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들이 몸 안에 있던 시절 혼이나 영에 대해 가졌던 생각 에 관하여 그들을 만나보고 쓴몇 가지 사례들  Some Examples Drawn From Experience With Spirits Concerning What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bout The Soul Or Spirit

 

443. 다른 삶이 시작되면, 모든 영은 생전에 사람들이 혼과 영 및 사후 삶(생명)에 관해 가졌던 견해들을 더욱 명료하게 지각할 수 있게 됩니다. 살아있을 때와 비슷한 상태에 놓이게 되면, 그들은 살아있을 때처럼 생각하고, 그들의 생각은 마치 큰 소리로 말한 것처럼 명료하게 통하기 때문입니다. In the other life it is given to perceive clearly what opinions people had entertained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concerning the soul, the spirit, and the life after death; for when kept in a state resembling that of the body they think in the same way, and their thought is communicated as plainly as if they spoke aloud.

 

어떤 사람 이야기입니다. 그는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이었고, 제가 그에게서 지각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혼자 중얼거린 것입니다.) 그는 생전에 영의 존재를 정말 믿었던 사람이지만, 속으로는 ‘나는 사후 무슨 안개 같은 생명으로 살게 될 거야. 왜냐하면, 몸의 생명이 그치면 남는 것은 안개같이 희미한 것 밖에 없을 테니까...’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생명을 몸 안에 있는 것으로만 보았고, 영은 일종의 유령처럼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가진 생명과 거의 같은 생명을 짐승들도 갖고 있는 걸 보고, 이런 생각을 스스로 확신했던 것입니다. In the case of one person, not long after his decease, I perceived (what he himself confessed) that he had indeed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 spirit, but had imagined that it must live after death an obscure kind of life, because if the life of the body were withdrawn there would remain nothing but what is dim and obscure; for he had regarded life as being in the body, and therefore he had thought of the spirit as being a phantom; and he had confirmed himself in this idea from seeing that brutes also have life, almost as men have it.

 

그랬던 그가 이제는 경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영들과 천사들이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살며, 또 가장 놀라운 지성과 지혜, 그리고 행복 가운데, 너무나 완벽하여 도저히 말로 설명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 그런 지각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으며, 그 결과 그들의 삶은 모호함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가장 완벽한 명료함과 확실함 가운데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He now marveled that spirits and angels live in the greatest light, and in the greatest intelligence, wisdom, and happiness, attended with a perception so perfect that it can scarcely be described; consequently that their life, so far from being obscure, is most perfectly clear and distinct.

 

 

444. 생전에 믿기를, 영은 무슨 외연 같은 걸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믿었던, 그리고 이런 믿음 때문에 대화 중에도 이런 개념이 포함된 일체의 표현조차 매우 조심하던 사람과 대화하면서, 저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지금은 자기 자신을 무엇으로 생각하는지 말이지요. 지금은 그는 혼 또는 영이 되었고, 시력, 청력, 후각, 매우 정교해진 촉각, 갈망, 생각 등, 그가 자신을 마치 몸 안에 있는 거와 완전 똑같다 여길 정도로 모든 감각이 그대로인 상황을 보면서 말입니다. Conversing with one who while he lived in this world had believed that the spirit has no extension, and on that ground would admit of no word that implied extension, I asked him what he now thought of himself, seeing that now he was a soul or spirit, and possessed sight, hearing, smell, an exquisite sense of touch, desires, thoughts, insomuch that he supposed himself to be exactly as if in the body.

 

그는 세상에 있을 때 했던 생각 가운데 여전히 머물러 있었는데, 말하기를 영은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He was kept in the idea which he had when he had so thought in the world, and he said that the spirit is thought.

 

저는 허락하심을 얻어 그의 대답을 구하기를, 혹시 세상 살 때, 눈 같은 보는 기관이 없으면 무슨 육체적 시력 같은 것도 있을 수 없음을 알고 계셨는지 물었습니다. I was permitted to ask him in reply, whether, having lived in the world, he was not aware that there can be no bodily sight without an organ of vision or eye?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내적 시야 혹은 생각 또한 어떻게 가능한지를 말입니다. And how then can there be internal sight, or thought?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어떤 기관을 이루는 실체를 가져서는 안 되나요? Must it not have some organic substance from which to think?

 

그때 그는 인정하기를, 몸 안에 있는 동안, 자기는 영 또한 모든 기관이나 외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영은 그저 생각일 뿐이라는 망상을 지키느라 헛수고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He then acknowledged that while in the bodily life he had labored under the delusion that the spirit is mere thought, devoid of everything organic or extended.

 

저는 덧붙이기를, 만일 혼이나 영이 단지 생각일 뿐이라면, 사람의 머리가 그렇게 클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머리 전체가 내면의 모든 감각을 총괄하는 기관인 것을 볼 때 말이지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두개골은 텅 비었을 것이고, 그럴지라도 생각은 여전히 영으로서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I added that if the soul or spirit were mere thought man would not need so large a brain, seeing that the whole brain is the organ of the interior senses; for if it were not so the skull might be hollow, and the thought still act in it as the spirit.

 

이런 한 가지만 살펴보더라도, 그리고 뿐만 아니라 영혼이 근육에 들어가 매우 엄청나게 다양한 운동을 일으키는 걸 보더라도, 당신은 영이 기관, 즉, 하나의 기관을 이루는 실체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From this consideration alone, as well as from the operation of the soul into the muscles, giving rise to so great a variety of movements, I said that he might be assured that the spirit is organic, that is, an organic substance.

 

그러자 그는 자신의 오류를 시인했고, 자신이 그토록 어리석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기막혀했습니다. Whereupon he confessed his error, and wondered that he had been so foolish.

 

 

445. 더욱 주목하게 된 것은, 사후에도 계속 사는 혼, 즉, 영에 대해, 배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믿음은, 영은 추상적 생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It was further remarked, that the learned have no other belief than that the soul which is to live after death, that is, the spirit, is abstract thought.

 

이것은 영의 외연과 외연에 속한 것을 포함하는 어떤 말도 인정하기를 꺼리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 아주 분명합니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외연을 갖지 않지만, 생각의 주제, 그리고 생각의 대상들은 외연을 갖기 때문입니다. 외연을 갖지 않는 그런 대상들에 관하여 사람들은 바운드리를 정하고, 확장합니다.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지요. This is very manifest from their unwillingness to admit of any term that implies extension and what belongs to extension, because thought abstractedly from a subject is not extended, whereas the subject of the thought, and the objects of the thought, are extended; and as for those objects which are not extended, men define them by boundaries and give extension to them, in order that they may comprehend them.

 

이것으로 아주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배운 사람들은 혼 또는 영의 개념과 관련, 그건 그저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사후엔 사라지는 것으로밖에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This shows very clearly that the learned have no other conception of the soul or spirit than that it is mere thought, and so cannot but believe that it will vanish when they die.

 

 

446. 저는 오늘날(18세기 중엽 유럽)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일반적인 생각들에 관하여 영들과 담론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영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영이라는 것을 두 눈으로 볼 수도, 그들이 가진 머릿속 지식으로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들은 영이 확장, 곧 무슨 외연을 가진다는 것을 부인할 뿐 아니라, 영이 일종의 실체라는 것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실체가 무엇이냐를 가지고도 다투면서 말이지요. I have discoursed with spirits concerning the common opinion that prevails among men at the present day, that the existence of the spirit is not to be credited because they do not see it with their eyes, nor comprehend it by their memory-knowledges [scientias], and so they not only deny that the spirit has extension, but also that it is a substance, disputing as to what substance is.

 

영이 외연을 가진다는 것을 부인하며, 또 영의 실체에 관해 다투기 때문에, 그들은 또한 영은 어떤 곳, 곧 사람 몸 안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단순한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의 혼 또는 영이 자기 몸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And as they deny that it has extension, and also dispute about substance, they also deny that the spirit is in any place, and consequently that it is in the human body; and yet the most simple might know that his soul or spirit is within his body.

 

제가 이런 얘기들을 하자 훨씬 더 단순한 사람들이었던 그 영들은 현대인들이 그토록 어리석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습니다. When I said these things, the spirits, who were some of the more simple ones, marveled that the men of the present day are so foolish.

 

그리고 ‘부분들 없는 부분들’ 같은, 그리고 다른 말들을 가지고 다투고들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그런 걸 우스꽝스럽다, 터무니없다, 웃음거리다고 하며, 그런 걸로 마음을 채우면 안 된다고, 안 그러면 지혜의 길이 닫힌다고 하였습니다. And when they heard the words that are disputed about, such as “parts without parts,” and other such terms, they called them absurd, ridiculous, and farcical, which should not occupy the mind at all, because they close the way to intelligence.

 

 

447. 어떤 수사 수련 기간 중인 영이 저에게 영에 관한 얘기를 듣고는 “영이라는 게 뭡니까?” 물었습니다. 마치 자기는 사람인 줄 착각하면서 말이지요. A certain novitiate spirit, on hearing me speak about the spirit, asked, “What is a spirit?” supposing himself to be a man.

 

그리고 저는 그에게 모든 사람에게는 영이 있다는 것과, 생명 관련, 사람은 영이라는 사실, 즉, 몸은 그저 사람이 지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일 뿐이며, 살과 뼈, 곧, 몸이 사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전혀 아님을 말하면서, 그리고 이런 말을 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하는 걸 보면서, 그에게 혹시 전에 혼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And when I told him that there is a spirit in every man, and that in respect to his life a man is a spirit; that the body is merely to enable a man to live on the earth, and that the flesh and bones, that is, the body, does not live or think at all; seeing that he was at a loss, I asked him whether he had ever heard of the soul.

 

“혼은 뭡니까?” 그는 대답하면서, “저는 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하였습니다. “What is a soul?” he replied, “I do not know what a soul is.”

 

그때 저는 허락을 받아 그에게 그 자신 지금 혼 또는 영이라고, 그가 지금 내 머리 위에 있으며, 땅 위에 있지 않은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고 하였습니다. I was then permitted to tell him that he himself was now a soul, or spirit, as he might know from the fact that he was over my head, and was not standing on the earth.

 

제가 그에게 이 사실을 알겠느냐 묻자 그는 몸서리치며 도망가면서 “나는 영이다! 나는 영이다!”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I asked him whether he could not perceive this, and he then fled away in terror, crying out, “I am a spirit! I am a spirit!”

 

어떤 유대인이 자기는 완전히 몸 안에 살고 있다 생각하는 영이었는데, 그는 사실은 그 정반대임을 도무지 설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A certain Jew supposed himself to be living wholly in the body, insomuch that he could scarcely be persuaded to the contrary.

 

자기가 영임을 보았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자기는 사람이라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자기는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고 말이지요. And when he was shown that he was a spirit, he still persisted in saying that he was a man, because he could see and hear.

 

이런 사람들은 세상 살 때, 몸에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Such are they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ve been devoted to the body.

 

이런 사례들은 끝도 없이 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만 이런 말씀 드리는 이유는, 감각을 지각하는 것은 몸이 아닌, 사람 안 영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To these examples very many more might be added, but these have been given merely in order to confirm the fact, that it is the spirit in man, and not the body, which exercises sensation.

