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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3, 창5:5, '숫자'의 겉뜻에서 물러나기

bygracetistory 2026. 1. 6. 10:2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5:5)

 

AC.493

 

‘날’(days)과 ‘해’(years)가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숫자를 적용할 수 있는 시간과 분량(measures)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만 덧붙일 수 있는데, 이는 그것들이 자연의 최외층(the ultimates of nature, 맨 끝단)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숫자들이 적용될 때에는, 날과 해의 숫자들뿐 아니라 분량의 숫자들까지도 시간과 분량에서 추상(abstractedly), 즉 물러날 때 그 숫자가 지닌 속뜻에 따라 의미를 가집니다. 예를 들면,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이 거룩하다고 말하는 경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또 희년이 마흔아홉째 해마다 선포되고 쉰째 해에 거행되어야 했던 것, 이스라엘의 지파가 열둘이었고 주님의 사도들도 그와 같았던 것, 칠십 인의 장로들이 있었고 주님의 제자들도 그 수만큼 있었던 것, 그리고 이와 유사한 많은 경우들에서 숫자들은 그것들이 적용된 대상에서 물러나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러날 때, 숫자들의 속뜻에 의해 상태들이 의미됩니다. That by “days” and “year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needs no further explication, except to say that in the world there must needs be times and measures, to which numbers may be applied because they are in the ultimates of nature; but whenever they are applied in the Word, the numbers of the days and years, and also of the measures, have a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imes and measures, in accordance with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as where it is said that there are six days of labor, and that the seventh is holy, of which above; that the jubilee should be proclaimed every forty-ninth year, and should be celebrated in the fiftieth; that the tribes of Israel were twelve, and the apostles of the Lord the same; that there were seventy elders, and as many disciples of the Lord; and so in many other instances where the numbers have a special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hings to which they are applied; and when thus abstracted, then it is states that are signified by the number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days)과 ‘(years)가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더 이상 반복해서 증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말하며, 논의를 한 단계 더 깊은 곳으로 옮깁니다. 이제 질문은 ‘왜 성경이 굳이 숫자를 사용하는가’로 이동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자연의 최외층(the ultimates of nature, 맨 끝단), 곧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시간과 분량(measures), 그리고 숫자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고하기 때문에, 말씀도 그 틀을 빌려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성경이 숫자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 숫자가 세속적 계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말씀 안에서 숫자는 시간과 분량에서 ‘추상(abstractedly), 즉 물러납니다. 다시 말해, 숫자는 그것이 적용된 외적 대상과 분리되어, ‘그 자체의 의미’를 드러내는 표지가 됩니다. 날과 해, 길이와 무게는 외적 형식일 뿐이며,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의 많은 제도와 규례는 이해 불가능한 부담으로 남게 됩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문자 그대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노동 규칙이나 휴식 제도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숫자들이 상태를 향해 물러날 때, 여섯은 준비와 수고의 상태를, 일곱은 완성과 거룩의 상태를 의미하게 됩니다. 그러면 안식일은 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완성된 상태’를 가리키는 표지가 됩니다.

 

희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흔아홉 해마다 선포되고 쉰째 해에 거행되는 희년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고대 사회의 독특한 사회 제도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숫자들이 물러날 때, 희년은 해방과 회복, 곧 교회 상태의 새출발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연도가 아니라, ‘회복의 상태가 도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희년은 숫자로 기억되지만, 그 본질은 상태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주님의 열두 사도 역시 같은 원리로 이해됩니다. 이 숫자는 우연이나 행정적 편의의 결과가 아닙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교회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지파의 수와 사도의 수가 같다는 것은, 구약과 신약의 교회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질서 위에 서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수가 아니라, ‘교회 상태의 완전성’입니다.

 

칠십 장로와 칠십 제자의 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숫자는 충만함과 확장을 의미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장로들이든 제자들이든, 그 숫자가 말하는 것은 조직의 규모가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사역의 범위와 충만함입니다. 숫자는 그 사역의 성격을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처럼 성경 전반에서 숫자가 적용된 많은 사례들을 열거하며, 공통된 원리를 분명히 합니다. 숫자는 외적으로는 시간과 분량에 붙어있지만, 내적으로는 언제나 상태를 의미합니다. 숫자가 대상에서 물러날 때, 비로소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깊이가 드러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은 끝없는 규칙과 계산의 집합으로 오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원리는 창세기 5장의 족보를 읽는 데 결정적인 기준을 제공합니다. 그곳에 나오는 날과 해, 그리고 수백 년에 이르는 숫자들은 인간의 수명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어떤 상태를 거쳐 왔는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숫자는 그 상태들의 질서와 흐름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표시한 기호입니다.

 

결국 AC.493은 성경을 읽는 우리의 시선을 다시 한번 교정합니다. 성경의 숫자를 볼 때, 우리는 ‘얼마나 오래’라는 질문보다 ‘어떤 상태로 지속’이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합니다. 그럴 때 숫자는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니라, ‘말씀의 깊이를 여는 열쇠’가 됩니다. 숫자가 시간과 분량에서 물러날 때, 성경은 비로소 살아 있는 영적 언어로 우리 앞에 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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