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5

 

9절,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Verse 9,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 9절 속뜻

 

 

 

500.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에노스’는 ‘셋’ 교회보다도 덜 천적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태고교회의 일원인 세 번째 교회를 상징합니다. ‘게난’은 먼저 교회인 에노스를 계승한 네 번째 교회를 상징합니다. By “Enosh,”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third church, still less celestial than the church “Seth,”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by “Kenan” is signified a fourth church, which succeeded the former ones.

 

 

501. 세월이 흘러 서로 부모-자식으로 연결된 교회들, 그래서 이 교회가 저 교회에서 나왔다 말할 수 있는 교회들에 관하여, 이럴 경우, 그것은 마치 열매들 혹은 그 씨앗들의 경우와 같습니다. As regards the churches that in course of time succeeded one another, and of which it is said that one was born from another, the case with them was the same as it is with fruits, or with their seeds.

 

이것들의 한 가운데, 즉, 그 가장 안쪽에는 말하자면, 열매들의 열매들, 혹은 씨앗들의 씨앗들이 있고, 이로 말미암아, 그 이어지는 부위들이 순서대로 생명을 받습니다. In the midst of these, that is, in their inmosts, there are as it were fruits of the fruits, or seeds of the seeds, from which live as it were in regular order the successive parts.

 

가장 안쪽인 중심에서 가장 바깥쪽인 둘레를 향하여 멀면 멀수록 열매 혹은 씨앗의 본질, 그들 안에 있는 본질이 흐릿해져서 결국 그 열매나 씨앗이 종료되는 최종 껍질밖에 남지 않습니다. For the more remote these are from the inmost toward the circumference, the less of the essence of the fruit or of the seed is there in them, until finally they are but the cuticles or coverings in which the fruits or seeds terminate.

 

아니면 이번엔 사람의 두뇌의 경우입니다. 두뇌 가장 안쪽 파트는 대뇌 피질이라 하는 아주 섬세한 조직들로 형성되며, 거기서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혼(soul)의 활동이 전개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순서대로 아주 순수한 막들 및 아주 촘촘한 막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다가 최종 뇌수막이라 하는 일반적인 막들에서 끝나다가, 결국 가장 일반적인, 전체를 싸는 막, 곧 두개골에서 마칩니다. Or as in the case of the brain, in the inmost parts of which are subtle organic forms called the cortical substances, from which and by which the operations of the soul proceed; and from which in regular order the purer coverings follow in succession, then the denser ones, and finally the general coverings called meninges, which are terminated in coverings still more general, and at last in the most general of all, which is the skull.

 

 

502. 이들 세 교회, ‘아담’(사람, man), ‘셋’, ‘에노스’는 함께 태고교회를 구성하면서도, 그러나 퍼셉션에 관한 온전함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앞서 살핀 열매나 씨, 그리고 두뇌의 경우처럼 첫 번째 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그 후속 교회들로 계승되어 내려가다가 점차 줄어들고 평범해져 갔습니다. These three churches, “man,” “Seth,” and “Enosh,” constitute the most ancient church, but still with a difference of perfection as to perceptions: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first church gradually diminished in the succeeding churches, and became more general, as observed concerning fruit or its seed, and concerning the brain.

 

퍼셉션은 처음에는 온전하여 뚜렷이 지각하는 능력이었다가 갈수록 줄어들어 덜 뚜렷하고 더 평범해집니다. 즉, 온전함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런 식으로, 더 모호한 퍼셉션이 더 명료했던 자리를 계승하고, 역시 그런 식으로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Perfection consists in the faculty of perceiving distinctly, which faculty is diminished when the perception is less distinct and more general; an obscurer perception then succeeds in the place of that which was clearer, and thus it begins to vanish away.

 

 

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각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선행에서 나오는 행복과 기쁨으로도 이루어졌습니다. 선을 행할 때 맛보는 이런 행복과 기쁨 없는 퍼셉션 능력에는 아무런 생명이 없습니다. 퍼셉션 능력, 역량이 생명이 있으려면 이런 행복과 기쁨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consisted not only in 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but also in the happiness and delight arising from well doing; without such happiness and delight in doing what is good the perceptive faculty has no life, but by virtue of such happiness and delight it receives life.

 

사랑과 사랑에서 오는 신앙의 생명의 퀄러티, 이것이 바로 태고교회 안에 있던 건데요, 이것이 곧 우리가 쓰임새의 삶을 살고 있거나, 쓰임새 있는 행위를 할 때 오는 선과 진리를 붙잡을 때, 우리에게 허락되는 생명의 퀄러티입니다. 쓸모없는 것 안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쓸모가 없는 것은 거절되기 때문입니다. The life of love, and of the derivative faith, such as the most ancient church enjoyed, is life while in the performance of use, that is, in the good and truth of use: from use, by use, and according to use, is life given by the Lord; there can be no life in what is useless, for whatever is useless is cast away.

 

이런 면에서, 태고인들은 주님의 모양이었고, 그래서 퍼셉션 능력 가운데서 그들은 주님의 형상이 되었습니다. In this respect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likenesses of the Lord, and therefore in perceptive powers they became images of him.

 

퍼셉션 능력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결과적으로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것으로만 기뻐하지 않고, 선과 진리를 행하는 것, 즉, 쓰임새 있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The perceptive power consists in knowing what is good and true, consequently what is of faith: he who is in love is not delighted in knowing, but in doing what is good and true, that is, in being use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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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e hundred and twelve years; and he died.

 

※ 7, 8절 속뜻

 

 

 

499. 여기 ‘날’(days)과 ‘해’(years)는 앞서(cf. 482, 487, 488) 말씀드린 대로, 때(times)와 상태(states)를 상징합니다.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signify here as before the times and states.

 

‘자녀’ 역시 앞서(cf. 489)와 같은 상징을 갖습니다. 그는 ‘죽었더라’(cf. 494)하는 문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ons and daughters” too have the same signification as before; and so likewise as the statement that he “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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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6절,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Verse 6,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 6절 속뜻

 

 

 

496. ‘셋’은 관찰(cf. 481)한 대로, 두 번째 교회이며, 부모 교회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의 일원인 교회입니다. 그가 ‘백오 세를 살았다’는 것은, 앞(cf. 482, 487, 488)에서 보았듯이 그들의 시간(times, 때)와 상태를 상징하며,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라 하는 또 다른 교회가 이어져 내려왔음을 상징합니다. “Seth,” as was observed,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that he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signifies, as before, times and states; that he “begat 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that was called “Enosh.”

 

 

497. ‘셋’은 두 번째 교회요, 부모 교회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의 일원인 교회라는 것은, 위 3절, 셋에 관한 내용(cf. 484, 485)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That “Seth”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may appear from what was said above concerning Seth (verse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앞서 언급해온 대로, 교회들의 경우 서서히,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본질에 있어 위(cf. 494:2)에서 언급한 이유로 인해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The case with churches, as we have said, is that by degrees, and in process of time, they decrease as to essentials, owing to the cause above mentioned.

 

 

498.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라 하는 또 다른 교회가 이어져 내려왔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본 장에서 이름들이 교회 말고 다른 걸 상징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he “begat 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called “Enos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n this chapter the names signify nothing else than chur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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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5절,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Verse 5,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 5절 속뜻

 

 

 

492. 여기 ‘날’(days)과 ‘해’(years, 세)는 위에서처럼 때(횟수)와 상태를, ‘사람의 죽음’은 그런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각각 상징합니다. By “days” and “years” are he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as above; by “man’s dying” is signified that such perception no longer existed.

 

 

493. ‘날’과 ‘해’가 때(혹은 횟수)와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언급 말고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지 싶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는 실제 수량을 나타내는 숫자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숫자들이 그 고유 본성의 끝단, 곧 일상에 필요한 하나하나의 수량을 나타내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면, 달걀 한 판에 얼마, 수도세, 전기세 얼마 등등입니다. 그러나 말씀에서는, 이 숫자들이 그 수량에 맞춰 어떤 추상적 상징을 갖습니다. 예를 들면,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출20:9),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8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10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레25:8, 10),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주님의 열두 제자, 칠십 인의 장로들, 그리고 주님의 칠십 인의 제자들 및 다른 많은 경우들 모두, 이렇게 구체적 숫자가 적용되었을 때 어떤 특별한 추상적 상징들을 갖게 되는데, 그렇게 갖게 된 추상적 상징이 바로 그 숫자가 상징하는 상태입니다. That by “days” and “year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needs no further explication, except to say that in the world there must needs be times and measures, to which numbers may be applied because they are in the ultimates of nature; but whenever they are applied in the Word, the numbers of the days and years, and also of the measures, have a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imes and measures, in accordance with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as where it is said that there are six days of labor, and that the seventh is holy, of which above; that the jubilee should be proclaimed every forty-ninth year, and should be celebrated in the fiftieth; that the tribes of Israel were twelve, and the apostles of the Lord the same; that there were seventy elders, and as many disciples of the Lord; and so in many other instances where the numbers have a special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hings to which they are applied; and when thus abstracted, then it is states that are signified by the numbers.

 

 

494. 그가 ‘죽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런 퍼셉션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라는 뜻임은 ‘죽다’라는 단어의 상징, 즉, 어떤 것이 이전 상태에 더 이상 있기를 멈추다라는 의미임을 볼 때 분명합니다. That he “died” signifies that there was no longer such percep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die,” which is, that a thing ceases to be such as it has been.

 

요한계시록입니다. Thus in John:

 

1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계3:1-2) Un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Sardis write, These things saith he that hath the seven spirits, and the seven stars; I know thy works, that thou art said to live, but art dead; be watchful, and strengthen the things which remain, that are ready to die; for I have not found thy works perfect before God. (Rev. 3:1–2)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머니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으로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으리라 (렘22:26) I will cast out thy mother that bare thee, into another country where ye were not begotten, and there shall ye die, (Jer. 22:26)

 

여기 ‘어머니’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where “mother” signifies the church.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이 교회의 경우, 처음 상태, 정말 깨끗했던 온전함이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고, 퇴색되며, 잃어갔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악의 세습 및 증가였는데, 역대 모든 부모마다 자기가 타고난 악에다 새로운 악을 더했기 때문입니다. For as we have said, the case with the church is that it decreases and degenerates, and loses its pristine integrity, chiefly by reason of the increase of hereditary evil, for every succeeding parent adds new evil to that which he has inherited.

