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AC.250-279, 창3.4,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창3:15-19), 2025/11/9(D1)
창3.4,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창3:15-19, AC.250-279)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man [vir])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5-19)
창세기 속뜻 주석설교, 오늘은 창세기 3장 두 번째 단락 두 번째 시간으로, 지난주에 이어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창3:15-19) 계속입니다.
먼저 개요입니다. (반복)
234
홍수로 이어지는 교회의 후속 상태(The subsequent state of the church down to the flood)가 여기 기술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교회는 자신을 철저히 파괴했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예언이 주어집니다.
235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거 믿는 걸 내켜 하지 않음으로써, 감각 파트는, 이게 바로 ‘뱀’(serpent)인데, 자신을 저주했고, 즉 그 자체가 저주였고, 그 결과 지옥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14절)
236
이런 이유로 온 인류가 지옥을 향해 뛰어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 주님은 세상에 오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15절)
237
교회가 ‘여자’(woman)라는 표현으로 더 깊이 설명되고 있는데요, 이 교회는 더 이상 진리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아(self), 즉 본성(own)을 사랑했습니다. 비록 이 본성을 ‘통제하라’(rule)는 합리적 능력(合理, a rational)이 그들에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16절)
238
다음은 이 합리적 능력이라는 래셔널의 퀄러티(The quality of the rational)에 관한 설명입니다. 여기 보면, 이 합리적 능력은 자아, 즉 본성에 동의, 저주를 자초하더니 결국 지옥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남아 있는 이성(理性, reason)은 없고, 대신 이성 노릇을 하는 추론 능력(推論, ratiocination)만 남게 된 것이지요. (17절)
239
저주와 황폐함, 그리고 길들여 지지 않은 본성(nature), 즉 야생으로 돌아간, 짐승 수준이 되어버린 그들의 본성에 관한 설명입니다. (18절)
240
다음은, 신앙과 사랑의 모든 것을 향한 그들의 혐오와,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들은 처음에는 사람이었다가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19절)
241
태고인들은, 천적(天的, celestial), 그러니까 상응 능력이 있어서, 땅 위 온 세상 만물을 눈으로, 즉 육안(肉眼)으로 보면서도 속으로는 그 사물이 가리키고 표상하는 천국 신성한 것들을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시각(sight)은 그저 창문 역할, 안경 역할이었을 뿐, 그들이 실제 뭘 봤는지를 알 수 있는 건 그들의 말(speech)이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런 걸 알 수 있는데요, 만일 누가 어떤 사람이 하는 말에 깊이 동의가 되면, 그는 실제로 그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마치 말 자체보다는 말에 담긴 의미만 건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좀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심지어 그 말의 의미보다 더 보편적인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후손들은 그들의 선조들하고는 달랐습니다. 이들 역시 땅 위 온 세상 만물을 눈으로 보았지만, 선조들과 달리 이들은 마치 사랑하듯 보았고, 마음과 생각이 거기에 사로잡혔으며, 그걸 가지고 천국 신성한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들과 함께 감각적인 것이 원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선조들한테는 한낱 도구였을 뿐인 것들이 말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속한 것, 땅에 속한 것이 원리가 되면, 사람들은 하늘에 속한 걸 이걸 가지고 이성질(理性질, reason)을 하며, 그런 식으로 눈이 머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하는 것 역시 각자의 경험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서 정작 그 말의 의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 말에서 건지는 게 거의 없고, 더 나아가 보편적인 의미는 더 말할 것도 없으며, 때로는 그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을 단어 하나 가지고, 심지어 어떤 문법적 특이점을 가지고 판단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절 별 속뜻입니다. 지난주 14절에 이어 오늘은 15절부터입니다.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C.250-260)
250
모든 사람이 이 구절을 주님의 강림(降臨)에 관한 첫 번째 예언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워딩을 보면 분명 그렇게 보이며, 그래서 이 워딩과 예언서들로 인해 유대인들조차 어떤 메시아가 오시는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뱀’(serpent), ‘여자’(woman), ‘뱀의 후손’(serpent’s seed), ‘여자의 후손’(woman’s seed),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head of the serpent which was to be trodden upon),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heel which the serpent should bruise)라는 표현들이 특별히 뭘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들이 먼저 설명되어야만 하는데요, 여기 ‘뱀’(serpent)은 일반적으로는 모든 악을, 특별히는 자아 사랑(the love of self)을 의미합니다. ‘여자’(woman)는 교회를, ‘뱀의 후손’(serpent’s seed)은 모든 부정(不貞, infidelity)을, ‘여자의 후손’(woman’s seed)은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을, ‘그’(he)는 주님 자신을, ‘뱀의 머리’(head of the serpent)는 일반적으로는 악의 지배(the dominion of evil)를, 특별히는 자아 사랑의 지배를, ‘상하게 하다’(trample upon)는 암울함(depression), 곧 ‘배로 다니고 흙을 먹을지니라’(go upon the belly and eat dust)를, ‘발꿈치’(heel)는 자연적(natural as the corporeal)으로 가장 낮은 것, 곧 뱀이 ‘상하게’(bruise)할 것을 의미합니다.