 

 

448. 저는 세상에서 저를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랫동안,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씩 해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비록 내적이지만 아주 맑은 목소리로, 마치 이 세상 친구들하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I have conversed with many who had been known to me in this life (and this I have done for a long time—for months and years), in as clear a voice, although an inward one, as with friends in this world.

 

우리 대화의 주제는 때때로 사람의 사후 상태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사람들이, 몸 안에 사는 동안 아무도 자기가 몸 안에 사는 삶을 마친 후에도 여전히 삶은 계속되며, 사람은 현재의 모호한 삶을 지나 명료한 삶으로 계속해서 나아간다는 사실, 그리고 주님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더욱 더 명료한 삶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안 믿는다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였습니다. The subject of our conversation has sometimes been the state of man after death, and they have wondered exceedingly that during the bodily life no one knows or believes that he is so to live when the bodily life is over, when yet there is then a continuation of life, and such a continuation that the man passes from an obscure life into a clear one, and those who are in faith in the Lord into a life that is more and more clear.

 

그들은 제가 아직 살아있는 자기 친구들에게 글이나 말로, 자기들이 지금 어떤 상태 가운데 있는지, 마치 제가 여기 있는 자기 친구들에 관해 자기들한테 많은 걸 알려주는 거처럼 그렇게 알려주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They have desired me to tell their friends that they are alive, and to write and tell them what their condition is, even as I had related to themselves many things about that of their friends here.

 

그러나 저는 답하기를, 만일 제가 그들의 친구들에게 그렇게 하면, 혹은 그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하면, 그들은 안 믿을뿐더러, 오히려 그들을 망상이라며 비웃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믿을 수 있도록 무슨 싸인이나 기적을 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저 그들의 조롱거리가 될 뿐이라고 했습니다. But I replied that were I to tell their friends such things, or to write to them about them, they would not believe, but would call them delusions, would scoff at them, and would ask for signs or miracles before they would believe; and I should merely expose myself to their derision.

 

그리고 이런 얘기가 사실이다, 혹시 믿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And that these things are true, perchance but few will believe.

 

진실로, 사람들은 영들의 존재를 부인하며, 설령 부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가 영들에 관해 말하는 걸 아주 듣기 거북해들 합니다. For at heart men deny the existence of spirits, and even those who do not deny it are unwilling to hear that anyone can speak with spirits.

 

고대에는 영들에 관한 그런 상태의 믿음은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은 정신 나간 추론을 가지고 사람들은 영들이 무엇인지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자신들의 정의와 가설들을 가지고 영들로부터 모든 감각을 박탈하며, 더 많이, 더 많이 배운 자들일수록 이런 짓을 저리르고 있습니다. In ancient times there was no such state of belief in regard to spirits, but so it is now when by crazy ratiocination men try to find out what spirits are, and by their definitions and suppositions deprive them of all the senses, and do this the more, the more learned they desire to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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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26절,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Verse 26,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 26절 속뜻

 

’은 신앙, 곧 이 신앙을 통해서 체어리티가 오는 그런 신앙을, 그의 ‘아들’은 이름이 ‘에노스’인데, 체어리티를 신앙의 원리로 삼았던 어떤 교회를,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 교회의 예배가 드디어 체어리티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438. ’(Seth)은 신앙, 곧 이 신앙을 통해서 체어리티가 오는 그런 신앙임은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그의 아들은 이름이 에노스’(Enosh)였으며, 체어리티를 신앙의 원리로 삼았던 어떤 교회를, 그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시작했다는 것은 그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로 드려졌음을 의미합니다.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as was said above; by his “son,” whose name was “Enosh,” is signified a church which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by beginning then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439. 이 신앙, 곧 이 신앙을 통해서 체어리티가 오는 그런 신앙임은 선행구절에서 보여드렸습니다.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was shown in the preceding verse.

 

그의 아들, 곧 그 이름이 에노스였던아들, 체어리티를 신앙의 원리로 삼았던 어떤 교회를 가리켜 에노스라 한다는 것은 앞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들 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실들로도 분명한데요, 그 교회를 에노스라 한다는 것, 이 이름의 뜻 역시 사람’(man)인데, 천적 인간(天人, celestial man)을 말하는 건 아니고, 대신 영적 인간(靈人, spiritual man)의 성향을 띤 평범한 인간을 의미하는, 이런 게 에노스라는 것입니다. That by his “son, whose name was Enosh,” is signified a church that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is also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before,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it is called “Enosh,” which name also means a “man,” not a celestial man, but that human spiritual man which is here called “Enosh.

 

바로 이어지는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는 말씀으로도 분명합니다.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words that immediately follow: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440. 방금 인용된 본문,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의 의미가 그 교회는 체어리티로 예배드리는 교회라는 의미임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선행구절에서는 하나님’(God)이었는데 여기서는 여호와’(Jehovah)라는 점과, 뿐만 아니라 주님은 체어리티의 예배가 아니면 받으실 수가 없으신데, 그 이유는 참된 예배는 체어리티에 속하지 않은 신앙에서는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며, 그것은 단지 입술이지 마음의 예배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사실 등으로 보아 분명합니다. That by the words just quoted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is a customary and general form of speech for all worship of the Lord; and that this worship was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Jehovah” is here mentioned, whereas in the preceding verse he was called “God,”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the Lord cannot be worshiped except from charity, since true worship cannot proceed from faith that is not of charity, because it is merely of the lips, and not of the heart.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주님을 향한 모든 예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언어 형태라는 사실은 말씀에도 나오는데요, 다음은 아브라함에 관한 본문들입니다. That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 is a customary form of speech for all worship of the Lord, appears from the Word; thus it is said of Abraham, that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12:8)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13:4) he built an altar to Jehovah, and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Gen. 12:8; 13:4)

 

그리고, 또 and again, that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창21:33) he “planted a grove in Beersheba, and called there on the name of Jehovah, the God of eternity” (Gen. 21:33).

 

이 표현에 모든 예배가 포함되어 있음은 이사야를 통해서도 명료합니다. That this expression includes all worship, is plain from Isaiah:

 

22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23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제물로 말미암아 너를 수고롭게 하지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말미암아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거늘 (사43:22-23)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hath said, thou hast not called upon me, O Jacob, but thou hast been weary of me, O Israel. Thou hast not brought to me the small cattle of thy burnt offerings, neither hast thou honored me with thy sacrifices. I have not caused thee to serve with an offering, nor wearied thee with incense, (Isa. 43:22–23)

 

이 본문에 모든 표상적 예배(表象, representative worship)의 요약이 들어있습니다. in which text a summary is given of all representative worship.

 

 

441.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이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보면 아주 분명한데요, 첫 번째는, 태고교회에 관하여 위에서 지금까지 말씀드려온 내용입니다. 태고교회는 다른 어느 교회보다도 가장 주님을 경배하고 예배한 교회로서 이미 이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을 예배했습니다. 두 번째는, 양 떼의 첫 새끼를 희생제물로 드린 아벨의 경우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본문,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는 새 교회의 예배를 상징하는 것 말고는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아다와 씰라 이전의 교회들은 가인라멕이라는 사람들에 의해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That the invocation of the name of Jehovah did not commence at this time is sufficiently evident from what has already been said above in regard to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more than any other adored and worshiped the Lord; and also from the fact that Abel brought an offering of the firstlings of the flock; so that in this passage by “calling upon the name of Jehovah” nothing else is signified than the worship of the new church, after the former church had been extinguished by those who are called “Cain” and “Lamech.

 

 

442. 위에 설명한 대로 본 장의 내용으로부터 분명한 사실은, 태고 시대에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간 많은 교리와 이단이 있었으며, 그 하나하나는 다 이름이 있었고, 그 교리와 이단의 결과물들은 오늘날 교회의 것보다 훨씬 더 심오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천재성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chapter as above explained, it is evident that in the most ancient time there were many doctrines and heresies separate from the church, each one of which had its name, which separate doctrines and heresies were the outcome of much more profound thought than any at the present day, because such was the genius of the men of tha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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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25절,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Verse 25,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 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 25절 속뜻

 

 여기 ‘아담’과 그의 ‘아내’는 위 ‘아다와 씰라’가 의미하는 새 교회를, 그녀의 ‘아들’ 셋은 체어리티를 낳게 될 새 신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의 의미는 가인이 분리 및 소멸시켰던 체어리티가 이제 주님에 의해 이 교회에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434. 여기 아담’(man, 남자, 사람)과 그의 아내는 위 아다와 씰라가 의미하는 새 교회를 말하며, 그녀의 아들(Seth)은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선행, 인애)가 말미암게 될 새 신앙을 의미합니다.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and by her “son,” whose name was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ight be obtained.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가인이 분리 및 소멸시켰던 체어리티를 주님이 이제 이 교회에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By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is signified that charity, which Cain had separated and extinguished, was now given by the Lord to this church.

 

 

435. 아담과 그의 아내가 위 아다와 씰라가 의미하는 새 교회를 뜻한다는 사실은 겉뜻으로는 아무도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이전까지는 태고교회와 그 후손을 의미했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이런 사실이 그 속뜻과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실로는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 바로 이어지는 장인 51절로 4절에, 아담과 그의 아내, 그리고 그들이 낳은 셋이 다시 언급되는데, 여기서는 오늘 본문과 전혀 다른 말로 언급되며, 이 경우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후손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That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no one could know or infer from the literal sense, because the “man and his wife” had previously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and its posterity; but it is very evident from the internal sense,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immediately afterwards, in the following chapter (verses 1–4), the man and his wife, and their begetting Seth, are again mentioned, but in entirely different words, and in this case there is signified the first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1-4)

 

지금 보고 있는 이 구절에, 이것 말고 다른 아무 의미도 없다면, 여기서 굳이 같은 걸 말할 필요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비슷한 예를 하나 들면, 1장에서 보면 거기 사람, 땅의 열매들, 그리고 짐승들의 창조를 다루더니, 얼핏 보면 같은 내용을 2장에서 또 다룹니다. 그 이유는 이미 말씀드렸지만, 1장에서는 영적 인간의 창조를, 반면 2장에서는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If nothing else were signified in the passage before us, there would be no need to say the same thing here: in like manner as in the first chapter the creation of man, and of the fruits of the earth, and of the beasts, is treated of, and then in the second chapter they are treated of again, for the reason, as has been said, that in the first chapter it is the creation of the spiritual man that is treated of, whereas in the second chapter the subject is the creation of the celestial man.

 

하나를 언급하고 다른 데서 또 같은 사람이나 사물을 언급하는 이런 반복이 있는 곳마다 항상 어떤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속뜻이 아니고서는 아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Whenever there is such a repetition in the mention of one and the same person or thing, it is always with a difference of signification, but what it is that is signified cannot possibly be known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여기 이 컨넥션 자체로 이미 어떤 주어진 의미가 있음을 컨펌하고 있고요,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부가적인 것은 아담(homo)과 아내라는 표현은 지금 말하고 있는 부모 교회를 의미하는 관용적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Here, the connection itself confirms the signification that has been given, and there is the additional consideration that man [homo] and wife are general terms which signify the parent church that is in question.

