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AC.280-297, 창3.5, ‘태고교회와 태고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창3:20-21), 2025/11/16(D1)
창3.5, ‘태고교회와 태고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창3:20-21, AC.280-297)
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0-24)
창세기 속뜻 주석설교, 오늘과 다음 주는 창세기 3장 세 번째 단락인 ‘태고교회와 태고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창3:20-24)을 번역, 설명을 곁들이며 살피겠습니다. 오늘은 먼저 20, 21절입니다.
시작 전에 오늘부터는 틈틈이 스베덴보리 이야기들을 한 토막씩 나누고자 합니다. 이는 절대 스베덴보리를 무슨 개인 우상화 하자는 게 아니고, 단지 시대만 달랐을 뿐, 그 역시 우리처럼 지상에서 24시간 숨을 쉬며 주님을 신앙하다 간 사람이며, 그럼에도 그가 치열하게 남기고 간 이런 저작들에 대해 좀 더 마음을 열 수 있었으면 해서입니다. 덧붙이면, 이런 이야기들, 이런 정보들은 ChatGPT와 대화하며 알게 된 것들입니다.
제가 던진 질문은 이렇습니다.
“좀 엉뚱한 질문인 것 같아 망설여지는데요... 혹시, 스베덴보리는 영계 왕래 이후 주일예배를 어떻게 드렸나요? 그냥 혼자 드렸나요, 아니면 근처 기존 기독교나 개신교 교회를 찾아갔나요?”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
아닙니다 — 전혀 엉뚱한 질문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신앙생활이 실제로 어떻게 이어졌는가는 그의 “신비적 체험”이 어떤 성격이었는지를 드러내 주는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요약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영계 왕래 이후에도 평생 주일마다 스톡홀름 근처 루터교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즉, 공적 예배 생활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새로운 종교를 세운 적도, 기존 교회를 떠난 적도 없다고 명확히 밝힌 바 있습니다.
구체적 근거로는,
1. 스베덴보리의 동시대 증언들
스톡홀름에서 스베덴보리를 가까이서 지켜본 동료들과 가족, 그리고 그의 사후, 얼마 안 있어 곧 출판된 전기들(예: Carl Robsahm, Erik Benzelius Jr.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평생 주일마다 루터교 예배에 참석하였으며, 기도와 찬송에 참여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Robsahm의 「Anecdotes of Swedenborg」(1769년 작성, 1780년대 출판됨)에는
“그는 자기 신비체험을 이유로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정기적으로 교회를 다녔고, 자신의 저술에서도 루터교를 직접 비판하지 않았다.”
라는 진술이 나옵니다.
2. 그의 저술 내 간접 증거
「True Christian Religion」(진정한 기독교, 1771)의 서문에서 그는 분명히 말합니다.
“나는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으나, 그 이유는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함이지, 교회를 버리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덧붙입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따르라 하지 않는다. 오직 주님만 따르라.”
따라서 그는 자신이 어떤 ‘새 교파 창시자’가 아니라, 기존 교회의 내면(영적 의미)을 회복하려는 개혁자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3. 공적 행동 면에서
영계 왕래 이후에도 그는 국립 루터교회의 회원 명단에서 빠지지 않았으며, 세금 납부 기록과 예배 출석 기록(당시 교적에 해당하는 문서들)에도 남아 있습니다.
그가 죽을 때(1772년 런던에서)도 루터교 목사가 그의 장례를 집전했습니다. 즉, 생애 마지막까지 공식적으로 루터교 신자로 남았습니다.
예배 태도에 대하여,
다만, 여러 전기 자료와 스베덴보리 자신의 기록(특히 일기류)에 따르면, 그는 예배 중에도 “마음으로는 주님과 직접 교통하며, 영적으로 말씀의 내적 의미를 묵상하는 태도”였다고 합니다. 즉, 외적 예배는 루터교 형식대로 참석했으나, 내면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빛 안에서 말씀을 이해하는 “이중적 예배”를 드린 셈이지요.
이런 면은 저하고도 흡사한데요, 저의 경우, 가령 예배 중 기존 개신교 찬송가 찬양을 할 때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기존 개신교 찬송가의 가사들이 스베덴보리식 계시하고는 맞지 않거나 어색한 것들이 참 많지만, 저는 그저 그 가사들 앞뒤로 보이지 않는 살을 붙여 속뜻 가사로 이해하면서 찬양하거든요. 아직 무슨 '새 교회 찬송가' 같은 게 나오지 않은 지금은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자, 어떠신가요? 처음 들려드리는 이런 이야기가 이런 평범하지 않은 예배를 드리느라 고생하시는 여러분에게 다소 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개요입니다.