 

부모의 모든 실제적 악은 일종의 본성을 옷 입습니다. 그리고는 종종 재발 시, 그들의 본성이 되고, 그렇게 그들의 유전 악에 더해집니다. 이런 식으로, 자녀들에게 전이되고, 그렇게 후손에게 전해집니다. All the actual evil in the parents puts on a kind of nature, and when it often recurs, becomes natural to them, and is added to their hereditary evil, and is transmitted into their children, and so to posterity.

 

이런 식으로, 유전 악은 후손들에 이르러 엄청나게 증가합니다. In this way the hereditary evil is immensely increased in the descendants.

 

이것이 그렇다는 것은 아이들의 악한 기질이 정확히 그들의 조상의 것과 똑같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this is so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evil dispositions of children are exactly like those of their progenitors.

 

아담으로부터 우리에게 이식되어 유전되어 온 악 외에 다른 유전 악은 없다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완전 거짓입니다. (cf. AC.313) Quite false is the opinion of those who think that there is no hereditary evil except that which they allege to have been implanted in us from Adam (see n. 313).

 

진실은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죄를 실제로 지어 유전 악을 만들며, 그걸 자기가 물려받은 악에다 보태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악은 모든 후손들 가운데 축적되며, 남습니다.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한테서만 줄어드는 거 빼고 말입니다. The truth is that everyone makes hereditary evil by his own actual sins, and adds it to the evils that he has inherited, and in this way it accumulates, and remains in all the descendants, nor is it abated except in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by the Lord.

 

모든 교회마다 이것이 타락, 퇴보의 첫째 원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태고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In every church this is the principal cause of degeneration, and it was so in the most ancient church.

 

 

495. 태고 교회가 어떻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는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태고 교회는 퍼셉션이 있었던 교회였고, 오늘날엔 그런 교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How the most ancient church decreased cannot appear unless it be known what perception is, for it was a perceptive church, such as at this day does not exist.

 

한 교회의 퍼셉션은 이런 것으로 구성됩니다. 곧, 그 교회의 구성원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마치 천사들처럼 선악을 구별합니다. 이 선악은, 사람들 사는 시민 사회의 선악과 같은 것이 아니고, 주님 사랑과 주님 신앙에 속한 선악을 말합니다. The perception of a church consists in this, that its members perceive from the Lord what is good and true, like the angels; not so much what the good and truth of civic society is, but the good and truth of love to the Lord and of faith in him.

 

생활로 확인되는 신앙고백을 통해 퍼셉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From a confession of faith that is confirmed by the life it can be seen what perception is, and whether it has any exist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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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4절,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Verse 4,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 4절 속뜻

 

 

 

486. ‘날’(日, days)은 일반적으로, ‘해’(年, years)는 구체적으로, 각각 때와 상태를 상징하며, ‘자녀’(sons and daughters)는 그들이 지각했던 진리와 선을 상징합니다. By “day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in general; by “years,” times and states in special; by “sons and daughters”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which they perceived.

 

※ 이후, 예를 들어, 영어 복수 표현인 ‘days’에 대한 우리말 번역을 굳이 ‘날들’로 하지 않고 대신 우리에게 익숙한 ‘날’로 하겠습니다. 우리말은 단수, 복수 등에 영어처럼 그렇게 예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은 문맥 상 정황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년’, ‘때’, ‘상태’ 등, 다른 복수 표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87. ‘날’이 일반적으로 때와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을 1장에서 보여드렸는데, 거기 보면, 첫째 날, 둘째 날 등 창조의 ‘날’이 때와 상태 말고 무슨 다른 걸 상징하지 않습니다. That by “day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in general, was shown in the first chapter, where the “days” of creation have no other signification.

 

말씀에서 ‘늘’, ‘항상’(all time)을 ‘날’로 표현하는 건 아주 평범한 일입니다. 지금 이 구절과 이어지는 구절들(5, 8, 11, 14, 17, 20, 23, 27, 31)의 경우가 특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일반적으로 ‘날’ 하면 마찬가지로 때의 상태들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년’이 등장하면, 우르르 등장하는 년들을 통해 상태의 퀄러티, 그러니까 특별한 상태를 상징하게 됩니다. In the Word it is very usual to call all time “days,” as is manifestly the case in the present verse, and in those which follow (5, 8, 11, 14, 17, 20, 23, 27, 31); and therefore the states of the times in general are likewise signified by “days”; and when “years” are added, then by the seasons of the years are signified the qualities of the states, thus states in special.

 

태고인들은 자기들의 숫자들을 가졌는데, 그 숫자들로 그들은 교회와 관련된 다양한 것을 상징했습니다. 그 숫자들은 예를 들면, ‘삼’(3), ‘일곱’(7), ‘열’(10), ‘열둘’(12) 및 이 숫자들과 다른 숫자들 간 합성을 통해 생성되는 많은 숫자들입니다. 그들은 이 숫자들을 가지고 그 교회의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이들 숫자들에는 오랜 시간 설명해야 하는 아케이나가 들어 있습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had their numbers, by which they signified various things relating to the church, as the numbers “three,” “seven,” “ten,” “twelve,” and many that were compounded of these and others, whereby they described the states of the church; wherefore these numbers contain arcana which would require much time to explain.

 

숫자들은 그 교회의 상태들에 대한 일종의 설명 혹은 평가였습니다. It was an account or reckoning of the states of the church.

 

같은 일이 말씀 여러 군데서 발생하는데요, 특히 예언서입니다. The same thing occurs in many parts of the Word, especially the prophetical.

 

유대 교회의 제의들을 보면, 그 안에도 역시 ‘몇 번’(數) 및 ‘어느 정도의 양’(量) 등 숫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번제, 소제, 봉헌물 및 다른 것들과 관련되는 것들인데, 다들 그 드려짐에 따라 성물(聖物)을 상징합니다.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lso there were numbers, both of times and measures, as for instance in regard to the sacrifices, meat offerings, oblations, and other things, which everywhere signify holy things, according to their application.

 

그래서, 여기 ‘팔백’(800)이라는 숫자, 그리고 다음 절, ‘구백삼십’(930) 및 이어지는 구절들에 나오는 햇수들 등에 들어 있는 것들은, 말하자면, 그들 고유의 일반적 상태에 생긴 그들 교회의 상태 변화들인데, 일일이 세기엔 그 수가 너무 많습니다. The things here involved, therefore, in the number “eight hundred,” and in the next verse, in the number “nine hundred and thirty,” and in the numbers of years in the verses following—namely, the changes of state of their church as applied to their own general state—are too many to be recounted.

 

앞으로 다루게 될 부분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으로 숫자 ‘열둘’(12)까지 단순 숫자들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게 될 텐데, 이 숫자들의 상징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이런 합성수의 상징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ake occasion to show what the simple numbers up to “twelve” signify, for until the signification of these is known, it would be impossible to apprehend the signification of the compound numbers.

 

 

488. ‘날’(days)이 일반적인 상태를, ‘해’(years)가 구체적인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 에스겔에 보면 나옵니다. That “days” signify states in general, and “years” states in special, appears from the Word, as in Ezekiel: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겔22:4) Thou hast caused thy days to draw near, and art come even unto thy years, (Ezek. 22:4)

 

혐오스러운 짓을 저지르고, 자기들의 죄를 꽉꽉 채우는 사람들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상태를 일반적으로는 ‘날’로, 구체적으로는 ‘연한’(해, years)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speaking of those who commit abominations, and fill up the measure of their sins, of whose state in general are predicated “days,” and in special “years.”

 

그래서 시편에 So in David:

 

주께서 왕에게 장수하게 하사 그의 나이가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시61:6) Thou shalt add days to the days of the king, and his years a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Ps. 61:6)

 

주님과 주님의 왕국에 관한 말씀 중에, ‘장수’(날)와 ‘나이’(해)로 왕국의 상태를 상징하십니다. speaking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 where also “days” and “years” signify the state of his kingdom.

 

다시 Again: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시77:5) I have considered the “days of old,” the years of the ages, (Ps. 77:5)

 

여기 ‘옛날’은 태고교회의 상태를, ‘지나간 세월’은 고대교회의 상태를 각각 상징합니다. where “days of old” signify state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years of the ages,” states of the ancient church.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사63:4) The day of vengeance is in my heart, and the year of my redeemed is come, (Isa. 63:4)

 

마지막 때에 관한 말씀인데, 여기 ‘원수 갚는 날’은 저주의 상태를, ‘구속할 해’는 행복의 상태를 각각 상징합니다. speaking of the last times, where the “day of vengeance” signifies a state of damnation, and the “year of the redeemed” a state of blessedness.

 

다시 Again: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61:2) To proclaim the acceptable year of the Lord, and the day of vengeance of our God; to comfort all that mourn, (Isa. 61:2)

 

여기 ‘날’과 ‘해’ 모두 상태를 상징합니다. where both “days” and “years” signify states.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여기는 분명히 상태를 의미합니다. where state is plainly meant.

 

[2] 요엘입니다. In Joel:

 

1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욜2:1-2) The day of Jehovah cometh, for it is nigh at hand,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a day of cloud and of obscurity; there hath not been ever the like, neither shall be after it, even to the year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Joel 2:1–2)

 

여기 ‘날’은 ‘어둡고 캄캄한’ 상태, ‘짙은 구름이 덮인’ 상태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도 상징하고, 전체를 일반적으로도 상징합니다. where “day” signifies a state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of cloud and of obscurity, with each one in particular, and with all in general.

 

스가랴입니다. In Zechariah:

 

9내가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10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슥3:9-10) I will remove the iniquity of that land in one day; in that day shall ye cry a man to his companion under the vine, and under the fig tree. (Zech. 3:9–10)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슥14:7) It shall be one day which is known to Jehovah, not day nor night,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Zech. 14:7)

 

여기 역시 상태를 의미함이 분명합니다. 한 날을 가리켜,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하기 때문입니다. where it is plain that state is meant, for it is said that there shall be a day that is “neither day nor nigh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같은 내용이 십계명 표현들 가운데 나옵니다. The same appears from expressions in the Decalogue: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5:16; 25:15) Hono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prolonged, and that it may be well with thee upon the ground, (Deut. 5:16; 25:15)

 

여기 ‘네 날이 길리라’는 것은 생명의 길이가 아닌, 행복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where to have the “days prolonged” does not signify length of life, but a happy state.

