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5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And Mahalalel lived after he begat Jar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Mahalalel were eight hundred ninety and five years; and he died. (창5:16-17)

 

※ 16, 17절 속뜻

 

 

 

512. 이 표현들은 앞의 비슷한 표현들과 같은 의미입니다. It is the same with these words as with the like words before.

 

팔백구십오(895)라는 숫자가 문자 그대로 실제로 895년을 뜻하는 게 아닌, 어떤 긴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주님은 게난에 이어 마할랄렐로 이어지는, 점점 더 안 좋은 쪽으로 기울어지는 시대의 흐름을 그대로 허용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편의상, 구백 년으로 보면, 실제로는 그 이상이었겠지만, 거의 천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인물과 사건, 사상의 부침이 있었을 텐데도, 노아의 홍수라는 종말을 향해 유유히 흘러가는 그 장강, 대하의 물결을 주님은 의도적으로 간섭하시거나 개입하셔서 강제로 돌리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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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15절,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Verse 15,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 15절 속뜻

 

 

 

510. ‘마할랄렐’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다섯 번째 교회를, ‘야렛’은 여섯 번째 교회를 각각 상징합니다. By “Mahalalel” is signified, as before said, a fifth church; by “Jared” a sixth.

 

 

511. 퍼셉션 능력의 감소와, 이 능력이 더욱 예리해지거나 뚜렷해지는 대신 오히려 평범해지거나 모호해졌을 때, 사랑 혹은 쓰임새의 삶(생명) 또한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랑 혹은 쓰임새의 삶(생명)의 모습이 퍼셉션 능력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As the perceptive faculty decreased, and from being more particular or distinct, became more general or obscure, so also did the life of love or of uses; for as is the life of love or of uses, so is the perceptive faculty.

 

선에서 진리를 아는 것이 천적(天的, celestial)입니다. ‘마할랄렐’이라는 교회를 구성하던 사람들은 진리에서 큰 기쁨 얻는 것을 그 진리를 사용함으로써 맛보는 기쁨보다 더 좋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이런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제가 영계에 있을 때, 마할랄렐 때 사람과 같은 사람들을 만나봄으로써 알게 된 것입니다. From good to know truth is celestial; the life of those who constituted the church called “Mahalalel” was such that they preferred the delight from truths to the delight from uses, as has been given me to know by experience among their like in the other life.

 

참고로,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은 곧 주님 자신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주님의 선을 행할 뿐인데 사람들은 거기서 주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퍼셉션은 선이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그들의 심비(心碑)에 심으셨기 때문인데, 그들의 조상, 곧 태고교회 첫 교회인 아담교회가 거듭남을 완성하여 안식에 들어간 천적 인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을 통해 선과 진리를 알았으면 이제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퍼셉션의 생명이 시작되며,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주석이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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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Kenan were nine hundred and ten years; and he died. (창5:13-14)

 

※ 13, 14절 속뜻

 

 

 

508. 여기 ‘날’과 ‘해’의 수, 곧 햇수는 앞서와 같은 상징들을 갖습니다.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have the same signification here as before.

 

여기 ‘자녀’ 또한 진리와 선을 상징합니다. 이 교회 사람들에게도 역시 퍼셉션이 있었지만, 그러나 이들은 앞 세 교회보다 더 일반적으로만 취급했습니다. “Sons and daughters” here also signify truths and goods, whereof the members of the church had a perception, but in a more general manner.

 

즉, 덜 소중하게, 시큰둥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점점 더 자기를 사랑하게 되어 자기들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이 퍼셉션 능력을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퍼셉션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뜻에 아주 예민한 상태로 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주님보다 자기와 세상을 더 사랑하고픈 사람에게는 이 천부적 재능처럼 불편한 재능도 아마 없었지 싶습니다...

 

그가 ‘죽었다’라는 것은 이런 퍼셉션의 상태가 멈춘,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 그런 것을 상징합니다. That he “died” signifies in like manner the cessation of such a state of perception.

 

 

509. 여기서 꼭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은 교회의 상태와 어떻게 관련되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It is here only to be remarked, that all things are determined by their relation to the state of the church.

 

모든 천사가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듯 모든 사람은 가장 작은 형태의 교회입니다. 모든 천사와 사람은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를 담는 그릇입니다. 모든 것은 그가 주님의 신성을 얼마나 담고 있느냐로 결정되며, 그렇게 교회의 상태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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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12절,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Verse 12,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 12절 속뜻

 

 

 

506. ‘게난’은 네 번째 교회를, ‘마할랄렐’은 다섯 번째를 각각 상징합니다. By “Kenan” is signified a fourth church, and by “Mahalalel” a fifth.

