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0591-10597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5-26)

 

 

10591. 사람은 그의 내면, 속에 있어서는 죽을 수가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신앙과 사랑에 있어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과 결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Man has been so created that he cannot die in respect to his internal, because he is able to believe in God and also to love God, and thus to be conjoined with God in faith and love;

 

하나님과 결합하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and to be conjoined with God is to live forever.

 

 

10592. 이 내면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This internal is in every man who is born.

 

사람의 외면이라는 것은 신앙과 사랑, 곧 내면에 속한 일들이 이것을 통해서 바깥으로 드러나게 되는, 그런 것입니다. His external is that by means of which he brings into effect the things that belong to faith and love, thus that belong to the internal.

 

내면을 가리켜 ‘소울’이라고 하고, 외면을 가리켜 ‘바디’라고 합니다. The internal is what is called the “soul” and the external is what is called the “body.

 

 

10593. 사람이 세상 살면서 가지고 다니는 외면한테는 세상에서의 쓰임새를 위해 공간이 제공되었습니다. The external which man carries about in the world has been accommodated to uses in the world.

 

사람이 죽을 때 두고 가는 것이 바로 이 외면입니다. This external is what is laid aside when the man dies;

 

그러나 저 세상 삶의 쓰임새를 위해 제공되는 외면은 죽지 않습니다. but the external which has been accommodated to uses in the other life does not die.

 

이 두 번째 외면과 내면을 함께 ‘’이라고 합니다. This latter external together with the internal is called a “spirit”;

 

세상에서 선한 삶을 산 사람은 선한 영과 천사로 a good spirit and an angel if the man had been good in the world;

 

악한 삶을 산 사람은 악한 영이 됩니다. and an evil spirit if he had been evil.

 

 

10594. 저 세상에서 사람의 영은 이 세상 때 모습과 완전히 똑같은 사람 형상입니다. In the other life the spirit of man appears in the human form absolutely as in the world.

 

그는 마치 이 세상 때처럼 보고, 듣고, 말하고, 그리고 느끼는 등 모든 감각들을 즐기기까지 합니다. He also enjoys the capability of seeing, of hearing, of speaking, and of feeling, as in the world;

 

그리고 그에게는 이 세상 때처럼 생각하고, 마음먹고, 그리고 행동하는 능력들까지 제공됩니다. and is endowed with every capability of thinking, of willing, and of acting, as in the world.

 

한 마디로, 그는 모든 면에서 사람입니다. 단지 그가 세상 살 때 그를 두르던 육중한 몸으로 다시 두르지 않은 점만 빼고 말입니다. In a word, he is a man in respect to each and all things, except that he is not encompassed with that gross body with which he was encompassed in the world.

 

이것은 그가 죽을 때 뒤에 남겨두고 가는 것이며, 다시는 되살려 다시 두르지 않는 것입니다. This he leaves behind when he dies, nor does he ever resume it.

 

 

10595. 이것이 부활이 의미하는 삶의 연속입니다. It is this continuation of life which is meant by resurrection.

 

사람들은 믿기를, 자기들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 부활하지 않으며, 세상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은 소멸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믿는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감각적인 사람들은 생명 그 자체를 육체에 두기 때문이고, 그들은 이 육체가 다시 살지 않으면 사람은 그걸로 그냥 끝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men believe that they will not rise again until the last judgment, when also every visible thing of the world will perish, is that they have not understood the Word, and that sensuous men place the very life itself in the body, and believe that unless this were to live again it would be all over with man.

 

 

10596. 사후 사람의 삶은 그가 사랑한 삶이며, 그가 신앙한 삶입니다. The life of man after death is the life of his love, and the life of his faith;

 

세상 살면서 그가 사랑한 것들, 그가 신앙한 것들이 결국 그의 삶이 되며, 그런 그의 삶은 사후에도 영원히 남게 됩니다. consequently such as has been his love, and such as has been his faith, during his life in the world, such his life remains forever.

 

지옥은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세상을 사랑한 사람들을 위한 삶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The life of hell is for those who have loved themselves and the world above all things;

 

천국의 삶은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한 사람들을 위한 삶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and the life of heaven for those who have loved God above all things and the neighbor as themselves.

 

이들은 신앙의 사람들이지만, 저들은 신앙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These are they who have faith; but the former are they who have not faith.

 

천국의 삶을 가리켜 영생이라 합니다. 반면, 지옥의 삶은 영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The life of heaven is what is called eternal life; and the life of hell is what is called spiritual death.

 

 

10597. 말씀은 사후에도 여전히 삶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2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The Word teaches that man lives after death, as where it is said that “God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Matt 22:32);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으로 올리웠으나 부자는 지옥으로 던져졌습니다. that after death Lazarus was taken up into heaven, but the rich man was cast into hell (Luke 16:22–23);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이 거기 있습니다. that Abraham, Isaac, and Jacob are there (Matt. 8:11; 22:32; Luke 16:23–25, 29);

 

주님은 도적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말씀 다른 곳들도 사람은 사후에도 삶이 계속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that Jesus said to the thief, “This day shalt thou be with me in paradise (Luke 23:43); and in other pl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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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7-15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 the place thereof. (2:21)

 

 

147. 가슴을 구성하는 뼈들 중 하나인 갈빗대a rib 사람의 고유본성(固有本性, proprium)man’s own 의미합니다. 그 안에는 활기라고는 거의 없지만, there is but little vitality, 그러나 그에게는 정말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indeed an own which is dear to him.

 

살로 대신flesh in the place of the rib 본성 안에 활기가 있는 걸 an own in which there is vitality. 의미합니다.

 

깊이 잠들게a deep sleep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데요, 그는 바로 이 상태에서 the state into which he was let 이 본성의 소유자가 바로 자기 자신인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so that he might seem to himself to have what is his own.

 

이 상태는 잠든 상태와 닮았는데요, 그가 이 상태에 있는 동안은 자기가 살아있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전부 다 자기 스스로 하는 줄로만 알기 때문입니다. he knows not but that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that this is false 알게 되면서부터 그는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잠을 깨며, he is then roused as it were out of sleep,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148. 사람의 고유본성, 실제로 이것은 사람에게는 무척 소중한 건데요, 이것을 what is man’s own 가리켜 갈빗대’, a rib 가슴을 구성하는 뼈들 중 하나인 which is a bone of the chest ‘갈빗대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태고인(太古人, the most ancient people)들 사이에서는 가슴은 이웃을 향한 사랑을 love toward the neighbor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the chest signified charity. 가슴에는 두 가지, 심장과 폐가 the heart and the lungs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뼈는 아주 언짢은 것들을 the viler things 상징했지요. 뼈에는 활기라는 게 거의 없기 a minimum of vitality 때문입니다. 반면, 살은 활기를 띤 그런 것을 가리켰습니다. while flesh denoted such as had vitality.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아케이나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상징들에 관한 건데요, the ground of these significations 이런 아케이나가 앞으로 주님의 신적 자비와 관련되어 계속됩니다.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149. 말씀에서도 bones 사람의 고유본성을 man’s own 상징합니다. 이 본성은 실제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생해지는 그런 본성입니다. an own vivified by the Lord.