251
‘뱀’(serpent)이 일반적으로는 모든 악을, 특별히는 자아 사랑을 의미하는 이유는, 모든 악은 마음의 감각 파트에서, 그리고 처음부터 ‘뱀’(serpent)으로 상징된 기억-지식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며, 그래서 여기 나오는 뱀은 모든 종류의 악, 특히 자아 사랑, 즉 이웃과 주님을 향한 증오를 가리킵니다. 이 악, 곧 증오는 다양, 수많은 속(屬, genera)과 더욱 수많은 종(種, species)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뱀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뱀’(snakes, 마23:33), ‘독사’(cockatrices, 렘8:17), ‘독사’(asps, 신32:33), ‘독사’(adders, 시140:3), ‘불뱀’(fiery serpents, 민21:6), ‘날으는 뱀’(serpents that fly, 사14:29), ‘기는 뱀’(that creep), ‘독사’(vipers, 마23:33)등인데요, 독, 곧 증오의 차이에 따른 것입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23:3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가운데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 (렘8:17)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맹독이라 (신32:33)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시140:3)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민21:6)
그래서 이사야에 보면은
블레셋 온 땅이여 너를 치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기뻐하지 말라 뱀의 뿌리에서는 독사가 나겠고 그의 열매는 날아다니는 불뱀이 되리라 (사14:29)
‘뱀의 뿌리’(serpent’s root)는 감각 및 기억-지식과 연결된 마음의 파트나 원리를, ‘독사’(cockatrice)는 거짓의 기원이 된 악을, ‘날아다니는 불뱀’(flying fire serpent)은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탐욕을 각각 가리킵니다. 같은 선지서 또 다른 데들을 보면, 유사한 표현들이 나오는데요,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사59:5)
여기 창세기에 나오는 뱀을 계시록에서는 ‘큰 붉은 용’(great and red dragon), ‘옛 뱀’(old serpent), ‘마귀, 사탄’(devil and satan), ‘온 천하를 꾀는 자’(deceives the whole world)(계12:3, 9; 20:2)라고 하는데요, 또 다른 구절들에서도 여기 나오는 ‘마귀’(devil)는 그 무슨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특별한 마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악한 영들의 무리 전체를, 그리고 악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계12:3)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계12:9)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계20:2)
위 ‘여기 나오는 ‘마귀’(devil)는 그 무슨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특별한 마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악한 영들의 무리 전체를, 그리고 악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부분에 대한 보충 설명이 아랫글에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5장, ‘천국과 지옥은 사람들로 구성된다’ 311번 글입니다.
기독교계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인류로 구성되어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 처음부터 천사는 천사로 창조되어 천국을 이루고 있었다고, 마귀 또는 사탄도 빛의 천사였다가 반역하여 그 일당과 함께 내쫓겨 지옥을 형성했다고들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계에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에 천사들은 무척 놀라고, 천국이야말로 교회 교리의 근본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천국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데 더욱 경악한다. 그러나 또한 그런 무지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주님의 뜻에 따라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많은 사실이 기독교 사회의 사람들에게 밝혀지게 되었고, 기독교가 종말을 맞아 어둠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 계시로 인해 그 어둠이 가능한 한 많이 걷히게 되었다고 천사들은 진심으로 기뻐한다.
[2] 그래서 천사들은 내가 그들의 다음 말을 증언해 주기를 원했다. “천국 전체에 처음부터 천사로 창조된 천사는 단 한 명도 없다. 지옥에도 빛의 천사로 창조되었다가 쫓겨난 악마는 없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전부 인류가 가서 이룬다. 천국은 세상에서 천국의 사랑과 신앙으로 산 사람들로, 지옥은 지옥적 사랑과 신조로 산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 마귀나 사탄은 지옥을 통칭하는 말이다. 마귀는 악마들이 모여 사는 뒤쪽 지옥을, 사탄은 악령들이 모여 사는 앞쪽 지옥을 말한다. 각 지옥의 속성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룰 것이다.
[3] 천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 사회가 천국과 지옥의 구성에 대해 잘못 믿는 것은, 해당 구절들을 오로지 글자 그대로 이해했을 뿐, 말씀에서 이끌어 낸 참된 교리로 깨우침이나 설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의 문자 상의 의미는 참된 교리로 설명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오도하고, 이것이 무지한 견해와 이설과 오류를 낳는 것이다.” (HH.311)
252
‘여자’(woman)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건 위 천국 결혼을 다룬 155번 글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이, 결과적으로는 교회가 본성(own)에 있어 주님과 하나 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천국 결혼의 본질(nature)인데요, 이때 천국과 교회, 주님도 각자 자기 본성 안에 있는 만큼 하나가 되는 그런 하나 됨입니다. 본성 없이는 하나 됨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자비로우신 주님이 이노센스(innocence)와 평화, 그리고 선을 이 본성 안으로 스며들게 하실 때, 이 본성은 자신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여전히 유지하면서도, 천적이며 가장 행복한 상태가 됩니다. (164번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천적 천사들의 본성의 어떠함과, 자아(self)로 말미암아 지옥 상태, 악마 상태가 된 본성의 어떠함은 도저히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차이는 천국과 지옥 같은 차이입니다.
