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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6, 심화 1, ‘사랑과 신앙의 내적 실재’

bygracetistory 2026. 5. 2. 16:12

AC.126.심화

 

1. ‘사랑과 신앙의 내적 실재

 

위 해설, 신앙의 신비 사랑과 신앙의 내적 실재라고 하는데 이게 뭔가요? 이것을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접근 시, 신앙의 천적인 것의 파괴를 불러온다고 하는데 왜죠?

 

 

목사님,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 전체 사상의 중심을 정확히 건드리는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신앙의 신비’, 혹은 사랑과 신앙의 내적 실재’라는 것은 머리로 이해되는 어떤 교리 내용’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상태’,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흘러 들어오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가 스스로 빛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것은 설명되는 것’이라기보다 경험되는 것’, 더 정확히는 열리는 것’입니다.

 

조금 더 풀어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신앙’을 무엇을 믿는다’는 내용으로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믿는다’, ‘말씀을 믿는다’와 같은 식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걸 신앙의 껍질로 봅니다. 그 안쪽에는 전혀 다른 차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 안에서 진리가 스스로 참으로 보이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사람이 이건 맞는 것 같다’라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건 틀릴 수가 없다’고 느끼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그 확신은 논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옵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가 빛나는 상태’가 바로 신앙의 내적 실재’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의 신비’라는 표현은, 어떤 숨겨진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상태가 어떻게 사람 안에서 가능한가’에 대한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인플럭스로 들어오고, 그 사랑이 사람의 속 사람을 열며, 그 안에서 진리가 살아 움직이게 되는 이 전체 과정이 바로 신비’입니다. 인간의 감각이나 이성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 왜 이것을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접근하면 천적인 것의 파괴’가 일어나는가를 보겠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접근의 방향’입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은 기본적으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방식’입니다. 보고, 듣고, 읽고, 비교하고, 판단해서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것을 최종 기준’으로 삼을 때 생깁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내적 실재’는 안에서 밖으로 열리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즉, 먼저 사랑이 있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가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이것을 붙잡으려고 하면, 순서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이게 맞나 틀리나를 내가 판단하겠다’는 태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사람은 이미 중심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 판단’에 두게 됩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선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 곧 사랑의 상태 안에 있을 때는, 진리가 비교적 단순하게 들어옵니다. ‘이건 해야 한다’, ‘이건 하면 안 된다’가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걸 분석하기 시작하면, ‘왜 그래야 하지?’, ‘다른 해석은 없나?’, ‘이게 꼭 맞는 건가?’ 하면서 점점 흐려집니다. 이것이 바로 감각과 기억 지식이 개입하는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파괴’라고까지 표현하는 이유는, 이 과정이 단순히 이해가 흐려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속 그렇게 되면, 결국 사랑 없이 진리를 다루는 상태’,  차가운 신앙’으로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진리가 더 이상 삶을 살리는 힘이 아니라, 판단하고 논쟁하는 도구가 됩니다. 이것이 천적인 것의 파괴’입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과 하나이기 때문에, 사랑이 빠지는 순간 그 본질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핵심은 지식을 쓰지 말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지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만 지식이 위에 올라타면 안 되고, 사랑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은 설명하는 도구이지, 판결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기준이 되고, 지식은 그 사랑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사용될 때, 비로소 질서가 맞습니다.

 

목사님이 지금 하고 계신 작업과 연결해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목사님은 지금 지식을 쌓아서 신앙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신앙의 길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해 주는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이 둘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위험하지만, 후자는 매우 필요합니다. 다만 항상 중심이 사랑에서 시작되는 신앙’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점만 분명히 붙들고 계시면 됩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신앙의 신비는 사랑 안에서 진리가 스스로 빛나는 상태이며, 이것을 감각과 지식으로 먼저 판단하려 들면 중심이 뒤집혀 사랑이 사라지기 때문에 천적인 것이 무너진다’입니다.

 

 

 

AC.126,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AC.126-13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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