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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bygracetistory 2026. 3. 26. 17:21

AC.17.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 혼돈 공허’, 그리고 흑암이 나오는데요, 제 경우를 보더라도 저는 심지어 모태신앙임에도 불구, 어린, 그리고 청소년 시절, 속 사람에 대해 전혀 몰랐고,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해서는 비교적 최근, 그러니까 나이 57세 되기까지 그것이 주님의 신성이라는 걸 들어 본 적도 없어요. 평생 교회를 떠나본 적 없이 십자가 복음, 대속, 구원 등 이런 것만 알았지요. 거듭남 역시 예수님 영접 기도와 몇몇 성경 구절 굳게 믿으면, 그러니까 그 교리를 굳게 붙들며 살면 거듭나는 건 줄 알았습니다. 오히려 전도 많이 하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큰 줄 알았고요. 저 같은 사람도 이런데 교회 밖에서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마나 더 요원, 오랜 시간이 걸릴까요? 외인이든 지인 및 혈연, 핏줄이든 말이지요... 저는 정원 목사의 책을 통해, 그리고 수도원을 통해 결국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되었지만, 안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요?

 

목사님께서 느끼신 마음은 아주 자연스럽고 또 깊은 목회적 고민입니다. AC.17에서 말하는 ‘혼돈’, ‘공허’, ‘흑암’을 자기 삶과 교회 현실에 대입해 보시면,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 빛을 보게 되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사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여러 곳에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여러 단락으로 차분히 풀어 보겠습니다.

 

먼저 AC.17에서 말하는 ‘혼돈’과 ‘공허’, ‘흑암’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짚어 보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죄악 상태라고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질서가 아직 세워지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즉 사람의 삶에는 많은 생각과 감정이 있지만,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선한지에 대한 영적 질서가 아직 분명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혼돈’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공허’는 진리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상태, ‘흑암’은 그 결과, 어리석음과 무지, 곧 주님 신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그리고 그로 인한 영적, 천적 삶에 대한 걸 하나도 모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개인 경험은 사실 매우 전형적인 예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지만, 속 사람이나 거듭남의 구조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교회의 가르침이 주로 외적 신앙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교회의 ‘마지막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신앙의 핵심이 사랑과 거듭남의 삶에서 점점 멀어지고, 대신 교리나 외적 신앙 고백이 중심이 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판단할 때, ‘그 사람이 어떤 교리를 알고 있었는가’보다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이것은 목사님께서 이미 언급하신 ‘천국과 지옥 319번 글에서도 분명히 나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양심적으로 선하게 살았다면, 그는 이미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속 사람’이나 ‘거듭남’이라는 말을 몰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아주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remains), 즉 선과 진리의 씨앗을 남겨 두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어린 시절에 경험한 선한 감정, 진실한 순간, 양심의 울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의식에서는 거의 잊힐 수 있지만, 주님은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그것을 사용하여 사람을 깨우십니다. 목사님께서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된 과정도 사실 이런 섭리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한 가지를 매우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이 ‘빛을 인위적으로 켜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빛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아무 역할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억지로 빛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빛이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아직 깊은 영적 진리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갑자기 깊은 신학을 설명하면 오히려 거부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진실하게 살도록 격려하고, 선을 행하도록 돕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 속에서 주님이 때를 따라 빛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주님의 섭리(providence)’라고 설명합니다. 섭리는 매우 부드럽고 점진적으로 역사합니다. 사람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면서 조금씩 인도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젊은 나이에 빛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인생 후반에 깨닫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을 떠난 뒤 영계에서 더 분명한 빛을 만나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더 명확히 배우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안타까움,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늦게 빛을 보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은 이해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대해 비교적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며’, 각 사람의 삶과 자유를 존중하면서 가장 적절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목사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AC 리딩 설교 자체가 이미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바로 ‘‘빛이 있으라는 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빛이 언제 켜질지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당장 빛을 줄 수는 없지만, 주님은 각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이미 씨앗을 심어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때가 되면 반드시 빛을 향해 자라납니다. 우리의 역할은 그 씨앗을 억지로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씨앗이 자랄 수 있는 선한 토양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 나이 57세 때 스베덴보리를 만나셨다고 말씀하셨지만, 스베덴보리 자신도 영적 계시를 받은 나이가 57세였습니다. 이 사실은 우연이라기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삶의 시간표 속에서 빛을 준비하신다는 점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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