253
교회를 일컬어 ‘여자’(woman), ‘아내’(wife), ‘신부’(bride), ‘처녀’(virgin), 그리고 ‘딸’(daughter)이라 하는 건 교회에게 있는 천국적 천사적 본성(a heavenly and angelic own) 때문입니다. 계시록에서는 교회를 가리켜 ‘여자’(woman)라 하는데요,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 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13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 (계12:1, 4-5, 13)
이 구절에서 ‘여자’(woman)는 교회를, ‘해’(sun)는 사랑을, ‘달’(moon)은 신앙을, ‘별들’(stars)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하는데, 이 모두가 악한 영들이 아주 극도로 증오하며 박해하는 것들입니다. 이사야에서도 교회를 일컬어 ‘여자’(woman)라고도 하고, ‘아내’(wife)라고도 합니다.
5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6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어릴 때에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을 받은 자에게 함과 같이 하실 것임이라 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사54:5, 6)
‘지으신 이’(maker)를 또한 ‘남편’(husband)이라고도 하는데요, 그 이유는 그 본성과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버림받은 여자’(woman forsaken), ‘어린 아내’(wife of youth)는 특별히 고대교회와 태고교회를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말라기에서도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말2:14)
계시록에서도 이 여자를 ‘아내’(wife)라고도 하고 ‘신부’(bride)라고도 합니다.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9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계21:2, 9)
여러 선지서에 걸쳐 교회를 ‘처녀’(virgin)와 ‘딸’(daughter)로 부르고 있습니다.
254
‘네 후손’(seed of the serpent)이 모든 부정(不貞, infidelity, 특히 배우자에 대한)을 의미한다는 것은 ‘뱀’(serpent)의 상징으로부터 분명합니다. 뱀은 모든 악이기 때문입니다. ‘후손’(seed, 씨앗)은 생산, 즉 출산과 관련되는데, 여기서는 교회에 대한 걸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네 후손’은 교회에 대한 부정, 곧 불신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에서는 왜곡된 상태의 유대교회를 가리켜 ‘행악의 종자’(seed of evil doers),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seed of adultery), ‘거짓의 후손’(seed of falsehood)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사1:4)
3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아 너희는 가까이 오라 4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거짓의 후손이 아니냐 5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틈에서 자녀를 도살하는도다 (사57:3-5)
그리고 다시 거기 루시퍼(Lucifer, 계명성, 12절에 나오는)라 하는 ‘뱀’(serpent) 또는 ‘용’(dragon)에 대해 말하면서
19오직 너는 자기 무덤에서 내쫓겼으니 가증한 나뭇가지 같고 칼에 찔려 돌 구덩이에 떨어진 주검들에 둘러싸였으니 밟힌 시체와 같도다 20네가 네 땅을 망하게 하였고 네 백성을 죽였으므로 그들과 함께 안장되지 못하나니 악을 행하는 자들의 후손은 영원히 이름이 불려지지 아니하리로다 할지니라 (사14:19, 20)
255
‘여자의 후손’(seed of the woman)이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을 의미한다는 건, ‘여자’(woman)는 교회를 의미하며, 교회의 ‘후손’(seed)은 신앙 말고는 없다는 점에서 분명합니다. 교회를 교회라 하는 건, 교회에는 주님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에 보면, 신앙을 ‘경건한 자손’(seed of God)이라 하고 있습니다.
14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15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말2:14, 15)
이 구절에서 ‘어려서 맞이한 아내’(wife of youth)는 고대와 태고의 교회들인데, 그 ‘후손’(seed), 즉 그 교회들의 신앙에 대하여 선지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에도 역시 교회와 관련하여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사44:3)
계시록에서는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계12:17)
그리고 시편에서는
3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4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29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36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시89:3-4, 29, 36)
여기서 ‘다윗’(David)은 주님을, ‘왕위’(throne)는 주님의 나라를, ‘해’(sun)는 사랑을, ‘자손’(seed)은 신앙을 의미합니다.
256
신앙뿐 아니라 주님 자신도 ‘여자의 후손’(seed of the woman)이라 하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 곧 첫째, 주님은 홀로 신앙을 주는 분이시며, 그래서 주님이 곧 신앙이시기 때문이고, 둘째, 주님은 사람으로 태어나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인데, 여기서 정말 기가 막힌 것은, 이 교회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결과, 아주 끔찍한, 지옥과도 같은 본성으로 거의 굴러떨어진 그런 교회였음에도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주님의 신적 천적 본성과 주님의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주님의 신적 권능으로 결합, 자기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이런 하나 됨이 실현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피조 세계는 완전히 소멸될 뻔하였습니다.
천국의 결혼, 즉 천국과 교회, 주님의 본성 간 하나 됨을 다룬 위 252번 글을 참조하세요.
이런 사유로, 주님은 여자의 후손이시고, 그래서 ‘그것’(it)이 아닌, ‘그’(he)라 하신 것입니다.
