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 심화 1, 아직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데 왜 ‘회개의 상태’인가?
AC.9.심화
1. 아직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데 왜 ‘회개의 상태’인가?
AC.9에서 세 번째 상태를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이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을 하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 선들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선의 근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을 왜 벌써 ‘회개의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일까요?
먼저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AC.9은 ‘회개’를 ‘내가 행하는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이미 충분히 깨달은 상태’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아직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바로 그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 선들을 ‘여전히 생기가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AC.9의 ‘회개의 상태’를 설명하면서 ‘사람이 이제 자기 선은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고 말하면 순서가 조금 뒤바뀝니다. 그 깨달음이 이미 충분히 이루어졌다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긴다’는 AC.9의 설명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회개’일까요? 이 질문에는 AC.9이 바로 이어서 말하는 사람의 실제 변화에 주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을 하며,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을 행합니다.’ 즉 이전 상태와 달리 이제 실제 삶에서 선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회개를 단순히 ‘큰 죄를 짓고 몹시 후회하는 감정’으로만 생각하면 AC.9의 표현이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에는 삶의 방향을 악에서 선으로 돌리는 실제적인 변화가 포함됩니다. 사람이 이전과 같은 삶에 그대로 머물면서 마음속으로 미안하다고 느끼는 것만이 회개의 전부는 아닙니다.
AC.9에서 바로 그 변화가 나타납니다. 사람은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말하기 시작하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실제로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이 이미 영적으로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에서 실제적인 선의 방향으로 삶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렇게 보면 ‘회개’와 ‘아직 생기 없는 선’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회개의 상태에 들어가 실제로 선을 행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삶의 방향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선의 근원에 대한 인식은 아직 온전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거듭남이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연속적인 상태의 변화라는 AC.6의 설명과도 잘 맞습니다. 첫째 상태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첫째에서 둘째로, 둘째에서 셋째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상태인 회개 역시 완성된 영적 인간의 상태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AC.9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사람은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회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선이 어디에서 오는지 완전히 알게 된 다음에야 선한 삶을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배우고, 돌이키고, 말하고, 행하면서 거듭남의 다음 상태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그래도 아직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회개하기 전 아닌가?’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AC.9은 바로 그런 불완전한 상태를 세 번째 상태로 제시합니다. 사람은 실제 선을 행하기 시작했지만,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문제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생기 없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그것은 이 단계의 회개와 선한 행위가 모두 거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여전히 ‘선들’이라고 부릅니다. 다만 사람이 그 선들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아직 참된 생명을 가진 상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두 극단으로 가기 쉽습니다. 하나는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생각하니 그 선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한 일을 하고 있으니 이미 영적으로 충분히 살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AC.9은 어느 쪽도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 선이 나타났지만 아직 생기가 없는, 거듭남 도중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회개’는 무엇에 대한 회개일까요? AC.9 한 단락은 구체적으로 어떤 죄목을 열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기 공로를 죄로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라고 특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본문이 직접 보여 주는 것은 회개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새로운 방향, 곧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들을 행하기 시작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AC.9의 ‘회개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극적인 회심 장면을 상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눈물이나 강렬한 죄책감이 있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방향에 실제 변화가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감정을 포함할 수 있지만 감정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에 여기서 일반적인 회개론 전체를 AC.9 한 문장 안에 넣을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곳에서 회개를 어떻게 더 자세히 설명하는지는 별도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AC.9에서 우리의 우선 과제는 이 세 번째 상태가 왜 ‘회개의 상태’라고 불리는지를 이 문맥 안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두 번째 상태까지는 주님의 것과 사람 자신의 것이 구별되고 리메인스가 드러나는 준비가 이루어졌다면, 세 번째 상태에서는 이제 그 내적인 변화가 말과 행위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들을 행합니다. 회개가 실제 삶의 방향 전환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여전히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며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킵니다. 그래서 그 선은 아직 ‘생기 없는’ 것으로 불립니다. 앞으로의 거듭남에서는 이 선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지가 더 분명해져야 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AC.9의 ‘회개의 상태’는 비약이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의 연속성을 잘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회개했다고 해서 사람이 단번에 자기중심성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며, 선의 근원을 완전히 깨닫는 것도 아닙니다. 돌이킴이 시작되고 실제 선이 나타나면서도 여전히 자기에게 속한 것이 섞여 있는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9에서 회개란 ‘완성된 회개’라기보다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에서 나타나는 실제적인 돌이킴의 상태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들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선에는 참된 생명이 충분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회개할 정도로 무슨 큰 죄를 지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회개를 주로 ‘큰 잘못을 저지른 뒤 크게 뉘우치는 사건’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AC.9에서 중요한 것은 죄의 크기가 아니라 삶의 방향입니다. 사람이 이전 상태에서 벗어나 선을 향하여 실제로 말하고 행하기 시작하는 것, 그러나 아직 그 선의 참된 근원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것, 바로 이 미완성의 전환이 여기서 말하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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