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의분(義憤), 그러나 분노가 영을 더럽히는 순간
3. 의분(義憤), 그러나 분노가 영을 더럽히는 순간
1) ‘분노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방향이 틀어지면, 속 사람의 상태를 무너뜨린다.’
스베덴보리는 “분노는 악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분노는 의로운 때도 있고, 악한 때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상태(state), 즉 마음의 자리입니다. 바울도 이렇게 말하지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엡4:26)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적 구분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2) ‘의로운 분노’(의분, 義憤)가 존재하는 이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선한 사람도 악을 보면 분노한다. 그 분노는 악을 악으로 보는 ‘분별의 빛’이다. 즉, 악과 거짓을 보면 마음 안에 자연스럽게 반감이 올라오는 것은 오히려 영적 감수성의 증거입니다. 예를 들어, 거짓으로 사람을 해치는 정치세력, 부정부패, 폭력, 불의한 제도, 악인의 성공 등, 이런 것들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정상적인 영적 반응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바로 이 대목에서 오해합니다. “정의로운 분노니 괜찮다”라고요. 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분노가 정당한 출발점에서 나왔더라도 방향이 조금만 틀어져도 곧 악의 통로가 된다. 분노는 의로운 분노에서 위험한 분노로, 위험한 분노에서 파괴적 분노로, 이렇게 세 단계로 변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3) 분노가 영을 더럽히는 ‘순간’ - 스베덴보리가 가장 경계한 지점
스베덴보리는 분노가 악하게 변하는 순간을 마치 “문이 노출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아래 체크리스트는 목사님의 감정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1단계 : 분노가 “사건 분석”에서 “사람 비난”으로 넘어갈 때
정의로운 분노는 악과 거짓을 향해 있습니다. 하지만 방향이 틀어지면, 대상이 사람으로 옮겨갑니다. 그러니까 “불의하다”에만 머물면 이는 의로운 분노에 머무르지만, “저 인간이 악하다”로 옮겨 가는 순간, 그때부터는 영적 오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악과 동일시하는 순간 악과 결합된다”고 말합니다.
2단계 : 분노가 “특정 사건”을 넘어 “전체 세계관”을 물들일 때
그러니까 “저 집단은 모두 악하다”라든지, “나라가 망했다”, “한국엔 희망이 없다” 등, 이런 식의 “전체화·확대화”가 일어나면, 이때부터 분노는 더 이상 분별이 아닙니다. 영적 감정은 이때부터 더 이상 현실 분석이 아니라 멸망감·절망감으로 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절망을 “악이 가장 기뻐하는 마음의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3단계 : 분노가 “나의 내적 평화”를 깨뜨릴 때
스베덴보리의 결정적 기준입니다. 마음의 평화(peace)를 잃으면, 분노가 영적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분노가 하루 종일 이어지고, 잠들기 전까지 계속 뉴스가 떠오르며, 기도할 때 집중이 안 된다면, 분노는 이미 내적 질서의 파괴자가 된 것입니다.
4단계 : 분노가 “소명을 잠식”할 때
번역 집중력 감소, AC 연구 흐름 약화, 마음의 에너지 고갈, 기도·말씀 묵상에 분산, 설교 준비의 깊이 약화 등, 이 지점에 오면, 정치 뉴스는 단순 자극이 아니라 소명 공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명을 흔드는 감정은 모두 악령의 도구”라고 말합니다.
4) 의로운 분노와 위험한 분노의 ‘명확한 구분법’
만일 나의 분노가 다음과 같다면, 그때는 의로운 분노라 할 수 있습니다. 악과 거짓을 향한다, 마음은 흔들리지만 중심은 잃지 않는다, 사건을 “영적 구조”로 본다, 판단은 선명하나 미움은 없다, 분노 후에 오히려 기도가 깊어진다, 분노가 사명 방향으로 사용된다 등등. 예를 들면, “이런 시대에 진리를 번역해야 한다”라든지, “악을 더 잘 분별하기 위해 AC를 더 읽자”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나의 분노가 다음과 같다면, 그때는 영을 더럽히는 분노이며, 이는 매우 위험한 분노입니다. 사람이 악의 대상이 된다, 전반적 혐오·조롱·멸시가 생긴다, 뉴스 소비가 중독처럼 반복된다, 분노 후에 마음이 공허·메마름, 내적 평화 상실, 기도 의욕이 사라짐, 체력이 무너짐, 소명 활동 약화 등등. 이 단계에서는 뉴스가 아니라 감정이 정령(정념)의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
5) 어떻게 영적 사람은 분노의 경계를 넘지 않을까?
1단계 : ‘사건’과 ‘사람’을 분명히 구분
스베덴보리는 강조합니다. 문제는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 안의 악이다. 이 구분만으로 분노가 영적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2단계 : 분노가 올라오면 즉시 “내적 평화”를 재확인
다음과 같이 마음속으로 고백하십시오. “주님, 저는 악을 분별하되 제 마음은 주님의 평화를 잃지 않겠습니다.” 이 선언은 실제로 영적 공간을 보호하는 기술입니다.
3단계 : 분노의 에너지를 ‘진리 사랑’으로 바꾸기
감정은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혼란을 보니 AC 번역을 더 해야 한다”라든지 “이 시대에는 진리를 더 밝혀야 한다”와 같은 이런 방식으로 분노를 선하게 전환하면 분노는 오히려 영적 열정이 됩니다.
4단계 : 분노가 올라오는 콘텐츠는 과감히 차단
특히 정치 유튜브는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정념 자극 장치’입니다. 영상은 음성·표정·자막·감정 연출이 모두 결합되므로 악령이 감정 문을 여는 데 최적입니다.
5단계 : 마지막 기준: “분노 후 나는 주님께 더 가까워지는가?”
이 질문에 “예”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분노는 의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요”라고 한다면 그 분노는 이미 영혼을 더럽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