런 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이렇게 하면, 모두는 마치 자기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된 것 같기 때문입니다. For in the other life there is a most exquisite communication and perception of all the affections and thoughts, so that each person communicates his joy to all, and all to each, so that each one is as it were the center of all.

 

이것이 천국의 형태입니다. This is the heavenly form.

 

이런 이유로, 주님의 나라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행복 또한 더욱 더 커집니다. 천국의 행복은 그 수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왜 천국의 행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And therefore the more there are who constitute the Lord’s kingdom, the greater is the happiness, for it increases in proportion to the numbers, and this is why heavenly happiness is unutterable.

 

모두가 남을 자기보다 더 사랑할 때, 전체는 개인과, 개인은 전체와라는 이런 커뮤니케이션이 있게 됩니다. There is this communication of all with each and of each with all when everyone loves others more than himself.

 

그러나 만일 누가 남보다 자기를 더 이롭게 하기를 원하면 그때부터는 자기 사랑이라는 것이 다스림을 시작합니다. 이 자기 사랑으로부터는 오직 나만, 나만! 이라는 것밖에 다른 아무것도 커뮤니케이션 되는 게 없는데, 이것은 정말 악취 나는, 반칙과 같은 짓입니다. 천국에서는 이런 것이 지각되는 순간, 그는 즉시 추방되고, 거부됩니다. But if anyone wishes better for himself than for others the love of self reigns, which communicates nothing to others from itself except the idea of self, which is very foul, and when this is perceived the person is at once banished and rejected.

 

 

550. 인체 내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나머지 모두를 위한 전체적이고 개별적인 쓰임새에 기여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주님의 나라에서도 그렇습니다. 천국도 한 사람의 인체와 같아서 사실은 ‘그랜드 맨’(the grand man)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Just as in the human body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particular contribute to the general and individual uses of all the rest, so is it in the Lord’s kingdom, which is constituted like a man, and in fact is called the grand man.

 

이런 식으로 그곳 천국의 모두는 더 가깝게든 더 멀리든, 다양한 방법으로 모두의 행복을 위해 서로에게 기여하며, 이 모든 것은 오직 주님이 시작하신 질서에 따라 결과적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In this way everyone there contributes either more nearly or more remotely, and in many ways, to the happiness of all, and this in accordance with the order instituted and consequently maintained by the Lord alone.

 

 

551. 주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광대한 천국으로부터, 그리고 전체적인 유니버스와 그 안 가장 개별적인 구성원들 둘 다와 일대일, 유일한 관계를 맺고 있는 거기 있는 모두로부터 질서, 연합, 서로 사랑, 그리고 행복이 옵니다. 거기 있는 하나하나는 모두의 복지와 행복을 배려하며, 모두 또한 각 개인의 행복을 배려하기 때문입니다. From the universal heaven bearing relation to the Lord, and all there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bearing relation to the very and only being both in the universal as a whole and in its most individual constituents, there comes order, there comes union, there comes mutual love, and there comes happiness; for so each person regards the welfare and happiness of all, and all that of each one.

 

 

552. 천국 모든 기쁨과 행복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주님은 저로 하여금 많은 걸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보여주셨습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That all the joy and happiness in heaven are from the Lord alone, has been shown me by many experiences, of which the following may be related.

 

저는 램프가 달린 램프 스탠드와 꽃처럼 생긴 가장 값진 조명기구들을 주님에 대한 경외함으로 온 힘을 다해 부지런히 빚고 있는 천사 같은 영들을 보았습니다. I saw that with the utmost diligence some angelic spirits were fashioning a lampstand with its lamps and flowers of the richest ornamentation in honor of the Lord.

 

두어 시간 동안 저는 그들이 얼마나 엄청난 수고로 그 모든 것들로 하여금 아름답고, 또 주님을 잘 표현하게 하려고 애를 쓰는지를 허락을 받아 참관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자기들 힘으로 하고 있다 여기고 있었습니다. For an hour or two I was permitted to witness with what great pains they labored to make everything about it beautiful and representative, they supposing that they were doing it of themselves.

