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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8, 창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AC.438-442)

bygracetistory 2025. 12. 27. 16:59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4:26)

 

AC.438

 

‘셋’(Seth)은 위에서 말했듯이 체어리티가 나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그의 ‘아들’(son)의 이름은 ‘에노스’(Enosh)인데, 체어리티를 믿음의 원리로 여긴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beginning then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는 체어리티에서 나온 그 교회의 예배를 상징합니다.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as was said above; by his “son,” whose name was “Enosh,” is signified a church which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by beginning then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해설

 

AC.438은 셋이 표상하는 것이 ‘체어리티를 얻게 하는 신앙’임을 다시 확인한 뒤, 그의 아들 에노스를 통해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이끄는 수단으로서의 신앙이라면,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해 실제로 형성된 체어리티를 중심에 둔 교회를 표상합니다. 즉, 셋은 ‘’이고, 에노스는 ‘도착’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미묘하지만 결정적입니다. 신앙이 아무리 바르다 해도 체어리티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교회의 질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에노스가 셋의 ‘아들’로 소개되는 것은, 체어리티가 신앙과 단절되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부터 합법적으로 태어난 결과임을 뜻합니다. 이는 체어리티가 신앙을 대체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제 자리를 지킬 때 자연스럽게 맺히는 열매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구조는 가인의 오류, 즉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는 상태와 정확히 반대입니다.

 

AC.438의 핵심 문구는 에노스로 표상된 교회가 체어리티를 신앙의 주된 것으로 여겼다는 진술입니다. 여기서 ‘주된 것(principal)이란 단순히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판단의 기준, 삶의 방향, 예배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에서 신앙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체어리티를 섬기는 위치에 있습니다. 진리는 사랑, 즉 체어리티를 설명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며, 체어리티 없는 진리는 더 이상 신앙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에노스 시대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표현은 단순히 기도의 시작이나 호칭의 변화를 뜻하지 않습니다. 내적 의미, 즉 속뜻으로 ‘이름’은 질과 본질을 뜻하고, ‘부른다’는 건 그 질에 따라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이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흘러나오는 예배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즉, 의무나 전통이 아니라 체어리티라는 사랑에서 우러난 예배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용례에서 ‘여호와’는 사랑과 자비의 근원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한 교회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배의 초점이 진리의 정확성보다 사랑의 실천과 자비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배의 질적 전환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변화는 예배의 외형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생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체어리티가 중심이 되면, 말씀은 논쟁의 재료가 아니라 삶의 등불이 되고, 교리는 판단의 무기가 아니라 섬김의 지침이 됩니다. 에노스로 표상된 교회는 바로 이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때를 예배의 ‘시작’으로 기록합니다. 이전에도 예배는 있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참된 의미의 예배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구조는 개인의 거듭남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배워야 하고(셋), 그 신앙을 통해 삶이 바뀌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삶의 기준이 될 때(에노스), 예배는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호흡이 됩니다. 그때 사람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 즉, 사랑의 질에 따라 살고 예배합니다.

 

AC.438은 창세기 4장의 마지막을 이렇게 봉인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낳기 위해 주어졌고, 체어리티가 중심이 될 때 비로소 예배는 살아난다.

 

셋은 이 길을 열었고, 에노스는 그 길의 목적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주된 것이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삶의 고백입니다.

 

 

 

AC.437, 창4:25, ‘셋’(Seth)은 체어리티가 말미암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 여기서 ‘셋’(Seth)이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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