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2, 심화 4,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네요?’
AC.62.심화
4.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네요?’
그러면...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어요. 천성적으로 ‘사랑스런’ 사람, 처음부터 사랑으로 출발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어서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 생각처럼 ‘천적 인간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인식은 어느 정도 맞지만, 동시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극단적으로 희귀한 존재로만 볼 필요는 없다’가 더 정확한 균형입니다. 왜냐하면 ‘천적’이라는 것을 흔히 말하는 ‘성격 좋은 사람’이나 ‘착한 사람’으로 오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먼저 중요한 오해부터 풀어야 합니다. ‘천적 인간 = 타고나기를 사랑스러운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온순함, 다정함, 눈물 많음, 배려심 같은 것은 자연적 애정일 수도 있고, 영적 과정 중의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은 그런 성격적 특성이 아니라, ‘의지의 가장 깊은 중심이 주님과 직접 결합된 상태’, 곧 ‘선 자체를 사랑하는 상태’입니다. 이건 단순한 기질 문제가 아니라 ‘거듭남의 깊이’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부드럽지 않은’ 사람도 천적일 수 있고, 반대로 매우 따뜻하고 착해 보이는 사람도 아직 자연적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먼저 분명히 하셔야 ‘천적 인간은 극소수일 것 같다’는 느낌이 조금 정리됩니다.
그 다음으로, 왜 천적 인간이 상대적으로 적게 느껴지느냐를 보면, 이유는 단순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진리를 통해’ 자라기 때문입니다. 즉, ‘이게 옳다’를 배우고, 그걸 따라 살면서 점점 변화됩니다. 이것이 영적 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대부분은 이 길을 걷습니다. 설교도, 교훈도, 교육도 대부분 이 구조를 전제로 합니다.
반면 천적 상태는 ‘사랑이 먼저’인 상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감정이 따뜻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 따지기 전에 이미 선을 사랑하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는 인간이 타락 이후 일반적으로 잃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드물게 느껴지는 것이 맞습니다. 스베덴보리도 태고교회를 바로 이 ‘천적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반전이 있습니다. ‘천적 인간이 적다’는 것을 ‘특별한 몇 사람만의 영역’으로 이해하면, 오히려 AC의 흐름과 어긋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모든 사람을 결국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사랑’이 어떤 구조 위에서 형성되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도 결국 사랑에 이르지만, 그것은 ‘진리를 통해 형성된 사랑’입니다.
이걸 목회적으로 풀어보면 훨씬 편안해집니다. 어떤 성도는 계속 ‘이게 맞나요?’를 묻고, 고민하고, 분별하며 자랍니다. 또 어떤 성도는 복잡한 설명 없이도 자연스럽게 선한 방향을 택합니다. 둘은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둘 다 주님께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누가 더 높다’가 아니라 ‘각 사람이 어떤 길 위에 있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목사님 질문에 가장 정확한 답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적게 느껴지는 것이 맞지만, 그것은 소수 엘리트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보통 진리를 통해 거듭나는 구조 때문이며, 모든 사람은 각자의 길 위에서 결국 사랑 중심의 상태로 인도됩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천적 인간은 드물게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거듭남의 방식의 차이이며, 모든 사람은 자기 방식 안에서 사랑 중심의 완성으로 인도됩니다.’
AC.62, 심화 3, ‘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AC.62.심화 3. ‘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음... 위 설명은 좀 서로 충돌하는 것 같아요.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 구조와 본질은 여전히 영적 방식 위에 있다’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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