 

그러나 저에게 어떤 지각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그들의 힘으로는 그들은 그것을 고안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But to me it was given to perceive that of themselves they could devise nothing at all.

 

마침내 여러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자기들이 이렇게 정말 아름답고, 또 주님을 잘 표현하는 가지가 달린 촛대를 주님을 경외함 가운데 만들었다고 말하며, 그것으로 그들은 진심으로 즐거워하였습니다. At last after some hours they said that they had formed a very beautiful representative candelabrum in honor of the Lord, whereat they rejoiced from their very hearts.

 

그러나 저는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만드는 것은 고사하고 고안조차 하실 수 없으며, 오직 그들을 사랑하시는 주님으로 하신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But I told them that of themselves they had devised and formed nothing at all, but the Lord alone for them.

 

처음에 그들은 이 사실을 거의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밝아져 천사 같은 영들이 되자 그들은 과연 그렇다며 고백했습니다. At first they would scarcely believe this, but being angelic spirits they were enlightened, and confessed that it was so.

 

주님을 표상하는 다른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모든 어펙션과 생각도 그렇고, 천국 모든 기쁨과 더할 나위 없는 행복 역시 그렇습니다. 그것들 중 가장 작은 것조차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는 것입니다. So it is with all other representative things, and with everything of affection and thought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and also with heavenly joys and felicities—the very smallest bit of them is from the Lord alone.

2021-08-01(D1)-주일예배(AC.547-552, 창6 O), '창6 오프닝,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3)'.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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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7JP7Ko94F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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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And he called his name Noah, saying, He shall comfort us from our work, and the toil of ou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창5:29)

 

 

528. ‘노아’는 고대(古代, the ancient)교회를 상징합니다. By “Noah” is signified the ancient church.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라는 표현은 교리를 상징하는데, 이 교리로 말미암아 그동안 왜곡되었던 모든 것이 회복될 것입니다. By “comforting us from our work and the toil of ou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is signified doctrine, whereby what had been perverted would be restored.

 

 

529. ‘노아’는 고대교회 혹은 홍수 후 세 교회인 셈, 함, 야벳의 부모 교회를 상징한다는 내용이, 뒤에 이어지는 페이지들을 보시면 나오는데요, 거기 노아에 대한 내용이 정말 엄청납니다. That by “Noah” is signified the ancient church, or the parent of the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 will appear from the following pages, where Noah is largely treated of.

 

 

530. 본 장에 나오는 이름들은, 앞서 언급한 대로, 교회, 혹은 같은 말이지만 교리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교리를 가지고 존재하고, 또 이름하기 때문이지요. ‘노아’ 역시 그런 식으로, 고대교회를 상징하거나, 혹은 태고교회 교리들 가운데 남은 것을 상징합니다. By the names in this chapter, as we have said, are signified churches, or what is the same, doctrines; for the church exists and has its name from doctrine; thus by “Noah” is signified the ancient church, or the doctrine that remained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교회와 교리를 가지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는 이미 다루어 왔는데요, 즉, 교회와 교리들은 기울어지는데, 신앙의 선과 진리가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까지 기울어지며, 교회가 그 상태, 그 지경에 이르는 것을 말씀에서는 황폐해졌다 합니다. How the case is with churches or doctrines has already been stated, namely, that they decline, until there no longer remains anything of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 and then the church is said in the Word to be vastated.

 

그러나 여전히 리메인스, 혹은 신앙의 선과 진리가 남아 있는 어떤 사람들은 늘 보존되고 있습니다. 신앙의 선과 진리가 이 얼마 안 되는 사람들에게서라도 보존되지 않으면 인류와 천국이 결합하는 일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But still remains are always preserved, or some with whom the good and truth of faith remain, although they are few; for unles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were preserved in these few, there would be no conjunction of heaven with mankind.

