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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8, 창1: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AC.58-59)

bygracetistory 2026. 4. 1. 11:5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wherein is a living soul, every green herb for food; and it was so. (1:30)

 

AC.58

 

같은 사람의 자연적 음식이 여기서 설명됩니다. 그의 자연적인 것은 땅의 모든 짐승(wild animal of the earth)하늘의 모든 새(fowl of the heavens)로 표상되며, 이들에게는 먹을 것으로 모든 푸른 풀이 주어집니다. 그의 자연적 음식과 영적 음식 둘 다 시편에 이렇게 묘사됩니다. The natural meat of the same man is here described. His natural is signified by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by the “fowl of the heavens,” to which there are given for food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Both his natural and his spiritual food are thus described in David: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104:14) Jehovah causeth the grass to grow for the beast, and herb for the service of man, that he may bring forth bread out of the earth (Ps. 104:14),

 

여기서 가축(beast)이라는 말은, 같은 시편의 11절과 12절에 언급된 들짐승공중의 새 모두를 포함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where the term “beast” is used to express both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he fowl of the heavens which are mentioned in verses 11 and 12 of the same psalm.

 

11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12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104:11, 12)

 

 

해설

 

이 글은 AC.56, 57에서 다룬 ‘영적 인간의 음식’에 이어, ‘같은 인간 안에 존재하는 자연적 인간의 음식’을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여러 인간이 따로 있는 존재로 보지 않고, 하나의 인간 안에 서로 다른 단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구조로 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자연적 음식은 ‘다른 사람의 음식’이 아니라, ‘같은 사람 안에서 가장 바깥 단계를 유지하는 양식’입니다.

 

자연적인 것은 ‘들짐승’과 ‘공중의 새’로 표상됩니다. 이는 앞서 반복해서 설명된 상응 구조를 그대로 따릅니다. 들짐승은 감각과 욕구에 가까운 자연적 애정들을, 하늘의 새는 자연적 사고와 기억 지식을 뜻합니다. 이 두 영역이 자연적 인간을 구성하며, 이들에게 주어지는 음식은 ‘채소’와 ‘푸른 풀’입니다. 즉 자연적 인간은 생명을 직접 낳는 열매나 씨를 먹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라난 외적 지식과 경험의 결과물’로 살아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연적 음식이 결코 ‘악한 음식’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채소와 풀은 주님이 직접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음식의 출처가 아니라, ‘그 음식이 어느 단계의 생명을 유지하느냐’입니다. 자연적 음식은 자연적 생명을 유지하는 데 적합하고 필요합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영적 생명이나 천적 생명을 낳을 수 없습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구절이 시편 104편 14절입니다. 이 시편은 창조 질서 전체를 찬양하는 시로, 인간과 동물, 땅과 하늘이 각자에게 맞는 양식을 받는 질서를 노래합니다. 여기서 ‘가축을 위한 풀을 자라게 하시며’라는 말은, 자연적 애정들이 유지될 수 있도록 주님이 외적 세계를 공급하신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라는 말은, 자연적 인간이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쓰임을 향한 질서 안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사람을 위한’(for the service of man)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연적 인간의 음식은 목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영적, 천적 생명을 섬기기 위한 수단입니다. 자연적 사고, 기억 지식, 경험, 기술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더 안쪽의 생명을 돕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채소는 ‘사람의 쓰임을 위하여’ 자랍니다.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라는 표현은, 인간이 외적 세계에서 얻는 모든 자연적 자원이 결국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는 자연적 인간이 자기 힘으로 산다고 느끼는 착각을 교정하는 표현입니다. 자연적 인간은 가장 쉽게 ‘내가 내 힘으로 벌어서 먹고 산다’고 느끼는 단계이기 때문에, 시편은 그 지점에서조차 주님의 섭리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짐승’이라는 말이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굳이 짚어 줍니다. 이는 성경의 언어가 얼마나 ‘포괄적 상응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예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짐승과 새가 다르지만, 상응적으로는 모두 자연적 생명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하나의 범주로 묶일 수 있습니다.

 

이 글이 말하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같은 사람 안에서 영적 음식과 자연적 음식은 동시에 존재하며, 둘 다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각각은 ‘자기 단계의 생명만을 유지’합니다. 거듭남이란 자연적 음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음식이 더 높은 음식들을 섬기도록 ‘질서가 바로잡히는 과정’입니다.

 

 

심화

 

1. ‘시104:14’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104:14) Jehovah causeth the grass to grow for the beast, and herb for the service of man, that he may bring forth bread out of the earth (Ps. 104:14),

 

이 구절은 AC.58의 문맥에서 ‘주님께서 사람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수준의 것들에 맞게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그것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유익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시104:14의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는 사람 안에 있는 자연적 애정과 이성적 이해에 각각 맞게 주어지는 선과 진리의 양식을 의미하며, 그 목적은 결국 삶의 실제 양식인 ‘떡’, 곧 ‘선한 삶’을 이루게 하기 위함입니다.’

 

먼저 ‘가축을 위한 풀’입니다. 성경에서 ‘가축’은 길들여진 애정, 곧 비교적 온순하고 질서 안에 들어온 자연적 욕망이나 감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풀’은 앞에서 보신 것처럼 ‘처음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선과 진리’, 곧 비교적 낮은 수준에서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가축을 위한 풀’은 사람 안에 있는 자연적 애정들이 유지되고 바로 서기 위해 필요한 기초적인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아직 깊은 이해나 높은 사랑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사람이 최소한 바르게 살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기초 양식입니다.

