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25, 창4:22, '구리'(銅, brass)의 속뜻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5
다음과 같은 사실을 오늘날 세상은 모르는데요, 그러니까 ‘동’(銅, brass)은 자연적 선과 상응한다는 사실 같은 건데, 이런 식으로 말씀에 나오는 모든 금속은 저마다 그 속뜻으로는 어떤 특별한 것들과 상응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금’(金, gold)은 천적 선, ‘은’(銀, silver)은 영적 진리, ‘동’은 자연적 선, ‘철’(鐵, iron)은 자연적 진리와 각각 상응한다는 것이지요. 계속해서 다른 금속들도 그렇고요, ‘나무’(wood)와 ‘돌’(stone)도 마찬가지입니다. 법궤와 성막, 그리고 성전에 사용된 ‘금’, ‘은’, ‘동’ 및 ‘나무’의 상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자비를 따라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사야 같은 선지서들을 보면 이런 상응 사실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It is unknown to the world at the present day that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and also that every metal mentioned in the Word has a specific signification in the internal sense—as “gold,” celestial good; “silver,” spiritual truth; “brass,” natural good; “iron,” natural truth; and so on with the other metals, and in like manner “wood” and “stone.” Such things were signified by the “gold,” “silver,” “brass,” and “wood,” used in the ark and in the tabernacle and in the temple,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That such is their signification is manifest from the prophets, as from Isaiah:
16네가 이방 나라들의 젖을 빨며 뭇 왕의 젖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17내가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니 (사60:16, 17) Thou shalt also suck the milk of the gentiles, and shalt suck the breast of kings. For brass I will bring gold, and for iron I will bring silver, and for wood brass, and for stones iron; I will also make thy tribute peace, and thine exactors righteousness, (Isa. 60:16–17)
위 구절들은 주님의 오심, 그의 나라와 천적 교회에 대해 다루는데요, ‘금을 가지고 놋을’(For brass gold)은 자연적 선은 천적 선으로, ‘은을 가지고 철을’(for iron silver)은 자연적 진리는 영적 진리로, ‘놋으로 나무를’(for wood brass)은 육적(肉, corporeal) 선은 자연적 선으로, ‘철로 돌을’(for stones iron)은 감각적(sensuous) 진리는 자연적 진리로 각각 상응합니다. 에스겔에는 treating of the Lord’s advent, of his kingdom, and of the celestial church. “For brass gold,” signifies for natural good celestial good; “for iron silver,” signifies for natural truth spiritual truth; “for wood brass,” signifies for corporeal good natural good; “for stones iron,” signifies for sensuous truth natural truth. In Ezekiel:
야완과 두발과 메섹은 네 상인이 되었음이여 사람과 놋그릇을 가지고 네 상품을 바꾸어 갔도다 (겔27:13) Javan, Tubal, and Meshech, these were thy merchants, in the soul of man, and vessels of brass they gave thy trading, (Ezek. 27:13)
두로(Tyre), 그러니까 이 두로가 영적, 천적 부를 소유한 사람들과 상응한다는 내용인데요, 여기서 ‘놋그릇’(vessels of brass)은 자연적 선과 상응합니다. speaking of Tyre, by which are signified those who possess spiritual and celestial riches; “vessels of brass” are natural goods.
신명기입니다. In Moses: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신8:9) A land whose stones are iron, and out of whose mountains thou mayest hew brass, (Deut. 8:9)
이 구절에서도 ‘돌’(stones)은 감각적 진리를, ‘철’(iron)은 자연적, 그러니까 이성적(rational) 진리를, 그리고 ‘동’(brass)은 자연적 선을 각각 가리킵니다. 에스겔이 본 것은 where also “stones” denote sensuous truth; “iron,” natural, that is, rational truth; and “brass,” natural good. Ezekiel saw:
5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6그들에게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7그들의 다리는 곧은 다리요 그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광낸 구리 같이 빛나며 (겔1:7) Four living creatures, or cherubs, whose feet sparkled like the appearance of burnished brass, (Ezek. 1:7)
여기서도 거듭 ‘구리’(brass)는 자연적 선과 상응하며, 사람의 ‘발바닥’(foot)은 자연적인 걸 표현합니다. 다니엘한테도 같은 식으로 나타났습니다. where again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for the “foot” of man represents what is natural. In like manner there appeared to Daniel,
5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6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단10:5, 6) A man clothed in linen, whose loins were girded with gold of Uphaz, his body also was like the beryl, and his arms and his feet like the appearance of burnished brass. (Dan. 10:5–6)
‘놋뱀’(brazen serpent)(민21:9)이 주님의 감각적, 자연적 선을 표현한다는 것은 위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the “brazen serpent” (Num. 21:9) represented the sensuous and natural good of the Lord may be seen above.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21:9)
해설
AC.425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거의 잊혀진, 그러나 말씀의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원리 하나를 다시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에 등장하는 금속과 재료 하나하나가 각각 고유한 영적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특히 ‘놋’(brass, 구리)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금속 전반이 하나의 질서 안에서 배열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질서는 임의적이 아니라, 천적–영적–자연적 구조에 정확히 상응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금’(gold)은 천적 선, 곧 사랑의 가장 내적인 선을 뜻하고, ‘은’(silver)은 영적 진리, 곧 신앙의 진리를 뜻하며, ‘놋’(brass)은 자연적 선, 즉 외적 삶에서 실천되는 선을 뜻하고, ‘철’(iron)은 자연적 진리, 곧 이성과 합리성의 차원에서 인식되는 진리를 뜻합니다.