 

[3] 겉뜻, 글자의 뜻으로는 ‘날’은 마치 시간인 것처럼 보여야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날’은 상태를 상징합니다. In the literal sense it must needs appear as if “day” signifies time, but in the internal sense it signifies state.

 

천사들은, 그들은 속뜻, 내적 감각 가운데 있는데, 시간이라는 게 뭔지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시간을 구별하게 해주는 해와 달이 없기 때문인데, 그래서 그들은 날이 뭔지, 해가 뭔지를 모르며, 대신 상태와 상태의 변화만 압니다. 그래서 천사들 앞에서는, 그들은 내적 감각 가운데 있기 때문에, 여기 에스겔 구절의 속뜻처럼 무슨 일이든지 시공간에 관련된 것들은 다 사라집니다. The angels, who are in the internal sense, do not know what time is, for they have no sun and moon that distinguish times; consequently they do not know what days and years are, but only what states are and the changes thereof; and therefore before the angels, who are in the internal sense, everything relating to matter, space, and time disappears, as in the literal sense of this passage in Ezekiel:

 

그 날이 가깝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여러 나라들의 때이리로다 (겔30:3) The day is near, even the day of Jehovah is near, a day of cloud; it shall be the time of the nations, (Ezek. 30:3)

 

그리고 요엘서 구절의 속뜻입니다. and of this in Joel: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욜1:15) Alas for the day! For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and as vastation shall it come, (Joel 1:15)

 

‘구름의 날’은 구름, 혹은 거짓을, ‘나라들의 때’는 나라들, 혹은 사악(邪惡, wickedness)을, ‘여호와의 날’은 황폐(荒廢, vastation)를 각각 상징합니다. where a “day of cloud” signifies a cloud, or falsity; the “day of the nations” signifies the nations, or wickedness; the “day of Jehovah” signifies vastation.

 

시간개념이 사라질 때 남는 것은 그때 존재했던 것들에 대한 상태개념입니다. When the notion of time is removed, there remains the notion of the state of the things which existed at that time.

 

본 장에서 아주 자주 언급되는 ‘날’(days)과 ‘해’(years)에 대한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The case is the same with regard to the “days” and “years” that are so often mentioned in this chapter.

 

 

489. ‘자녀’는 그들이 지각했던 진리와 선을 상징하며, 실제로 ‘아들’은 진리, ‘딸’은 선을 각각 상징하고 있음은 예언서 많은 구절을 보면 분명합니다. 말씀, 옛날 이사야를 보면 교회의 잉태와 해산을 가리켜 ‘자녀’라고 합니다. That by “sons and daughters”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which they had a perception of, and indeed by “sons” truths, and by “daughters” goods,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in the prophets; for in the Word, as also in olden time, the conceptions and births of the church are called “sons and daughters,” as in Isaiah: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5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사60:3-5)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lift up thine eyes round about and see; all they gather themselves together and come to thee; thy sons shall come from far, and thy daughters shall be nursed at thy side; then thou shalt see and flow together, and thy heart shall be amazed, and shall be enlarged, (Isa. 60:3–5)

 

위 구절들에서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각각 상징합니다. in which passage “sons” signify truths, and “daughters” goods.

 

[2] 시편입니다. In David:

 

11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12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들과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돌들과 같으며 (시144:11-12) Deliver me and rescue me from the hand of the sons of the stranger, whose mouth speaketh vanity; that our sons may be as plants grown up in their youth, that our daughters may be as cornerstones hewn in the form of a temple, (Ps. 144:11–12)

 

여기 ‘이방인’은 거짓된 진리들이나 거짓들을, ‘우리 아들들’은 진리의 교리들을, ‘우리 딸들’은 선의 교리들을 각각 상징합니다. where the “sons of the stranger” signify spurious truths, or falsities; “our sons” signify doctrinals of truth; “our daughters,” doctrinals of good.

 

[3]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6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8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사43:6, 8) I will say to the north, Give up, and to the south, Keep not back; bring my sons from far, and my daughters from the ends of the earth; bring forth the blind people, and they shall have eyes; the deaf, and they shall have ears, (Isa. 43:6, 8)

 

위 구절에서,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백성’은 진리를 보게 될 사람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은 진리를 순종할 사람들을 각각 상징합니다. in which passage “sons” signify truths; “daughters,” goods; the “blind,” those who would see truths; and the “deaf,” those who would obey them.

 

[4]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가 청년의 때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렘3:24) Shame hath devoured the labor of our fathers from our youth; their flocks, their herds, their sons, and their daughters, (Jer. 3:24)

 

여기 ‘아들들’과 ‘딸들’은 진리와 선을 상징합니다. where “sons” and “daughters” signify truths and goods.

 

‘자손’과 ‘아들들’이 진리를 상징함은 이사야를 보면 명백합니다. That “children” and “sons” signify truths is plain from Isaiah:

 

22야곱이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겠고 그의 얼굴이 이제는 창백해지지 아니할 것이며 23그의 자손은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이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24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되며 (사29:22-24) Jacob shall not now be ashamed, neither shall his face now wax pale; for when he shall see his children the work of my hands in the midst of him, they shall sanctify my name, and shall sanctify the Holy One of Jacob, and shall fear the God of Israel; they also that erred in spirit shall know understanding, (Isa. 29:22–24)

 

‘야곱의 거룩한 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는 주님을 상징하며, ‘자손’은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 위 본문이 설명하고 있는 대로, 선과 진리를 지성적으로 이해하게 된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where the “holy one of Jacob, the God of Israel,” signifies the Lord; “children” signify the regenerate, who have the understanding of good and truth, as is indeed explained.

 

[5] 다시 Again: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사54:1) Sing, O barren, thou that didst not bear, for more are the sons of the desolate than the sons of the married wife, (Isa. 54:1)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은 원시(primitive) 교회, 혹은 이방인들의 교회에 알려진 진리를, ‘남편 있는 자의 자식’은 유대 교회에 있는 진리를 상징합니다. where the “sons of the desolate” signify the truths of the primitive church, or that of the Gentiles; the “sons of the married wife,” the truths of the Jewish church.

 

[6]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렘10:20) My tent is laid waste and all my cords are plucked out; my sons are gone forth of me, and are not, (Jer. 10:20)

 

‘자녀’는 진리를 상징합니다. where “sons” signify truths.

 

다시 Again:

 

그의 자손은 예전과 같겠고 그 회중은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며 (렘30:20) His sons shall be as aforetime, and their congregation shall be established before me, (Jer. 30:20)

 

‘자손’은 고대 교회의 진리를 상징합니다. where “sons” signify the truths of the ancient church.

 

스가랴입니다. In Zechariah: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슥9:13) I will stir up thy sons, O Zion, with thy sons, O Javan, and make thee as the sword of a mighty man, (Zech. 9:13)

 

사랑의 신앙의 진리를 상징합니다. signifying the truths of the faith of love.

 

 

490. 말씀에서 ‘딸’은 종종 선을 가리킵니다. 시편입니다.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10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11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 12두로의 딸은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얼굴 보기를 원하리로다 13왕의 딸은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의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14수 놓은 옷을 입은 그는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친구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15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16왕의 아들들은 왕의 조상들을 계승할 것이라 왕이 그들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17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하게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하리로다 (시45:10-17) Kings’ daughters were among thy precious ones; at thy right hand doth stand the queen in the best gold of Ophir; the daughter of Tyre with a gift; the king’s daughter is all glorious within; of eyelet work of gold is her raiment; instead of thy fathers shall be thy sons, (Ps. 45:10-17)

 

사랑과 신앙의 선과 아름다움이 ‘딸’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where the good and beauty of love and faith are described by the “daughter.”

 

그래서 교회를 선으로 말미암아 ‘딸’이라 합니다. 이사야 37장 22절과 다른 많은 데서 ‘딸 시온’, ‘딸 예루살렘’으로 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내 딸 백성’(사22:4), ‘딸 다시스’(사23:10), ‘딸 시돈’(사23:12) 및 ‘들에 있는 딸’(겔26:6, 8)이라고도 합니다. Hence churches are called “daughters” by virtue of goods, as the “daughter of Zion” and the “daughter of Jerusalem” (Isa. 37:22, and in many other places); they are also called “daughters of my people” (Isa. 22:4), the “daughter of Tarshish” (Isa. 23:10), the “daughter of Sidon” (verse 12), and “daughters in the field” (Ezek. 26:6, 8).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사37:22)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사22:4)

 

10딸 다시스여 나일 같이 너희 땅에 넘칠지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12이르시되 너 학대 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23:10, 12)

 

6들에 있는 그의 딸들은 칼에 죽으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8그가 들에 있는 너의 딸들을 칼로 죽이고 너를 치려고 사다리를 세우며 토성을 쌓으며 방패를 갖출 것이며 (겔26:6, 8)

 

 

491. 본 장 4, 7, 10, 13, 16, 19, 26 및 30절 등에 나오는 ‘자녀’는 모두 같은 것을 상징합니다. 이것이 교회요, 이것이 ‘자녀’, 즉, 선과 진리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진리와 선은 뚜렷하게 지각되었던 것입니다. 태고교회가 바로 이것들로 설명이 되며, 이후 이어지는 모든 교회들에게 있어 하나의 원리요, 부모의 역할을 하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The same things are signified by “sons” and “daughters” in this chapter (verses 4, 7, 10, 13, 16, 19, 26, 30), but such as is the church, such are the “sons and daughters,” that is, such are the goods and truths; the truths and goods here spoken of are such as were distinctly perceived, because they are predicated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principal and parent of all the other and succeeding churches.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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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3절,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Verse 3,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 3절 속뜻

 

 

 

481. ‘백삼십 세’라는 표현은 하나의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 흐른 시간을 상징합니다. 이 새로 일어난 교회는 태고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는 교회였습니다. ‘모양’이라는 용어는 신앙에, ‘형상’이라는 용어는 사랑에 각각 관련됩니다. By a “hundred and thirty years” there is signified the time before the rise of a new church, which, being not very unlike the most ancient, is said to be born “into its likeness, and after its image”; but the term “likeness” has relation to faith, and “image” to love.

 

이 교회를 일컬어 ‘셋’이라 하였습니다. This church was called “Seth.”

