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 창1 개요, '세 번째 상태'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는데, 그가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걸로 여기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선들을 ‘풀’(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라 하고, 나중에는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라고 합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These goods are called the “tender grass,” and also the “herb yielding seed,” and afterwards the “tree bearing fruit.”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state)를 ‘회개의 상태’로 규정하며, 인간의 내적 변화가 처음으로 의식적 삶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는 단계를 설명합니다. 앞선 두 상태에서 사람은 아직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고, 주님의 자비가 어둠 위에서 운행하거나, 주님께 속한 것과 자기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상태에 이르면,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삶과 말, 행동에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며, 이것이 회개라는 이름으로 드러납니다.
이 회개는 겉 사람의 형식적 변화가 아니라, ‘속 사람’(internal man)에서 비롯된 반응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이 단계에서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말하며, 신앙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이전과는 다른 삶의 태도를 보입니다. 또한 실제로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한 일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거듭남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진전이며, 신앙이 단지 생각이나 감정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선들을 ‘생기 없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여전히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선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결심, 자신의 경건,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로 인해 이 단계의 선은 참된 영적 생명을 갖지 못하며, 아직은 자연적 차원의 선에 머뭅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평가가 아니라, 선의 근원에 대한 인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선을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 1장 11절의 식물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먼저 ‘풀’(tender grass)입니다. 이 풀은 막 돋아난 초기의 선을 가리키며, 매우 연약하고 쉽게 상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회개 초기에 나타나는 선의 특징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다음으로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는 이 선 안에 진리의 씨앗이 들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비록 아직 생기는 없지만, 이후에 성장할 가능성과 번식의 능력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마지막으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는 이 초기적 선이 장차 성숙하여 지속적이고 안정된 선으로 발전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비유는 회개의 상태가 단번에 완성되는 단계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은 회개를 시작했다고 해서 곧바로 참된 영적 선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주님은 이 단계에서 나타나는 미숙한 선조차도 소중히 여기시며, 그것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보호하시며 자라게 하십니다. 이는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불완전함을 고려하여 단계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또한 이 단락은 인간의 협력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세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실제로 선을 행하며, 말과 행동에서 책임 있는 주체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아직 선의 근원을 오해하고 있으며, 이 오해가 바로 다음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지점입니다. 이 때문에 이 상태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위험을 내포한 단계입니다. 사람이 이 선을 자기 의로 고착시키면 더 나아가지 못하지만, 주님의 인도에 따라 이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배우게 되면, 이후의 깊은 변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AC.9에서 말하는 회개의 상태는 거듭남의 여정에서 최초로 인간의 삶이 눈에 띄게 변하는 시점이지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한 단계입니다. 이 상태의 선은 생기가 없으나, 성장할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연한 풀을 자라게 하시고, 씨를 맺게 하시며, 마침내 열매를 맺는 나무로 이끄시기 위해 다음 단계들을 준비하십니다. 그래서 세 번째 상태는 인간의 진지한 응답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단계이자, 주님의 더 깊은 역사가 이어지기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됩니다.
심화
1. ‘회개(repentance)의 상태’
AC.9의 ‘회개(repentance)의 상태’라는 표현을 설명해 주세요. 이어지는 내용인,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는데, 그가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걸로 여기기 때문이지요.’에서 갑자기 ‘회개’(repentance)라는 용어가 나오는 게 좀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비약에 가깝다 느껴지는데요... 뭐랄까... 그 정도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정도지 무슨 회개할 정도로 죄를 진 건가 싶어서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갑작스러움’은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현대 한국어에서 ‘회개’라는 단어는 보통 ‘큰 죄를 뉘우치는 사건’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9에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repentance’는 그런 의미보다 훨씬 ‘구조적이고 영적 과정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그래서 그 맥락을 조금 풀어 보면 비약처럼 보이던 부분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서 ‘회개’는 단순히 ‘죄를 후회한다’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는 여러 저작에서 회개를 ‘자신의 삶을 살펴보고, 악을 인식하고, 그것을 버리기 시작하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즉 회개는 사건이라기보다 ‘상태’(state)입니다. 사람이 자기 삶을 돌아보고 ‘내 안에는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나온 것이 많구나’ 하고 깨닫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AC.9의 ‘repentance의 상태’는 ‘죄를 크게 저질러서 울며 회개하는 순간’이 아니라 ‘자기 중심성의 문제를 처음 의식하기 시작하는 영적 단계’입니다.
이제 AC.9의 문장과 연결해 보겠습니다. 그 글에서는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한 말과 체어리티의 행위를 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아직 ‘생기’(life)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그 사람이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선을 행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 이렇게 선하게 행동했다’는 자기중심적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한 미숙함을 넘어 ‘거듭남이 아직 완전히 시작되지 않았다는 표지’입니다.
