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 (2)(DLW.27, 2023/6/9)

 

 

하나님에 관한 두 번째 주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입니다.

 

AC.27

건전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신(神, the Divine, 하나님, 주님)은 나눌 수 없다(the Divine is not divisible)는 걸 모르겠습니까? 또 무한자(無限者)도, 창조되지 않은 자도, 전능자도, 혹은 신이라는 것도 다 복수로 존재하는 건 불가능하다(a plurality of infinites, of uncreates, of omnipotents, and of gods, is impossible)는 것도 말이지요. 어떤 제정신이 아닌 사람(one destitute of reason)이 선언하기를, ‘다 가능하다. 복수의 무한자도, 창조되지 않은 자도, 전능자도, 그리고 신이라는 것들도 다 복수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신 나간 주장을 하면서, 그리고 계속해서 ‘만일 그들이 하나의 동일 본질(one identical essence)을 가진다면, 그러면 이것이 그들을 하나의 무한자, 창조되지 않은 자, 전능자, 그리고 하나님이 되게 할 수 있다’ 주장한다면, (사실 이 주장은 좀 뒤죽박죽, 앞뒤가 안 맞는 주장인데요) 이 하나의 동일 본질이 사실은 하나의 아이덴티티가 아니었던 거 아닐까요? 하나의 아이덴티티(identity, 正體, 신원)라는 건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여러 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존재가 다른 것에서 나왔다고 해야 한다면, 다른 것에서 나온 존재는 그 자체로 이미 신이, 하나님(God)이 아닙니다. 이런 여러 주장, 논란, 입장에도 불구, 불변의 진리는 ‘하나님은 그 자체로 만물이 말미암는, 만물의 근원 되시는 분이시다’(the God from whom all things are)라는 사실입니다. (DLW.27) Who that has sound reason can help seeing that the Divine is not divisible? Also that a plurality of infinites, of uncreates, of omnipotents, and of gods, is impossible? Suppose one destitute of reason were to declare that a plurality of infinites, of uncreates, of omnipotents, and of gods is possible, if only they have one identical essence, and this would make of them one infinite, uncreate, omnipotent, and God, would not the one identical essence be one identity? And one identity is not possible to several. If it should be said that one is from the other, the one who is from the other is not God in himself; nevertheless, God in himself is the God from whom all things are (see above, n. 16). (DLW.27)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신적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1장, ‘창조주(The Creator)의 일곱 번째 주제, ‘만물이 말미암는 한 분의 신-인이 계신다(There is one God-man, from whom all things come)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27번 글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오늘 위 메인 본문은 사실 매우 신학적, 철학적 논거여서 대부분, 읽어도 선뜻 눈에 들어오지들 않으실 겁니다. 저 자신, 사실 저는 이런 걸 매우 안 좋아합니다. 제가 신대원 시절, 제일 싫어했던 과목이 조직신학이었거든요. 날마다 무슨 ‘(性), 성, 성’, ‘(論), 론, 론’, ‘(的), 적, 적’ 하는 게 저는 정말 와닿질 않았고, 매우 매우 불편했는데요, 칼빈에 대해서 처음엔 호의적이었던 입장도 그의 대표적인 저작, ‘기독교 강요’(1536)를 읽고는 그냥 질려버렸지요. 당시 시대적 특성을 따라 스콜라식 저술 형태로 충만한 이 책을 읽고는 저는 그만 질식하는 줄 알았고... 나중에 영계에서 그를 여러 번 만나 대화했던 스베덴보리의 기록을 접하고는 완전... 네, 뭐, 하여튼 저는 이쪽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래도 무슨 교리적 전반적 이해는 또 꼭 필요해서 날마다 꾸욱 꾹 마치 무슨 달팽이 기어가듯 그렇게 번역, 풀고 있습니다. 그냥 휙 읽는 것과, 이렇게 풀이식 번역으로 정리, 정돈하는 건 또 완전 차원이 다른 작업이군요!

 

※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만난 여러 사람 중 캘빈에 관한 기록입니다.

 

캘빈이 처음 영계에 들어왔을 때는 그가 태어났던 세상에 그대로 사는 줄로 생각했었다. 그는 처음 그에게 다가온 천사들로부터 그가 죽어서 영들의 세계에 와 있다고 들었지만, 그는 말하기를 나는 동일한 몸을 가지고 있고, 손도 동일하고, 또 감각도 전과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즉 그가 지상에서는 실체적인 몸이 물질적인 몸을 입고 있었으나 이제 그 물질적인 몸은 벗고, 대신 실체적인 몸이 남아 있어서 이 실체적인 몸에 의해 사람의 생명이 이어진다고 말해주었다. 이것을 그는 처음에는 이해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에는 예전 이념으로 되돌아가서 그는 아직도 그 자신이 태어났던 세상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까닭은 그는 관능적 사람이었으므로 신체적 감각의 대상에 의해서 배운 것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성언(聖言)에 의해서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총명에 의해서 그의 믿음의 모든 독단적 교리들을 취했던 이유이다. 그는 사람들의 합의를 얻기 위해서만 성언에서부터 인용을 했던 것이다.

 

이 초기 후에 그는 천사들을 떠나서 옛날 예정론을 믿은 자들을 찾아서 배회했다. 그는 그런 사람들이 어느 멀리 떨어진 지하 동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으나 그 지하 동굴에는 뒷길을 통해서 들어가는 문 이외에는 다른 입구가 없어 그들과 조우할 수 없었다. 그 동굴로 들어가지 못한 캘빈은 이번에는 그 동굴에 있는 자기 형제들에게서 나와 아직도 자유로운 방황을 허용받고 있던 고트샬크의 제자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은 영적인 언어로 피리스라고 칭해지는 곳에서 때때로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캘빈은 그들과 함께 거할 것을 요구하였고, 그 뒤 그들의 모임 장소에 인도되어졌다. 그가 그들 중에 왔을 때 그는 환희에 차서 그들의 친밀한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트샬크의 종들이 동굴 안의 그들의 형제들에게 다시 보내지자 그 후 캘빈은 자신의 그런 삶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는 단순한 마음의 종교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어떤 사회에로 피난처를 구해 갔다. 그러나 그들이 예정론에 대해서 아는 바 없고, 또 도무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사회 변두리로 나가서 종교적인 주제에 관해서는 함구하고 있었다. 이렇게 섭리된 것은 그가 예정론에 관한 오류를 시정할 수 있게 하기 위함과 아울러 도르트 종교회의 이후 그 혐오스러운 이단 사설에 스스로를 고착시켜 온 높은 지위의 사람들의 수가 차게 하기 위함에서였다. 이런 자들이 서서히 그 지하 동굴 안에 모여들었다.

 

마침내 현대 예정론자들 사이에서 캘빈은 어디 있는가? 하는 아우성 소리가 일어났다. 그들은 캘빈이 사회 변두리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캘빈은 스스로 예정론에 감염된 어떤 장관 앞에 인도되었고, 그 장관은 그를 자기 집에 받아들여 주님에 의한 새 천계가 형성될 때까지 보호하였다. 그러나 그의 보호자가 다른 동료들과 함께 쫓겨났을 때, 캘빈은 자신에 대한 평판이 그다지 좋지 못한 집으로 가서 한동안 거기 머물렀다. 그러던 중 그가 여기저기를 배회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기 때문에 그는 나에게까지 와서 나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처음에 주님의 말씀,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에 의거하여 주님만을 하늘과 땅의 하나님으로 시인하는(이 역시 지적 시인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들로 구성되고 있는 새 천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이 사람들이 주님과 아버지를 한 분으로 믿고 또 주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주님 안에 계심을 믿으며, 주님을 보고 안 사람은 아버지를 보고 또 알며, 이와 같이 교회와 천계에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처음에는 통상적인 침묵을 유지했으나 약 반 시간 후에 갑자기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사람이요. 요셉과 혼인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닙니까?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으로 예배받을 수 있습니까?

