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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심화 1, ‘영적 인간’, ‘천적 인간’

bygracetistory 2026. 3. 30. 16:34

AC.52 심화

1. 영적 인간, 천적 인간

 

AC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비교적 익숙하지만 천적 인간이라는 말은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한국어에서 천적이라고 하면 흔히 서로 잡아먹는 관계의 천적(天敵)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번역에서 사용하는 천적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영어 celestial을 옮긴 말로, ‘하늘의’, ‘천국적인’, 더 정확하게는 스베덴보리가 구별하는 천적 차원에 속한 성질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celestial spiritual을 매우 자주 구별합니다. 우리말로는 각각 천적 영적이라고 옮깁니다. 둘 다 자연적·세속적인 것과 대비되는 넓은 의미에서는 영적인 것에 속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전문적인 용법에서는 서로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천적은 특히 사랑과 선, 의지에 속한 것과 깊이 관계되고, ‘영적은 신앙과 진리, 이해에 속한 것과 깊이 관계됩니다.

 

AC.52는 이 차이를 매우 간결하게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을 설명할 때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물고기 가 먼저 언급되고 그다음에 짐승이 나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을 설명하는 시8에서는 짐승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물고기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천적 인간이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어느 쪽에는 사랑이 있고 어느 쪽에는 사랑이 없다가 아니라 무엇이 먼저인가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 나타나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 나타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을 머리로만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스베덴보리는 여섯째 상태의 영적 인간이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나 선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거듭난 인간이며 AC.48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마찬가지로 천적 인간을 생각이나 진리가 필요 없는 사람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52에서 천적 인간을 나타내는 순서에도 새와 물고기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다만 짐승이 먼저입니다. 이것은 이해와 진리가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이고 이해에 속한 것들이 그 뒤에 놓이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 차이는 앞의 AC.51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주님의 모양’, 곧 닮음이라고 했습니다. 또 영적 인간은 빛의 아들 친구라고 불리고,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호칭들을 곧바로 높고 낮은 신분표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두 상태의 성질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천적 인간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AC.52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그는 사랑으로 선을 행하며’,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의 다스림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한다는 것과 대비됩니다.

 

이 대목을 쉽게 설명하려고 영적 인간은 옳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천적 인간은 좋아서 선을 행한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어느 정도 방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정확한 정의로 굳히면 곤란합니다. 영적 인간 역시 사랑으로 행동하며, 천적 인간 역시 진리와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인간의 차이는 단순히 의무  자발성보다 더 깊은 내적 질서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이후 설명까지 넓혀 보면 이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선과 사랑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나고,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형성되는 양심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를 설명할 때는 천적 인간과 퍼셉션이 특별히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천적 인간은 생각하지 않고 직감으로 안다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퍼셉션은 단순한 감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또한 양심이 퍼셉션보다 가치가 낮은 가짜 영적 기능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서로 다른 인간 상태에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시는 서로 다른 질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적이라는 말 자체도 여기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어의 천적(天敵)이 아니라 celestial을 번역한 전문 용어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 자체에도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의 구별이 있으며,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의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천적은 단순히 아주 영적인’, ‘영적보다  단계 높은이라는 정도 표현이 아니라 독특한 성질을 가진 범주입니다.

 

이 때문에 영적 인간이 계속 성장하면 모두 천적 인간이 되는가?라는 질문에도 조심해서 답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2장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설명에서는 영적 인간 다음에 천적 인간이 등장하므로 하나의 더 깊어지는 흐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전체 저술에서는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 영적 천사와 천적 천사가 지속적으로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영적 단계 졸업  천적 단계로 승급한다는 하나의 직선 과정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두 상태를 완전히 관계없는 두 종류의 인간으로 떼어 놓는 것도 현재 창세기 해설의 흐름을 놓칠 수 있습니다. 1의 거듭남에서 창2의 더 내적인 상태로 이어지는 진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는 둘은 분명히 구별되지만,  관계의 모든 세부를 하나의 간단한 단계표로 만들지 않는다는 태도가 가장 안전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어느 상태든 생명의 근원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AC.49-50에서 반복해서 본 것처럼 선과 진리와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영적 인간이 이해와 신앙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자기 지성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니며, 천적 인간이 사랑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자기 사랑에서 선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두 경우 모두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서로 다른 질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AC에서 영적 천적을 만나면 단순히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라고 번역해 읽기보다 먼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면 좋습니다. 대체로 영적은 진리·신앙·이해와, ‘천적은 선·사랑·의지와 특별히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기계적인 일대일 사전처럼 적용해서는 안 되고 각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AC.52에서 가장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그의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이고, 그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둘 다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거듭난 인간이지만,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질서를 이루는 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천적이라는 낯선 용어는 바로 그 차이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말입니다. 앞으로 태고교회, 퍼셉션, 창세기 2,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을 읽어 갈수록 이 구별은 점점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AC.52, 창1:26, ‘다스림의 방향 전환 : 이해에서 사랑으로,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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