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5, 창1, ‘영광’이라 불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 : 천사들의 지각
AC.65
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적 의미가 너무도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도 완전하며, 그들을 너무도 깊이 감동시켜서, 그들은 그것을 ‘영광’(glory)이라고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Certain ones were taken up to 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 when I was reading the Word, and from there conversed with me. They said they could not there understand one whit of any word or letter therein, but only what was signified in the nearest interior sense, which they declared to be so beautiful, in such order of sequence, and so affecting them, that they called it glory.
해설
AC.65는 바로 앞 AC.64와 함께 읽어야 가장 잘 이해됩니다.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말씀의 문자와 이름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65에서는 이제 그 설명을 하나의 경험으로 이어 갑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말씀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이해할 수 없었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것’만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하며, 자신들을 너무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에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먼저 이 글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실제 영적 경험으로 제시하는 기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5는 비유를 만들어 ‘천사라면 아마 이렇게 말씀을 읽을 것이다’라고 상상하는 글이 아닙니다. 저자는 자신이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실제로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들과 대화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이 글을 해설할 때에는 한편으로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실제 경험으로 제시한다는 사실을 존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독자에게도 반드시 같은 경험이 일어나야 한다거나 우리가 그 영적 경험의 세부 구조를 본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설명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늘의 첫 입구 뜰’이라는 표현도 그런 경우입니다. 처음 읽으면 ‘천국의 어느 층인가? 첫째 천국보다 더 낮은 곳인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65는 여기서 천국의 지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 ‘비교적 낮은 단계의 하늘 영역’이라고 확정하기보다, 본문 그대로 ‘하늘의 첫 입구 뜰’이라고 두고 이 경험의 핵심에 집중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들려 올라간 이들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AC.64에서 천사들이 말씀의 문자와 역사적 이름을 지각하지 않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지각한다고 했던 설명과 직접 이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사에게는 단어가 전혀 없고 오직 추상적인 의미만 있다’는 일반적인 언어 이론까지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65가 직접 말하는 것은 그들이 그곳에서 스베덴보리가 읽고 있던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것’을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라는 표현은 특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문자 바로 안쪽의 영적 의미이며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천적 의미가 있다’는 식으로 층위를 확정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과 뒤의 설명들을 함께 보면 말씀의 여러 의미에 관한 더 풍부한 교리가 나오지만, AC.65 자체는 여기서 그 구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원문이 말하는 그대로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라고 두고, 그 의미조차 천사들에게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게 지각되었는지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표현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초보 독자에게도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므로 별도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각한 내적 의미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름다움’이고 다른 하나는 ‘연속의 질서’입니다. 특히 ‘in such order of sequence’라는 표현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서로 관계없는 상징들의 모음처럼 지각된 것이 아니라 어떤 연속적인 질서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1을 읽으면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빛에서 궁창으로, 식물에서 광명체로, 생물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설명은 각 단어의 뜻을 하나씩 풀어 놓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이루었습니다. 다만 이 창1의 사례는 AC.65의 ‘연속의 질서’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예이지, 이 한 구절만으로 말씀의 모든 내적 의미가 어떤 구조로 연결되는지를 다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의미는 또한 그들을 깊이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서도 먼저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AC.65는 그들이 왜 ‘glory’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에 관한 상응론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광은 언제나 신적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 나타나는 상태이므로 여기서도 정확히 그것을 뜻한다’고 이번 한 문장에 완성된 정의를 가져오기보다, 그들이 말씀의 내적 의미의 아름다움과 완전한 연속의 질서에 깊이 감동되어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이면 충분합니다.
그렇다고 ‘영광’을 단순히 ‘정말 아름다웠다’ 정도의 감탄사로 축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이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한 것은 바로 ‘말씀의 내적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 문맥에서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가 천사적 지각 안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고 감동적인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영광’이라는 말이 어떤 속뜻을 갖는지는 그 표현을 직접 해설하는 관련 AC에서 충분히 살펴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AC.65에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이 일이 ‘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에서 말씀을 읽고 있었고, 그와 대화한 이들은 하늘의 첫 입구 뜰에서 그 말씀의 단어나 글자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이 장면은 AC.64에서 말한 인간의 문자와 천사적 지각 사이의 관계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사람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특정 천사들이 동시에 그 내적 의미를 읽는다’는 식으로 모든 세부 작동 방식을 AC.65 하나에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는 동안 이러한 경험을 했다고 증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말씀의 문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으로도 이어집니다. ‘천사들은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않는다니, 그렇다면 인간에게도 단어와 문법과 원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론은 AC.65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방식과 자연계의 인간이 말씀을 읽는 방식은 같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은 실제로 단어와 문장으로 주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 문자를 통해 말씀을 읽습니다. 따라서 천사들이 문자에서 떠난 의미를 지각한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문자를 소홀히 하라는 명령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말씀의 문자를 더욱 신중하게 대해야 할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바로 그 말씀 안에 천사들이 지각하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문자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는 대신, 주님께서 말씀을 문자로 우리에게 주셨고 그 안에 더 깊은 의미를 두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원어 연구나 정확한 번역도 그 자체로 속뜻은 아니지만 말씀의 문자를 정확하게 읽기 위한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또 AC.65를 읽고 ‘나도 천사들처럼 말씀의 내적 의미를 직접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 자체는 독자에게 그런 경험을 추구하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가 경험한 영적 개방과 우리가 말씀을 읽다가 깊은 깨달음이나 감동을 얻는 일을 곧 같은 종류의 경험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깊이 감동받고 삶이 변화되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을 곧 AC.65의 ‘하늘의 첫 입구 뜰’에서 이루어진 경험과 동일시할 근거는 이번 글에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특별한 경험은 특별한 경험대로 존중하고, 우리의 말씀 읽기는 말씀 읽기대로 주님 앞에서 충실하게 이어 가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AC.65는 독자의 관심을 신비 체험 자체보다 ‘말씀’으로 돌립니다. 이 경험에서 놀라운 것은 어떤 사람들이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거기서 만난 것이 말씀의 내적 의미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하며, 그들을 너무 깊이 감동시켜 ‘영광’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경험이 가리키는 중심도 결국 스베덴보리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AC를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AC의 목적이 독자로 하여금 ‘나도 스베덴보리처럼 영계를 보고 싶다’는 데 머물게 한다면 중심이 옮겨진 것입니다. AC.65가 보여 주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매일 읽을 수 있는 말씀 안에, 인간의 눈에는 문자로 보이지만 천사들에게는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되어 ‘영광’이라 불리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AC가 중요하다면 바로 그 말씀의 깊이를 열어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도 말씀과 AC의 순서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었기 때문에 이 경험이 일어났고, 그들이 지각한 것도 말씀의 내적 의미였습니다. AC.65는 새로운 영적 체험을 말씀 위에 올려놓는 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내적 의미가 천사적 지각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는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증언하는 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짧은 글은 AC.64의 설명을 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말씀의 단어와 글자가 있고, 그 안에는 천사들이 지각하는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의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는 그들에게 ‘영광’이라 불릴 만큼 깊은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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