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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예배(2025/12/25, 눅2:10, 11, 요1:9),'오늘 우리를 위하여 오신 참 빛 되신 주님'

bygracetistory 2025. 12. 25. 11:26

 

오늘 우리를 위하여 오신 참 빛 되신 주님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10, 11)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9)

 

 

※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115,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125, ‘천사들의 노래가’입니다.

 

 

오늘은 성탄절 당일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먼저 1225일이 성탄절이 된 유래와 그 의미를 살핀 후, 이어서 오늘 본문을 살피고자 합니다.

 

 

우선 왜 1225일인가입니다. 정말 그날 주님이 태어나셨을까요?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날짜는 나오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1225일은 초대 교회 이후 형성된 전통적 기념일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로마 문화적 배경이 있는데요, 로마에는 ‘동지’(冬至) 전후에 열리던 ‘무적의 태양(Sol Invictus) 축제라는 게 있었습니다. ‘동지’는 어둠이 가장 깊은 날이지만, 이날을 기점으로 다시 낮, 곧 빛이 길어지는 날이지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빛이 어둠을 이기는 시점으로 본 것입니다. 주님을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1:9)으로 본 초대 교회는 그래서 동지의 이런 상징을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과 연결한 것입니다. 즉, ‘동지’의 특징과 로마의 ‘축제’라는 상징을 차용, 이날을 주님 오신 성탄절로 삼은 것이지요. 날짜의 정확성보다 의미의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 오신 그 실제 시기를 짐작할 때도 12월 설은 좀 무리가 있는데요, 그 이유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2:8)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유대 지역에서 12월은 우기, 한랭기이며, 밤에 들에서 양을 치는 것은 봄에서 가을 사이가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만 특별히 당시 호적 명령으로 대규모 이동도 있었고요. 이런 현실적 이유로 주님의 탄생을 12월, 그것도 25일로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주님 탄생의 그 가장 유력한 시기를 유대 절기와 연결지어 생각할 때, 학자들과 신학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절기는 바로 ‘초막절(Sukkot, 티쉬리월 / 9-10)인데요,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라는 말씀에서 이 ‘거하시매’라는 말이 바로 ‘장막을 치다, 초막을 세우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초막절은 바로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 거하심, 곧 ‘임마누엘’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계심을 선포하는 절기이지요. 이 절기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는 ‘강생’(降生, 신이 인간으로 태어남)의 핵심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또한 이 절기는 ‘빛의 절기’이기도 합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대한 등불 점화가 있기 때문인데, 이는 ‘나는 세상의 빛(8:12)이라 하시는 주님의 선언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초막절에 오셨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견해가 매우 강하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실제 역사 연대기보다 섭리의 질서입니다. 주님의 강생은 자연의 한 날이 아니라 인류의 영적 밤의 한가운데에 비추어진 ‘새 날’이기 때문이지요.

 

결론적으로, 1225일은 역사의 어떤 한 날짜라기보다는 인류의 ‘어둠이 가장 깊을 때 오신 빛’이라는 상응적 표지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특정 날짜보다, 인류가 가장 어두워진 ‘’에 오신 것이지요.

 

참고로, 이 ‘어둡다’는 것은 어떤 한 시대가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해 완전히 깜깜한 상태를 말합니다. 교회 밖 세상인 로마는 그때가 가장 찬란한 시절이었지만, 정작 교회 안은 그때가 가장 어두운 때였습니다. 주님이 누구시며, 언제, 왜 오시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또 관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적으로 ‘새 교회’는 항상 이전 교회의 종말의 때에 일어납니다. 가인 계보의 라멕 때가 그랬고, 셋 계보의 라멕 때가 그랬지요. 태고 교회에서 고대 교회로, 고대 교회에서 유대 교회로, 그리고 유대 교회에서 기독 교회로 이어져 온 이 교회 시대마다 이런 종말과 일어남은 반복되었고, 그것이 주님의 오심, 곧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의 강생, 주님의 초림으로 지금 유대 교회에서 기독 교회로 새 교회 시대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지난 2천 년을 이어온 현 기독 교회는 말씀의 속뜻으로 오시는 주님의 재림으로 종말을 고하고, 지금은 이후 영원한 ‘새 교회’로 옮겨 가고 있는 중이며, 주님 초림 당시에 침례 요한을 통해 그 준비를 하셨다면, 주님 재림의 지금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그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10, 11)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신다면, 보통은 하나님은 신이시므로 그 권능과 위엄을 떠올립니다. 과거 세상을 호령한 왕과 황제들, 영웅들의 개선이 그랬으니까요. 그러나 성탄의 주님은 가장 연약한 모습, 말도 못 하는 아기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의 상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삶 안으로 실제로 들어오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참 역설적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께서 이토록 조용히, 심지어 들에서 밤에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을 상대로 참 초라하게, 그것도 여관에 빈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태어나 말 구유에 누이시다니요! 주님의 방식은 참 다릅니다. 세상 방식과 정말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주님이 부여하신 쓰임새의 삶을 살 때 주님이 일하시는 이런 방식을 반드시 따라야 하겠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경하러 오셨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 안에서 다시 시작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성육신은 인간 안에서 하늘과 땅을 다시 연결하시는 사건, 즉. 외적 역사보다 내적 탄생이며, 또한 빛은 지식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다음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탄은 ‘하늘과 땅이 다시 이어진 날’

