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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은 하나’

bygracetistory 2026. 3. 17. 12:20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4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수 없는데, 이는 둘이 하나요, 동일한 것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광명체들(luminaries)을 언급하실 때, 그것들을 하나로 간주,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라고 라틴어 단수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주님의 허락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한테서 오는 그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는데,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속에 있어, 하늘의 뜰 첫 문턱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다시 물러납니다. 이들 가운데는 주님의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자기는 주님을 믿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시기를, Love and faith admit of no separation, because they constitute one and the same thing; and therefore when mention is first made of “luminaries” they are regarded as one, and it is said, “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Concerning this circumstance it is permitted me to relate the following wonderful particulars. The celestial angels, by virtue of the celestial love in which they are from the Lord, are from that love in all the knowledges of faith, 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But, on the other hand, spirits who are in the knowledge of the doctrinals of faith, without love, are in such a coldness of life and obscurity of light that they cannot even approach the first threshold of the court of the heavens, but flee back again. Some of them, while not living according to his precepts, say that they have believed in the Lord, and it was of such that the Lord said in Matthew: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1, 22, 끝까지) Not everyone that saith unto me, Lord, Lord, shall enter into the kingdom of the heavens, but he that doeth my will: many will say to me in that day, Lord, Lord, have we not prophesied through thy name (Matt. 7:21–22, to the end).

 

[2]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신앙 안에도 있으며, 그렇게 해서 천적 생명 안에 있지만, 자기는 신앙이 있다 말하면서도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은 겨울철 햇빛과 같아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모든 것이 얼어붙어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반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철 햇볕과 같아, 태양의 열로 인해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합니다.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도 정확히 이와 같은데, 이런 것들은 보통 말씀에서 세상과 땅 위에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또한 신앙이 전혀 없는 상태와 사랑 없는 신앙은, 주님께서 세대의 종말을 예고하시면서 겨울(winter)에 비유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Hence it is evident that those who are in love are also in faith, and thereby in heavenly life, but not those who say they are in faith, and are not in the life of love. The life of faith without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without heat, as in the time of winter, when nothing grows, but all things are torpid and dead; whereas faith proceeding from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in the time of spring, when all things grow and flourish in consequence of the sun’s fructifying heat. It is precisely similar in regard to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which are usually represented in the Word by such as exist in the world and on the face of the earth. No faith and faith without love are also compared by the Lord to “winter,” where he foretell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in Mark:

 

18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13:18, 19) Pray ye that your flight be not in the winter, for those shall be days of affliction (Mark 13:18–19).

 

여기서 (flight)은 마지막 때를 뜻하며, 또한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합니다.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이고, ‘환난의 날(day of affliction)은 저세상에서의 그 비참한 상태를 말합니다. Flight” means the last time, and also that of every man when he dies. “Winter” is a life destitute of love; the “day of affliction” is its miserable state in the other life.

 

 

해설

 

이 글은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가장 단호하고도 경험적으로 확증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이 단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처음 ‘광명체들’이 언급될 때, 복수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실재처럼 단수로 다루어집니다.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수 없는, 한 생명의 두 작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리를 단순한 논증으로 제시하지 않고, 영계에서 직접 본 경험을 통해 설명합니다.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그 사랑 자체로 인해 신앙의 모든 지식 안에 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신앙을 따로 배우거나 점검하지 않아도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진리를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너무도 충만해서 인간의 언어로는 거의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사랑 없이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의 상태는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그들은 생명이 차갑고, 빛이 어두워서 하늘의 문턱에도 접근하지 못합니다. 이는 신앙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방향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지식의 시험장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 안에 있는 곳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엄중한 말씀을 인용합니다. 주님을 입으로 부르고, 심지어 예언과 종교적 활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조차 사랑의 삶이 없으면 하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는 신앙의 내용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 그 신앙과 결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믿었다는 고백보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는가’를 기준으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결론을 명확히 합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신앙 안에도 있으며, 그로써 천적 생명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다 말하면서도 정작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 생명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이 차이는 자연의 비유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겨울철 햇빛과 같습니다. 빛은 있지만 열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자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굳어 있고, 생명은 잠든 상태가 아니라 사실상 죽어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온 신앙은 봄철 햇볕과 같습니다. 빛과 열이 함께 작용하여, 모든 것이 살아나고 자라며 열매를 맺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비유가 단순한 설명을 넘어 말씀의 보편적 표현 방식임을 강조합니다.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은 늘 자연의 질서로 표현됩니다. 왜냐하면 자연 세계의 질서 자체가 영적 질서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겨울’에 도망하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은, 이 글의 의미를 개인의 마지막 순간까지 확장합니다. ‘’(flight, 비행, 도피, 휴거)은 세상의 끝일 뿐 아니라 각 사람이 죽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을 뜻합니다. 사랑 없는 상태, 곧 겨울 같은 삶으로 그 순간을 맞이하는 것은, 저세상에서 매우 비참한 상태로 이어집니다.

