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5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창5:23-24)

 

※ 23, 24절 속뜻

 

 

 

520.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라는 표현은 그들의 수가 아주 적었다는 뜻입니다. By “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is signified that they were few.

 

그의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표현은 위에서처럼, 신앙 관련 교리를 의미합니다. By his “walking with God” is signified, as above, doctrine concerning faith.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표현은 후손들의 사용을 위해 이 교리를 보존하신다는 뜻입니다. By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is signified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표현이 후손들의 사용을 위해 이 교리를 보존하심을 뜻한다는 것에 관하여, 에녹의 경우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에서는 퍼셉션의 일이었던 것을 교리라는 형태로 하향 재탄생케 하였는데, 이것은 그 교회 시대에는 허용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퍼셉션으로 아는 것은, 교리로 배우는 것하고는 아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As to the words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signifying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the case with Enoch, as already said, is that he reduced to doctrine what in the most ancient church had been a matter of perception, and which in the time of that church was not allowable; for to know by perception is a very different thing from learning by doctrine.

 

퍼셉션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교리 형태로 정리해서 굳이 따로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다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They who are in perception have no need to learn by formulated doctrine that which they know already.

 

예를 들어, 잘 생각하는 법을 이미 아는 사람은 생각하는 법을 예술 수준으로까지 올린 무슨 규칙들을 가지고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오히려 그의 잘 생각하는 타고난 재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스콜라 철학의 먼지를 스틱으로 빠르게 찌르고 있는 사람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For example: he who knows how to think well, has no occasion to be taught to think by any rules of art, for in this way his faculty of thinking well would be impaired, as is the case with those who stick fast in scholastic dust.

 

퍼셉션으로 배우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내적 방식과 경로로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교리로 배우는 사람들은, 지식이라는 것을 외적 방식, 혹은 육체적 감각으로 얻게 되는데, 이 둘의 차이는 마치 빛과 어두움 간 차이와도 같습니다. To those who learn by perception, the Lord grants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by an inward way; but to those who learn from doctrine, knowledge is given by an external way, or that of the bodily senses; and the difference is like that between light and darkness.

 

또한 천적 인간의 퍼셉션은 도무지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없다는 점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가장 작고 특별한 것들 속으로 상태들과 환경들, 상황들을 따라 온갖 다양성을 가지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Consider also that the perceptions of the celestial man are such as to admit of no description, for they enter into the most minute and particular things, with all variety according to states and circumstances.

 

그러나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사라지고 난 후, 인류는 무엇이 진리요, 선인지를 교리로 배우게 되며, 곧, 어두움을 겪고 나서 빛으로 나아오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여기 이르시기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 즉, 후손들이 사용하도록 그 교리를 보존하셨다 하신 것입니다.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ould perish, and that afterwards mankind would learn by doctrines what is true and good, or by darkness would come to light, it is here said that “God took him,” that is, preserved the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522. 또한 ‘에녹’이라 하는 사람들이 가진 퍼셉션의 상태와 퀄러티가 제게 경험된 적이 있었는데요, The state and quality of the perception with those who were called “Enoch” have also been made known to me.

 

그것은 일종의 무슨 차이점 없는 일반적인 뿌연 퍼셉션이었습니다. 이런 경우, 마음은 자기 밖 희미한 뷰를 교리적인 것으로 결정합니다. It was a kind of general obscure perception without any distinctness; for in such a case the mind determines its view outside of itself into the doctrinal things.

 

안 좋아진 눈을 가지고 어렴풋이 보는 걸 ‘아, 저건 무엇이다!’ 단정하는 것 같은, 그런 게 아닌가, 그런 수준으로 퍼셉션의 하향 쇠락의 상태가 아닌가, 에녹 교회의 퍼셉션 상태가... 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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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22절,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Verse 22,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 22절 속뜻

 

 

 

518. ‘하나님과 동행’은 신앙에 관한 교리를 상징합니다. To “walk with God” signifies doctrine concerning faith.

 

그가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That he “begat sons and daughters” signifies doctrinal matters concerning truths and goods.

 

 

519. 태고 교회에서 출발, 그 후속 교회들에 이르기까지 퍼셉션에 속했던 사안들로부터 교리들을 추출, 뼈대를 세우며 조직하던 사람들이 그때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한 이유는, 이 교리를 기준으로 사람들이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이 사람들이 바로 ‘에녹’입니다. There were some at that time who framed doctrines from the things that had been matters of perception in the most ancient and succeeding churches, in order that such doctrine might serve as a rule whereby to know what was good and true: such persons were called “Enoch.”