 

내가 대답하기를 우리 속량주와 구주되시는 분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십니다. 이 말에 그는 응대하기를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성은 주님에게 속해 있지 않고, 성부에게만 속합니다. 내가 반문하기를 그렇다면 인성의 그리스도는 어디에 있습니까? 캘빈이 말하기를 천계의 가장 낮은 곳에 있습니다. 이것은 성부 앞에서 가진 겸비와 당신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시게 한 고난에서 증명됩니다. 그리고 그는 세상에서 그의 기억에 저장되었던 미망들로 그리스도 예배를 논박하기 시작했다. 그 말들이 의미하는 바는 그러한 예배는 우상숭배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그리스도 예배를 모독하려 했으므로 나와 함께 있던 천사들이 그의 입술을 닫아버렸다.

 

그를 회심시키고자 하는 내 열정 때문에 나는 주 우리 구주께서 단지 하나님과 사람이실 뿐 아니라 주님 안에서 하나님이 사람이시고, 사람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을 바울의 말, 즉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로 증거하였고, 나아가 아타나시우스 신경에서 선언되고 있는 바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과 사람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이들은 한 인격 안에 있기를 사람 안에 영혼과 몸처럼 계신다는 것으로 증명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대꾸했다. 그 모든 성언의 인용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요. 성언의 인용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돌아가는 풍차와 같아서 이단들도 모두 성언의 인용으로 지탱되고 있소. 예정론만이 모든 다른 교리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정론은 회중들의 장막과 같고 득의와 구원을 산출하는 믿음이 그 성소요 안치소입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사람은 영적인 것에 있어서 자유의지가 없고, 구원은 자유로운 은사요. 예정론에 대한 반론은 내 귀에는 배에서 올라오는 트림 소리 같고, 설사를 일으킨 것 같이 들리오. 예정론 이외의 교리로 가르쳐지는 교회의 회중들은 양과 이리들의 혼합과 같아서 이리들이 율법으로 제재되어서 양들을 공격할 수 없게 해야 마땅하오. 나는 양들을 예정된 자들이라 믿고 있소. 그리고 그런 교회의 설교를 아무리 웅변적으로 해도 딸꾹질 이상으로 여기지 않소. 그러나 내게 내 자신의 믿음을 서술하게 해주시오. 즉 하나님 한 분이 계시며, 그분은 전능하시다.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선택되고 예정된 자가 아니고는 누구에게도 구원은 없다. 그 모든 다른 자들은 자기들의 운명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이요.

 

이 말을 듣고 나는 격분해서 말했다. 가버려라. 이 악한 영아! 너는 주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있다. 네 믿음은 어떤 자는 천계로 예정되고, 어떤 자는 지옥으로 예정되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이 폭군이며, 자기가 좋아하는 자들만을 자기 도성에 들이고, 그 밖의 사람들은 고문하는 집에 넘겨준다고 믿고 있구나. 부끄러움을 알아라. 그리고 나서 캘빈의 일치신조에서 다음과 같은 발췌를 읽어주어 이것이 그의 정확한 교리를 서술한 것인지를 확인하였다. 일치신조에,

 

만일 심중의 신뢰와 믿음이 주님의 신성에 의지해서뿐 아니라 주님의 인간 성정에 의거해서 그리스도에게 두어진다면, 또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이 두 가지 모두에게 향해진다면 그것은 저주받아야 할 우상숭배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지 않으시고, 오로지 선택된 자들만을 위하여 죽으셨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대다수의 사람을 영벌에 처하도록 창조하셨으며, 그들이 회심하여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큰 죄를 범하고 각종의 범행을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선택된 자들과 이미 중생한 자들은 믿음과 성령을 상실하지 않으나 선택되지 않은 자들은 필연적으로 정죄되어 첫 번 세례를 받고, 날마다 성찬에 참여하며 그들의 능력껏 거룩하고 비난받을 일이 없게 산다고 할지라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라이프찌히판, 1756년, 837. 838쪽)

 

이 발췌를 읽고 나자 그는 그것이 그의 교리를 대변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낱말들 자체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주님의 사자들은 모두 그를 떠났고, 그는 급히 가증스러운 예정론으로 자신들을 다진 자들의 동굴로 향하였다. 나는 후에 이들 중 몇과 그들의 상태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하여 노동을 강요당하고, 또 서로가 미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서로 상해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그들의 생활의 환희였다.

 

※ 주) 스베덴보리가 전하여주는 루터와 캘빈에 대한 영계에서의 이러한 모습들은 아직 그들의 주도적인 애정의 빛깔이 드러나기 전의 상태로 그때까지 그들의 내면은 세상적인 요소들의 잔재가 남아 있는 상태이다. 사람들은 죽은 후 대개 이런 영적 상태를 거치며, 점차 겉 사람에 형성된 외적인 요소들을 지우고, 그들의 주도적인 애정으로 돌아가서 마침내 그들의 주도적인 내적 상태과 일치하는 외부의 주변 환경 속에서 살게 된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천국과 지옥인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 스베덴보리가 만난 그들의 상태는 아직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가기 전의 상태인 것이다.

 

 

2. 오늘 저 메인 본문은 어려운 표현들, 일상 중엔 잘 안 쓰는 용어들 때문에 좀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러나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논리적으로 절대 여럿으로 존재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라는 겁니다. 너무나 당연한 걸 저렇게 너무나 진지하게 말하고 있지요... 스베덴보리는 일종의 논문 형식으로 저술 중이기 때문인데요, 스베덴보리가 그의 모든 저술을 라틴어로 기록한 그 첫 번째 이유는, 스베덴보리는 그 첫 번째 독자층을 당대의 학자들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그 두 번째 이유는, 라틴어는 이미 사어(死語)라 더 이상 시대 변화에 따른 언어적 변화가 없어 그 원어의 의미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것도 있습니다.

 

 

3. ‘하나님에 관한 생각, 즉 신관(神觀)’을 올바로 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모든 것의 기초라는 생각을 붙들고 함께 이 씨름을 해나가시기를 권합니다. 반드시 천국 입성을 향한 굳건한 반석이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3-06-09(D6)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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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 (1)(DLW.23, 2023/6/8)

 

 

오늘부터는 하나님에 관한 두 번째 주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 첫 번째 시간입니다.

 

AC.23

인간 지혜의 모든 것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한 분 하나님이 계신다’라는 신관(神觀)으로 연합하는데요, 그 모습은 마치 이것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결과적으로, 사람은 이와 달리는 생각하지도, 그리고 할 수도 없는데요, 이것은 이해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한테서나 다 볼 수 있는 본성이지요. 만일 건전한 이성을 가진 사람에게 우주의 창조주가 두 분이라고 말하면, 당신은 그가 품는 반감을 느끼시게 될 텐데요, 이건 아마도 그의 귀에 들리는 말만으로부터, 그리고 인간 이성의 모든 것이 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신관으로 연합, 이 신관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첫째는, 이성적, 합리적으로(rationally)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자체로 볼 때, 사람의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반적인 본성상, 인간의 이성은 바로 이 능력에 의존하는데요, 이 본성으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걸 직접, 그러니까 마치 스스로 보는 것처럼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능력에 의해 사람은 천국의 빛 안에 있거나 그가 가진 대부분의 생각들을 거기서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진리는 천국 빛으로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진리인데요, 그렇지 않은 때는 그 능력으로 인간 이해의 낮은 부분들(the lower parts of his understanding)이 왜곡되었을 때입니다. 그런 사람은 실제로는 그 능력을 부여받았지만, 그 낮은 부분들에 가해진 왜곡으로 인해 그걸 반대로 돌리고, 결국 그로 인해 그의 이성은 불건전해지지요. (DLW.23) All things of human wisdom unite, and as it were center in this, that there is one God, the creator of the universe; consequently a man who has reason, from the general nature of his understanding, does not and cannot think otherwise. Say to any man of sound reason that there are two creators of the universe, and you will be sensible of his repugnance, and this, perhaps, from the mere sound of the phrase in his ear; from which it appears that all things of human reason unite and center in this, that God is one. There are two reasons for this. First, the very capacity to think rationally, viewed in itself, is not man’s, but is God’s in man; upon this capacity human reason in its general nature depends, and this general nature of reason causes man to see as from himself that God is one. Secondly, by means of that capacity man either is in the light of heaven, or he derives the generals of his thought therefrom; and it is a universal of the light of heaven that God is one. It is otherwise when man by that capacity has perverted the lower parts of his understanding; such a man indeed is endowed with that capacity, but by the twist given to these lower parts, he turns it contrariwise, and thereby his reason becomes unsound. (DLW.23)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신적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1장, ‘창조주(The Creator)의 일곱 번째 주제, ‘만물이 말미암는 한 분의 신-인이 계신다(There is one God-man, from whom all things come)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23번 글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이해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해하는 능력’으로 좀 풀어 번역한 이 ‘이해(understanding)는 ‘의지(will)와 함께 사람을 구성하는 두 키워드입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이 둘이 있어서입니다. 이 둘은 주님의 신성과 상응하는데요, 즉 주님의 신성 중 선은 사람의 의지와, 그리고 진리는 사람의 이해, 즉 이해하는 능력과 상응합니다. 참고로, 주님은 사람의 의지 속으로는 직접 들어가시지만, 사람의 이해, 생각 속으로는 의지를 거쳐 간접적으로 들어가시는데요(HH.26), 저는 이걸 ‘가슴 신앙’, ‘머리 신앙’이라고 종종 번역합니다. 대략적으로는, ‘사랑(love, charity), ‘(good), ‘의지(will), ‘애정(affection), ‘’, ‘’, ‘’, ‘천적(celestial, heavenly) 등이 한 흐름이고요, ‘신앙(faith), ‘진리(truth),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 ‘이성(reason, rational), ‘’, ‘포도주’, ‘’, ‘영적(spiritual) 등이 또 다른 흐름입니다.