257
‘뱀의 머리’(head of the serpent)가 일반적으로는 악의 지배(the dominion of evil)를, 구체적으로는 자아 사랑의 지배를 의미한다는 건 그 본성(nature)에서 나오는데요, 이 본성은 너무나 지독스러워서 단지 지배를 추구하는 정도가 아닌, 실제로 땅 위 모든 것에 대한 지배와, 그 정도로는 양이 안 차 계속해서 이번에는 천국의 모든 것을, 더 나아가 급기야 바로 주님까지도! 그러고도 여전히 만족을 모르는, 그런 아주 끔찍한 본성입니다. 자아 사랑의 스파크가 일어나는 곳마다 거기엔 이런 게 잠재해 있습니다. 사람의 사후(死後), 규제가 풀려 하고픈 대로 마음껏 할 수 있게 되면, 이런 본성이 즉시 우리 안에서 거침없이 터져 나와 점점 자라 높은 데를 지향하게 될 것이라는 걸 우리는 지각하게 될 겁니다.
‘규제가 풀려’(freed from restraint)는 아직 몸 안에 사는 이 세상 삶에서는 남의 이목과 사회적 도덕, 윤리, 체면 등이 있어 마음대로 못 하지만, 사후 이 몸을 벗고 영이 되면 그때는 사정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건, 이 ‘뱀’(serpent), 곧 자아 사랑이라는 이 악이 남 지배하기를 정말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그리고 이런 거에 휘둘리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뱀의 머리’(head of the serpent), 곧 자신을 높이며, 그래서 주께서 ‘상하게’(tramples down) 하시는 것, 심지어 땅으로까지 짓밟히게 하시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앞 절에서 기술한, ‘배로 다니며 흙을 먹을지니라’(go upon its belly, and eat dust)인 것입니다. 이사야에서는 이를 ‘루시퍼’(Lucifer)라고 하는, ‘뱀’(serpent)이나 ‘용’(dragon)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2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15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사14:12-15)
계시록에서도 ‘뱀’(serpent)이나 ‘용’(dragon)이 자기 머리를 어떤 식으로 높이는지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9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계12:3, 9)
시편에서는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6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7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시110:1-2,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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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게 할 것이요’(trampling on)나 ‘상하게 할 것이니라’(bruising)가 디프레션(depression, 암담함)을 의미하며, 그래서 ‘배로 다니며 흙을 먹을지니라’(go on the belly and eat the dust) 상태가 되게 하려는 게 지금 분명한 것은 본 절과 선행절들을 보면 됩니다. 이사야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4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5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6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사26:4-6)
2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같이, 파괴하는 광풍같이, 큰물이 넘침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3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사28:2, 3)
259
‘발꿈치’(heel)의 의미가 자연적, 혹은 육적(肉的)으로 가장 낮은 거(the lowest natural orcorporeal)라는 사실은, 먼저 태곳적 사람들이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을 이루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던 방식을 알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데요, 그들은 사람의 천적, 영적인 것들은 머리와 얼굴로, 거기서 나오는 체어리티(charity)와 자비는 가슴으로, 자연적인 것은 발, 더 자연적인 것은 발바닥, 가장 자연적, 육적인 것들을 발꿈치로 나타냈는데, 그들은 그저 그렇게 나타내기만 한 게 아니라 실제 일상에서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사유(思惟, reason, 理性)의 가장 낮은 단계의 것들, 곧 기억-지식의 경우 또한 그런데, 야곱이 단과 관련하여 예언한 데를 보면 그렇습니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창49:17)
시편에서도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시49:5)
같은 식으로 야곱 관련해서도, 그가 자궁으로부터 나올 때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창25:26)
‘야곱’(Jacob)이라는 이름은 ‘발꿈치’(heel)에서 나오는데요, ‘야곱’(Jacob)으로 상징되는 유대교회가 발꿈치에 상해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뱀은 그것이 독사의 일종이 아닌 한, 자연적인 것들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것밖에는 상해를 입힐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보다 높은 차원인, 사람 내면의 자연적인 것은 물론, 더욱 그의 영적인 것과 더더욱 천적인 것은 절대 상해를 입힐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주님은 본인도 모르게 그의 안에 보존, 보관하십니다. 그렇게 주님이 보관하신 걸 가리켜 말씀에서는 ‘남은 자’(remains, 리메인스)라 하고 있습니다. 뱀이 사람 안 자연적인 것들 가운데 가장 낮은 걸 파괴해 온 방식, 곧, 홍수 전 사람들한테서는 감각의 원리와 자아 사랑(the sensuous principle and the love of self)을 가지고, 그리고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감각적인 것들, 전통들, 하찮은 것들 및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sensuous things, traditions, trifles, and by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을 가지고, 오늘날에는 감각과 기억-지식 및 철학에 속한 것들,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랑(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and the same loves)으로 역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같은 짓을 반복하는, 뱀이 일하는 이 방식에 대하여 이제부터 쭈욱 들으시게 되는데, 이는 주님의 허락, 곧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260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으로부터 분명한 것은 주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러 세상에 오심이 그 시대 교회에게 계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쉬는 시간)
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C.261-260)
261
지금 ‘여자’(woman)는 프로프리움(proprium, 固有本性, 자아, own, self-dependence)의 관점에서 본 교회를 말하는데, 특히 이 교회는 이것을 사랑했습니다.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greatly multiplying her sorrow)는 전투를, 그리고 그로 인한 염려를, ‘임신’(conception)은 모든 생각을,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sons whom she would bring forth in sorrow)는 그녀가 그렇게, 곧 이런 상태에서 낳게 될 진리들을, ‘남편’(man)은 앞서 살핀 대로, 여기서도 교회가 복종하게 될, 그리고 교회를 다스리게 될 래셔널(the rational, 합리적, 이성적 능력)을 말합니다.
