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스베덴보리 with ChatGPT

오늘날 기독교, 개신교의 금식 기도와 방언에 대하여

bygracetistory 2026. 1. 19. 09:27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금식 기도를 비롯, 각종 기도와 방언에 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

 

 

1. 문제 제기의 출발점 : 왜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열심의 표지가 잘 보이지 않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깊이를 가늠할 때, 자연스럽게 몇 가지 외적 표지를 떠올립니다. 금식을 하는가, 얼마나 자주 기도하는가, 기도할 때 눈물과 통곡이 있는가, 방언이나 특별한 영적 체험이 있는가 같은 것들입니다. 실제로 교회사 속에서도 이런 요소들은 경건과 헌신의 징표처럼 받아들여져 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그런데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다 보면, 이런 기대가 자주 어긋납니다. 그는 금식 기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도 않고, 기도의 방법론을 제시하지도 않으며, 방언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랑’, ‘진리’, ‘’, ‘의지’, ‘지각’ 같은 단어들을 집요할 정도로 반복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개인적 취향이나 시대적 한계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베덴보리가 ‘신앙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앙을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로 보지 않고, ‘어떤 존재 상태로 살아가느냐’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이 출발점의 차이가, 금식, 기도, 방언에 대한 그의 침묵을 만들어 냅니다.

 

 

2. 금식 기도 : 행위가 아니라 상태의 문제

 

성경에서 금식은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모세, 엘리야, 다니엘, 그리고 주님 자신도 금식하셨습니다. 이런 본문들 때문에 많은 신자들은 금식을 ‘영적 능력을 끌어올리는 특별한 행위’로 이해해 왔습니다. 일정 기간 음식을 끊고 기도하면, 하늘의 문이 더 잘 열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은 전혀 다릅니다. 그에게 금식은 결코 ‘음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음식은 단지 외적 상응일 뿐이며, 금식의 실제 내용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절제하는 내적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입이 음식을 끊었는가가 아니라, ‘의지가 무엇을 끊었는가’가 핵심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며칠씩 금식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자기 의를 붙들고 있고, 타인을 정죄하며, 자신이 더 거룩해졌다고 느낀다면, 그 금식은 영적으로는 오히려 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금식은 자아를 낮추는 대신, 자아를 더 강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금식을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금식을 ‘신앙의 중심 자리에 두지 않습니다’. 참된 금식은 매일의 삶 속에서, 악을 악으로 보고 그것을 거절하는 지속적인 내적 선택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초점의 이동’입니다.

 

 

3. 기도 일반 : 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향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인간과 주님 사이의 연결을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 연결은 기도의 ‘기술’이나 ‘강도’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에 따르면, 기도의 본질은 언제나 그 사람의 삶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진리대로 살고, 선을 의지에서 선택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내면은 이미 하늘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짧은 기도, 혹은 말없는 탄식조차도 천국에서는 분명한 의미를 지닌 언어로 받아들여집니다.

 

반대로, 삶은 변하지 않은 채 기도만 늘어난다면, 그 기도는 소리로는 크지만 영적으로는 공허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을 경계합니다. 그래서 그는 통성 기도냐 묵상 기도냐, 중보 기도냐 개인 기도냐 같은 구분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런 구분은 외적 형식의 차이일 뿐, 기도의 실체를 결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질문은 언제나 이것입니다. ‘이 기도가 그 사람을 더 겸손하게 만드는가?’, ‘이 기도가 그 사람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면, 그 기도는 형식이 무엇이든 참됩니다.

 

 

4. 방언 : 영적 언어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

 

방언 문제는 특히 민감합니다. 많은 교회에서 방언은 성령의 임재를 보여 주는 강력한 표지로 여겨져 왔고, 어떤 공동체에서는 방언 경험이 사실상 신앙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잣대처럼 작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영적 세계의 언어를 실제로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천사들의 언어를 듣고, 그 의미를 이해하며, 그 구조를 설명했습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천사의 언어는 결코 무질서하지 않으며, 의미 없는 소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과 진리의 상태가 즉각적으로 의미로 전달되는, 매우 정합적이고 질서 있는 언어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말하는 본인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음성 발화가 ‘고등한 영적 상태’의 증거라는 주장은, 스베덴보리에게 설득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는 그런 현상을 전면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구원의 기준이나 교회의 중심 표지로 삼는 것’에는 분명한 거리를 둡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결과입니다. 방언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 이후에 그 사람이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더 진리 안에서 살게 되었는가, 더 이웃을 품게 되었는가가 기준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현상은 영적으로 중립적이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하위 영역의 영향일 수도 있습니다.

 

 

5. 왜 이런 주제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조용했는가

 

여기서 핵심 질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이런 주제들에 대해 체계적인 설명이나 강조를 남기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그의 사명이 ‘신앙 실천 매뉴얼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명은, 인간이 영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사랑과 진리가 어떻게 사람 안으로 들어오고, 어떻게 왜곡되며, 어떻게 다시 회복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방법’을 가르치기보다, ‘분별의 기준’을 남겼습니다.

 

금식, 기도, 방언, 찬양은 모두 시대와 문화에 따라 형태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진리의 구조는 변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변하지 않는 구조를 남기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적 열심을 조직하거나 장려하지 않고, 그것들이 참된지 거짓된지를 가려낼 수 있는 ‘내적 잣대’를 제공했습니다.

 

 

6.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깊은 도전

 

이 모든 논의는 오늘 우리에게 매우 현실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신앙의 중심에 두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금식과 기도가 많아질수록, 방언과 감정적 고양이 강해질수록, 우리는 더 신앙적인 사람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더 미묘한 자기만족에 빠지고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우리에게 금식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말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방언을 무조건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는 끊임없이 이렇게 묻습니다. ‘그 모든 것이 너를 더 사랑하게 만들고 있는가?’, ‘그 모든 것이 너를 더 겸손하게 만들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그는 일부러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 오늘의 교회와 신자들이 스스로 답해야 할 깊은 숙제를 남겼습니다.

 

 

7. 맺음말 : 외적 열심을 넘어 내적 실재로

 

결국 스베덴보리가 금식 기도와 각종 기도, 방언에 대해 강조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어떤 사랑 안에 살고 있는가, 어떤 진리를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의 저작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그는 우리가 붙들고 싶은 외적 확신의 표지들을 하나씩 내려놓게 하고, 대신 삶 전체를 신앙의 자리로 끌어오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침묵은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 개신교 예배 음악, 찬양에 대하여

개신교를 비롯, 전체 기독교에서는 예배와 생활 속에서 교회 음악과 찬양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스베덴보리 저작을 보면 상대적으로 언급이 적은 것 같아요. 왜 그런 건가요? 1. 문제 제기의

bygrac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