 

참고로, ‘하나 됨’, ‘한 몸’이라는 것은, ‘의지’는 ‘이해’의 의견을 사랑으로 받들고, ‘이해’는 ‘의지’가 원하는 것을 사랑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2. ‘인간 이해의 낮은 부분들(the lower parts of his understanding)

 

창세기 6장 16절 말씀,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에 보면, ‘상 중 하 삼층으로’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아래, 이 구절 전체의 속뜻을 보면서 위 표현을 짐작해 봅니다.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는 지적 부분(the intellectual part)을, ‘그 문은 옆으로 내고’는 청각(hearing)을,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는 지식(knowledge, scientifica), 이성(reason, rationalia), 그리고 이해(understanding, intellectualia)에 관한 것을 각각 의미합니다. (AC.651)

 

창6:9-22은 거듭나기 전 ‘노아’라는 교회의 상태에 관한 내용인데요, 특별히 16절은 그 교회가 가진 이해에 관련된 내용으로서, 갑작스런 이런 내용에 좀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이처럼 사람의 이해에는 세 가지 전혀 다른 부분들이 있다는 정도로만 우선은 알려드리며, 그러므로 ‘인간 이해의 낮은 부분들’인 ‘지식’, 특히 세상의 학습을 통해 습득한 ‘지식’을 주님의 계시보다 우선하는 태도,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왜곡’의 시작이요, 근원임을 직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질서, 순서는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출발, 사람의 겉 사람에 도착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반대의 길을 추구한 케이스들이 모두 ‘가인의 삶’, ‘각 교회 시대의 종말’ 및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3. 다음은 이런 내용들에 대하여 천사들은 모든 걸 이해하는 반면, 우리는 왜 이토록 어둡고 어려운가 하는 말씀을 좀 드리면서 오늘 말씀을 마칠까 하는데요, 아래는 천국 천사들이 왜 그토록 지혜로운가 하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0장, ‘천국 천사들의 지혜(The Wisdom of the Angels of Heaven) 267번 글입니다.

 

천사들이 그런 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내면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지혜는 다른 모든 완벽성과 마찬가지로 내적으로 갈수록 증가하므로, 내면이 열리는 정도만큼 지혜가 늘어나는 것이다. 모든 천사에게는 생명의 세 단계가 있고, 이것은 세 천국에 상응한다. 내면의 첫 단계가 열린 이들은 일층천, 즉 가장 외적인 천국에 있다. 내면의 둘째 단계가 열린 이들은 이층천인 중간 천국에, 내면의 셋째 단계가 열린 이들은 삼층천인 가장 내적 천국에 있다. 천국 천사들의 지혜는 이들 단계에 적합한 것이다. 따라서 가장 내적 천국 천사들의 지혜는 중간 천국 천사들의 지혜를 측량할 수 없이 초월하고, 중간 천국 천사들의 지혜는 가장 외적 천국 천사들의 지혜를 그렇게 초월한다.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은, 더 높은 단계에 속한 것은 세부적이고, 낮은 단계에 속한 것은 일반적이며, 일반적인 것은 세부적인 것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세부적인 것은 일반적인 것을 수천수만 배 능가한다. 그러므로 더 높은 천국 천사들의 지혜도 낮은 천국 천사들의 지혜에 비하면 그 정도로 차이가 난다. 같은 이치로, 낮은 천국 천사들의 지혜는 사람의 지혜에 비하면 그런 차이가 난다. 사람은 육체적인 상태에 있고, 또한 육체의 감각에 속해 있으며, 육체의 감각은 낮은 단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면 감각적인 사람들, 즉 감각의 대상이 되는 것에 그들 사고의 범위를 국한한 사람들의 지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지혜가 하나도 없고, 단지 지식만 있다. 그러나 감각적인 것을 넘어 그들의 사고를 고양시킨 사람들은, 특히 그 내면이 천국 빛을 받는 단계로까지 열린 사람들은 이와 다르다. (HH.267)

 

 

내용이 다소 어렵고 난해하더라도 위 3번 글을 읽어 보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힘을 내셔서, 주님께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천국 빛을 구하시고, 해바라기와 같이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곧 천사들의 내면을 비추는 빛이 우리에게도 비춰 이 영광의 말씀들, 내용들이 이해되기 시작할 줄 믿습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3-06-08(D5)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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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신관(神觀, a just idea of God)의 중요성(3)(DLW.13, 2023/6/7)

 

 

오늘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신관(神觀, a just idea of God)의 중요성’ 세 번째, 마지막 시간입니다. 다음 다룰 주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관(神觀, a correct idea of God)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이 하나님 신관이 종교를 가진 모든 사람의 가장 심오한 생각(the inmost of thought)을 구성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종교에 관한 모든 것과 예배에 관한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종교와 예배에 관한 모든 것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참된 신관(a proper idea of God)없이는 천국과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이런 사실로, 영계에서는 모든 국가가 하나님은 사람이시라는 생각, 신관(its idea of God as a man)에 따라 그 자리가 배정됩니다. 이 안에 주님에 대한 신관(the idea of the Lord)이 있기 때문인데요, 천국에는 주님에 대한 그밖에 다른 신관은 없습니다. 인간의 사후 삶의 상태는 생전 그가 확신하게 된 신관에 따라 정해진다는 사실은 정반대, 즉 하나님을 부인하고, 기독교계에서 주님의 신성을 부인함이 곧 지옥을 구성한다는 것을 보면 아주 명백한 것입니다. (DLW.13) How important it is to have a correct idea of God can be known from the truth that the idea of God constitutes the inmost of thought with all who have religion, for all things of religion and all things of worship look to God. And since God, universally and in particular, is in all things of religion and of worship, without a proper idea of God no communication with the heavens is possible. From this it is that in the spiritual world every nation has its place allotted in accordance with its idea of God as a man; for in this idea, and in no other, is the idea of the Lord. That man’s state of life after death is according to the idea of God in which he has become confirmed, is manifest from the opposite of this, namely, that the denial of God, and, in the Christian world, the denial of the divinity of the Lord, constitutes hell. (DLW.13)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신적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1장, ‘창조주(The Creator)의 네 번째 주제,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에 나오는, 전체 글 번호로는 13번 글 내용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하나님은 사람이시라는 생각, 신관(its idea of God as a man)에 따라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49번 글(창1:26 주석) 내용 일부입니다.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에서 주님께서 저들과 얼굴과 얼굴로 대화하실 때, 주님은 저들 앞에 ‘사람’(Man)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드릴 말씀이 참 많지만, 아직은 좀 이른 것 같고요... 이 때문에, 저들은 주님 자신과 주님께 속한 것 외에는 누구에게도 ‘사람’(ma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저들 자신한테도 감히 ‘사람’이라 하지 않았으며, 오직 그들 자신 안에 있는 것들, 즉 사랑의 모든 선과 믿음의 모든 진리, 그러니까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인식한 것들과 관련해서만 ‘사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들이 주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났다’한 것입니다. (AC.49)

