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9 심화 2. 스베덴보리의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경험’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AC.59 심화
2. 스베덴보리의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경험’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AC.59 후반부에는 처음 AC를 읽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가기 어려운 대목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수년 동안 육신 안에 있으면서 저 세상의 영들과 교류했으며, 가장 악한 영들과도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때로는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독을 내뿜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문장을 만나면 먼저 ‘정말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AC.59 자체만 놓고 보면 대답은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비유나 상징적인 이야기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경험의 역사적 사실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스베덴보리 자신은 무엇이라고 주장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먼저 구별하는 것이 좋습니다. 적어도 저자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읽는다면, 그는 이것을 실제 영계 경험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AC.59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왜 이 이야기를 여기에서 하는가?’입니다. 이 경험담 바로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사람을 매 순간, 아니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보호하지 않으시면 사람이 즉시 멸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증언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수천의 영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괴롭히도록 허락되었는데도 ‘머리카락 하나’ 해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자신의 영적 능력에서 찾지 않고 ‘주님의 보호’에서 찾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는 수천의 악령과 싸워 이길 정도로 대단한 영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읽으면 본문의 중심이 뒤집힙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자기의 강함이 아니라 주님의 보호입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다’는 표현을 읽을 때에도 성경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보호를 말하면서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나 AC.59이 여기서 그 성경 구절을 직접 인용하여 상응을 논증하는 것은 아니므로, 억지로 별도의 성경 해석을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한국어 독자에게는 주님의 보호를 표현하는 익숙한 성경적 언어와 자연스럽게 울림을 이루는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또 ‘수천’이라는 숫자를 상징적인 숫자로 바꾸어 해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실제로 매우 많은 영들에게 둘러싸였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 숫자를 가지고 영계의 집단 규모나 구조를 계산할 수도 없습니다. 이번 글의 중심은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스베덴보리에게 이런 특별한 경험이 허용되었을까요? AC.59은 여기서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류에게 영계의 비밀을 밝히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런 일을 겪어야 했다’고 이번 한 글만으로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술들을 따라가면 그가 자신에게 영계가 열렸으며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AC.59의 이 특정 경험이 왜 허용되었는지는 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판단해야 합니다.
또 이 경험을 모든 신앙인의 표준으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AC.59은 모든 거듭나는 사람이 영들을 눈으로 보고 그들과 대화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오랜 경험을 통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이’ 겪는 전투에 관하여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의 특별한 경험과 모든 사람의 경험을 동일하게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체험이 강렬한 사람이 더 높은 신앙인이라는 결론도 나오지 않습니다. AC.59의 강조점은 얼마나 많이 보고 들었느냐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말을 존중해서 읽는다면 영과 영계를 전부 인간 심리의 비유로 환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의 세계와 그곳의 영들을 실제적인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저술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무엇을 실제라고 주장하는지를 그대로 받아들여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모든 불안이나 나쁜 생각,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를 곧바로 ‘악한 영의 공격’이라고 판정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AC.59은 그런 진단법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늘 마음이 갑자기 불안하니 악한 영이 가까이 왔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으니 어떤 영이 내게 넣은 것이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AC.59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 적용입니다. 사람의 감정과 생각에는 신체적·심리적·환경적 요인도 있으므로 특정 느낌만으로 영적 원인을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이 경험담은 무엇을 말해 줄까요? 가장 먼저 AC.59 자체가 말하려는 것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극심한 영적 적대 가운데서도 주님의 보호 때문에 자신이 해를 입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영의 세계와 그 본성, 그리고 거듭나는 사람들이 겪는 전투에 관하여 배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독자에게 특별한 영적 체험을 추구하라고 권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듭남의 전투와 그 가운데 있는 주님의 보호에 대한 증언입니다.
여기서도 AC보다 앞에 있는 것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스베덴보리의 놀라운 영계 경험에 마음을 빼앗겨 그의 체험 자체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AC의 역할은 독자의 관심을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해설하고 있는 말씀과 그 말씀의 주님께 돌려보내는 데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AC.59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목적도 ‘나를 보라’가 아닙니다. ‘주님의 보호’를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에게 아무리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 해도 생명과 안전의 근원은 자기에게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한 번의 일반적인 설명만으로 독자에게 모든 것을 믿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주제들은 일반적인 설명만으로 의심 없는 신앙을 갖게 할 만큼 충분히 가르칠 수 없으므로 세부 사항들을 뒤에서 계속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도 같은 태도로 읽으면 좋겠습니다. ‘수천의 영들’이라는 놀라운 한 문장만 떼어 내어 영계의 전체 구조를 만들거나 스베덴보리의 특별함을 강조하기보다, AC 전체를 계속 따라가며 그가 무엇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대목의 중심은 ‘수천의 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아닙니다. 그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도록 그를 보호하신 주님입니다.
그래서 AC.59의 이 매우 특이한 경험담을 가장 안전하게 읽는 방법은 ‘스베덴보리가 얼마나 놀라운 영적 세계를 보았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그가 이 경험을 통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사람을 매 순간 보호하시는 주님입니다.
AC.59, 창1:30, 거듭남의 전투 : 악한 영들의 공격과 주님의 보호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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