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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 창1:20,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AC.39-41)

bygracetistory 2026. 3. 19. 11:4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1:20)

 

AC.39

 

큰 광명체들이 불이 붙어 속 사람 안에 놓이고, 겉 사람이 그 빛을 받게 되면, 그러면 사람은 비로소 살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까지는 그를 가리켜 거의 살아있다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때는 그가 선을 행해도 그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 걸로 알았고, 진리를 말해도 그 진리 역시 자기에게서 나온 거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사람이란 자기 자신으로서는 죽어 있으며, 그 안에는 악과 거짓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나오는 건 그게 무엇이든 생명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로부터는 그 자체로 선한, 그런 선을 절대로 행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선한 것을 생각하거나, 선한 것을 원하거나, 따라서 선한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로 보아도 누구에게나 분명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After the great luminaries have been kindled and placed i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receives light from them, then the man first begins to live. Heretofore he can scarcely be said to have lived, inasmuch as the good which he did he supposed that he did of himself, and the truth which he spoke that he spoke of himself; and since man of himself is dead, and there is in him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false, therefore 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insomuch that he cannot, from himself, do good that in itself is good. That man cannot even think what is good, nor will what is good, consequently cannot do what is good, except from the Lord, must be plain to everyone from the doctrine of faith, for the Lord says in Matthew: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또한 선은 오직 하나뿐인 참된 선의 근원에서만 올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Nor can any good come except from the real fountain of good, which is one only, as he says in another place: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2]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살리실 때, 곧 거듭남으로 생명으로 일으키실 때에는,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십니다. 이때 사람은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그런 방식이 아니고서는 그를 이끌어 나중에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더 나아가 퍼셉션으로 알 수 있도록 인도하실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동안, 그의 진리와 선은 (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에 비유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사랑과 신앙으로 생명을 얻게 되고,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자기가 말하는 모든 진리가 사실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임을 믿게 되면, 그는 먼저 물속의 기는 것들(creeping things of the water)땅 위를 나는 새들(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에 비유되고, 또한 짐승들(beasts)에 비유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이것들을 가리켜 생물(living souls)이라고 합니다. Nevertheless when the Lord is resuscitating man, that is, regenerating him, to life, 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 for at that time he is incapable of conceiving otherwise, nor can he in any other way be led to believe, and afterwards to percei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lone. While man is thinking in such a way his truths and goods are compared to the “tender grass,” and also to the “herb yielding seed,” and lastly to the “tree bearing fruit,” all of which are inanimate; but now that he is vivified by love and faith, and believes that the Lord works all the good that he does and all the truth that he speaks, he is compared first to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and to 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and also to “beasts,” which are all animate things, and are called “living souls.”

 

 

해설

 

이 글은 넷째 날 이후에 비로소 ‘생명’이 시작된다는 점을 인간의 거듭남 관점에서 분명히 밝힙니다. 앞선 단계들에서 사람은 빛을 받고, 선과 진리를 배우며, 겉으로는 신앙적이고 선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상태를 아직 ‘살아있다’, 즉 ‘살아있는 상태’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 사람이 여전히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서는 죽어 있으며, 그 안에는 악과 거짓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비하하려는 표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정확히 규정하는 말입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만 오기 때문에, 그 근원과 단절된 상태에서는 아무리 선해 보이는 행위도 본질적으로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는 참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은 성경 말씀으로도 확증됩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이시며,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선과 진리의 근원이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들을 단순한 교리적 인용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구조를 설명하는 핵심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럼에도 이 글은 매우 중요한 전환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사람을 거듭남으로 이끄실 때, 처음부터 그에게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런 성숙한 태도를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지요. 오히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십니다. 이는 사람의 한계 때문이며, 동시에 주님의 지혜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런 단계가 아니고서는 다음 단계로 인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의 선과 진리는 연한 풀과 씨 맺는 채소, 그리고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됩니다. 이것들은 성장과 생산성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못 움직이는, 생명 없는 것들로 묘사됩니다. 이는 선과 진리가 아직 사랑과 신앙의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준비는 되었지만,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이 결합하고, 사람이 선과 진리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게 될 때는,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사람은 생명 있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물속의 기는 것들, 하늘을 나는 새들, 그리고 짐승들은 모두 움직이고, 반응하고, 생명을 표현하는 존재들입니다. 이때 비로소 사람은 ‘생물(living souls)이 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매우 섬세한 주님의 섭리 안에서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사람의 오해조차도 주님은 사용하십니다.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그 상태조차, 더 깊은 진리와 퍼셉션으로 이끌기 위한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 글은 인간의 무능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자비와 지혜를 가장 깊이 드러내는 글입니다.