 

 

482. 이 장에 나오는 ‘세’와 ‘몇 세를 살고’ 하는 표현들이 속뜻으로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습니다. What the “years” and the “numbers of years,” which occur in this chapter, signify in the internal sense, has hitherto been unknown.

 

겉뜻에 머무르시는 분들은 세속적 년 수들로 생각하시겠습니다만, 이 장부터 십이 장까지는 겉뜻에 나오는 표현 그대로 실제 역사적으로 일어난 것은 하나도 없고, 대신 일반적으로는 모든 것,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다른 것이 들어 있습니다. Those who abide in the literal sense suppose them to be secular years, whereas from this to the twelfth chapter there is nothing historical according to its appearance in the literal sense, but all things in general and every single thing in particular contain other matters.

 

이름뿐 아니라 숫자 역시 같은 경우입니다. And this is the case not only with the names, but also with the numbers.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는 숫자는 삼(3), 칠(7)이 있는데요, 이 숫자들이 언급되는 곳마다 거기서 이 숫자들은 그 숫자들에 포함되어 있거나 표현하고 있는 시간이나 다른 무엇과 관련, 가장 거룩하고 신성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 숫자들은 가장 짧은 시간 간격들이나 가장 긴 시간 간격들이나 같은 걸 상징합니다. 부분들이 전체에 속하듯 가장 작은 것들은 가장 큰 것에 속하기 때문인데, 전체가 부분에서, 가장 큰 것이 가장 작은 것에서 제대로 나올 수 있으려면 반드시 닮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In the Word frequent mention is made of the number three, and also of the number seven, and wheresoever they occur they signify something holy or most sacred in regard to the states which the times or other things involve or represent; and they have the same signification in the least intervals of time as in the greatest, for as the parts belong to the whole, so the least things belong to the greatest, for there must be a likeness in order that the whole may properly come forth from the parts, or the greatest from its leasts.

 

그래서 이사야에서 Thus in Isaiah: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삼 년 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 (사16:14) Now hath Jehovah spoken, saying, Within three years, as the years of a hireling, and the glory of Moab shall be rendered worthless. (Isa. 16:14)

 

주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기한 같이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사21:16) Thus hath the Lord said unto me, Within a year, according to the years of a hireling, and all the glory of Kedar shall be consumed, (Isa. 21:16)

 

둘 다 가장 작은 간격들과 가장 큰 간격들을 상징합니다. where both the least and the greatest intervals are signified.

 

하박국에서 In Habakkuk: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합3:2) Jehovah, I have heard thy renown, and was afraid; O Jehovah, revive thy work in the midst of the years, in the midst of the years make known, (Hab. 3:2)

 

‘수년 내에’라는 표현은 주님의 강림을 상징합니다. where the “midst of the years” signifies the Lord’s advent.

 

보다 작은 간격들의 경우,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처럼 모든 주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보다 큰 간격들의 경우는 주님의 교회가 새롭게 일어나는 경우를 상징합니다. In lesser intervals it signifies every coming of the Lord, as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in greater, when the church of the Lord is arising anew.

 

이사야에서 ‘구속할 해’라 하신 경우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It is likewise called the “year of the redeemed,” in Isaiah: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사63:4) The day of vengeance is in my heart, and the year of my redeemed is come. (Isa. 63:4)

 

그래서 계시록 20장 2절, 7절, 사탄이 결박되어 있었던 천 년과, 계시록 20장 4절로 6절, 첫째 부활 관련 천 년 역시 절대 천 년(1,000년)을 상징하는 게 아니고, 대신 상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여드린 것처럼, ‘날’은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며, ‘년’ 또한 그렇습니다. 이렇게 년 수, 햇수를 가지고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So also the thousand years in which Satan was to be bound (Rev. 20:2, 7), and the thousand years of the first resurrection (Rev. 20:4–6), by no means signify a thousand years, but their states; for as “days” are used to express states, as shown above, so also are “years,” and the states are described by the number of the years.

 

2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7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계20:2, 7)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계20:4-6)

 

그래서 본 장의 시간들 또한 상태들을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모든 개 교회는 선천적, 후천적 재능 차이에 따라 퍼셉션의 상태가 다른 교회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e times in this chapter also involve states; for every church was in a different state of perception from the rest,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genius, hereditary and acquired.

 

 

483. 다음과 같은 이름들, 곧,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는 매우 많은 교회들을 상징합니다. 이 가운데 첫 번째, 제일의 교회를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이 교회들의 가장 주된 특징은 퍼셉션이었고, 그래서, 이 시절 교회 간 차이는 주로 퍼셉션의 차이에서 왔습니다. By the names which follow: “Seth,” “Enosh,” “Kenan,” “Mahalalel,” “Jared,” “Enoch,” “Methuselah,” “Lamech,” “Noah,” are signified so many churches, of which the first and principal was called “man.” The chief characteristic of these churches was perception, wherefore the differences of the churches of that time were chiefly differences of perception.

 

저는 여기서 퍼셉션에 관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천국 그 어디든 선과 진리에 관한 퍼셉션 말고 다른 것으로 천국을 다스리는 것은 없습니다. 이 퍼셉션은 도저히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점들이 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어떤 두 소사이어티도 유사한 퍼셉션을 엔조이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존재하는 퍼셉션들은 종(種, Species)과 속(屬, Genus)으로 분류됩니다. 속만으로도 셀 수가 없는데, 그 각각의 종 역시 하나하나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을 받아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I may here mention concerning perception, that in the universal heaven there reigns nothing but a perception of good and truth, which is such as cannot be described, with innumerable differences, so that no two societies enjoy similar perception; the perceptions there existing are distinguished into genera and species, and the genera are innumerable, and the species of each genus are likewise innumerable; but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셀 수 없는 속(屬)이 존재하고, 그 각 속에 딸린 종(種) 또한 셀 수 없이 많으며, 더욱이 개별 종 안에서도 셀 수 없는 다양함이 있기 때문에,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 세상이 알고 있다는 천적, 영적인 것들에 관해 아는 것이 얼마나 미미한지, 너무 보잘 것 없어 거의 없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퍼셉션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기 때문이며, 만일 그것에 관해 듣는다 해도 그런 것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고, 그런 식으로 다른 것 역시 안 믿기 때문입니다. Since then there are innumerable genera, and innumerable species in each genus, and still more innumerable varieties in the species, it is evident how little—so little that it is almost nothing—the world at this day knows concerning things celestial and spiritual, since they do not know even what perception is, and if they are told, they do not believe that any such thing exists; and so with other things also.

 

태고교회는 심지어 일반적, 구체적 퍼셉션 차이들에 관해서조차 주님의 천적 왕국을 표현했습니다만, 오늘날은 퍼셉션의 본성에 관한 가장 일반적 측면에서조차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들 교회들의 퍼셉션 그 속(屬)과 종(種) 어떤 경우도 할 수 없이 어둡고 낯설게만 보입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represented the celestial kingdom of the Lord, even as to the generic and specific differences of perception; but whereas the nature of perception, even in its most general aspect, is at this day utterly unknown, any account of the genera and species of the perceptions of these churches would necessarily appear dark and strange.

 

그들은 그 시절 가족, 가문 및 민족들로 구분되며, 결혼도 가족과 가문 내에서만 했습니다. 퍼셉션의 속과 종의 보존을 위해서이며, 민족적 특성의 전수처럼 부모를 통해 정확히 전수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이유로,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천국에서 함께 지냅니다. They were at that tim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nd contracted marriage within their houses and families, in order that genera and species of perceptions might exist, and be derived from the parents precisely as are the propagations of native character; wherefore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dwell together in heaven.

 

 

484. ‘셋’이라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아주 비슷하게 닮았었다는 사실은, 그가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라는 표현을 보면 분명합니다. 용어 ‘모양’(likeness)은 신앙과, ‘형상’(image)은 사랑과 관련됩니다. 이 교회가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관련, 태고교회를 닮지 않았다는 사실은, 방금 앞서 말씀드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하신 것으로 분명합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여섯째 날 영적 인간을 상징하는데요, 즉, 아직은 사랑이 주된 원리가 아닌, 여전히 사랑과 결합된 신앙이 주된 원리였다는 말씀입니다. That the church called “Seth” was very nearly like the most ancient church is evident from its being said that the man begat in his likeness, according to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the term “likeness” having relation to faith, and “image” to love; for that this church was not like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regard to love and its derivative faith, is plain from its being said just before,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by which is signified the spiritual man of the sixth day, as was said above, so that the likeness of this man was to the spiritual man of the sixth day, that is, love was not so much the principal, but still faith was conjoined with love.

 

 

485. 여기 ‘셋’은 위 4장 25절의 ‘셋’과는 다른 교회라는 사실은 435번 글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a different church is here meant by “Seth” from that which was described above (Gen. 4:25), may be seen at n. 43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교리가 다른 교회들을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은, 앞 장 17절, 18절에 나오는 ‘에녹’과 ‘라멕’을, 여기 5장 21절과 30절에서는 다른 교회들인데 같은 이름인 ‘에녹’, ‘라멕’으로 부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churches of different doctrine were called by the same name, is evident from those which in the foregoing chapter (Gen. 4:17–18) were called “Enoch” and “Lamech,” while here other churches are in like manner called “Enoch” and “Lamech” (Gen. 5:21, 30).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18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창4:17-18)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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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hey were created.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e hundred and twelve years; and he died.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sh lived after he begat Kenan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sh were nine hundred and five years; and he died.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Kenan were nine hundred and ten years; and he died.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And Mahalalel lived after he begat Jar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Mahalalel were eight hundred ninety and five years; and he died.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he died.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25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And Methuselah lived a hundred eighty and seven years, and begat Lamech. 26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And Methuselah lived after he begat Lamech seven hundred eighty and two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27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Methuselah were nine hundred sixty and nine years; and he died. 28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And Lamech lived a hundred eighty and two years, and begat a son; 29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And he called his name Noah, saying, He shall comfort us from our work, and the toil of ou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Lamech lived after he begat Noah five hundred ninety and five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Lamech were seven hundred seventy and seven years; and he died. 32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And Noah was a son of five hundred years; and Noah begat Shem, Ham, and Japheth.

 

개요


460
. 이 장은 특별히 거의 홍수 전까지 죽 이어진 세대들을 통해 태고교회가 퍼져나간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This chapter treats specifically of the propag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rough successive generations, almost to the flood.