 

 

436. (Seth)이라 이름한 그녀의 아들이 새 신앙, 곧 체어리티를 얻게 될 새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서 서술해온 내용들 뿐 아니라,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하신 가인 관련 말씀(cf. 392)으로도 분명합니다. That by her “son,” whom she named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ay be attai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tated, as well as from its being related of Cain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

 

이런 일련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For the subject as it stands in a series is as follows:

 

가인으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로는 체어리티를, 그리고 아벨을 죽이는 가인으로는 분리된 상태의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케 함을 나타냈습니다.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signified by “Cain”; charity, by “Abel”; and that faith in its separated state extinguished charity was signified by Cain slaying Abel.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로는 신앙을 보존, 그렇게 해서 체어리티를 심고자(might be implanted) 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나타냈습니다. The preservation of faith in order that charity might be thereby implanted by the Lord was signified by Jehovah’s setting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lay him.

 

그 후에 거룩한 사랑(the holy of love)과 그로 말미암은 선(the good thence derived)이 주님에 의해 신앙을 통해 주어지는데 이걸 아다가 낳은 야발로, 그리고 신앙의 영적인 것(the spiritual of faith)을 그의 아우 유발로, 그리고 이들로 말미암은 자연적 선과 진리(natural good and truth)를 씰라가 낳은 두발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That afterwards the holy of love and the good thence derived were given by the Lord through faith was signified by Jabal whom Adah bare; and that the spiritual of faith was given, was signified by his brother Jubal; and that from these there came natural good and truth was signified by Tubal-Cain whom Zillah bare.

 

창세기 4장의 이들 두 구절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의 결론 및 요약을 다음과 같이 내릴 수 있는데요, 그것은, ‘아담과 그의 아내는 전에 아다와 씰라로 불린 새 교회를, ‘은 체어리티가 심기는 신앙을, 다음 이어지는 구절의 에노스는 신앙을 통해 심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In these two concluding verses of Genesis 4 we have the conclusion, and thus the summary, of all these matters, to this effect, that by the “man and his wife” is signified that new church which before was called Adah and Zillah, and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harity is implanted; and in the verse which now follows, by “Enosh” is signified the charity that is implanted through faith.

 

 

437. 여기 이 새 신앙, 곧 체어리티가 나오는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의 이름으로 설명이 되는데요, 이르시기를,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하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That “Seth” here signifies a new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is explained by his name, which it is said was given him because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하나님이 다른 씨를 주셨다는 것은 주께서 또 다른 신앙을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씨는 체어리티를 낳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That God “appointed another seed” means that the Lord gave another faith; for “another seed” is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가 신앙인 것은 위(cf. 255)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That “seed” signifies faith may be seen above (n.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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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24절,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Verse 24,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 24절 속뜻

 

인류가 비록 ‘가인’으로 기울었어도 주님은 차선책으로 그걸 허락, ‘가인’ 신앙을 통해서라도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선행, 인애)가 일어나게 하셨고, 이를 위해 사람들이 ‘가인’ 신앙을 못 건드리게, 곧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창4:15)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후예들은 주님의 이 신성불가침을 폭행, 결국 ‘가인’ 신앙을 소멸시켰고, 더 나아가 라멕의 때에 이르자 더 중요한 신성불가침인 체어리티마저 소멸케 했습니다. 그 결과는 바로 지옥, 곧 ‘칠십칠 배의 벌’이 있게 된 것입니다.

 

 

432. 이 말씀들의 의미는, 그들은 신성불가침(sacrilege, sacred ban)이었던 가인신앙을 폭행, 소멸시켰고, 동시에 신앙을 통해 생겨나야 했던, 훨씬 더 신성불가침(sacrosanct)인 체어리티 또한 소멸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지옥, 칠십칠 배의 벌이 있게 된 것입니다. These words signify that they had extinguished the faith meant by “Cain,” to do violence to which was sacrilege, and at the same time had extinguished the charity which should be born through faith, a far greater sacrilege, and that for this there was condemnation, that is, a “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

 

 

433.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라는 것은, 이미 15절에서 보여드린 대로, ‘가인의 분리된 신앙을 폭행하는 것은 신성모독, 신성불가침을 범함이었음을 의미합니다. (cf. 392-396) That Cain’s being “avenged sevenfold” signifies that it was sacrilege to do violence to that separated faith which is meant by “Cain,” has been already shown at verse 15.

 

※ ‘가인’ 신앙은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신앙입니다. 원래 태고교회 신앙은 사랑 하나였습니다. 사랑 따로, 신앙 따로 같은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나 그 교회에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신앙은 하려는 사람들이 서서히 일어난 것입니다.

 

칠십칠 배의 벌은 아주 끔찍한 신성모독(a far greater sacrilege)이요, 신성불가침을 심각하게 범하는 것으로서, 그 결과는 지옥이라는 것이 칠십칠이 의미하는 바를 보면 분명합니다. And that by a “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 is signified a far greater sacrilege, the consequence of which is damna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seventy and sevenfold.

 

이라는 숫자가 거룩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유래하는데요,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 천적 교회, 천적 나라, 그리고 가장 높은 뜻으로 바로 주님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That the number “seven” is holy originates in the fact that the “seventh day” signifies the celestial man, the celestial church, the celestial kingdom, and, in the highest sense, the Lord himself.

 

그래서 이라는 숫자는 말씀 가운데 나올 때마다 거룩한 것, 즉 가장 신성한 것을 의미하며, 이 거룩(holiness)과 신성(sanctity)이 어떤 것인지는 그때 다루어지고 있는 것들에 의해 서술되거나 따릅니다. Hence the number “seven,” wherever it occurs in the Word, signifies what is holy, or most sacred; and this holiness and sanctity is predicated of, or according to, the things that are being treated of.

 

일곱 때들(ages)을 구성하는 숫자 칠십의 의미가 여기에서 오는데요, 말씀에서, 한 때는 십 년입니다. From this comes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seventy,” which comprises seven ages; for an age, in the Word, is ten years.

 

가장 거룩하거나 신성한 어떤 것을 표현해야 했을 때, ‘칠십칠 배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그의 형제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그가 죄를 얼마나 짓든지 끝없이, 혹은 영원히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When anything most holy or sacred was to be expressed, it was said “seventy-sevenfold,” as when the Lord said that a man should forgive his brother not until seven times, but until seventy times seven (Matt. 18:22), by which is meant that they should forgive as many times as he sins, so that the forgiving should be without end, or should be eternal, which is holy.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18:22)

 

그리고 여기, 라멕의 말,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의 의미는 지옥인데, 그 이유는 가장 신성한 것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And here, that Lamech should “be avenged seventy and sevenfold” means damnation, because of the violation of that which is most sac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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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23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Verse 23,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 23절 속뜻

 

아다와 씰라’라는 교회가 일어나자 ‘라멕’이라는 교회의 황폐함이 다음과 같이 드러납니다. ‘라멕’이라는 교회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고 소멸된 상태였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라멕’이라는 교회에서 신앙은 황량(荒涼, desolate)해졌고, 체어리티는 황폐(荒廢, devastate)해졌습니다.

 

※ 사실 교회의 상태가 이 지경이면 이런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 할 수도 없는 상태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놀랍게도 꼭 이런 교회의 종말의 때에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새 교회는 꼭 교회의 마지막 종말의 때에 출현합니다!

 

 

427. 앞서 살핀 대로(cf. 405, 406), ‘라멕은 황폐함을 의미합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말을 들으라는 죄에 대한 자백(confession)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교회라는 게 있는 데서만 할 수 있는 것이며,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cf. 409), 라멕의 아내들이 의미하는 게 바로 이 교회입니다.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as before; that he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signifies confession, which can only be made where there is a church, which, as has been said, is signified by his “wives.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는 그가 신앙을 소멸시켰음을 의미하는데, 여기 사람은 신앙을(cf. 340, 367:1)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은 그가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선행, 인애)를 소멸시켰음을 의미합니다.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faith, for by a “man” is signified faith; “a little one to my hurt”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charity.

 

상처’(a wound)상함’(a bruise)은 더이상 온전한 것이 없음을 의미하는데, 여기 상처는 신앙이 황량해졌음을, ‘상함은 체어리티가 황폐해졌음을 의미합니다.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no more soundness;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by a “hurt,” that charity was devastated.

 

 

428. 이 본문도 그렇고, 다음 절도 그렇고... 아주 분명한 사실은 라멕이 황폐함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길, ‘내가 사람을 죽였다’, ‘내가 소년을 죽였다하고 있고, 또 가인의 경우는 그 벌이 일곱 배이지만, 라멕의 경우는 일흔일곱 배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and the following verse, it is very evident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for he says that he had “slain a man,” and a “little child,” and that Cain should be avenged sevenfold, and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429. 사람이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본 장 1, 하와가 가인을 낳고 한 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내가 여호와라는 사람을 얻었다)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여기서 사람은 여호와라는 사람’(a man, Jehovah)이라는 신앙의 교리를 의미합니다. (cf. 340) That by a “man” [vir] is signified faith is evident from the first verse of this chapter, in that Eve said, when she bare Cain, “I have gotten a man, Jehovah”; by whom wa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a man, Jehovah.

 

이런 사실은 또 훨씬 앞서 다룬 (cf. 158, 265), 사람(남자) 또는 남성에 관한 내용을 봐도 분명합니다. 거기서 남자는 이해(understanding)를 의미하는데, 이해는 신앙에 속한 것입니다. It is evident also from what was shown above concerning a man or male, that he signifies understanding, which is of faith.

 

그는 체어리티 또한 소멸시켰는데요, 여기 뒤이어 나오는 어린이’, 혹은 소년이라고 하는 게 바로 체어리티입니다. 신앙을 부인하고 죽이는 자는 동시에 체어리티 또한 그렇게 하는데, 그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That he had also extinguished charity, here called a “little one,” or a “little child,” follows, for he who denies and murders faith, at the same time also denies and murders the charity that is born from faith.

 

 

430. 말씀에 나오는 어린이’(little one)나 ‘소년’(little child)은 이노센스(innocence, 순진)를 의미하며, 또한 체어리티도 의미합니다. 참된 이노센스는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체어리티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A “little one,” or “little child,” in the Word, signifies innocence, and also charity, for true innocence cannot exist without charity, nor true charity without innocence.

 

이노센스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말씀에서는 각각 젖먹이’(sucklings), 걸음마 배우는 아이’(infants) 소년’(little children)으로 구분합니다. 참된 사랑과 체어리티 없이 참된 이노센스는 없기 때문에, ‘젖먹이’, ‘아이소년은 또한 사랑의 세 단계를 의미하는데요, 즉 엄마나 유모를 향한 젖먹이의 사랑 같은 다정한 사랑, 부모를 향한 아이의 사랑 같은 사랑, 선생님을 향한 소년의 상냥한 사랑과 유사한 체어리티입니다. There are three degrees of innocence, distinguished in the Word by the terms “sucklings,” “infants,” and “little children”; and as there is no true innocence without true love and charity, therefore also by “sucklings,” “infants,” and “little children” are signified the three degrees of love: namely, tender love, like that of a suckling toward its mother or nurse; love like that of an infant toward its parents; and charity, similar to that of a little child toward its instructor.