 

 

507. ‘게난’이라 하는 교회는 퍼셉션에 관한 한, 보다 더 완전한 교회인 위 세 교회 중 하나로 여겨질 정도는 아닙니다. 이들 세 교회는 퍼셉션에 있어 서로 구별될 정도였지만 지금은 평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열매나 씨의 핵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첫 번째 막과도 같이 말이지요. 이런 상태는 사실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어지는 후속 교회들, 예를 들면, ‘에녹’, ‘노아’라 하는 교회들에 관한 설명을 보면 분명히 다른 상태입니다. The church called “Kenan” is not to be so much reckoned among those three more perfect ones, inasmuch as perception, which in the former churches had been distinct, began now to become general, comparatively as are the first and softer membranes relatively to the kernel of fruits or seeds; which state is not indeed described, but still is apparent from what follows, as from the description of the churches called “Enoch” and “No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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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sh lived after he begat Kenan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sh were nine hundred and five years; and he died.

 

※ 10, 11절 속뜻

 

 

 

504. 여기 ‘날’(days) 및 ‘해’(years)의 수, 그리고 ‘자녀’ 및 ‘죽음’ 역시 앞에서 다룬 것들과 같은 것들을 상징합니다. Here in like manner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and also “sons and daughters,” and his “dying,” signify like things.

 

 

505. ‘에노스’는 앞서 본 대로 세 번째 교회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의 일원입니다. 그러나 ‘셋’보다 덜 천적이며, 그래서 퍼셉션에 있어 덜한 교회입니다. ‘셋’ 역시 그 부모 교회인 ‘아담’ 교회보다 덜 천적이며, 퍼셉션에 있어 덜한 교회였습니다. “Enosh,” as before observed, is a third church,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but less celestial, and consequently less perceptive, than the church “Seth”; and this latter was not so celestial and perceptive as the parent church, called “man.”

 

이들 세 교회를 일컬어 함께 태고교회라고는 하지만, 태고교회는 그 후속 교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매 혹은 씨앗의 핵에 해당하고, 반면, 이어지는 후속 교회들은 상대적으로 그 열매의 막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These three are what constitute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relatively to the succeeding ones, was as the kernel of fruits, or seeds, whereas the succeeding churches are relatively as the membranaceous parts of th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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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9절,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Verse 9,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 9절 속뜻

 

 

 

500.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에노스’는 ‘셋’ 교회보다도 덜 천적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태고교회의 일원인 세 번째 교회를 상징합니다. ‘게난’은 먼저 교회인 에노스를 계승한 네 번째 교회를 상징합니다. By “Enosh,”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third church, still less celestial than the church “Seth,”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by “Kenan” is signified a fourth church, which succeeded the former ones.

 

 

501. 세월이 흘러 서로 부모-자식으로 연결된 교회들, 그래서 이 교회가 저 교회에서 나왔다 말할 수 있는 교회들에 관하여, 이럴 경우, 그것은 마치 열매들 혹은 그 씨앗들의 경우와 같습니다. As regards the churches that in course of time succeeded one another, and of which it is said that one was born from another, the case with them was the same as it is with fruits, or with their seeds.

 

이것들의 한 가운데, 즉, 그 가장 안쪽에는 말하자면, 열매들의 열매들, 혹은 씨앗들의 씨앗들이 있고, 이로 말미암아, 그 이어지는 부위들이 순서대로 생명을 받습니다. In the midst of these, that is, in their inmosts, there are as it were fruits of the fruits, or seeds of the seeds, from which live as it were in regular order the successive parts.

 

가장 안쪽인 중심에서 가장 바깥쪽인 둘레를 향하여 멀면 멀수록 열매 혹은 씨앗의 본질, 그들 안에 있는 본질이 흐릿해져서 결국 그 열매나 씨앗이 종료되는 최종 껍질밖에 남지 않습니다. For the more remote these are from the inmost toward the circumference, the less of the essence of the fruit or of the seed is there in them, until finally they are but the cuticles or coverings in which the fruits or seeds terminate.

 

아니면 이번엔 사람의 두뇌의 경우입니다. 두뇌 가장 안쪽 파트는 대뇌 피질이라 하는 아주 섬세한 조직들로 형성되며, 거기서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혼(soul)의 활동이 전개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순서대로 아주 순수한 막들 및 아주 촘촘한 막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다가 최종 뇌수막이라 하는 일반적인 막들에서 끝나다가, 결국 가장 일반적인, 전체를 싸는 막, 곧 두개골에서 마칩니다. Or as in the case of the brain, in the inmost parts of which are subtle organic forms called the cortical substances, from which and by which the operations of the soul proceed; and from which in regular order the purer coverings follow in succession, then the denser ones, and finally the general coverings called meninges, which are terminated in coverings still more general, and at last in the most general of all, which is the skull.

