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44, 심화 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AC.144.심화
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고대인들이 ‘이름’(name)으로는 어떤 것의 본질(essence)을 이해하였고,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로는 그 성질 아는 걸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윗글은 뭐가 다른 거죠? 전자는 ‘이해를 했고’, 후자는 ‘이해하는 행위를 이해했다’는 건가요? 이게 뭐죠?
네, 목사님께서 정확히 걸리신 부분입니다. 여기 문장은 얼핏 보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름’ 자체와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반부와 후반부의 초점이 다릅니다.
먼저, ‘고대인들이 ‘이름’(name)으로는 어떤 것의 본질(essence)을 이해하였다’는 말은, ‘이름’이라는 것 자체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설명합니다. 즉,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essence, 곧 가장 중심적 실체와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름 자체가 곧 존재의 핵심 의미를 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반면,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로는 그 성질(quality)을 아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말은,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이름이라는 정적인 개념보다, ‘어떤 존재를 보고, 그 이름을 부른다’는 동작 전체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호칭을 발음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존재의 상태와 성질을 분별하고 인식하는 것을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이름’ 자체는 그 존재의 본질(essence)을 담고 있고, ‘이름을 부른다’는 행위는 그 존재의 성질(quality)을 알아보고 분별하는 작용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더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는 어떤 영적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서 그런 성질과 상태를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전자는 존재론적 의미에 더 가깝고, 후자는 인식 작용에 더 가깝습니다.
목사님 표현대로 아주 단순화하면, 전자는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말하고, 후자는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말한다고 보셔도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왜 essence와 quality가 갈라지는지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essence는 존재의 중심 핵심이고, quality는 그것이 실제 상태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름 자체는 essence를 담지만, ‘보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essence가 어떤 quality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행위가 됩니다.
결국 AC.144의 구조는 이렇게 됩니다.
고대인들에게 이름(name)은 존재의 essence를 담는 것이었고, 그 이름을 보고 부르는 행위는 그 존재의 quality를 분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 반복이 아니라, ‘이름의 의미’와 ‘이름 짓기의 행위’를 구분해서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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