 

그래서 이사야에는 말하기를 Thus it is said in Isaiah: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사11:6) The wolf shall dwell with the lamb, and the leopard shall lie down with the kid; and the calf, and the young lion, and the fatling together, and a little child shall lead them. (Isa. 11:6)

 

여기 ’, ‘염소’, ‘송아지는 이노센스와 사랑의 세 단계를, ‘이리’, ‘표범어린 사자는 그 반대를, 그리고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Here a “lamb,” a “kid,” and a “calf” signify the three degrees of innocence and love; a “wolf,” a “leopard,” and a “young lion,” their opposites; and a “little child,” charity.

 

예레미야에 In Jeremiah: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어찌하여 큰 악을 행하여 자기 영혼을 해하며 유다 가운데에서 너희의 남자와 여자와 아이와 젖 먹는 자를 멸절하여 남은 자가 없게 하려느냐 (렘44:7) Ye commit this great evil against your souls, to cut off from you man and wife, infant and suckling, out of the midst of Judah, to leave you no remains. (Jer. 44:7)

 

남자와 여자는 이해(the understanding)와 의지(the will)에 속한, 곧 진리(truth)와 선(good)에 속한 것들을, ‘아이와 젖 먹는 자는 사랑의 첫 번째 단계들을 의미합니다. Man and wife” denot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will, or of truth and of good; and “infant and suckling,” the first degrees of love.

 

아이어린이가 이노센스와 체어리티를 가리키는 것은 누가복음에 주님 하신 말씀을 보면 아주 분명합니다. That an “infant” and a “little child” denote innocence and charity is very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in Luke: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18:15, 17) They brought unto him little children that he should touch them. And Jesus said, Suffer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 and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God. Verily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shall in no wise enter therein. (Luke 18:15, 17)

 

주님 자신 아기’(little one), ‘아들’(child)(9:6)로 불리십니다. 주님은 이노센스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같은 구절에서 주님을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시라 하고 있습니다. The Lord himself is called a “little one,” or “child(Isa. 9:6), because he is innocence itself and love itself, and in the same passage he is spoken of as “wonderful, counselor, God, hero, father of eternity, prince of peace.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9:6)

 

 

431. 상처상함은 더이상 온전한 것이 없음을 의미하는데, ‘상처로는 신앙이 황량해졌음을, ‘상함으로는 체어리티가 황폐해졌음을 의미함이 분명한 것은 상처는 사람에게, ‘상함은 소년에게 속한 것으로 서술되고 있는 걸 보면 그렇습니다. That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soundness no longer,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and by a “bruise” that charity was devastat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wound” is predicated of a “man,” and “bruise” of a “little one.

 

신앙의 황량함 및 체어리티의 황폐함을 이사야에 보면 같은 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The desolation of faith and the vastation of charity are described in the same terms in Isaiah: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사1:6) From the sole of the foot even unto the head there is no soundness in it; but wound and bruise and a fresh sore they have not been pressed out, neither bound up, neither mollified with oil. (Isa. 1:6)

 

이 구절에서, ‘상한 것은 황량해진 신앙으로, ‘터진 것은 황폐해진 체어리티로, ‘새로 맞은은 둘 다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In this passage “wound” is predicated of faith desolated, “bruise” of charity devastated, and “sore” of bo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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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22절,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Verse 22,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 22절 속뜻

 

씰라’(Zillah)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두발가인,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여기서 ‘구리’(brass, 銅)는 자연적 선을, ‘’(iron, 鐵)는 자연적 진리를, ‘나아마, 두발가인의 누이’는 새 교회와 비슷한 교회, 곧 그 교회 밖에 있는(outside of that church)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421. 씰라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두발가인,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는 자연적 선과 진리의 교리를 의미하는데, 여기서 구리’(brass, )는 자연적 선을, ‘’(iron, )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합니다. By “Zillah” is signified, as previously stated, the mother of the natural things of the new church; by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brass” denoting natural good, and “iron” natural truth.

 

나아마, 두발가인의 누이는 어떤 비슷한 교회, 곧 그 교회 밖에 있는 자연적 선과 진리의 교리를 의미합니다. By “Naamah, the sister of Tubal-Cain” is signified a similar church, or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outside of that church.

 

 

422. 이 새 교회가 어떤 유형의 교회인지는 유대교회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유대교회는 내적(內的, internal), 외적(外的, external) 양면성을 가진, 곧 천적, 영적인 것들로 이루어진 내적 교회와, 자연적인 것들로 구성된 외적 교회로 된 교회였습니다. How the case was with this new church may be seen from the Jewish church, which was both internal and external; the internal church consisting of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nd the external church of natural things.

 

내적 교회는 라헬로, 외적 교회는 레아로 표현되었습니다. The internal church was represented by Rachel, and the external by Leah.

 

그러나 야곱, 아니 오히려 말씀에서 야곱으로 이해된 그의 후손은 오직 외적인 그런 것들만 원하거나 겉으로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레아가 라헬보다 먼저 야곱에게 주어졌습니다. 눈이 침침한 레아로는 유대교회를, 라헬로는 이방의 새 교회를 표현했습니다. But as Jacob, or rather his posterity understood by “Jacob” in the Word, were such as to desire only external things, or worship in externals, therefore Leah was given to Jacob before Rachel; and by blear-eyed Leah was represented the Jewish church, and by Rachel a new church of the gentiles.

 

이런 이유로, ‘야곱은 예언서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갖게 되었는데요, 하나는 전도된(顚倒, perverted) 상태 가운데 있는 유대교회를,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의 참된 외적 교회를 가리킵니다. For this reason “Jacob” is taken in both senses in the prophets, in one denoting the Jewish church in its perverted state, and in the other the true external church of the gentiles.

 

내적 교회를 의미할 때는 이스라엘이라 하는데,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더 말씀드리게 될 것입니다. When the internal church is signified, he is called “Israel”; but of these matters, by the Divine mercy of the Lord, more will be said hereafter.

 

 

423. 두발-가인을 일컬어 모든 기능공들의 선생(instructor)’이라 하면서 야발과 유발의 경우처럼 조상’(father)이라고는 하지 않는데요, 그 이유는 그전에는 천적, 영적, 곧 내적인 것들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Tubal-Cain is called the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and not the “father,” as was the case with Jabal and Jubal; and the reason is that before there were no celestial and spiritual or internal things.

 

※ 즉 특별히 야발과 유발에게 ‘조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라멕의 때에는 천적, 영적, 즉 내적인 것들이 전혀 없다가 아다와 씰라라는 새 교회가 일어나면서 비로소 시작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야발과 유발의 경우는, 이런 내적인 것들이 그들의 때에 처음 존재하기 시작했음을 가리키기 위해 조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반면, 그 새 교회의 자연적, 즉 외적인 것들은 이미 그전부터 존재하다가 이 시점에서 내적인 것들과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발-가인의 경우는 조상이라 하지 않고, 대신 모든 기능공들의 선생이라 하는 것입니다. And the term “father” is applied to Jabal and Jubal, to denote that such internal things then first began to exist; whereas natural or external things did exist before, but were now applied to internal things, so that Tubal-Cain is not called the “father,” but the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424. 말씀에서 기능공’(artificer)은 지혜롭고, 지성적이며, 박식한 사람을 의미하며, 여기 구리와 쇠를 다루는 모든 기능공들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친숙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By an “artificer” in the Word is signified a wise, intelligent, and well-informed [sciens] man, and here by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re signified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natural good and truth.

 

계시록입니다. As in John:

 

21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22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계18:21-22) With violence shall that great city Babylon be thrown down, and shall be found no more at all. And the voice of harpers, and musicians, and of pipers, and trumpeters, shall be heard no more at all in her; and no artificer, of whatsoever craft, shall be found any more in her. (Rev. 18:21–22)

 

여기 거문고 타는 자’(harpers)는 위에서처럼 진리들을, ‘나팔 부는 자들’(trumpeters)은 신앙의 선들을, ‘어떠한 세공업자’(artificer of any craft)는 알고 있는 자, 곧 진리와 선에 관해 단지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Harpers” here as above signify truths; “trumpeters,” the goods of faith; an “artificer of any craft,” one who knows, or the memory-knowledge of truth and good.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19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사40:19-20) The artificer melteth a graven image, and the smelter spreadeth it over with gold, and casteth silver chains; he seeketh unto him a wise artificer, to prepare a graven image that shall not be moved, (Isa. 40:19–20)

 

환상에 빠져 자기를 위해 거짓된 것, ‘우상’(graven image)을 새기고, 그것을 참인 양 가르치는 자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speaking of those who from fantasy forge for themselves what is false—a “graven image”—and teach it so that it appears true.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1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8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가르침은 나무뿐이라 9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기술공과 은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옷을 입었나니 이는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이거니와 (렘10:1, 8-9) At the same time as they are infatuated they grow foolish, the doctrine of vanities, it is but a stock. Silver beaten out is brought from Tarshish, and gold from Uphaz, the work of the artificer, and of the hands of the smelter; blue and raiment; they are all the work of the wise, (Jer. 10:1, 8–9)

 

거짓들을 가르치고, 자기가 지어낸 이야기를 위조하기 위하여 말씀을 수집하는 자에 관한 말씀이며, 이런 이유로, 이를 가리켜 우상의 가르침’(a doctrine of vanities),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the work of the wise)이라 하고 있습니다. signifying one who teaches falsities, and collects from the Word things with which to forge his invention, wherefore it is called a “doctrine of vanities,” and the “work of the wise.

 

※ 오늘날 대표적인 이단인 신천지가 생각나네요. 이들은 거룩한 말씀을 해괴한 방식, 곧 교주 이만희를 중심으로 전부 풀면서 거짓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에 이런 인물들은 아이돌, 즉 거짓을 위조하는 장색(匠色, artificer)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들은 아이돌을 금, 곧 선의 겉모습으로, , 곧 진리처럼 보이는 것으로, 청색 옷처럼 누가 보아도 아주 자연적인 것으로 꾸몄습니다. Such persons were represented in ancient times by artificers who forge idols, that is, falsities, which they adorn with gold, that is, with a semblance of good; and with silver, or an appearance of truth; and with blue and with raiment, or such natural things as are in apparent agreement.

 

 

425. 오늘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요, 바로 구리’(, brass)는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과, 말씀에 나오는 모든 금속은 그 속뜻으로는 어떤 특별한 의미들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 gold)은 천적 선을, ‘’(, silver)은 영적 진리를, ‘’(, brass)은 자연적 선을, ‘’(, iron)은 자연적 진리를, 그리고 그렇게 다른 금속들도 그런데요, ‘나무’(, wood)’(, stone)도 마찬가지입니다. It is unknown to the world at the present day that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and also that every metal mentioned in the Word has a specific signification in the internal sense—as “gold,” celestial good; “silver,” spiritual truth; “brass,” natural good; “iron,” natural truth; and so on with the other metals, and in like manner “wood” and “stone.

