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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저작에서 교회 음악과 찬양에 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

bygracetistory 2026. 1. 18. 17:09

개신교를 비롯, 전체 기독교에서는 예배와 생활 속에서 교회 음악과 찬양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스베덴보리 저작을 보면 상대적으로 언급이 적은 것 같아요. 왜 그런 건가요?

 

 

1. 문제 제기의 출발점: ‘왜 스베덴보리에게서 찬양과 음악은 조용한가

 

개신교를 포함한 현대 기독교의 예배를 떠올리면, 음악과 찬양은 거의 예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설교보다 찬양 시간이 더 길고, 예배의 성패가 ‘찬양의 은혜로움’에 의해 평가되기도 합니다. 신앙 간증 역시 ‘찬양 중에 울었다’, ‘찬양하다가 은혜를 받았다’는 표현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풍경에 익숙한 눈으로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펼치면, 자연히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 이렇게 찬양 이야기가 적은가’, ‘왜 교회 음악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보았는지를 정확히 겨누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음악을 몰랐거나, 예술을 무시했거나, 혹은 감성이 메마른 신학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신학 전체가 애초에 외적 예배 요소를 중심에 두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스베덴보리는 ‘찬양 없는 메마른 신학자’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해하고 나면, 오히려 오늘날 교회의 예배 구조가 얼마나 ‘외적 형식’에 무게를 두고 있는지를 거꾸로 성찰하게 됩니다.

 

 

2.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심축: ‘예배란 무엇인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에게서 ‘예배’는 특정 시간, 특정 공간, 특정 형식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의 저작 전반에서 예배는 ‘삶 전체의 방향’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의지와 이해가 주님을 향해 정렬된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예배는 행위가 아니라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있을 때, 말과 행동과 의식이 뒤따르는 것이지, 반대로 의식을 행한다고 해서 그 상태가 자동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음악과 찬양은 예배의 본질이 아니라 예배의 ‘표현 양식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는 외적 예배 행위를 평가할 때 항상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이것이 그 사람 안의 사랑과 진리의 결합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단지 습관, 문화, 감정의 산물인가’. 이 질문 앞에서 음악은 특권을 갖지 않습니다. 찬송이든 기도든 설교든, 모두 동일한 기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는 예배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분석하거나, 어떤 형식이 더 좋다고 제안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문제, 곧 ‘사람 안에 무엇이 살아 있는가’를 묻습니다. 이 질문에 비하면, 음악의 비중은 자연히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3. 찬양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급진적 전환

 

현대 교회 문화에서 찬양은 종종 ‘영적 변화를 일으키는 수단’으로 이해됩니다. 찬양을 하면 마음이 열리고, 은혜가 임하고, 성령이 역사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배 초반에 찬양으로 분위기를 만들고, 사람들의 감정을 끌어올린 뒤, 그 상태에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이 구조는 너무 익숙해서 의심조차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시각에서 보면, 이 구조는 순서가 뒤집혀 있습니다. 그는 일관되게 말합니다. ‘내적 상태가 먼저 있고, 외적 표현은 그 다음에 온다’. 참된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될 때, 그 상태가 자연스럽게 말과 행동과 심지어 노래로까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노래가 상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태가 노래를 낳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찬양은 결코 무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찬양은 매우 중요한 ‘지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측정 도구’이지 ‘발전 장치’가 아닙니다. 찬양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라는 사실은, 그 찬양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적 상태가 실제로 존재할 때에만 영적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자연적 감정의 울림일 뿐입니다.

 

 

4. 천국의 음악과 지상의 교회 음악의 본질적 차이

 

혹시 스베덴보리가 음악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는 천국에서의 소리와 노래, 말의 리듬과 조화에 대해 매우 인상적인 묘사를 남겼습니다. 다만, 그가 말하는 천국의 음악은 우리가 생각하는 ‘연주되는 음악’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천국에서는 사랑과 진리의 상태가 곧 소리로 드러납니다. 천사들이 말할 때, 그 말에는 이미 음악성이 깃들어 있으며, 그 울림은 그들의 내적 상태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거기에는 연습도 없고, 연출도 없고, 감정을 유도하려는 의도도 없습니다. 상태가 곧 소리이고, 소리가 곧 상태입니다.

 

이와 비교하면, 지상의 교회 음악은 필연적으로 ‘기술과 연출과 반복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 자체가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동일 선상에 놓지 않습니다. 그는 천국의 음악을 설명하기 위해 지상의 찬양을 끌어오지 않고, 오히려 지상의 찬양이 얼마나 쉽게 천국의 것을 ‘흉내만 낼 수 있는지’를 경계합니다.

 

 

5. 감정의 문제: ‘울림변화는 다르다

 

스베덴보리가 교회 음악을 다룰 때 조심스러운 또 하나의 이유는, 인간이 ‘자연적 감정’과 ‘영적 상태’를 매우 쉽게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음악은 그 자체로 인간의 감정을 강하게 자극합니다. 조율된 화음, 반복되는 후렴, 점점 고조되는 리듬은 누구에게나 눈물과 전율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반응은 반드시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감정의 고양이 곧 영적 상태의 증거가 되는 것을 강하게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감정은 삶을 바꾸지 않고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을 나서는 순간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다면, 그 감동은 영적이라기보다 심리적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묻습니다. ‘그 찬양 이후에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있었는가’, ‘악을 멀리하고 선을 선택하는 힘이 생겼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찬양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의 신학에서는 중심에 설 수 없습니다.

 

 

6. 말씀의 이해가 찬양보다 앞서는 이유

 

스베덴보리 저작이 음악보다 압도적으로 ‘말씀의 구조와 의미’에 집중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분명해집니다. 그는 사람의 내적 상태가 변하는 유일한 길은, 말씀을 이해하고, 그 이해에 따라 삶을 개혁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찬양은 이 과정을 보조할 수는 있지만,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채 부르는 찬양은, 진리 없는 열심에 가깝습니다. 반대로, 말씀을 이해하고 그 의미가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일 때, 굳이 많은 찬양이 없어도 그 삶 자체가 예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예배는 ‘주일의 음악적 행사’가 아니라, ‘매일의 선택과 행동’입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은 자연히 음악을 분석하기보다는, 말씀의 속뜻, 상응, 내적 논리, 인간 정신의 구조를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이것이 그의 신학이 ‘차갑다’고 느껴질 수 있는 이유이지만, 동시에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7. 맺음말: 침묵은 부정이 아니라 방향 설정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교회 음악과 찬양의 언급이 적은 것은 결핍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신앙의 중심을 ‘느낌’이 아니라 ‘상태’, ‘형식’이 아니라 ‘’, ‘행위’가 아니라 ‘사람 그 자체’에 두었습니다. 음악은 그 전체 구조 속에서 자연히 자리를 찾을 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를 깊이 읽을수록, 우리는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찬양을 통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내가 말하는 은혜는 삶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예배의 중심이 정말 주님과 말씀인가, 아니면 나의 감정인가’.

 

이 질문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음악에 대해 말하지 않음으로써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2026-01-18(D1)

 

 

 

스베덴보리 버전 장례 설교

아래는 ‘죽음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실제 상태’를 조용히 밝혀 주는 설교입니다. 2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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