 

 

502. 이들 세 교회, ‘아담’(사람, man), ‘셋’, ‘에노스’는 함께 태고교회를 구성하면서도, 그러나 퍼셉션에 관한 온전함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앞서 살핀 열매나 씨, 그리고 두뇌의 경우처럼 첫 번째 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그 후속 교회들로 계승되어 내려가다가 점차 줄어들고 평범해져 갔습니다. These three churches, “man,” “Seth,” and “Enosh,” constitute the most ancient church, but still with a difference of perfection as to perceptions: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first church gradually diminished in the succeeding churches, and became more general, as observed concerning fruit or its seed, and concerning the brain.

 

퍼셉션은 처음에는 온전하여 뚜렷이 지각하는 능력이었다가 갈수록 줄어들어 덜 뚜렷하고 더 평범해집니다. 즉, 온전함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런 식으로, 더 모호한 퍼셉션이 더 명료했던 자리를 계승하고, 역시 그런 식으로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Perfection consists in the faculty of perceiving distinctly, which faculty is diminished when the perception is less distinct and more general; an obscurer perception then succeeds in the place of that which was clearer, and thus it begins to vanish away.

 

 

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각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선행에서 나오는 행복과 기쁨으로도 이루어졌습니다. 선을 행할 때 맛보는 이런 행복과 기쁨 없는 퍼셉션 능력에는 아무런 생명이 없습니다. 퍼셉션 능력, 역량이 생명이 있으려면 이런 행복과 기쁨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consisted not only in 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but also in the happiness and delight arising from well doing; without such happiness and delight in doing what is good the perceptive faculty has no life, but by virtue of such happiness and delight it receives life.

 

사랑과 사랑에서 오는 신앙의 생명의 퀄러티, 이것이 바로 태고교회 안에 있던 건데요, 이것이 곧 우리가 쓰임새의 삶을 살고 있거나, 쓰임새 있는 행위를 할 때 오는 선과 진리를 붙잡을 때, 우리에게 허락되는 생명의 퀄러티입니다. 쓸모없는 것 안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쓸모가 없는 것은 거절되기 때문입니다. The life of love, and of the derivative faith, such as the most ancient church enjoyed, is life while in the performance of use, that is, in the good and truth of use: from use, by use, and according to use, is life given by the Lord; there can be no life in what is useless, for whatever is useless is cast away.

 

이런 면에서, 태고인들은 주님의 모양이었고, 그래서 퍼셉션 능력 가운데서 그들은 주님의 형상이 되었습니다. In this respect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likenesses of the Lord, and therefore in perceptive powers they became images of him.

 

퍼셉션 능력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결과적으로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것으로만 기뻐하지 않고, 선과 진리를 행하는 것, 즉, 쓰임새 있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The perceptive power consists in knowing what is good and true, consequently what is of faith: he who is in love is not delighted in knowing, but in doing what is good and true, that is, in being use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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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e hundred and twelve years; and he died.

 

※ 7, 8절 속뜻

 

 

 

499. 여기 ‘날’(days)과 ‘해’(years)는 앞서(cf. 482, 487, 488) 말씀드린 대로, 때(times)와 상태(states)를 상징합니다.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signify here as before the times and states.

 

‘자녀’ 역시 앞서(cf. 489)와 같은 상징을 갖습니다. 그는 ‘죽었더라’(cf. 494)하는 문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ons and daughters” too have the same signification as before; and so likewise as the statement that he “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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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6절,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Verse 6,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 6절 속뜻

 

 

 

496. ‘셋’은 관찰(cf. 481)한 대로, 두 번째 교회이며, 부모 교회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의 일원인 교회입니다. 그가 ‘백오 세를 살았다’는 것은, 앞(cf. 482, 487, 488)에서 보았듯이 그들의 시간(times, 때)와 상태를 상징하며,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라 하는 또 다른 교회가 이어져 내려왔음을 상징합니다. “Seth,” as was observed,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that he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signifies, as before, times and states; that he “begat 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that was called “Enosh.”

 

 

497. ‘셋’은 두 번째 교회요, 부모 교회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의 일원인 교회라는 것은, 위 3절, 셋에 관한 내용(cf. 484, 485)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That “Seth”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may appear from what was said above concerning Seth (verse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앞서 언급해온 대로, 교회들의 경우 서서히,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본질에 있어 위(cf. 494:2)에서 언급한 이유로 인해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The case with churches, as we have said, is that by degrees, and in process of time, they decrease as to essentials, owing to the cause above mentioned.