 

이사야입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58:11)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66:14)

 

시편입니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35:10)

 

이런 사실은 에스겔에서 더 여전히 분명한데요, 거기서 그는 살이 입혀지고, 그 안에 생기가 들어오는 뼈들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4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37:1, 4-6)

 

[2] 사람의 고유본성은 the own of man 천국에서 봤을 땐 when viewed from heaven 일종의 무슨 뼈마디가 앙상하고, 못 움직이며, 아주 추한, 그래서 마치 그 자체로 죽은 것 같은 as being in itself dead 걸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본성이라 할지라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되면 when vivified by the Lrod 그때는 살처럼 보입니다. it looks like flesh. 그에게는 그 고유본성이라는 것이 어떤 것, 실제로는 전부를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영적 실상으로는 그저 죽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for man’s own is a mere dead thing,

 

그의 안에 무슨 산 것이 있던지 그건 모두 주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이 물러가면 if this were withdrawn 그는 돌덩어리와도 같은 죽은 상태로 전락하게 됩니다. 사람은 그저 생명의 기관일 뿐이며, man is only an organ of life, 기관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고, such as is the organ, 생명의 애정이라는 것 또한 이런 것이기 such is the life’s affection 때문입니다.

 

주님은 홀로 주님의 고유본성, 곧 신성이라는 것을 갖고 계십니다. the Lord alone has what is his own. 이것으로 주님은 인간을 구속하시며, he redeemed man, 이것으로 주님은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he savens him. 주님의 신성은 생명이십니다. the Lord’s own is life. 이 신성으로부터 인간의 본성은, 그 자체로는 죽은 상태이지만, 살아납니다. 주님의 신성은 the Lord’s own 누가복음의 주님 말씀으로 상징되었는데요,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24:39)

 

이것은 또한 유월절 어린양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음을 가지고도 표현되었습니다.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12:46)

 

 

150. 사람의 상태, 곧 그가 자신의 본성 가운데 있을 때, the state of man when in his own, 혹은 그가 자기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when he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그때, 사람의 상태는 깊은 잠deep sleep 비유됩니다. 실제로 고대인들은 이런 상태를 깊이 잠든 상태라 했습니다. 말씀에서도 이런 상태를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라고 하셨고,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로 표현하였습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29:10)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51:57)

 

사람의 본성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며, man’s own is in itself dead, 아무도 스스로는 무슨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no one has any life from himself 사실은 영들의 세계에서는 in the world of spirits 너무나 클리어하게 알려져 온 사실인데요,

 

한번은 자기들의 본성 밖에는 사랑할 줄 모르며, who love nothing but their own, 자기들은 자기들 힘으로 살고 있다 막무가내 주장을 펴는 obstinately insist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악한 영들을 직접 체험을 통해 확인시킨 결과, 결국 자기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사는 게 아니라고 할 수 없이 고백하고 마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저는 허락하심 하에 I have been permitted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사람의 경우는 어떤지를 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 알아볼 수 있었는데요, 저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통해 it has been granted to me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임을 클리어하게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I could think nothing from myself, 대신 모든 아이디어들이 제 안으로 흘러들어 왔습니다. every idea of thought flows in, 저는 이것들이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흘러들어 오는지를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게 틀림없어.’라고 가정하는 사람은 그러므로 거짓 안에 있는 것입니다. in what is false, 또한 그는 그렇게 믿음으로써 그 자신을 모든 악과 거짓 가운데 빠트리게 되는데,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 이것은 만일 그의 믿음이 이런 경우의 진실과 일치하였다면 in accordance with the real truth of the case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그런 것입니다.

 

2021-03-28(D1)-창세기(창2,21, AC.147-151), '뼈, 살, 깊은 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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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6-130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scientia]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126. 이 말씀들은 방금 설명한 말씀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상징합니다. , 주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퍼셉션으로 진리와 선을 숙지해 가는 것은 허락하시지만 it is allowable to become acquainted with what is true and good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 자아와 세상으로 말미암은 걸로는 금하신다는 but not from self and the world; 의미입니다. , 센스와 메모리, 곧 감각과 지식에 속한 것들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들을 탐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we are not to inquire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 그랬다가는 신앙의 천적인 면들이 the celestial of faith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127. 신앙의 미스터리들, 신비들을 좀 깊이 알아보고자 감각적으로, 그리고 세상을 통해 습득한 지식들을 가지고 접근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태고교회 후손들이 몰락하게 된 원인이 the cause of the fall of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되었고요, 이 내용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됩니다.

 

이런 태도는 또한 지금도 모든 교회가 몰락하는 원인입니다. the cause of the fall of every church 이런 태도에서 모든 거짓들뿐 아니라 삶의 악들 또한 나오기 때문입니다. for hence come not only falsities, but also evils of life.

 

 

128. 세속적이고 육적(肉的)인 사람은 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신앙과 신앙과 관련된 모든 것에 관해 나는 감각으로, 지식으로 내가 직접 보고 이해할 수 없으면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so that I may see, or by means of those of the memory [scientifica], so that I may understand, 안 믿을 거야.’라고 말이지요. , 하나님을 보여 주면 믿겠다는 것이요, 세상의 가르침과 부합해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연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이 서로 반대될 리 없다는 생각으로 by the consideration that natural things cannot be contrary to spiritual. 더욱 굳어집니다. 그 결과, 이 사람은 천적(天的)이며, 신성(神的)에 속한 것을 in what is celestial and Divine, 자신의 육체적 감각으로 배우고자 하게 되는데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 이런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겠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이런 식으로 더 지혜로워지기를 원할수록 그는 사실은 스스로를 더욱 더 장님이 되게 할 뿐이며, 결국에는 그는 아무 것도, 심지어 영적인 어떤 것이 존재한다, 혹은 영생이 존재한다까지도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결과는 처음에 그가 가정했던 원리에서 나오는 것이며, this comes from the priciple which he assumes.

 

이런 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입니다. to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누구든지 먹으면 먹을수록 먹는 그는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고, 결코 세상으로는 아닌 사람은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곧 주님이 말씀에서 언급하신 것들은 모두 반드시 믿어야 해. 그것은 진리이니까!’ 그리고 그는 이 원칙에 맞춰 자기의 사고를 조절합니다. according to this principle he regulates his thoughts.