 

법궤와 성막, 그리고 성전에 사용된 ’, ‘’, ‘나무가 그런 건데요, 그 자세한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Such things were signified by the “gold,” “silver,” “brass,” and “wood,” used in the ark and in the tabernacle and in the temple,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거기에 이런 의미들이 있다는 것이 예언서들을 보면 아주 분명히 나타나는데요, 예를 들면, 이사야입니다. That such is their signification is manifest from the prophets, as from Isaiah:

 

16네가 이방 나라들의 젖을 빨며 뭇 왕의 젖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17내가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니 (사60:16-17) Thou shalt also suck the milk of the gentiles, and shalt suck the breast of kings. For brass I will bring gold, and for iron I will bring silver, and for wood brass, and for stones iron; I will also make thy tribute peace, and thine exactors righteousness, (Isa. 60:16–17)

 

이 내용은 주님의 오심과 그의 나라, 그리고 천적 교회에 관한 것입니다. treating of the Lord’s advent, of his kingdom, and of the celestial church.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는 자연적 선을 대신하는 천적 선을,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는 자연적 진리를 대신하는 영적 진리를,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는 육적(肉的, corporeal) 선을 대신하는 자연적 선을, ‘철로 돌을 대신하며는 감각적 진리를 대신하는 자연적 진리를 각각 의미합니다. For brass gold,” signifies for natural good celestial good; “for iron silver,” signifies for natural truth spiritual truth; “for wood brass,” signifies for corporeal good natural good; “for stones iron,” signifies for sensuous truth natural truth.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야완과 두발과 메섹은 네 상인이 되었음이여 사람과 놋그릇을 가지고 네 상품을 바꾸어 갔도다 (겔27:13) Javan, Tubal, and Meshech, these were thy merchants, in the soul of man, and vessels of brass they gave thy trading, (Ezek. 27:13)

 

두로(Tyre), 영적, 천적 부를 소유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두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놋그릇은 자연적 선입니다. speaking of Tyre, by which are signified those who possess spiritual and celestial riches; “vessels of brass” are natural goods.

 

신명기입니다. In Moses: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신8:9) A land whose stones are iron, and out of whose mountains thou mayest hew brass, (Deut. 8:9)

 

여기 또한 은 감각적 진리를, ‘은 자연적, 즉 합리적(rational) 진리를, ‘은 자연적 선을 가리킵니다. where also “stones” denote sensuous truth; “iron,” natural, that is, rational truth; and “brass,” natural good.

 

에스겔이 본 것은 Ezekiel saw:

 

5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6그들에게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7그들의 다리는 곧은 다리요 그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광낸 구리 같이 빛나며 (겔1:7) Four living creatures, or cherubs, whose feet sparkled like the appearance of burnished brass, (Ezek. 1:7)

 

여기 다시 구리는 자연적 선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은 자연적인 것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where again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for the “foot” of man represents what is natural.

 

다니엘에게도 같은 식으로 보였습니다. In like manner there appeared to Daniel,

 

5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6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단10:5-6) A man clothed in linen, whose loins were girded with gold of Uphaz, his body also was like the beryl, and his arms and his feet like the appearance of burnished brass. (Dan. 10:5–6)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 자연적 선을 표현하는 것을 위 다니엘 본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That the “brazen serpent” (Num. 21:9) represented the sensuous and natural good of the Lord may be seen above.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21:9)

 

※ cf. 197번 글

 

 

426. 이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에스겔 두로에 대한 말씀을 보면 더 분명합니다. That “iron” signifies natural truth is further evident from what Ezekiel says of Tyre:

 

12다시스는 각종 보화가 풍부하므로 너와 거래하였음이여 은과 철과 주석과 납을 네 물품과 바꾸어 갔도다 19워단과 야완은 길쌈하는 실로 네 물품을 거래하였음이여 가공한 쇠와 계피와 대나무 제품이 네 상품 중에 있었도다 (겔27:12, 19) Tarshish was thy trader by reason of the multitude of all riches; in silver, iron, tin, and lead, they gave thy traffickings. Dan, and Javan, and Meusal furnished bright iron in thy tradings; cassia and calamus were in thy mart. (Ezek. 27:12, 19)

 

이 구절들뿐 아니라 같은 장 앞뒤 이어지는 구절들을 볼 때 정말 분명한 것은, 이 모든 표현이 천적, 영적 부들에 대한 의미라는 것과, 모든 특정 표현들, 하나하나 언급된 이름들까지 어떤 특별한 의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From these words, as well as from what is said both previously and subsequently in the same chapter, it is very evident that celestial and spiritual riches are signified; and that every particular expression, and even the names mentioned, have some specific signification,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piritual, and not verbal.

 

[2]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12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13그러나 네 모든 죄로 말미암아 네 국경 안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 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렘15:12-13) Can one break iron, even iron from the north, and brass? Thy substance [facultates] and thy treasures will I give for a spoil without price, and this for all thy sins, (Jer. 15:12–13)

 

여기 은 자연적 진리와 선을 의미하며, 그것이 북방’(north)에서 온다는 것은 그것이 감각적이고 자연적임을 의미합니다. 영적, 천적인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짙은 흑암, 북방과 같기 때문인데, 빛 혹은 남방’(south)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말입니다. 또 그늘과도 같은데, 그늘은 두발-가인의 어머니씰라로 의미되는 것입니다. where “iron” and “brass” signify natural truth and good; that it came from the “north” signifies what is sensuous and natural; for what is natural, relatively to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is like thick darkness (that is, the “north”) relatively to light or the “south”; or like shade, which is also signified here by “Zillah,” who is the “mother.

 

재산’(substance)보물’(treasures)은 천적, 영적 부를 의미하는 게 아주 분명합니다. That the “substance” and “treasures” are celestial and spiritual riches is also very evident.

 

[3] 다시 에스겔입니다. Again in Ezekiel: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겔4:3) Take thou unto thee a pan of iron, and set it for a wall of iron between thee and the city, and set thy faces toward it, and let it be for a siege, and thou shalt straiten against it, (Ezek. 4:3)

 

여기도 역시 이 진리를 의미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where also it is evident that “iron” signifies truth.

 

강함은 진리의 속성입니다. 진리를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철을 가리켜 다니엘과 계시록에서, ‘부서뜨리다’, ‘깨뜨리다하는 것입니다. ‘은 진리, 곧 신앙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Strength is attributed to truth, because it cannot be resisted, and for this reason it is said of iron—by which is signified truth, or the truth of faith—that it “breaks in pieces” and “crushes”; as in Daniel (2:34, 40), and in John:

 

34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40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쇠 같으리니 쇠는 모든 물건을 부서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쇠가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서뜨리고 찧을 것이며 (단2:34, 40)

 

26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계2:26–27) He that overcometh, to him will I give sovereign power over the nations, that he may pasture them with a rod of iron; as the vessels of a potter shall they be broken to shivers. (Rev. 2:26–27)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계12:5) The woman brought forth a man child, who should pasture all nations with a rod of iron. (Rev. 12:5)

 

[4] 철장’(鐵杖, a rod of iron)은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임을 계시록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That a “rod of iron” is the truth which is of the Word of the Lord, is explained in John: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5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계19:11, 13, 15) I saw heaven open, and behold a white horse, and he that sat upon him was called faithful and true, and in righteousness he doth judge and fight; He was clothed with a vesture dipped in blood, and 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 out of his mouth goeth a sharp sword, that with it he should smite the nations; and he shall pasture them with a rod of iron. (Rev. 19:11, 1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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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21절,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Verse 21,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 21절 속뜻

 

아다와 씰라’라는 새 교회의 영적인 것들의 교리를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로,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417.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는 같은 교회 영적인 것들의 교리를,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합니다. By “his brother’s name was Jubal” is signified the doctrine of the spiritual things of the same church; by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418. 앞 절은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들을 다룬 반면, 이번 절은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걸 수금과 퉁소로 표현한 것입니다. The former verse treated of celestial things which are of love, but this verse treats of spiritual things which are of faith, and these are expressed by the “harp and organ.

 

하프(본문에서는 수금으로 번역)와 그런 종류의 현악기들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데요, 그건 여러 가지를 살펴볼 때 분명합니다. That by stringed instruments, such as harps and the like, are signified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is evident from many considerations.

 

표상교회(表象, the representative church)의 예배에서는 이런 악기들과 보컬 말고는 딱히 표현할 수 있는 게 없었는데요, 이런 이유로, 심령이 천국의 모든 기쁨으로 즐거울 때, 그걸 보컬로, 그리고 그 옆에서 그 보컬을 받쳐주고, 북돋워 주는 현악기들을 가지고 표현하기 위해 그렇게나 많은 보컬과 악기 연주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Similar instruments, and also the singing, in the worship of the representative church, represented nothing else, and it was on this account that there were so many singers and musicians, the cause of this representation being that all heavenly joy produces gladness of heart, which was expressed by singing, and in the next place by stringed instruments that emulated and exalted the singing.

 

이 예배를 마음의 모든 애정(affection)을 다해 참여하게 되는데요, 그 결과, 이 예배에 보컬과 보컬 관련된 것들이 필요하게 됩니다. Every affection of the heart is attended with this: that it produces singing, and consequently what is connected with singing.

 

마음의 애정은 천적인 반면, 그로 인한 보컬은 영적입니다. The affection of the heart is celestial, but the consequent singing is spiritual.

 

보컬과 그런 류의 의미가 영적이라는 게 무엇인가라는 걸 저는 두 종류의 천사 찬양대, 곧 천적, 영적 찬양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That singing and that which resembles it denote what is spiritual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angelic choirs, which are of two kinds, celestial and spiritual.

 

영적 찬양대는 현악기 소리에 비교되는, 그들의 활기찬 찬양 톤 [sono canoro alato] 때문에 천적 찬양대와 쉽게 구별이 되는데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The spiritual choirs are easily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by their vibrant singing tone [sono canoro alato], comparable to the sound of stringed instruments, of which, by the Divine mercy of the Lord, we shall speak hereafter.

 

태고인들은 천적인 건 심장 지역, 영적인 건 폐 지역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결과, 폐와 관련된 것들은 뭐든지, 예를 들면, 보컬 목소리 및 그와 유사한 것들을 그렇게, 곧 목소리나 그런 악기들의 소리를 영적이라고 본 것입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referred what was celestial to the province of the heart, and what was spiritual to that of the lungs, and consequently to whatever pertains to the lungs, as do the singing voice and things like it, and therefore the voices or sounds of such instruments.

 

이렇게 말씀드리는 근거는 단지 심장과 폐가 마치 사랑과 신앙처럼 일종의 결혼을 표현한다는 사실 뿐 아니라, 실제로 천적 천사들은 심장 지역에, 영적 천사들은 폐 지역에 속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The ground of this was not merely that the heart and lungs represent a kind of marriage, like that of love and faith, but also because the celestial angels belong to the province of the heart, and the spiritual angels to that of the lungs.