 

 

498.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라 하는 또 다른 교회가 이어져 내려왔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본 장에서 이름들이 교회 말고 다른 걸 상징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he “begat 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called “Enos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n this chapter the names signify nothing else than chur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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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5절,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Verse 5,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 5절 속뜻

 

 

 

492. 여기 ‘날’(days)과 ‘해’(years, 세)는 위에서처럼 때(횟수)와 상태를, ‘사람의 죽음’은 그런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각각 상징합니다. By “days” and “years” are he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as above; by “man’s dying” is signified that such perception no longer existed.

 

 

493. ‘날’과 ‘해’가 때(혹은 횟수)와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언급 말고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지 싶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는 실제 수량을 나타내는 숫자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숫자들이 그 고유 본성의 끝단, 곧 일상에 필요한 하나하나의 수량을 나타내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면, 달걀 한 판에 얼마, 수도세, 전기세 얼마 등등입니다. 그러나 말씀에서는, 이 숫자들이 그 수량에 맞춰 어떤 추상적 상징을 갖습니다. 예를 들면,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출20:9),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8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10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레25:8, 10),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주님의 열두 제자, 칠십 인의 장로들, 그리고 주님의 칠십 인의 제자들 및 다른 많은 경우들 모두, 이렇게 구체적 숫자가 적용되었을 때 어떤 특별한 추상적 상징들을 갖게 되는데, 그렇게 갖게 된 추상적 상징이 바로 그 숫자가 상징하는 상태입니다. That by “days” and “year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needs no further explication, except to say that in the world there must needs be times and measures, to which numbers may be applied because they are in the ultimates of nature; but whenever they are applied in the Word, the numbers of the days and years, and also of the measures, have a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imes and measures, in accordance with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as where it is said that there are six days of labor, and that the seventh is holy, of which above; that the jubilee should be proclaimed every forty-ninth year, and should be celebrated in the fiftieth; that the tribes of Israel were twelve, and the apostles of the Lord the same; that there were seventy elders, and as many disciples of the Lord; and so in many other instances where the numbers have a special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hings to which they are applied; and when thus abstracted, then it is states that are signified by the numbers.

 

 

494. 그가 ‘죽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런 퍼셉션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라는 뜻임은 ‘죽다’라는 단어의 상징, 즉, 어떤 것이 이전 상태에 더 이상 있기를 멈추다라는 의미임을 볼 때 분명합니다. That he “died” signifies that there was no longer such percep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die,” which is, that a thing ceases to be such as it has been.

 

요한계시록입니다. Thus in John:

 

1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계3:1-2) Un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Sardis write, These things saith he that hath the seven spirits, and the seven stars; I know thy works, that thou art said to live, but art dead; be watchful, and strengthen the things which remain, that are ready to die; for I have not found thy works perfect before God. (Rev. 3:1–2)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머니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으로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으리라 (렘22:26) I will cast out thy mother that bare thee, into another country where ye were not begotten, and there shall ye die, (Jer. 22:26)

 

여기 ‘어머니’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where “mother” signifies the church.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이 교회의 경우, 처음 상태, 정말 깨끗했던 온전함이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고, 퇴색되며, 잃어갔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악의 세습 및 증가였는데, 역대 모든 부모마다 자기가 타고난 악에다 새로운 악을 더했기 때문입니다. For as we have said, the case with the church is that it decreases and degenerates, and loses its pristine integrity, chiefly by reason of the increase of hereditary evil, for every succeeding parent adds new evil to that which he has inherited.

 

부모의 모든 실제적 악은 일종의 본성을 옷 입습니다. 그리고는 종종 재발 시, 그들의 본성이 되고, 그렇게 그들의 유전 악에 더해집니다. 이런 식으로, 자녀들에게 전이되고, 그렇게 후손에게 전해집니다. All the actual evil in the parents puts on a kind of nature, and when it often recurs, becomes natural to them, and is added to their hereditary evil, and is transmitted into their children, and so to posterity.

 

이런 식으로, 유전 악은 후손들에 이르러 엄청나게 증가합니다. In this way the hereditary evil is immensely increased in the descendants.

 

이것이 그렇다는 것은 아이들의 악한 기질이 정확히 그들의 조상의 것과 똑같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this is so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evil dispositions of children are exactly like those of their progenitors.

 

아담으로부터 우리에게 이식되어 유전되어 온 악 외에 다른 유전 악은 없다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완전 거짓입니다. (cf. AC.313) Quite false is the opinion of those who think that there is no hereditary evil except that which they allege to have been implanted in us from Adam (see n. 313).

 

진실은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죄를 실제로 지어 유전 악을 만들며, 그걸 자기가 물려받은 악에다 보태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악은 모든 후손들 가운데 축적되며, 남습니다.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한테서만 줄어드는 거 빼고 말입니다. The truth is that everyone makes hereditary evil by his own actual sins, and adds it to the evils that he has inherited, and in this way it accumulates, and remains in all the descendants, nor is it abated except in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by the Lord.

