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기 위해 반드시 이해해야 할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처음 접하면 ‘상징’이나 ‘비유’와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은 단순한 문학적 표현 방법이 아닙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 있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 때문에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나타내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연계의 사물과 영적인 의미를 서로 별개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빛은 물리적인 빛이고, 물은 물이며, 나무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빛과 어둠, 물과 불, 산과 골짜기, 나무와 열매, 씨와 밭, 눈과 귀, 손과 발 같은 자연적인 것들이 끊임없이 영적인 의미를 품고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성경 저자가 자연물을 적절한 비유로 골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 자체가 서로 관계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상응의 중요한 특징이 나타납니다. 상응은 인간이 사후에 임의로 붙인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시인이 ‘빛을 희망의 상징으로 사용하자’고 결정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관계는 창조의 질서 안에 근거합니다. 자연적인 것은 그 자체로 독립된 최종 현실이 아니라 더 내적인 원인과 목적이 자연계에서 드러난 결과이자 형식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에는 원인과 결과,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의 질서 있는 관계가 있으며, 이것이 상응의 토대가 됩니다.
인간 자신이 상응을 이해하는 가장 가까운 예입니다. 마음속에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얼굴과 눈빛과 목소리와 행동에 그 사랑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분노하면 표정과 몸짓과 말투가 달라집니다. 얼굴의 근육과 목소리가 사랑이나 분노 그 자체는 아니지만, 내적인 애정이 외적인 몸을 통하여 표현됩니다. 이때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과 아무 관계 없이 우연히 붙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형식 안에서 나타납니다. 이것이 상응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이 예를 너무 단순하게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웃는 얼굴 = 사랑’이라는 고정된 상응표가 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거짓으로 웃을 수도 있고, 겉으로 감정을 숨길 수도 있습니다. 이 예의 목적은 단지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을 통하여 표현될 수 있다’는 질서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개별적인 외적 모양을 기계적으로 해석하는 기술이 아니라 영적 원인과 자연적 결과 사이의 질서를 말합니다.
이 점에서 인간은 하나의 작은 세계와도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몸과 그 기관들이 영적인 것들과 상응한다고 설명합니다. 눈은 보는 기능 때문에 이해에 속한 것들과 관계되고, 귀는 듣고 받아들이는 기능 때문에 순종과 받아들임에 속한 것들과 관계됩니다. 손과 팔은 힘과 행위에, 발은 보다 자연적이고 외적인 삶의 차원에 관계됩니다. 이것 역시 신체 부위에 임의로 의미를 붙인 것이 아니라, 그 기관의 실제 기능과 영적인 기능 사이에 질서 있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상응은 말씀 해석의 원리가 됩니다. 말씀은 자연적인 인간이 읽을 수 있도록 자연계의 언어와 사물과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연적인 표현들은 영적인 것들과 상응하기 때문에 동시에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빛’은 단지 태양이나 광명에 관한 말에 머무르지 않고 문맥에 따라 진리와 깨달음에 속한 것을 나타낼 수 있으며, ‘물’은 진리에 속한 것, ‘열매’는 삶에서 나타나는 선에 속한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빛 = 진리, 물 = 진리, 나무 = 지식’과 같은 단순한 암호표를 만드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상응은 살아 있는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같은 자연물이 말씀의 어느 곳에서는 선한 의미로 사용되고 다른 곳에서는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물이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하나의 상응을 설명하면서도 성경의 여러 구절을 길게 인용하고 서로 비교합니다.
상응에는 또한 ‘층위’가 있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과 상응하고, 영적인 것은 더 내적인 천적인 것과 관계되며, 궁극적으로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의 문자에서 속뜻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이 단어의 숨은 뜻은 무엇인가?’를 알아맞히는 일이 아닙니다. 외적인 표현을 통하여 그 안에 있는 영적인 질서를 보고, 그 영적인 질서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주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AC.1에서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가리킨다’고 한 것과 연결됩니다.
이제 앞에서 살펴본 ‘표상’과 ‘상응’의 차이도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둘은 매우 밀접하지만 같은 말은 아닙니다. ‘상응’은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의 관계와 질서를 말하고, ‘표상’은 그 상응의 관계에 근거하여 자연적인 사람이나 사물이나 사건이 영적인 것을 나타내 보이는 기능을 말합니다. 따라서 상응이 ‘왜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나타낼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라면, 표상은 ‘그 자연적인 것이 실제로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가?’에 더 가까운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제사와 성막과 성전은 수많은 영적인 것을 표상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영적인 것을 표상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상응입니다. 제단, 불, 향, 기름, 떡, 등잔과 같은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실재와 아무 관계도 없다면 그것들은 단지 인간이 정한 종교적 상징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것이 상응의 질서 안에 있기 때문에 말씀과 예배 안에서 영적인 것을 나타낼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상응은 인간과 말씀을 넘어 천국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은 추상적인 생각만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천사들에게도 집과 정원, 산과 강, 빛과 색 등 외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영계에서 그러한 외적 환경은 천사들의 내적인 애정과 사고에 상응하여 나타납니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내적인 상태와 외적인 환경 사이의 관계가 자연계에서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영계 경험을 통하여 상응을 이해했다고 설명하는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자연계의 모든 것을 보면서 ‘이것은 영적으로 무엇을 뜻할까?’라고 해석해야 할까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상응의 교리는 일상의 모든 사건을 암호처럼 풀이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특히 어떤 질병이나 사고, 재난을 보고 곧바로 ‘이것은 그 사람의 어떤 영적 상태를 뜻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상응은 다른 사람의 내면을 추측하거나 현실의 사건을 점치는 도구가 아닙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와 창조의 질서를 이해하기 위한 원리이지,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의적으로 영적 해석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이 점은 실제로 매우 중요합니다. 상응을 배우기 시작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로운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경험입니다. 자연을 보면서 주님의 질서를 생각하고, 빛을 보면서 진리를, 봄의 새 생명을 보면서 거듭남을 생각하는 것은 아름다운 묵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오늘 비가 왔으므로 주님께서 나에게 특별히 이런 메시지를 보내셨다’고 단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상응은 주님의 질서를 바라보게 하지만 인간의 추측을 계시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상응을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빛과 물과 나무와 산과 동물의 상응을 수백 가지 알고 있어도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면 그 지식 자체가 영적 생명이 되지는 않습니다. 상응을 아는 목적은 말씀을 통하여 더 깊이 주님을 알고, 진리를 배우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AC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도 상응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이제 AC.4로 돌아가면 왜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창조와 태고교회에 관한 것을 표상하고 의미하고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가 조금 더 이해됩니다.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이 영적인 것과 아무 관계도 없는 자연물이라면 그러한 해석은 단순한 상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상응이라는 창조의 질서가 있다면, 자연적인 언어로 기록된 말씀 안에 영적인 의미가 담길 수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결국 ‘상응’은 말씀의 속뜻을 풀기 위한 하나의 해석 기법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세계를 거쳐 자연적인 세계에 이르는 창조의 질서와,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설명하는 스베덴보리 사상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리고 말씀은 바로 그 상응의 질서에 따라 기록되었기 때문에 자연계의 인간이 읽는 문자 안에서 동시에 천국의 것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응을 배운다는 것은 성경에 숨겨진 암호표를 하나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외적인 것은 더 내적인 것과 질서 있게 연결되어 있다’는 새로운 시선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말씀을 향할 때, 우리는 문자에서 멈추지 않으면서도 문자를 버리지 않고, 그 문자를 통하여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거쳐 궁극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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