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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12/21, 창4:16-24), '라멕과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

bygracetistory 2025. 12. 21. 09:52

 

 

라멕과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4:16-24)

 

 

보통은 성탄절을 앞둔, 그러니까 오는 목요일(25)이지요, 오늘 같은 주일은 성탄 관련 본문으로 주일 설교를 준비하는데요, 저도 이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AC에 헌신하기로 한 이상, 앞으로는 거의 모든 절기 설교들조차 꾹 참고 가급적 오직 한 우물만 파는 게 맞는 것 같아 오늘도 창세기 본문을 준비했습니다. 이점 다들 양해 바라며, 다만 성탄 당일은 따로 성탄 축하 예배를 오전 10시에 드리겠습니다. 성탄 설교는 그때 나누기로 하지요.

 

 

오늘 본문은 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고, 성을 쌓고, 족보는 계속 이어지며, 문화와 기술은 발전하고, 음악과 금속 가공까지 등장합니다. 겉으로 보면 문명은 전진하고, 삶은 풍요로워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흐름을 ‘’이 아니라, ‘황폐(荒廢, vastation)로 향하는 길로 묘사합니다. 왜일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문명이 발전하면 교회도 살아 있는가? 외적 번영이 곧 영적 생명인가? 스베덴보리는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리고 주님께서 그 한가운데서도, 즉 상황이 가장 안 좋을 때도 그 가운데에서 어떻게 새 교회를 준비하시는지를 다음 세 가지로 보여 줍니다.

 

 

첫째, 여호와 앞을 떠난 신앙은 성까지 쌓지만 결국 생명을 잃는다 (16-18)

 

16절은 오늘 본문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말씀입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4:16)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는 단순한 장소 이동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상태’를 뜻합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하는데, 가인은 그 앞을 떠났기 때문이지요. 즉, 신앙은 남아 있으되, 사랑과 생명에서 분리된, 떨어져 나간 상태인 것입니다.

 

그 결과 가인은 ‘놋 땅에 거주’, 곧 진리와 선의 바깥에서 살며, ‘성을 쌓고’, 즉 성읍을 세웁니다. 성경에서 ‘(, city)은 언제나 ‘교리 체계’를 뜻하는데요, 가인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리로 자신을 방어하는 구조’를 만듭니다. 이것이 ‘성을 쌓는’ 것이며, 그래서 성경에서 ‘에녹(Enoch)은 ‘신앙을 교리화하여 체계적으로 정돈하는 사람’을 표상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창4 가인 계보와 나란히 진행되는 창5(Seth) 계보에서도 동명이인인 ‘에녹’이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의 속뜻이 바로 이런 건데요, 그러니까 당시 에녹이 힘쓴 나름의 ‘신앙의 조직화’, 즉 오늘날 조직신학 같은 정돈을, 그러나 주님은 이런 건 태고교회에 맞지 않기 때문에 홍수 후 세대를 위해 잠시 보류하시는데, 그걸 저렇게,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처럼 점잖게 표현하신 것이지요. 그동안 우리는 저 본문을 ‘에녹이 얼마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으면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셨을까... 우리도 저런 에녹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라며 설교했고, 그리고 ‘아멘!’하며 받아들였지요. 우리가 성경을 겉으로만 읽어도 웬만하면 충분하지만, 가끔 이렇게 전혀 엉뚱한 삼천포로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가급적 속뜻도 함께 알 수만 있으면 아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그럼, 스베덴보리는 이런 걸 어떻게 알았던 걸까요? 주님이 스베덴보리 곁에서 불러주는 걸 그는 그저 딕테이션(dictation), 그러니까 받아적기만 한 건가요? 전에 제가 잘 모르고 이렇게 여러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오늘 이 부분을 좀 바로잡고자 합니다.

