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37, 창4:25, ‘셋’(Seth)은 체어리티가 말미암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
여기서 ‘셋’(Seth)이 체어리티가 말미암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의 이름이 다음과 같은 이유, 곧 하나님께서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는 것 때문에 그에게 주어졌다는 사실로 설명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씨를 주셨다’(appointed another seed)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씨’(another seed)는 체어리티가 말미암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씨’(seed)가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위 AC.255번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That “Seth” here signifies a new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is explained by his name, which it is said was given him because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That God “appointed another seed” means that the Lord gave another faith; for “another seed” is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That “seed” signifies faith may be seen above (n. 255).
해설
AC.437은 ‘셋’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그의 영적 의미를 설명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에 대한 설명 속에서, 셋은 단순히 잃어버린 아들을 보충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께서 새로운 질서를 공식적으로 세우셨음을 알리는 표지입니다. 여기서 ‘대신’이라는 말은 동일한 것을 반복한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회복하신다는 뜻입니다. 곧, 주님은 아벨이라는 체어리티를 같은 자리와 같은 방식으로 되돌려놓지 않으시고, 신앙을 통해 다시 심기게 하시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죽은 아벨을 다시 살리는 것과 같은 어떤 신기한 방식으로 쉽게 이 문제를 해결하실 것 같은데 말입니다.
본문은 다른 ‘씨’(seed)가 곧 신앙임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AC.255번 글을 인용하며, 말씀에서 ‘씨’는 상응적으로 신앙을 뜻한다고 밝힙니다. 씨는 땅에 심겨 자라 열매를 맺는 시작점이듯, 신앙은 체어리티가 자라나도록 하는 영적 시작점입니다. 중요한 점은, 씨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씨는 열매를 위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씨로서의 신앙’은 체어리티를 낳기 위해 주어진 신앙입니다.
셋이 표상하는 신앙은 이전의 신앙, 곧 ‘가인’(Cain)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가인의 신앙은 스스로 목적이 되었고, 그 결과 체어리티를 제거했습니다. 반면 셋의 신앙은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목적으로 갖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AC.437은 셋을 ‘체어리티를 얻게 하는 신앙’으로 규정합니다. 이 표현은 신앙의 자리, 즉 신앙이 있어야 할 올바른 자리를 정확히 규정하는 결정적 문장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의 ‘주셨다’(appointed)라는 표현에는 주님의 주권적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새 신앙을 발명하거나 선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교회의 붕괴 속에서도 신앙의 올바른 형태를 지정하고 보존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셋의 신앙은 인간의 사상적 선택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질서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 그 자체를 표상했고, 가인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셋은 아벨의 단순한 복원판이 아닙니다. 아벨은 직접적 사랑의 상태였고, 셋은 사랑으로 이끄는 신앙의 상태입니다. 이 차이는 결정적입니다. 태고교회처럼 사랑이 곧바로 지각되던 시대가 지나간 이후, 주님은 신앙을 매개로 사랑이 형성되는 질서를 허락하셨습니다. 셋은 이 새로운 시대의 표상입니다.
신앙을 ‘씨’로 주신 이유에는 인간의 자유가 존중됩니다. 씨는 강제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토양과 돌봄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셋으로 표상된 신앙은 사람 안에 체어리티가 자발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듭니다. 이는 강요된 선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자라나는 선입니다. 주님은 이 질서를 통해 체어리티를 보다 견고하게 회복하십니다.
AC.437의 논지는 교회 역사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동일합니다. 먼저 왜곡된 신앙(가인)이 드러나고, 사랑이 상실된 아픔(아벨의 죽음)을 겪은 후, 주님은 새 신앙(셋)을 주셔서 다시 사랑이 자라게 하십니다. 이때 신앙은 중심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AC.437은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체어리티를 직접 강제로 주시지 않고, 그것을 낳을 수 있는 ‘신앙의 씨’를 다시 주신다.
셋은 이 씨의 이름이며, 교회와 인간에게 주어진 희망의 질서입니다. 신앙은 목적이 아니라 길이고, 체어리티는 그 길의 끝에 맺히는 열매입니다.
AC.436, 창4:25, '창4 전체 흐름과 결론'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 그녀가 셋이라 이름 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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