 

AC.34는 신앙의 진위를 가르는 가장 분명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신앙은 말로 증명되지 않고, 지식으로도 증명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의 삶 안에서만, 신앙은 살아 있는 빛이 됩니다.

 

 

심화

 

1.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

 

AC.34본문,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말인데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어떤 묘사가 좀 가능할까요? 저렇게만 말하면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해서요...

 

AC.34에서 스베덴보리가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이것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언어가 영적 상태를 충분히 담아내기 어려운 한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혀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도 다른 저작들, 특히 ‘천국과 지옥’이나 ‘천적 사랑과 지혜’ 같은 곳에서 그 상태를 여러 방식으로 묘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조각들을 모아 보면 어느 정도의 윤곽은 그려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그 상태의 핵심은 ‘사랑과 진리가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사는 보통의 상태에서는 마음이 자주 둘로 나뉩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것을 하기 싫을 때가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따라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해와 의지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그 상태에서는 이런 분열이 거의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곧 진리이고, 진리를 아는 것이 곧 기쁨이 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생각과 의지 사이에 갈등이 거의 없고, 사람 안에 매우 깊은 평안이 생깁니다.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지성의 빛이 매우 투명하고 즉각적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이해하려면 보통 여러 단계의 사고가 필요합니다. 책을 읽고, 비교하고, 추론하고, 다시 생각하고... 이런 과정을 거쳐야 조금씩 이해가 깊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적 상태에 가까운 사람이나 천적 천사들의 경우에는 진리가 이런 식으로 분석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한 번에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합니다. 마치 햇빛이 비치면 사물이 한순간에 환히 보이는 것처럼, 진리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지성의 빛(light of intelligence)이라고 부릅니다.

 