 

천국 전체가 ‘하나님은 사람이시다’라는 이 생각으로 충만하며, 그래서 천국은 사람 형태로 되어 있고, 천국 각 공동체도 사람 형태요, 천국을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 역시 사람이라고 하는데요,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역시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From Things Heard and Seen)

 

8장, ‘천국 전체는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

9장, ‘천국의 각 공동체는 한 사람으로 보인다(Each Society in Heaven Reflects a Single Man)

10장, ‘천사는 완전한 사람 형태로 있다(Therefore Every Angel Is in a Complete Human Form)

11장, ‘천국이 사람 모습임은 주의 신적 인성에서 비롯된다(It Is from the Lord’s Divine Human That Heaven as a Whole and in Part Reflects Man)

12장,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There Is a Correspondence of All Things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Man)

 

등을 읽어 보시기 바라며, 아래 링크는 스베덴보리의 저서들 중 릴리즈된 저서들을 모아놓은 제 블로그 글이니 필요하신 분들은 가셔서 다운 받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영문 pdf 문서들입니다.

 

https://bygrace.kr/377

 

스베덴보리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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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자리가 배정됩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기술입니다.

 

또 밝혀둘 것은, 어느 공동체가 한 단위로 보일 때 반드시 사람의 모습이지만, 결코 한 공동체도 똑같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에서 밝힌 대로, 그들의 선이 각기 다르고, 그에 따라 형태가 결정되기 때문에, 한 가족도 얼굴이 다 다르듯 공동체들도 다 다르다. 가장 내적이고 높은 천국의 공동체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공동체들은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사람 모습이다. (HH.70)

 

천국을 이루는 주님의 신성에 대한 친밀감(affinity)에 따라 세 천국이 구분되며, 각 천국 내 수많은 공동체들 역시, 그리고 한 공동체 내 수많은 구성원들의 위치, 자리 역시 주님의 신성에 대한 애정, 친밀감에 따라 정해지는데요, 이는 마치 가운데 환히 빛나는 전구 주위가 가장 밝고 전구와 거리가 멀수록 흐릿한 것과 같습니다.

 

 

3.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타국 이민을 생각하거나 일정 기간 체류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 나라 입국을 위한 여러 준비 및 자격을 갖춰야 하는 것처럼, 천국 역시 동일하며, 그래서 주님은 특별히 250여 년 전 스베덴보리를 찾으셔서 천국 입국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오픈하셨습니다.

 

아래 링크는 스베덴보리가 누구인지 하는 간략한 프로필입니다. 꼭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에 대한 보다 좀 깊숙한 전기가 필요하신 분은 위 스베덴보리 저작들(writings) 중 맨 아래 ‘COMPENDIUM(叢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bygrace.kr/376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다음은 제가 번역하는 책들의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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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천국을 여시며, 그 입국의 비밀을 아낌없이 계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2023-06-07(D4)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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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신관(神觀, a just idea of God)의 중요성(2)’ (AR.서문, 2023/6/6)

 

 

오늘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신관(神觀, a just idea of God)의 중요성’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온 천국과 지상의 모든 교회, 그리고 모든 종교의 기초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이런 올바른 생각(a just idea of God), 즉 신관(神觀) 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결합이 있고, 이 결합을 통해 빛과 지혜, 그리고 영원한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AR.서문) For the whole heaven is founded upon a just idea of God, and the whole church on earth, and in general all religion; since by that idea there is conjunction, and by conjunction light, wisdom, and eternal happiness. (Pref. to A. R)

 

※ 이 글은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속뜻’(Apocalypse Revealed, Wherein are disclosed the arcana there foretold which have hitherto remained concealed, 1766) 의 ‘저자 서문’(Author’s Preface)에 있는 내용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위 내용은 계시록 속뜻 주석의 서문에 나오는 내용으로, 계시록이 어떤 책이며, 지난 역사 가운데 사람들이 이 계시록을 어떻게 풀어왔는지, 그리고 1757년에 영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그때 형성된 새 하늘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는지, 또 이 새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 교회가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을 다음 말씀들, 곧

 

9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계21:9-10)

 

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계19:7, 9)

 

1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5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계21:1-2, 5)

 

를 통해 확인하여 주며, 또 계속해서 기독교인들의 천국은 고대인들의 천국 아래 있다는 것과, 이 기독교인들의 천국에는 주님 성육신 이후 주님을 세 인격 아래 한 분 하나님(one God under three persons)으로 예배하면서, 동시에 세 신에 대한 생각(an idea of three gods)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만 입장이 허용되었다는 것, 그 이유는 기독교계 전체가 이 입장, 곧 세 인격의 삼위일체(the trinity of persons)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 하여튼 주님에 관한 이 신적 삼위일체(The Divine Trinity)라는 정확한 신관을 소유해야만 천국에서,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서 그에 합당한 위치를 배정받는다는 등의 전반적인 배경 가운데 기술된, ‘계시록 속뜻’(Apocalypse Revealed) 서문 전체의 결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 ‘모든 종교의 기초가

 

우리 기독교, 특히 개신교인들은 유독 이런 표현에 매우 민감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렇기 때문에 오직 기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나중에 이 문제 역시 깊이 다루겠지만, 지금은 이 한 가지, 곧 그럼, 기독교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주님의 자녀가 아닌가? 인류 전체의 퍼센티지를 볼 때, 오히려 기독교는 일부에 지나지 않은데... 그러면 나머지 7, 80%의 타종교인들은 무조건 지옥 가는가? 저들이 타종교, 타문화권에서 태어난 게 저들의 죄인가? 주님이 그렇게 불공정하신 분인가? 이런 참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차별, 구별은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는, 구원에 대한 오해, 말씀을 겉 글자로만 이해, 너무 폭력적으로 적용하며, 또 사람의 사후, 즉시 천국 아니면 지옥에서 눈뜨는 줄로만 아는 데서 오는 부작용입니다.

 

주님의 시야, 주님의 마음을 품으시기를 바라며, 이 주제가 좀 급하신 분들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6장, ‘천국의 비기독교인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을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저는 틈틈이 탈북자들의 유튜브 채널을 봅니다. 저들의 무슨 드라마 같은, 사선을 넘어 생명의 나라로 넘어오는 그 파란만장한 사연 하나하나가 저에게는 모두 제가 지상에서 천국을 사모하는 치열한 노력과 상응하기 때문인데요, 저들의, 들으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은 이 땅에 태어나 감사할 줄 모르고, 교만하고 나태함 가운데 있는 저로 하여금 마음을 다잡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올해 만 62세가 됩니다. 이젠 만나이만 쓴다네요 ^^ 제가 이 지상에서 얼마나 더 머무르게 될까요? 날이 갈수록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 제가 살아온 지난날, 그리고 선친께서 당부하신 통일되면 꼭 황해도 해주 선산을 찾으라신 당부 말씀 등... 이런 걸 보면 제가 이젠 정말 육학년이 되었구나 싶습니다.

