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05, 심화 1,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AC.105.심화
1.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위 본문에 ‘의지는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 하는 건데,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가장 근본적인 소유(the primary possession)입니다...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이게 사람의 것입니다.’라는 내용 말인데요, 이 내용으로 오늘날 전 세계 혼란, 미-중 대립, 러-우 및 미-이란 전쟁, 그리고 여러 나라 구석구석 좌-우 대립 등을 설명해 줄 수 있나요?
충분히 설명은 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짚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모든 복잡한 국제 정세를 단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해 버리는 것은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다만 AC.105의 ‘의지’,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의지(사랑)’와 ‘사람에게서 나오는 욕망(cupidity)’의 구분은 이런 혼란을 바라보는 ‘근본 틀’을 제공해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가장 깊은 중심은 ‘의지’입니다. 그런데 이 의지는 두 가지로 갈립니다. 하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로부터 나오는 욕망의 의지입니다. 문제는 타락 이후 인간은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고, 자기 욕망을 마치 ‘자기 생각’이나 ‘정당한 신념’처럼 느낀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 차원에서는 ‘내가 옳다’는 확신이, 집단 차원에서는 ‘우리 편이 옳다’는 확신으로 확장됩니다. 여기서 이미 갈등의 씨앗이 만들어집니다.
이 구조를 국가와 국제 관계로 확장하면, 매우 유사한 패턴이 보입니다. 국가도 일종의 ‘집단적 인간’처럼 움직입니다. 각 국가는 자국의 안전, 번영,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는데, 이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 동기가 ‘사랑에서 나온 질서’가 아니라 ‘욕망에서 나온 자기 중심성’일 때입니다. 그때 국가는 상대를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과 위협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관계는 ‘상호 이해’가 아니라 ‘힘의 균형’으로 운영됩니다.
예를 들어, 미국-중국 갈등 같은 경우를 보면, 겉으로는 경제, 기술, 안보 문제이지만, 그 깊은 층에서는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가 작동합니다. 이 의지는 반드시 악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자기 보존과 우월성에 대한 욕망이 중심이 될 때, 상대를 인정하기보다 견제하고 압박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이때 서로는 자신을 ‘정당한 쪽’으로 느끼기 때문에 갈등은 더 복잡해집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란-미국 긴장 역시 비슷한 틀로 볼 수 있습니다. 각자 나름의 역사적, 안보적, 정치적 이유를 갖고 있지만, 그 모든 판단의 밑바닥에는 ‘두려움과 욕망이 결합된 의지’가 작동합니다. 두려움은 자기 보호를 강화시키고, 욕망은 영향력을 확대하려 합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 상대는 점점 더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기 쉽습니다.
국가 내부의 좌-우 대립도 같은 구조입니다. 이념 자체보다 더 깊은 곳에서는, 각 집단이 ‘자신이 옳다’는 확신 속에서 상대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배제하려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양쪽 모두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한 ‘자기에게서 나오는 의지(욕망)’의 특징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이 모든 것을 AC.105의 언어로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의지는 ‘사랑에서 나와 타자를 살리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반면 사람에게서 나오는 욕망은 ‘자기 중심에서 나와 상대를 도구화하거나 배제하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어느 쪽 의지가 중심에 서 있느냐에 따라 질서와 평화, 혹은 혼란과 갈등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은 단순히 ‘누가 옳으냐’를 판단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의지가 지금 작동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개인에게도 그대로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집단의 상태는 결국 개인들의 상태가 모여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외부 세계의 갈등은, 인간 내면의 질서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확대해서 보여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결국 이 설명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적 혼란은 단지 정치적,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욕망이 중심에 있을 때는 필연적으로 충돌이 생기고, 사랑이 중심에 있을 때만 질서가 회복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사랑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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