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80, ‘교회 소개 문구’
창2:15의 ‘경작하며 지키게’를 다룬 AC.122-124 본문들을 보며, 특히 ‘영적 인간’의 경우에 대한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저도 언젠간 주님의 허락으로 본격적인 교회 소개를 하며 사람들을 초청하게 될 텐데, 그때 이런 표현들, 그러니까 ‘저희 교회는 가급적 선한 삶을 살고프신 분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문구를 사용하면 많이 이상할까요? 이런저런 교리적 배경으로 싸우고 다투느라 교회가 어수선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렇습니다만...
목사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표현 자체가 ‘이상하다’기보다, 그대로 사용하시면 오히려 ‘문을 먼저 좁혀 버리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AC.122-124가 말하는 ‘경작하며 지키게’의 핵심은, 이미 선한 사람만 모으라는 뜻이 아니라 ‘들어온 사람 안에 있는 것을 경작하고, 외부로부터 오는 것을 지켜내는 과정’에 있습니다. 특히 거기서 말하는 ‘영적 인간’은 처음부터 선과 진리의 조화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서서히 선으로 인도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시작점은 오히려 불완전하고 혼재된 상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한 삶을 살고 싶은 분들만’이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가장 필요한 사람들, 곧 아직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갈망은 있는 사람들조차 심리적으로 위축시키거나 스스로를 배제하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완성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거듭남이 일어나는 장소’이며, 바로 그 의미에서 ‘경작’은 씨앗을 심고 돌보는 일이요, ‘지킴’은 잘못된 원리나 왜곡된 애착이 그 과정을 망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초대 문구는 ‘결과 상태’를 전제하기보다 ‘과정에의 참여’를 여는 쪽이 더 본질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알고 싶고, 그 사랑을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 문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인간이 걷는 길, 곧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되는 질서와도 정확히 맞닿습니다.
그래서 표현을 조금만 바꾸면 훨씬 자연스럽고, 동시에 AC의 정신에도 더 부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선한 삶을 살고 싶은 분들’이라는 단정적 표현 대신 ‘삶을 더 선하게 살아가고 싶으신 분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 대신 ‘하나님을 더 알고 사랑하는 길을 함께 찾고 싶으신 분들’처럼 ‘이미 그러한 사람’이 아니라 ‘그 길을 향해 가는 사람’을 부르는 방식이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문은 열려 있으면서도 방향은 분명해집니다. 교회 안의 질서를 ‘지키는 일’은 초대 문구에서 걸러내는 방식이 아니라, 들어온 이후의 가르침과 공동체의 분위기, 곧 말씀과 삶의 일관성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염려, 곧 ‘교리로 싸우는 어수선함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은 매우 타당합니다. 다만 그것은 ‘누가 들어오느냐’보다 ‘들어온 사람을 어떻게 이끌어 가느냐’의 문제에 더 가깝습니다. AC.122-124의 빛에서 보면, 참된 ‘지킴’은 외부인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 ‘질서’를 세워 외부에서 들어오는 혼란이 스스로 힘을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문턱을 높여 조용해지는 곳’이 아니라, ‘진리와 체어리티의 질서가 분명하여 자연히 고요해지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목사님께서 계획하시는 초대는 충분히 가능하고, 오히려 방향만 조금 다듬으시면 매우 건강한 형태가 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 교회는 이미 완성된 사람을 찾는 곳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 아래 더 나아지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는 곳입니다.’ 이 한 줄 안에 ‘경작’과 ‘지킴’, 그리고 ‘영적 인간의 길’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SC.79, ‘AI라는 유능한 도우미를 주신 주님께 감사’
감사합니다. 이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군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저라고 왜 AI로 이 작업을 하는 게 맞나라는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분명히 AI가 정돈하여 주는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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