 

모든 교회마다 이것이 타락, 퇴보의 첫째 원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태고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In every church this is the principal cause of degeneration, and it was so in the most ancient church.

 

 

495. 태고 교회가 어떻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는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태고 교회는 퍼셉션이 있었던 교회였고, 오늘날엔 그런 교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How the most ancient church decreased cannot appear unless it be known what perception is, for it was a perceptive church, such as at this day does not exist.

 

한 교회의 퍼셉션은 이런 것으로 구성됩니다. 곧, 그 교회의 구성원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마치 천사들처럼 선악을 구별합니다. 이 선악은, 사람들 사는 시민 사회의 선악과 같은 것이 아니고, 주님 사랑과 주님 신앙에 속한 선악을 말합니다. The perception of a church consists in this, that its members perceive from the Lord what is good and true, like the angels; not so much what the good and truth of civic society is, but the good and truth of love to the Lord and of faith in him.

 

생활로 확인되는 신앙고백을 통해 퍼셉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From a confession of faith that is confirmed by the life it can be seen what perception is, and whether it has any exist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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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4절,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Verse 4,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 4절 속뜻

 

 

 

486. ‘날’(日, days)은 일반적으로, ‘해’(年, years)는 구체적으로, 각각 때와 상태를 상징하며, ‘자녀’(sons and daughters)는 그들이 지각했던 진리와 선을 상징합니다. By “day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in general; by “years,” times and states in special; by “sons and daughters”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which they perceived.

 

※ 이후, 예를 들어, 영어 복수 표현인 ‘days’에 대한 우리말 번역을 굳이 ‘날들’로 하지 않고 대신 우리에게 익숙한 ‘날’로 하겠습니다. 우리말은 단수, 복수 등에 영어처럼 그렇게 예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은 문맥 상 정황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년’, ‘때’, ‘상태’ 등, 다른 복수 표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87. ‘날’이 일반적으로 때와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을 1장에서 보여드렸는데, 거기 보면, 첫째 날, 둘째 날 등 창조의 ‘날’이 때와 상태 말고 무슨 다른 걸 상징하지 않습니다. That by “day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in general, was shown in the first chapter, where the “days” of creation have no other signification.

 

말씀에서 ‘늘’, ‘항상’(all time)을 ‘날’로 표현하는 건 아주 평범한 일입니다. 지금 이 구절과 이어지는 구절들(5, 8, 11, 14, 17, 20, 23, 27, 31)의 경우가 특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일반적으로 ‘날’ 하면 마찬가지로 때의 상태들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년’이 등장하면, 우르르 등장하는 년들을 통해 상태의 퀄러티, 그러니까 특별한 상태를 상징하게 됩니다. In the Word it is very usual to call all time “days,” as is manifestly the case in the present verse, and in those which follow (5, 8, 11, 14, 17, 20, 23, 27, 31); and therefore the states of the times in general are likewise signified by “days”; and when “years” are added, then by the seasons of the years are signified the qualities of the states, thus states in special.

 

태고인들은 자기들의 숫자들을 가졌는데, 그 숫자들로 그들은 교회와 관련된 다양한 것을 상징했습니다. 그 숫자들은 예를 들면, ‘삼’(3), ‘일곱’(7), ‘열’(10), ‘열둘’(12) 및 이 숫자들과 다른 숫자들 간 합성을 통해 생성되는 많은 숫자들입니다. 그들은 이 숫자들을 가지고 그 교회의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이들 숫자들에는 오랜 시간 설명해야 하는 아케이나가 들어 있습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had their numbers, by which they signified various things relating to the church, as the numbers “three,” “seven,” “ten,” “twelve,” and many that were compounded of these and others, whereby they described the states of the church; wherefore these numbers contain arcana which would require much time to explain.

 

숫자들은 그 교회의 상태들에 대한 일종의 설명 혹은 평가였습니다. It was an account or reckoning of the states of the church.

 

같은 일이 말씀 여러 군데서 발생하는데요, 특히 예언서입니다. The same thing occurs in many parts of the Word, especially the prophetical.

 

유대 교회의 제의들을 보면, 그 안에도 역시 ‘몇 번’(數) 및 ‘어느 정도의 양’(量) 등 숫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번제, 소제, 봉헌물 및 다른 것들과 관련되는 것들인데, 다들 그 드려짐에 따라 성물(聖物)을 상징합니다.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lso there were numbers, both of times and measures, as for instance in regard to the sacrifices, meat offerings, oblations, and other things, which everywhere signify holy things, according to their application.