 

저는 수년 전 수도원 공부를 하면서부터 지상 생활의 그 무엇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임종하는 그날까지 주님 의지하며,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하신 주님의 메시지들, 곧 천국에 관한 모든 것을 번역하며 소개하는 삶에 매진하고자 합니다. 저의 사랑하는 모든 구독자님들 또한 저와 이 길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3-06-06(D3)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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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신관(神觀, a just idea of God)의 중요성 (1)’ (2023/6/5)

 

오늘부터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들을 좀 나누었으면 하는데요, 그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생각의 중요성(Importance of a just Idea of God)

2.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

3.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

4.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시지 않는다(God is not in Space)

5. 신적 본질 그 자체는 바로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

6.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는 실체이며, 형체이다(The Divine Love and the Divine Wisdom are Substance and Form)

7.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며, 생명 그 자체이시다(God is Love itself and Life itself)

8. 신적 사랑의 본성(The Nature of the Divine Love)

9.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영원하심(The Infinity and Eternity of God)

10. 하나님의 전능하심(The Omnipotence of God)

11.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The Omniscience of God)

12. 하나님의 편재(遍在)하심(The Omnipresence of God)

13. 하나님에 관한 건 오직 계시로만 알 수 있음(Knowledge respecting God only possible by Revelation)

 

 

각 제목마다 서너 개씩의 아티클로 진행되지 싶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생각은 교회와 종교, 그리고 예배에 관한 모든 것 안으로 들어갑니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특히 신학적 주제들은 다른 모든 것보다 윗자리(above all others)를 차지하는데요, 그중에서도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 최상석(the supreme place)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만일 이것이 거짓이면 그로 말미암은 모든 것 또한 거짓이거나 거짓이 되지요. 이런 지극히 높은 것은 또한 가장 내적(the inmost)이기도 해서 거기서 비롯되는 모든 일련의 것들에 대한 본질(the very essence of all)이 됩니다. 이 본질은, 일종의 영혼으로도 볼 수 있는데, 일련의 그 이어지는 것들에 대한 어떤 몸, 즉 자기를 닮은 어떤 몸을 형성합니다. 본질은 그 이어지는 것들을 따라 쭈욱 아래로 내려오면서 그 진리들 위에 빛을 비추는데, 만일 이 본질이 잘못되면 심지어 자기가 가진 무슨 흠과 오류들을 가지고 이어지는 그 아래 것들을 감염시키기도 합니다... (BE.40) ...the idea of God enters into all things of the church, religion, and worship; and theological matters have their residence above all others in the human mind, and the idea of God is in the supreme place there; wherefore if this be false, all beneath it, in consequence of the principle from whence they flow, must likewise be false or falsified; for that which is supreme, being also the inmost, constitutes the very essence of all that is derived from it; and the essence, like a soul, forms them into a body, after its own image; and when in its descent it lights upon truths, it even infects them with its own blemish and error... (BE.40)

 

※ 위 글은 스베덴보리 저, ‘새 교회 교리에 대한 개략적 설명’(A Brief Exposition of the Doctrine of the New Church, Which Is Meant by “The New Jerusalem” in the Book of Revelation, 1769) 중 ‘새 교회 교리들에 대한 스케치’(A sketch of the doctrinals of the New Church) 6번 ‘그 신학 교리(dogmas)는 인격들(persons)에 관한 어떤 삼위일체(a trinity), 그러니까 세 분 하나님(three Gods)에 대한 생각이 거부된 후, 대신 신적 삼위일체(the Divine Trinity)이신 한 분 하나님(one God)에 대한 생각이 받아들여진 후에야 오류로 보입니다.’(The dogmas of that theology appear to be erroneous after the idea of a trinity of persons, and thence of three Gods, has been rejected, and the idea of one God in whom is the Divine Trinity is received in its stead.)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위 내용은 주님을 세 분 하나님, 곧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및 성령 하나님으로 나누는 입장의 근본적인 오류를 지적하면서, 그래서 ‘첫 단추를 잘 끼어야 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참고로,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습니다.

 

...나는 자주 이 문제로 천사들과 대화를 나눴다. 천국에서는 신을 셋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천사들은 한결같이 단언했다. 그들은 신이 한 분이심과 그 한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심지어 지상에서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도 신이 세 분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천국에 올 수 없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은 세 신 사이를 헤매기 때문이며, 천국에서는 한 분을 생각하면서 셋이라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생각을 그대로 말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의 언어는 생각이 직접 전달되는 것, 즉 소리나는 생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살 때 신을 셋으로 나누어 그 각각을 별개로 인정한 사람들, 그래서 신관을 주님 한 분으로 모으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각 사람의 생각이 전체에 전달되기 때문에, 만일 입으로는 한 분을 말하면서 셋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드러나고 거부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진리와 선을 분리하지 않은 사람들,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놓지 않은 사람들은 사후에 영계에서 가르침을 받을 때, 주님께 대한 천국의 관념, 즉 주님이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생활이 따르지 않은 신앙인, 참 신앙의 교훈대로 살지 않은 사람은 그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HH.2)

 

 

2. 한 분 주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주님의 속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의 겉 사람이십니다. 우선은 이렇게만 말씀드립니다. 당분간 이 일종의 조직신학의 여정 중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비롯, 신적 삼위일체에 관한 보다 깊은 내용을 접하시게 되는데, 그때 좀 더 깊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 인간이 영과 육,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되어 있고, 또 활동하는 것과도 같겠습니다.

 

 

3. 다음은 성령에 관한 기술입니다.

 

...우리의 구주이신 주님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소중히 간직한 모든 성직자는 영계로 들어갈 때, (일반적으로 사후 사흘째 되는 날에) 처음에 신적 삼위일체(the Divine Trinity), 특히 성령(the Holy Spirit)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데요, 성령은 그 자체로 무슨 신(a God)이 아니라, 유일하시고 편재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신적 활동(the Divine operation proceeding from the one and omnipresent God)이 말씀에서 성령이 의미하는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TCR.138)

 

성령에게서 주님의 인격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모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안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는 침대와 같아서 사람들은 교리 안에 있는 것을 편안해한다 했습니다.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하신 모든 것 역시 주님의 어떤 거룩한 질서가 있습니다. 그 거룩한 질서인 교리의 세계, 주님 말씀하신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교회의 교리의 세계로 주님의 빛을 구하며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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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誘惑, temptation)이란 무엇인가? (5)’ (2023/6/2)

 

계속해서 ‘유혹’(誘惑, temptation), 오늘은 마지막 다섯 번째 단락 번역 및 설명입니다.

 

※ 영역(英譯, 원본은 라틴어)은 아래 링크로 가셔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bygrace.kr/1555

 

 

[5]이들 정말 적은(very few), 무슨 말을 하다 만 것 같은 약간의 진술들이지만, 이 정도로도 유혹이라는 게 어떤 건지(what temptations are), 그리고 가만 보면, 이게 사랑하고도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으며, 여기서 또 알 수 있는 건, 주님이 받으신 시험, 유혹의 본질, 본성이 무엇인지(the nature of the Lord’s temptations)하는 것인데요, 그것은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끔찍했던 것으로서(the most terrible of all), 주님의 사랑은 모든 사랑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the greatness of the love)이기 때문이며, 그만큼 주님이 받으신 유혹의 성격 또한 정말 두려운 것(the fearful character of the temptation)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는 사랑이었으며, 그래서 가장 열정적이었고, 그 결과, 가장 높은 수준의 선에 대한 애정과 진리에 대한 애정(the affection of good and affection of truth)의 총합이었는데, 이에 대항하여, 지옥 전체가 가장 악의적인 농간과 독을 품고(with the most malignant wiles and venom)달려들었지만, 그러나 주님 홀로 저들 모두를 정복하셨습니다. 이런 승리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악의적 정령들과 영들(the malignant genii and spirits)은 감히 아무 짓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생명이란 고작해야 파괴할 수 있냐 없냐에 달려 있으며, 그래서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들을 맞설 수 있는 사람, 저항할 수 있는 사람(a man is of such a character that he can resist)임을 지각하는 순간, 그들은 그 사람에게서 즉시 달아나는데, 그 모습이 마치 그들이 천국의 첫 번째 입구 근처에 가까이 갈 때마다 거기서 즉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내던지는 그런 모습과 똑같습니다. From these few statements, and they are very few, it may be seen what temptations are, and that they are, in general, such as the loves are, and from this we may see what was the nature of the Lord’s temptations, that they were the most terrible of all, for such as is the greatness of the love, such is the fearful character of the temptation. The Lord’s love was the salvation of the whole human race, and was most ardent; consequently it was the whole sum of the affection of good and affection of truth in the highest degree. Against these, with the most malignant wiles and venom, all the hells waged the combat; but still the Lord conquered them all by his own power. Victories are attended with the result that the malignant genii and spirits afterwards dare not do anything; for their life consists in their being able to destroy, and when they perceive that a man is of such a character that he can resist, then at the first onset they flee away, as they are wont to do when they draw near to the first entrance to heaven, for they are at once seized with horror and terror, and hurl themselves backward. (AC.1820.5)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주님의 사랑은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는 사랑