 

설교 중이니 짧게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없던 새로운 의미를 발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의 속뜻은 이미 하늘(영계)의 질서 안에 존재하며, 그 질서가 문자 속에 ‘상응’(correspondence)으로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영계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질서와 구조가 성경의 이름과 계보, 배열 속에 상응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나는 성경을 새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스스로 사용해 온 언어를 끝까지 따라갔을 뿐이다. 나는 영계에서 천사들이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듣고, 보고, 검증하도록 허락받았다.” 즉, 그는 새 내용을 받아 적은 예언자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영적 의미를 관찰하고 확인한 증인’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합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점 하나는, 스베덴보리는 자기 개인의 생각이나 계시를 성경 위에 두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일관성과 맞는가?”, “다른 본문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하는가?”, “교회의 역사 전체와 어긋나지 않는가?” 이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면 아르카나로 제시하지 않았지요. 결론적으로, 스베덴보리는 ‘새 계시의 전달자가 아니라 계시의 구조를 열어 보인 사람’입니다. 비유하자면, 그는 새 음악을 작곡한 사람이 아니라 이미 연주되고 있던 음악의 악보를 보여 준 사람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것이 참인지 아닌지는 내 말을 믿지 말고, 성경과 삶에서 직접 시험해 보라”고 말이지요. 거듭 말씀드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새로 쓰거나 받아 적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성경이 하늘에서는, 그러니까 천사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오랫동안 보고 확인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고, 그 이해가 성경 전체와 일치할 때만 주석으로 남겼습니다.

 

네, 우선 이 정도로만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이런 아르카나를 알 수 있었나에 대해 그동안 제가 잘못 전달한 부분을 바로잡습니다.

 

오늘 본문 관련, 계속해서 말씀드리면,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신앙이 사랑을 잃으면, 반드시 체계를 강화한다’는 사실과, ‘살아 있는 관계 대신, 안전한 구조를 선택한다’는 사실입니다. 8백 년 전 사람인 성 프란체스코도 그의 열두 명의 제자 중 이 가인 같은 제자, 에녹 같은 제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프란체스코 말년에 큰 어려움은 물론 훗날 크게 변질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체어리티가 안 보이는 신앙생활의 맹점이며, 초래하는 무서운 사실입니다.

 

그 이후 이어지는 족보는, 생명의 계보가 아니라 ‘이단(異端, heresy)의 계보입니다. 한 오류는 또 다른 오류를 낳고, 신앙은 점점 추상화되고, 삶과 분리됩니다. 가인의 길은 단절되지 않고 계속 확장되어 가지만, 안타깝게도 그 확장은 생명의 확장이 아니며, 그 끝은 황폐함, 곧 종말입니다.

 

 

둘째, 그러나 ‘황폐’(荒廢, vastation)의 끝에서도 주님은 새 교회의 씨앗을 심으신다 (19-22)

 

19절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뀝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라멕에게 두 아내, ‘아다(Adah)와 ‘씰라(Zillah)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을 신앙이 거의 완전히 사라진 황폐의 극점(極點)으로 보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주님은 새 교회의 윤곽을 보여 주십니다.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 영적 차원’을, 씰라는 ‘자연적 차원’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지요, 먼저 ‘야발(Jabal), 아다의 아들인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 곧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을 의미하고, 다음은 그의 아우 ‘유발(Jubal)입니다.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 즉 신앙의 정서와 질서를 의미합니다. 다음은 씰라의 아들 ‘두발가인(Tubal-Cain),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 곧 자연적 삶의 기술과 질서를 의미합니다. 그의 누이 ‘나아마(Naamah)는 유사한 교회, 즉 그 교회 밖에 있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문명의 발전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가 회복될 때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이 새 교회는 황폐가 끝나기 전에 싹으로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시대를 바꿀 힘은 없고, 여전히 가인의 계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완성된 새 교회가 아니라, 주님이 미리 심어 두신 씨앗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위로를 받는데요, 그것은 가장 어두운 때에도, 주님은 결코 손 놓고 계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문화가 극에 달할수록, 교회는 침묵하고 홍수는 가까워진다 (23, 24)

 

23, 24절은 충격적입니다. 라멕이살인을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4:23)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신앙’, ‘소년’은 ‘체어리티’입니다. 이는 더 이상 싸움이 아니라, 영적 생명의 완전한 붕괴를 뜻합니다. 라멕은 신앙도, 사랑도 모두 죽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절망이 아니라 ‘자기 확신’입니다. 절망을 해도 모자랄 판에 확신을 하고 앉아 있는 것이지요.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4:24)

 

