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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9, 창4:21, '영적인 것' - 신앙의 진리와 선

bygracetistory 2025. 12. 22. 17:36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4:21)

 

AC.419

 

천적인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 인한 선이듯, 영적인 것은 신앙의 진리와 선입니다. 참되고 선한 걸 이해하는 건 신앙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 지식은 이 둘을 포함하지만, 그러나 신앙이 가르치는 바대로 되는 거, 그 결과 주님 사랑의 사람이 되어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건 천적입니다. 즉 이해하고 그 안에 머무르는 건 영적이지만, 이해한 걸 실천에 옮겨 그런 사람이 되는 건 천적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이 이들 두 가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두 악기, 곧 ‘수금과 퉁소’(the harp and organ)로 상응하고 있습니다. 하프는, 다들 아시듯 현악기이며, 그래서 영적 진리를, 그리고 오르간은 현악기와 관악기 사이 중간, 곧 영적 선을 상응합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 so spiritual things are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for it belongs to faith to understand not only what is true, but also what is good. The knowledges of faith involve both. But to be such as faith teaches is celestial. As faith involves both of these, they are signified by two instruments, the harp and the organ. The harp, as everyone knows, is a stringed instrument, and therefore signifies spiritual truth; but the organ, being intermediate between a stringed instrument and a wind instrument, signifies spiritual good.

 

 

해설

 

AC.419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분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하면서, 동시에 이 둘이 어떻게 신앙 안에서 결합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먼저 이렇게 정리합니다. ‘천적인 것(celestial things)은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부터 파생된 선이고, ‘영적인 것(spiritual things)은 신앙의 진리와 선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신앙이 단지 참된 것을 아는 능력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란 무엇이 참인지뿐 아니라 무엇이 선한지까지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지식, 곧 ‘신앙의 앎’ 속에는 진리와 선이 함께 포함됩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중요한 구분을 덧붙입니다. 신앙이 진리와 선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은 영적인 영역에 속하지만, 그 이해한 바를 존재 자체로 살아내는 것, 곧 그 사람 자체가 그렇게 되는 것은 천적인 영역에 속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이 선이라고 아는 것은 신앙의 일이고, 그 선 안에 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사랑의 일입니다. 이 구분은 신앙과 사랑,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의 관계를 오해 없이 이해하게 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스베덴보리는, 영적인 것들이 두 악기, 수금과 퉁소(오르간)로 표상된다고 설명합니다. 신앙 안에는 진리와 선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악기가 아니라 두 악기가 필요합니다. 수금은 현악기로서, 줄의 진동을 통해 소리를 냅니다. 이는 분명하고 구별되는 음, 곧 진리의 성격과 상응합니다. 진리는 구분하고, 밝히며, 질서를 세웁니다. 그래서 수금은 영적 진리를 표상합니다.

 

반면 퉁소, 혹은 오르간은 성격상 현악기와 관악기 사이의 중간적 성질을 지닙니다. 공기의 흐름이 관을 통해 소리를 내지만, 그 소리는 일정한 구조와 질서 안에서 형성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중간성’을 근거로, 오르간이 영적 선을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영적 선은 진리처럼 날카롭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사랑처럼 즉각적인 생명력만으로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진리에 의해 형성되고,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선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음악의 물리적 특성을 억지로 영적 의미에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상응의 질서를 따라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리는 분별과 명료성을 지니고, 선은 온화함과 유익함을 지닙니다. 현악기의 또렷한 음은 진리의 성격과 상응하고, 공기의 흐름 속에서 조화롭게 울리는 오르간의 소리는 선의 성격과 상응합니다. 이 둘이 함께 연주될 때, 비로소 신앙의 전체, 곧 진리와 선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가 표현됩니다.

 

결국 AC.419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신앙은 결코 단일한 차원이 아니며, 진리와 선의 이중 구조를 지닙니다. 그리고 이 구조는 음악이라는 표상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납니다. 수금만 있다면 신앙은 차갑고 분석적인 지식에 머물고, 오르간만 있다면 신앙은 방향 없는 선의 감정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이 함께 있을 때, 신앙은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며,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살아 있는 질서가 됩니다.

 

따라서 유발이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으로 불린 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이 진리와 선의 균형 속에 자리 잡았음을 알리는 표상입니다. 이는 천적인 사랑(야발)에서 출발하여, 영적인 신앙(유발)으로 질서 있게 전개되는 새 교회의 구조를 완성하는 중요한 한 조각이며, 스베덴보리가 음악의 상응을 통해 보여 주고자 한 깊은 영적 통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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