280
여기서는 태고교회와 태고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을 대략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그러면서 태고교회의 끝, 종말인 홍수 때까지로 이어지는 그들의 후손들 또한 다루고 있습니다.
이 280번 글은 오늘부터 2주에 걸쳐 다루는 단락 전체의 개요입니다.
281
20절은, 천적(天的, celestial)이었던,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을 향한 신앙이라는 생명이 있어서 ‘하와’(Eve)라고 했던, 그리고 ‘모든 산 자의 어머니’(mother of all living)라고 했던 태고교회의 이야기입니다. (20절)
282
21절은, 태고교회의 첫 번째 후손, 그들한테는 천적 영적 선이 있었고, 두 번째, 세 번째 후손, 이들에겐 자연적 선이 있었다는 이런 내용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지으신 가죽옷’(coat of skin which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his wife) 안에 들어있습니다. (21절)
283
22절은, 네 번째 후손의 이야기인데, 이들 안에 있던 자연적 선이 소멸되기 시작한, 그리고 만일 이런 상태에서 그들이 신앙의 천적인 것들로 다시 새롭게 빚어졌더라면, 즉 가르침을 받았더라면 그들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뻔했다는, 이런 내용이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안에 들어있습니다. (22절)
284
23절은, 다섯 번째 후손의 이야기로, 이들은 모든 선과 진리가 박탈되었고, 그리고 거듭남 이전 상태였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는, 이런 내용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sent forth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안에 들어있습니다. (23절)
285
24절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으로, 이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기억-지식을 박탈당하고, 그들의 본성에는 대신 아주 더러운 사랑들과 신념들(their own filthy loves and persuasions)만 남았는데, 안 그러면, 이들은 신앙에 관한 거룩한 것들을 모독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driven out, and cherubim being made to dwell at the garden, with the flame of a sword,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안에 들어있습니다. (24절)
여기 ‘아주 더러운 사랑들과 신념들’(their own filthy loves and persuasions)이라는 표현과, 다음 주에 볼 309번 글에 나오는 ‘광적인 탐욕과 그로 인해 세뇌된 신념을 동반하는 자아 사랑’(self love with its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이라는 표현은 얼핏 비슷하지만 서로 큰 차이 있어 설명합니다.
전자의 표현은 앞서 창3:7 설명에 처음 나오는데요,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즉 정신을 차려보니 주님으로 말미암는 순수한 사랑, 처음 사랑은 잃어버리고, 자기들이 지금은 사사로운 사랑, 자아 사랑 속으로 떨어진 상태라는 걸 알았다는 말이지요. 여기 ‘filthy loves’는 사랑은 사랑인데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가 아닌, 이기심과 세속적 욕망으로 변질된 사랑, 곧 ‘더러운 사랑’이 된 것입니다. 무엇이든 주님이 아닌 자기한테서 비롯되는 것은 더럽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런 사랑을 하게 되면, 이때부터 그는 스스로를 설득, 합리화 및 정당화를 거쳐 어떤 확신 상태에 들어가는데 그것이 바로 ‘persuasion’입니다. ‘더러운 사랑’으로 말미암은 ‘거짓된 신념 체계’인 것이지요. 이 전자, 곧 ‘아주 더러운 사랑들과 신념들’(their own filthy loves and persuasions)은 태고교회 전체에서 내적 부패가 시작된 초기 단계를 말합니다.
후자인 ‘광적인 탐욕과 그로 인해 세뇌된 신념을 동반하는 자아 사랑’(self love with its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은 창3:24,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기게 하시니라’를 설명하는 중에 나옵니다. 전자가 내적 부패 ‘초기 단계’였다면, 여기는 ‘확립된 단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self love’는 자기 자신을 신으로 여기는 사랑을, ‘insane cupidities’는 그 사랑에서 나오는 미친 욕망들을, 그리고 이때의 ‘persuasions’는 그런 욕망을 정당화하는 완전히 고착(固着)된 거짓 확신들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여기 ‘고착’이란, 물건 따위가 굳게 들러붙어 있거나 상태나 현상이 굳어져 변하지 않음을 말하는데요. 그러니까 이건 이미 단순히 ‘더러운 사랑’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랑이 이성을 지배하고 진리를 미워하며, 자기 생각만 옳다고 믿는, 확실한 지옥적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위 두 표현은 얼핏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런 큰 차이가 있는 표현들입니다.