262
앞서 지금까지 보여드린 교회가 ‘여자’(woman)로 상징되었다면, 여기 나오는 교회는 본성(own)으로 왜곡된 교회입니다. 이 본성은 ‘여자’(woman)로 상징된, 전에는(창2:23) 그 자체였던 본성입니다. 그 이유는, 지금 다루고 있는 내용이 태고교회의 후손들, 왜곡되어 망가진 후손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전에는 그 자체였던 본성’(the own which was itself formerly), 즉 처음, 곧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창2:23) 하던 천적 인간 시절에는 순수하게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던 ‘여자’(교회)가 지금은 ‘망가진 교회’(church which had become perverted)를 가리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때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막 지음받은 따끈따끈한 본성으로 남자의 원래 본성과 너무나 닮아 마치 처음부터 남자의 본성이었던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주님이 남자의 본성으로 선물하신 이 새 본성 덕에 그나마 태고교회의 급속한 타락의 속도를 좀 늦출 수 있었습니다.
263
그래서 감각 파트가 자신으로부터 눈을 돌리거나 자신을 저주하면, 그러니까 겉 사람으로부터 물러나 속 사람을 섬기려고 하면, 그 결과 악한 영들은 강력하게 싸움을 시작하는 반면, 수행 천사들은 무척 애를 먹는데, 그래서 그때 이 전투, 곧 진리를 생각하고 생산하는 것에 관한 묘사를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in relation to the conception and birth of sons)라 한 것입니다.
사람 마음의 감각 파트가 뱀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예를 들어, 금욕적 삶, 참된 영성에 기초한 금욕적 삶을 살고자 하면, 그래서 속 사람을 위해 살고자 하면, 자기들 말 잘 들을 땐 가만히 있던 악한 영들이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괴롭힌다는 말입니다.
이 본문은 실제로 아들, 딸, 자식 낳는 본문이 아니라 선악과를 범한 후부터는, 인간이 진리 편에 서서 살아가기가 실제 영적 전투를 치러야만 가능하게 된,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 되었다는 그런 본문입니다.
264
‘임신과 출산’(conception and birth of sons)은 말씀에서 영적인 뜻으로 사용되는데, 곧 ‘임신’(conception)은 마음의 생각과 계획을, ‘자식’(sons)은 진리를 말한다는 건 호세아를 보면 분명합니다.
11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12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 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호9:11, 12)
여기 ‘에브라임’(Ephraim)은 지성, 즉 진리를 이해함을, 그리고 ‘자식’(sons)은 진리 자체를 말합니다. 에브라임에 관한 데는 어디든 다 마찬가지라고들 하는데, 이 에브라임은 지성적이지만 어리석게 되지요.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호13:13)
이사야에서는
4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 5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 (사23:4, 5)
여기 ‘시돈’(Zidon)은 신앙에 관한 지식이 있었으나 기억-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파괴하여 지금은 척박해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2] 다시 같은 선지서에서 거듭남을 다루면서, 여기서도 신앙의 진리들을 똑같이 ‘아이’(sons)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7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8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사66:7-9)
천국 결혼을 통해 잉태되고 태어나는 선들과 진리들을 가리켜, 그래서 ‘아들들’(sons)이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 하신 말씀입니다.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마13:37, 38)
구원하는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the goods and truths of a saving faith)을 가리켜 주님은 ‘아브라함의 자손’(sons of Abraham)(요8:39)이라 하십니다. ‘후손’(seed)은 (255번 글에 서술한 대로) 신앙을 가리키는데, 그런 까닭에, ‘후손’(seed)에 속한 ‘자손’(sons)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입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요8:39)
이런 이유로, 자신을 ‘후손’(seed) 되게 하신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인자’(人子, Son of man), 즉 교회의 신앙(the faith of the church)이라 하셨습니다.