 

 

461. 태고 교회 자체는, 천적이었는데, ‘사람’(아담, man, [homo])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모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교회입니다. (1) The most ancient church itself, which was celestial, is what is called “man” [homo], and a “likeness of God.” (verse 1)

 

 

462. 태고 교회처럼 그렇게 천적이지는 않았던 두 번째 교회를 ‘셋’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2-3) A second church which was not so celestial as the most ancient church is called “Seth.” (verses 2–3)

 

 

463. 세 번째 교회는 ‘에노스’라는 이름으로, 네 번째는 ‘게난’, 다섯 번째는 ‘마할랄렐’, 여섯 번째는 ‘야렛’, 일곱 번째는 ‘에녹’, 그리고 여덟 번째는 ‘므두셀라’로 각각 불렀습니다. A third church was called “Enosh” (verse 6); a fourth “Kenan” (verse 9); a fifth “Mahalalel” (verse 12); a sixth “Jared” (verse 15); a seventh “Enoch” (verse 18); and an eighth church “Methuselah” (verse 21).

 

 

464. ‘에녹’이라는 교회는 태고 교회에 계시되고, 지각된 것들로부터 골격이 짜여진 교리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교리는 당시에는 안 사용되고 대신 후손들의 사용을 위해 보전되었습니다. The church called “Enoch” is described as framing doctrine from what was revealed to and perceived by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doctrine, although of no use at that time, was preserved for the use of posterity.

 

이걸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렇게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2-24) This is signified by its being said that “Enoch was no more, because God took him.” (verses 22–24)

 

 

465. 아홉 번째 교회는 ‘라멕’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25) A ninth church was called “Lamech.” (verse 25)

 

 

466. 열 번째 교회, 이 교회는 홍수 후 세 교회의 부모로서, ‘노아’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A tenth, the parent of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 was named “Noah.”

 

이 교회를 고대 교회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28-29) This church is to be called the ancient church. (verses 2829)

 

 

467. ‘라멕’은 태고 교회가 즐겁게 누리던 퍼셉션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교회로 그려지는 반면, ‘노아’는 일종의 새 교회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29) “Lamech” is described as retaining nothing of the perception which the most ancient church enjoyed; and “Noah” is described as a new church. (verse 29)

 

배경

 

468. 이전 장들을 통해 지금까지 말씀드리고 보여드린 내용들을 볼 때 분명한 것은, 이름은 이교(異敎, heresy)나 교리(敎理, doctrine)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and shown in the foregoing chapter, it is evident that by names are signified heresies and doctrines.

 

그래서 본 장에 나오는 이름들은 사람들의 이름이 아닌 다른 것들, 곧 현 맥락에서는 태고 교회로부터 바로 이 ‘노아’ 때까지, 변화를 겪으며 내려오면서도 보존된 교리나 교회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Hence it may be seen that by the names in this chapter are not meant persons, but things, and in the present instance doctrines, or churches, which were preserved, notwithstanding the changes they underwent, from the time of the most ancient church even to “Noah.”

 

모든 교회의 경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줄어들다가 결국엔 몇 개 정도만 남게 되는데, 그 가운데 홍수 때까지 남은 이들 몇 교회를 가리켜 ‘노아’라 부른 것입니다. But the case with every church is that in course of time it decreases, and at last remains among a few; and the few with whom it remained at the time of the flood were called “Noah.”

 

[2] 참된 교회가 줄어들다가 몇 안 남게 되는 건, 다른 교회들 역시 그렇게 줄어든 걸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true church decreases and remains with but few, is evident from other churches which have thus decreased.

 

남겨진 자들을 말씀에서는 ‘리메인스’, ‘남은 자’라 하고, 또 말하기를, ‘가운데’, 혹은 ‘중간에’, ‘땅에’ 있다고도 합니다. Those who are left are in the Word called “remains,” and a “remnant,” and are said to be “in the midst,” or “middle,” “of the land.”

 

이런 게 보편적이듯 특별한 경우 역시 그렇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경우처럼 각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사람 안 리메인스가 주님에 의해 보존되지 않으면, 사람은 반드시 영원히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영적, 천적 생명이 리메인스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And as this is the case in the universal, so also it is in the particular, or as it is with the church, so it is with every individual man; for unless remains were preserved by the Lord in everyone, he must needs perish eternally, since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are in the remains.

 

그렇게 또한 일반적 혹은 보편적으로, 만일 교회나 참 신앙이 몇 사람 안에라도 늘 남아있지 않으면 인류는 소멸됩니다. 잘 알려진 대로, 한 도시, 아니, 간혹 한 나라 전체가 단지 몇 사람으로 말미암아 건짐을 받기 때문입니다. So also in the general or universal—if there were not always some with whom the church, or true faith, remained, the human race would perish; for, as is generally known, a city, nay, sometimes a whole kingdom, is saved for the sake of a few.

 

교회와 관련된 이런 일은 인체의 경우에도 있습니다. 심장이 괜찮은 한, 이웃한 장기들 또한 괜찮을 수 있습니다만, 만일 심장이 약해지면, 인체의 다른 장기들 역시 공급이 중단되어 사람은 죽게 됩니다. It is in this respect with the church as it is with the human body; so long as the heart is sound, life is possible for the neighboring viscera, but when the heart is enfeebled, the other parts of the body cease to be nourished, and the man dies.

 

마지막 리메인스들이 바로 ‘노아’로 상징된 사람들입니다. (창6:12와 다른 구절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온땅이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The last remains are those which are signified by “Noah”; for (as appears from Gen. 6:12, as well as from other places) the whole earth had become corrupt.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창6:12)

 

[3] 보통, 교회뿐 아니라 각 개인 안에 있는 리메인스에 관하여, 많은 말씀들이 예언서에 보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입니다. Of remains as existing in each individual as well as in the church in general, much is said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3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4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사4:3-4) He that is left in Zion, and he that remaineth in Jerusalem, shall be called holy to him, even everyone that is written unto lives in Jerusalem, when the Lord shall have washed the filth of the daughters of Zion, and shall have washed away the bloods of Jerusalem from the midst thereof, (Isa. 4:3–4)

 

위 구절에서 남은 자들을 거룩하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 남은 자들을 통해서 교회의 리메인스와, 또 교회에 속한 사람을 상징합니다. 시온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은 단순히 그들이 ‘남겨졌다’는 이유 만으로 거룩하다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in which passage holiness is predicated of the remains, by which are signified the remains of the church, and also of a man of the church; for “those left” in Zion and Jerusalem could not be holy merely because they were “left.”

 

다시 Again:

 

20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사10:20-21)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he remains of Israel, and such as are escaped of the house of Jacob, shall no more again stay upon him that smote them, but shall stay upon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in truth. The remains shall return, the remains of Jacob, unto the mighty God. (Isa. 10:20–21)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 (렘50:20) In those days, and in that time, the iniquity of Israel shall be sought for, and there shall be none; and the sins of Judah, and they shall not be found; for I will pardon him whom I shall make a remnant. (Jer. 50:20)

 

미가서입니다. In Micah: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가운데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미5:7) The remains of Jacob shall be in the midst of many peoples, as the dew from Jehovah, as the showers upon the grass. (Micah 5:7)

 

[4] 한 사람 혹은 한 교회의 잔여물 혹은 리메인스는 십분의 일로도 표현되었는데, 이 십분의 일은 거룩했습니다. 그래서 또 그 안에 십(10)을 가진 수 또한 거룩했고, 그래서 ‘십’(10)은 리메인스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사야입니다. The residue or remains of a man, or of the church, were also represented by the tenths, which were holy; hence also a number with ten in it was holy, and “ten” is therefore predicated of remains; as in Isaiah: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사6:12-13) Jehovah shall remove man, and many things [shall be] left in the midst of the land; and yet in it [shall be] a tenth part, and it shall return, and shall be for exterminating; as an oak, and an ilex, when the stock is cast forth from them, the holy seed is the stock thereof; (Isa. 6:12–13)

 

여기 남아있는 것을 가리켜 ‘거룩한 씨’라 하고 있습니다. where the residue is called a “seed of holiness.”

 

아모스에서 And in Amos: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암5:3) Thus saith the Lord Jehovah, The city that goeth forth a thousand shall have a hundred left, and that which goeth forth a hundred shall have ten left to the house of Israel. (Amos 5:3)

 

이들과 다른 많은 구절들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말하고 있는 ‘리메인스’가 속뜻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In these and many other passages, in the internal sense are signified the “remains” of which we have been speaking.

 

한 도시가 그 교회의 리메인스 덕분에 보존된다는 사실은 소돔 관련, 아브라함이 들은 내용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a city is preserved for the sake of the remains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to Abraham concerning Sodom: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18:32) Abraham said, Peradventure ten may be found there; and he said, I will not destroy it for ten’s sake. (Gen.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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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2절,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Verse 2,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hey were created.

 

※ 2절 속뜻

 

 

 

475. ‘남자와 여자’라는 이 표현은, 신앙과 사랑 간 결혼을 상징하며,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심’이라는 이 표현은, 그들은 특별한 뜻으로는 ‘사람’[homo]이라고 하는 교회였음을 상징합니다. By “male and female,” is signified the marriage between faith and love; by “calling their name man,” is signified that they were the church, which, in an especial sense, is called “man” [homo].

 

 

476. ‘남자와 여자’라는 표현이 신앙과 사랑 간 결혼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에서 분명히 말씀드렸고, 증명도 했습니다. 거기서 보여드린 것은, 남성 혹은 남자[vir]는 이해력과 그에 속한 모든 것, 곧 신앙의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과, 여성 혹은 여자는 의지와 의지에 속한 것들, 곧 사랑과 관련된 모든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그녀를 이름하여 이브라는, 생명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이 생명은 오직 사랑에만 속한 것입니다. That by “male and female” is signified the marriage between faith and love was declared and proved above, where it was shown that the male or man [vir] signifies the understanding and whatever belongs to it, consequently everything of faith; and that the female or woman signifies the will, or the things appertaining to the will, consequently whatever has relation to love; wherefore she was called Eve, a name signifying life, which is of love alone.

 

그래서 앞서 보여드린 대로, 여성은 또한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남성은, 그 교회에 속한 사람[vir]을 상징합니다. By the female therefore is also signified the church, as has been previously shown; and by the male, a man [vir] of the church.