 

개인적 차원에서 어떤 한 사람 안의 리메인스를 생각해 보면, 이것이 적을수록 그는 그가 가진 이성과 지식에 관한 것들이 덜 열리며, 덜 밝아집니다. 선과 진리의 빛은 리메인스로부터, 혹은 주님으로부터 리메인스를 통해서 그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 오기 때문입니다. As regards the remains that are in a man individually, the fewer they are the less can the matters of reason and knowledge that he possesses be enlightened, for the light of good and truth flows in from the remains, or through the remains, from the Lord.

 

만일 사람 안에 리메인스가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면 그는 사람이라 할 수 없고, 대신 짐승보다 훨씬 더 끔찍한 그 무엇이 될 수 있습니다. 리메인스가 적을수록 그는 사람이 아니며, 리메인스가 많을수록 그는 사람입니다. If there were no remains in a man he would not be a man, but much viler than a brute; and the fewer remains there are, the less is he a man, and the more remains there are, the more is he a man.

 

리메인스는 마치 밤하늘의 별과 같습니다. 별이 적을수록 별빛은 희미하지만, 별이 많으면, 별빛도 밝은 것처럼 말입니다. Remains are like some heavenly star, which, the smaller it is the less light it gives, and the larger, the more light.

 

태고교회로부터 겨우 남은 것들이 ‘노아’라 하는 교회를 이룬 사람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남은 것은 퍼셉션이 아닌, 온전함에 관한 것이며, 태고교회의 퍼셉션에서 나온 교리에 관한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교회가 이제 주님으로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이 교회는 이전 태고교회와는 본성적으로 완전히 다른 교회이며, 고대교회라 이름하였습니다. 고대라는 것은, 홍수 직전에 존재, 홍수 후 첫 세대 동안 있었던 데서 가져왔습니다. The few things that remained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among those who constituted the church called Noah; but these were not remains of perception, but of perfection, and also of doctrine derived from the things of perception in the most ancient churches; and therefore a new church was now raised up by the Lord, which being of an entirely different native character from the most ancient churches, is to be called the ancient church—ancient from the fact that it existed at the close of the ages before the flood, and during the first period after it.

 

이 교회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을 받아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Of this church, by the Divine mercy of the Lord, more will be said hereafter.

 

 

531.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라는 표현은 교리를 상징하는데, 이 교리로 말미암아 그동안 왜곡되었던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라는 이런 내용 또한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으로 이어지는 페이지들 가운데 보시게 됩니다. That by “comforting us from our work and the toil of ou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is signified doctrine, whereby what had been perverted would be restored, will also appear, of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 following pages.

 

’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이 진리인지를 그들은 고통에 가까운 수고를 하지 않고는 지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By “work” is signified that they could not perceive what is true except with labor and distress.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것은, 그들은 선을 전혀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By the “toil of the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is signified that they could do nothing good.

 

그래서 ‘라멕’을 가리켜 황폐해진 교회라고 합니다. Thus is described “Lamech,” that is, the vastated church.

 

사람이 참(what is true)을, 진리, 진실을 추구하는 것도, 그리고 선을 행하는 것도 ‘일과 손의 수고’가 되는 때는 바로 스스로의 힘으로, 혹은 자신의 것으로 할 때입니다. There is “work and labor of the hands” when, from themselves or from their own, men must seek out what is true and do what is good.

 

이런 사실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곧, 거짓된 것과 악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저주하심’의 의미는 위 245번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That which comes of this is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that is, nothing comes of it but what is false and evil. (But what is signified by “Jehovah cursing,” may be seen above, n. 245.)

 

위로하다’라는 표현은 ‘아들’ 혹은 노아와 관련되는데, 새로운 거듭남, 즉, 새로운 교회, 고대교회를 상징합니다. To “comfort” has reference to the “son,” or Noah, whereby is signified a new regeneration, thus a new church, which is the ancient church.