265
‘남편’(man [vir])이 래셔널(the rational, 합리적 능력)을 말한다는 게 본 장 6절에 나오는데요, 거기 보면, 여자는 자기와 함께 있는 자기의 남자(her man)에게 주었고, 그는 먹었는데, 이는 그도 동의했다는 의미입니다. 같은 내용이 158번 글에 나오는 남자(the man)에 대한 말로도 분명한데요, 거기서 그는 지혜와 지성의 사람(one who is wise and intelligent)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남자’(man)는 그와는 달리 래셔널(the rational)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지식의 나무, 곧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지성이 파괴된 결과,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래셔널이라는 건 지성의 모방, 말하자면 겉모습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266
모든 법과 수칙(守則, precept)은 참된 출발점인 천적, 영적인 것에서 나오므로,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이 결혼의 법칙 또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 법칙은, 아내, 그러니까 하고픈 걸 하는, 그리고 이 하고픈 건 아내 자신의 본성에 속한 것인데, 이성을 좇아서 하는 게 아닌, 이런 아내는 반드시 남편의 신중함을 따라야 한다는 법칙입니다.
실제로는 역할이 뒤바뀐 사례들, 그러니까 오히려 아내가 신중하고, 남편이 자기 본성대로 하는 그런 케이스들도 많겠지만, 그럼에도 이 큰 줄기, 곧 주님 정하신 이 질서 안에서 주님께 지혜를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또한 이는 한 사람 안에서 본성과 이성 간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 늘 어떤 결정에 앞서 본성보다는 이성에 귀 기울일 것과, 그리고 그 이성 또한 늘 주님을 향해 해바라기처럼 있어야 한다는 점,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17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C.267-271)
267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man hearkening to the voice of his wife)라는 표현은 아담(the man)이라는 남자, 즉 래셔널(rational, 합리적 능력)의 동의를 말합니다. 이 부주의한 동의로 그는 그 자신도 외면받는 저주를 받아 결과적으로는 총체적 겉 사람(the whole external man), 즉 완전한 겉 사람이 되는데, 이것이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의 의미입니다.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eat thereof in sorrow)는 표현은 그의 삶의 앞날의 상태는 비참할 것이며, 이것은 심지어 그 교회의 종말에 이르도록 그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네 평생에’(all the days of his life)의 의미입니다.
‘그 자신도 외면받는 저주’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너무 끔찍하여 얼굴을 돌리는 걸 말합니다. 그만큼 주님 대신 자기 본성을 사랑하는 사람의 말로(末路)는 지옥문이 펼쳐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268
‘땅’(ground)이 겉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은 ‘땅’(earth, 창1:1, AC.16), ‘지면’(ground, 창2:5, AC.90), ‘들’(field, 창2:5, AC.90) 관련, 앞서 서술한 내용들을 보시면 분명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그를 가리켜 더 이상 ‘땅’(earth)이라 하지 않고, 대신 ‘지면’(ground)이라고 합니다. 천적 씨(celestial seed)가 그의 안에 심겼기 때문이지요. 그는 또한 말씀 여러 곳에서 ‘대지’(ground)에 비교되며, 그를 가리켜 ‘지면’(ground)이라고 합니다. 선과 진리의 씨앗들은 겉 사람, 즉 그의 어펙션(affection, 애정)과 기억에 심깁니다. 속 사람이 아니고 말입니다. 속 사람 안에는 그의 본성 관련, 아무것도 없기 때문인데, 사람의 본성과 관련된 것들은 오직 겉 사람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는 속 사람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즉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바로 겉(external), 즉 육(肉, corporeal)의 상태입니다만, 그러나 주님에 의해 이들은 속 사람 안에 차곡차곡 쌓여갑니다. 본인도 모르게 말인데요, 겉 사람이 마치 죽을 것 같은 때가 아니면 이들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며, 보통 시험, 불행, 병, 그리고 임종 상황이 아니면 이들 속 사람 안에 저장, 보관되어 온 선과 진리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래셔널도 겉 사람에게 속하며(AC.118), 실상은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 일종의 중간 역할을 합니다. 속 사람은 이 래셔널을 통해 육적 겉(the corporeal external)과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래셔널이 동의(同意, consents)하면, 겉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가 되고, 그러면 속 사람의 존재를 더 이상 알 수도, 속(the internal)에 속한 지성과 지혜도 역시 알 수 없게 됩니다.
269
여호와 하나님, 곧 주님이 ‘땅을 저주하신’(curse the ground), 즉 겉 사람을 저주하신 게 아니라,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외면, 속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그 결과 저주를 자초한 것인데요, 이것은 앞서 본 글(AC.245)을 보면 분명합니다.
270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eat of the ground in great sorrow)라는 표현의 의미가 삶의 비참한 상태라는 건 앞뒤 내용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먹는 것’(eat)의 속뜻이 사는 것(to live)임을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말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분명한데요, 악한 영들이 싸움을 시작, 수행 천사들(the attendant angels)이 애를 쓰기 시작할 때 이런 삶의 상태가 뒤따른다는 걸 보면 말입니다. 이런 삶은 그 주도권이 악한 영들에게 있어서 더욱 비참한 상태가 되는데요, 이때는 겉 사람을 다스리는 게 그들인 반면, 천사들은 그저 단지 속 사람만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수행 천사들이 애를 먹는 이유는 속 사람 안에 남아 있는 리메인스가 거의 없어 그 사람을 악한 영들로부터 지키는 데 필요한 영적 무기를 거의 취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비참과 염려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그런 비참과 염려에 좀처럼 예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인데, 비록 그들은 자신을 다른 누구보다도 더 사람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말이지요. 그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 그리고 영원한 삶에 관해 더 이상 짐승들보다 더 아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짐승들처럼 땅의 것들을 향해 아래를, 그리고 세속적인 것들을 향해 밖으로 눈을 돌리기 때문인데,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본성(own)에만 호의적이며, 자신들의 성향과 감각에 올인, 미친 듯이 자기들 하고픈 대로만 합니다. 래셔널의 완전한 동의하에 말이죠.