 

첫날 말씀드린 내용이 생각나는데요, 곧 악령들은 사람이 무슨 애정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 말고는 절대 무슨 공격도, 심지어 관심 조차 갖지 않는다는 것 말입니다. 이 말은 역으로 말하면, 사랑이 클수록 지옥의 공격이 크다는 말이며,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큰 사랑을 하신 주님은 그 결과, 누구보다도 혹독한 지옥의 공격 가운데 늘 계셨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이런 차원이 다른 공격을 늘 이기시기 위해서는 또한 아버지이신 여호와와의, 차원이 다른 교제 가운데 늘 머무르셔야만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요, 주님에 관한 이런 사실을 통해 우리 역시 이 세상 삶 가운데 늘 이기기 위해서는, 늘 승리하기 위해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진심으로 배우게 됩니다. 우리의 본 되어주신 주님, 그리고 그래서 지금도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2. ‘어떤 사람이 자기들을 맞설 수 있는 사람, 저항할 수 있는 사람(a man is of such a character that he can resist)임을 지각하는 순간, 그들은 그 사람에게서 즉시 달아나는데

 

야고보의 권면,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4:7)가 생각납니다. 모든 유혹 앞에서, 시험 앞에서 눈을 부릅뜹시다. 명예, 권세, 평판, 부, 건강, 외모, 유불리 등 삶의 전방위에서 우리를 흔드는 지옥의 공격 앞에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여 지옥에 대적, 저항, 맞섭시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여 꼭 쥐고 있는 것들을 역시 주님을 사랑하여 하나하나 내려놓읍시다. 지옥이 우리를 건드릴 소지가 충분한 것들, 즉 공격할 빌미, 꺼리들을 제공하지 말자는 겁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세요. 저런 것들을 부인, 부정, 무슨 비뚤어진 금욕을 지지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저런 것들이 우리에게 허락되었어도 우리는 그것을 단지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무슨 쓰임새(use) 정도로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쓰임새들의 형상, 체어리티(charity)의 모양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좋은 것을 주님으로부터 아낌없이 받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3. ‘그들이 천국의 첫 번째 입구 근처에 가까이 갈 때마다 거기서 즉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내던지는 그런 모습

 

실제로 지옥의 영들 중 천국을 원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허락, 천국 초입까지 접근하지만, 그러나 천국의 경계를 넘어 천국 빛에 노출되는 순간, 그들은 무슨 연탄불 위 오징어 오그라들듯 그렇게 사지가 뒤틀리며 고통스러워하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 그만 도로 지옥으로 점프, 지옥의 빛과 그 기운을 쐬고 나서야 한숨 돌리며, 그렇게 평안해 한다고 하는데요, 이들이 천국 빛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는, 이들은 자기 안의 질서가 모든 면에서 천국과 정반대, 완전 거꾸로 되어 있기 때문이랍니다.

 

사람의 영(spirit), 곧 사람의 속(internal man, 속 사람)은 자연계에서는 겉인 몸(body)에 가려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후(死後), 그러니까 이 모든 외적인 것이 제거된 후 남는 것인 영으로 영원히 살아가야 하는 사후 세계에서는 이 모든 실체, 정체인 속이 드러납니다. 세상에서는 점잖은 명망가요, 명성 관리를 잘하여 사람들에게 점수를 많이 땄어도 그것이 속으로는 오직 자기를 사랑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런 사람은 사후엔 그 정체가 드러나 바로 저런 비참한 상태로 전락합니다.

 

문제는, 지옥의 속이는 기술인 이 ‘유혹’이 얼마나 교묘한지, 살아생전 본인은 지금 자기가 속고 있는 줄은 전혀 꿈에도 모른 채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감지, 감별하기 위한 유일한 질문은 바로 ‘나는 지금 주님을 사랑하는가?’,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유혹의 상황 속에서도 이 질문을 끝까지 붙들고 씨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최종 도달점은 바로 천국이 될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지난 한 주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제 역량이 이리도 모자라 결국은 이렇게나 어려운, 알쏭달쏭한 말씀이 되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천국의 일을, 영계의 일을 정말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더욱 힘써 주님 빛 구하며, 정진하겠습니다. 이런 글이어도 늘 수신하여 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이 글들을 내치지 않으시는 모든 분께 보답하여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1)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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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誘惑, temptation)이란 무엇인가? (4)’ (2023/6/1)

 

계속해서 ‘유혹’(誘惑, temptation), 오늘은 네 번째 단락 번역 및 설명입니다.

 

※ 영역(英譯, 원본은 라틴어)은 아래 링크로 가셔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bygrace.kr/1554

 

 

[4] 그들, 곧 이 지옥에서 온 영들은 진리에 관한 애정들(the affections of truth)에 대해 유사한 움직임을 보이는데요, 이 애정들이 사람의 양심(the conscience)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양심에 속한 게 무엇이든, 그리고 그게 어떤 종류든 일단 그걸 지각하게 되면, 그 즉시 이들은 그 사람 안에 있는 거짓들과 실패들로부터 자신들에게 어떤 애정을 하나 급조하는데요, 이걸 가지고 이들은 진리의 빛 위에 그늘을 드리워 그걸 왜곡하거나 불안을 유도, 그를 고문합니다. 그들은 또 그가 다른 걸 두리번거리지 못하도록 어떤 한 가지만 끈질기게 생각, 그걸 환상으로 채우며, 동시에 그 갈망, 그 욕망에 몰래 환상의 옷을 입힙니다. 이런 식으로 이들, 곧 이 악령들의 수법은 정말 기가 막힐 정도인데요, 이런 거 말고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말 예술 수준의 기술들이 있는데, 그 하나하나는 도저히 어떻게 설명할 수도, 이해시켜 드릴 수도 없는 그런 것들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나마 이런 것들은 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다른 수많은 수단들 중 극히 일부이며, 이들이 사람의 양심을 가지고 놀 수 있는 방법들 중 가장 일반적인 수준의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이들 지옥의 영들은 사람을 파괴하는 것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얻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They act in a similar way against the affections of truth that make the conscience: as soon as they perceive anything of conscience, of whatever kind, then from the falsities and failings in the man they form to themselves an affection; and by means of this they cast a shade over the light of truth, and so pervert it; or they induce anxiety and torture him. They also hold the thought persistently in one thing, and thus fill it with fantasies; and at the same time they clandestinely clothe the yearnings with the fantasies; besides innumerable other arts, which cannot possibly be described to the apprehension. These are a few of the means, and only the most general, by which they can make their way to man’s conscience, for this above all else they take the greatest delight in destroying. (AC.1820.4)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이 지옥에서 온 영들’, 각 사람에게 와 있는 악령들은 지옥에서 직접 오는 게 아니고, 수많은 지옥 공동체에서 중간영계로 파견 나온 에이전시 영들입니다. 이 중간영계는 천국 상태도, 지옥 상태도 아닌, 중간 상태의 영들이 잠시 머무르는 영계로, 여기는 사람의 사후, 제일 먼저 놓이게 되는 상태이며, 여기엔 지옥뿐 아니라 천국 수많은 공동체에서 파견 나온 에이전시 천사들(또는 선한 영들)도 함께 있습니다.