 

‘그리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며, 그래서 그들은 그걸 가리켜 교리라 하였는데, 이것은 ‘에녹’이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바와 비슷합니다. 이 이름의 뜻이 ‘가르치다’이기 때문입니다.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so did they call that doctrine; which is likewise signified by the name “Enoch,” which means to “instruct.”

 

‘동행하다’라는 표현 역시 같은 걸 상징하는데요, 그를 일컬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 하지 ‘여호와와 동행하였다’라고는 하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신앙의 교리를 따라 가르치며 사는 것이지만,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expression to “walk,” and from the fact that he is said to have “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 to “walk with God” is to teach an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faith, but to “walk with Jehovah” is to live the life of love.

 

‘행(行)하다, 걷다, 살다’라는 표현은 살아가는 걸 상징하는 일상적인 말투입니다. 예를 들면, ‘법대로 살다’, ‘규범 가운데 살다’, ‘진실하게 살다’처럼 말입니다. To “walk” is a customary form of speaking that signifies to live, as to “walk in the law,” to “walk in the statutes,” to “walk in the truth.”

 

‘행하는 것’은 어떤 길이나 삶, 방식에 대한 적절한 레퍼런스를 갖는 것인데, 이 길은 진리, 곧 신앙 혹은 신앙의 교리와 관련됩니다. To “walk” has reference properly to a way, which has relation to truth, consequently to faith, or the doctrine of faith.

 

말씀에서 ‘행함’이 상징하는 바는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What is signified in the Word by “walking,” may in some measure appear from the following passages.

 

[2] 미가입니다. In Micah: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6:8) He hath showed thee,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th Jehovah require of thee, but to do judgment and the love of mercy, and to humble thyself by walking with thy God?, (Micah 6:8)

 

여기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상징하는 바는 여기서 가리키는 것들을 따라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 ‘하나님과 함께’라는 표현에 대해서, 에녹에 대한 다른 성경(히브리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함께로부터’를 상징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좀 애매합니다. where to “walk with God” signifies to live according to the things here indicated; here, however, it is said “with God,” while of Enoch another word is used which signifies also “from with God,” so that the expression is ambiguous.

 

시편입니다. In David: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56:13) Thou hast delivered my feet from impulsion, that I may walk before God in the light of the living, (Ps. 56:13)

 

여기 ‘하나님 앞에서 다니는 것’은 신앙의 진리, 곧 ‘생명의 빛’ 가운데 다니는 것입니다. where to “walk before God” is to walk in the truth of faith, which is the “light of the living.”

 

이사야에서도 같습니다. In like manner in Isaiah: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9:2) The people that walk in darkness see a great light. (Isa. 9:1)

 

또한 주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So the Lord says by Moses: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26:12) I will walk in the midst, and will be your God, and ye shall be my people, (Lev. 26:12)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을 상징하십니다. signifying that they shoul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the law.

 

[3]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8:2) They shall spread them before the sun, and the moon, and to the armies of the heavens, whom they have loved, and whom they have served, and after whom they have walked, and whom they have sought, (Jer. 8:2)

 

여기 보면, 사랑 관련된 것들과 신앙 관련된 것들 사이에 뚜렷한 차이를 두는데요, 전자는 ‘사랑하며’와 ‘섬기며’로, 후자는 ‘뒤따르며’와 ‘구하며’로 각각 표현하고 있습니다. where a manifest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e things of love, and those of faith; the things of love being expressed by “loving” and “serving”; and those of faith by “walking” and “seeking.”

 

모든 예언서들을 보면, 모든 표현들을 아주 정교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표현을 다른 걸로 적당히 대신하거나 섞어 쓰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In all the prophetical writings every expression is used with accuracy, nor is one term ever used in the place of another.

 

말씀에서 ‘여호와와 함께 걷다’나 ‘여호와 앞에’라는 표현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But to “walk with Jehovah,” or “before Jehovah,” signifies, in the Word, to live the life of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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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21절,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Verse 21,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 21절 속뜻

 

 

 

516. 전에 말씀드린 대로, ‘에녹’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는 여덟 번째 교회를 각각 상징합니다. By “Enoch,”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seventh church; and by “Methuselah” an eighth.

 

 

517. ‘에녹’이라는 교회의 퀄러티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설명합니다. The quality of the church “Enoch”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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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he died. (창5:19-20)

 

※ 19, 20절 속뜻

 

 

 

515. 이들 표현들의 상징들 또한 위 같은 표현들의 것들과 유사합니다. The signification of these words also is similar to that of the like words above.