래셔널(the rational)은 의지와 지식 사이에 있어 둘을 중재하는 합리적 능력을 말합니다. 마지막 경고등이라 할 수 있는 이 래셔널조차 이들한테는 이미 망가진 상태라 더 이상 정상적으로 기능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이미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영적 전투나 시험을 전혀 견딜 수 없습니다. 이들이 만일 이것에 노출되면, 이들의 삶은 그 무게로 가라앉게 되며, 그 결과 점점 더 자신들을 저주, 치닫게 하고, 계속해서 더 깊이깊이 지옥의 저주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들은 다른 삶, 곧 지옥이지요, 거기서는 무슨 시험이나 불행으로 죽을 수 있는 위험 같은 건 전혀 없지만, 대신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그런 곳인데, 그런 삶의 입구에 이를 때까지 이들은 잠시 유예되어 이런 삶을 계속 살게 되며, 이런 상태를 본문에서는, ‘땅은 저주를 받고 너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건 아니지만, 그 내면 상태가 사실상의 지옥이어서 사실은 살아도 산 게 아닌, 그런 끔찍한 상태라는 말입니다.
271
‘네 평생에’(all the days of thy life)의 의미가 그 교회 시대의 종말이라는 것은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어느 한 개인이 아닌, 그 교회와 그 상태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로 분명합니다. 그 교회 시대의 종말은 홍수였습니다.
18절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C.272-274)
272
‘가시덤불과 엉겅퀴’(thorn and the thistle)는 저주와 황폐함(vastation)을,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은 그가 들짐승처럼 살게 될 것을 말합니다. 속 사람이 겉 사람에게 아주 일반적으로밖에는 뭘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겉 사람과 분리된 상태에 있게 되면, 사람은 그때는 들짐승처럼 삽니다.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받는 걸로는 사람이지만, 속 사람과 분리되어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만으로는 들짐승이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은 그 자체로는 들짐승과 다를 바 없어 본성, 욕구, 식욕, 공상 및 감각 면에서 비슷하며, 유기적 형태로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그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보기엔 완전히 자신한테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영적 실체(the spiritual substance)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는 이걸로 주님으로 말미암는 생명의 인플럭스(入流, the influx of life from the Lord)를 받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이 저런 인간, 곧 저런 들짐승 같은 겉 사람 안에서는 반대로 뒤집혀 악한 생명, 곧 죽음이 됩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죽은 자라 하는 것입니다.
273
‘가시덤불과 엉겅퀴’(thorn and the thistle)가 저주와 황폐함을 말한다는 건, 추수와 과실나무가 정 반대되는 것들, 곧 축복과 번성을 가리키는 걸 보면 분명합니다. ‘가시덤불’(thorn), ‘엉겅퀴’(thistle), ‘찔레’(brier), ‘가시덩굴’(bramble) 및 ‘찔레’(nettle)가 저런 저주, 황폐함을 상징한다는 건 말씀을 보면 분명한데요, 호세아입니다.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호9:6)
여기 ‘애굽’(Egypt)과 ‘놉’(Memphis)은 신성한 것들에 대한 이해를 자신들과 자신들이 소유한 기억-지식을 가지고 하려는 걸 가리킵니다. 같은 선지서에서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때에 그들이 산 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 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호10:8)
여기 ‘아웬의 산당’(lofty places of Aven)은 자아 사랑을,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thorn and thistle on the altars)는 신성모독(profanation)을 말합니다. 이사야에서
12그들은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13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사32:12, 13)
그리고 에스겔에서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겔28:24)
274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eat the herb of the field)의 의미가 거친 음식, 즉 들짐승처럼 사는 것임은 다니엘서의 느부갓네살에 관한 부분을 보면 분명합니다.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단4:25)
그리고 이사야에서
26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 27그러므로 그 주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사37:26, 27)
여기 ‘들의 풀’(grass of the field), ‘푸른 나물’(green of the herb), ‘지붕의 풀’(grass on the housetops), 그리고 ‘곡초’(field parched)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룬 주제가 홍수 전 시대, 곧 ‘태초’(long ago)와 ‘상고’(days of old)가 의미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19절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AC.275-279)
275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는 천적(天的, celestial)인 걸 싫어하게 되었음을,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return to the ground from whence he was taken)는 거듭남 이전 상태였던 겉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는 그가 정죄를 받고, 지옥과 같은 상태가 됨을 말합니다.