 

이 교회, ‘노아’는 그래서 쉼과, 그리고 쉼에서 오는 위로를 상징하는데, 이 쉼은 태고교회 때, 주님이 쉬셨던 바로 그 일곱 번째 날의 쉼입니다. (참조, 84 - 88번 글) By this church, or “Noah,” is therefore likewise signified rest, and comfort that comes from rest, just as it was said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it was the seventh day, in which the Lord rested. (See n. 84–88.)

2021-07-25(D1)-주일예배(AC.528-531, 창5,29), '노아, 태고교회의 리메인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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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591-10597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5-26)

 

 

10591. 사람은 그의 내면, 속에 있어서는 죽을 수가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신앙과 사랑에 있어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과 결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Man has been so created that he cannot die in respect to his internal, because he is able to believe in God and also to love God, and thus to be conjoined with God in faith and love;

 

하나님과 결합하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and to be conjoined with God is to live forever.

 

 

10592. 이 내면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This internal is in every man who is born.

 

사람의 외면이라는 것은 신앙과 사랑, 곧 내면에 속한 일들이 이것을 통해서 바깥으로 드러나게 되는, 그런 것입니다. His external is that by means of which he brings into effect the things that belong to faith and love, thus that belong to the internal.

 

내면을 가리켜 ‘소울’이라고 하고, 외면을 가리켜 ‘바디’라고 합니다. The internal is what is called the “soul” and the external is what is called the “body.

 

 

10593. 사람이 세상 살면서 가지고 다니는 외면한테는 세상에서의 쓰임새를 위해 공간이 제공되었습니다. The external which man carries about in the world has been accommodated to uses in the world.

 

사람이 죽을 때 두고 가는 것이 바로 이 외면입니다. This external is what is laid aside when the man dies;

 

그러나 저 세상 삶의 쓰임새를 위해 제공되는 외면은 죽지 않습니다. but the external which has been accommodated to uses in the other life does not die.

 

이 두 번째 외면과 내면을 함께 ‘’이라고 합니다. This latter external together with the internal is called a “spirit”;

 

세상에서 선한 삶을 산 사람은 선한 영과 천사로 a good spirit and an angel if the man had been good in the world;

 

악한 삶을 산 사람은 악한 영이 됩니다. and an evil spirit if he had been evil.

 

 

10594. 저 세상에서 사람의 영은 이 세상 때 모습과 완전히 똑같은 사람 형상입니다. In the other life the spirit of man appears in the human form absolutely as in the world.

 

그는 마치 이 세상 때처럼 보고, 듣고, 말하고, 그리고 느끼는 등 모든 감각들을 즐기기까지 합니다. He also enjoys the capability of seeing, of hearing, of speaking, and of feeling, as in the world;

 

그리고 그에게는 이 세상 때처럼 생각하고, 마음먹고, 그리고 행동하는 능력들까지 제공됩니다. and is endowed with every capability of thinking, of willing, and of acting, as in the world.

 

한 마디로, 그는 모든 면에서 사람입니다. 단지 그가 세상 살 때 그를 두르던 육중한 몸으로 다시 두르지 않은 점만 빼고 말입니다. In a word, he is a man in respect to each and all things, except that he is not encompassed with that gross body with which he was encompassed in the world.

 

이것은 그가 죽을 때 뒤에 남겨두고 가는 것이며, 다시는 되살려 다시 두르지 않는 것입니다. This he leaves behind when he dies, nor does he ever resume it.

 

 

10595. 이것이 부활이 의미하는 삶의 연속입니다. It is this continuation of life which is meant by resurrection.