 

이런 것들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본문의 의미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또한 알 수 있는데요,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 그리고 유발이 수금과 퉁소’(the harp and the organ) 연주의 조상이라는 의미 말고는 아무것도 없거나, 이런 아케이나를 아는 게 아무한테도 쓸데없는 거라면 그런 건 생명이 결핍된 거여서 주님의 말씀이라 할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That such things are meant in the passage before us, may also be known from the fact that this is the Word of the Lord, and that it would be destitute of life if nothing more were implied than that Jubal was the father of such as play upon the harp and the organ; nor is it of any use to anyone to know this.

 

 

419. 천적인 것들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인 것처럼, 영적인 것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입니다. 참이 무엇이며, 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건 신앙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 so spiritual things are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for it belongs to faith to understand not only what is true, but also what is good.

 

이 둘은 둘 다 신앙의 지식들에 포함됩니다. The knowledges of faith involve both.

 

그러나 신앙의 가르침대로 되는 건 천적인 일입니다. But to be such as faith teaches is celestial.

 

신앙에 이 둘이 포함되기 때문에, 이들이 두 개의 악기, ‘수금과 퉁소로 상징되는 것입니다. As faith involves both of these, they are signified by two instruments, the harp and the organ.

 

다들 아시듯, ‘수금’(harp)은 현악기이며, 그래서 영적 진리를 의미하는 반면, 현악기와 관악기의 중간인 퉁소’(organ)는 영적 선을 의미합니다. The harp, as everyone knows, is a stringed instrument, and therefore signifies spiritual truth; but the organ, being intermediate between a stringed instrument and a wind instrument, signifies spiritual good.

 

 

420. 말씀에는 다양한 악기들이 나오며, 다들 저마다의 의미들이 있습니다. 그 의미들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그때그때 적절한 곳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는 시편 말씀으로만 말씀드립니다. In the Word mention is made of various instruments, each having its own signification, as will be shown, of the Lord’s Divine mercy, in its proper place; here however we shall adduce only what is said in David: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시27:6) I will sacrifice in the tent of Jehovah sacrifices of shouting, I will sing, yea, I will sing praises unto Jehovah, (Ps. 27:6)

 

여기 장막’(tent)은 천적인 것을, ‘즐거운’(shouting), ‘노래하며’(singing), 그리고 찬송하리로다’(singing praises)는 거기에서 나오는 영적인 것을 표현합니다. where by “tent” is expressed what is celestial, and by “shouting,” “singing,” and “singing praises,” what is spiritual thence derived.

 

Again:

 

1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2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3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4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시33:1-4) Sing unto Jehovah, O ye righteous, for his praise is comely for the upright; confess ye to Jehovah on the harp, sing unto him with the psaltery, an instrument of ten strings. Sing unto him a new song, play skillfully with a loud noise; for the Word of Jehovah is right, and all his work is in the truth, (Ps. 33:1–4)

 

다음과 같은 내용에 관한 신앙의 진리들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denoting the truths of faith, concerning which these things are said.

 

[2] 영적인 것들, 곧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은 수금과 비파(psaltery, 14, 5 세기 현악기의 일종), 그리고 찬송 및 관련 악기들을 가지고 찬양하였던 반면, 신앙의 거룩한 천적인 것들은 트럼펫 같은 관악기를 가지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전에서 왜 그렇게나 많은 악기들이, 그리고 그렇게나 자주 사용되었는지 하는 이유인데요, 그것은 이런저런 찬양의 주제들마다 해당 특정 악기로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Spiritual things, or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were celebrated with the harp and psaltery, with singing and analogous instruments, but the holy or celestial things of faith were celebrated with wind instruments, such as trumpets and the like; and this was why so many instruments were used about the temple and so often, in order that this or that subject might be celebrated with certain instruments; and in consequence of this the instruments came to be taken and understood for the subjects that were celebrated with them.

 

[3]Again:

 

22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23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시71:22-23) I will confess to thee with the psaltery, even thy truth, O my God; unto thee will I sing praises with the harp, O thou holy one of Israel; my lips shall sing when I sing praises unto thee, and my soul which thou hast redeemed, (Ps. 71:22–23)

 

여기서도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where also the truths of faith are signified.

 

Again: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시147:7) Answer to Jehovah in confession, sing praises upon the harp unto our God; (Ps. 147:7)

 

감사’(confession)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에 대한 존중, 그래서 여호와가 언급되는 것이며, ‘수금으로 찬양함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 그래서 하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confession” has respect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and therefore mention is made of “Jehovah”; and to “sing praises upon the harp” has reference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wherefore “God” is spoken of.

 

다시 Again: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149:3) Let them praise the name of Jehovah in the dance, let them sing praises unto him with the timbrel and harp, (Ps. 149:3)

 

여기 소고’(timbrel, 탬버린)는 선을, ‘수금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선과 진리는 그들이 찬양하는 것으로, 곧 주님이십니다. where the “timbrel” signifies good, and the “harp” truth, which they praise.

 

[4] 다시 Again:

 

3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4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5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시150:3-5) Praise God with the sound of the trumpet; praise him with the psaltery and harp; praise him with the timbrel and dance; praise him with stringed instruments and the organ; praise him upon the loud cymbals; praise him upon the cymbals of shouting. (Ps. 150:3–5)

 

이들 악기들은 찬양의 주제들인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가리킵니다. 이걸 모르면, 사람들은 이 각각의 악기들이 무슨 특별한 의미 없이도 여기 이렇게나 많이 언급되었다 믿기 때문입니다. These instruments denote the goods and the truths of faith which were the subjects of praise; for let no one believe that so many different instruments would have been here mentioned unless each had a distinct signification.

 

계속해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언급하면서, Again, referring to the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3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43:3, 4) O send out thy light and thy truth, let them lead me, let them bring me unto the mountain of thy holiness, and to thy habitations, and I will go in to the altar of God, unto God, the gladness of my exultation; yea, I will confess unto thee upon the harp, O God, my God. (Ps. 43:3, 4)

 

[5] 이사야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과 그에 관한 지식들을 언급하시면서 In Isaiah, referring to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and the knowledges thereof:

 

잊어버린 바 되었던 너 음녀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사23:16) Take a harp, go about the city, play well, sing many songs, that thou mayest be called to remembrance. (Isa. 23:16)

 

같은 내용이 계시록에서는 계속해서 훨씬 더 명료하게 표현됩니다. The same is expressed still more plainly in John: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계5:8) The four animals and the four and twenty elders fell down before the lamb, having every one of them harps, and golden vials full of incense offerings, which are the prayers of the saints, (Rev. 5:8)

 

여기 누가 보아도 이 말씀은 생물들과 장로들이 글자 그대로 거문고를 갖고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대신, ‘거문고’(harps)는 신앙의 진리들을, ‘향이 가득한 금 대접(vials)’은 신앙의 선들을 의미하는 말씀이라는 게 분명합니다. where it must be evident to everyone that the animals and elders had not harps, but that by “harps” are signified the truths of faith, and by “golden vials full of incense offerings,” the goods of faith.

 

시편에서는 이들 악기들의 퍼포먼스들을 찬송’(praises)감사’(confessions)라 하고 있습니다. In David the performances on the instruments are called “praises” and “confessions.” (Ps. 42:5; 69:3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42:5)

 

30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31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시69:30-31)

 

그리고 계시록 다른 곳에서 And in another place in John:

 

2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3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계14:2-3) I heard a voice from heaven as the voice of many waters, and I heard the voice of harpers harping with their harps, and they sang a new song. (Rev. 14:2–3)

 

또 다른 구절에서 And in another place: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계15:2) I saw them standing by the sea of glass having the harps of God. (Rev. 15:2)

 

천사들과 영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자기들의 차이에 따라 사운즈, 곧 노래 및 악기 연주 소리뿐 아니라, 자신들의 목소리를 구분하며, 또 사운즈 및 그로 인한 악기 소리들과, 선과 진리의 본성(nature)과 본질(essence) 사이 어떤 일치가 있을 수 있을 정도로 똑같은 소리를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인정한다는, 이런 사실들은 언급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It is worthy of mention that angels and spirits distinguish sounds according to their differences with respect to good and truth, not only those produced in singing and by instruments, but also those of voices; and they admit none but such as are in accord, so that there may be a concord of the sounds, and consequently of the instruments, with the nature and essence of the good and the true.

 

※ 즉 천국 그 수많은 천사와 영들 중 단 한 사람도 똑같은 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구성원은 철저히 그 선과 진리의 하나 됨이 다 다르기 때문이며, 천국에서 소리, 즉 사운드(sound)라는 것은 바로 이 선과 진리의 하나 됨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천국은 ‘똑같다’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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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20절,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Verse 20,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 20절 속뜻

 

 

 

412. ‘아다’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신앙의 천적,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상징합니다. ‘야발,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 치는 자의 조상’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 관한 교리와 그 교리에서 나오는 천적 선을 상징합니다. By “Adah” is signified, as before, the mother of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by “Jabal,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is signified doctrine concerning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goods thence derived, which are celestial.

 

 

413. ‘아다’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상징한다는 것은 그녀의 첫아들 야발을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 치는 자의 조상’이라 하는 데서 분명합니다. 여기 가축은 천적인데, 가축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여기서 나오는 선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That by “Adah” is signified the mother of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is evident from her firstborn Jabal being called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which are celestial because they signify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goods thence derived.

 

 

414. ‘장막에 거주하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장막’이 상징하는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o “dwell in tents” signifies what is holy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ents” in the Word.

 

시편에 보면 As in David: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시15:1-2) Jehovah, who shall abide in thy tent? Who shall dwell in the mountain of thy holiness? He that walketh upright, and worketh righteousness, and speaketh the truth in his heart, (Ps. 15:1–2)

 

이 말씀에서, ‘장막에 거주하는 것’ 혹은 ‘성산에 사는 것’을 사랑의 거룩한 것들, 즉,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in which passage, what it is to “dwell in the tent” or “in the mountain of holiness” is described by holy things of love, namely, the walking uprightly, and working righteousness.

 

계속해서 Again: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19:4) Their line is gone out through all the earth, and their discourse to the end of the world. In them hath he set a tent for the sun, (Ps. 19:4)

 

여기 ‘해’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where the “sun” denotes love.

 

다시 Again: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시61:4) I will abide in thy tent to eternities, I will trust in the covert of thy wings, (Ps. 61:4)

 

여기 ‘장막’은 천적인 것을, ‘날개 아래’는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where the “tent” denotes what is celestial, and the “covert of wings” what is spiritual thence derived.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사16:5) By mercy the throne has been made firm, and one hath sat upon it in truth, in the tent of David, judging and seeking judgment, and hasting righteousness,

 

여기 또한 ‘장막’은 사랑의 거룩한 것을 가리킵니다. ‘정의로 판결함’, ‘공의를 신속히 행함’이라는 표현을 보면 아실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where also the “tent” denotes what is holy of love, as may be seen by the mention of “judging judgment,” and “hasting righteousness.”

 

다시 Again: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사33:20) Look upon Zion, the city of our appointed feast; thine eyes shall see Jerusalem a quiet habitation, a tent that shall not be moved away, (Isa. 33:20)

 

하늘의 예루살렘을 말씀하시면서 speaking of the heavenly Jerusalem.