이러한 상응은 단순한 상징 풀이가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영적 질서입니다. 그래서 성막과 성전, 언약궤에 사용된 재료들, 그러니까 금, 은, 놋, 나무, 돌은 모두 교회와 인간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차원의 선과 진리를 표상합니다. 주님은 아무 재료나 사용하지 않으셨고, 각각의 재료는 그에 상응하는 영적 실재를 담기 위해 선택되었습니다.
이사야 60장의 예언은 이 질서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라는 말씀은 단순한 물질적 번영의 약속이 아닙니다. 이는 자연적 차원의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차원인 천적, 영적 차원으로 끌어올려지고 변화됨을 뜻합니다. 자연적 선(놋)이 천적 선(금)으로, 자연적 진리(철)가 영적 진리(은)로 변화된다는 것은, 인간의 외적 삶이 주님의 사랑과 신앙에 의해 새롭게 재구성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곧 주님의 나라, 곧 천적 교회의 회복입니다.
에스겔 27장에서 ‘두로’(Tyre)가 ‘사람과 놋그릇을 가지고 네 상품을 바꾸어 갔도다’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입니다. 두로는 말씀에서 영적, 천적 풍요를 지닌 자들, 곧 선과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들을 표상합니다. 그들이 거래하는 ‘놋그릇’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자연적 선을 담는 그릇, 즉 삶 속에서 사용될 수 있는 선을 뜻합니다. 여기서도 놋은 언제나 외적 삶의 선, 실천 가능한 선과 연결됩니다.
신명기 8장에서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라는 표현 역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돌’을 감각적 진리, ‘철’을 자연적, 이성적 진리, ‘놋’을 자연적 선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인간의 인식이 감각에서 이성으로, 그리고 삶의 선으로 이어지는 자연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진리는 단지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선으로 실현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에스겔 1장에서 그룹들의 발이 ‘그들의 발바닥은 광낸 구리 같이 빛나며’라는 묘사도 이 질서를 강화합니다. ‘발’은 언제나 인간의 자연적 차원, 곧 삶의 가장 아래 단계, 행동과 실천의 영역을 뜻합니다. 그 발이 놋처럼 빛났다는 것은, 자연적 삶 자체가 선으로 충만해졌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늘의 실재가 가장 낮은 차원까지 내려와 자연적 삶을 거룩하게 만들었음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다니엘 10장에서 등장하는 인물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라는 묘사도 같은 의미입니다. 허리는 금으로 띠를 두르고(천적 선), 몸은 보석처럼 빛나며(영적 상태), 팔과 발은 놋과 같습니다. 이는 천적–영적–자연적 차원이 한 인물 안에서 질서 있게 결합된 상태를 상응적으로 보여 줍니다. 즉, 자연적 선은 결코 하위적이거나 무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위의 차원들을 충실히 담아내는 기반입니다.
마지막으로 언급된 놋뱀은 이 모든 상응을 집약합니다. 놋뱀은 감각적, 자연적 차원에서 바라보면 단순한 물체이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자연적 선, 곧 인간의 가장 낮은 상태까지 내려오셔서 구원을 이루신 주님의 선을 표상합니다. 여기서도 놋은 언제나 구원과 연결된 자연적 선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AC.425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말씀에 등장하는 금속과 재료들은 결코 장식이나 역사적 우연이 아니며, 교회와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층위적 구조를 드러내는 상응의 언어입니다. 그중 ‘놋’은 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과 신앙이 실제 삶으로 내려와 구현되는 자리, 곧 자연적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참된 신앙은 언제나 금과 은으로 끝나지 않고, 놋으로 내려와 삶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AC.424, 창4:22, 'artificer'의 속뜻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4 말씀에 나오는 ‘기능공, 공장(工匠), 장색(匠色), 장인(匠人), 숙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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