 

2. ‘진리에 관한 애정들이 사람의 양심을 만든다’, 양심이라는 것은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종교적 원리(the religious principle)를 속으로(inwardly) 받아들임에 따라 형성되는 건데요, 여기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함(what is good)에 대한 양심이 있고, 다른 하나는 올바름(what is just), 정의, 공정 등에 대한 양심이 있습니다. 전자는 속 사람의 양심, 후자는 겉 사람의 양심으로서, 전자는 내적 애정(internal affection)을 가지고 신앙의 율례(the precepts of faith)에 따라 행하는 걸로, 후자는 외적 애정에 따라 사회, 도덕적 법에 따라 행하는 걸로 구성됩니다. 전자에는 후자 또한 있지만, 그저 후자뿐인 사람은 전자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이며, 그러나 가르침을 통해서 나중에 전자를 받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저, ‘새 예루살렘과 천적 교리’(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9장 ‘양심’에서 발췌)

 

그러므로 기독교 내 각 교단과 교파, 심지어 타종교에 이르기까지 주님은 저들의 나름의 종교적 양심을 허락하시며, 최종적으로는 선한 양심의 사람들이 되도록 도우십니다. 우리 역시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자신의 종교적 양심에서 출발, 결국엔 선한 양심이 되도록 힘쓸지언정 나와 다르다고 타인의 양심을 함부로 대하거나 무례, 심지어 종교적, 신앙적 폭행을 일삼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3. ‘그 즉시 이들은 그 사람 안에 있는 거짓들과 실패들로부터 자신들에게 어떤 애정을 하나 급조한다’, 각 사람에게 와 있는 선한 영 둘, 악한 영 둘은 각각 전자는 그 사람의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후자는 그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갑니다. 들어가서는 그 기억과 생각들이 마치 자기들 것인 양 사용하는데요, 위 기술(記述)은 바로 이런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요, 위 기술의 뜻은,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회사에서 이중장부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교회 다니는 사람은 ‘아, 그건 좀...’ 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그 순간, 그의 안에 있는 악령들은 곧바로 ‘아니야, 지난번에도 괜히 양심 어쩌구 하다가 큰 불이익을 받았잖아... 그랬다고 누가 잘했다고 내 편 드는 사람 하나 없었고... 심지어 마누라까지도 당신은 왜 그렇게 남들처럼 안 해? 왜 그렇게 튈려고 그래? 그래서 얻는 게 뭔대? 하며 나를 모욕했잖아... 그래, 이번 한 번만, 딱 한 번만 눈 감자. 아무개 좀 봐. 회사가 하라는 대로 했더니 얼마 안 있어 승진했잖아...’ 속삭이며, 그에게 비추는 빛을 가리고, 대신 환상의 옷을 입히며, 슬쩍 속이는... 네, 이런 겁니다.

 

5. 영계는 내면의 나라여서 이곳에서 우리가 ‘추상적이다’, ‘개념적이다’ 하는 것들이 그곳에서는 마치 영상을 보듯, 비디오를 보듯 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우리 안의 악령들의 저 은밀한 짓거리들을 마치 두 눈으로 보듯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계에서 악령들의 온갖 궤휼과 술수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그러나 주님이 그 자세한 기술을 금하셨다고 합니다. 만일 그 방법 하나라도 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 순간 이 세상은 정말 큰일 나기 때문이지요. 비록 지금 우리는 두 눈이 탁하고 어두워 저들의 하는 짓을 실제로 볼 수도, 그리고 이렇게 알려줘도 이해조차 쉽지 않지만... 하여튼 아주 사소한 ‘유혹’조차도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겨 한번 두번 허용했다가는 영적으로는 수습 불가 상태로까지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정신 똑바로 차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1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4:1-11)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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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誘惑, temptation)이란 무엇인가? (3)’ (2023/5/31)

 

계속해서 ‘유혹’(誘惑, temptation) 세 번째 단락 번역 및 설명입니다.

 

※ 영역(英譯, 원본은 라틴어)은 아래 링크로 가셔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bygrace.kr/1553

 

 

[3] 또 그들은 선(善, good)이 무엇이고, 진리(眞理, true)는 무엇인지에 관한 단순한 논쟁 같은 건 하지 않는데요, 그런 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 논쟁에서 자신들이 천 번을 지더라도 자신들은 여전히 집요할 것이기 때문이며, 이 역시 선과 진리에 관한 건 결코 이성으로, 머리로, 말과 논쟁으로 끝을 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은 선과 진리를 왜곡(歪曲, pervert), 거기에 욕망(慾望, yearning, appetite)과 망상(妄想, persuasion, delusion)의 불을 확 붙여 그로 하여금 영적 장님이 되어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못 보게, 그리고 모르게 하며, 동시에 그들은 이런 욕망과 망상을 어떤 즐거움으로 불타오르게 하는데, 이 즐거움은 그들이 그에게서 뺏은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그를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감쪽같이 속이고 감염시키며, 영적 성폭행을 통해 철저히 망가지게 합니다. 이런 일을 그들은 정말 엄청난 스킬로 하는데요, 이런 스킬로 그들은 그를 이렇게 저렇게 가지고 놀며, 만일 주님이 그를 돕지 않으시면, 그는 실제로 자기가 지금 영적으로 이런 일을 겪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정도로 악령들의 훼방과 공격은 정말 정말 지독하며, 이런 것이 영계에서 자행되는 ‘유혹’(誘惑, temptation)의 정체, 실체입니다. (AC.1820.3) Nor do they wage the combat simply by reasoning against things good and true, because such combats are of no account, for if they were vanquished a thousand times they would still persist, since reasonings against goods and truths can never be wanting. But they pervert the goods and truths, and inflame with a certain fire of yearning and of persuasion, so that the man does not know otherwise than that he is in the like yearning and persuasion; and at the same time they enkindle these with delight that they snatch from the man’s delight in something else, and in this way they most deceitfully infect and infest him; and this they do with so much skill, by leading him on from one thing to another, that if the Lord did not aid him, the man would never know but that the case was really so.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선과 진리를 왜곡, 욕망과 망상의 불을 붙인다’는 것은 쉽게 말씀드리면 이런 것입니다. 출발할 때는 주님을 사랑하여 이 골고다의 길 걸어야지 해 놓고는 그래도 안정된 목회를 하려면 십일조 내는 가정이 몇은 되어야 생활이 되니 어쩌니 하다가, 그 다음엔 사람들이 찾아오는 교회가 되려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설교를 해야 하니 어쩌니, 그것도 스킬이 있어야 하니 어쩌니 하다가... 결국엔 설교꾼, 목회꾼이 되어버리고 마는... 네, 이런 비슷한 많은 것들입니다. 이렇게 망가지는 중에도 계속해서 ‘나는 지금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이 길은 나중에 큰 상급이 약속된 길이야...’ 하는 속삭임에 그만 정신 못 차리고 점점 깊이 빠져드는 것이지요...

 

2. 이 ‘yearning’과 ‘persuasion’의 역사는 참으로 유구합니다. 인류 첫 교회의 종말인 ‘대홍수’(大洪水) 역시 사실은 인류 첫 교회인 태고교회가 타락, 이 ‘yearning’과 ‘persuasion’의 물결에 얼마나 처절하게 잠겼는지 다른 마땅한 표현이 없어 ‘대홍수’, ‘노아의 홍수’로 표현한 것입니다. 참고로, ‘노아’는 당시 이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참 신앙의 교회, 곧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지 않았던 교회를 일컫는 이름입니다.

 

3. 영계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24) 주님 말씀에 처절하게 시선 고정하지 않으면 정말 눈 뜨고 코 베임을 당하는 그런 세계이며, 그래서 모든 천사는 끊임없이 주님을 향해 얼굴을 돌린다고 합니다. 마치 해바라기들처럼 말입니다. 사실은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천사들을 끊임없이 자신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4. 아주 사소해 보이는 한 조각 ‘유혹’조차도 철저하게 끊어내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도 그러셨고, 수 많은, 소위 성인’(聖人)이라 추앙받는 사람들도, 이들 중 99.999%는 후세가 자신을 성인으로 추앙한다는 사실에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라 주님 앞에서 쥐구멍을 찾았겠지만..., 이 ‘유혹’의 영적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상상을 초월한 금욕에 힘썼던 것입니다. 금욕 생활에 대해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분들은 이 혼탁한 물질과 육욕의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을 사랑하여 더할 수 없이 순결, 정결한 신부로 준비하여 드리고픈 그런, 이미 지상에서 천사의 삶, 천국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몸부림치시는, 혹은 치셨던 분들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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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誘惑, temptation)이란 무엇인가? (2)’ (2023/5/30)

 

어제에 이어 ‘유혹’ 두 번째 단락 번역 및 설명입니다. 모두 다섯 단락으로 되어 있습니다.