 

그래서, 여기 ‘팔백’(800)이라는 숫자, 그리고 다음 절, ‘구백삼십’(930) 및 이어지는 구절들에 나오는 햇수들 등에 들어 있는 것들은, 말하자면, 그들 고유의 일반적 상태에 생긴 그들 교회의 상태 변화들인데, 일일이 세기엔 그 수가 너무 많습니다. The things here involved, therefore, in the number “eight hundred,” and in the next verse, in the number “nine hundred and thirty,” and in the numbers of years in the verses following—namely, the changes of state of their church as applied to their own general state—are too many to be recounted.

 

앞으로 다루게 될 부분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으로 숫자 ‘열둘’(12)까지 단순 숫자들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게 될 텐데, 이 숫자들의 상징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이런 합성수의 상징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ake occasion to show what the simple numbers up to “twelve” signify, for until the signification of these is known, it would be impossible to apprehend the signification of the compound numbers.

 

 

488. ‘날’(days)이 일반적인 상태를, ‘해’(years)가 구체적인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 에스겔에 보면 나옵니다. That “days” signify states in general, and “years” states in special, appears from the Word, as in Ezekiel: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겔22:4) Thou hast caused thy days to draw near, and art come even unto thy years, (Ezek. 22:4)

 

혐오스러운 짓을 저지르고, 자기들의 죄를 꽉꽉 채우는 사람들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상태를 일반적으로는 ‘날’로, 구체적으로는 ‘연한’(해, years)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speaking of those who commit abominations, and fill up the measure of their sins, of whose state in general are predicated “days,” and in special “years.”

 

그래서 시편에 So in David:

 

주께서 왕에게 장수하게 하사 그의 나이가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시61:6) Thou shalt add days to the days of the king, and his years a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Ps. 61:6)

 

주님과 주님의 왕국에 관한 말씀 중에, ‘장수’(날)와 ‘나이’(해)로 왕국의 상태를 상징하십니다. speaking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 where also “days” and “years” signify the state of his kingdom.

 

다시 Again: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시77:5) I have considered the “days of old,” the years of the ages, (Ps. 77:5)

 

여기 ‘옛날’은 태고교회의 상태를, ‘지나간 세월’은 고대교회의 상태를 각각 상징합니다. where “days of old” signify state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years of the ages,” states of the ancient church.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사63:4) The day of vengeance is in my heart, and the year of my redeemed is come, (Isa. 63:4)

 

마지막 때에 관한 말씀인데, 여기 ‘원수 갚는 날’은 저주의 상태를, ‘구속할 해’는 행복의 상태를 각각 상징합니다. speaking of the last times, where the “day of vengeance” signifies a state of damnation, and the “year of the redeemed” a state of blessedness.

 

다시 Again: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61:2) To proclaim the acceptable year of the Lord, and the day of vengeance of our God; to comfort all that mourn, (Isa. 61:2)

 

여기 ‘날’과 ‘해’ 모두 상태를 상징합니다. where both “days” and “years” signify states.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여기는 분명히 상태를 의미합니다. where state is plainly meant.

 

[2] 요엘입니다. In Joel:

 

1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욜2:1-2) The day of Jehovah cometh, for it is nigh at hand,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a day of cloud and of obscurity; there hath not been ever the like, neither shall be after it, even to the year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Joel 2:1–2)

 

여기 ‘날’은 ‘어둡고 캄캄한’ 상태, ‘짙은 구름이 덮인’ 상태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도 상징하고, 전체를 일반적으로도 상징합니다. where “day” signifies a state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of cloud and of obscurity, with each one in particular, and with all in general.

 

스가랴입니다. In Zechariah:

 

9내가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10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슥3:9-10) I will remove the iniquity of that land in one day; in that day shall ye cry a man to his companion under the vine, and under the fig tree. (Zech. 3:9–10)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슥14:7) It shall be one day which is known to Jehovah, not day nor night,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Zech. 14:7)

 

여기 역시 상태를 의미함이 분명합니다. 한 날을 가리켜,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하기 때문입니다. where it is plain that state is meant, for it is said that there shall be a day that is “neither day nor nigh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같은 내용이 십계명 표현들 가운데 나옵니다. The same appears from expressions in the Decalogue: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5:16; 25:15) Hono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prolonged, and that it may be well with thee upon the ground, (Deut. 5:16; 25:15)

 

여기 ‘네 날이 길리라’는 것은 생명의 길이가 아닌, 행복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where to have the “days prolonged” does not signify length of life, but a happy state.

 

[3] 겉뜻, 글자의 뜻으로는 ‘날’은 마치 시간인 것처럼 보여야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날’은 상태를 상징합니다. In the literal sense it must needs appear as if “day” signifies time, but in the internal sense it signifies state.