 

[2]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야곱 장막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할 것이고 그 거처들에 사랑을 베풀 것이라 성읍은 그 폐허가 된 언덕 위에 건축될 것이요 (렘30:18) Thus said Jehovah, Behold, I bring again the captivity of Jacob’s tents, and will have mercy on his dwelling places, and the city shall be builded upon her own heap; (Jer. 30:18)

 

‘장막의 포로’는 천적인 것, 혹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의 황폐함을 상징합니다. the “captivity of tents” signifies the vastation of what is celestial, or of the holy things of love.

 

아모스입니다. In Amos: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암9:11) In that day will I raise up the tabernacle of David which is fallen; and will fence up the breaches thereof, and I will raise up its ruins, and I will build it as in the days of eternity, (Amos 9:11)

 

여기 ‘장막’(tabernacle)은 마찬가지로 천적인 것과 그것의 거룩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where the “tabernacle” in like manner denotes what is celestial and the holy things thereof.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렘4:20) The whole land is laid waste, suddenly are my tents laid waste, and my curtains in a moment. (Jer. 4:20)

 

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내 장막을 세울 자와 내 휘장을 칠 자가 다시 없도다 (렘10:20) My tent is laid waste, and all my cords are plucked out, my sons are gone forth from me, and they are not; there is none to stretch my tent anymore, and to set up my curtains, (Jer. 10:20)

 

여기 ‘장막’은 천적인 것들을, 그리고 ‘휘장’과 ‘줄’은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where the “tent” 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 “curtains” and “cords” spiritual things thence derived.

 

다시 Again:

 

너희는 그들의 장막과 양 떼를 빼앗으며 휘장과 모든 기구와 낙타를 빼앗아다가 소유로 삼고 (렘49:29) Their tents and their flocks shall they take; they shall carry off for themselves their curtains, and all their vessels, and their camels, (Jer.49:29)

 

게달(아라비아)과 동방 자손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들은 천적이거나 거룩한 것을 소유한 사람들을 표현합니다. speaking of Arabia and the sons of the east, by whom are represented those who possess what is celestial or holy.

 

다시 Again:

 

딸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애2:4) Into the tent of the daughter of Zion the Lord hath poured out his wrath like fire, (Lam. 2:4)

 

신앙의 천적이거나 거룩한 것들의 황폐함에 관한 말씀입니다. speaking of the vastation of the celestial or holy things of faith.

 

[3] 말씀에서 이 ‘장막’이라는 용어를 채택, 천적인 것과 사랑의 거룩한 것들을 표현하는 이유는, 고대에는 예배의 거룩한 의식들을 그들의 장막에서 행했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he term “tent” is employed in the Word to represent the celestial and holy things of love is that in ancient times they performed the holy rites of worship in their tents.

 

그러나 그들이 신성모독의 예배를 장막에서 드림으로써 장막을 모독하기 시작하더니 성막이 세워졌고, 나중에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이런 이유로, 장막은 먼저 성막이, 그 다음엔 성전이 가리키는 모든 것을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But when they began to profane the tents by profane kinds of worship, the tabernacle was built, and afterwards the temple, and therefore tents represented all that was subsequently denoted first by the tabernacle, and afterwards by the temple.

 

같은 이유로, 거룩한 사람을 가리켜 주님의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이라 합니다. For the same reason a holy man is called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of the Lord.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이 같은 걸 상징한다는 것은, 시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That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have the same signification, is evident in David: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시27:4-6) One thing have I asked of Jehovah, that will I seek after, that I may remain in the house of Jehovah all the days of my life, to behold Jehovah in sweetness, and to visit early in his temple; for in the day of evil he shall hide me in his tabernacle; in the secret of his tent shall he hide me; he shall set me up upon a rock. And now shall my head be lifted up against mine enemies round about me, and I will offer in his tent sacrifices of shouting. (Ps. 27:4–6)

 

[4] 가장 높은 뜻으로는, 주님은 그의 인성과 관련하여,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천인(天人, celestial man)을 그렇게 부르며, 그래서 또한 모든 천적이며 거룩한 것들을 그렇게 부릅니다.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as to his human essence is the “tent,” the “tabernacle,” and the “temple”; hence every celestial man is so called, and also everything celestial and holy.

 

태고교회는 주님을 자기 뒤에 일어난 교회들보다 훨씬 더 사랑했으며, 그때는 혼자, 즉, 가족 단위로 살면서 자신의 장막에서 참으로 거룩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장막은 성전보다 훨씬 더 거룩하게 여겨졌습니다. 성전은 나중에 신성모독 되었습니다. Now as the most ancient church was better beloved of the Lord than the churches that followed it, and as men at that time lived alone, that is, in their own families, and celebrated so holy a worship in their tents, therefore tents were accounted more holy than the temple, which was profaned.

 

장막 시절의 모든 것을 기념하고, 대신하는 절기가 바로 초막절입니다. 토지 소산을 거둘 때에 그들은 그 절기 동안, 태곳적 사람들처럼 장막에서 지냈습니다. (레23:39-44; 신16:13; 호12:9) In remembrance thereof the feast of tabernacles was instituted, when they gathered in the produce of the earth, during which, like the most ancient people, they dwelt in tents. (Lev. 23:39–44; Deut. 16:13; Hosea 12:9)

 

39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 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40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너희는 매년 이레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일곱째 달에 이를 지킬지니라 42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43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44모세는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 (레23:39-44)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신16:13)

 

네가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기를 명절날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호12:9)

 

 

415. ‘가축 치는 자의 조상’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서 나오는 선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위, 이 장 2절에서 보여드린, ‘양 치는 자’는 이웃 사랑의 선을 상징한다는 데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That by the “father of cattle” is signified the good that is derived from the holy things of love, is evident from what was shown above, at verse 2 of this chapter, where it was shown that a “shepherd of the flock” signifies the good of charity.

 

그런데 여기 보면, ‘양 치는 자’ 대신 ‘조상’을, ‘양 떼’ 대신 ‘가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발을 가리켜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라 할 때 사용된 단어 ‘가축’이 ‘장막’ 바로 뒤에 나옵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이것은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상징한다는 것과, 가축의 주거지나 우리, 혹은 장막과 가축의 우리에 거주하는 자들의 조상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Here however the term “father” is employed instead of “shepherd,” and “cattle” instead of “flock”; and the word “cattle,” of which Jabal is said to be the “father,” follows immediately after “tent,” whence it is evident that it signifies the good that comes from the holy of love, and that there is meant a habitation or fold for cattle, or the father of them that dwell in tents and in folds for cattle.

 

그리고 이런 표현들이 사랑의 천적인 것들에서 나오는 선들을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에 나오는 다양한 본문들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And that these expressions signify goods from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is evident from various passages in the Word.

 

예레미야입니다. As in Jeremiah: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 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렘23:3) I will gather the remnants of my flock out of all lands whither I have scattered them, and I will bring them again to their folds, that they may be fruitful and multiply. (Jer. 23:3)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겔34:14) I will feed them in a good pasture, and upon the mountains of the height of Israel shall their fold be; there shall they lie down in a good fold, and in a fat pasture shall they feed upon the mountains of Israel, (Ezek. 34:14)

 

여기 ‘우리’와 ‘꼴’은 ‘살지다’로 서술된 사랑의 선들을 가리킵니다. where “folds” and “pastures” denote the goods of love, of which “fatness” is predicated.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사30:23) He shall give the rain of thy seed wherewith thou shalt sow the ground; and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shall be fat and full of oil; in that day shall he feed thy cattle in a broad meadow, (Isa. 30:23)

 

여기 ‘먹을 것’은 천적인 것을, 가축이 그 가운데서 먹게 될 ‘풍성함’은 천적인 것에서 나오는 선들을 상징합니다. where by “bread” is signified what is celestial, and by the “fat” whereon the cattle should feed, the goods thence derived.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11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12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렘31:11-12) Jehovah hath redeemed Jacob, and they shall come and sing in the height of Zion, and shall flow together to the good of Jehovah, for the wheat, and for the new wine, and for the oil, and for the sons of the flock, and of the herd; and their soul shall be as a watered garden, (Jer. 31:1112)

 

 

여기 여호와의 거룩하심이 ‘곡식’과 ‘기름’으로,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선들이 ‘새 포도주’와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 혹은 ‘가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where the holy of Jehovah is described by “wheat” and “oil,” and the goods derived from it by “new wine” and the “sons of the flock and of the herd,” or of “cattle.”

 

다시 Again:

 

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렘6:3) The shepherds and the flocks of their cattle shall come unto the daughter of Zion; they shall pitch their tents toward her round about; they shall feed everyone his own space. (Jer. 6:3)

 

‘시온의 딸’은 천적 교회를 가리키는데, ‘장막’과 ‘양 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The “daughter of Zion” denotes the celestial church, of which “tents” and “flocks of cattle” are predicated.

 

 

416.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상징하고 있음은 야발이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최초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둘째였던 아벨, 그 역시 ‘양 치는 자’였던 아벨의 경우와 같다 할 수 있으며, 야발은 가인에서 시작, 일곱 번째였기 때문입니다. That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 are signifi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Jabal was not the first of those who “dwelt in tents and in folds of cattle,” for it is said likewise of Abel, the second son of Adam and Eve, that he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Jabal was the seventh in the order of descent from C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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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19절,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Verse 19,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 19절 속뜻

 

교회의 황폐함을 상징하는 라멕, 교회가 황폐해졌다는 건 주님 신앙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참 놀랍게도 새 교회는 꼭 이때 등장합니다. 황폐한 상태에 도달해야만 교회가 주님을 모독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안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아내 중 아다는 그때 일어난 새 교회의 천적,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말합니다.

 

 

405.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은 황폐함(vastation)을 상징합니다. 더이상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을 때의 상태이지요. 그의 두 아내는 일종의 새로운 교회의 도래를 의미하는데, ‘아다는 그 교회의 천적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그리고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By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from Cain, is signified vastation, in consequence of there being no longer any faith; by his “two wives” is signified the rise of a new church; by “Adah,” the mother of its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nd by “Zillah,” the mother of its natural things.

 

 

406. 라멕의 의미가 황폐함, 혹은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음이라는 것이 분명한 것은 이어지는 23, 24절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거기 보면,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 사람은 신앙, ‘어린아이혹은 소년은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or that there was no faith,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verses (23–24), in which it is said that he “slew a man to his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his hurt”; for there, by a “man” is meant faith, and by a “little one” or “little child,” charity.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23, 24)

 


407
. 보통 한 교회의 상태는 그래서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The state of a church in general is thus circumstanced.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회는 참 신앙으로부터 멀어지다가 결국 신앙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데, ‘황폐해졌다’(vastated) 하는 것은 바로 그 지경,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In process of time it departs from the true faith until at last it comes to be entirely destitute of faith, when it is said to be “vastated.

 

이런 일이 태고교회의 경우는 가인파(가인, Cainites)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또 홍수 후 고대교회의 경우 및 유대 교회의 경우에서도 있었습니다. This was the case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among those who were called Cainites, and also with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s well as with the Jewish church.