 

여기 주제는 교회가 영적이었을 때 상태, 그리고 나중에 천적으로 변화되어 간 상태에 관한 것이며, 그래서 창1:26-27처럼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The subject here is the state of the church when it was spiritual, and which was afterwards made celestial, wherefore “male” is mentioned before “female,” as also in chapter 1:26–27.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6-27)

 

‘창조하다’라는 표현은 또한 영적 인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만 나중에 결혼이라는 효과가 나타나면, 즉, 교회가 천적 상태로 완성이 되면, 그때는 더 이상 ‘남자와 여자’가 아닌, ‘사람’, 곧 그들의 결혼으로 말미암아 둘 다를 상징하는 ‘사람’[homo]이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보시듯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라는 표현이 이어지는 이유이며, 이것이 바로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The expression to “create” also has reference to the spiritual man; but afterwards when the marriage has been effected, that is, when the church has been made celestial, it is not said “male and female,” but “man” [homo], who, by reason of their marriage, signifies both; wherefore it presently follows, “and he called their name man,” by which is signified the church.

 

 

477. ‘사람’이 태고교회임은 그동안 앞에서 종종 말씀드렸고, 또 보여도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가장 높은 뜻으로는 홀로 주님 자신,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That “man” is the most ancient church has been often said and shown above; for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lone is man.

 

이런 이유, 곧, 사람이신 주님을 닮았다 하여 태고교회를 가리켜 사람이라 하며, 역시 같은 이유, 곧, 사람이신 주님의 이미지라 하여 나중에 영적 교회도 사람이라고 합니다. From this the celestial church is called man, as being a likeness, and from this the spiritual church is afterwards so called because it was an image.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모든 개개인을 가리켜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인간의 이해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이해력이 있어 사람이며, 그에 따라 한 인간은 다른 사람보다 (이해력 면에서) 더 사람(같은 차이가 생깁니다)입니다. 사람 간 차이는 주님 사랑에 기반한 그 사람의 신앙에 따라 생겨야 하는데 말입니다. But in a general sense everyone is called a man who has human understanding; for man is man by virtue of understanding, and according thereto one person is more a man than another, although the distinction of one man from another ought to be made according to his faith as grounded in love to the Lord.

 

[2] 태고교회와 모든 참 교회, 그리고 그래서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나 주님 사랑과 주님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특별히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 에스겔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most ancient church, and every true church, and hence those who are of the church, or who live from love to the Lord and from faith in him, are especially called “man,”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Ezekiel:

 

10내가 또 사람을 너희 위에 많게 하리니 이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겔36:10-12) I will cause man to multiply upon you, all the house of Israel, all of it; I will cause to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that they may be multiplied and bear fruit;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ccording to your antiquities; and I will do better unto you than at your beginnings and I will cause man to walk upon you, my people Israel, (Ezek. 36:10–12)

 

‘전 지위’는 태고교회를, ‘처음’은 고대교회를, ‘이스라엘 온 족속’, ‘내 백성 이스라엘’은 초대교회, 혹은 이방인들의 교회를 각각 상징하며, 이 모든 교회를 ‘사람’이라고 합니다. where by “antiquities”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es; by the “house of Israel” and “people Israel,” the primitive church, or church of the Gentiles; all which churches are called “man.”

 

[3] 그래서 신명기에 So in Moses:

 

7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8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신32:7-8) Remember the days of eternity, understand ye the year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when the most high would give the nations an inheritance, when he would set apart the sons of man, he set the bounds of the peoples according to the number of the sons of Israel, (Deut. 32:7–8)

 

‘옛날’은 태고교회를, ‘역대’는 고대교회를, ‘인종’은 주님 신앙 안에 있었던 사람들을 각각 의미하며, 여기 이 신앙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입니다. where by the “days of eternity” is meant the most ancient church; by “generation and generation,” the ancient churches; the “sons of man” are those who were in faith toward the Lord, which faith is the “number of the sons of Israel.”

 

거듭남의 사람을 일컬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예레미야를 보면 있습니다. That a regenerate person is called “man,” appears from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empty and void;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땅’은 겉 사람을, ‘하늘’은 속 사람을, ‘사람’은 선에 속한 사랑을, ‘공중의 새’는 진리에 속한 이해력을 각각 상징합니다. where “earth” signifies the external man; “heaven” the internal; “man” the love of good; the “birds of the heavens” the understanding of truth.

 

[4] 다시 Again: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렘31:27) Behold the days come that I will sow the house of Israel, and the house of Judah, with the seed of man, and with the seed of beast, (Jer. 31:27)

 

‘사람’은 속 사람을, ‘짐승’은 겉 사람을 상징합니다. where “man” signifies the internal man, “beast” the external.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사2:22) Cease ye from man in whose nostrils is breath, for wherein is he to be accounted of, (Isa. 2:22)

 

‘인생’은 교회에 속한 사람을 상징합니다. where by “man” is signified a man of the church.

 

다시 Again: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6:12) Jehovah shall remove man far away, and many things shall be left in the midst of the land, (Isa. 6:12)

 

사람의 황폐함을 말씀하시면서, 거기에는 더 이상 선도 진리도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speaking of the vastation of man, in that there should no longer exist either good or truth.

 

다시 Again: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도다 (사24:6)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shall be burned, and man shall be left very little, (Isa. 24:6)

 

남은 ‘자’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where “man” signifies those who have faith.

 

다시 Again:

 

8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어지며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9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사33:8-9) The paths have been desolated, the farer on the path hath ceased, he hath made vain the covenant, he hath despised the cities, he hath not regarded man, the earth mourneth and languisheth, (Isa. 33:8–9)

 

사람을 가리키는데, 사람은 히브리 말로 ‘에노스’입니다. denoting the man who in the Hebrew tongue is “Enosh.”

 

다시 Again: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사13:12-13) I will make a man more precious than fine gold, and a man than the gold of Ophir; therefore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moved out of her place, (Isa. 13:12–13)

 

첫 번째 나오는 사람에 대한 말은 ‘에노스’, 두 번째는 ‘아담’입니다. where the word for man in the first place is “Enosh,” and in the second is “Adam.”

 

 

478. 그를 ‘아담’이라고 하는 이유는 히브리 말 ‘아담’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아담’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정말 맞지가 않고, 대신 ‘사람’으로 부르는 게 맞습니다. 이것은 이 구절과 앞에 나온 구절들을 통해 분명한데요, 그는 단수가 아닌 복수로 거론된다는 점에서 그렇고, 또 이 용어는 남자와 여자 둘 다에 대한 서술, 둘 다 ‘사람’으로 부른다는 사실로도 그렇습니다. The reason why he is called “Adam” is that the Hebrew word “Adam” signifies “man”; but that he is never properly called “Adam” by name, but “man,” is very evident from this passage and also from former ones, in that [in some cases] he is not spoken of in the singular number, but in the plural, and also from the fact that the term is predicated of both the man and the woman, both together being called “man.”

 

누구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은 둘 다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말씀들 때문인데요,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와, 1장에서도 같은 방식인데,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를 다스리게 하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That it is predicated of both, everyone may see from the words, for it is said, “He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that they were created”; and in like manner in the first chapter: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Gen.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이런 이유로,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가 인류 최초의 사람이었던 어떤 한 사람의 창조가 아닌, 태고교회의 창조라는 사실 또한 보게 됩니다. Hence also it may appear that the subject treated of is not the creation of some one man who was the first of mankind, but the most ancient church.

 

 

479. ‘이름을 부르기’ 혹은 ‘이름으로 불리기’는 말씀에서는 앞서 보여드린 것처럼 관련 대상의 퀄리티에 대해 아는 것을 상징하는데, 이 경우에는 태고교회의 퀄러티와 관련된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퀄러티는, 사람이 흙에서 취함을 입었음을, 혹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났고, 여기서 ‘아담’이라는 말은 ‘흙’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는 천적(天的, celestial)으로 변화되면서, 주님 사랑에서 비롯되는 신앙으로 가장 놀랍게 ‘사람’이 되는 그런 퀄러티입니다. By “calling a name,” or “calling by name,” is signified in the Word to know the quality of things, as was shown above, and in the present case it has relation to the qual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denoting that man was taken from the ground, or regenerated by the Lord, for the word “Adam” means “ground”; and that afterwards when he was made celestial he became most eminently “man,” by virtue of faith originating in love to the Lord.

 

 

480. 그들이 창조되던 날, ‘사람’으로 불린 것은 1장 26절, 27절, 즉, 여섯째 날 끝에도 나옵니다. 이것이 안식일 저녁, 혹은 안식일이나 일곱째 날 시작에 대한 답입니다, 일곱째 날, 혹은 안식일은 위에서 보여드린 대로 천적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That they were called “man” in the day that they were created, appears also from the first chapter (Gen.1:26–27), that is, at the end of the sixth day, which answers to the evening of the sabbath, or when the sabbath or seventh day began; for the seventh day, or sabbath, is the celestial man, as was shown above.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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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1절,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Verse 1,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 1절 속뜻

 

 

469. ‘계보를 적은 책’이라는 표현은 태고 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의 목록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라는 표현은 그의 영적 창조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는 표현은 그의 천적 창조를 각각 상징하며, 이런 걸 볼 때, 이 구절은 태고 교회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The “book of the births” is an enumeration of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denotes his being made spiritual; and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signifies that he was made celestial: thus it is a descrip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470. ‘계보를 적은 책’(출생들에 관한 책)이 태고 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의 목록표라는 사실은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너무나 분명한데요, 이 5장에서 11장, 에벨의 때까지는 이름들이 특정 인물들(persons)을 상징하는 것이 절대 아닌, 실제적인 것들(things)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That the “book of the births” is an enumeration of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s very evident from what follows, for from this to the eleventh chapter, that is, to the time of Eber, names never signify persons, but actual things.

 

태곳적 인류는 가족, 가문 및 민족으로 구별되었습니다. 하나의 가족은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들 및 그들을 섬겼던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하나의 가문은 좀 더 크고 작은 가족들로 구성되는데, 멀리 떨어진 건 아니지만 함께 사는 것도 아닌, 그런 구성으로, 하나의 민족은 좀 더 많고 적은 가문으로 각각 구성되었습니다. In the most ancient time mankind wer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 house consisting of the husband and wife with their children, together with some of their family who served; a family, of a greater or lesser number of houses, that lived not far apart and yet not together; and a nation, of a larger or smaller number of families.

