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가족 중 일부가 지옥에 간 경우
사후 가족 중 일부가 지옥에 간 경우 - 스베덴보리가 본 실제 관계
이 부분은 많은 성도들뿐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도 깊이 고민했던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살아 있을 때, 자신의 가족 중 일부가 신앙적으로 매우 다른 길을 걸었고, 그들의 사후 상태가 어떨지 진지하게 궁금해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영계를 왕래하며 가장 먼저 확인한 사실은 이렇습니다. ‘지옥에 있는 가족과 천국에 있는 가족은 서로 만날 수 없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두 세계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본질’(affection)로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1. 스베덴보리가 본 실제 장면 – ‘서로를 보려고 하지만, 접근하지 못한다’
스베덴보리는 지상에서 매우 친하게 지냈던 형제 둘을 관찰했습니다. 한 사람은 선한 삶을 통해 천국으로 들어갔고, 다른 한 사람은 외적 신앙만 있었고, 내적으로는 자기애와 권력욕이 강해 결국 지옥으로 흘러갔습니다. 천국에 들어간 형제는 지상 기억으로 인해 한 번쯤 ‘그를 찾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듯, 그는 순간적으로 ‘희미한 인식’을 통해 지옥에 있는 형제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마음은 극도로 불편함을 느꼈고, 더는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국인은 지옥의 악을 참을 수 없다. 단지 악과 접촉하는 순간, 선한 사랑은 즉시 뒤로 물러난다.” 천국인은 ‘보고 싶다’는 자연적 마음이 잠시 일어날 수는 있지만, 지옥의 상태는 그 자체로 천국인의 영적 호흡을 막는 공기와 같기 때문에 결코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2. 지옥에 있는 가족은 천국 가족을 바라볼 수 있는가?
스베덴보리는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천국을 ‘위로 올려다본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영계에서 위·아래가 공간 개념이 아니라 상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지옥 영들은 천국의 빛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천국인을 ‘보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은 선을 견디지 못하며, 선은 악을 가까이할 수 없다.” 따라서 지옥 가족이 ‘천국에 있는 가족을 보고 싶어 한다’는 지상적 상상은 영계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3. 그렇다면 ‘지상에서의 사랑’은 사라지는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을 매우 섬세하게 설명합니다. 천국 가족은 지상에서의 사랑을 잊지 않습니다. 다만 그 사랑은 고통 없이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형태로 변합니다. 지옥 가족은 천국 가족을 자연적 기억으로는 기억하지만, 영적으로 사랑하거나 그리워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악은 본질적으로 사랑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국 가족이 지옥 가족을 보며 느끼는 마음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슬픔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삶의 결과를 바라보는 조용한 연민이다.’ 천국에서는 결코 ‘영원한 상실의 고통’이라는 형태가 남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 고통을 제거하시기 때문입니다.
4. 천국 가족은 지옥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가?
지상에서는 기도가 가능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는 중보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최종 상태가 결정되면 그것은 본질(사랑의 형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 사람의 마음 속에는 그의 과거 가족에 대한 부드러운 자비의 정서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적 기억’입니다. 고통이 아니라, 상대가 가엾다는 자비의 정서만 남습니다.
5. 스베덴보리의 결론 - ‘천국의 행복은 지옥 가족의 존재로 인해 전혀 흐려지지 않는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영계 탐방자도 이 사실을 처음에 믿기 어려워했지만, 천국의 실제를 경험하는 순간, 이 원리를 온전히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선한 사랑, 참된 이해, 완전한 평화가 마음을 채우기 때문에 지상식 감정인 ‘영원한 슬픔’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천국인은 지옥에 있는 가족 때문에 불행해지지 않는다. 주님은 천국인에게 불행을 결코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천국의 기쁨은 지옥에 있는 가족 때문에 흐려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가 선택한 길’에 대한 조용한 연민만 남기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