 

그는 이성, 지식, 감각, 그리고 본능 등의 일들을 가지고 by things of reason, of knowledge, of the senses, and of nature [per rationalia, scientifica, sensualia et naturalia] 점점 더 확신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확신을 주지 못하는 것들은 그는 버립니다. he casts aside.

 

 

129. 인간은 어쩌면 몹시도 거짓된 것일 수 있는, be they ever so false, 그런 원칙들을 스스로 세우고는, 이후 그 원칙들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사실과, 인간은 자기가 세운 그 원칙들을 자기의 모든 지식과 추론을 통해 찬성한다는 all his knowledge and reasoning favor his priciples 사실들을 아마 다들 인정하실 겁니다.

 

분명히 거짓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자기가 세운 이 원칙들을 어떻게든 지지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다 보면 어느 새 이 원칙들이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며, for innumerable considerations tending to support them present themselves to his mind, 그렇게 되면 그는 그만 그것이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확신 가운데 있게 되는 것입니다. thus he is confirmed in what is false.

 

이런 이유로, 두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면 아무 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라는 입장을 하나의 원칙으로 정한 사람은 결코 믿음이라는 것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영적, 천적인 것들은 결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무슨 상상력을 가지고 마음 속으로 그려낼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 참된 질서, 올바른 순서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즉 말씀으로부터 오는 지혜로 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후 모든 것이 뒤를 따르며, 이 사람은 눈이 밝아져 계발되는데 심지어 추론 및 기억-지식의 일들에서도 even in matters of reason and of memory-knowledge [in rationalibus et scientificis] 그렇게 됩니다.

 

주님, 곧 말씀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해서 과학적 지식들을 배우는 것이 금지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지식들은 인간의 삶에 유익하며, 인간의 삶을 아주 즐겁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이 신앙 안에 있다고 해서 nor is he who is in faith 세상에서 무엇을 배우고, 그 배운 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금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이 새로운 원칙, 주님의 말씀을 믿음이라는 원칙으로 해야 하는데요, 그래서 가능한 한, 영적, 천적 진리들을 자연적 진리들을 가지고 확증하되 so far as possible, confirm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s by natural truths, 세상에서 배운 내용들과 친숙한 그런 용어들을 in terms familiar to the learned world. 써서 확증하는, 이런 원칙으로 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의 모든 출발점은 주님이셔야 합니다. 결코 자기 자신이 아니고요. 전자는 생명이지만, 후자는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130. 세상으로 말미암아 지혜롭게 되기를 구하는 사람은 he who desires to be wise from the world 자신의 동산을 위하여 감각 및 기억-지식과 관련된 일들을 추구하여 가집니다. has for his ‘garden’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그에게는 에덴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동쪽은 서쪽, 곧 자기 자신이며,

 

그의 유브라데(Euphrates) 은 그의 모든 기억-지식인데, 이것은 안 좋은 것입니다. which is condemned 그의 두 번째 강앗수르(Assyria)인데, 머리를 굴려 거짓을 지어내느라 정신이 나간 것이고, is infatuated reasoning productive of falsities 그의 세 번째 강', 에디오피아(Ethiopia)는 거기서 나오는 악과 거짓의 원리들인데 그는 이 원리들을 가지고 자기의 신앙 지식들을 삼습니다. 그의 네 번째 강은 거기서 나오는 지혜인데, 말씀에서는 이걸 마술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애굽(Egypt), 이 애굽은 기억-지식을 상징하는데요, 이 지식은 나중에 마술이 됩니다. 이 애굽은 그래서, 말씀에서도 볼 수 있는 거처럼, 자아(self), 곧 스스로 지혜로워지기를 구하는 사람을 he desires to be wise from self 상징합니다. 이와 관련, 에스겔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29:3, 9)

 

이 선지자는 또한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지하에 있는 에덴의 나무들’ trees of Eden in hell 이라 하는데, 거기서 바로, 혹은 애굽인을 다음과 같은 말로 다룹니다.

 

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31:16, 18)

 

여기 에덴의 나무들the trees of Eden 말씀으로 말미암는 지식들을 가리키며, knowledges [scienfifica et cognitiones] from the Word 이 지식을 저들은 추론, 추리들을 통해 모독하는 것입니다. which they profane by reason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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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37, 3월 첫 주 주일입니다. 우리는 매월 첫 주 주일예배 때, 성찬식을 합니다. 하여 오늘은 특별히 성찬에 관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최근 일련의 아케이나 시리즈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는데요,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마주하던 일련의 익숙한 것들이 있습니다. 앞서 다룬 십일조가 그렇고, 안식일이 그렇습니다. 오늘 다룰 이 성찬 또한 그런데요, 이 말고도 주께서 다루게 하실 다른 많은 주제들도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어떤 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편하고 좋은 일입니다. 거기에 그 본래의 의미와 처음 취지를 잃지 않고 지킬 수만 있다면 말이지요.

 

이 아케이나, 곧 속뜻, 숨은 뜻, 비의(秘義)라고도 하며, 영어로는 이너 센스 inner sense, 인터널 센스 internal sense라고도 하는 이 라틴어 아케이나의 의미는, 이것이 가리키는, 이것이 상징하는, 이것에 상응하는 천국의 대상이 무엇이냐, 이 지상의 것은 천국의 무엇과 상응하는가 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 지상에서 생활하면서 이 모든 것의 영적 의미, 천국의 의미를 늘 살필 수 있다면 정말 가장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참된 영성이며,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이 지상 신앙생활이 좌표를 잃고 흔들리거나 세상 세속의 무엇과 적당히 섞여 변질되고 더럽혀지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자비로 우리의 영안이 열리고, 또한 온전히 깨끗하고 순전하게 보존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2626절로 28절입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6:26-28)

 

주님 오시기 전 유대교회는 말하자면 일종의 표상(表象)교회였습니다. 영어로는 the representative church입니다. 교회의 모든 것이 천국의 무엇을 가리키는, 나타내고 상징하는 그런 교회였지요. 성막, 성전이 그렇고, 번제로 대표되는 제사가 그렇고, 각종 절기가 그렇습니다. 많은 상징물들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가리키는 것은 한 분 주님이시며,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그것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모세로 대표되던 이 교회는 그러나 가리키던 그분, 곧 주님이 오시자 그 모든 가리킴들이 중단이 되었고, 그래서 더 이상 표상교회는 계속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 가운데 딱 두 개만 남기셨습니다. 바로 세례(침례)와 성찬이지요. 세례의 경우, 대부분 세례라 하지만 침례교인들은 침례라는 표기를 사용합니다. 원어로는 물 속에 잠기다라는 뜻의 밥티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둘을 병기하겠습니다.