 

야렛이 구백육십이 세를 살았다, 므두셀라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았다 하여 대홍수 이전 사람들의 나이가 실제로 이렇게 엄청났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사실을, 특별히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다음 장 3절,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창6:3)를 통해 모두가 아시게 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햇수들은 어떤 개인의 수명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해당 교회의 때와 상태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That the ages of the antediluvians were not so great, as that of Jared nine hundred and sixty-two years, and that of Methuselah nine hundred and sixty-nine years, must appear to everyone, especially from w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said at verse 3 of the next chapter, where we read, “Their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so that the number of the years does not signify the age of any particular man, but the times and states of the church.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창세기 12장까지는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난 역사기록이 아닙니다. 역사기록은 아브라함 때부터입니다. 성경의 기록, 기술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첫 부분의 기록 방식은 스토리텔링 방식입니다. 많은 내용을 함축한 어떤 스토리를 의인화한 등장인물들을 통해 풀어내는 방식인데, 특히 태고 및 초창기 고대 시대 사람들이 이런 방식을 즐겨 사용했고, 그래서 성경의 첫 부분이 이런 방식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이런 어떤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글자 그대로 이해하게 되면 여러 가지 무리한 해석과 어려움이 생겨나게 됩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며, 주님의 말씀은 그런 이상한 말씀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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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18절,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Verse 18,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 18절 속뜻

 

 

 

513. ‘야렛’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은 일곱 번째 교회를 각각 상징합니다. By “Jared,”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sixth church; by “Enoch” a seventh.

 

 

514. ‘야렛’이라는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게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가 대략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그 앞 교회였던 ‘마할랄렐’과, 그 다음 교회인 ‘에녹’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교회는 그 둘 사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Concerning the church called “Jared” nothing is related; but its character may be known from the church “Mahalalel” which preceded it, and the church “Enoch” which followed it, between which two it was intermediate.

 

거듭 말씀드리지만, 게난 및 마할랄렐 시대, 그리고 오늘 야렛 시대에도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래서, 나는 저래서 천국 준비를 할 시간이 없었다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어떤 시대, 무슨 환경에서도 천국 갈 사람은 천국 준비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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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And Mahalalel lived after he begat Jar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Mahalalel were eight hundred ninety and five years; and he died. (창5:16-17)

 

※ 16, 17절 속뜻

 

 

 

512. 이 표현들은 앞의 비슷한 표현들과 같은 의미입니다. It is the same with these words as with the like words before.

 

팔백구십오(895)라는 숫자가 문자 그대로 실제로 895년을 뜻하는 게 아닌, 어떤 긴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주님은 게난에 이어 마할랄렐로 이어지는, 점점 더 안 좋은 쪽으로 기울어지는 시대의 흐름을 그대로 허용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편의상, 구백 년으로 보면, 실제로는 그 이상이었겠지만, 거의 천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인물과 사건, 사상의 부침이 있었을 텐데도, 노아의 홍수라는 종말을 향해 유유히 흘러가는 그 장강, 대하의 물결을 주님은 의도적으로 간섭하시거나 개입하셔서 강제로 돌리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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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15절,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Verse 15,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 15절 속뜻

 

 

 

510. ‘마할랄렐’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다섯 번째 교회를, ‘야렛’은 여섯 번째 교회를 각각 상징합니다. By “Mahalalel” is signified, as before said, a fifth church; by “Jared” a sixth.

 

 

511. 퍼셉션 능력의 감소와, 이 능력이 더욱 예리해지거나 뚜렷해지는 대신 오히려 평범해지거나 모호해졌을 때, 사랑 혹은 쓰임새의 삶(생명) 또한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랑 혹은 쓰임새의 삶(생명)의 모습이 퍼셉션 능력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As the perceptive faculty decreased, and from being more particular or distinct, became more general or obscure, so also did the life of love or of uses; for as is the life of love or of uses, so is the perceptive faculty.

 

선에서 진리를 아는 것이 천적(天的, celestial)입니다. ‘마할랄렐’이라는 교회를 구성하던 사람들은 진리에서 큰 기쁨 얻는 것을 그 진리를 사용함으로써 맛보는 기쁨보다 더 좋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이런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제가 영계에 있을 때, 마할랄렐 때 사람과 같은 사람들을 만나봄으로써 알게 된 것입니다. From good to know truth is celestial; the life of those who constituted the church called “Mahalalel” was such that they preferred the delight from truths to the delight from uses, as has been given me to know by experience among their like in the other life.