 

천사들은, 그들은 속뜻, 내적 감각 가운데 있는데, 시간이라는 게 뭔지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시간을 구별하게 해주는 해와 달이 없기 때문인데, 그래서 그들은 날이 뭔지, 해가 뭔지를 모르며, 대신 상태와 상태의 변화만 압니다. 그래서 천사들 앞에서는, 그들은 내적 감각 가운데 있기 때문에, 여기 에스겔 구절의 속뜻처럼 무슨 일이든지 시공간에 관련된 것들은 다 사라집니다. The angels, who are in the internal sense, do not know what time is, for they have no sun and moon that distinguish times; consequently they do not know what days and years are, but only what states are and the changes thereof; and therefore before the angels, who are in the internal sense, everything relating to matter, space, and time disappears, as in the literal sense of this passage in Ezekiel:

 

그 날이 가깝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여러 나라들의 때이리로다 (겔30:3) The day is near, even the day of Jehovah is near, a day of cloud; it shall be the time of the nations, (Ezek. 30:3)

 

그리고 요엘서 구절의 속뜻입니다. and of this in Joel: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욜1:15) Alas for the day! For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and as vastation shall it come, (Joel 1:15)

 

‘구름의 날’은 구름, 혹은 거짓을, ‘나라들의 때’는 나라들, 혹은 사악(邪惡, wickedness)을, ‘여호와의 날’은 황폐(荒廢, vastation)를 각각 상징합니다. where a “day of cloud” signifies a cloud, or falsity; the “day of the nations” signifies the nations, or wickedness; the “day of Jehovah” signifies vastation.

 

시간개념이 사라질 때 남는 것은 그때 존재했던 것들에 대한 상태개념입니다. When the notion of time is removed, there remains the notion of the state of the things which existed at that time.

 

본 장에서 아주 자주 언급되는 ‘날’(days)과 ‘해’(years)에 대한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The case is the same with regard to the “days” and “years” that are so often mentioned in this chapter.

 

 

489. ‘자녀’는 그들이 지각했던 진리와 선을 상징하며, 실제로 ‘아들’은 진리, ‘딸’은 선을 각각 상징하고 있음은 예언서 많은 구절을 보면 분명합니다. 말씀, 옛날 이사야를 보면 교회의 잉태와 해산을 가리켜 ‘자녀’라고 합니다. That by “sons and daughters”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which they had a perception of, and indeed by “sons” truths, and by “daughters” goods,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in the prophets; for in the Word, as also in olden time, the conceptions and births of the church are called “sons and daughters,” as in Isaiah: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5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사60:3-5)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lift up thine eyes round about and see; all they gather themselves together and come to thee; thy sons shall come from far, and thy daughters shall be nursed at thy side; then thou shalt see and flow together, and thy heart shall be amazed, and shall be enlarged, (Isa. 60:3–5)

 

위 구절들에서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각각 상징합니다. in which passage “sons” signify truths, and “daughters” goods.

 

[2] 시편입니다. In David:

 

11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12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들과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돌들과 같으며 (시144:11-12) Deliver me and rescue me from the hand of the sons of the stranger, whose mouth speaketh vanity; that our sons may be as plants grown up in their youth, that our daughters may be as cornerstones hewn in the form of a temple, (Ps. 144:11–12)

 

여기 ‘이방인’은 거짓된 진리들이나 거짓들을, ‘우리 아들들’은 진리의 교리들을, ‘우리 딸들’은 선의 교리들을 각각 상징합니다. where the “sons of the stranger” signify spurious truths, or falsities; “our sons” signify doctrinals of truth; “our daughters,” doctrinals of good.

 

[3]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6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8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사43:6, 8) I will say to the north, Give up, and to the south, Keep not back; bring my sons from far, and my daughters from the ends of the earth; bring forth the blind people, and they shall have eyes; the deaf, and they shall have ears, (Isa. 43:6, 8)

 

위 구절에서,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백성’은 진리를 보게 될 사람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은 진리를 순종할 사람들을 각각 상징합니다. in which passage “sons” signify truths; “daughters,” goods; the “blind,” those who would see truths; and the “deaf,” those who would obey them.

 

[4]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가 청년의 때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렘3:24) Shame hath devoured the labor of our fathers from our youth; their flocks, their herds, their sons, and their daughters, (Jer. 3:24)

 

여기 ‘아들들’과 ‘딸들’은 진리와 선을 상징합니다. where “sons” and “daughters” signify truths and goods.