 

이 둘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세례(침례)를 통해서는 사람이 교회의 일원, 패밀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상에 구현된 천국입니다. 교회의 속뜻, 아케이나가 곧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모든 지상의 교회가 정말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성찬을 통해서는 천국의 패밀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정말 지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왜 그런지를 특히 성찬에 대하여 오늘 살펴보겠습니다. 주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빛을 비추사 우리로 밝히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주님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왜 빵을 가지고 가리켜 이것은 내 몸이니라하셨을까요? 위 본문의 은 영어로는 브레드 bread, 곧 빵입니다. 잠시, 말씀에서 빵의 의미, 더 나아가 푸드 food, 곧 먹을 것, 먹을 양식의 의미에 대해서 좀 보겠습니다.

 

아마 이 의미가 제일 먼저 다루어지는 본문들이 창세기 첫 장들이지 싶은데요, 창세기 3장은 그 내용이 참 슬픈 장입니다. 거기서 사람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차례로 뱀과 여자에게 말씀하신 후, 그리고 끝으로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3:19)

 

여기 먹을 것이 바로 빵입니다. 사람이 살 수 있으려면, 곧 생존하려면 기본적으로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바로 의, , 주이지요. 이 가운데 표현상 두 번째가 되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입니다. ‘먹을 것이지요. 지상의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려면 그 몸에 먹을 것’, 곧 빵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사람한테서 식량을 빼앗는 것은 그더러 죽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 주 북한 김정은이 갑자기 북한 내 모든 장마당을 폐쇄하라 명령했습니다. 장마당을 폐쇄하고 대신 국가기관을 활성화해서 국가의 관리를 통해 먹거리와 생필품을 구하도록 하라 지시하여서 지금 북한이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나라가 주민들의 식량을 공평하게 무상급식해 주겠다는 체제가 공산주의인데 이게 잘 안 되어 주민들이 굶어죽게 생겨 자생적으로 생겨난 게 장마당이고, 이 장마당의 활성화로 북한이라는 체제가 근근이 숨을 쉬던 차였는데 이걸 틀어막으려 하니... 아버지 김정일 시대에도 한번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을 아들 김정은이 또 시도하고 있습니다. 큰일입니다. 북한 주민들의 생계가 참으로 막막해졌고, 지금 북한은 그냥 굶어 죽느냐, 죽기를 각오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느냐의 기로에 서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식량, 곧 빵의 본질입니다. 빵은 곧 생명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도 먼저 이 부분부터 건드렸고, 그에 대해 주님도 이렇게 답하신 것입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4:3-4)

 

물론 이 말씀들의 아케이나는 더욱 깊고 다르지만,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하시면서, 사람에게 떡이 곧 생명임을 확인하여 주십니다.

 

지상의 빵이 이처럼 사람에게 생명이듯 천국의 천사들 역시 그들 생명의 음식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천적, 영적인 것들입니다. 지상에서는 빵을 얼굴에 땀을 흘려야얻을 수 있지만 천국 천사들은 주님을 향하여 얼굴을 돌림으로써 얻습니다. 천사들의 양식이 주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모든 천적, 영적인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나오며, 이것으로 천사들이 양식을 삼기 때문에,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6:48, 51)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 곧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 모든 피조물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음을, 주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양식이 되시는 분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주님은 유월절 만찬 때가 아닌 이미 이때 자신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6:51, 53-58)

 

우리의 생명되신 주님을 영원히 찬양합니다. 아멘아멘, 할렐루야!

 

떡과 잔, 브레드 앤드 와인 bread and wine을 주님은 위 말씀처럼 자신이 직접 주님의 살과 피 flesh and blood로 연결시키셨습니다.

 

여기서 하나, 오늘날 교회들은 거의 대부분 성찬 때 잔, 곧 피를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성찬 때 잔, 곧 주님의 피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 곧 신적 진리 Divine Truth입니다. 한 가지 예가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의 피뿌림입니다.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24:6-8)

 

모세가 뿌려 백성에게 입혀진 피는 곧 주님으로부터 나와 우리에게 전달되는 주님의 신적 진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힘입어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애정으로 진리에 담긴 선을 실천하게 되어 진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것이 어떻게 우리로 영생하게 하며, 우리로 위 요한복음 말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가 될 수 있는지, 이 주님의 성찬, 떡과 잔, 살과 피의 아케이나를 살피며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주님이 처음 도입하신 성찬의 목적은 천국의 모든 것, 곧 주님의 모든 것과 교회의 모든 것, 곧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 간 결합입니다. 주님은 천국과 교회가, 주님과 우리가 하나로 결합하게 하시려고 성찬을 도입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앞에서 우리는 성찬을 통해 천국의 패밀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결합, 이 하나됨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집니다.

 

성찬에서 살과 떡 the flesh and the bread은 신적 선 Divine good을 가리키는데, 이 선은 인류 전체를 향하신 주님의 신적 사랑 the Lord’s Divine love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피와 잔 the blood and the wine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 Divine truth를 가리킵니다. 진리는 선을 담는 그릇입니다. 진리라는 그릇 안에 선이 담기는 것이며, 우리는 진리를 통해 선을 알고, 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선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선은 그 안에 주님이 계셔서 주님의 선을 행하는 사람마다 주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신 주님으로부터 마치 해의 열과 빛처럼 선과 진리가 나옵니다. 해의 열이 빛과 융합되어 만물을 소생케 하듯 주님의 선과 진리가 융합되어 모든 피조세계에 생명을 공급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신성이며, 그래서 우리가 성찬 때, 떡과 잔, 곧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거룩하게 참여하면 우리는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생명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렇게 주님과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찬의 떡과 잔, 살과 피는 주님의 선과 진리, 곧 주님의 신성을 가리킨다! 이것이 성찬 떡과 잔의 아케이나입니다.

 

천국의 대기는 주님의 신성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물고기는 아가미 호흡을, 사람은 폐 호흡을 할 수 있어야 각각의 환경에서 살 수 있듯 우리도 천국 생활을 하려면 천국의 대기, 곧 주님의 신성 호흡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럴려면 우리 안에 주님의 신성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곧 이 지상의 삶을 통해 주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그럼 성찬 때 먹고 마시는 떡과 잔, 살과 피가 과연 참된 신앙고백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맞습니다. 당연히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향한 애정으로 주님의 말씀 생활을 하고, 그 말씀을 일상 가운데 실천해야지요. 주님의 진리의 말씀은 참 특별해서 알고 있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절대로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즉 진리의 실천 같은 것엔 도무지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성찬에 참여한들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먹고 마셨으면 반드시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시고, 또 그런 참된 실천, 참된 회심의 삶을 가지고 모든 성찬에 정성을 다해 참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이 참으로 원하시는 기쁜 성찬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성찬에 참여하시는 모든 성도님들께 주님의 생명 안으로 초청이 이루어지는 크고 영원한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youtu.be/1Z9toQlEjP8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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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28, 2월 마지막 주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창세기 22절로 3절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3)

 

오늘은 이 본문과 함께 마침 꼭 기억해야 할 두어 가지가 더 있어 한 설교, 세 주제라는 좀 특별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주께서 결국 하나의 메시지로 묶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먼저 첫 번째입니다.