이는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는 말이 아니라, 심판마저 상대화하는 교만이요, 거룩한 것을 숫자로 계산하는 상태입니다. 이미 선을 넘은 것이며,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문명은 최고조에 이르렀지만, 교회는 완전히 황폐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홍수’가 필요했습니다. 홍수는 벌이 아니라, ‘시대 전환’입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뒤섞이는 상태를 끊고, 주님께서 보존하신 ‘노아’, 곧 리메인스를 통해 완전히 다른 방식의 교회인 양심의 교회를 시작하시기 위함입니다. 퍼셉션(perception)의 교회가 더 이상 존재, 존속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늘 주님과 연결되어야 있어야 살 수 있는데, 인류의 첫 연결 방식인 퍼셉션이 막을 내렸기 때문에 주님은 부득이하게 그보다는 못하지만 새로운 방식인 ‘양심’이라는 연결 방식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바로 ‘노아’ 때부터 말이지요. 이 둘의 차이는 전자인 퍼셉션 방식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앙하는 반면, 후자인 양심 방식은 주님 사랑을 신앙을 통해 배워서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모독(冒瀆, profanation)을 이토록 엄중하게 다루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죄나 오류가 아니라 인간의 영적 구조 자체를 파괴하여 회복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독’이란, 사람이 주님의 진리와 선을 알고 인정하며 어느 정도 믿기까지 한 뒤에, 그것을 삶에서 의도적으로 거부하거나, 자기 욕망, 자기 영광, 권력, 이익을 위해 왜곡하여 사용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때 일어나는 가장 심각한 결과는, 인간 안에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분리되지 못한 채 강제로 결합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 사람에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 곧 선과 진리의 흔적이 저장되어 있고, 겉 사람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악과 거짓이 자리 잡고 있는데, 모독은 이 둘을 억지로 섞어 버립니다. 그 결과 인간의 마음은 어느 한쪽으로도 돌아설 수 없는 상태, 즉 선을 완전히 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악으로 완전히 떨어질 수도 없는 ‘내적 분열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영혼이 찢어진다’는 표현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사후 세계에서 그 사람이 극심한 고통과 혼란 속에 놓이게 됨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므로, 선을 사랑하는 부분과 악을 사랑하는 부분이 동시에 활성화되어 서로를 끊임없이 공격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 상태에 놓인 영들은 가장 깊은 불안과 자기혐오, 분노와 절망 속에 머물게 되는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지옥 가운데서도 가장 참혹한 상태’라고까지 말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모독이 반복될 경우, 주님께서 인간 안에 보존하신 리메인스 자체가 훼손될 위험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리메인스는 거듭남의 유일한 토대이기에, 이것이 손상되면 주님께서 더 이상 그 사람을 새로운 상태로 인도하실 길이 거의 사라집니다. 바로 이 때문에 주님은 사람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상태로라도 머물게 하시고, 심지어는 신앙 자체를 거의 잃게 되는 황폐를 허락하시면서까지 모독만은 피하도록 섭리하십니다. 차라리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상태는, 새 빛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알고 믿으면서도 거부하고 뒤섞는 모독의 상태는 그 가능성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독은 단순히 ‘나쁜 죄’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과 다시 연결될 수 있는 내적 구조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정적 단절’이며,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듯, 주님께서 모독을 무엇보다 엄중히 금하시고, 역사 전체를 통해서까지 그것을 막으시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거울’입니다.

 

우리는 성을 쌓고 있습니까, 아니면 장막에 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신앙을 방어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랑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문화와 성취가 커질수록, 우리는 더 겸손해지고 있습니까?

 

주님은 황폐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모독을 막기 위해 황폐를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언제나 ‘새 교회의 씨앗을 숨겨 두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묻고 계십니다. “너는 가인의 성에 살 것인가, 아니면 노아의 방주로 들어올 것인가?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가 겉으로는 풍요로워 보이나 속으로는 사랑을 잃은 신앙이 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성을 쌓는 교회가 아니라, 장막에 거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교회가 되게 하시옵소서.

 

황폐의 시대에도 주님께서 숨겨 두신 리메인스를 소중히 여기게 하시고, 새 교회의 씨앗을 알아보는 눈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참된 체어리티를 다시 살리시고, 노아의 방주와 같은 양심으로 이 시대를 건너가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교

2025-12-2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3. 창4.4, 2025-12-21(D1)-주일예배(창4,16-24, AC.397-433), ‘라멕과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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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12/14, 창4:13-15), '가인에게 표를 주사'

가인에게 표를 주사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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