 

‘자손’과 ‘아들들’이 진리를 상징함은 이사야를 보면 명백합니다. That “children” and “sons” signify truths is plain from Isaiah:

 

22야곱이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겠고 그의 얼굴이 이제는 창백해지지 아니할 것이며 23그의 자손은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이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24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되며 (사29:22-24) Jacob shall not now be ashamed, neither shall his face now wax pale; for when he shall see his children the work of my hands in the midst of him, they shall sanctify my name, and shall sanctify the Holy One of Jacob, and shall fear the God of Israel; they also that erred in spirit shall know understanding, (Isa. 29:22–24)

 

‘야곱의 거룩한 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는 주님을 상징하며, ‘자손’은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 위 본문이 설명하고 있는 대로, 선과 진리를 지성적으로 이해하게 된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where the “holy one of Jacob, the God of Israel,” signifies the Lord; “children” signify the regenerate, who have the understanding of good and truth, as is indeed explained.

 

[5] 다시 Again: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사54:1) Sing, O barren, thou that didst not bear, for more are the sons of the desolate than the sons of the married wife, (Isa. 54:1)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은 원시(primitive) 교회, 혹은 이방인들의 교회에 알려진 진리를, ‘남편 있는 자의 자식’은 유대 교회에 있는 진리를 상징합니다. where the “sons of the desolate” signify the truths of the primitive church, or that of the Gentiles; the “sons of the married wife,” the truths of the Jewish church.

 

[6]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렘10:20) My tent is laid waste and all my cords are plucked out; my sons are gone forth of me, and are not, (Jer. 10:20)

 

‘자녀’는 진리를 상징합니다. where “sons” signify truths.

 

다시 Again:

 

그의 자손은 예전과 같겠고 그 회중은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며 (렘30:20) His sons shall be as aforetime, and their congregation shall be established before me, (Jer. 30:20)

 

‘자손’은 고대 교회의 진리를 상징합니다. where “sons” signify the truths of the ancient church.

 

스가랴입니다. In Zechariah: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슥9:13) I will stir up thy sons, O Zion, with thy sons, O Javan, and make thee as the sword of a mighty man, (Zech. 9:13)

 

사랑의 신앙의 진리를 상징합니다. signifying the truths of the faith of love.

 

 

490. 말씀에서 ‘딸’은 종종 선을 가리킵니다. 시편입니다.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10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11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 12두로의 딸은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얼굴 보기를 원하리로다 13왕의 딸은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의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14수 놓은 옷을 입은 그는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친구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15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16왕의 아들들은 왕의 조상들을 계승할 것이라 왕이 그들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17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하게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하리로다 (시45:10-17) Kings’ daughters were among thy precious ones; at thy right hand doth stand the queen in the best gold of Ophir; the daughter of Tyre with a gift; the king’s daughter is all glorious within; of eyelet work of gold is her raiment; instead of thy fathers shall be thy sons, (Ps. 45:10-17)

 

사랑과 신앙의 선과 아름다움이 ‘딸’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where the good and beauty of love and faith are described by the “daughter.”

 

그래서 교회를 선으로 말미암아 ‘딸’이라 합니다. 이사야 37장 22절과 다른 많은 데서 ‘딸 시온’, ‘딸 예루살렘’으로 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내 딸 백성’(사22:4), ‘딸 다시스’(사23:10), ‘딸 시돈’(사23:12) 및 ‘들에 있는 딸’(겔26:6, 8)이라고도 합니다. Hence churches are called “daughters” by virtue of goods, as the “daughter of Zion” and the “daughter of Jerusalem” (Isa. 37:22, and in many other places); they are also called “daughters of my people” (Isa. 22:4), the “daughter of Tarshish” (Isa. 23:10), the “daughter of Sidon” (verse 12), and “daughters in the field” (Ezek. 26:6, 8).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사37:22)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사22:4)

 

10딸 다시스여 나일 같이 너희 땅에 넘칠지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12이르시되 너 학대 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23:10, 12)

 

6들에 있는 그의 딸들은 칼에 죽으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8그가 들에 있는 너의 딸들을 칼로 죽이고 너를 치려고 사다리를 세우며 토성을 쌓으며 방패를 갖출 것이며 (겔26:6, 8)

 

 

491. 본 장 4, 7, 10, 13, 16, 19, 26 및 30절 등에 나오는 ‘자녀’는 모두 같은 것을 상징합니다. 이것이 교회요, 이것이 ‘자녀’, 즉, 선과 진리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진리와 선은 뚜렷하게 지각되었던 것입니다. 태고교회가 바로 이것들로 설명이 되며, 이후 이어지는 모든 교회들에게 있어 하나의 원리요, 부모의 역할을 하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The same things are signified by “sons” and “daughters” in this chapter (verses 4, 7, 10, 13, 16, 19, 26, 30), but such as is the church, such are the “sons and daughters,” that is, such are the goods and truths; the truths and goods here spoken of are such as were distinctly perceived, because they are predicated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principal and parent of all the other and succeeding churches.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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