 

참고로,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은 곧 주님 자신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주님의 선을 행할 뿐인데 사람들은 거기서 주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퍼셉션은 선이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그들의 심비(心碑)에 심으셨기 때문인데, 그들의 조상, 곧 태고교회 첫 교회인 아담교회가 거듭남을 완성하여 안식에 들어간 천적 인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을 통해 선과 진리를 알았으면 이제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퍼셉션의 생명이 시작되며,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주석이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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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Kenan were nine hundred and ten years; and he died. (창5:13-14)

 

※ 13, 14절 속뜻

 

 

 

508. 여기 ‘날’과 ‘해’의 수, 곧 햇수는 앞서와 같은 상징들을 갖습니다.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have the same signification here as before.

 

여기 ‘자녀’ 또한 진리와 선을 상징합니다. 이 교회 사람들에게도 역시 퍼셉션이 있었지만, 그러나 이들은 앞 세 교회보다 더 일반적으로만 취급했습니다. “Sons and daughters” here also signify truths and goods, whereof the members of the church had a perception, but in a more general manner.

 

즉, 덜 소중하게, 시큰둥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점점 더 자기를 사랑하게 되어 자기들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이 퍼셉션 능력을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퍼셉션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뜻에 아주 예민한 상태로 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주님보다 자기와 세상을 더 사랑하고픈 사람에게는 이 천부적 재능처럼 불편한 재능도 아마 없었지 싶습니다...

 

그가 ‘죽었다’라는 것은 이런 퍼셉션의 상태가 멈춘,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 그런 것을 상징합니다. That he “died” signifies in like manner the cessation of such a state of perception.

 

 

509. 여기서 꼭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은 교회의 상태와 어떻게 관련되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It is here only to be remarked, that all things are determined by their relation to the state of the church.

 

모든 천사가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듯 모든 사람은 가장 작은 형태의 교회입니다. 모든 천사와 사람은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를 담는 그릇입니다. 모든 것은 그가 주님의 신성을 얼마나 담고 있느냐로 결정되며, 그렇게 교회의 상태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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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12절,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Verse 12,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 12절 속뜻

 

 

 

506. ‘게난’은 네 번째 교회를, ‘마할랄렐’은 다섯 번째를 각각 상징합니다. By “Kenan” is signified a fourth church, and by “Mahalalel” a fifth.

 

 

507. ‘게난’이라 하는 교회는 퍼셉션에 관한 한, 보다 더 완전한 교회인 위 세 교회 중 하나로 여겨질 정도는 아닙니다. 이들 세 교회는 퍼셉션에 있어 서로 구별될 정도였지만 지금은 평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열매나 씨의 핵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첫 번째 막과도 같이 말이지요. 이런 상태는 사실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어지는 후속 교회들, 예를 들면, ‘에녹’, ‘노아’라 하는 교회들에 관한 설명을 보면 분명히 다른 상태입니다. The church called “Kenan” is not to be so much reckoned among those three more perfect ones, inasmuch as perception, which in the former churches had been distinct, began now to become general, comparatively as are the first and softer membranes relatively to the kernel of fruits or seeds; which state is not indeed described, but still is apparent from what follows, as from the description of the churches called “Enoch” and “No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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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sh lived after he begat Kenan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sh were nine hundred and five years; and he died.

 

※ 10, 11절 속뜻

 

 

 

504. 여기 ‘날’(days) 및 ‘해’(years)의 수, 그리고 ‘자녀’ 및 ‘죽음’ 역시 앞에서 다룬 것들과 같은 것들을 상징합니다. Here in like manner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and also “sons and daughters,” and his “dying,” signify like things.

 

 

505. ‘에노스’는 앞서 본 대로 세 번째 교회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의 일원입니다. 그러나 ‘셋’보다 덜 천적이며, 그래서 퍼셉션에 있어 덜한 교회입니다. ‘셋’ 역시 그 부모 교회인 ‘아담’ 교회보다 덜 천적이며, 퍼셉션에 있어 덜한 교회였습니다. “Enosh,” as before observed, is a third church,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but less celestial, and consequently less perceptive, than the church “Seth”; and this latter was not so celestial and perceptive as the parent church, called “man.”

 

이들 세 교회를 일컬어 함께 태고교회라고는 하지만, 태고교회는 그 후속 교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매 혹은 씨앗의 핵에 해당하고, 반면, 이어지는 후속 교회들은 상대적으로 그 열매의 막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These three are what constitute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relatively to the succeeding ones, was as the kernel of fruits, or seeds, whereas the succeeding churches are relatively as the membranaceous parts of th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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