이 상태의 또 다른 특징은 ‘기쁨이 매우 깊고 평화로운 성격을 가진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기쁨은 종종 긴장이나 흥분과 함께 옵니다. 성공했을 때의 기쁨이나 경쟁에서 이겼을 때의 기쁨은 순간적으로 강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적 상태의 기쁨은 그런 종류가 아니라 ‘조용하고 깊은 기쁨’입니다. 마치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평안과 같은 느낌입니다. 그는 이것을 ‘천국의 기쁨’이라고 부르며, 그 기쁨은 ‘사랑을 행하는 것 자체에서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면 이런 모습에 가깝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심으로 이웃을 돕고 싶어 하고, 실제로 그것을 할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도움을 주고 나서 느끼는 따뜻한 만족감이 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누가 보지 않아도 기쁘고, 보상이 없어도 만족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삶이 바로 이런 경험이 훨씬 더 깊고 지속적인 형태라고 설명합니다. 거기서는 사랑이 삶의 중심이기 때문에, 서로 돕고 기쁘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 자체가 행복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모든 것이 질서 속에 있다는 느낌’입니다. 인간이 불안하거나 혼란스러울 때는 세상이 무질서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랑과 진리가 조화를 이루는 상태에서는 세상이 매우 질서 있게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천사들이 모든 것을 ‘주님의 질서 속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깊은 안정감을 느낀다’고 설명합니다. 마치 복잡한 음악이 완벽한 화음을 이루며 흐르는 것을 들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AC.34에서 말하는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는 여러 요소가 결합된 상태입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에서 진리가 자연스럽게 이해되며, 생각과 의지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그 결과 깊은 평안과 기쁨이 계속 흐르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말한 이유는 이런 경험이 단순한 감정이나 생각의 조합이 아니라 ‘사람 전체가 다른 질서 속에 들어가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풍경을 사진으로 볼 때와 실제로 그곳에 서서 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사진으로는 윤곽만 알 수 있지만, 실제로 그곳에 가면 공기의 느낌, 빛의 색, 소리와 냄새까지 함께 경험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그 상태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지금 언어로 그 윤곽만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 경험은 훨씬 더 풍부하고 깊다는 뜻에서 그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2.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7:22) 말인데요, 이런 사람들, 곧 염소로 분류되는 사람들임에도 어떻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실제로 오늘날도 보면, 많은 이단, 사이비 현장에서도 그런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는 합니다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마7:22의 말씀, 곧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는 사람들이 결국 주님에게서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을 듣는 장면은 많은 신앙인들에게 당혹스러운 부분입니다. 특히 실제로도 종교 현장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 영계 이해를 가지고 보면 이 문제는 비교적 분명한 구조로 설명됩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하는 외적 행위나 능력이 반드시 그 사람의 내적 상태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주님이 보시는 것은 외적 능력이나 기적이 아니라 ‘사람 안의 사랑’, 곧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언을 하거나 기적 같은 일을 행했다 하더라도, 만약 그의 중심 사랑이 자기 영광이나 권력이나 이익이라면 그 사람의 내적 상태는 여전히 주님과 멀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영계의 영향(influx)이라는 개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인간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항상 영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에게는 항상 어떤 영들이 함께 있으며, 선한 영도 있고 악한 영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특정한 능력이나 현상을 보일 때, 그것이 반드시 그 사람 자신의 거룩함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영계의 다른 존재들이 그 사람을 통해 작용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복음서에서도 이런 일이 이미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이나 복음서에는 귀신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히 말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귀신들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귀신들이 주님을 사랑하거나 주님께 순종하는 존재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진리를 알고 말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말하거나 어떤 능력을 나타내는 것과, 실제로 그 진리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주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의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히 발음되는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품과 권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실제로 주님의 성품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로 말한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영적 현상이나 강한 감정적 경험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증거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경우를 ‘외적 종교 활동이 내적 사랑과 분리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현대 종교 현장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도 이 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강한 기대나 두려움,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 있을 때 심리적, 정서적 현상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영계의 영향이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반드시 천국에서 오는 영향이라는 보장은 없다고 말합니다. 영계에는 선한 영들뿐 아니라 다양한 상태의 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초자연적’이라고 해서 곧 ‘신적인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강조하신 기준은 능력이나 기적이 아니라 ‘삶의 열매’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열매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사람의 삶 속에 나타나는 사랑과 선’입니다. 즉 그 사람이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며 정직하게 살고 있는가,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진짜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같은 원리를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는 기적이나 특별한 현상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신앙의 중심이 되면 사람은 쉽게 ‘외적 능력에 매료되어 내적 삶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부러 기적을 신앙의 중심으로 두지 않으셨고, 오히려 사랑과 삶을 강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놀라운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주님과 가까운 것은 아닙니다. 진짜 기준은 그 사람이 어떤 능력을 보였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랑으로 살고 있는가’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외적 능력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은 우리에게 ‘능력보다 사랑을 보라’는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결국 AC.34에서 이 구절이 인용되는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생명과 지성의 빛이 ‘사랑에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신앙 활동이나 능력은 참된 생명이 아니라 외적 현상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차이를 말씀하시기 위해 ‘많은 권능을 행했다’는 사람들에게도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 (flight)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막13:18)에 나오는 (flight)을 기독교, 개신교에서는 휴거라 하여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13:18의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라는 구절은 많은 개신교 전통에서 ‘휴거’나 어떤 물리적 종말 사건과 연결되어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는 복음서의 종말 담화를 기본적으로 ‘세계의 물리적 종말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종말과 새 교회의 시작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flight’, 곧 ‘도피’ 또는 ‘피함’도 어떤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는 사건이 아니라 ‘영적으로 타락한 교회 상태로부터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 벗어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flight’라는 표현부터 보겠습니다. 문자 그대로는 ‘도망’이나 ‘도피’를 의미합니다. 복음서 문맥에서도 예수님은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 같은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을 문자 그대로 어떤 지리적 이동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도망’은 ‘악과 거짓이 지배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진리를 보존하려는 영적 행동’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가 타락하고 진리가 왜곡될 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타락한 상태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내적으로 그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겨울’이라는 표현을 보면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계절’이 영적 상태를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은 사랑이 시작되는 상태, ‘여름’은 사랑이 충만한 상태, ‘가을’은 신앙이 성숙한 상태를 의미하고, ‘겨울’은 ‘사랑이 식고 신앙이 거의 남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겨울에 도망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영적 의미에서는 매우 깊은 뜻을 갖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완전히 식어 버린 상태에서 진리를 지키려 하면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종말을 항상 같은 패턴으로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진리가 함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이 점점 약해지고, 결국에는 교리나 형식만 남게 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겨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사람들이 진리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능력이 매우 약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겨울에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설명됩니다. 즉 ‘사랑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진리를 붙잡으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복음서의 종말 담화를 ‘개인의 거듭남과 교회의 역사 두 가지 차원에서 동시에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로 보면, 이것은 교회가 타락할 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타락에서 벗어나 새로운 교회를 형성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개인의 거듭남으로 보면, 이것은 사람이 영적으로 시험과 혼란 속에 있을 때, ‘거짓과 악에서 물러나 진리를 지키려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 구절이 ‘휴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는 신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 세상을 떠난다는 식의 해석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종말과 심판이 ‘주로 영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그의 저서 ‘Last Judgment’에서는 최후의 심판이 이미 영계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가 지상 교회에 점차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막13:18의 말씀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설명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도피’는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영적으로 악과 거짓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겨울’은 사랑이 식어 버린 교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사랑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진리를 붙잡고, 타락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영적 권면입니다. 이것은 미래의 한순간에 일어나는 극적인 사건을 예언하기보다, 교회와 인간의 영적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원리를 말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 구절을 단순한 종말 공포나 특별한 사건으로 보기보다, ‘지금 자신의 신앙 상태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강조하신 것은 언제 어디로 들려 올라갈 것인가가 아니라, 사랑이 식어 가는 시대 속에서도 ‘진리를 붙잡고 살아가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AC.33, 창1:14-17, 생명과 기쁨, 행복의 근원은 ‘사랑’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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