 

이제 ‘사람을 위한 채소’입니다. 여기서 ‘사람’은 단순한 생물학적 인간이 아니라, ‘이해와 이성을 사용하는 존재’, 곧 더 높은 수준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채소’는 ‘씨 맺는 것’, 곧 계속해서 다음 것을 낳는 진리였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위한 채소’는 단순한 기초를 넘어서, 사람이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더 확장하고 깊게 만들어 가는 양식을 뜻합니다. 즉, 생각하고 분별하며 더 높은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풀’은 유지와 기초에 가깝고, ‘채소’는 성장과 확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 안의 상태에 따라 각각에 맞는 양식을 주십니다. 아직 자연적 수준에 있는 사람에게는 ‘풀’이 필요하고, 더 이해가 열려 있는 사람에게는 ‘채소’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열이 아니라 ‘단계와 용도의 차이’입니다.

 

이제 마지막이 핵심입니다.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여기서 ‘먹을 것’, 곧 ‘떡’은 언제나 ‘선한 삶’, ‘실제로 살아내는 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땅’은 사람의 삶 전체, 특히 외적 삶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주님께서 다양한 형태의 진리와 선을 공급하시는 이유는, 결국 그것이 사람의 실제 삶에서 선한 열매로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AC.58의 흐름과 연결하면 더 분명해집니다. 앞에서 ‘채소’와 ‘나무’, ‘열매’가 나왔듯이, 여기서는 그 공급의 구조가 설명됩니다. 즉, 주님은 사람 안의 각 수준에 맞게 ‘풀’과 ‘채소’를 주시고, 그것이 점점 자라 결국 ‘먹을 것’, 곧 선한 삶으로 이어지게 하십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 깊은 신앙 이해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바르게 살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풀’이 주어집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더 깊이 이해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그에게는 ‘채소’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결국 ‘실제로 어떻게 사느냐’로 이어져야 합니다. 즉, 말과 생각을 넘어 ‘삶의 선’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먹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자연의 공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상태에 따라 필요한 만큼의 선과 진리를 주시고, 그것을 통해 결국 선한 삶이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시104:14는 주님께서 사람 안의 각 수준에 맞게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그것을 통해 결국 실제 삶에서 떡, 곧 선한 열매가 맺히게 하심을 의미합니다.’

 

 

2. ‘자연적 애정, 자연적 사고’

 

위 AC.58 해설에 나오는 ‘자연적 애정’과 ‘자연적 사고’는 특별한 신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늘 느끼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다만 그 ‘출처와 중심’이 아직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세상과 자기 자신’에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내가 보통 살아가면서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 중, 아직 신앙과 사랑으로 깊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라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먼저 ‘자연적 애정’부터 보겠습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 ‘욕구, 감정, 끌림’입니다. 예를 들어, 편하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 손해 보기 싫은 마음, 가족을 아끼는 마음, 내 것을 지키고 싶은 마음, 누군가에게 서운하거나 기쁜 감정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자연적 애정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좋다/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서 출발하느냐’입니다. 자연적 애정은 기본적으로 ‘나 중심’, ‘내 삶 중심’, ‘세상 속에서의 나’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선한 것처럼 보여도 아직은 주님과의 결합 안에 들어온 상태는 아닙니다.

 

이제 ‘자연적 사고’를 보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생각들입니다. 예를 들어, ‘이게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 ‘어떻게 하면 일이 잘 풀릴까’, ‘이 사람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같은 판단들입니다.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 경험, 기억, 상식, 논리도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이것도 역시 나쁜 것이 아니라, 다만 ‘세상 경험과 감각을 바탕으로 형성된 생각’이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AC.58에서 말하는 구조를 연결하면 이렇게 됩니다. ‘들짐승’은 이런 자연적 애정들, 즉 감정과 욕구 쪽을 가리키고, ‘공중의 새’는 자연적 사고들, 즉 생각과 지식 쪽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둘이 합쳐져서 ‘자연적 인간’이 됩니다. 다시 말해, ‘느끼고 생각하는’, 즉 ‘애정과 사고’, 이 두 층위가 아직 주님과 깊이 결합되지 않은 상태가 자연적 인간입니다.

 

이걸 더 와닿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내가 화가 납니다. 이건 자연적 애정입니다. 그리고 ‘저 사람 왜 저러지?’, ‘내가 이렇게 대응해야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자연적 사고입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움직이며 내가 행동을 결정합니다. 이게 바로 ‘들짐승과 새가 함께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상태 자체는 출발점이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될 때입니다. 자연적 애정만 따라가면 욕심, 경쟁, 비교, 집착으로 흐르기 쉽고, 자연적 사고만 따르면 자기중심적 계산과 판단에 갇히기 쉽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기에 ‘채소’와 ‘풀’, 즉 진리를 주셔서 이 상태를 조금씩 바꾸어 가십니다.

 

그래서 변화는 이렇게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자연적 애정대로 살던 사람이, ‘이건 옳지 않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연적 사고도 점점 ‘내 기준’이 아니라 ‘진리 기준’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같은 감정과 생각이라도, 그 방향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과정입니다.

 

핵심을 한 번 더 또렷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자연적 애정’은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과 욕구이고, ‘자연적 사고’는 내가 일상에서 하는 모든 생각과 판단입니다. 다만 그것들이 아직 주님과의 결합 안에 들어오기 전, 즉 ‘자기와 세상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상태’일 때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자연적 애정과 자연적 사고는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그대로의 것이지만, 아직 주님이 아니라 자기와 세상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AC.57, 창1:29,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창1:29) AC.57 ‘씨 맺는 채소’(herb bearing seed)는 쓰임을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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