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30, 심화 3, ‘마술’
AC.130.심화
3. ‘마술’
위 본문에 나오는 ‘그의 ‘넷째 강’(fourth river)은 거기서 비롯된 지혜인데, 말씀에서는 이것을 ‘마술’(magic)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애굽’(Egypt), 그러니까 이는 기억 지식을 뜻하는데, 지식이 마술적인 것이 된 이후에는 이러한 사람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는 그가 자기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하기 때문이며, 이 점은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라는 이 부분 좀 설명해 주세요.
이 대목은 꽤 충격적으로 들리지만, 핵심은 ‘지식이나 이성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디에서 출발하느냐가 바뀔 때 전혀 다른 성질로 변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넷째 강’, 곧 가장 바깥 단계에서 나타나는 어떤 ‘지혜’를 두고 그것을 ‘마술’이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래 질서를 먼저 다시 보셔야 이해가 또렷해집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가 지성, 이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 지식까지 내려와 생명을 줍니다. 이 흐름이 유지될 때에는, 바깥에 있는 기억 지식조차도 살아 있는 것이며, 이성은 밝고 건강하게 작동합니다. 그런데 이 질서가 뒤집히면, 곧 사람이 ‘기억 지식과 이성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지혜로워지려 할 때’, 겉으로는 여전히 ‘지혜처럼 보이는 것’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그 근원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 성질도 달라집니다. 바로 이것을 스베덴보리는 ‘마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주술이나 초자연적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자기중심에서 나온 지식과 추론으로 현실을 지배하고, 진리를 만들어내려는 태도 전체’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나는 스스로 알 수 있다’, ‘나는 내 지식으로 판단하고 결론낼 수 있다’는 상태가 극단으로 가면, 그것이 곧 ‘마술적 상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받지 않고, ‘자기 안에서 근원을 만들어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굽이 마술적인 것이 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애굽’은 원래 기억 지식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지식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잃고, 오히려 스스로를 근원으로 삼기 시작하면,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속이고 지배하는 힘’이 됩니다. 겉으로는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진리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듭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애굽과 바로가 종종 ‘마술사’, ‘술객’과 연결되는 이유입니다.
이 상태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고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래서 오히려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 안에서 완결된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AC.129에서 말한 ‘거짓된 원리를 전제로 삼으면 모든 지식이 그것을 지지하게 된다’는 구조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넷째 강에서 비롯된 지혜’라고 부르는 이유 말인데요, 그것은 겉모습 때문입니다. 이 상태는 매우 ‘지혜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풍부한 지식, 날카로운 분석, 설득력 있는 말 등, 모든 것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 내려온 지혜가 아니라, 아래에서 조합된 지혜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름은 지혜이지만, 실제로는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정리하면, 이 부분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는 질서를 떠나, 기억 지식과 이성으로부터 스스로 지혜를 만들어내려 할 때,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혜처럼 보이는 것’을 스베덴보리는 ‘마술’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겉으로는 빛나지만, 실제로는 근원이 뒤틀린 상태이며, 사람을 진리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지식의 출발점과 방향’입니다.
AC.130, 심화 2, ‘겔31:16, 18’
AC.130.심화 2. ‘겔31:16, 18’ 16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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