276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의 의미가 천적인 걸 싫어한다는 것임은 ‘먹을 것’(bread)의 의미를 보면 분명합니다. ‘먹을 것’(bread)은 영적이고 천적인 모든 걸 의미하는데, 이는 천사들의 양식으로, 만일 이것이 없으면 천사들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도 양식이 떨어지면 그런 것과 완전히 똑같이 말입니다. 천국에 있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 역시 지상에 있는 양식과 상응하는데요, 이런 사실로 더욱 많은 것이 표상됩니다. 말씀 여러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떡’(bread)이심을, 이는 자신으로부터 모든 천적이고 영적인 것이 나오기 때문인데요, 이 사실을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친히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6:58)
그래서 또한 빵과 포도주가 성찬(聖餐, the holy supper) 심볼들이 된 것이고, 만나 역시 이 천적인 것을 표상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의 양식은 천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다음 주님 말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4:4)
즉, 천적이고 영적인 모든 것이 나오는 주님의 생명으로부터라는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2] 홍수 직전까지 존재했던, 지금 여기 다루고 있는 이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은, 신앙의 진리라는 게 무엇이며, 주님이라는 분은 뉘신지, 그리고 그분이 오셔서 자신들을 구원하신다는 말 같은 거 듣기를 더 이상 내켜 하지 않을 정도로, 감각적인 일과 몸에 관한 일에 너무도 철저히 잃어버린 상태, 잠긴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주제들이 언급될 때마다, 그들은 듣기 싫어 외면했습니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는 바로 이런 혐오를 말합니다. 그래서 또한 유대인들은 천적인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대신 오직 세속적 메시아만을 원하는 그런 캐릭터들이 되어버렸고, 그 결과 그들은 만나를 보고 혐오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나는 주님의 표상이었는데, 그들은 이것을 ‘하찮은 음식’(vile bread)이라 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한테 불뱀(fiery serpents)을 불러들이는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민21:5, 6)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민21:5, 6)
더욱 놀라운 사실은, 천적인 것들을 가리켜 그들이 울면서, ‘역경의 빵’(bread of adversity), ‘비참의 빵’(bread of misery), ‘눈물의 빵’(bread of tears)이라고 했을 때, 실제로 천적인 것들은 역경과 비참이라는 상태로 그들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의 구절에서 혐오하면서 받은 것을 가리켜,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bread of the sweat of the face)이라 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주치의로서 오랫동안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었던 김승학 장로가 사우디아라비아의 감시에도 목숨을 걸고 탐사한, 시내 산을 비롯, 모세의 출애굽기 모든 기록이 담긴 책, ‘떨기나무’ 1, 2를 보면, 사막 한 가운데 이름 모를 히브리 무덤 수천수만 기가 가로세로 질서정연하게 있다고 합니다. 그는 위 민수기 21장 사건을 비롯, 금송아지 사건, 메추리 고기 탐욕 사건 등을 떠올리며, 혹시 이 무덤들이 바로 저렇게 죽어간, 이스라엘 광야 1세대들의 무덤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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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속뜻입니다. 글자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이 구절을 사람은 자기가 먹을 걸 땅을 일궈 힘들게, 즉 얼굴에 땀을 흘려 힘들게 구해야만 하는 걸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사람’(Man)은 어떤 한 사람이 아닌,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를 말합니다. ‘땅’(ground)도 땅을, ‘빵’(bread)도 빵을, ‘동산’(garden)도 동산을 말하는 게 아니라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충분히 보여드린 대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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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취함을 입은 흙으로 돌아감’(returning to the ground whence he was taken)의 속뜻이 ‘교회가 거듭나기 전 상태였던 겉 사람(the external man)으로 돌아가다’라는 게 분명한 것은, ‘흙’(ground)의 속뜻이 전에 말씀드린 대로 ‘겉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흙’(dust)의 속뜻이 ‘정죄를 받아 지옥과 같은 상태가 되다’라는 것 또한 앞서 뱀에 관해 드린 말씀으로 분명한데요, 이 뱀은 저주를 받아 ‘흙을 먹을지니라’(eat dust)라는 말씀을 듣게 되지요. ‘흙’(dust)의 속뜻에 대해 거기서 보여드릴 수 있었던 것 외에도 시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도 있는데,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시22: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시104:29)
이 말씀의 의미, 속뜻은 사람들이 주님의 얼굴을 외면할 때 그들은 끝나고, 즉 죽고, 그래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return to the dust), 그러니까 정죄를 받아 지옥과 같은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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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시리즈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모든 구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감각 파트가 자신을 천적인 것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했다는 것 (14절):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4절)
주님이 그들과 재결합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실 거라는 것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5절)
겉 사람이 스스로 돌아선 결과, 전투가 일어났다는 것 (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6절)
그래서 결국 비참해졌다는 것 (17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7절)
정죄 (18절):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8절)
그리고 결국은 지옥 (19절):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19절)
이런 일들이 그 교회 안에서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 말입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3장 두 번째 단락인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 일어난 일’(창3:14-19)을 지난주 14절에 이어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이며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창세기 3장 세 번째 단락인 ‘태고교회와 태고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창3:20-24)을 두 주에 걸쳐 살펴보겠습니다.
원고 맨 앞으로 돌아가 본문과 개요를 한 번 더 읽고 마치겠습니다.
설교
2025-11-0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