 

주의 강림(降臨, the Lord’s advent)의 때 종말의 상태가 바로 이런 황폐한 상태였는데요,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시기로 예정되어 있던 주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몰랐으며, 그분을 향한 신앙에 대해서도 아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this last was in such a state of vastation that they knew nothing about the Lord, that he was to come into the world for their salvation, and they knew still less about faith in him.

 

초대 기독교회, 곧 주님 강림 직후 있었던 교회 역시 그랬으며, 오늘날(1750년대 즈음 유럽) 교회의 경우도 그 안에 아무런 신앙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철저하게 황폐해졌습니다. Such was also the case with the primitive Christian church, or that which existed after the Lord’s advent, and which at this day is so completely vastated that there is no faith remaining in it.

 

그러나 교회의 얼마간 핵들은 늘 남아 있는데, 이것은 신앙에 관해 황폐해진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경우가 그랬는데, 태고교회의 남은 자들은 홍수 때까지 있었고, 홍수 후에도 계속 있었습니다. Yet there always remains some nucleus of a church, which those who are vastated as to faith do not acknowledge; and thus it was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of which a remnant remained until the time of the flood, and continued after that event.

 

태고교회 내 이들 남은 자들을 노아라 하는 것입니다. This remnant of the church is called “Noah.

 

 

408. 하나의 교회가 더이상 그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지면 전과 다르게 새로움이 시작, 즉 새 빛이 발()하는데요, 말씀에서는 이걸 아침이라고 합니다. When a church has been so vastated that there is no longer any faith, then and not before, it begins anew, that is, new light shines forth,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morning.

 

이 새 빛, 아침이 왜 교회가 황폐해질 때까지는 발하지 않는지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동안 신앙과 체어리티의 일들은 모독의 일들과 뒤엉킨 상태로 지내왔는데요, 계속 이런 상태에 있는 한, 무슨 빛이나 체어리티의 일이 시작되기란 불가능합니다. ‘잡초들이 모든 좋은 씨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he new light or “morning” does not shine forth until the church is vastated, is that the things of faith and of charity have been commingled with things profane; and so long as they remain in this state it is impossible for anything of light or charity to be insinuated, since the “tares” destroy all the “good seed.

 

※ 주님의 비유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13:24-30)

 

그러나 신앙이라는 게 전혀 없으면, 신앙은 더이상 모독(冒瀆, profaned)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선포된 걸 더이상 믿지 않기 때문이며, 시인도 안 하고 믿지도 않는, 대신 알기만 하는 사람들은 위에서 관찰한 것처럼, 모독이라는 걸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But when there is no faith, faith can no longer be profaned, because men no longer believe what is declared unto them; and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but only know, cannot profane, as was observed above.

 

이 경우가 바로 오늘날 유대인들의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시인하는 주님이 자기들이 그토록 자원하여 기다려 왔고, 지금도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이 사실을 시인하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실을 모독할 수 없습니다. This is the case with the Jews at the present day, who in consequence of living among Christians must be aware that the Lord is acknowledged by Christians to be the messiah whom they themselves have expected, and still continue to expect, but yet they cannot profane this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it.

 

※ 이런 유대인들의 특성은 저들의 이런 성정을 잘 아시는 주님의, 저들을 향하신 배려라고 합니다. 저들은 조상들로부터 유전한 그 특성 상, 만일 주님을 시인하고, 믿게 되면 반드시 돌이켜 부인, 결국 주님을 모독하게 되고, 그 결과, 그 영이 더럽혀질 것을 아셨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에 대하여 들은 모하메드인들과 이방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And it is the same with the Mohammedans and gentiles who have heard about the Lord.

 

이것이 바로 유대 교회가 아무것도 시인도, 믿음도 없을 때까지는 주님이 세상에 오실 수 없으셨던 이유였습니다. It was for this reason that the Lord did not come into the world until the Jewish church acknowledged and believed nothing.

 

 

409. 세월이 흐르며 황폐해진 가인이라 하는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이들은 사랑을 시인해 놓고는 사랑 아닌 신앙을 머리 삼으며, 사랑보다 앞세웠습니다. 이 이단에서 유래한 후대의 이단들은 점점 더 곁길로 빠지더니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에 이르러서는 아예 신앙조차 부인했습니다. The case was the same with the heresy called “Cain,” which in process of time was vastated, for although it acknowledged love, yet it made faith the chief and set it before love, and the heresies derived from this one gradually wandered from it, and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altogether denied even faith.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새 빛, 곧 아침이 빛을 발하며, 여기 아다와 씰라라는 이름을 가진, ‘라멕의 아내들이라는 새 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When this time arrived, a new light, or morning, shone forth, and a new church was made which is here named “Adah and Zillah,” who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그들을 일컬어 라멕의 아내들이라 하고 있습니다. 라멕이라는 교회는 아무 신앙도 갖고 있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의 내적(內的, the internal), 외적(外的, the external) 교회와 같은 경우인데요, 마찬가지로 신앙이라는 게 전혀 없었던 이들 유대인들의 두 교회를, 말씀에 보면 아내들’, 곧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이라 하고 있으며, 거기서 레아는 외적 교회, 라헬은 내적 교회를 말합니다. They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although he possessed no faith, just as the internal and external church of the Jews, who also had no faith, are also in the Word called “wives,” being represented by Leah and Rachel, the two wives of Jacob—Leah representing the external church and Rachel the internal.

 

이들 교회들은 겉으로는 둘로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입니다. 내적인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외적인 것, 곧 표상적인 것(表象, the representative)은 단지 무슨 우상을 숭배하는 것, 곧 죽은 것인 반면, 외적인 것과 함께하는 내적인 것은 하나의 교회, 여기 아다와 씰라가 그런 것처럼 심지어 하나 된, 같은 교회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These churches, although they appear like two, are yet only one; for the external or representative, separate from the internal, is but as something idolatrous, or dead, whereas the internal together with the external constitute a church, and even one and the same church, as Adah and Zillah do here.

 

하지만 야곱과 그의 후손은 라멕처럼 신앙이라는 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교회는 그들 가운데 남아 있을 수가 없어 대신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이들 이방인들은 부정(不貞, infidelity) 대신 무지(無知, ignorance) 가운데 살았지요. As however Jacob and his posterity, like Lamech, had no faith, the church could not remain with them, but was transferred to the gentiles, who lived not in infidelity but in ignorance.

 

교회가 황폐해졌을 때, 그 가운데 진리를 가진 사람들이 남아 있을 경우는,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극히 드물며, 교회는 그 경우, 진리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로 이동하는데요, 오히려 이 사람들이 저 사람들보다 더 쉽게 신앙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The church rarely, if ever, remains with those who when vastated have truths among them [apud se] but is transferred to those who know nothing at all of truths, for these embrace the faith much more easily than the former.

 

※ 이 말씀이 정말 맞다싶은 건, 제가 이 아케이나를 삼 년여 약 백여 분, 정말 진국 중에 진국이라 여겨지는 분들임에도 불구, 그 중에서 요만큼의 희망을 볼 수 있는 분은 아주아주 범위를 넓혀, 그러니까 저를 무슨 의혹을 품고 대하지만 않는 분들로 넓혀도 대략 다섯 분을 넘지 않는 현실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정말이지... 늘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소위 생고구마들을 데리고 새로 시작해야 하나 하고 있었는데 여기 이런 말씀이 나오는군요... ^^

 

 

410. 황폐함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알고 있으면서 알기를 원치 않거나, 보고 있으면서 보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입니다. 옛 유대인들과 오늘날 기독교인들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는, 무지의 결과, 뭘 알지도 못하고, 볼 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고대와 현대의 이방인들처럼 말입니다. Vastation is of two kinds; first, of those who know and do not wish to know, or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like the Jews of old, and the Christians of the present day; and secondly, of those who, in consequence of their ignorance, neither know nor see anything, like both the ancient and modern gentiles.

 

알면서도 아는 걸 원치 않는, 즉 보면서도 보는 걸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황폐함의 마지막 때가 이르면 이때 하나의 교회가 새롭게 일어나는데요, 이들이 아니고, 이들이 이방인이라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일어납니다. When the last time of vastation comes upon those who know and do not desire to know, that is,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then a church arises anew, not among them, but with those whom they call gentiles.

 

이런 일이 홍수 전 태고교회에 일어났고, 또 홍수 후 고대교회와, 그리고 유대교회에도 일어났습니다. This occurred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was before the flood, with the ancient church that was after that event, and also with the Jewish church.

 

새 빛이 그때 빛을 발하고, 그전에는 아닌 이유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그때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들이 진리임을 시인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new light shines forth then and not before is, as has been said, that then they can no longer profane the things revealed,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that they are true.

 

※ 그렇다고 주님의 진리를 시인하지 않는 것, 믿지 않는 것이 잘 하는 것, 좋은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비유하자면... 안 믿는데 정직하고 양심적인 사람과, 믿는다고 하면서 속이고, 비양심적인 사람과... 이 둘 중 전자는 그 영이 깨끗한 반면, 후자는 자기 영에 죄를 짓는 사람, 자기 영을 더럽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후 운명은 이 영의 어떠함으로 결정되는데... 이럴 경우, 이 후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사랑의 주님은 ‘신성모독’을 금하신 것입니다. 신성모독으로 사람의 영은 망가지기 때문인데, 신성모독의 사람은 주님도 수습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411. 새 교회가 일어날 수 있으려면 반드시 그전에 먼저 황폐함이라는 마지막 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님은 예언서에서 자주 선언하시는데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해서는 황폐함’(vastation), 혹은 황폐하게 함으로, 그리고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해서는 황무함’(desolation)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That the last time of vastation must exist before a new church can arise, is frequently declared by the Lord in the prophets, and is there called “vastation” or “laying waste,” in reference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and “desolation,” in relation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또는 종말’(consummation), ‘끊음’(cutting off)으로도 말씀하십니다. (다음 본문들 참조 : 6:9, 11-12, 23:8-끝절, 24, 42:15-18, 25, 8, 9:24-끝절, 1, 32, 15, 16 및 이어지는 장들) It is also spoken of as “consummation” and “cutting off.” (See Isa. 6:9, 11–12; 23:8 to the end; 24; 42:15–18; Jer. 25; Dan. 8; 9:24 to the end; Zeph. 1; Deut. 32; Rev. 15; 16; and following chap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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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18절,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Verse 18,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 18절 속뜻

 

이 여러 이름들은 에녹에 뒤이어 일어난 이단들의 이름이며, 그저 이름만 있을 뿐이어서 딱히 드릴 언급은 없습니다.

 

 

404. 이 이름들은 모두 가인이라 하는 첫 이단에서 유래된 이단들을 말합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이름들밖에는 현존하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무슨 언급을 하는 건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All these names signify heresies derived from the first, which was called “Cain”; but as there is nothing extant respecting them, except the names, it is unnecessary to say anything about them.

 

이 이름들의 기원들을 가지고 뭔가 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예를 들면, ‘이랏성의 후손이라는 것, 그렇다면 에녹이라는 이단에서 비롯되었나? 뭐 그런 것입니다. Something might be gathered from the derivations of the names; for example, “Irad” means that he “descends from a city,” thus from the heresy called “Enoch,” and s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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