 

어제는 우리 교회가 지난 201391일 첫 예배를 드린 후부터 꼭 이천 번째 예배를 드린 날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서 숫자를 세는 것은 혹시라도 주님의 공로를 가로채게 될까 봐 무척 조심스럽습니다만 저는 지금까지 다른 건 거의 금했어도 이 예배만큼은 모든 예배에 번호를 붙여가며 정성을 다했습니다. 주님의 오심이요, 함께 하심, 열납하심이었기 때문이며, 매 예배마다 다 다른, 나름의 생명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동행하심과 붙드심을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래 영혼의 근육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시작은 있으나 끝을 보는 일은 거의 없었던 사람이었는데 이런 제가 신대원을 나와 목회자가 되면서 이후 달라지기 시작한 계기들이 있습니다.

 

두어 가지인데, 하나는 제가 개척 전 부사역자로 섬기던 교회에서 교회 건축 관련 1000일 동안 진행된 천일예배 덕분입니다. 당시 교회 미디어 담당자로서 외부 광고 없이 조용히 진행된 이 천일예배 뒷바라지가 무슨 의무도, 책임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제 안에 자원하는 심령이 생기면서 저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이 일을 1000일 동안 녹음, 녹화로, 웹서비스로, 또 모든 메시지들 딕테이션으로 정성을 다해 섬겼습니다. 이 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개인적인 기적과 함께 저는 제 안에 영혼의 근육이 생겼음을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이 근육은 이후 개척 및 수도원 영성에 큰 이정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천일예배를 인도하신,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윤경숙 사모님과 당시 함께 했던, 지금은 사모님이 되신 권윤미 전도사님, 그리고 딕테이션팀으로 섬겼던 이십여 분의 집사님들께 오래전 기억이지만 새삼 진심 어린 감사가 생생하게 일어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다른 하나는, 수도원 영성으로 부름 받아 수도사 공부를 하던 중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접한 것입니다.

 

사막은 물이 없어 사막입니다. 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부터 지금으로 치면 한 10키로 쯤 떨어진 수도원에서 90년을 살았습니다. 그는 날마다 해가 지면 물동이를 들고 그 왕복 20키로의 길을 물을 길으러 다녔습니다. 그는 지쳤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 물 가까운 곳에서 지내고 싶다...’ 그때 무슨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사막의 밤, 자기 말고 누가 있을 리 없는데 말입니다. 그 인기척은 발소리였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천사가 자기를 뒤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순간 엎드리며 소리칩니다. ‘주여, 어찜이신지요?’ 천사가 말합니다. ‘나는 너의 발걸음을 세고 있노라...’ 이 수도사는 크게 깨달았습니다. 이후 그는 자기가 머물던 곳으로부터 8키로를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일화는 제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여 행하는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이 주님과, 그래서 당연히 천국과 연결되어 있음을 제 안에 깊이 각인시켜 준 이야기이며, 이후 결정적일 때마다 저를 다시 일으켜 주었던 참 고마운 격려의 일화입니다.

 

목회자가 예배 한 번 준비하는 일이 사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특히 설교를 해 본 적이 있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것은 정말이지 영혼의 일이며, 심령을 불태우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2000번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진실로 오직 주님의 붙드심과 힘주심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늦게 목회의 길을 걷게 된 저 같은 사람 말고 일찍 헌신하여 묵묵히 걸어오신 선배 목회자들 앞에서는 소위 명함도 못 내밀지만 말입니다. 저는 그저 이만큼이 제 역량이며, 저를 이만큼 키워주신 주님께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또한 함께 한 저희 사모와 자녀들에게도 마음속 깊이 진심으로 감사하지요.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두 번째 주제입니다.

 

오늘은 저의 선친 33주기 기일입니다. 내일은 마침 장인 6주기 기일이고요. 어떻게 양가 바깥 사돈의 기일이 하루 상간이 되었습니다 ^^

 

저희 모친의 경우는 작년이 40주기였습니다. 어느덧 40년이 지나 52녀 대부분의 자녀들이 그만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되어버렸지요. 지금은 증손까지 다 합쳐 팔십! 그렇다 보니 이제는 형제모임 한번 하기가 보통 일이 아닌 게 되어서 지난 40년 동안 모였던 친가쪽 형제모임을 작년을 끝으로 마치기로 하였습니다. 처가쪽은 이제 6주기라 여전히 모일 수 있지만 마침 코로나로 인해 작년과 올해, 이 마저 여의치 않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선친 기일이 다가오면, 그리고 사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오히려 더 늘 생각나는 생전 말씀 한 마디, ‘사람은 제 할 도리만 다 하면 된다...’ 이 말씀이 생각나는 오늘입니다.

 

사실 저희 선친께서는 어린 시절 궁핍한 삶에 배움이 없으셨습니다. 선친의 생전 삶에 관해 어린 시절 토막토막 들었던 것이 전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감탄케 하셨던 선친의 생전 모습들이 생각나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부산에서 육이오 피난살이를 하던 중 동네 권사님을 통해 교회 출석을 시작하셨던 아버지... 그러나 사실은 평양 대부흥의 때인 1907년에 출생, 황해도 황주 및 해주 사시며, 젊어서 평양 갔다가 무슨 집회에 참석, 그때 무슨 시냇가에서 이미 침례를 받으셨던 아버지이십니다.

 

배움은 없으셨으나 세상 경험과 타고난 눈썰미가 남다르셔서 독일서 건너온 무슨 중장비마저 대충 보고 조립해 내실 정도였습니다.

 

생전 보시던 두꺼운 신구약 성경이 아직도 서재 한쪽에 꽂혀 있는데요, 어머니 먼저 보내시고 8년 동안 늘 소리 내어 읽으시던 성경입니다.

 

한창 혈기왕성하여 세상을 비판하며 어둡고 부정적이었던 저에게, 나지막히 타이르시며 늘 권하시던 말씀, ‘얘야, 세상 이렇다 저렇다, 사람 이렇다 저렇다 할 거 없다. 사람은 그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자기 할 도리만 다하면 된다...’ 그 말씀을 듣는 청년 시절 저는 말씀 그대로 사시는 아버지 모습에 아무 대꾸도, 반박도 할 수 없었습니다.

 

목회자로서 늘 새기는 말씀이 있습니다.