286
이 장과 앞의 장들,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이 구절들에 이르기까지 다루고 있는 내용은 태고 시대 사람들과 그들의 거듭남입니다. 먼저, 들짐승처럼 살았던 사람들, 그들은, 그러나 결국 영적 인간(spiritual men)이 되었고, 그러더니 천적 인간(celestial men)이 되고 태고교회를 구성합니다. 그랬다가 그 후 사라지는 사람들과 그들의 자손들, 차례대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후손과 이후 계속되는 그 계승자들의 이야기입니다. 홍수 때까지 말입니다. 이 장을 포함, 이어지는 구절들을 통해 우리는 일종의 개요를 만나게 되는데, 태고교회인(the man of the most ancient church)이 형성된 때부터 홍수 때까지 이 기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요약이지요. 이것이 앞서 진행된 모든 내용, 곧 창세기 맨 앞 첫 세 장의 결론입니다.
다음은 절 별 속뜻입니다. 오늘은 20절과 21절, 두 절만 보겠습니다.
20절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C.287-291)
287
여기 ‘아담’(man, 사람, homo)은 태고교회인(the man of the most ancient church), 즉 천인(天人, the celestial man, 천적 인간)을, ‘아내’(wife)와 ‘모든 산 자의 어머니’(mother of all living)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녀를 이름하여 ‘어머니’(mother)라 합니다. 첫 교회였기 때문이지요. ‘산’(living)이라 하는 이유는,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을 소유했기 때문이며, 주님은 생명 자체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라틴어에서 사람을 의미하는 두 단어 ‘homo’와 ‘vir’를 스베덴보리는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homo’의 경우,
속뜻으로 homo는 선을 지닌 존재, 즉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선을 행하는 존재를 뜻합니다. 인간은 본래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로 인해 homo가 되며, 이로부터 ‘인간’(human)이라 불릴 자격을 갖습니다. 반대로, 선의 결여와 함께 자아의 욕망만 따른다면 외형은 사람이지만, 그는 더 이상 homo가 아닙니다.
참된 사람(homo)이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는 자이다. ‘Homo’ est qui recipit bonum et verum a Domino. (AC.5658)
사람이라 불리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선으로 말미암음이다. ‘Homo’ dicitur ex bono amoris et fidei. (AC.49)
즉, homo는 ‘주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창1:26)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다음은 ‘vir’의 경우입니다.
vir는 진리의 힘, 이해력, 신앙적 지성을 상징합니다. 종종 homo에 대응하는 보완적 개념으로, vir는 진리, ‘mulier’(여자)는 선 또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남자’(vir)는 진리의 이해를 의미한다. Per virum significatur intellectus veri. (AC.3134)
남자는 이해력에 속하므로 진리를 의미한다. Vir, quia ex intellectu, significat verum. (AC.4510)
따라서 vir는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는 단계, 혹은 지성적 신앙의 작용 상태를 나타냅니다.
288
‘아담’(man)이 태고교회인(the man of the most ancient church), 즉 천인(天人, the celestial man, 천적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음 사실들도 보았는데, 곧 주님만 홀로 사람이시며, 또 주님으로부터 모든 천인은 사람인데, 그 이유는 주님을 닮아서(likeness)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의 모든 구성원을 예외나 구별 없이 ‘사람’(man)이라 하더니, 결국은 그 겉모습이 사람처럼 보이기만 하면 누구든지 이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짐승과 구별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우리가 누구를 보고 저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닮았다 할 때, 물론 외모를 보고 그러는 걸 수도 있겠으나 보통은 그 일거수일투족, 즉 그의 성품, 인성, 됨됨이를 보고 그러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닮았다는 건 우리 안에 주님의 성품, 곧 주님의 신적 성품인 선과 진리가 발견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289
또 ‘아내’(wife)가 교회를, 그리고 가장 광의(廣義, in the universal sense)로는 천국(the heavens)과 지상 주님의 나라(the kingdom of the Lord)를 의미한다는 것은 위에서 이미 보여드렸으며, 이로부터 ‘어머니’(mother) 역시 같은 의미라는 사실이 이어집니다. 말씀에 보면 굉장히 자주 교회를 ‘어머니’(mother)라고 합니다. 이사야처럼 말입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의 어미를 내보낸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보라 너희는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 너희의 어미는 너희의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 (사50:1)
예레미야에서는
그러므로 너희의 어머니가 큰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를 낳은 자가 치욕을 당하리라 보라 그가 나라들 가운데의 마지막과 광야와 마른 땅과 거친 계곡이 될 것이며 (렘50:12)
에스겔에서는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어머니의 딸이요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형의 동생이로다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며 (겔16:45)
여기 ‘남편’(man, [vir])은 주님, 그리고 천적인 모든 것을, ‘자녀’(sons)는 신앙의 진리들을, ‘헷’(Hittite)은 거짓된 것을, ‘아모리’(Amorite)는 악한 것을 가리킵니다.
