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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8-21,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 (AC.138-148) (2025/10/5, 주일)

bygracetistory 2025. 10. 4. 23:09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 (2:18-21, AC.138-148)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18-25)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다섯 번째 시간으로 2장 후반부 중 첫 번째인 18절로 21절,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AC.138-148)입니다.

 

먼저 2장 후반부(18-25) 전체 및 절 별 개요입니다.

 

131

태고교회의 후손들, 이들은 자신들의 본성(本性, proprium, own)으로 기울어졌는데, 여기서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이 창2 후반은 태고교회 두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입니다.



132

인간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신 자신과 세상, 곧 자기 본성으로 인도받기를 원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에게 허락된 본성을 여기서 다룹니다. (18)

 

133

그래서 그에게 먼저 선에 관한 애정들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알게 하시는데, 이것들은 그가 앞서 주님께 받은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 본성을 향해 기울어집니다. (19, 20)

 

※ ‘’을 생각하면 마음이 밝아지고 긍정적이 되며, ‘진리’, ‘’, ‘올바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반듯한 생각들은 앞서 주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들입니다. 이런 귀한 선물들을 받아놓고도 우리는 그 가치를 모르고 아주 보잘것없는 내 안의 것들, 나의 본성에 주목하면서 주님으로부터는 독립하려고 애를 쓰며 살고 있습니다.

 

 

134

이런 이유로 그는 자기 본성 상태로 들어가며, 그리고 어떤 본성(an own)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그걸 여자로 빚어진 갈빗대라 한 것입니다. (21-23)

 

 

135

천적 영적 생명은 인간의 본성과 아주 가까이, 거의 하나로 보일 정도로 붙어있습니다. (24)

 

 

136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이노센스가 이 본성 안으로 스며드는데요, 이 본성이 완전히 망가져서 도무지 뭐든지 못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지 않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25)

 

 

다음은 단락 전체의 배경 설명입니다.

 

 

137

창세기의 첫 세 장은 대체로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처음부터 마지막, 그러니까 사라질 때까지 ‘사람’(man, homo)으로 불렸습니다. 창2 전반부가 이 태고교회가 가장 융성했던 상태, 곧 천적 인간이었던 때를 다루고 있다면, 이제 여기 후반부는 자신들의 본성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상이 개요 및 배경이고, 다음은 후반부 본문 절 별 속뜻입니다.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38

‘혼자’(alone)는 그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해 하지 않았음을, 대신 자아와 세상으로 인도받기를 원했음을,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help as with him)은 인간의 본성(man’s own)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여자로 만드신 갈빗대’(rib built into a woman)라 하는 것입니다.

 

 

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들처럼 주님의 가이드 아래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홀로 지내는’(dwell alone) 사람들이라 하였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로 인한 들끓음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것을 유대교회에서도 그들이 다른 민족들을 다 몰아낸 후 그 땅에 홀로 거주하는 걸로 표상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종종 주님의 교회를 가리켜 ‘홀로 산다’(alone)고 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49:31)

 

모세의 예언에서도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33:28)

 

그리고 발람의 예언에서는 더 분명하게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23:9)

 

여기 ‘여러 민족’(nations)은 악을 말합니다. 이 태고교회의 후손은 홀로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즉 천적 인간이 되려 하거나 그들처럼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려 하지 않고 대신 유대교회처럼 여러 민족 중에 있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이 이런 걸 원했기 때문에 이르시기를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라 하신 것입니다. 이런 걸 원하는 사람은 이미 악 가운데 있으며 그가 원하는 삶이 그에게 허락됩니다.

 

※ 우리는 보통 자녀가 무슨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그걸 막거나 금지, 못 하게 꾸짖고 책망하는데 주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자원함이 없는 순종, 사랑으로 하지 않는 복종과, 강제로, 억지로 돌이키게 함은 주님 편에서는 하나 마나이기 때문이며, 그런 건 아예 주님의 속성에 배치되기 때문이지요. 아래 이사야 말씀이 생각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42:3)

 

이 말씀의 속뜻은 주님은 사람들의 거짓을 바로잡으시지도, 탐욕을 끄지도 않으신다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거듭나기 전, 사람의 생명은 오직 거짓과 탐욕밖에 없기 때문인데 만일 이때 이 유일한, 비록 악하고 거짓되더라도, 생명을 건드리게 되면 더 이상의 생명이 없어 사람은 바로 소멸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는’ 대신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려도 그와 동행, 그가 자의로 주님의 선과 진리 쪽으로 돌이키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역량에 맞춰 강약을 조절하시면서 말이지요. 마치 저 아우 아벨을 죽인 가인을 보호(?)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8-15) //

 

 

140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사람의 본성(man’s own)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본성의 본질(nature)로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으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이 교회 사람을 주님이 좋게 보셔서 그에게 어떤 본성이 허락되었는데, 그게 마치 그의 본성처럼 보이는 그런 것이어서 이르시기를,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라 하신 것입니다.