 

단에 오를 땐 산 만큼만 말하고, 단에서 내려올 땐 말한 만큼 살아라...’

 

선친께서는 무슨 배움도, 아무 신학도 안 하신 분이 이런 걸 어떻게 깨우치셨을까요! 이제 육십에 접어드는 저는 여전히 한참 멀었음을 깨닫습니다.

 

세 번째, 오늘 본문입니다.

 

창세기 첫 장들은 전통적으로 실제 천지창조의 기술로 이해했습니다. 글자 그대로로, 겉뜻 그대로로 이해한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듯 말씀 또한 그렇다는 걸 알게 되면서 말씀 또한 그렇게 이해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도 옷처럼 입고 있는 이 육보다 그 안의 영이 진짜인 것처럼, 말씀도 겉뜻인 글자, 문자의 뜻보다 그 안에 담긴 속뜻이 참 의미인 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말씀의 속뜻, 영어로는 인터널 센스 internal sense 라고 하는 이 속뜻을 가리켜 라틴어로 아케이나라 하며, 그 의미는 천계비의(天界秘義)’, ‘천국의 비밀정도가 되겠습니다.

 

아케이나로 본 창세기의 첫 장들은, 아니 성경 전체는 사실,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내용이며, 그래서 창조 첫 육일간의 기록을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을 여섯 단계로 나눈 것으로 이해합니다. 특별히 창세기 1장은 영적 인간을, 창세기 2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선 거듭남의 관점으로 본 세 종류의 사람, 혹은 사람의 세 가지 상태 이야기를 좀 해야 하는데요, 이미 몇 번 말씀을 드려서 어느 정도 이해들을 하시겠지만 잠깐 다시 상기시켜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죽은 사람 a dead man 입니다. 죽은 사람은 진리와 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acknowledges nothing to be true and good 사람, 대신 오직 육체와 세상 the body and the world 에 속한 것만 잘 아는 사람, 그런 걸 아주 좋아하는 adores 사람입니다.

 

다음은 영적 인간 a spiritual man 입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 천적 진리와 선을 아는 acknowledges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원리 a principle of faith 로만 압니다. 그의 모든 행위의 기반은 이런 신앙 원리 같은 거에 있습니다. 사랑이 아니고 말입니다.

 

끝으로, 천적 인간 a celestial man 입니다. 천적 인간은 영적, 천적 진리와 선을 믿고, 지각하는 perceives 사람입니다. 이 지각한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으로만, 행위가 뒤따르는 신앙으로만 주님을 신앙하고, 그런 신앙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또 이렇게도 구분합니다.

 

죽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오직 육체적, 세상적인 목표만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삶이 무엇인지도, 주님이 누구신지도 모릅니다. 혹시 알게 되어도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들의 경우는 영원한 삶, 영생입니다. 영생을 추구하다 보니 그 결과,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천적인 사람들은 바로 처음부터 주님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알다 보니 그 결과,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 영생을 선물로 받는 사람들입니다.

 

천적 인간들의 삶의 목표와 순서는 영적 인간들의 삶의 목표 및 순서랑 정확히 정반대입니다.

 

영적 전투라는 측면으로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삶 가운데 전투가 있을 때, 즉 선악 간 싸움이나 진리, 거짓 간 싸움으로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면 거진 다 매번 집니다. 그렇지 않을 때, 즉 전투가 없을 때는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하며, 그래서 그는 그들의 종이 됩니다. 그의 묶임은 겉으로 드러나는데, 예를 들면, , 목숨, , 소득, 명성 등 소위 안전한 삶을 위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그런 형태로 나타납니다.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심지어 자기는 거듭남 가운데 있다고 믿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되시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며 소위 신앙생활을 한다 하면서도 사실은 위와 같은 묶임 가운데 있으시다면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해보셔야 합니다. ‘내가 과연 정말 거듭남의 여정 가운데 있는 건지, 내 삶에 참된 회심, 진정한 거듭남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영적 인간은 전투가 있어도 늘 승리합니다. 이 경우가 참된 회심 가운데, 진정한 거듭남 가운데 있으시다 할 수 있겠습니다. 영적 인간에게 있어서 묶임은 내적 묶임이며, 양심의 묶임, 속박이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전투가 없습니다. 악과 거짓의 무슨 난폭한 공격이 있어도 그는 그것들을 경멸, 무시해 버리며, 그래서 그는 정복자, 이긴 자라 불립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이긴 자가 바로 이들입니다. 그는 정말 그 무엇도 그를 속박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유하며, 그에게 있어 굳이 속박이라 하면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지각능력이지 싶습니다. 차원이 다른 속박이요, 묶임입니다.

 

, 이 정도의 배경이 있으면 창세기 첫 장들의 아케이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하이라이트는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입니다. 안식은 히브리어로 싸바스 a sabbath 이며, 그 뜻은 입니다. 곧 주님이 일곱째 날에 쉬셨다, 쉬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이제야 주님이 쉬실 수 있게 된 건가요?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은 유전 악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악한 영들이 찾아옵니다. 마치 악취 나는 배설물에 똥파리 꼬이듯 말이지요. 이때 찾아오는 악한 영들은 각 개인의 악의 특성에 따라 다 다릅니다. 소위 주파수가 맞아야 하고, 코드가 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악한 영들은 이 사람 모르게 은밀히 활동하면서 한순간도 쉬지 않으면서 이 사람을 지옥으로 끌어당깁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은 이런 실상 가운데 있는 사람을 사랑하셔서 이번에는 선한 영들과 천사들을 보내십니다. 악한 영들이 지옥으로 끌어당기는 딱 그만큼 이번에는 이들을 통해서 천국으로, 주님한테로 끌어당기십니다. 사람은 딱 그 중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에 영적 전투, 곧 선악 간 싸움과 진리, 거짓 간 전투가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

 

영적 전투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선천적으로 싸울 능력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주님이 대신 싸워 주셔야 하며, 우리가 하는 것은 그저 늘 주님 편에 서는 것, 늘 주님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는 정도입니다. 다음 주님 말씀은 영적 전투에 관한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8)

 

이 말씀은 주님이 우리 안에서 치러지는 영적 전투를 대신 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덕지덕지 붙은 악을 주님이 대신 떼어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님한테로 가는 것뿐입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하기만 하면, 바로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 천사들도 항상 주님을 향하여 얼굴을 돌린다고 합니다. 천국 천사들도 늘 그렇다고 한다면 하물며 지상에 사는 우리는 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듭남의 단계가 진행될수록 처음엔 우리를 좌지우지했던 악한 영들이 점점 맥을 못 씁니다. 우리의 의지가 점점 더 주님 쪽으로 기울기 때문이며, 점점 더 주님을 사랑하여 무슨 선택을 하며, 말을 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져서 더욱 성숙해져 가면 우리는 그만큼 더 주님을 사랑하게 되며, 즐겁게 선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는 악한 영들이 무슨 말로 우리를 꾀어도 더 이상 안 통합니다. 이쯤 되면 이제 악한 영들은 우리를 포기합니다. ‘, 이 사람은 더 이상 되돌릴 가망이 없다. 이미 선을 넘었다. 괜히 헛수고 말고 그만 철수하자...’