같은 데서
네 피의 어머니는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 (겔19:10)
여기 ‘어머니’(mother)는 고대교회(the ancient church)를 가리킵니다. ‘어머니’(mother)라는 말은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에 더 특별히 해당하는 말인데요, 첫 교회였고, 천적이었던 유일한 교회였으며, 그래서 주님이 그 어떤 다른 교회보다도 더 사랑하셨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290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신앙한 결과, 그녀를 일컬어 ‘모든 산 자의 어머니’(mother of all living)라고 한 것 역시 이미 지금까지 보여드린 사실들로 분명합니다. 만물의 생명이 나오는, 그러니까 근원 된 생명이란 건 하나 이상 있을 수가 없으며,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신앙하지 않으면서 무슨, 그것도 생명이라 하는 그런 생명 또한 있을 수도,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 그 결과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그래서 그 안에 생명이 있을 수 없는 그런 신앙 역시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주님에게만 홀로 ‘살아 계신’(living)이라 하며, ‘살아 있는 여호와’(living Jehovah)(렘5:2; 12:16; 16:14, 15; 23:7; 겔5:11),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렘5:2)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으려니와 (렘12:16)
1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 15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렘16:14, 15)
여기에도 물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나와 분명 관련 구절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이 AC에는 이처럼 수많은 구절들이 계속 인용되는데요, 이는 단순히 그 구절에 이런 표현이 있어서 인용된다기보다는 이런 표현의 표상, 즉 상응되는 바가 적합하여 인용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를 오늘 이 본문을 잠깐 살펴보면서 이해를 도울까 합니다. ChatGPT와 나눈 대화 인용입니다.
일단 이 본문의 문맥상 문자적 의미부터 보면,
이 장면은 예레미야 시대, 유다는 바벨론 포로기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옛 출애굽”보다 더 큰 “새로운 구원”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시는 장면인데요, 그걸 절 별로 보면, 14절은, 앞으로는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부차적이 된다는 것이고, 15절은, “북방 땅(바벨론)과 여러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중심이 될 것이라는 예언. 즉, 출애굽을 능가하는 새로운 구원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한편, 이걸 신학적 목적(역사-예언 차원)으로 또 보면,
이 본문은 실제로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을 가리킵니다만, 그러나 동시에 예레미야 예언 전체는 단지 역사 회복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영적 재창조, 즉 새 언약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렘31)
이제 스베덴보리의 상응·내적 의미로 풀이해 보겠습니다.
이게 본론이지요.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말씀’은 ‘역사적 사건의 기념이 아니라 영적 과정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이동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영적 상태)의 이동’을 다룹니다.
아래는 먼저 핵심 상응들입니다.
애굽(Egypt), 지식(학문, 교리)의 영역. 특히 ‘진리 지식이 신앙을 압도하여 죽게 만드는 외적 지식 중심 상태’
북방(North), 진리에 대한 어둠, 왜곡된 신앙, 그리고 더 심하면 이성적·영적 진리에 대한 무지/거절의 영역
여러 나라(nations), 여러 종류의 악과 거짓, 영적 흩어짐의 상태
인도하여 내심(leads out, brings up), 주님께서 ‘거짓과 악의 속박에서 진리와 선의 자유로 이끄심’
그 땅(land), 교회 자체, 또는 교회의 내적 상태 — ‘사랑과 진리로 이루어진 주님의 왕국’
조상에게 준 땅, 본래 사람이 창조될 때 부여된 ‘속 사람의 본향(heavenly mind)’ 즉 선과 진리로 살도록 설계된 영적 상태
이제 본문의 전체적 내적 의미, 곧 속뜻을 봅니다.
