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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3, 심화 1, '이 모든 걸 다 미리 아셨음에도'

bygracetistory 2026. 5. 5. 20:00

AC.133.심화

 

1. ‘이 모든 걸 다 미리 아셨음에도

 

이 모든 걸 다 미리 아셨음에도 불구, 인간에게 허락하신 주님이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저 같으면 이런 대단히 위험스러울 수 있는 프로프리움 같은 요소는 애초에 허락하지 않거나 어쩔 수 없이 허락하더라도 큰 제약을 걸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 반응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이렇게까지 위험하다면 애초에 허락하지 않으셨으면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지점이 바로 AC.133이 겨냥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프로프리움을 제한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유가 가능하도록 하는 최소 조건을 열어 두신 것’에 가깝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랑은 강제로 만들어질 수 없고, 반드시 자유 속에서만 생깁니다.’ 그런데 자유는 단순히 선택지가 여러 개인 상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다’고 느낄 수 있는 상태를 포함합니다. 이 ‘내가 선택한다’는 감각이 바로 프로프리움의 토양입니다. 만약 이 감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거나 강하게 제약해 버리면, 사람은 안전해질 수는 있어도, ‘사랑하는 존재가 아니라 프로그램처럼 반응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방식은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포함한 채로도 사람이 진짜로 살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균형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인간이 ‘내 것’이라고 느끼며 선택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유가 완전히 무너져 버리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붙들고 제한하십니다.’ 강압적으로 막지 않지만, 완전히 방치하지도 않으십니다. 이것이 섭리의 방식입니다.

 

또 하나 보셔야 할 점은, 프로프리움이 단지 ‘위험 요소’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왜곡되면 자기중심이 되지만, 질서 안으로 들어오면 ‘주님의 것을 내 것처럼 느끼며 사는 자리’로 바뀝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목표는 프로프리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여전히 ‘내가 생각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그렇게 느끼며 살게 됩니다. 이 상태가 없으면 기쁨도, 친밀함도, 관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신 선택은 ‘위험을 없애는 안전한 창조’가 아니라, ‘자유와 사랑이 가능하도록 하는 창조’입니다. 그 대신 그 자유가 파괴로 가지 않도록, 사람의 안쪽과 바깥쪽에서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이끌고, 막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왜 이렇게 돌아가게 하실까’ 싶은 길도, 실제로는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결국 생명 쪽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결국 이렇게 정리하시면 가장 또렷합니다. 프로프리움은 허용된 위험이 아니라, ‘사랑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주어진 자유의 형태’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놀라움은, 그 위험을 제거하지 않으시면서도, 그 안에서 사람을 끝까지 살려 내신다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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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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