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12, 창4: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AC.412-416)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창4:20)
AC.412
‘아다’(Adah)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의 천적(天的, the celestial),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와 상응하며, ‘야발,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Jabal,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은 독트린과 상응하는데, 이 독트린은 사랑의 거룩한 것(the holy things of love)과, 그로 말미암는 선(the goods thence derived)에 관한 것으로, 이때 이 선은 천적(celestial)인 선입니다. By “Adah” is signified, as before, the mother of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by “Jabal,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is signified doctrine concerning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goods thence derived, which are celestial.
해설
‘아다’(Adah)는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듯, 새로 일어나는 교회에서 ‘신앙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낳는 근원, 곧 어머니’를 뜻합니다. 이는 황폐의 끝에서 시작되는 새 교회가 지식이나 규범, 제도에서 출발하지 않고, 먼저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내적 생명에서 출발함을 보여 줍니다. 가인의 계보에서 무너졌던 것은 바로 이 질서였는데, 신앙이 사랑보다 앞서고, 교리가 생명보다 앞서면서 교회는 점점 황폐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교회에서는 다시 거꾸로, 사랑이 중심이 되고 신앙은 그 사랑을 밝히는 빛으로 회복됩니다. 아다는 바로 이 회복된 질서의 시작점으로서, 교회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주님과의 연결이 다시 태어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 아다가 낳은 ‘야발’(Jabal)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단순한 유목 문화의 기원이 아니라,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 관한 교리와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의 체계’를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장막’은 언제나 주님의 임재, 곧 사랑이 거하는 내적 처소를 뜻하고, ‘가축’은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천적 선, 즉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실천되는 선한 행위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야발은 새 교회가 세워질 때 가장 먼저 형성되는 교리, 곧 사랑을 중심으로 한 교리를 대표하며, 이 교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논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생명에서 자연스럽게 정식화된 것입니다. 이는 가인의 계보에서 발전했던 ‘성읍’ 중심의 교리 체계와 뚜렷이 대비되는데, 후자가 방어와 정당화를 위한 구조였다면, 야발로 상징되는 교리는 삶과 임재에서 흘러나오는 살아 있는 교리입니다. AC.412는 이처럼 새 교회의 첫 열매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며, 참된 교회는 언제나 사랑에서 시작하여, 그 사랑이 신앙과 삶 전체를 형성해 간다는 근본 원리를 다시 한번 분명히 드러냅니다.
AC.411, 창4:19, ‘황폐’(vastation), ‘황무’(荒蕪, desolation), ‘종말’(終末, consummation)이 반드시 필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1 새 교회가 일어날 수 있으려면 반드시 그전에 먼저 황폐함이라는 마지막 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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