 

 

471. 그들이 가족, 가문 및 민족으로만 구별되며, 그렇게 자기들끼리 따로 지낸 이유는, 그렇게 해야 교회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기 때문이며, 그렇게 해야 모든 가족과 가문이 그들의 어른 아래로 모이고, 그래야 사랑과 참된 예배가 보존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hey dwelt thus alone by themselves, distinguished only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was that by this means the church might be preserved entire, that all the houses and families might be dependent on their parent, and thereby remain in love and in true worship.

 

또한 인상적인 것은, 각 가족마다 다른 가족과 구별되는 특이한 천성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녀들, 심지어 먼 후손까지도 그들의 부모 및 조상으로부터 어떤 특이한 천성과, 그들의 얼굴 생김새 및 다른 많은 특징들을 가지고 서로 구별될 수 있는 그런 특징적 캐릭터를 물려받는다는 것은 지금도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It is to be remarked also that each house was of a peculiar genius, distinct from every other; for it is well known that children, and even remote descendants, derive from their parents a particular genius, and such marked characteristics that they can be distinguished by the face, and by many other peculiarities.

 

이렇게 거주함으로써 서로 뒤섞이는 대신 정확히 구별될 수 있도록, 주님은 이런 식의 거주 방식을 기뻐하셨습니다. Therefore, in order that there might not be a confounding, but an exact distinction, it pleased the Lord that they should dwell in this manner.

 

이렇게 교회는 주님의 왕국을 생생하게 나타낸 표상이었습니다. 주님의 왕국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소사이어티들이 있으며, 각각의 소사이어티는 그들의 사랑과 신앙에 따라 다른 모든 소사이어티와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Thus the church was a living representative of the kingdom of the Lord; for in the Lord’s kingdom there are innumerable societies, each one distinct from every other,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love and faith.

 

이것이 앞에서 관찰한 것처럼, ‘혼자 사는 것’(cf. AC.139, 창2:18)과, ‘장막에 거주함’(cf. AC.414, 창4:20)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This, as observed above, is what is meant by “living alone,” and by “dwelling in tents.”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또 같은 이유로, 주님은 유대 교회가 가족, 가문 및 민족으로 구별되며, 그래서 모두가 자기 친족 가운데서만 결혼하도록 명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For the same reason also it pleased the Lord that the Jewish church should b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nd that everyone should contract marriage within his own family; but concerning this,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472.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라는 표현은 그가 영적으로 지음 받고 있음을,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는 표현은 그가 천적으로 지음 받고 있음을 각각 상징합니다. 이 사실은 앞에서 말씀드리고 보여드린 내용을 보시면 나옵니다. That by the “day in which God created man” is signified his being made spiritual, and that by “God making him in his likeness” is signified his being made celestial, appears from what was said and shown above.

 

‘창조하다’(create)라는 표현은 새롭게 창조되고 있는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표현이며, ‘짓다’(make)라는 말은 온전해져 가는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2장 말씀에서 보여드린 것처럼, ‘창조하기’(creating), ‘짓기’(forming) 및 ‘만들기’(making) 간 정확한 차이가 관찰되기 때문에, 거기서 영적 인간을 천적으로 변화시키신 것을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창2:2)고 하신 것입니다. 다른 구절들에서도 ‘창조하다’(create)는 영적 인간과, ‘짓다’(make), 즉, 온전하게 하다는 천적 인간과 연관되고 있습니다. (cf. AC.16, 88) The expression to “create” properly relates to man when he is being created anew, or regenerated; and the word “make,” when he is being perfected; wherefore in the Word there is an accurate distinction observed between “creating,” “forming,” and “making,” as was shown above in the second chapter, where it is said of the spiritual man made celestial that “God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created in making”; and in other passages also, to “create” relates to the spiritual man, and to “make,” that is, to perfect, to the celestial man. (See n. 16 and 88.)

 

 

473. ‘하나님의 모양’(likeness)은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은 영적 인간임 또한 앞서 보여드렸습니다. (cf. 창1:26) That a “likeness of God” is a celestial man, and an “image of God,” a spiritual man, has also been previously shown.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1:26)

 

‘형상’은 ‘모양’을 준비하는 것이며, ‘모양’은 실물과 똑같아 보이는 모방입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의 ‘모양’으로서, 주님에 의해 온전히 다스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An “image” is preparatory to a “likeness,” and a “likeness” is a real replica, for a celestial man is entirely governed by the Lord, as his “likeness.”

 

 

474. 이런 이유로,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가 태고 교회의 출생 혹은 퍼져나감인 점을 볼 때, 이것은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가는 첫 번째 묘사입니다. 퍼져나감이 여기서부터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Since therefore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birth or propag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is first described as coming from a spiritual to a celestial state, for the propagations follow from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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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449. 지금까지 천국과 천국 기쁨의 본질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Hitherto the nature of heaven and of heavenly joy has been known to none.

 

이 주제들에 관하여 생각해 온 사람들은 이것들에 관한 어떤 아이디어를 형성해 왔는데, 그 아이디어는 너무 일반적이고 너무 뭉뚱그린 것이어서 거의 무슨 아이디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Those who have thought about them have formed an idea concerning them so general and so gross as scarcely to amount to any idea at all.

 

그들이 그 주제에 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저는 최근에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의 일부가 된 영들을 통해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영들은 그냥 내버려 두면 자신들이 마치 이 세상에 있는 듯 이 세상에 있을 때와 똑같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What notion they have conceived on the subject I have been able to learn most accurately from spirits who had recently passed from the world into the other life; for when left to themselves, as if they were in this world, they think in the same way.

 

몇 가지 사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I may give a few examples.

 

 

450. 세상에 있는 동안, 말씀에 관하여 놀라울 정도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여겨졌던 영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천국에 관하여 아주 거짓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은 높이 올려져 천국에 있게 될 것이며, 거기서 그들 아래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될 것이고, 그 결과, 그들은 자기 영광과 남들을 압도하는 뛰어남 가운데 있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Some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d seemed to be preeminently enlightened in regard to the Word, had conceived so false an idea about heaven that they supposed themselves to be in heaven when they were high up, and imagined that from that position they could rule all things below, and thus be in self-glory and preeminence over others.

 

그들이 이런 환상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오류 가운데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그들은 높이 올려졌고, 거기서 허락하심 하에 어느 정도 아래에 있는 것들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런 것은 환상 속 천국이며, 실제 천국은 높아지는 걸로 이루어지지 않고, 대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혹은 자기 안에 주님의 나라가 있는 사람이면 어디나 그곳이 천국이라는 것과, 천국은 남들보다 더 뛰어나기를 원하는 그런 걸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부끄러워했습니다. 남들보다 더 위대해지고자 하는 것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On account of their being in such a fantasy, and in order to show them that they were in error, they were taken up on high, and from there were permitted in some measure to rule over things below; but they discovered with shame that this was a heaven of fantasy, and that heaven does not consist in being on high, but is wherever there is anyone who is in love and charity, or in whom is the Lord’s kingdom; and that neither does it consist in desiring to be more eminent than others, for to desire to be greater than others is not heaven, but hell.

 

 

451. 한 영이 있었는데, 그는 몸 안에 있을 동안, 권력을 소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저 세상에서도 똑같이 권력을 행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 했습니다. A certain spirit, who during his life in the body had possessed authority, retained in the other life the desire to exercise command.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지금 다른 왕국에 있고, 이 왕국은 영원한 왕국이라는 것, 지상에서의 그의 다스림은 끝났다는 것, 그가 지금 있는 곳은 아무도 선과 진리, 그리고 주님의 자비, 그가 지금 이 자비 가운데 있는데, 이외의 것으로는 평가받지 않는 곳이라는 것, 더 나아가 지상 왕국처럼 이 나라 역시 모든 사람이 국왕의 총애와 자기가 가진 부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는 왕국인데, 이 나라에서는 선과 진리가 부(富)요, 국왕의 총애는 주님의 자비라는 것, 만일 그가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려 한다면, 그는 반역자라는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반역자인 건 지금 그가 다른 나라에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는데요, But he was told that he was now in another kingdom, which is eternal; that his rule on earth was dead; and that where he was now no one is held in estimation except in accordance with the good and truth, and the mercy of the Lord, in which he is; and further, that it is in that kingdom as it is on earth, where everyone is rated according to his wealth, and his favor with his sovereign; and that there good and truth are wealth, and favor with the sovereign is the Lord’s mercy; and that if he desired to exercise command in any other way, he was a rebel, seeing that he was now in the kingdom of another.

 

이 말을 듣고 그는 부끄러워했습니다. On hearing this he was ashamed.

 

 

452. 저는 천국과 천국의 기쁨은 가장 큰 자가 되는 걸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던 영들과 대화를 해오고 있습니다. I have conversed with spirits who supposed heaven and heavenly joy to consist in being the greatest.

 

그들은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행복을 누리며, 결과적으로 가장 큰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인데, 이것이 가장 행복한 자가 되는 게 아니라면 가장 큰 자가 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이유입니다. But they were told that in heaven he is greatest who is least, because he who would be the least has the greatest happiness, and consequently is the greatest, for what is it to be the greatest except to be the most happy?

 

힘을 가진 자는 힘을, 부유한 자는 부를 추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곧 행복입니다. It is this that the powerful seek by power, and the rich by riches.

 

더 나아가 그들은 천국은 가장 큰 자가 되기 위해 가장 작은 자가 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실제로는 가장 큰 자가 되기를 열망하고, 간절히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천국은 이것, 곧 마음으로 제 몸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는 것, 그들의 행복 증진을 위해 그들에게 봉사하기를 원하는 것, 그리고 이것을 절대 이기적인 목적이 아닌, 사랑으로 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 나라라고 들었습니다. They were told, further, that heaven does not consist in desiring to be the least in order to be the greatest, for in that case the person is really aspiring and wishing to be the greatest; but that heaven consists in this, that from the heart we wish better for others than for ourselves, and desire to be of service to others in order to promote their happiness, and this for no selfish end, but from love.

