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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3, 창5:9, ‘태고교회 퍼셉션 능력의 비밀’

bygracetistory 2026. 1. 8. 11:3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선을 행함으로부터 생겨나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선행의 행복과 기쁨이 없이는 퍼셉션 능력은 생명을 가지지 못하며, 이러한 행복과 기쁨에 의해 그것은 생명을 받습니다. 태고교회가 누렸던 사랑의 생명과 그로부터 나온 신앙의 생명은, 쓰임새(use)를 행하는 가운데 있는 생명, 곧 쓰임새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생명이었습니다. 생명은 쓰임새로부터, 쓰임새에 의해, 그리고 쓰임새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며, 무익한 것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는데, 무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버려지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태고의 사람들은 주님을 닮은 사람들이었고, 그러므로 퍼셉션 능력에 있어서 주님의 형상이 되었습니다. 퍼셉션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는 데에 있으며, 따라서 무엇이 신앙에 속하는지를 아는 데에 있습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지 않고,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에서, 곧 유용한 사람, 쓰임새의 사람이 되는 데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consisted not only in 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but also in the happiness and delight arising from well doing; without such happiness and delight in doing what is good the perceptive faculty has no life, but by virtue of such happiness and delight it receives life. The life of love, and of the derivative faith, such as the most ancient church enjoyed, is life while in the performance of use, that is, in the good and truth of use: from use, by use, and according to use, is life given by the Lord; there can be no life in what is useless, for whatever is useless is cast away. In this respect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likenesses of the Lord, and therefore in perceptive powers they became images of him. The perceptive power consists in knowing what is good and true, consequently what is of faith: he who is in love is not delighted in knowing, but in doing what is good and true, that is, in being useful.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왜 ‘살아 있는 퍼셉션’이었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핵심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단순히 ‘옳고 그름을 아는 능력’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선과 진리를 아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행할 때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행복과 기쁨을 포함하는 능력’입니다. 이 기쁨이 빠진 퍼셉션은, 겉모습은 남아 있을지라도 생명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하나 일어납니다. 퍼셉션의 생명은 ‘’ 자체에 있지 않고, ‘행함에서 느끼는 기쁨’에 있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선을 행하는 데서 오는 행복과 기쁨이 없으면, 퍼셉션 능력에는 생명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는 지식 중심 신앙에 대한 매우 강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무리 정확히 알아도, 그것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앎은 생명을 잃은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생명을 ‘쓰임새를 행하는 가운데 있는 생명’이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쓰임새(use)는 단순한 기능 수행이나 사회적 역할을 뜻하지 않습니다. 쓰임새는 ‘사랑에서 비롯되어 타인을 향해 흘러가는 선과 진리의 실제적인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선을 행하는 것이 의무가 아닌, 자신의 생명이었기 때문에 행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 자체가 쓰임새였고, 그 쓰임새 안에서 생명을 느꼈습니다.

 

이 글은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생명은 쓰임새로부터, 쓰임새에 의해, 그리고 쓰임새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원리입니다. 이는 생명이 어떤 정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관계와 작용 속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뜻합니다. 생명은 저장해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흘러갈 때 유지됩니다. 그래서 무익한 것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무익한 것은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결국 버려집니다. 마치 고인 물은 썩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점에서 태고의 사람들은 주님의 닮음들, 즉 주님을 닮은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은 끊임없이 쓰임새로 흘러갑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도 사랑 안에서 살며, 그 사랑을 쓰임새로 드러냈기 때문에, 주님의 닮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닮음 때문에, 퍼셉션의 능력에 있어서 주님의 형상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퍼셉션은 추상적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 방식에 참여한 결과’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의 능력을 다시 정의합니다. 퍼셉션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는 능력이며, 따라서 무엇이 신앙에 속하는지를 아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는 말은 개념적으로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현실로 분별하고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이 분별은 사랑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지 않고,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에서 기쁨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지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에게 앎은 행함을 위해 존재하며, 행함이 곧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바로 퍼셉션의 생명입니다.

 

이 글은 오늘날 신앙의 상태를 매우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로 평가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전혀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진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가, 아니면 그저 아는 데서 만족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후자의 경우, 퍼셉션은 이미 생명을 잃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봉사와 사역에 대한 이해도 바로잡아줍니다. 쓰임새는 억지로 감당해야 할 짐이 아니라, ‘사랑이 살아 있을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생명의 표현’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쓰임새를 통해 지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안에서 행복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퍼셉션의 교회가 지녔던 독특한 생명력입니다.

 

결국 AC.503은 퍼셉션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게 합니다. 퍼셉션은 선과 진리를 아는 능력이되, 그 생명은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서 오는 기쁨에 있습니다. 이 기쁨이 살아 있을 때, 퍼셉션은 살아 있고,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이 기쁨이 사라질 때, 퍼셉션은 점차 어두워지고, 마침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 통찰은 태고교회의 이해를 넘어, 오늘 우리의 신앙과 사역을 깊이 점검하게 만드는 기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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