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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 창2:19-20, ‘이름을 주었으나 여전히 기울어지는’(AC.142-146)

bygracetistory 2026. 5. 10. 17:32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 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2:19-20)

 

AC.142

 

짐승(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뜻하고,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들을 뜻하는데,짐승(beasts)은 의지에 속한 것들을, ‘(fowls)는 이해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 그가 그것들의 성질(quality)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이며, 그가 그것들에게 이름을 주니라(giving them names)는 그가 그 성질을 알았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한 애정들과 인식한 진리들의 성질을 그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기의 것, 곧 자신의 proprium으로 기울어졌는데, 이것은 앞에서와 같은 말로 표현된,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라는 것입니다. By “beasts” are signified celestial affections, and by “fowls of the heavens,” spiritual affections; that is to say, by “beasts” are signified things of the will, and by “fowls” things of the understanding. To “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 is to enable him to know their quality, and his “giving them names” signifies that he knew it. But notwithstanding that he knew the quality of the affections of good and of the knowledges of truth that were given him by the Lord, still he inclined to his own, which is expressed in the same terms as before—that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해설

 

이 단락은 창2:19-20의 장면, 곧 짐승들과 새들이 아담 앞으로 나오고 그가 이름을 붙이는 장면을 ‘지식의 충만함과 내적 결핍의 대비’로 읽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분을 분명히 합니다. 인간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 앎이 그의 중심을 바꾸지는 못했다는 점입니다.

 

먼저 상징의 구조가 명확히 정리됩니다. 짐승들은 천적인 애정들, 곧 의지에 속한 것들이고, 하늘의 새들은 영적인 애정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입니다. 이는 창세기 1장에서 이미 등장했던 상응이지만, 여기서는 천적 인간의 내부에서 ‘의지와 이해가 어떤 내용들로 채워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끌어 가시니’와 ‘이름을 주니라’라는 표현은 인식의 성숙을 뜻합니다. 이름을 준다, 붙인다는 것은 단순한 분류가 아니라, ‘본질과 질을 분별하여 파악했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한 애정들과 인식된 진리들이 무엇인지, 그것들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이 구절은 무지나 결핍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장이 뒤따릅니다. 그렇게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 그는 여전히 자기의 것, 곧 자신의 proprium으로 기울어졌다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핵심 문제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중심의 방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아무리 많은 선과 진리를 인식해도, 그것들이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 결합되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려는 성향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다시 같은 결론으로 돌아옵니다.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는 말은, 외부의 대상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proprium과 결합할 형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의지와 이해의 내용들은 충만하지만, 그것들이 자기성(自己性)이라는 proprium 속에서 하나로 작동할 구조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로써 다음 단계, 곧 깊은 잠과 갈빗대의 사건이 필연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AC.142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지만, 그 인식만으로는 자기 중심성을 해소하지 못하며,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의 proprium’이 보다 분명한 형식으로 등장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AC.142, 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AC.142.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는, 그가 그것들의 성질(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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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3. ‘

 

 

 

 

 

AC.141, 창2:18, ‘인간의 세 가지 유형으로 본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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