 

할렐루야! , 이때가 바로 악한 영들이 물러가는 때이며, 이때가 바로 평생 우리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모든 매임에서 풀려나는 때입니다. 더 이상 싸움을 거는 상대가 없어지니 이제 더 이상 싸울 일도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때 비로소 주님은 우리 안에서 안식하십니다. 쉬실 수 있게 되신 겁니다. 우리를 믿고 안심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안식일의 아케이나입니다. 일곱째 날의 비밀입니다. 안식일은 그래서 비밀이며, 말할 수 없는 기쁨이며 영광입니다. 맨 처음 혼돈과 공허, 흑암 가운데 있던 인생을 주님은 그 사람 일평생 포기하지 않으시고, 힘주시며, 끝없이 품으시고 격려하셔서 결국 이 안식의 상태, 일곱째 날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모든 공로는 홀로 주님의 것이며, 그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주님의 권면입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58:13-14)

 

십계명, 십성언 중에도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20:8-11)

 

주님의 말씀입니다.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28)

 

안식일의 아케이나를 기억하여 먼저 힘써 우리 자신 일곱째 날, 곧 안식일 되기를 힘쓰며, 또 이 일곱째 날을 거룩히 지켜야 할 것입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유튜브 바로가기 : youtu.be/sxrC3JliQ5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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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우안(右眼) 수술 등, 38일 만에 유튜브 주일설교를 재개하게 되었습니다. 기다려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 오늘은 221, 2월 셋째 주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2323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3:23)

 

오늘 이 본문과 또 십일조 관련, 몇몇 말씀들을 가지고, 과연 십일조의 참된 영적 의미, 아케이나는 무엇일까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마침 오늘은 우리 큰애 우석이의 만 31세 생일이며, 또 큰애 결혼 100일째 되는 날입니다. 신기합니다. 앞으로 해마다 큰애는 자기 결혼기념일로부터 딱 100일째 되는 날이 자기 생일이 되었어요! ㅎㅎㅎ... ^^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혼을 그것도 풍요롭게 벼락같이 하고는 또 평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부모로서 여전히 지금도 꿈만 같고 이 모든 게 어찌됨인가 생각하며 주님께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또 저희 이 오늘 주일예배가 지난 199391, 바로 이 자리, 바로 아파트 집 저희 거실에서 창립개척예배를 처음 드린 후, 1995번째 드리는 예배이므로 다음 주말이면 2000번째 예배를 드리게 될 것 같아 요즘 곰곰이 지난날을 회상함과 함께 우리 큰애에게 찾아온 이 큰 복을 생각하면서 마음속 떠오르는 몇 가지가 있지만 그중 특별한 한 가지, 곧 큰 아이의 헌금생활, 특별히 십일조 생활이 떠올라 오늘 그 말씀을 좀 나누고자 합니다.

 

작년 11, 큰애 결혼 즈음하여 많은 지인들께 큰애의 결혼 소식을 전하는 멘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리둥절함 가운데 조용히 이해되어지는 바는,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우석이 지난 7년 동안, 부모님이 하시는 이 아파트 집 교회를 한결같이 섬겼습니다. 박사과정 중에 조금 나오는 그걸 가지고, 거기서 또 십일조에, 엄마 생활비에, 뭐에 뭐에... 아무리 바빠도 해외출장과 늘청(늘사랑교회 청년국) 수련회 때 외에는 늘 주일예배를 지키며, 아버지와 함께 특송을 올려드렸지요...

 

, 맞습니다. 이 내용 그대로입니다. 자기 앞가림 및 자기 앞날, 장래 장가갈 비용마련 등 생각해야 할 게 많았을 텐데도 우석이는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주님께 맡기며, 당장 현 상황 현재의 자리에서 주님과 부모님 앞에 자기의 할 도리를 다하기로 마음을 정하고는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외길을 걸었지요.

 

가끔 몇 달 십일조 및 생활비가 안 들어와 혹시 아이가 마음이 바뀌었나 보면 나중에 한꺼번에 들어오는 겁니다. 무슨 사정으로 프로젝트 대금이 이제야 들어왔다고요. 이 사이 아이는 그날그날 식비도 마땅치 않아 그냥 빵 한 쪽에 정수기 물만 먹을 때도 있었다는 말에 부모의 마음이 찢어질 때도 있었습니다...

 

주님의 호흡은 보통이 십 년이신가 봅니다. 주님이 사람의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기본 단위가 말입니다. 결심만 잘하는 사람보다는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 황소처럼 묵묵히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 그것도 십 년을 한결같이 그렇게 하는 사람의 마음을 인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마저도 그 마음이 정결해야 계속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마음을 주님으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하여튼 저는 육십 평생에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주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우리 큰아들은 나이 삼십에 인정을 받으며, 복 받는 것을 보면서, , 요셉이 저랬겠구나! , 다니엘이 저랬겠구나 싶습니다. 주님을 찬양하오며, 형의 이런 축복의 생생한 현장을 아우 준석이도 곁에서 보면서 준석이 우리 둘째도 동일한 복 받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이런 이유 등으로 오늘은 특별히 우리의 헌금생활 중 십일조에 대하여, 그 아케이나(arcana, 秘義, 속뜻)에 대하여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십일조에 관한 거의 첫 본문이라 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창세기 14, 아브람이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드린 부분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14:17-20)

 

여기 20,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에 나오는 이 십분의 일에 관하여, 창세기 주석 아케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38번 글을 보면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십일조(tithes)가 리메인스(remains)를 상징한다, 가리킨다는 사실은 앞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리메인스라는 것은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선행, 인애)의 모든 상태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의 모든 상태, 이웃 사랑의 모든 상태들을 말하며,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순진함(innocence)과 평화(peace)의 모든 상태, 곧 천국의 모든 상태이며, 주님은 이런 상태, 이런 리메인스를 거듭남의 과정을 걷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이 상태들이 사람에게 그 유아기 때부터 주어져 어른이 되면서 점점 줄어들지만 그러다가 거듭남이 시작되면 사람은 다시 이번에는 새로운 리메인스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입니다. 사람이 진정 사람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리메인스로부터, 또는 리메인스에 의해서이며, 만약 사람에게 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상태가 없다면, 그래서 결국 순진함의 상태가 없다면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며, 그때는 오히려 짐승보다도 더 최악이 됩니다. 사람은 순진함이 있어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생명의 다른 상태들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말하는 리메인스는 시험을 이김으로써 얻는 리메인스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싸워 이긴 후, 멜기세덱에게 바친 십일조를 가지고 이 리메인스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 리메인스는 사랑의 모든 상태, 곧 사랑의 모든 천적인 것들인데, 주님도 인성을 입고 계신 동안은 지속적인 싸움과 이김을 통해서 힘들게 습득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주님은 끊임없이 주님의 신적 본성과 결합하셨고, 같은 방식으로 주님의 인성이 사랑, 곧 생명 그 자체, 곧 여호와가 되실 때까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좀 어렵지 않으신지요... 스베덴보리의 글들은 천계(天界), 초월적 지혜의 나라의 일을 매우 제한적인 지상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는지 원문은 사실 이보다 더 간략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 글과 글 사이 무슨 배경지식이 없으면 한 번에 이해하기가 다소 좀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위 주석을 제가 이해한 바로 좀 쉽게 풀이하자면...