 

 

141

인간 본성(man’s own)의 본질(nature)을 육적(corporeal) 세속적 인간, 그리고 영적 인간, 천적 인간과 함께 설명하려면 그전에 먼저 인간 본성에 관한 수많은 것들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육적 세속적 인간에게는 그의 본성이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신의 본성 말고는 아는 게 없고, 앞서도 말씀드렸듯 만일 이걸 잃으면 자기는 망할 꺼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인간의 경우 역시 그의 본성의 모습은 비슷한데요, 그가 비록 주님은 만물의 생명이시고, 지혜와 이해, 그리고 그 결과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을지라도 그에게 있어 이런 지식은 아직은 마음속 신념이라기보다는 입술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은 만물의 생명이시며 생각하고 행동할 힘 주시는 분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는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지각(perceives), 그러니까 주님이 주시는 영적 통찰력으로 천사들처럼 그냥 알기 때문이지요. 그는 결코 자신의 본성을 원치 않습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주님은 그에게 어떤 본성을 주시는데, 그것은 선함과 참됨에 관한 모든 퍼셉션, 그리고 모든 행복과 결합하는 본성입니다. 천사들이 이런 본성 가운데 있으며, 동시에 가장 내적인 평화와 고요한 내적 기쁨(the highest peace and tranquility)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의 본성에는 주님의 것들이 들어 있기 때문인데, 주님은 그들의 본성을 다스리시거나 그들의 본성으로 그들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이 본성은 가장 천적인 것 그 자체이지만, 육적 인간의 본성은 끔찍, 곧 지옥 그 자체입니다. 이 본성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다루겠습니다.

 

※ 천적 인간은 천사들처럼 그저 주님의 인도하심만으로 충분, 굳이 무슨 다른 본성을 또 필요로 하거나 찾지 않지만,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본성, 곧 ‘선함과 참됨에 관한 모든 퍼셉션, 그리고 모든 행복과 결합하는 본성’을 허락하셨습니다.

 

 

19, 20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 20)

 

142

‘짐승, 가축’(beasts)은 천적 애정을, ‘공중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을 의미하는데요, 다시 말씀드리면 ‘짐승’(beasts)은 의지에 속한 것을, ‘새’(fowls)는 이해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는 그로 하여금 그것들의 퀄리티를 알게 하심이며, 아담이 ‘그들에게 이름을 주니라’(giving them names)는 그가 그것을 알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에게 주신 선에 속한 애정의 퀄리티와, 그리고 진리에 관한 지식의 퀄리티를 그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 그는 여전히 자신의 고유 본성으로 기울어졌는데, 이를 전과 같이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처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이 ‘퀄러티를 안다’는 것은 그것의 본질, 본성을 안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이름을 주다’, ‘아무개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다’의 의미가 모두 이렇습니다. 천적 천사들의 능력 중 하나가 바로 자기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상대방의 아우라만 가지고도,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만 가지고도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지각하는 건데요, 이 ‘아담’으로 일컬어지는 천적 인간, 곧 초창기 태고교회 사람들이 바로 이런 능력, 곧 이런 퍼셉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143

고대에는 ‘가축’(beasts)과 ‘짐승’(animals)이 사람한테 있는 애정과 그와 같은 걸 의미했다는 사실이 오늘날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천적 사고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영계에서는 동물을 가지고 그런 거, 곧 애정 같은 걸 표현하며, 실제로도 동물의 생긴 모양대로 해당 애정을 표현했기 때문에 그 당시 그들은 그런 식으로 말했고, 그때 그들은 그밖에 무슨 다른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에서도 짐승들이 언급되는 곳마다 일반적이든 아니든 무슨 다른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언의 말씀 전체가 이런 걸로 가득하며, 그렇기 때문에 각 짐승이 특별히 뭘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 말씀에 담긴 속뜻이 무엇인지를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앞서도 보았듯 짐승들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악한, 즉 해로운 짐승이 있는가 하면 선한, 즉 무해(無害)한 짐승이 있지요. 선한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 예를 들면 양(sheep), 어린 양(lambs), 비둘기 같은 것들이지요. 여기서 다루는 인간이 천적 인간, 혹은 천적 영적 인간이기 때문에 이들 선한 짐승들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짐승’(beasts)이 의미하는 바가 일반적으로 애정이라는 것을 위, 곧 말씀 몇몇 구절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 (AC.45, 46) 여기서 굳이 다시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144

