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5, 창1:14-17,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창1:14-17)
AC.35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타고나는 역량(faculties), 곧 의지와 이해(will and understanding)가 있습니다. 이해가 의지의 지배를 받을 때, 이 둘은 함께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그 결과 하나의 생명이 됩니다. 이때에는 사람이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동시에 생각하고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의지와 어긋날 때에는, 그러니까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경우인데요, 이때는 하나의 마음이 둘로 나뉘는데, 하나, 곧 이해는 스스로를 하늘로 높이려 하고, 다른 하나, 곧 의지는 지옥을 향해 기울어지지요. 그런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동하는 쪽은 의지이기 때문에,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 전체는 곧장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Man has two faculties: will and understanding. When the understanding is governed by the will they together constitute one mind, and thus one life, for then what the man wills and does he also thinks and intends. But when the understanding is at variance with the will (as with those who say they have faith, and yet live in contradiction to faith), then the one mind is divided into two, one of which desires to exalt itself into heaven, while the other tends toward hell; and since the will is the doer in every act, the whole man would plunge headlong into hell 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
해설
이 글은 앞선 AC.34의 논의를 인간의 내적 구조 차원으로 더욱 구체화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라는 말은 추상적인 선언이 아니라, 인간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두 기능, 곧 의지와 이해의 관계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감정과 이성의 단순한 결합체로 보지 않고, 의지와 이해라는 두 작용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존재로 봅니다.
이해가 의지에 의해 다스려질 때, 사람 안에는 하나의 마음이 형성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사람이 원하는 것, 행하는 것, 생각하는 것, 의도하는 것이 서로 어긋나지 않습니다. 삶은 일관되고, 내면과 외면이 갈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과 신앙이 결합한 상태이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생명의 구조입니다.
반대로, 이해가 의지와 분리되거나 의지에 맞설 때, 인간의 내면은 분열됩니다. 신앙을 말로는 고백하지만, 삶으로는 부정하는 상태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때 이해는 하늘을 말하고, 의지는 땅을 향하거나 그보다 더 낮은 곳을 향합니다. 사람은 머리로는 옳은 것을 알고 말할 수 있지만, 가슴으로는, 그러니까 실제 삶은 그와 정반대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분열을 단순한 모순이나 미성숙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극도로 위험한 상태로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움직이고 결정하는 주체는 이해가 아니라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이해는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의지입니다. 그래서 의지가 사랑 없는 방향으로 기울어 있으면, 이해가 아무리 하늘을 말해도 사람 전체는 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의지와 이해가 분열된 상태가 그대로 방치된다면, 사람 전체는 머리를 곤두박질치듯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위협의 언어가 아니라, 영적 질서에 대한 냉정한 진술입니다. 생명은 사랑이 있는 곳으로 흐르며, 의지는 그 흐름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를 분명히 언급합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상태만으로 판단된다면, 의지와 이해가 어긋난 대부분의 사람은 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즉시 버리지 않으시고, 자비로 붙들어 주십니다. 이 자비는 이해를 통해 의지를 서서히 교정하고, 사랑과 신앙이 다시 하나로 결합하도록 이끄는 힘입니다.
AC.35는 결국 인간의 신앙 문제를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로 다룹니다. 신앙이 말에만 머무를 때 왜 위험한지, 사랑 없는 신앙이 왜 겨울과 같은지를, 의지와 이해의 관계를 통해 명확히 보여 줍니다. 이 글은 독자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지금 내 이해와 내 의지는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도록 말입니다.
심화
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위 AC.35본문,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말인데요, 우리를 지으신 신(神)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 한 문장은 짧지만, 사실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을 건드립니다. ‘만일 주님께서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인간의 상태와 주님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주님의 생명과 자비의 흐름 속에서만 유지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만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항상 이미 주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점을 조금 더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비’를 어떤 잘못을 했을 때 용서해 주시는 것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mercy’는 훨씬 더 깊고 근본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단지 죄를 용서해 주시는 감정적 행위가 아니라, ‘타락하고 자기중심으로 기울어진 인간을 계속해서 선과 진리 쪽으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지속적인 작용’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기울어지기 쉽기 때문에, 만약 아무런 제어도 없다면 그 흐름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곳에서 ‘주님이 매 순간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즉시 더 깊은 악으로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붙들어 주신다’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밖에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의지 안에서 은밀하게 방향을 돌려 주시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어떤 악한 선택을 하려는 순간, 마음 한편에서 그것을 멈추게 하는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올라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어떤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일이 틀어져서 더 큰 잘못을 피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까지도 넓은 의미에서 ‘주님의 자비의 작용’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우연이나 자기 판단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더 깊은 차원의 인도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비는 단지 ‘용서’만이 아니라, ‘보존과 인도와 회복 전체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것, 조금이라도 선한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하시는 것, 진리를 들을 기회를 주시는 것, 심지어 고통이나 시험을 통해서라도 방향을 돌려 주시는 것 등, 이 모든 것(all of these)이 다 자비의 범주 안에 들어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자비는 단순히 따뜻한 감정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한 끊임없는 신적 작용’입니다.
목사님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신 그 감탄이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옵니다. 만약 하나님이 단지 공의만을 기준으로 인간을 대하신다면,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인간은 한순간도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공의 자체이시면서, 동시에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에, 공의로만 심판하시지 않고 자비로 붙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본질을 설명할 때 자주 ‘사랑과 자비’를 중심에 둡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을 돌아보며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변하지 않는가?’, ‘왜 여전히 같은 문제를 반복하는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AC.35의 이 한 문장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것, 여전히 말씀을 듣고 고민하고 주님을 찾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주님의 자비가 당신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신앙의 중심적인 위로이자 확신’이 됩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직시하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 연약함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주님의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는 어떤 특정한 순간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고백은 아주 깊은 신앙의 자리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은 하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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