 

사람들은 믿기를, 자기들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 부활하지 않으며, 세상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은 소멸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믿는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감각적인 사람들은 생명 그 자체를 육체에 두기 때문이고, 그들은 이 육체가 다시 살지 않으면 사람은 그걸로 그냥 끝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men believe that they will not rise again until the last judgment, when also every visible thing of the world will perish, is that they have not understood the Word, and that sensuous men place the very life itself in the body, and believe that unless this were to live again it would be all over with man.

 

 

10596. 사후 사람의 삶은 그가 사랑한 삶이며, 그가 신앙한 삶입니다. The life of man after death is the life of his love, and the life of his faith;

 

세상 살면서 그가 사랑한 것들, 그가 신앙한 것들이 결국 그의 삶이 되며, 그런 그의 삶은 사후에도 영원히 남게 됩니다. consequently such as has been his love, and such as has been his faith, during his life in the world, such his life remains forever.

 

지옥은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세상을 사랑한 사람들을 위한 삶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The life of hell is for those who have loved themselves and the world above all things;

 

천국의 삶은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한 사람들을 위한 삶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and the life of heaven for those who have loved God above all things and the neighbor as themselves.

 

이들은 신앙의 사람들이지만, 저들은 신앙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These are they who have faith; but the former are they who have not faith.

 

천국의 삶을 가리켜 영생이라 합니다. 반면, 지옥의 삶은 영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The life of heaven is what is called eternal life; and the life of hell is what is called spiritual death.

 

 

10597. 말씀은 사후에도 여전히 삶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2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The Word teaches that man lives after death, as where it is said that “God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Matt 22:32);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으로 올리웠으나 부자는 지옥으로 던져졌습니다. that after death Lazarus was taken up into heaven, but the rich man was cast into hell (Luke 16:22–23);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이 거기 있습니다. that Abraham, Isaac, and Jacob are there (Matt. 8:11; 22:32; Luke 16:23–25, 29);

 

주님은 도적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말씀 다른 곳들도 사람은 사후에도 삶이 계속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that Jesus said to the thief, “This day shalt thou be with me in paradise (Luke 23:43); and in other pl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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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7-15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 the place thereof. (2:21)

 

 

147. 가슴을 구성하는 뼈들 중 하나인 갈빗대a rib 사람의 고유본성(固有本性, proprium)man’s own 의미합니다. 그 안에는 활기라고는 거의 없지만, there is but little vitality, 그러나 그에게는 정말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indeed an own which is dear to him.

 

살로 대신flesh in the place of the rib 본성 안에 활기가 있는 걸 an own in which there is vitality. 의미합니다.

 

깊이 잠들게a deep sleep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데요, 그는 바로 이 상태에서 the state into which he was let 이 본성의 소유자가 바로 자기 자신인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so that he might seem to himself to have what is his own.

 

이 상태는 잠든 상태와 닮았는데요, 그가 이 상태에 있는 동안은 자기가 살아있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전부 다 자기 스스로 하는 줄로만 알기 때문입니다. he knows not but that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that this is false 알게 되면서부터 그는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잠을 깨며, he is then roused as it were out of sleep,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148. 사람의 고유본성, 실제로 이것은 사람에게는 무척 소중한 건데요, 이것을 what is man’s own 가리켜 갈빗대’, a rib 가슴을 구성하는 뼈들 중 하나인 which is a bone of the chest ‘갈빗대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태고인(太古人, the most ancient people)들 사이에서는 가슴은 이웃을 향한 사랑을 love toward the neighbor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the chest signified charity. 가슴에는 두 가지, 심장과 폐가 the heart and the lungs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뼈는 아주 언짢은 것들을 the viler things 상징했지요. 뼈에는 활기라는 게 거의 없기 a minimum of vitality 때문입니다. 반면, 살은 활기를 띤 그런 것을 가리켰습니다. while flesh denoted such as had vitality.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아케이나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상징들에 관한 건데요, the ground of these significations 이런 아케이나가 앞으로 주님의 신적 자비와 관련되어 계속됩니다.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149. 말씀에서도 bones 사람의 고유본성을 man’s own 상징합니다. 이 본성은 실제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생해지는 그런 본성입니다. an own vivified by the Lord.