이 구절은 다음 같은 과정을 가리키는데요,
(1) ‘다시는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지 않는다’ (14절)
이 구절을 상응으로 보면,
주님이 사람을 진리 지식의 노예 상태(애굽)에서 건지신 것보다 더 크고 깊은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애굽은 ‘외적 교리 지식이나 문자적 율법 중심 신앙’을 말합니다. 즉, 단순히 ‘무지에서 지식으로 나오는’ 초급 단계의 구원이 아니라...
(2) ‘북방과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게 된다’ (15절)
이는 ‘훨씬 더 깊은 상태’, 즉,
거짓과 왜곡(북방)
분열된 악의 성향들(여러 나라)
에서 사람을 끌어내시는 ‘내적 구원의 과정’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용어로 말하면,
사람이 내적 재창조, 즉 거듭남의 길로 들어갈 때, 주님은 단순한 교리 지식의 정리, 그러니까 ‘애굽에서 인도’를 넘어서, 영의 근본 상태 전체를 전환시키는 더 큰 역사, 곧 ‘북방에서 인도’를 이루십니다.
여기서는 ‘출애굽’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영적 포로 상태에서의 해방을 뜻합니다.
(3) ‘그들을 그들의 조상에게 준 땅으로 인도한다’ (15절)
여기서 ‘땅’은 물리적 가나안이 아니라 ‘진정한 교회 상태’, 즉,
사랑(선)이 중심이 되고, 진리가 그 사랑을 섬기며, 마음과 생각 전체가 주님의 질서 속으로 회복된 상태
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조상에게 준 땅’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는 사람의 ‘본래 창조될 때의 상태’, 곧 ‘내적 천국의 상태’입니다.
저 역시, ChatGPT가 이 정도로 살필 줄은 몰랐는데요, 뭐랄까, 이 AI의 도움이 없었으면 좀 흐릿했을 주제가 얘의 도움으로 명료해졌다고 할까요? 얘가 무슨 거짓되고 엉뚱한 풀이나 해석을 하는 게 아닌 걸 보면 말입니다. 저는 그러나 경계심을 풀지 않으면서도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좋은 도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식입니다. 여기 수많은 인용 구절이 있는데요, 인용 구절이 많다고 힘들어하시거나 불평하시지 말고, 대신 잘 이해가 안 될 경우, 이렇게 이 AI에게 도움을 받으시며 한 구절 한 구절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쉬는 시간)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렘23:7)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 나도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미약하게 하리니 (겔5:11)
‘영생하시는 이’(he that liveth to eternity)(단4:34; 계4:10; 5:14; 10:6);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단4:34)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계4:10)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계5:14)
한글 14절엔 빠졌으나 영문 14절에는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계10:6)
‘생명의 원천’(the fountain of life) (시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36:9)
‘생수의 근원’(fountain of living waters)으로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렘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렘17:13)
주님에 의해, 즉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천국을 일컬어 ‘산 자의 땅’(land of the living)이라 합니다. (사38:11; 53:8; 겔26:20; 32:23–27, 32; 시27:13; 52:5; 142:5)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산 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의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사38:11)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사53:8)
내가 너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내려가서 옛적 사람에게로 나아가게 하고 너를 그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땅 깊은 곳 예로부터 황폐한 곳에 살게 하리라 네가 다시는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 되지 못하리니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 (겔26:20)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로다 24거기에 엘람이 있고 그 모든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지하에 내려간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25그와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침상을 놓았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뉘었도다 26거기에 메섹과 두발과 그 모든 무리가 있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27그들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가운데에 이미 엎드러진 용사와 함께 누운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 용사들은 다 무기를 가지고 스올에 내려가서 자기의 칼을 베개로 삼았으니 그 백골이 자기 죄악을 졌음이여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용사의 두려움이 있던 자로다 (겔32:23-27)
내가 바로로 하여금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그가 그 모든 무리와 더불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이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2:32)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시27:13)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시52: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시142:5)
그리고 주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살아 있다’(living)라고 합니다. 시편에서처럼 말입니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시66:9)
그리고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은 ‘생명책에 있다’(in the book of lives, in the book of life)는 말을 듣습니다. (시69:28; 계13:8; 17:8; 20:15)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시69:2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13: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 (계17:8)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계20:15)