 

※ 영역(英譯, 원본은 라틴어)은 아래 링크로 가셔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 어떤 경우가 유혹(temptations)인지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으므로 여기서 짧게라도 말씀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악한 영들은 사람이 사랑하는 것 말고는 그 어떤 것하고도 절대 싸우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 무엇을 더욱 열렬히 사랑할수록 이들은 더욱더 치열하게 싸웁니다. 악한 정령들(evil genii)이나 악한 영들(evil spirits)은 모두 애정(affection)에 관한 것들과 싸우는데, 그것들이 선(good)과 관련되었으면 전자, 진리(truth)와 관련되었으면 후자입니다. 이들은 무언가 아주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사람이 그걸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그리고 무언가 사람이 그것을 즐거워하고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마치 냄새를 맡듯 지각하는데요, 그 순간, 이들은 곧바로 그것에 대한 폭행과 함께 그걸 파괴하려고 힘쓰는데, 그것은 곧 그 사람 전체에 대한 공격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은 사실은 그가 사랑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식으로 사람을 파괴하는 것보다 더 이들을 즐겁게 하는 건 없는데요, 주님이 이들을 쫓아버리시지 않는 한 이들은 심지어 영원히 이 짓을 그만두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들은 악의적이고 교활하여 사람에게 아첨,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은 후, 사람이 자신들을 사랑하게 하는데요, 이런 식으로 이들은 사람을 자기들 가운데로 끌어들이며, 일단 끌어들인 후에는 이들은 그 사람의 사랑을 파괴하려 하며,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데, 그 방법은 수천 가지나 되며, 그 하나하나는 도저히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As few know how the case is with temptations, it may here be briefly explained. Evil spirits never fight against other things than those which the man loves; the more ardently he loves them, the more fiercely do they wage the combat. It is evil genii who fight against the things that pertain to the affection of good, and evil spirits that fight against those which pertain to the affection of truth. As soon as they notice even the smallest thing which a man loves, or perceive as it were by scent what is delightful and dear to him, they forthwith assault it and endeavor to destroy it, and thereby the whole man, for man’s life consists in his loves. Nothing is more delightful to them than to destroy a man in this way, nor would they desist, even to eternity, unless they were driven away by the Lord. They who are malignant and crafty insinuate themselves into man’s very loves by flattering them, and thus bring the man among themselves; and presently, when they have brought him in, they attempt to destroy his loves, and thereby murder the man, and this in a thousand ways that cannot be comprehended.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입니다.

 

1. 모든 사람에게는 악한 영들과 선한 영들(혹은 천사들)이 최소 둘 이상씩 와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항상 주님과 연결되어 있게 하시려는 주님의 배려 때문인데요, 이는 사람이 그 본성상 악 가운데 태어나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설명은 따로 나중에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위 번역 가운데 ‘악한 정령들’과 ‘악한 영들’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2. 위 내용은 사람의 내면, 즉 사람의 영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은 자연계와 영계, 두 세계에 공존합니다. 그러므로 자연계 관점만으로는, 즉 육체적, 감각적 관점만으로는 자기 안에서 저런 일이 일어나는 걸 전혀 인지할 수 없습니다.

 

 

오늘 메시지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혹은 누구를 사랑하고 좋아하며, 애정을 느끼는 순간, 그것이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에 관련되었으면, 영계에서는 그에 비례, 아니 그 이상의 아주 지독한 훼방과 파괴가 시작된다는 걸 꼭 기억, 그만큼의 댓가를 지불할 결심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즉 모든 종류의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는 반드시 그에 비례하는 고난과 시험, 유혹이 뒤따르는데, 이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의 허락과 배려 때문이며, 그러므로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공짜 사랑, 오직 행복하기만 한 애정의 꽃길 같은 건 없습니다. 주님조차 무슨 금수저의 길을 걸으시다 십자가 한번 지시고 덜컥 구속주가 되신 거, 절대 아닙니다. 주님도 우리처럼 사람으로 태어나 우리와 똑같은 거듭남의 과정을 밟으시되 주님의 속 사람이신 여호와께 초집중,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성취를 아주 어려서부터 이루신 것만 다를 뿐입니다.

 

거듭남은 무슨 영접기도 한 번, 신앙고백 한 번으로 되는 거, 절대 아니며, 이처럼 매 순간 우리를 죽이려고 덤벼드는 악령들의 훼방과 파괴를 주님 의지하고, 마치 탈북민들, 목숨 걸고 강을 건너 자유의 나라로 넘어오듯 그렇게 절박함으로 싸워 얻는 것입니다. 싸워 얻는다는 건 싸워 이겨나가는 중에 우리의 속 사람이 천국 생활에 적합하게 되어간다는 뜻입니다.

 

우리로 이 거듭남을 이루어 천국 들어가도록 끝까지 우리와 동행하시며 도우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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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誘惑, temptation)이란 무엇인가? (1)’ (2023/5/29)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Whereby shall I know that I shall inherit it? (창15:8)

 

위 말씀은 창세기 15장 7절,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하시는 말씀에 아브람이 대답하는 말입니다.

 

이는 겉으로는 아브람과 여호와 간 대화이지만, 그 속뜻으로는 주님의 내부 사람(the interior man)과 속 사람(the internal) 간 대화입니다.

 

이는 인성을 입으신 주님의 거듭나심에 관한 과정으로서 주님 안에서 일어난 각종 영적 전쟁과 전투, 싸움을 주님은 어떻게 이겨나가셨는지를 아브라함의 아브람 시절 일어난 일들을 통해 알려주고 계신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 역시 우리의 거듭남의 과정 및 우리의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하면 주님처럼 이겨나갈 수 있는지 하는 매우 생생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귀한 계시입니다.

 

아래는 주님이 받으신 유혹에 대하여, 스베덴보리를 통해서 밝히신 아르카나이며, 순서대로 오늘은 그 첫 번째 단락을 번역, 소개합니다.

 

 

[1] 이 표현이 주님의 사랑, 곧 온전히 확신할 수 있었으면 하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유혹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들 단어 자체에 내포된 의심들을 보고 알 수 있는데요, 시험 중에 있는, 유혹 가운데 있는 사람은 시선의 끝(the end in view), 곧 믿음을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선의 끝인 믿음은 곧 사랑인데요, 이는 악한 영들과 정령들(evil genii)의 힘써 싸우는 대상이요, 결국 의심케 하고자 의도하는 것이며, 이 사랑이 크면 클수록 저들 역시 더욱 이를 악물고 그 목적, 곧 그 사랑을 포기, 의심케 하고자 갖은 애를 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만일 그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전혀 꿈쩍도 안 하면, 저들은 크게 절망, 결국 그 어떤 유혹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결과에 대한 확신은 승리를 선행, 승리, 이김이라는 것에는 이런 확신도 들어 있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a temptation against the Lord’s love, which desired to be fully assured, may be seen from the doubt that is implied in the words themselves. He who is in temptation is in doubt concerning the end in view. The end in view is the love, against which the evil spirits and evil genii fight, and thereby put the end in doubt; and the greater the love is, the more do they put it in doubt. If the end which is loved were not put in doubt, and indeed in despair, there would be no temptation. Assurance respecting the result precedes the victory, and belongs to the victory. (AC.1820.1)

 

 

시험, 유혹은 내 영적 시선의 끝인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사실과, 내가 무엇을 사랑하면 곧바로 악령들의 훼방이 시작된다는 사실! 그러므로 무엇을, 누구를 사랑하기로 결심하였으면, 당연히 그에 따른 유혹 역시 비례하여 혹독할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게 되며,

 

그러면 이 세상 온 인류를 사랑하신 주님은 그 시험와 유혹, 훼방과 모욕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심하였을까 생각하며, 거듭거듭 주님 십자가의 길 걸으심 앞에 숙연해집니다...

 

주님, 정말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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