 

 

심화

 

1.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신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신다(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는 이 문장은 저를 정말 놀라게 하며, 그래서 깊이 감동하게 합니다. 저는 결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하지만 저의 지난날을 곰곰 생각해 보면, 과연 주님이 나에게도 저런 사랑과 자비를 허락하지 않으셨으면 저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해집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놀라움’과 ‘아찔함’은 사실 AC.39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체험적으로 붙드신 반응입니다. 이 문장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주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방식의 깊은 비밀’, 곧 자비의 실제 작용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아온 시간 속에 이미 조용히 작동해 왔던 것입니다.

 

이 문장의 뜻을 조금 더 또렷하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만약 그 상태에서 그것을 그대로 들이대면, 사람은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혹은 반발하여 더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처음에는 사람에게 ‘‘내가 하는 것이다라고 느끼도록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속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와 자발성을 지켜 주시는 방식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행한다고 느낄 때만, 그 행위가 그의 것이 되고, 그 안에 책임과 사랑이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고백하신 것처럼,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때 내가 했던 것들이 정말 다 내가 한 것들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선택, 어떤 깨달음, 어떤 돌이킴 등, 그 순간에는 내가 한 것 같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배후에 ‘보이지 않는 인도와 보호가 있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AC.39가 말하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처음에는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시지만, 점점 빛이 밝아질수록 우리는 알게 됩니다. ‘, 이것이 내 것, 내가 한 것이 아니었구나. 주님이 나를 이끌어 오신 거구나.’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허락(permit)이라는 표현입니다. 주님이 적극적으로 사람을 착각하게 만드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그 생각을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단계에서는 그것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처음 걸을 때, 부모가 손을 놓아 주면서도 뒤에서 지켜보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내가 걷는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부모의 보호 속에서 걷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부모가 완전히 개입해 버리면, 아이는 걷는 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반대로 완전히 내버려두면 넘어져 다치게 됩니다. 주님은 그 사이에서, ‘자유를 주시면서도 보호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신 ‘만일 저런 자비가 없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감정은 매우 깊은 영적 통찰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주님의 보호가 한순간만 거두어져도 사람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그 보호가 너무 자연스럽고, 너무 조용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자비의 특징입니다.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러나 끊임없이 지켜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 문장은 또한 한 단계 더 나아가 우리를 이끕니다. 처음에는 ‘내가 한다’고 생각하게 하시지만, 점점 빛이 밝아지면 우리는 배우게 됩니다. ‘‘나는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행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힘을 받는다는 상태’, 곧 ‘마치 자기로부터인 것처럼(as if from oneself)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진짜 균형입니다. 완전히 자기로 돌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으면서도, 내가 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감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더 깊어집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이 단순히 우리의 선택과 노력만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와 자비가 엮여 만들어진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자연스럽게 겸손해지고, 동시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감사는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이 AC.39의 한 문장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스스로 살아가는 것처럼 느끼는 걸 허락하시면서, 실제로는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조용히 인도하고 보호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될 때, 신앙은 의무가 아니라 ‘감사와 사랑의 관계’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아찔함’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실은 ‘자비를 알아볼 때 생기는 경외와 감사의 감각’입니다. 그리고 그 감각이야말로, 이미 넷째 날을 지나 더 깊은 빛 속으로 들어가고 계시다는 하나의 아름다운 ‘징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AC.38, 창1:18-19, ‘이는 넷째 날이니라’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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