여기서 ‘회개’가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선한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공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가면 그 사람은 점차 깨닫기 시작합니다. ‘내가 하는 선이 사실은 내 힘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구나.’ ‘내 안에는 여전히 자기 사랑이 강하구나.’ 이런 인식이 생기면, 그때부터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는 방향으로 마음이 움직입니다. 바로 이 전환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AC.9의 흐름을 거듭남 단계로 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진리와 선을 알기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경건한 말과 선한 행동도 어느 정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자기 공로의 한계를 깨닫는 단계’, 즉 회개의 상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회개는 ‘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선의 한계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래도 선한 행동을 하는데 왜 회개까지?’라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기준에서는 선한 행동의 외형보다 ‘그 출처가 어디냐’가 더 중요합니다.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믿는 한, 그것은 아직 완전히 살아 있는 선이 아닙니다. 그 선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생명이 들어옵니다. 그 전환의 문턱이 바로 ‘회개의 상태’입니다.
처음 신앙을 시작하면 사람은 선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점점 깨닫습니다. ‘내가 선을 행하려 해도 내 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구나.’ 바로 그 깨달음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죄인의 절망이라기보다 ‘자기 중심성에서 주님 중심으로 방향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AC.9의 ‘repentance’는 죄책감의 폭발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거듭남의 구조 안에서 나타나는 자기 인식의 단계’라고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렇게 보면 그 표현은 갑작스러운 비약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앞 문장과 정확히 연결된 설명이 됩니다.
2.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
체어리티(charity)를 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 영어 ‘charity’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참 그런 게, 우리말 어떤 하나의 표현으로 옮기는 순간, 그것 말고도 가지고 있는 다른 많은 뉘앙스들을 다 놓치는 것 같아요...
목사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한국어 한 단어로 옮기기 가장 어려운 단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선’, ‘사랑’, ‘인애’, ‘선행’, ‘이웃 사랑’ 어느 하나로 번역해도 항상 뭔가 빠집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개념을 먼저 분명히 이해하고, 번역은 문맥에 따라 유연하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charity’의 가장 기본적인 뜻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 삶 속에서 실제 행동으로 나타난 상태’입니다. 즉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행동의 방향’입니다. 그는 자주 ‘love to the Lord’와 ‘charity toward the neighbor’를 함께 말합니다. 전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고, 후자는 그 사랑이 사람들 사이의 삶으로 흘러나오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charity는 사랑의 감정이라기보다 ‘사랑이 삶 속에서 작동하는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charity는 ‘자선 행위’보다 훨씬 넓은 개념입니다. 현대 영어에서 charity라고 하면 흔히 가난한 사람을 돕는 자선 활동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charity를 그렇게 좁게 보지 않습니다. 그는 charity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는 의지와 그에 따른 삶 전체’로 이해합니다. 즉 정직하게 일하는 것,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 남을 해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의 유익을 고려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이 charity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이 점 때문에 한국어 번역이 어려워집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너무 좁아지고, ‘사랑’이라고 하면 감정 중심으로 들리고, ‘선행’이라고 하면 도덕적 행위 정도로 축소됩니다. 그래서 많은 번역자들이 ‘이웃 사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비교적 좋은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자신이 charity를 설명할 때 거의 항상 ‘이웃(neighbor)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charity는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그는 charity를 ‘진리(truth)에 의해 인도되는 선(good)’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무엇이 진짜로 이웃에게 유익한지 분별하면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이 항상 charity는 아닙니다. 때로는 그것이 그 사람을 더 해롭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charity는 감정적 친절이 아니라 ‘지혜와 결합된 선한 의지’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charity가 ‘삶의 중심 원리’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그 사람이 믿는 교리보다 ‘그가 어떤 사랑으로 살고 있는가’로 판단합니다. 그 사랑이 이웃의 선을 향하고 있다면 그는 charity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faith without charity’는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charity 안에서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charity는 ‘남을 불쌍히 여겨 돕는 마음’보다 훨씬 넓습니다. 그것은 ‘이웃의 선을 진심으로 바라며 그를 위해 옳은 일을 하려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태도는 작은 일들 속에서 나타납니다. 정직하게 일하는 것, 공정하게 행동하는 것,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것,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이 charity입니다.
그래서 번역할 때는 한 단어에 너무 묶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문맥에서는 ‘이웃 사랑’이 가장 자연스럽고, 어떤 곳에서는 ‘선행’, ‘선한 삶’, ‘이웃을 위한 사랑’, 또는 ‘이웃을 향한 선’이라고 풀어 번역하는 것이 오히려 의미를 더 잘 전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charity는 하나의 단어라기보다 ‘삶의 방향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charity는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이웃의 선을 바라며 그 선을 위해 살려는 의지와 삶 전체’입니다. 감정이 아니라 삶의 질서이고, 순간적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인 상태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charity 안에서 신앙이 살아 움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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