그래서 또한 주님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살아 있는 상태가 되다’(made alive)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호6:2; 시85:6)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6:2)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시85:6)
다른 한편으로, 신앙 안에 있지 않은 사람들의 상태는 ‘죽은’(dead) 상태라고 합니다. 이사야를 보면 말입니다.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사26:14)
자아 사랑으로 부풀어 오른 사람들을 의미하면서 말입니다. ‘다시 사는 것’(rise again)은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말합니다. 또한 그들을 가리켜 ‘칼에 죽임을 당하다’(pierced)라고 합니다. (겔32:23–26, 28–31)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로다 24거기에 엘람이 있고 그 모든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지하에 내려간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25그와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침상을 놓았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뉘었도다 26거기에 메섹과 두발과 그 모든 무리가 있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겔32:23-26)
28오직 너는 할례를 받지 못한 자와 함께 패망할 것임이여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 29거기에 에돔 곧 그 왕들과 그 모든 고관이 있음이여 그들이 강성하였었으나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있겠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 30거기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내려간 북쪽 모든 방백과 모든 시돈 사람이 있음이여 그들이 본래는 강성하였으므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부끄러움을 품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웠고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31바로가 그들을 보고 그 모든 무리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을 것임이여 칼에 죽임을 당한 바로와 그 온 군대가 그러하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2:28-31)
그들은 또한 주님에 의해서도 ‘죽은’(dead) 상태라는 말을 듣습니다. (마4:16; 요5:25; 8:21, 24, 51, 52)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4:16)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5:25)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요8:2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51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요8:51, 52)
또 지옥을 ‘사망’(death)이라고 합니다. (사25:8; 28:15)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25:8)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사28:15)
291
이 절에서는 맨 처음 시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교회 시대인 이때는 교회의 일생 중 젊음의 꽃 같았는데, 그래서 이런 교회의 모습으로 천국의 결혼을 표상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를 결혼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또 교회를 ‘하와’(Eve)라 하는 이유는, 이 이름이 ‘생명’(life)을 의미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C.292-297)
292
이 말씀은 주님이 그들을 영적 자연적 선(spiritual and natural good)으로 가르치셨음을 의미합니다. ‘지어’(making)와 ‘입히시니라’(clothing)로는 주님이 그들을 가르치셨음을, ‘가죽옷’(coat of skin)으로는 영적 자연적 선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293
위 구절이 이런 걸 의미한다는 것을 겉 글자 상으로는 결코 알 수 없지만, 분명 여기엔 어떤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게 확실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정말로 가죽옷을 지으셨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94
‘가죽옷’(coat of skin)이 영적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 역시 누가 보아도 분명하지 않을 텐데요, 속뜻에 관한 계시 없이는, 그리고 말씀 내 유사 표현들이 나오는 여러 구절 간 일련의 비교 없이는 말입니다. 여기 ‘가죽’(skin)이라는 흔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사실은 새끼 염소(a kid)나 양(sheep), 또는 숫양(ram)의 가죽으로 이해됩니다. 말씀에서 이 동물들은 선, 체어리티(charity) 관련 애정을, 그리고 희생 제사 때 사용된 양의 상징처럼 똑같이 그런 체어리티에 속한 애정을 상징합니다. 체어리티의 선, 곧 영적 자연적 선을 부여받은 사람들을 ‘양’(sheep)이라고 하는데요, 그래서 주님을 ‘양의 목자’(shepherd of the sheep), 체어리티를 부여받은 사람들을 그분의 ‘양’(sheep)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들 아시는 대로 말입니다.
295
태고인들(太古人, the most ancient people)을 ‘가죽으로 지은 옷을 입은 사람들’(clothed with a coat of skin)이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벌거벗은 사람들’(naked), 곧 이노센스(innocence, 순진무구)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노센스를 잃어버렸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벌거벗음’(nakedness)이기 때문입니다. 태고인들의 스피킹 방식(the way of speaking of the most ancient people, 매우 그럴듯한 스토리 텔링 방식의 화법)으로 보면, 이 모든 일이 논리정연하게 마치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여기 그들을 가리켜 ‘벗은 채로 있게 될까 봐 주님이 그들에게 옷을 입히셨다’(clothed lest they should be naked)고 합니다. 그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들이 영적 자연적 선 가운데 있음이 분명한 것은, 그들에 관해 위 본 장 1절로 13절에서 언급한 내용뿐 아니라, 여기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Jehovah God made them a coat of skin, and clothed them) 하신 말씀과의 연관성을 보면 분명합니다. 여기서는 그 교회의 첫 번째, 그리고 더욱 특별히는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인데, 이들은 그런 선을 부여받은 교회였습니다.