 

 

453. 어떤 영들은 천국에 대한 생각을 너무 대충 하는 바람에 천국을 그저 단순히 허락만 있으면 되는 곳으로, 실제로 그곳은 문이 있어 입장 허락만 받으면 들어가는 곳, 문은 열려 있고, 문지기가 있어 문지기의 허락으로 들어가는 그런 곳인 줄 압니다. Some entertain so gross an idea of heaven that they suppose it to be mere admission, in fact that it is a room into which they are admitted through a door, which is opened, and then they are let in by the doorkeepers.

 

 

454. 어떤 영들은 생각하기를, 천국은 다른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편안한 삶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곧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되는데요, 수고 없이 행복을 누리는 그런 삶은 없다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행복을 이용해서 자신이 행복하고자 하기 때문인데, 모든 사람이 그런 삶을 원하면, 아무도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Some think that heaven consists in a life of ease, in which they are served by others; but they are told that there is no possible happiness in being at rest as a means of happiness, for so everyone would wish to have the happiness of others made tributary to his own happiness; and when everyone wished this, no one would have happiness.

 

그런 삶은 적극적이 아닌, 게으른 삶이며,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무기력해질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은 (속으로는) 적극적인 삶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있을 겁니다. Such a life would not be an active life, but an idle one, in which they would grow torpid, and yet they might know that there is no happiness except in an active life.

 

천사의 삶은 쓰임새로, 그리고 체어리티의 선으로 구성됩니다. 세상을 떠나 막 도착한 영들을 가르치고 교육하는 일, 그리고 악한 영들로 하여금 정해진 바운더리를 넘지 못하게 하며, 선으로 사람들을 격려하고 섬기는 일, 또 죽은 자를 일으켜 영원한 삶으로 인도하며, 그래서 만일 가능하다 싶으면 원하는 영들에게 천국을 소개하는 일 등, 천사들은 이런 쓰임새의 삶보다 더 행복한 것은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Angelic life consists in use, and in the goods of charity; for the angels know no greater happiness than in teaching and instructing the spirits that arrive from the world; in being of service to men, controlling the evil spirits about them lest they pass the proper bounds, and inspiring the men with good; and in raising up the dead to the life of eternity, and then, if the souls are such as to render it possible, introducing them into heaven.

 

이 모든 일을 통해 그들은 이렇게 글로 묘사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한 행복을 지각합니다. From all this they perceive more happiness than can possibly be described.

 

그래서 그들은 모두가 주님의 이미지, 형상들이며, 그들은 자신들보다 이웃을 더 사랑합니다. 이런 이유로, 천국이 천국(天國, heaven)인 것입니다. Thus are they images of the Lord; thus do they love the neighbor more than themselves; and for this reason heaven is heaven.

 

천사의 행복이 쓰임새 안에, 쓰임새로부터 있기 위하여, 또한 천사의 행복은 쓰임새에 따라 쓰임새만큼, 즉,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만큼 행복합니다. So that angelic happiness is in use, from use, and according to use, that is, it is according to the goods of love and of charity.

 

천국의 기쁨은 안락하게 빈둥대며 숨이나 쉬는 영원한 즐거움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면, 지각이 생겨 그런 삶이 정말 어떤 건지를 깨닫게 되고는 부끄러워합니다. 그리고 또한 깨닫기를, 그런 삶은 정말 비참하며, 모든 기쁨을 파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혐오하고 역겨워하게 될 그런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When those who have the idea that heavenly joy consists in living at ease, idly breathing in eternal joy, have heard these things, they are given to perceive, in order to shame them, what such a life really is, and they perceive that it is a most sad one, that it is destructive of all joy, and that after a short time they would loathe and nauseate it.

 

 

455. 세상에서 말씀에 관하여 최고로 많이 배운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천국의 기쁨은 영광의 빛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빛은 태양 광선이 어떤 금빛 색조로 나타날 때와 같은 그런 빛이었습니다. 그 역시 그래서 천국의 기쁨은 안락한 삶으로 이루어진다고 가정했습니다. One who in this world had been most learned in regard to the Word, had the idea that heavenly joy consists in being in a glorious light, like that which exists when the solar rays appear of a golden hue, so that he too supposed it to consist in a life of ease.

 

그가 오류 가운데 있음을 스스로 알 수 있도록 그에게 그런 빛이 비쳤고, 그 빛 가운데서 그는 자기가 말한 대로, 마치 자기가 정말 천국에 있는 듯 무척 즐거워했습니다. In order that he might know himself to be in error, such a light was granted him, and he, being in the midst of the light, was as delighted as if he were in heaven, as indeed he said.

 

그러나 그는 그 빛 가운데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빛은 점점 그를 지겹게 했고, 급기야 전혀 기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But he could not remain long in it, for it gradually wearied him and became no joy at all.

 

 

456. 최고의 교육을 받은 그들 모두는 말하기를, 천국의 기쁨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삶은 좀 부족해도 대신 오직 주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며, 이런 게 적극적인 삶이라고 했습니다. The best instructed of them all said that heavenly joy consists solely in praising and glorifying the Lord, being a life destitute of any doing of the goods of charity, and that this is an active life.

 

그러나 그들이 들은 말은, 주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액티브 라이프 자체가 아니라 그런 삶의 효과일 뿐이라는 것, 주님은 찬양은 굳이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대신, 그들이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것은 원하신다는 것,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게 될 행복은 이에 수반될 것이라는, 비례할 것이라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But they were told that praising and celebrating the Lord is not such an active life as is meant, but is an effect of that life; for the Lord has no need of praises, but wills that they should do the goods of charity, and that it is according to these that they will receive happiness from the Lord.

 

그러나 이들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함에 관하여 여전히 기쁨보다는 무슨 노예 생활 같은 것밖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But still these best instructed persons could form no idea of joy, but of servitude, in doing these goods of charity.

 

그래서 천사들은 증언하기를, 그런 삶은 모두를 가장 자유롭게 하는 삶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But the angels testified that such a life is the freest of all, and that it is conjoined with happiness unutterable.

 

 

457. 이 세상에서 내세로 건너가는 거의 모든 사람이, 지옥은 모든 사람에게 같으며, 천국 또한 그럴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Almost all who pass from this world into the other life suppose that hell is the same for everyone, and that heaven is the same for everyone.

 

그러나 실제로는 양쪽 모두 무한한 다양성과 다름이 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의 천국도, 그리고 지옥도 다른 사람의 천국 혹은 지옥과 똑같지 않습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나, 영, 천사도 다른 사람이나 영, 천사와 완전 똑같은 경우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And yet in both there are endless diversities and varieties, and neither the heaven nor the hell of one person is ever exactly like that of another; just as no man, spirit, or angel is ever exactly like another.

 

제가 그곳에 똑같거나 동등한 둘의 존재를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그곳 영들의 세계와 천사들의 천국에 있는 거류민들은 엄청나게 놀랐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은 각각 수많은 컴포넌트의 하모니로 형성되어 있다고, 그런 게 하모니요, 그런 게 하나 됨이라고, 낙동강 오리알처럼 자기 혼자 툭 튀어나와 스스로 존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오직 모든 컴포넌트들의 하모니의 결과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When I merely thought of there being two exactly alike or equal, horror was excited in the inhabitants of the world of spirits and of the angelic heaven, and they said that everyone is formed by the harmony of many components, and that such as is the harmony, such is the one, and that it is impossible for anything to subsist that is absolutely a one, but only a one that results from a harmony of component parts.

 

천국의 모든 개별 소사이어티가 그렇게 하나가 되며, 그렇게 해서 또 모든 소사이티들, 즉 유니버설 천국을 이룹니다. 그리고 이런 신비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주님의 사랑을 통해서 옵니다. Thus every society in the heavens forms a one, and so do all the societies together, that is, the universal heaven, and this from the Lord alone, through love.

 

어떤 천사가 영들, 곧 일층천 천국 영들의 기쁨을 가장 유니버설한 것으로만 속(屬, genus, ※ 생물 분류 단계) 단위로 세어보았더니 대략 사백일흔여덟(478) 가지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걸 보면, 유니버설 속보다 훨씬 세부적이고, 또 각 속에 속한 종들은 또 얼마나 엄청날까요? A certain angel enumerated the most universal only of the genera of the joys of spirits, that is, of the first heaven, to about four hundred and seventy-eight, from which we may infer how innumerable must be the less universal genera and the species in each genus.

 

※ 생물 분류 단계는 대략 종(種, Species), 속(屬, Genus), 과(科, Family), 목(目, Order), 강(綱, Class), 문(門, Pylum), 계(界, Kingdom)가 있습니다.

 

천국이 이렇듯 풍요로운 걸 보면, 천사적 영들의 천국, 곧 일층천 천국의 행복의 종류가 얼마나 무한한지, 그리고 더욱 천사들의 천국은 또 얼마나 더 그런지 모릅니다. And as there are so many in that heaven, how illimitable must be the genera of happinesses in the heaven of angelic spirits, and still more so in the heaven of angels.

 

 

458. 악한 영들은 종종 주님의 천국 말고 또 다른 천국이 있을 것이라 상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허락으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한 어디든 돌아다녀 봅니다. 하지만 결국은 어디서도 다른 천국을 찾지 못하고는 당혹해하지요. Evil spirits have sometimes supposed that there is another heaven besides that of the Lord, and they have been permitted to seek for it wherever they could, but to their confusion they could never find any other heaven.

 

악한 영들은 주님을 향해 품고 있는 증오로부터, 그리고 지옥의 고통으로부터 사악함 속으로 돌진, 그런 환상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For evil spirits rush into insanities both from the hatred they bear against the Lord, and from their infernal suffering, and catch at such fantasies.

 

 

459. 세 천국이 있습니다. 첫 번째 천국은 선한 영들이 지내는 뎁니다. 두 번째는 천사적 영들, 세 번째가 천사들의 천국입니다. There are three heavens: the first is the abode of good spirits; the second, of angelic spirits, and the third, of angels.

 

영들, 천사적 영들 및 천사들은 모두 천적, 영적으로 구별됩니다. Spirits, angelic spirits, and angels are all distinguished into the celestial and the spiritual.

 

천적인 사람들은 사랑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신앙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앞에서 다룬 태고 교회인들처럼 말이지요. The celestial are those who through love have received faith from the Lord, like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reated of above.

 

영적인 사람들은 신앙의 지식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The spiritual are those who through knowledges of faith have received charity from the Lord, and who act from what they have received.

 

이 이야기는 이 장 끝에서 계속됩니다. A continuation of this subject will follow at the end of this chapter.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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