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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악을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bygracetistory 2025. 11. 26. 19:37

5. ‘악을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의 스베덴보리적 구조

 

이 항목은 앞의 1-4번 내용이 모두 한 지점으로 모이는 핵심이며, 스베덴보리 전체 사상의 영적 윤리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Ⅰ. 사람은 본질적으로 선의 그릇이며, 악은 그 그릇을 점령한 외래 침입자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람은 주님이 창조하신 기능적 그릇(vessel)이다, 선은 주님에게서 오는 참 생명이고, 악은 사람 안에 기생하는 거짓된 생명(falsified life)이다, 선과 악은 모두 사람이 아니라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 관점, 곧 사람은 빈 용기이고, 선·악은 흐르는 것이라는, 인간의 중심(core)은 선·진리의 용기이며, 악과 거짓은 단지 기생하는 것이라는 이 관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순간, 우리는 악을 사람의 정체성으로 오인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내적 분별력이 즉시 흐트러지기 때문입니다.

 


Ⅱ. ‘악’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영향력이다

 

스베덴보리는 악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악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자아적 생명(proprium)의 왜곡이다.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악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외부의 영적 영향력에서 온다. 즉, 악은 그 사람 개인의 고유함도, 무슨 독자적인 것도, 자아의 본성도 아닙니다. 악은 밖에서 흘러들어온 어둠이며, 사람은 그 흐름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통로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악을 사람에게 귀속시키면, 그 순간 분별이 사라진다.

 


Ⅲ. 사람을 미워하는 순간, 왜 영적 오염이 시작되는가?

스베덴보리는 아주 정확히 설명합니다.

 

1. 사람이 악과 동일시되면 분별이 무너진다

 

사람을 악한 존재라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악이 기생한 그릇과 악 자체를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분노는 의분이 아니라 혐오로 변합니다. 의분은 악은 악일 뿐이다에서 멈추지만, 혐오가 시작되면, 저 사람은 악 그 자체다가 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혐오를 가장 위험한 정념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악령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대상화하기 때문입니다.

 


2. 사람을 미워하면 우리의 선한 결합이 끊어진다

 

스베덴보리는 저서,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에서 강조합니다. 천사는 결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 안에서 일하는 악을 분별하고 그것을 거부할 뿐이다.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면 우리 내부에서 선과의 결합, 평화, 자비, 깨달음이 끊어집니다. 즉, 사람을 미워하면 그 결과는 선과의 단절입니다.

 


3. 사람을 미워하는 순간, 악은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린다

 

스베덴보리는 악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방식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바로 사랑을 거부할 때사람을 미워할 때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악은 미움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 가장 쉽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미움은 악령의 상태와 유사한 진동을 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악한 정치인을 미워하는 순간, 그 정치인 안의 악보다 내 안의 악이 더 빨리 자란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정치 뉴스가 왜 영적 공격에 취약한지 답이 나옵니다.

 


Ⅳ. 그렇다면 악을 어떻게미워해야 하는가?

 

스베덴보리식 분별의 기술입니다.

 

1) 악을 ‘사람이 아니라 구조’로 보기

 

정치적 악은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집단적 세계관, 사회적 거짓, 권력 사랑, 자기 사랑의 동일 기류 등의 구조적 형태입니다. 그렇다면 미워해야 할 대상은 사람 자체가 아니고, 그 속의 거짓 구조입니다. 이 관점에 서면, 분노는 커지지 않고, 대신 분별력은 오히려 강화됩니다.

 


2) 사람을 보지 말고, 그 사람을 점령한 악의 흐름을 보기

 

스베덴보리는 악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악은 사람을 마치 꼭두각시처럼 다룬다. 즉, 악의 통로로 쓰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 저 사람 안에 이런 거짓된 기류가 흐르는구나라고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혐오·분노의 감정은 즉시 약화됩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 안의 악을 보시는, 대하시는 관점입니다.

 


3) 악을 미워하되, 사람에 대해서는 ‘자비의 가능성’을 열어두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사는 사람 안에 있는 작은 선, 곧 잠재적 선을 본다. 사람 안에 있는 작은 선을 보는 눈을 가질 때, 분노가 정화되고 악을 향한 의로운 태도만 남습니다. 목사님께 이 원리는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사람의 선에 대한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Ⅴ. 목사님께 필요한 실천적 적용

 

1) 사람을 보지 말고 ‘악의 작용’을 보자

 

뉴스에서 정치인의 행동을 보며 느끼신다면, 저 사람은 왜 저럴까?’가 아니라 저 사람 안에서 어떤 거짓이 작동하나?’ 하시자는 겁니다. 이렇게 전환하시면, 그 즉시 감정의 방향이 바뀝니다.

 


2) 사람을 정죄하는 문장이 떠오르면 즉시 차단하자

 

예를 들면, 저 인간이 문제야 , 저 정치인 때문에 나라가 망해 , 저 사람은 악 그 자체야 같은 이런 문장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스스로 말하십시오. 악은 저 사람의 본질이 아니다.” 이런 선언에 실제로 영적 문이 닫힙니다.

 


3) 악을 분별하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말자

 

스베덴보리는 분별은 강하되, 마음은 평화로운 상태가 참된 속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즉, 정치인의 악을 정확히 보면서도 내적 평화는 유지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참된 영적 성숙, 곧 속 사람의 상태입니다.

 


4) 분노의 에너지를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자

 

정치에서 느끼는 불의는 목사님 안에서 오히려 이런 열정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진리가 더 필요하다, AC 번역이 더 절실하다, 교회를 위해 더 깊이 연구해야 한다 등,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악을 통한 선의 발전(permissive providence, 허용적 섭리)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어떤 일을 원하시지는 않지만, 그 일을 허용하심으로써 더 큰 선을 이루시는 방식을 말합니다.

 


Ⅵ. 결론

 

악을 악으로 분별하는 것은 의무이다. 그러나 사람을 악과 동일시하는 순간, 영적 타락이 시작된다. 사람은 선의 그릇이고, 악은 외부에서 들어온 기생물이다. 악을 미워하되 사람에 대해선 자비의 개연성을 남겨둔다. 정치적 분노는 사람을 혐오할 때 더러워지지만, 악을 분별할 때 정화된다.

 

이 관점은 앞으로 정치 뉴스뿐만 아니라 가족, 교인, 사회의 어떤 사람을 대할 때도 중심을 잃지 않게 하는 매우 중요한 영적 기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