 

모든 사람은 거듭남의 유무와 관계없이 일단은 주님으로부터 첫 번째 리메인스라는 것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어떻게든 결국 선 쪽으로 기울어지는데요, 물론 사람들 중에는 끝까지 주님을 거절하여 선보다는 악을, 천국보다는 지옥을 선택, 결국 멸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말입니다. 주님의 이 첫 번째 선물로 말미암아 사람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하며, 일단 거듭남이 시작되면 이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두 번째 리메인스를 또 선물로 받습니다. 이 선물로 말미암아 사람은 생명, 곧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발자국을 떼는 것이지요. 사람은 주님의 선물, 주님의 호의, 주님의 돌보심 없이는 결코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탐욕과 거짓의 덩어리, 곧 악의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입니다. 사람 안에 주님이 넣어 두신, 주님으로 말미암은 이 리메인스라는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십분의 일로 표현된,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십일조라 일컫는 것이 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무슨 이쁜 짓을 하고, 무슨 기특한 행실을 보일 수 있는 것도 다 우리 안에 넣어 두신 이 리메인스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것으로 멜기세덱, 곧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공경하였습니다. ‘주님, 이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으로 제가 롯을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사례한 것입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아케이나입니다.

 

이 멜기세덱 본문을 보다 더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돌라오멜, 소돔왕, 그리고 롯과 아브람의 속뜻, 아케이나가 무엇이며, 그들 간 전쟁과 그 결과, 그리고 멜기세덱과 그가 들고 온 떡과 포도주의 아케이나가 무엇인지 등을 알아야 하지만 그것은 내용이 깊어지므로 다음에 기회 있을 때 정식으로(?) 다루기로 하고요, 여기서는 간략히만 말씀드리면...

 

주님도 인성을 입고 오셔서 처음에는 외견상의 선과 진리(apparent good and truth), 겉으로 보기엔 선이요, 진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닌 것, 가짜인 것들과 끊임없이 싸우셨습니다. 그것이 아브람과 그돌라오멜 간 전쟁입니다. 아브람은 주님의 합리성(合理性, rationality), 그돌라오멜은 외견상 진리를, 롯은 주님의 겉사람을 각각 가리킵니다. 겉사람과 합리성은 같이 있어야 하는데 겉사람이 합리성을 떠나 가짜 진리에게 사로잡힌 것을 롯이 아브람을 떠나 소돔에 있다가 그돌라오멜에게 사로잡힌 것으로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주님이 이 가짜들과 싸워 이기신 후, 주님의 겉사람이 속사람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온전히 인도된 것을 아브람이 롯을 데리고 멜기세덱을 만난 것과 그의 떡과 포도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 여기서는 이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간략하게라도 소개를 하고 넘어가는 것은, 말씀(the Word)은 정말 철저하게 상응(相應, correspondence)으로 기록되었다는 것과 그래서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은 아케이나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 1428, 29절입니다.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 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4:28-29)

 

십분의 일을 가지고 주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말씀하시는 본문입니다. 주님은 이 십분의 일을 가지고 레위인과 객,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십니다. 이들은 겉뜻으로도 그렇지만 속뜻으로도 영적 결핍을 뜻합니다. 주님은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들이 주님이 주시는 두 번째 리메인스를 가지고 이런 영적 결핍을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거듭남의 여정 가운데 있는 우리는 정말 그래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에게 있는 이 영적 결핍들을 돌아보고 채워주는 일에 이 두 번째 리메인스를 열심히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아브라함의 십일조 본문을 통해, 그리고 오늘 주님 말씀 마태복음 본문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먼저, 십일조를 드린다, 십일조 헌금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헌금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넣어주신 선한 능력, 리메인스를 잘, 그리고 열심히 사용하여 더욱 주님으로부터 더욱더 많은 리메인스가 우리 속사람 안에 공급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개념이 아닌, 주님의 것이 우리 안에 쌓이는 개념입니다.

 

말라기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3:10)

 

여기 시험하여증명하여’(prove, verify)라는 뜻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라, 증명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주님은 우리 안에 더욱 더 넘치게 주님의 리메인스를 공급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넘치는 리메인스로 우리는 더욱 더 쉽게 거듭남의 여정, 곧 영적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내 것을 드리는 게 아니라 사실은 주님의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리메인스라는 것을 우리는 두 번 다 거저 받았습니다. 우리가 악을 이겨 낼 근본 능력을 우리도 모르게 주님께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것으로 살며, 영적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사실은 모두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시인하며 사는 삶은 복된 삶이며,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게 되며, 우리가 드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 안에 리메인스로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오늘 본문, 주님 말씀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3:23)

 

박하와 회향, 근채의 십일조는 외적인 십일조입니다. 정의와 긍휼, 믿음의 십일조는 내적인 십일조입니다. 이 둘은 같이 갑니다. 외적 십일조는 내적 십일조가 겉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의 신앙이 온전할 수 없고, 반대로 온전한 신앙의 사람이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디 주님 말씀처럼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않는그런 온전한 신앙생활들을 하시기를, 그래서 주님 약속하신 저 놀라운 말씀들이 우리 큰아들처럼 생생히 이루어지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알려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 수년간 힘쓰던 유튜브에서의 활동을 무슨 사정으로 앞으로는 저의 개인 블로그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유튜브를 아주 닫는 건 아니지만 여기 유튜브에는 주일설교나 아주 특별한 것만 올리고, 대부분의 컨텐츠는 이렇게 비디오나 오디오 형태가 아닌 주로 글과 문서의 형태로 저의 블로그에 올리고자 합니다.

 

많은 양해 바라며, 아래 제 블로그 주소가 있으니 찾아와 둘러보시고 여전히 도움들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bygrac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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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 설교 유튜브 주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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