 

천사는 말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2:11)

 

이 말씀은 단지 한 아기의 출생을 알리는 소식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끊겨가던 하늘과 인간의 연결이 다시 열렸다는 선언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기를 지은 창조주와 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어야만 존속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왜 태어났는지도 모른 채 그저 자기 잘난 맛으로 사는 줄 알지만 말입니다. 존속이란 존재를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께서는 우리를 지으신 후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늘 순간순간 존속할 수 있도록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연결되어 자신의 생명을 공급받아 살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마치 가지가 포도나무에 연결되어 있어야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창조주이신 주님과 연결된다는 것은 주님의 성품, 곧 그 신성과 연결된다는 말이며, 이는 곧 그분의 선과 진리로 연결되는 걸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세상은 그 반대인 악과 거짓으로 정반대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 세상에는, 그리고 우리 안에는 더 이상 주님의 신성이 남아있지 않게 되어 인류의 생명 유지 장치가 곧 ‘삐...’ 소리를 낼 단계까지 오게 된 것이지요.

 

이때입니다. 주님이 우리 중에 한 아기로 오신 때가 말입니다.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은 창조주이신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질락 말락 하는 순간에 그 연결을 다시 잇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를 다시 창조주의 생명으로 계속해서 살게 하시려고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이 다시 이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성탄의 빛은 ‘지식’이 아니라 ‘생명’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1:9)

 

이 빛은 머리를 밝히는 정보가 아니라, 삶을 바꾸는 빛입니다. 전자는 오용(誤用)될 경우, 세상살이에만 능하게 할 뿐이지만, 후자는 속 사람을 변화시켜 천국으로, 그래서 주님께로 인도하는 영원한 빛입니다. 그래서 성탄의 빛은 학자보다 목자에게 먼저 비쳤고, 성전보다 들판에 먼저 임한 것입니다. 주님의 빛은 많이 아는 사람보다, 살고자 하는 마음, 선해지고자 하는 작은 의지 안으로 먼저 들어옵니다. 빛이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가 결과를 초래하는, 자초하는 것입니다. 햇빛이 방안에까지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가 햇빛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직 커튼을 걷지 않았기 때문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어찌 보면 하나의 그릇입니다. 영을 몸 안에 담고 다니는 그릇, 주님을, 그리고 주님의 빛을 담고 다니는 그릇 말입니다. 다음 주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4-16)

 

우리는 생명 되신 주님을 담고 사는 생명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성탄은 ‘주님이 우리 안에 태어나시는 시작’

 

성탄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동시에 지금도 계속되는 사건입니다. 주님은 한 번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끝나신 분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 마음이 낮아질 때, 우리 삶이 주님을 모실 자리를 낼 때, 그분은 우리 안에 다시 태어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미움 대신 용서를 선택할 때, 이익보다 선을 택할 때, 진리를 알고 나서 그것을 살아내려 할 때 말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 안에서 아기로 오셨다가, 점점 주님으로 자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성탄의 비밀입니다. 구주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점점 주가 되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한테서 나오는 모든 것, 곧 사랑, 빛, 선, 생명, 말씀 안에는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탄은 하루의 절기가 아니라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주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우리가 주님을 바라만 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특별히 오늘 주님 오신 성탄절에 저희 가운데 오셔서 저희 생각을 비추시고, 저희 선택을 인도하시며, 저희 삶 안에서 저희의 주님이 되어 주세요.

 

그때 성탄은 추억이 아니라, 현재가 되고, 주님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신 구주가 되십니다.

 

성육신하신 주님의 참된 빛이 여러분의 삶 전체에 머물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

2025-12-25(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4. 2025-12-25(D5)-성탄절예배(눅2,10-11, 요1,9), ‘오늘 우리를 위하여 오신 참 빛 되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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