‘이름으로 부르기’(call by name)는 그 퀄리티를 안다는 의미인데요, 이는 고대인들은 ‘이름’(name)을 가지고 어떤 것의 에센스를 이해했기 때문이며, 무엇을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그 퀄리티에 대해 아는 걸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 줄 때 어떤 의미를 담아 주었기 때문인데, 모든 이름은 그 안에 무언가 고유한, 그 이름으로부터나 그 이름에 의해서나 자녀의 어떤 기원과 고유 특성을 알 수 있는 그런 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원과 특성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하고 있는, 지금 이 아르카나 주석 작업 중반,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루는 부분에서 아시게 됩니다. 이름들에는 그렇게 이름하는 것의 근원과 퀄리티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부르기’(calling by name)를 그밖에 무슨 다른 걸로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 사람들의 언어적 관습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이걸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은 말씀에 나오는 이름들을 그런 의미들을 부여하며 읽어야 한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라실 수도 있겠습니다.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5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29:32-35)

 

 

145

말씀에서도 ‘이름’(name)은 어떤 것의 에센스(the essence of a thing)를,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는 그 퀄리티에 관해 아는 걸 의미합니다.

 

이사야입니다.

 

3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4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45:3, 4)

 

이 구절에서 ‘네 이름을 불러’(call by name)와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surname)는 그 퀄리티를 예견한다(to foreknow the quality)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62:2)

 

앞뒤 구절에 나오는 것처럼, 또 다른 캐릭터가 될 것을 의미하지요.

 

계속해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43:1)

 

그가 그들의 퀄리티를 알고 계셨음을 가리키시면서

 

계속해서 같은 이사야 말씀입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40:26)

 

그는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계시록입니다.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3:4, 5)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3:8)

 

이들 구절에서 ‘이름’(names)은 결코 말 그대로 이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퀄리티를 의미하는데요, 심지어 천국에서는 그 누구도 이름이 아닌, 그의 퀄리티로만 알려지지요.

 

 

146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통해 그 상징하고 있는 속뜻을 보실 수 있는데, 18절에 보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하시고는 지금은 ‘짐승’(beasts)과 ‘새’(birds)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는 전에 다룬 적이 있던 것이지요. 그러고는 즉시 또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일련의 흐름의 속뜻은 이렇습니다. 곧 그가 비록 자신의 퀄리티, 곧 선에 관한 애정과 진리에 관한 지식에 대해 자신의 퀄리티가 어느 정도인지를, 또는 어떤 상태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어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본성을 향해 기울어졌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유 본성을 간절히 원하는 그런 사람들은 주님에게 속한 것들에 대한 멸시를 시작하기 때문인데 주님에게 속한 것이 아무리 그에게 분명하게 표현되고 보여도 말입니다.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1)

 

147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rib)는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을 의미하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지만 실제로는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그런 본성입니다. ‘살로 대신 채우시고’(flesh in the place of the rib)는 그 안에 생기가 있는 본성을, ‘깊이 잠들게’(deep sleep)는 그의 현 상태를 말하는데, 사람이 이 상태가 되면 그는 자신의 본성이라 하는 걸 소유하고 있는 게 자기 자신인 줄 알지요. 이 상태는 잠든 상태와 유사한데, 이 상태에 있는 동안은 사람은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이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는 정신을 차리며 잠에서 깬 상태가 됩니다.



148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 실제로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본성을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rib)라 하는 이유는 태고인들 사이에서 가슴은 체어리티(charity)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심장과 폐가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뼈(bones)라는 건 아주 꺼림칙한 걸 의미했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살(flesh)은 생기 있는 걸 가리켰지요. 이 상응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아르카나 중 일부인데 이 아르카나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속한 것으로서,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2장 두 번째 단락 중 전반부인 18절로 21절 전반, 글 번호로는 AC.138-148을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주는 후반부인 21절 후반부터 끝 절인 25절까지입니다.

 

오늘 본문 및 전체 개요, 그리고 배경을 한 번 더 읽고 마치면 좋겠지만 성찬도 있고 원고가 길어 시간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설교
2025-09-2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10-05(D1)-주일예배(2618, 창2,18-21, AC.138-148),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pdf
0.44MB
성찬.pdf
0.14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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