296
새끼 염소, 양, 염소, 해달, 그리고 숫양이 영적 자연적 선(spiritual and natural goods)을 의미한다는 건, 말씀에서 야곱을 다루는 데와 궤(the ark)를 다루는 데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을 보면 분명합니다. 야곱의 경우,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입히고’(clothed with the raiment of Esau), 그의 손과 목 매끈매끈한 곳에는 ‘염소 새끼의 가죽’(with skins of kids of the goats)을 입혔으며, 이삭이 그 향취를 맡았을 때, 그는 ‘내 아들의 향취는 밭의 향취로다’(the smell of my son is as the smell of a field)라고 축복하였다 전하고 있습니다. (창27:15, 16, 27)
15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히고, 27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창27:15, 16, 27)
이 가죽들이 영적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주님의 신성하신 허락으로 해당 부분을 다룰 때 보시게 됩니다. 궤의 경우, 성막의 덮개(the covering of the tent)는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of rams’ skins and badgers’ skins)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출26:14; 36:19)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 (출26:14; 36:19)
그리고 그들이 출발할 때,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증거궤를 ‘해달의 가죽’(of badgers’ skins)으로 덮고, 같은 식으로 상과 대접들, 등잔대와 그릇들, 금제단, 그리고 성소에서 봉사하는 데에 쓰는 그릇들도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민4:6–14)
6그 위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7진설병의 상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대접들과 숟가락들과 주발들과 붓는 잔들을 그 위에 두고 또 항상 진설하는 떡을 그 위에 두고 8홍색 보자기를 그 위에 펴고 그것을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9청색 보자기를 취하여 등잔대와 등잔들과 불 집게들과 불똥 그릇들과 그 쓰는 바 모든 기름 그릇을 덮고 10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를 해달의 가죽 덮개 안에 넣어 메는 틀 위에 두고 11금제단 위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고 그 채를 꿰고 12성소에서 봉사하는 데에 쓰는 모든 기구를 취하여 청색 보자기에 싸서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어 메는 틀 위에 두고 13제단의 재를 버리고 그 제단 위에 자색 보자기를 펴고 14봉사하는 데에 쓰는 모든 기구 곧 불 옮기는 그릇들과 고기 갈고리들과 부삽들과 대야들과 제단의 모든 기구를 두고 해달의 가죽 덮개를 그 위에 덮고 그 채를 꿸 것이며 (민4:6-14)
이 가죽들이 영적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 또한 주님의 신성하신 허락으로 해당 부분에서 보시게 되는데요, 궤, 성막, 즉 장막 안에 있던 것들은 그게 무엇이었던지 간에, 그렇지요! 아론에게 입힌 거룩한 옷 위에 있던 것들 또한 그게 무엇이었던지 간에 천적 영적인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인데, 이는 아주 사소한 것 하나도 그 나름의 고유한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을 갖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97
천적 선(Celestial good)은 옷을 입지 않습니다. 가장 내적(內的, inmost)이며, 천진(天眞, innocent)하기 때문입니다. 천적 영적 선(celestial spiritual good)은 옷을 입는 첫 번째 선이며, 그다음이 자연적 선(natural good)입니다. 이들은 더 외적(外的, external)이기 때문인데, 이런 이유로 이들 선은 옷에 비유되며, ‘옷’(garments)이라 합니다. 에스겔에서 고대교회에 대해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수 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두르고 모시로 덧입히고 (겔16:10)
이사야에서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 (사52:1)
계시록에서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4, 5)
4장 4절에서도 ‘흰옷을 입은’(clothed in white raiment) 이십사 장로들에 대해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계4:4)
이렇게 천적 영적 및 자연적인 더 외적인 선들이 ‘옷’(garments)입니다. 또한 이런 이유로 체어리티의 선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천국에서는 광채 나는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 몸 안이기 때문에, ‘가죽옷’(coat of skin)을 입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3장 세 번째 단락인 ‘태고교회와 태고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창3:20-24) 가운데 우선 앞 두 구절인 20, 21절을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이며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주엔 22절로 24절을 보겠습니다.
설교
2025-11-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