 

이사야입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58:11)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66:14)

 

시편입니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35:10)

 

이런 사실은 에스겔에서 더 여전히 분명한데요, 거기서 그는 살이 입혀지고, 그 안에 생기가 들어오는 뼈들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4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37:1, 4-6)

 

[2] 사람의 고유본성은 the own of man 천국에서 봤을 땐 when viewed from heaven 일종의 무슨 뼈마디가 앙상하고, 못 움직이며, 아주 추한, 그래서 마치 그 자체로 죽은 것 같은 as being in itself dead 걸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본성이라 할지라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되면 when vivified by the Lrod 그때는 살처럼 보입니다. it looks like flesh. 그에게는 그 고유본성이라는 것이 어떤 것, 실제로는 전부를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영적 실상으로는 그저 죽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for man’s own is a mere dead thing,

 

그의 안에 무슨 산 것이 있던지 그건 모두 주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이 물러가면 if this were withdrawn 그는 돌덩어리와도 같은 죽은 상태로 전락하게 됩니다. 사람은 그저 생명의 기관일 뿐이며, man is only an organ of life, 기관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고, such as is the organ, 생명의 애정이라는 것 또한 이런 것이기 such is the life’s affection 때문입니다.

 

주님은 홀로 주님의 고유본성, 곧 신성이라는 것을 갖고 계십니다. the Lord alone has what is his own. 이것으로 주님은 인간을 구속하시며, he redeemed man, 이것으로 주님은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he savens him. 주님의 신성은 생명이십니다. the Lord’s own is life. 이 신성으로부터 인간의 본성은, 그 자체로는 죽은 상태이지만, 살아납니다. 주님의 신성은 the Lord’s own 누가복음의 주님 말씀으로 상징되었는데요,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24:39)

 

이것은 또한 유월절 어린양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음을 가지고도 표현되었습니다.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12:46)

 

 

150. 사람의 상태, 곧 그가 자신의 본성 가운데 있을 때, the state of man when in his own, 혹은 그가 자기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when he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그때, 사람의 상태는 깊은 잠deep sleep 비유됩니다. 실제로 고대인들은 이런 상태를 깊이 잠든 상태라 했습니다. 말씀에서도 이런 상태를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라고 하셨고,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로 표현하였습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29:10)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51:57)

 

사람의 본성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며, man’s own is in itself dead, 아무도 스스로는 무슨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no one has any life from himself 사실은 영들의 세계에서는 in the world of spirits 너무나 클리어하게 알려져 온 사실인데요,

 

한번은 자기들의 본성 밖에는 사랑할 줄 모르며, who love nothing but their own, 자기들은 자기들 힘으로 살고 있다 막무가내 주장을 펴는 obstinately insist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악한 영들을 직접 체험을 통해 확인시킨 결과, 결국 자기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사는 게 아니라고 할 수 없이 고백하고 마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저는 허락하심 하에 I have been permitted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사람의 경우는 어떤지를 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 알아볼 수 있었는데요, 저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통해 it has been granted to me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임을 클리어하게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I could think nothing from myself, 대신 모든 아이디어들이 제 안으로 흘러들어 왔습니다. every idea of thought flows in, 저는 이것들이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흘러들어 오는지를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게 틀림없어.’라고 가정하는 사람은 그러므로 거짓 안에 있는 것입니다. in what is false, 또한 그는 그렇게 믿음으로써 그 자신을 모든 악과 거짓 가운데 빠트리게 되는데,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 이것은 만일 그의 믿음이 이런 경우의 진실과 일치하였다면 in accordance with the real truth of the case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그런 것입니다.

 

2021-03-28(D1)-창세기(창2,21, AC.147-151), '뼈, 살, 깊은 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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